소설리스트

라시아-41화 (41/113)

41화

일단 코라를 무작정 자습실에서 끌고 나와서 바로 말했다.

“나, 러브레터 받은 것 같아!”

“…뭐라고?”

"확실하진 않은데, 결투장이 아니라면 백퍼센트 러브레터야."

내가 소근거리면서 그녀에게 말하자 코라가 끄약! 하는 소리를 작게 내더니 손을 내밀었다. 빠르게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자 코라가 받아보더니 진짜네! 하고 말했다.

"그럼 진짜지 거짓말이겠니.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나가봐야 하는 건가?"

"그럼 안 나가보려고 했니?!! 너 인생에서 러브레터 받을 기회 많을 것 같지? 날 봐라. 이 어린나이에 약혼녀가 되가지고 편지는 무슨, 얼어 죽을 편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복도 밖에 나와서 우리는 신이 나서 같이 다시 편지를 읽어봤다. 몇 줄 되지도 않는 문장이 그렇게도 신나고 좋은 적은 처음이었다.

"앨번한테 너한테 편지 보내라고 말해볼까?"

"됐네요.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거네요. 이렇게 귀엽고 달달한… 그나저나 너 뭐라고 할 건데?"

“누군지도 모르는데 뭘 말 해! 그리고 지금 사람 사귈 때도 아니잖아!”

나 답지 않게 소리 지르는 듯한 꺅꺅거리는 목소리를 참지 못하자 코라가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짓더니 내 팔짱을 끼고는 물었다.

"그래도 얼굴은 보고 싶지?"

"당연하지!"

코라에게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어주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신나게 웃고 나서 그녀에게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난 결투장을 받았으니."

"살아 돌아오시게! 레싱엄 시간에 보자."

내가 웃으면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광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뜬금없는 곳에서 무척 인위적인 발걸음이 들렸다. 나는 휙, 몸을 돌리고 허리에 양 손을 올린 채 그를 뜛어져라 바라봤다.

"어디부터 들었어요?"

"러브레터를 받으신 부분부터 들었습니다."

있는 티 좀 내라고 했는데 별로 안 숨겨도 될 때만 슬쩍 나타나는 이 얄미운 호위무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어서 그를 째려봤지만, 그는 내 째림같은 것은 신경도 안 썼다.

"나가실 겁니까?"

"제 첫 러브레터인데, 그럼 나가야죠."

"러브레터에 이름도 안 써놓는 그런 자신 없는 남자 만나서 뭘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나가신다니 제가 어디에 숨어있는 게 마음이 놓이시겠습니까?"

또 놀리는 건가 싶어서 그만 놀려요. 하고는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여쭤 보는 겁니다만…. 어디 숨어있을까요?"

"…록진, 자신 없는 남자라는 말 있잖아요, 그것도 진심이에요?"

"진심입니다만."

이 질문은 왜 묻는 거지? 하는 얼굴에 대고 뭐라 할 말이 없어서 한참을 그…, 라고만 웅얼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가리면서 말했다.

"대화가 안 들릴만한 곳에 숨어 있어주세요…"

"그럼 대화를 못 듣는데, 그건 싫습니다."

"…내가 고백 받는 걸 들어서 뭐하게요."

그러자 그가 표정 없는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를 피워내더니 말했다.

"이번은 농담이었습니다."

아 나 진짜.

“저기요, 록진.”

“네, 아가씨..”

“한 대만 때려도 돼요?”

주먹을 꽉 쥐고 한 말에 록진이 스르륵, 내게서 멀어지더니 말했다.

“잘 못했습니다.”

이를 뿌드득 갈면서 거친 걸음걸이로 분수대의 여신상 쪽으로 걸어가면서 불안해서 다시 한 번 몸을 돌려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절대로…”

이 인간 또 기척 없이 사라지지!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올라갔다가 푸쉬쉬, 하고 식었다. 기껏 처음 러브레터를 받아서 나왔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 기분에 초를 쳐. 팔짱을 끼고 여신상 옆에 앉았다.

내가 먼저 나오다니 좀 실망스럽기도 했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멍하니 분수대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앞에 서기에, 바로 고개를 들었다.

“시드.”

그가 매우 긴장된 얼굴로 웃으면서 내게 토스트를 건넸다. 아, 뭐야. 러브레터 아니잖아..기운이 쭉 빠져서 아직 뜨거운 토스트를 받아들고 말했다.

“그냥 만나자고 하지 왜 결투장을 보내?”

"러브레터야. 너무하네. 첫사랑도 다른 남자에 첫 선물도 다른 사람이 줬으니 첫 러브레터를 준 남자라도 돼야 하지 않겠어?"

먹으려다 순간 입을 뗐다. 내가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 나 따라왔니?”

“미안. 사실 정정당당하게 있어야 하는데, 자꾸 너한테는….”

손이 떨릴 정도라 토스트를 바닥에 내려놨다.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나서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너… 그걸 나한테 말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넌 내 생활을 전부 훔쳐봤다는 거나 다름없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안해, 난 그냥, 궁금해서…”

“시드.”

“미안해!! 그런데, 너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제가 잘 안 된단 말이야!"

얼굴을 가리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금 이걸, 내가 넘겨야 한다는 말이야? 발로 쾅, 하고 바닥을 때리고 그에게 다시 소리를 지르려다가 입을 딱 닫았다.

“미안해.”

“…나한테는 공개하고 싶은 생활이 있고, 공개하고 싶지 않은 생활이 있어. 네가 알아도 되는 일이 있고, 몰라도 되는 일이 있어. 난 너한테 내 모든 생활을 알리고 싶지 않아.”

“알아.”

“… 왜 말했니.”

“반칙인 걸 아니까.”

입을 딱 다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용서해야, 하나. 이 사람을, 용서해야하나. 손이 떨리는 것을 참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저 연청색 눈동자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리콜라티 교수님은 그들이 매우 드물게 사랑에 빠진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이걸 이해해야할테지.

"르웬. 누군가를 나만큼 좋아해본 적 없지?"

그가 나를 연청색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게 네 유일한 면죄부야. 네게 내가 첫 사랑이고, 그래서 너는 서툴다는 게.”

주먹을 쥐었다가 놨다가, 한참을 움직이다가 말했다.

“솔직해서 고마워, 고마운데. 네가 순수하고 그래서 서툰 것도 알겠어. 그런데 시드, 네 순수가…”

그를 똑바로 노려보고 말했다.

“네 순수가 날 상처 입혔어.”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고 연청색 눈동자에 맺힌 습기를 바라보았다.

“날 좋아하건 말건, 상관 없는데.”

시드를 내가 얼마나 잔인하게 대할 수 있는 지 나는 그 때 처음 알았다.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최대한 내 감정을 가다듬은 채로 말했다.

“넌 도를 넘었어.”

그는 기운 없이 손을 늘어뜨렸고 나는 그를 위로해줄 수 없었다. 아니, 위로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결국에는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아가씨."

목소리에 왼쪽을 돌아봤다. 록진이 서있어서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이만 가시죠, 아가씨.”

고개를 끄덕였다. 시드를 전혀 바라보지 않고 그저 록진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내 팔을 세게 잡았고, 나를 끌어당겨 분수 앞을 지나쳤다. 분수에서 점심시간의 반을 알리는 물이 쏴- 하고 올라와 그제서야 시간의 흐름을 실감했다.

“…들었어요?”

“중간에 많이 화나 보이셔서.”

“…별 일 아니었어요.”

“화나면 주름 생깁니다.”

끝까지 이 인간이 맞으려고. 순간 정강이를 차려다가 참았다. 너무 화나서 손이 떨리는 것을 록진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진짜 주름 생겨요.”

“…내가 진짜 못 때릴 줄 알고 이러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아가씨가 때릴 줄 알고 팔을 잡고 있는 겁니다.”

“발도 있는 걸 잊지 말아요.”

내 말에 그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레싱엄 교수님 시각에 늦으시면 안 되니, 지금이라도 뭔가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샌드위치를 사오겠다고 하면…”

“내가 체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뚱한 목소리에 록진이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쁜 여자로 사는 건 힘든 일이군요.”

“… 죽을 것 같네요.”

록진이 가벼운 태도로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지키는 보람이 있습니다. 원래 일이 어려울 수록 재미있는 거지요.”

그 말에 입술을 뚱, 내밀었더니 그가 얌전한 목소리로 말했다.

“냉큼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힘이 빠져서 주변의 벤치를 찾아서 주저앉았다. 사람을 이렇게 잔인하게 만드나. 아니, 나는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그저 서툴다는 이유로… 아냐. 내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어. 시드는, 아니 르웬은… 그가 무엇이든, 도를 넘었으니까. 그럼에도 친구를 놓쳤다는, 서투른 사람에 대한 내 허용치가 너무 낮다는 생각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맞는 말을 했다. 그의 옆에서 그의 서투름을 교정해 줄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연인으로 좋아할 수 없는 사람에게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에게 그게 얼마나 아프든 말든… 내 기준에는 맞지 않았으니 허용할 수 없었다.

“…계속 그 생각 하고 있습니까?”

“음.”

록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그가 고구마라떼를 내게 건넸다.

“뭐가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아 보여서.”

얌전히 받아들면서 그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한 거예요?”

“정확히 뭘 잘못 하셨는지 모르니 뭐라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고구마라떼를 입에 대자 온기가 따뜻하게 몸 안으로 들어와 기분이 그나마 좀 나아졌다. 록진이 내 옆에 앉더니 말했다.

“본인이 허용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무덤을 판 것 같아요. …친한 친구 였거든요.”

“친구는 또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록진이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희망을 가지세요. 언젠가 당신이 허용할 수 없는 것마저 배려해주고 싶은 상대를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언제가 언젤까요?”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이 재미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록진.”

그러자 록진이 자신의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고마우면 월급이나 올려주세요.”

“… 이리하한테 말해줄게요.”

***

레싱엄 버나드는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는 주로 소설을 썼는데 대개 내용이 여행하면서 살아가는 진리에 관해 고찰하는 내용이 많았다.

무거운 주제치고는 굉장히 가벼운 필체에 무엇보다 처음으로 비싸지 않은 종이를 사용해서 책을 출판해 독자층을 넓힌 것이 특징이었다. 물론 귀족층을 타겟으로 한 건 비싼 양장까지 해서 더없이 예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그는 40살에 페드윈의 교수가 되었는데, 문학과 삶에 대해서 자유롭게 강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제군들은?"

모두들 조용했다. 레싱엄 버나드 교수의 수업에 함부로 대답을 했다간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일단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의 진짜 질문이 뭔지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2학기 첫 수업이다보니 피해자가 속출한다는 점이 안타까운 점이기는 하지만.

"일단 의식주 아닐까요…?"

웬 학생이 대답하자마자 나와 코라는 고개를 숙였다. 망했다.

"일어나보게. 이름이 뭐지?"

"게일입니다. 게일 크레이건."

"글쎄, 자네 집안이 상인집안인가?"

"아닙니다. 귀족입니다만."

"그런 경우에 성은 딱히 말 안 해도 될것 같네만. 자네가 문학수업에서 의식주를 말했다는 것 자체로 이미 부모님껜 창피란 창피를 다 준 셈이니까 말일세."

우리는 더더욱 숨을 죽였다. 게일이란 남자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싱엄은 새하얀 머리카락과 얼음처럼 차가운 남색 눈동자를 가진 노인이었는데, 누구도 그를 노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크지는 않지만 몸이 매우 단단하고 뚫어져라 사람을 쳐다보는 무척 무서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혀 속에 숨겨둔 단도는 사람 멱을 따고도 충분했다. 그토록 가볍고 재밌는 책을 어떻게 썼는지는 가히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자리에 앉게. 쯧. 다시 묻지, 제군들. 사람의 정신에서 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다시 적막이었다. 레싱엄이 10을 세지. 라고 말했다. 모두들 재빨리 공책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도 곰곰이 생각했다. 10을 세는 동안 저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끝나는 거였다. 난 레싱엄교수의 저녁밑반찬도 안되겠지. 오싹한 생각에 끙끙대면서 머리를 굴렸다. 뭐가 가장 중요할까?

이게 없으면 안 된다…는 것. 살아가면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 대체 뭐가 있을까? 내가 엄마에게 배운 것 중 내게 지금 와서도 가장 잘 쓰이는 것은.

나는 결국 펜을 들지 못하고 하얀 백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올수 있게 한 것은 뭘까?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 머리 위에서 차가운 남색 눈이 번뜩였다. 순간 숨을 멈출 뻔 한 것을 티내지 않고 얼른 네, 버나드 교수님. 이라고 대답했다.

"자네는 아무 말도 적지 않았군. 일어서보겠나?"

망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했다. 코라가 안쓰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아서 그녀에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여기서 그녀에게 웃어줬다간 그대로 나는….

"자네는 왜 아무 말도 적지 않았지?"

"오랜 시간 고민하느라 적는 걸 깜빡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답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다?"

"네."

버나드 교수는 지팡이로 바닥을 쿵! 하고 쳤다. 옆에 앉아 있는 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그럼 자네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게 그가 원하는 대답은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게 자아 존중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지팡이로 코라를 척- 하고 가르켰다. 코라가 얼른 일어났다. 버나드 교수는 코라를 보지도 않고 말해보게. 라고 했다.

"자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극이라.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군."

코라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그제서야 버나드 교수가 코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살았다! 그의 남색 눈이 멀어진 것만으로 상당히 긴장이 풀렸다. 이제 앉아도 되겠지 싶어서 살짝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지팡이가 휙, 하고 돌아와서 뻣뻣하게 긴장하고는 다시 섰다.

이 분은 쉬는 시간에 지팡이 다루는 연습만 하시나.

"계속 떠들어보게."

"자극이 없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의식주라는 것도 하나의 자극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을 거고,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따라 살게 될테니까요."

버나드 교수는 차갑게 코라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제군의 축제계획은 잘 봤네. 나로서는 무척 흥미로운 계획이었네만, 윗선에선 뭐 그렇게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무산됐더군. 쯧."

"감…감사합니다."

"제군은 좋은 상인이 되겠군. 자극을 따라 사람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그 생리를 따라 하면 거상이 될 수도 있겠어. …뭐 제군이 바라는 바는 아니겠지만."

코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버나드 교수에게서 칭찬을 들은 것을 의심하는 중인 것 같았다.

나는 그게 그녀에게 무척 나쁜 소리 같아서 한숨을 쉬었다. 코라는 거상이 되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천재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귀족이 돼야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상인기질을 비꼬다니. 성격 한 번 더럽게 나쁜 사람이라니까. 나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 수업을 들은 모두 그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했는 지 알테고, 아마 머리부터 끝까지 상인 같다면서 신나게 떠들어대겠지.

"제군은 자아 존중감이라고 했지?"

그가 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최대한 등을 펴려고 노력하면서 네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 내가 코라를 걱정 할 때가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했지?"

"다수가 원하지 않는 길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신기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남을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혹은 신의 기술에 도달하고 싶어서 스스로를 제물로까지 삼은 마법사 같은 사람들 말이에요. …사람들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으면 기쁘다고 느끼고, 물론 인생을 살면서 그런 건 상당 부분 스스로를 믿는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가 옳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자아 존중감이 가장 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싱엄 교수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쁜 짓을 하며 사는 자는 어떻지? 그들은 자아존중감이 있는 건가?"

"자아존중감은 도덕관과는 상당히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옳다 아니 옳다는 그 사람의 기준이지, 보편적 사람의 옳음과는 다를 수 있는 거죠. 기본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고 적은 사람이 있겠지만… 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도 자아존중감이 있는 건가?"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지켜야할 대상에 대한 강한 믿음이라고 보통 생각하지만, 저는 그런 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맹목적인 끌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이 옳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하는 스스로가 옳다고 굳건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레싱엄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미소?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그의 미소는 너무나 짧아서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지만, 순간 강의실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봐서는 이게 꿈은 아닌가보다.

"뭐 맞지 않는 예가 수십 개 쯤 떠오르지만, 모든 것에 정답이 없지. 그 정도면 그럴듯한 답변이었네. …그대는 퍽 귀족적인 여성이군."

나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얼른 미소를 짓고는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앉아도 좋아. 저건 아주 이상적인 말이지.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야. …좋아, 앞줄의 자네부터 일어나서, 그대가 삶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설명하게."

그리고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레싱엄 교수는 그날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잔인하게 학생들을 도륙했다.

============================ 작품 후기 ============================

리메이크 이전에도 시드는 똑같이 훔쳐봤습니다. 리메이크 전에 라시아는 이를 그냥 넘겼고, 이후의 라시아는 넘기지 않아요.

라시아의 성격상으로 이게 훨씬 맞는 것 같아서... . 그래서 일케 바꿨습니다.

시드의 서툰 첫사랑을 ... 엄...이해해주세여라시아는 이해 못하지만 ...(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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