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강 록진>
사실 이 일이 있었던 날에 대한 기억 중에 이리하에 대한 기억이 너무 세서 거의 까먹고 있었다. 나로서는 당첨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일도 잉그럼이 다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개강 이후 며칠이 지났을 때 코라와 페드윈 안의 광장을 지나치는 중이었는데 유난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왜 이렇게 많아, 사람이."
“어. 오늘 호위무사 뽑는 날인 것 같은데? 광장에 여자애들 비율도 높고… 저기 잉그럼이 가운데 서 있는 걸 보니 확실해.”
“아, 그게 벌써 오늘이었나?”
“진짜 신경도 안 쓰네. 이거 기다리는 애들 꽤 됐을텐데.”
“신청도 안 했는데 당첨이 될 리도 없고… 나랑 관련 없다보니 아무래도 그렇게 됐어.”
내 무신경함이 약간 부끄러워하면서 대답하자 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너도 이거 추첨인 조건에 해당되잖아.”
“응? 신청 안 해도?”
“그래서 더 신경 쓰는 거라니까. 당첨 됐으면 수속도 밟아야하고, 여러 가지 해야 하는 게 있으니까. 이것도 의무야.”
"무슨 호위무사를 의무로 받아…."
뽑힐 리가 없다는 내 주장에도 불구하고 코라는 혹시 모른다며 기다려볼 것을 종용했다. …그냥 자기가 뽑힐지도 몰라서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열정적인 모습에 결국 얌전히 마법으로 돌아가는 공을 보고 있었다.
1,2,3,4 학년 남녀가 모두 포함되는데다 성적 조건이 좀 까다롭긴 해도 못 받아 볼 점수는 아니라서 상당수가 포함되는 편이라 될 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어서, 한가한 잡담 주제로 좋았다고나 할까.
"이번에는 몇 명 뽑아?"
"사관생도가 10명만 왔으니까, 딱 10명."
"응? 저번 년도에 비해 너무 적은데?“
"3,4학년 중에 호위무사 신청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더라고. 작년에 사관학교에서 온 사람들이 욕을 진탕 먹었었거든."
"작년에 다니엘이 하지 않았었나?"
"다니엘이야 괜찮았는데 작년 저 쪽 대표가 진짜 엉망진창이었어. 어, 떴다. …모르는 이름인데, 너 혹시 쟤 아니?"
"전혀."
공이 또 빠져나와서 잉그럼의 손에 떨어졌다. 잉그럼이 에델, 뭐 그런 비슷한 이름을 외치자 코라가 악, 하고 외쳤다.
"어! 에델이다, 에델!!"
꺄아~ 하며 환호가 터졌다. 얼핏 들은 이름인데 싶어 코라에게 물었더니 로디나의 1학년인데 호위무사를 가질만한 형편이 되는 집안이 아니라서 이거 당첨 되기를 바랐다는 코라의 설명에 잘됐네, 싶어서 웃었다.
"또 모르는 사람이고… 어, 애론이다!!!"
애론이 걸렸어, 하면서 사람들이 수군댔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에 왜 이런가 싶어 코라가 내 허리를 꾹 눌렀다.
“왜 저래? 학생회 임원을 호위하는 거잖아, 좋은 거 아닌가 서로?”
“애론이 뭘 시킬 지 생각해 보면 동정 밖에…. 여기 와서 팔자에도 없는 서류 작업 할 것 같은데?”
코라가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더니 잠깐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는 말했다.
"애론은 좋겠네."
"애론이야 좋겠지."
그 뒤로는 별로 눈에 띄는 이름도 없고 해서 얌전히 결과나 보고 기다렸다. 슬슬 무거운 책가방에 어깨가 아파올 때쯤, 8번째 발표에 내 이름이 불렸다. 어, 나네. …응?!
“자, 잠깐만. 이거 나, 나 맞아?”
순간 굉장히 당황해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코라를 보자 마찬가지로 눈이 뎅그렁 해져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일단 이거에 당첨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계속 당황하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재빨리 신난 얼굴을 해보였다. 좋은 거 맞겠지…?
“일단 자리를 뜨자. 서류, 서류 처리 하러 가야한다며.”
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 끌고 본부석으로 걸어가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째 시선 집중이 좀 심하다?”
“개강파티 일이 있다보니까, 네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지 뭐.”
“맞다. 로디나들은 어때? 사실 마사가 로디나라 좀 신경 쓰이더라.”
“무난하게 나쁘지 않은데? 흠잡을 것 없이 행동한 게 마음에 들었나봐. 또 아비게일이 좀 강하게 나서준 것도 있고."
그 소리에는 진짜 놀랐다. 누가 뭘 해줘?
"아비게일이?"
"로디나 모였을 때 아비게일이 마사에게 똑 부러지게 말했거든. 마음에 들건 안 들건 내 가문의 후계자를 함부로 대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샤펜가의 후계자를 모욕하는 건 샤펜가의 장녀인 나를 모욕하는 것과 같으니까 처신 잘하라고."
"세상에."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뭐든간에 그녀가 나를 감싸고 도는 일이 생길 줄이야. 오래 살고 봐야 한다더니.
"나도 놀랐어. 사실 그녀가 널 위해 나서줄 줄은 몰랐거든. 근데 생각해보면 아비게일 다운 처신이지. 네가 샤펜가를 대표하는 사람인건 맞으니까. 록산느가 마사에게 몇 주 자숙하라고 했어. 공식적 자리에서 누군가를 그렇게 사사롭게 모욕하는 건 파티를 개최한 록산느 자신에 대한 무례라고 하던데."
"왜 지금까지 그 이야기 안 했어?"
"너도 나도 시간이 있었냐, 지금까지. 강의 신청하느라 며칠간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그 뒤에는 시간표 정하는 거 정리한다고 끙끙대고… 그 뒤로는 시드가 시간표 꼬여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서 또 바빴지. 사실 그 이후론 내가 까먹고 있었어. 너도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기에."
그랬구나. 신기하다는 생각과 괜히 더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다 싶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느 새 잉그럼이 있는 본부석에 다 와서 인사를 했는데, 피곤함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그는 몹시 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마법사 섭외하고 자격이 되는 애들 서류정리 죄다 하고 사관학교랑 연락하고 하느라 엄청 바빴을텐데 이제 끝물이니 편하기도 하겠지.
"네가 당첨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저도 그랬는데, 이렇게 됐네요. 애론은 왔다갔어요?"
"애론은 미친듯이 바빠서 나중에 따로 전해주려고. 잘 들어. 한 번밖에 말 안한다.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 페드윈 2학년 A반. 평점이랑 기타 조건에 해당사항이 있어서 사관학도 중 한 명을 호위무사로 3주간 가질 수 있다.
동의하면 여기 사인해… 다음으로, 사관학생은 남자거나 여자고, 너한텐 선택권이 없어. 사관학생 중 하나가 널 선택하면 그 사람이 네 호위무사가 되는 거다. 같이 다니고, 같이 생활해야 해. 내일 아침에 너희 집으로 널 데리러 갈 거고, 서로 규칙을 잘 지켜서 다니도록 해. 네가 규칙을 정하고, 그가 그걸 따를 거다.
남자가 호위로 오든 여자가 호위로 오든 연애는 금지고 페드윈의 엘리트로서 무사를 대하도록 해라. 뭐 특별히 위험에 처할 일은 없겠지만, 여차해서 엉뚱하게 네가 그 자를 구했다간 그 사람 모가지야. 알았어?"
빠른 말을 얌전히 들으면서 시키는 대로 사인을 하고 있는데 지시사항이 한 4페이지는 되기에 들고 가서 읽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는데 웬걸, 잉그럼은 이거 한 부밖에 없으니 다 읽고 가라고 눈을 부릅뜨고 지시했다.
나는 결국 그 자리에서 지시사항을 대충이나마 싹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얼떨떨하게 본부석을 빠져나오자 코라가 다가왔다.
"다 됐어?"
"응… 생각보다 굉장히 제대로라서 좀 놀랐어."
“운이 좋은 거야. 당첨되기 되게 힘들어, 그거.”
“이런 거 당첨 되고 싶었던 적 있어, 너는?”
그 말에 코라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그녀야 누가 자길 따라다닌다는 생각 자체로 진저리를 치는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이 끌고 다니게 된 거, 좀 편안한 사람이면 좋으련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여자가 왔으면 좋겠다."
“아, 그것 좋다. 여자면 진짜 편할 것 같아. 남자가 한가득인 곳에서 달랑 혼자 여자니까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
둘이서 그런 얘기를 하다가 수업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뭐, 오면 잘 지내면 되지, 그 정도?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다음 날 학교 갈 준비를 마친 내게 제프리가 묻는 말에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가씨. 그럼 저 분은 어떻게 할까요?”
“네? 웬 저 분?”
"아가씨께서 그냥 아실 거라고 하기에 일단 응접실에 모셔뒀습니다만."
이 아침에 대체 누가 날 찾아왔지. 찾아오기로 한 사람 없는데, 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려다가 어제의 일이 생각나서 말했다.
"아 맞다. 말하는 걸 깜빡했네. 아마 3주간 제 호위무사 일을 할 사람일거예요. 사관학교에서 온 교환학생 알죠? 그거에 제가 우연히 당첨됐거든요. 응접실에 있다고요?"
“…어, 그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 사람 아니면 올 사람이 없는데… 왜요?”
"왜냐면 아가씨를 모셔온 분이셨거든요. 오르제국에서."
응? 찾아올 일 없는 사람이 찾아왔다니 절로 의문이 들었다. 일단 가방을 제프리에게 맡기고 응접실로 갔더니 록진이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아있었다. 혹시 이리하가 뭔가 용건이 있어서 보냈나?
“오랜만이네요! 아침부터 볼 줄은 몰랐는데.”
내 말에 그가 약간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저는 아침부터 오라고 들었습니다만.”
“…어, 설마 호위무사로 온 거예요?”
“그거 말고는.”
딱히 나한테 볼 일이 그래, 뭐가 있겠어. 오랜만에 봐도 건조한 얼굴에 어쩐지 거리감이 다시 생겼다. 둘이 잘 지냈던 것 같은데, 다시 만나니까 또 묘하게 어색하네. 내 쭈뼛거림을 눈치챘는지 그가 불쑥 내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임명장입니다. 앞으로 3주, 잘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려요. 음. 제프리, 일단 이거 내 방 탁자 위에 올려두세요. 마부에게 말 좀 준비하라고 해주고요. 그리고 이 사람 지낼 침실도 오늘 저녁까지 비워두세요. 내 옆방 손님방이면 좋겠네요. …또 뭐 필요한 것 있어요, 록진? 준비해둘게요."
"그거면 됐습니다. 과분한 호의에 감사합니다."
몹시 정중한 인사에 좀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지, 딱히 과분한 호의는 아닌데. 머뭇거리다가 제프리에게 다시 말했다.
"아침 점심 저녁, 나랑 같이 움직일 사람이니까 내 스케줄도 제프리가 알려줬으면 좋겠네요. 3주라도 있는 사람이니까 짐 옮길 때 하인도 붙여주세요. 그럼, 부탁할게요."
제프리가 고개를 깊이 숙이더니 알겠습니다, 아가씨. 라고 하고는 하녀에게 내 가방을 맡긴 후에 응접실을 나갔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아예 모르는 사람이 왔으면 불편했을텐데.”
“예. 저도 그래서 아가씨를 선택한 거라.”
묘하게 긴장감이 없는 얼굴에 첫인상이 흐려질 지경이었다. 자객이며 뭐며 여럿 죽인 사람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아는 사람이라 편할 것 같아서요~ 라고 말해봤자 어째 현실감도 안 들고….
"아, 그래요… 음, 말은 타고 오셨죠?"
"예."
그럼 이제 등교나 해야지. 하녀에게 가방을 받으려고 했더니 록진이 자연스럽게 가방을 받아들더니 가시죠, 라고 말했다. 호위무사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정했다.
엄청 좋은 거다. 짐꾼이 생겼다…! 기쁜 마음으로 걸어가는 데 뒤가 영 조용했다.
따라오는 거 맞나? 하고 뒤 돌았는데 의외로 가까이 있어서 놀랐다.
"…발소리 내세요."
"있는 듯 없는 듯이 호위의 기본입니다."
"록진."
내가 눈을 치뜨고 그에게 말을 걸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키가 더 컸어야 했는데.
"난 황족도 아니고, 그림자 무사도 필요 없어요.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게 더 신경 쓰이니까. 아, 혹시 이것도 과제 같은 거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아, 뭐 그렇다면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아니라면 다행이네요. 어쨌든 전 소리안내고 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작게나마 기척은 저한테 내주셔야 제가 방심을 안 할 수 있죠."
"방심하시라고 제가 다니는 겁니다."
당신 동생한테 내가 방심해서 이미 보여줄 필요도 없는 걸 보여줬다고. 물론 뭐 큰 일은 아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저런 걸 말할 필요는 굳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아 예, 하고 무시했다. 뭐 같이 다니는 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는 내 스케줄을 이틀 만에 모조리 외우더니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줬고,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상하관계를 지켜줘서 사실 엄청 편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너무 친밀하게 지내서 사람들이 나와 록진 사이를 의심할 정도였으니까. 이 사람 참, 편하구나. 그렇게 며칠을 보낸 어느 날,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뜬금없이 옆에 앉은 사람이 내게 편지를 건네서 펴보라는 말을 한 후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뭐지?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쳐봤다.
‘광장 분수대 여신조각 앞에서 점심시간 내내 기다리겠습니다. 혼자 나와 주십시오.’
…설마 이렇게 질 좋은 종이에 적혀있는 게 결투장은 아닐 거고. 무지 짧긴 하지만, 러브레터인가? 볼이 붉어질 것 같아서 얼른 공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이건 넣어두고. 러브레터를 공책 뒤에 끼워두고 일단 공부에 집중해…보려고 했는데, 점심시간이 얼마나 남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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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헤헤. ..... 이 챕터는 라젠을 위한 챕터입니다.
그리고 어... 시드가 리메이크로 많이 달라질 거 같아요.
많이 좋아하시는분이 상처 받지 않으면 좋겠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