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애니가 시키는대로 하고 나서 피곤해서 한숨 자고 나니 어느 새 약속 시간이 훌쩍 가까워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치장도 하고 나서 밥 먹으러 내려갔더니 제프리부터 요리사, 마구간지기 한스까지 도대체 어제 뭐했냐며 발을 동동 굴리면서 화를 냈다.
차마 옆 나라 황제한테 가서 놀다 왔지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지라 너무 피곤해서 파티장 여자 휴게실에서 잠깐 잠들었다, 라고 변명하고 실컷 혼났다. 도대체 내 주변엔 왜 이리 아빠 행세하는 남자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내가 아빠가 없어서 그런가? 밥까지 얌전히 먹고 나서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약속 시각에 맞춰서 오랜만에 마차를 탔다.
애매하게 밤을 새웠더니 말을 타기가 싫네. 페드윈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곳은 들리지도 않고 로드리고 관으로 갔더니 사람들이 다들 폐인 꼴이었다.
“다들 얼굴이 왜 이렇게 반쪽이에요.”
“너야말로 왜 이렇게 멀쩡하냐…”
“오전에 안 주무셨어요?”
“잤는데 너처럼 말짱하지는 못하지. 우리랑 같이 깔깔대면서 논 여자 맞는지 의심스럽네.”
“
다들 병든 병아리처럼 조는 걸 보다가 문득 짐작가는 게 있어서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저 빼고 술 드셨죠.”
순식간에 그들이 어깨를 움찔, 하고 멈췄다. 이 인간들이 날 빼고 2차를 가져?
“와, 진짜 치사하다. 어떻게 저 빼고 술을 마시러 가실 수가 있어요? 그것도 왕창 드셨네요?”
당황한 사람들이 슬슬 내 쪽으로 다가와서 변명을 시작했지만 통하지도 않을 소리라 나는 더 엄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아니 넌 여자애니까… 혹시 우리가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그랬지이…”
“저 왕따예요?”
“아냐아냐!! 절대 아냐!!! 진짜야!!! 우리가 너 부르려고 그랬는데 엄청 피곤해보이고, 급해 보여서… 우리 다 만나서 네 얘기밖에 안 했어!!”
윈프레드며 앨번이며 여럿이서 급하게 나를 위로하는 모습에 마음이 살짝 풀리면서 마지막에 내가 말도 못 붙이게 급하게 쌩 나왔다는 점도 생각나서 일단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
“제 얘기 뭐 하셨는데요?”
“어… 뭐 라시아 예쁘다… 뭐 그런.”
진짜 내 얘기 한 거 맞나, 싶어 눈을 가늘게 떴는데 순간 문을 열고 애론이 들어왔다. 저 분은 또 왜 저렇게 상쾌한 얼굴인가 싶어서 재빨리 고개를 돌려 카일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카일도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저 사람 왜 저래, 하고 우리가 수군거리자 애론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세상이 참 아름답지!”
“… 애론 어디 아파요?”
이 사람이 미쳤나, 하는 눈으로 우리가 바라봐도 약 먹은 표정을 영 감추지를 못했다. 진짜 아프신가, 뭘 잘 못 먹었나. 혼자 어디 다른 세계를 헤매고 있는 표정에 윈프레드가 결국 나서서 그에게 물었다.
“록산느가 사귀어 주기라도 하는 거야, 뭐…”
그러자 애론의 눈이 비정상적으로 번뜩였다. …진짜로 허락해주기라도 한 거야? 솔직히 애론 쪽이 너무 티를 내고 절절하게 매달려서 평생 사귀기는커녕 그냥 개그콤비나 되겠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이어지다니.
“에엑! 진짜? 록산느가? 록산느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올해의 뉴스네. 솔직히 애론 그냥 늙어죽을 줄 알았는데.”
“으하하하하! 우매한 인간들이여!! 나의 승리다!!!”
“승리랄 게 있어요? 잘 됐긴 했는데…”
“냅둬. 미친 놈은 상종하는 거 아니야.”
미친 사람처럼 웃는 애론은 무시하고 앨번이 앉아있는 우리를 모으더니 말했다
“쟤는 원래 이거 하지도 못하는 학생회니까 내버려두고. 부른 건 다른 게 아니라, 호위기사 이벤트 때문인데… 하고 싶은 사람 있냐?”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들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턱이 있나. 다들 한창 개강을 시작해서 방학의 즐거움을 잊지 못한 상태였으니, 딱히 일할 의욕도 재미도 안 나는 상태일 거였다. 그걸 아는지 어떻게든 빠져보려는 눈치게임 중이었는데 과감하게도 윈프레드가 말했다.
"시드, 넌 어떠냐? 너 기사들이랑 연줄 쌓는 게 유리하잖아."
하긴 시드라면 잘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모두가 그를 바라봤는데 그는 관심 없는 척 앉아서 글쎄요, 하는 시큰둥한 반응만을 보였다.
"좋은 기회 아냐?"
내가 그를 바라보면서 물어도 시드는 글쎄- 하면서 시큰둥한 표정을 유지했다. 내가 채근하자 그는 저거 해서 바쁜 게 싫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너 별로 안 바쁘면서."
"바빠, 바빠."
결국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 윈프레드에게 그렇다네요. 라고 말했다. 그는 시드를 빤히 바라보더니, 피식하고 웃더니 말했다.
"그래, 내가 너 바쁜 거 알지."
앨번이 둘 다 안 돼냐? 라고 물었다. 나는 죄송해요 하고는 슬쩍 웃었고, 그가 내 머리를 툭, 하고 건드리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코라의 남편예정자가 된 이후로 앨번은 내게 무척 친근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원래 나름대로 친한 사이였는데 그가 친해지려 노력하는 건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코라의 친구라는 입장에서 보는 건 또 다른가 싶어서 그냥 자연스럽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 어떡하지… 1학년한테는 맡기는 건 또 좀 그렇고."
"루퍼트나 카일은요?"
"카일은 오르제국 출신이잖아. 아무래도 사관학교에는 오르제국사람들이 잘 없으니까 좀. 루퍼트는 기사랑 상성이 나빠서 웬만하면 일을 안 맡기고 싶거든."
"얼마나 나쁜데요?“
"기사랑도 장군감이면 상당히 다른데, 호위무사랑 사이가 유난히 나빠. 마법사거든, 루퍼트는. 원래 마법학교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뭐 본인의 사정으로 인해서 여기 들어온 녀석이라. 성격도 마법사라 기사를 관리하는 데는 좀….“
앨번이 고개를 흔들더니 다니엘을 불렀지만, 다니엘은 내 앞에 앉아서 모르는 척 책을 읽을 뿐이었다.
"야, 하늘같은 선배님께 반항이냐?"
앨번이 다니엘 옆에 턱, 앉더니 말했다. 다니엘은 그에게 시선을 두지도 않고 대답했다.
"작년에 그거 제가 한 것 같은데요."
앨번이 한숨을 쉬었다. 소파에 등을 아예 푹 기대더니 윈프레드를 노려보자 윈프레드가 얼른 말했다.
"전 좀 봐주세요. 축제 때 다들 하기 싫어하는 걸 제가 했잖습니까."
윈프레드는 축제 때 로드리고를 대표해서 애론과 함께 접대를 했는데, 접대는 축제 내내 정해진 쉬는 시간 없이 몰려드는 손님을 모두 맞아들여야 해서 모두들 질색하는 일이었다.
"데릭은 개강 준비 도우러 갔고… 잉그럼도 가버렸지. 잉그럼은 그런 거 원래 싫어하면서 왜 갔어?"
앨번이 투덜거리자 다니엘이 읽던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말했다.
"아비게일이 개강준비하러 갔거든요."
“…너도 진짜 희한한 놈이야.”
윈프레드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네 피앙세를 좋아하는 녀석인데 신경도 안 쓰이냐?"
"아비게일이 잉그럼한테 관심이 없으니까요. 신경도 안 쓰고 완전히 무신데, 뭐 걱정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너 그러다가 뒤통수 맞는다."
앨번이 다니엘을 툭, 치고는 말했다. 윈프레드가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사실 나도 그에 대해선 공감했지만, 굳이 남의 애정사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다니엘과 아비게일의 애정사에 대해서는 특히.
"그래서, 아무도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 이거냐?"
"시드 시켜요, 시드. 시드가 제일 그럴듯하지 못한 핑계잖아요. 지가 뭐가 바빠."
시드가 발끈하더니 말했다.
"방학 중에 사관학교에서 교습 받았단 말입니다! 그게 성적이 괜찮아서 여기랑 거기 겸해서 공부하기로 했기 때문에, 저 엄청 바쁘다고요. 2학기는."
"그게 가능하냐? 엄청 바쁠텐데."
"제가 페드윈에서 최소과목 이수자라서 가능한 일이죠. 이것 때문에 학장님한테 얼마나 불려 다녔는데."
그랬단말야? 코라와 내게 언질도 안 해준 일이라 퍽 놀랐다.
"왜 우리한테 말 안했어? 전혀 몰랐는데!"
“말할 기회가 없기도 했고… 코라는 계획은 알았는데, 되고 나서 말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
그가 쑥쓰러운듯이 나를 외면했다. 코라는 알려주면서 왜 나는 안 알려주나 싶어 좀 섭섭했지만 일단은 마땅히 기뻐할만한 일이고 친한 친구가 바라는 길로 가게 된 일을 지금이라도 축하해주고 싶었다.
"세상에, 너무 잘 됐다!!! 그럼 기사 서임도 받고, 이제 아주 그 쪽 길로 가는 거야?!“
기뻐서 시드를 잡고 물어보자 어쩐지 그가 슬슬슬 나를 피했다. 얘가 왜이래, 싶어서 더 붙잡고 막 잘됐다고 하자, 안쓰럽다는 얼굴로 다니엘이 나를 말렸다.
"왜 그래, 너?"
내가 시드를 붙잡자 다니엘이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시드 얼굴 새빨갛다?"
"아, 다니엘!!!!!"
시드가 다니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응? 싶어서 일어나서 시드를 봤더니, 얼굴이 정말 빨갰다. 윈프레드와 앨번, 루퍼트와 카일이 모두 신나게 웃어댔다. 웃긴 일인가. 난 사실 마음이 퍽 복잡했는데.
"너 왜 이렇게 귀엽냐. 안 그랬잖아, 너."
루퍼트가 낄낄대면서 시드의 등을 턱, 쳤다. 앨번이 웃으면서 시드의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은 뒤 말했다.
"흠. 그래서 사관생도 누가 관리할 건데요?"
그러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저는 하고 싶…다고도 말씀 못 드리겠고, 사관생도가 남자가 대다수고 검을 다루는 것 때문에 로드리고에게 맡겨진 것과는 꽤 상반되는 입장이라. 시드도 사관생도들을 관리하는 입장으로 하기에는 거의 신입입장이라 아마 그 분들이 말을 잘 안 따라줄 것 같고… 다니엘은 전년도에 하셔서 다시 하기 싫어하시는 걸보니 부탁드리기 민망하네요. 윈프레드도 마찬가지고 앨번은 무리시죠?"
"4학년 이래봤자 3명이다. 지금 3학년 손도 빌리고 있는데 나도 로드리고 쪽 일하면서 도와줘야해."
"… 그냥 1학년 시키면 안 돼요?"
"걔네를 어떻게 3, 4학년 사관생도를 지도하라고 보내냐. 면목이 있지."
앨번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쩌나하고 모두들 침묵했다. 다니엘이 말했다.
"그럼 뽑기 하죠."
"…뽑기?"
"지금 적당한 사람이 없고 다 바쁘니까 어쩔 수 없잖습니까."
신박한 방법이다! 우리 모두 동의하고 나와 시드가 쪽지를 만들었다. 그에게 네 이름은 몰래 빼줄까? 하고 물었는데, 앨번에게 딱 걸려서 째림 당햇다. 나머지는 결국 모두 감시당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성 있는 사람들 모두의 이름을 다 적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6명중에 한 명인데.
"저기, 잉그럼은 넣으면 안 돼요?"
"넣어, 넣어."
자기도 끼워달라며 징징거리던 애론이 뽑기 내용을 듣자마자 그럼 열심히, 하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 인간 자랑만 하려고 들어온 거구만. 앨번이 긴장된 얼굴을 하며 뽑은 종이에는 잉그럼이 적혀있었다.
“아싸!”
모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환호에 절로 분위기가 방방 떴다. …저 분들이 숙취는 생각도 안 하시나. 아니나 다를까 소리 지르고 나서 귀 울리는지 다들 데구르르 쓰러진다. 쯧쯧.
"그럼 전 이만 일어날게요. 가서 잠이나 좀 자야겠어요."
"놀다가지. 우리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건데."
"그래, 너 없이 재미도 없는데. 내가 사기로 한 건데 짐승들 먹이는 게 뭐가 재밌겠냐. 같이 가."
잠시 고민하다가 뭐 사주실건데요? 하고 배시시 웃었다. 해장이라는 말에 정색하고 빠져나왔더니 너무하다, 우리를 버린다 어찌나 말이 많은 지. 해장은 무슨 해장이야.
============================ 작품 후기 ============================
쉬어가는 화...(먼산)
저도 남들처럼 단타로 연재하려고요!
+ 강화가 잘 통해서.. 작가가 기뻐하며 40회 떄 코멘을 열기로 결심....은 다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