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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37화 (37/113)

37화

그래도 막상 자리를 일찍 뜨려고 하니 걸리는 게 많았다. 일찍 나갔다가 어떤 뒷말이 또 오갈 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끝의 끝까지 남아 있다가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보통 개강 파티에 이렇게 늦게까지 남는 건가. 늦은 시각에 시작하는 만큼 보통 파티가 3, 4시에 끝난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여러사람이 집에 돌아가지 않을 줄이야.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안 만날 수도 없는 상대니 결국 구두 뒷굽을 부딪혔다. 이리하가 있는 곳, 이라고 말하자 마자 시야가 밝아지고 부유감이 들었다.

원래 이런 부유감이 들었나, 하고 약간 갸웃거리다가 눈을 뜨니 테라스의 기다란 손잡이를 내가 밟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지금 이 뒤는 지지대 하나 없는거야, 싶어서 순간 소름이 돋아서 힘차게 발을 디디고 안 쪽으로 들어오는데 이리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떨어져서 무릎이 세게 찧었다. 아, 아파 죽겠어.

"뭘 바라보고 계세요,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아, 일부러 그렇게 들어오는 건 줄 알았지. 특별한 인상을 주려고."

"그런 짓을 왜 해요."

그가 다가와서 떨어진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아 일어나자 이리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언제나 특별하게 등장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군, 당신."

"저로서도 기대하지 못했던 특별함이라서요. 이 쪽은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거든요."

넘어지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그가 차분하게 귀 뒤로 넘겨주면서 웃었다.

"개강파티라 예쁘게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불렀는데, 이 꼴을 보게 될 줄이야."

내가 뭐 어때서, 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불러놓고 침의 차림이신건 뭐예요, 또."

"이렇게 늦은 사람한테 듣기엔 웃긴 소린데. 있어보게, 위에 뭐라도 걸치고 올테니까."

그가 주변에 널브러진 담요를 내게 건네주면서 옷을 갈아입으러 잠깐 안으로 들어갔다. 테라스 밖으로 펼쳐져있는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밤하늘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자 그가 어느 새 나와서 내 옆에 섰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오르의 하늘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 같아요."

"하늘을 좋아하나?"

"별을 좋아해요."

"그대에게 빛나는 것이 잘 어울리기는 해."

정말일까.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내게 빛나는 것이 어울린다면, 지금까지 어째서 내게 그런 반짝임이 와닿지 않았을까. 내 유년은 그저 빚의 향연이었다.

14살 때 엄마의 지병이 도졌고, 남은 세월을 병마와 싸우면서 보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엄마는 몸을 팔았고, 나는 그런 그녀를 말리기 위해 필사를 했다.

돈이 안 되는 일이란 얼마나 잔인한지… 엄마가 한 번 남자와 잠으로써 벌어지는 돈은 많았지만, 비참하고 서로에게 상처만 되는 돈일 뿐이었다.

"어울리는 건 아무 소용이 없는 걸요. 오지 않는 걸 바라봤자…"

"어울리는 자에게 가치 있는 것이 붙기 마련이야."

이리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지 않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는 말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누린 자가 행복한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누린 자가 행복한지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야. 불행은 똑같이 무거워. 원인이 어떤 것인가와는 관련이 없지."

이 사람 참, 우습다. 내가 하려던 말을 귀신같이 눈치챈다. 신기한 마음에 말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더욱 신중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대의 유년은, 불행했나?"

그 때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나와 그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내버려두면서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병마와 함께 하는 어머니, 그리고 가난. 나는 어린 시절 친절도, 명예도, 인정도, 상냥함도 사람에게 약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를 살리려면 결국 내가 필요한 것은 내 손 안에 있지도 않은 동전 몇 닢이었다.

"… 아니오."

그렇지만 나는 불행하지는 않았다. 쌓여가는 무서운 현실에 두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행하지 않았다.

엄마는 자신에게 온 러브레터 상자를 꺼내 읽어주면서 맞춤법을 알려주었고 내게 품위란 것을 알려주었다. 생일 때마다 없는 살림에도 집사 할아버지는 꽃다발을 선물해주었다.

함께 하는 시간, 생활이 쌓여갈 수록 그들의 품이 따뜻해졌고 덩달아 나도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쁘지 않았어요."

불행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길을 찾게 알려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건강도 악화되어 마지막에야 할아버지는 당신의 딸 집으로 옮겨가, 그 집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돈이 없어서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그 얼마 후 엄마도 돌아가셨다.

"그러면 됐어."

이리하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갑작스러운 눈물에 내가 더 놀랐는데 이리하가 내 쪽으로 손을 뻗어서 가만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엄지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저는… 저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말을 이어 보려고 했는데,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들이 촉촉하게 젖어서 내 속눈썹을 쓸어내렸다.

"그대의 이복언니가 요르펜과 약혼을 한다고 들었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얼굴이 그의 손에 묶여서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는 샤펜의 후계자가 되겠군."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혀를 찼다.

"당신이 내 옆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싶어졌는데, 아쉬운 일이야."

눈을 바로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에 닿는 손의 감각이 낯설고 그 손에 닿은 내 얼굴이 낯설었다. 그가 무감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이듯이, 조용히 말했다.

"번거로운 일은 앞으로 널려있어, 라시아. 그대는 이런 걸로 무너져서는 아니돼."

"… 무너지지 않아요."

"그대는 이것보다 수천배는 더 단단해지고, 수만배는 더 날카로워져야 해."

"그렇게 되는 데에, 의미가 있나요?"

그러자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일견 잔인해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분명 지배자의 위엄으로 차있었다. 나를 자신으로 보는 사람. 이 사람은 언제고 내가 가장 높아질 길을 바라보고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어서, 누구도 부수지 못하는 것이 되는 거야."

천천히 그의 손이 내려가 내 입술에 닿았다.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그가 꾸욱 누르면서 그제서야 말했다.

"아마다스 …"

다가오는 그의 숨결에 숨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지 않고, 두렵지 않은 것처럼.

"정복할 수 없는 것의 이름이지."

그 때 빛이, 아득한 주홍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만약, 그 때 해가 뜨지 않았다면 이 때 나와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가정에 의미는 없는 법이다, 그 때 해는 이미 떴고,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빛이 비추는 곳을 바라봤으니까.

"동이 트네요."

이리하가 내 뺨에서 아주 느리게 손을 떼어낸 후에 말했다.

"젠장."

그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천천히 그에게서 멀어지면서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해요. 큰 도움이 됐어요, 이리하."

그가 됐어, 라고 말하더니 뚱한 표정으로 테라스에 몸을 기댔다. 어쩐지 웃겨서 큭큭, 하고 나오는 소리를 겨우 참으면서 고개를 살짝 돌려 해가 뜨는 것을 보았다.

바다에서 해가 뜰때처럼, 사막의 연갈색 차가운 모래가 주홍빛으로 물들더니 그 안에서 해가 태어났다. 눈이 따가웠지만 몹시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곤하겠군. 오늘 학교는 가나?"

"아. 원래 개강파티 다음 날은 등교 안 하는 거래요."

"그거 잘 됐군. 원한다면 오르안의 침대를 혼자서 쓸 수 있게해주지."

"그러면 나중에 혼나는거 아니에요?"

피곤하다고 생각하자마자 하품이 절로 나왔다.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는 나를 보던 이리하가 테라스를 가린 커튼을 열면서 말했다.

"걱정마. 절대 안 들킬테니까. 그대도 웃기는 여자야. 이렇게 잘난 남자가 속에 침의만 입고 앞을 왔다갔다하고 있는데 잠이 오다니. 예쁜 여자는 다 이래?"

말은 잘 하셔. 히죽, 하고 웃으면서 그러니까요, 지금 당장 막 어떻게 해야 하는데, 라며 농담짓거리를 했는데, 과연 이리하가 어쭈- 하고 헛웃음을 보이더니 말했다.

"막 어떻게 뭐 하려고?"

"그야-…. 아, 무슨 농담도 못해요."

저절로 묘한 생각이 떠올라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침실로 따라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하품을 하자 이리하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건드리지도 않을테니까 자."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그대가 이상한 생각 했지 내가 언제 했나?"

억울하다는 얼굴에 분해서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얌전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서 이불을 덮었다. 이리하의 침대는 몹시 푹신했는데, 이 정도면 왕 될만 하겠다 싶을 정도로 베개며 이불이 부드러워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잠들기 전 무심코 이리하를 보았을 때, 그의 얼굴이 뜨는 해에 빛나고 있었다… 저 얼굴은, 어쩐지 잊지 못 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이리하 강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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