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코라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오자마자 찾아가고 싶었는데, 그 동안 저택을 비웠다고 나름대로 밀린 일이며 여행 다녀온 짐 정리며 무척 바쁘기도 했고, 그녀도 정신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바로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늦은 약속을 잡았지만 코라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었다.
뭐 이러 저러해서 결국 학기 시작하는 첫 날에 코라를 만나니 터놓고 말할 상대를 만난 것 자체가 오랜만이라 어마어마하게 기뻤다. 그녀에게 오르제국에서 사 온 기념품을 건네주고는 그동안 밀렸던 일들에 대해 서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는데, 코라가 말하는 게 죄다 업무에 대한 일이어서 나는 무척 실망했다.
이 아가씨가 왜 이러실까. 내가 바라는 질문이 그게 아닌 걸 알텐데.
"그건 됐고, 앨번은 잘 해주나~?"
내가 미소를 지으며 묻자, 그녀는 끄악, 하는 소리를 내더니 얼른 나를 밀쳐냈다. 제법 세게 밀어대서 얘가 물어보면 뭘 물어봤다고 사람을 이렇게 퍽퍽 쳐, 싶었다.
내가 뭐, 이상한 거 물었나. 질문에 뜬금 없이 얼굴을 발갛게 붉히면서 그냥 정략인데 뭘 잘해주긴… 하면서 입을 살짝 내미는 걸 보니 서로 칼싸움까지는 안 가겠네, 싶어서 웃었다. 하긴 앨번은 괜찮은 사람이었으니까.
"넌 꽤 일찍 약혼자가 정해진 셈이지?"
"그런 편? 보통은 4학년 졸업파티가 피앙세와 함께 하는 파티라고 할 정도니까. 거의 3학년 말이나 4학년내에 정해지지. 나야 뭐 거의 충동적으로 두 가문에서 정한경우지만… 그러고보니 아비게일이랑 다니엘 선배님이랑 약혼하신다면서?"
"아. 벌써 소문이 퍼졌어?"
"안 퍼질 소문도 아니고, 진작에 퍼졌지. 아비게일 같은 경우엔 상당히 오랫동안 몸 달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기도 했고."
"응? 무슨 소리야?"
"뭐… 유명한 얘기니까. 둘이 2학년일때 아비게일이 학년말 무도회에서 다니엘에게 춤신청을 한 적이 있었거든. 사실 아비게일 같은 성격의 아가씨가 먼저 남자에게 춤신청이라니, 대 사건이잖아. 그래서 아비게일이 다니엘 좋아하는 거 아니냐면서 엄청 말이 많았었거든. 뭐 물론 아비게일이나 다니엘 둘 다 노코멘트 였고, 잉그럼이 뜬금없이 나서서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집안끼리 문제라면서 수습했지. 그 때가 사실 스캔들의 끝이었지. 아비게일은 다니엘을 좋아하고, 잉그럼은 아비게일을 좋아하는데 다니엘은 어떨까 하면서 수군수군 대고. 근데 사실 셋 다 서로 사이가 좋기도 하고, 잉그럼은 다니엘의 친구기도 하니까 뭐 … "
다 아는 일인데다 약혼까지 된 마당에 숨길 일도 아닌 것 같아서, 약간 망설이다가 심술궂은 어조로 말했다.
"아비게일이 다니엘 초상화 들고 다니는 것 알아?"
코라가 눈을 크게 뜨고 비명 가까운 것을 지르고는 더 얘기해봐! 더 !!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너만 알지 말고 만백성에게 퍼뜨리라는 약속을 받아낸 뒤, 그녀가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증거를 줄줄 대줬다. 코라는 어머어머어머를 연방 터뜨린 후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는 말했다.
"근데 너 이거 나한테 알려주면 아비게일에게 뺨 맞는 것 아냐?"
"아비게일은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야. 이미 약식 약혼도 했는데, 쑥쓰러워할 필요도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말했다.
"좋겠다."
"…뭐가."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부비자 코라가 가만히 말했다.
"괜찮아질거야… 아마도, 언젠가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어떤 변명을 하지도, 물음을 할 기운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기댄 채 가만히 있었다. 너도 괜찮아졌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래, 괜찮아지겠지. 쌀쌀한 바람이 내 코끝을 스쳐갔다. 알트라의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새,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나중에 로드리고한테도 들를거야?"
"응, 그래야지. 나름대로 선물을 챙겨오기도 했고."
"다들 좋아하겠네… 시드는 만났어?"
어쩐지 내 안색을 살피는 기색에 고개를 흔들고 나서야 오르에서 자신을 찾으러 왔던 것이 떠올랐다. 말 해야 하나. 하지만 그건 드래곤으로서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닐까. '인간' 시드의 마법적 능력이, 단숨에 오르 궁을 뚫고 들어올 정도일까. …비밀이 생기는 일은 괴로왔다.
죄책감에 나는 결국 그녀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낸 후에 말했다.
"빨리 가야겠다. 이제 다 모였을거야."
"…그래."
그녀의 껄끄러운 얼굴을 애써 무시한 채, 먼저 자리를 떴다. 하인이 내가 잔뜩 들고 온 짐을 들어서 내 뒤를 따랐다. 로드리고 관으로 가는 중에 멈춰 서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자꾸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 생기는 걸까. 정말로 이런 일에 대해서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은데.
"이야, 라시아!"
멀리서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면서 시드가 다가오더니 오랜만이야! 하면서 내 뺨에 비쥬하고 나를 한 번 끌어안았다.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그를 반기지도 않은 채 어정쩡하니 서있다가 겨우 웃어보였다.
"키가 그새 큰 것 같아. 컸지?"
"어, 그래? 좀 크긴 했나…오르제국에서는 무사히 왔어? 짐이 꽤 많네."
"응. 로드리고 사람들이랑 너랑… 이것저것 준비해봤어. 이리하께서 마법으로 보내줘서 굉장히 빨리 올 수 있었어. 참, 윌 사비엥도 그가 처리했다?"
"…윌 사비엥을? …그보다, 이리하라고 불러?"
"응. 부르라고 하시던데."
그리고 나는 그의 껄끄러움을 모른 척하며 걷기 시작했다. 시드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눈치지만 내가 더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가 내 모든 일에 대해 알 필요는 없었다. 특히 내가 어떤 남자와 사람을, 어떻게 부르든, 그가 알 필요는 없다고 나는 부러 냉정하게 그를 외면했다.
"어리석은 자네. 할 의뢰가 있고 안할 의뢰가 있지."
그렇게 망할 줄 알았어. 하고 시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드는 내 짐을 하인에게서 받아들더니 그만 가보라고 했다.
하인에게 고마웠다고 말하고 팁을 준 다음, 그와 함께 로드리고 관으로 향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로드리고 관에 도착했다.
어째 시끌벅적한 것이 이상하다 싶었지만, 하긴 이 사람들도 방학 끝나고 처음 만나는 걸테니 반갑기도 할테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번에 시선이 집중되더니 그들이 나와 시드를 시집 간 딸이 친정에 놀러온 것마냥 반갑게 맞이해줬다.
오르제국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도 많았고, 얼굴이 하나도 타지 않았다며 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짐은 뭐야? 시드, 너 벌써 책 옮기냐?"
"아뇨, 이건 라시아 것."
커다란 짐 가방안에서 두개를 꺼낸 후 나머지 짐가방은 애론쪽으로 건넸다.
"오르제국에서 오면서 선물 좀 챙겨봤어요."
말 끝나기도 전에 난리다. 사실 너무 싸구려라도 실례고, 너무 고급품을 여러개 사는 것도 좀 우스운 모습이라 적당한 물품을 구하는데 애를 좀 먹었다. 결국 오르제국에서 유명한 차와 장식품 몇 가지를 사왔는데, 딱히 구분없이 넣어둬서 집는 대로 그냥 가져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이건 시드, 네것."
내가 시드에게 물건을 따로 건네주자 왜 시드는 따로냐며 말이 많다. 배시시 웃어주고는 모두에게 준 민트티를 마시는 가르쳐준뒤, 시드에게 풀어보라고 했다.
"꽤 무게가 있는데? 뭐야?"
그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내게 물었지만, 난 그냥 풀어봐, 라고만 말했다. 사실 마법으로 도착한 시드의 선물이 가장 무거웠긴했다.
이리하가 며칠 전에야 소포로 내가 산 것들을 보내줬는데, 친필로 된 편지와 함께 와서 나는 좀 웃었다. 안 어울리는 일을 할 줄 아는 남자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편지 안에는 좀 특별한 물건도 있었고 말이다. 사실 시드에게 따로 줄 것을 챙기는 게 찜찜하기는 했지만, 코라에게도 따로 선물을 고르기는 했으니까 .
"어."
시드가 선물을 풀어보더니 놀란 눈을 했다. 시드의 취미가 검 모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꼼꼼하게 명검을 고른답시고 이리하, 라젠과 함께 고른 사막 부족 특유의 칼을 선물했다. 이리하는 내가 검을 사가는 것에 계속 마땅찮아했지만, 뭐 내가 산다는데.
"물론 원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겠지만… 딱히 네가 뭘 좋아하는지 이것 외에는 생각나는게 없어서. 마음에 들어?"
그가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나는 쑥쓰러워져서 뭘, 이라고 말한 뒤에 남은 선물들을 챙겼다. 아직 안 온 사람들이 있나보다. 하긴, 다니엘도 아직 안 왔으니까.
"혹시 시드 너, 고백했냐?"
둘이서 뭘 하지도 않았는데 어찌나 귀신 같은 눈치들인지, 여러 명이 의심스런 눈초리를 하더니 데릭이 대표로 물었다. 끙. 이러저러한 소리를 해봤자 통하지도 않을 이야기일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자 드디어!! 라는 분위기라 아연했다.
" 다 알고 있었어요?"
"시드가 티를 그렇게 냈는데 모르겠냐. … 흐흐흐, 그래서, 둘이 사귀냐?"
그 말에 나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재빨리 눈치를 보더니 시드에게 뭔가 말해주려고들 했다. 그 말에 다들 어색한 분위기가 돼서 나는 이 자리가 … 솔직히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내가 자리에 없었을 때 이들이 시드에게 혹여나 했을 충고도 불편했고, 혹여나 당연히 시드를 선택하지 않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급격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어도 사귀라고 강요하는 분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내 기분을 무척이나 찝찝하게 만들었다.
시드가 혹시 말한 걸까. 우리끼리 해결을 했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아, 진짜. 불편하게 만들지 마요."
내 눈치를 보던 시드가 한 마디 하자 어색함을 깨고 싶어서 시드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분위기에서 이게 내가 남자 뿐인 동아리에 들어와서 감당해야 할 몫인가 싶었다. 애써 기분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슬쩍 빠져나와서 자비에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2학기 시간표가 정해졌나는 둥의 이야기와, 개강파티때 파트너를 정했냐는 둥의 쓰잘데 없는 이야기였다. 어쨌는 바람둥이는 말재간이 좋은데다 워낙 눈치가 빨라서 좋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고보니 자비에르 너는 따라다니는 여자애들이 많아서 누구랑 파트너할지도 고민이겠네. 누구랑 가?"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고, 자비에르가 라시아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속 빈 강정같은 소리를 하는 걸 들으면서 웃었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방학 잘 지냈어?"
완벽한 정복차림의 다니엘이 들어섰다. 방학 후로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를 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초콜릿 색 머리카락, 아름다운 초록색 눈. 그의 얼굴과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가, 나는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셨어요?"
모두들 하는 인사와 함께, 내 인사가 섞여 들어갔다. 눈이 마주쳤고,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오랜만이다."
"그래, 진짜 오랜만이네! 너 대체 뭐하고 지냈냐, 연락이 아주."
"난 거기 있었는데, 너 이 자식 바빠가지고…."
"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보니 참, 스스로가 웃겼다. 이 사람이 좋아서 별 일을 다 겪었네. 그런데도 밉지도 않고 반갑다니. 정말 바보도 아니고…
"나 약혼하느라 바빠서."
모두들 순간 입을 다물었다. 다들 약간 경악하는 눈치더니 누구랑!!! 이라고 외치듯이 말했다. 내가 말했다.
"아비게일 양이랑요. 샤펜쪽에서 먼저 약혼이야기를 꺼냈답니다."
순식간에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나중에 그의 선물을 줘야겠다.
나는 꺼내놓은 선물 하나를 손에 쥔 채, 다시 자비에르에게 말을 걸었다. 자비에르가 시시콜콜히 내게 약혼에 대해서 묻다가, 화제를 바꿨다.
과연 바람둥이는 이유가 있다니까… 내가 이 주제를 꺼리는 것을 알고 있었나보다 싶어서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그는 굉장히 놀란 눈을 했다.
"저기…"
"미안, 불쾌했니? 눈치가 빠른 것 같아서…바람둥이에는 이유가 있구나~ 했어."
자비에르가 그냥 웃더니 자기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내게 말했다.
"이렇게 머리카락을 정리하는게 바람둥이의 기본이긴 하답니다. 그보다 시드가 저를 잡아먹으려고 하고 있는데, 말 좀 걸어주시는게 어떠세요?"
응?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시드가 근처에 와있었다. 웃으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하니 앉아서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느냐고 묻는다.
"별 얘기 안했어. 개강파티 이야기랑, 시간표 변경하는 이야기… 선물은 마음에 들어? 사실 이미 가지고 있는 걸까봐 좀 고민했거든."
드래곤이라는 게 걸리니까 참, 선물해주기도 그렇다. 뭐든 다 가지고 있을 사람에게 선물이라니…
"마음에 들어. 엄청. 맞다, 코라가 이번에 앨번이랑 파트너해야한다고 나 찼어. 나랑 파트너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게 아직 파티 신청이 온 것이 없었다.
개강파티는 이틀이나 삼일 정도 전부터 파트너가 정해지는데, 대개 저택으로 편지가 온다. 이건 일종의 인기도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척도인데, 아비게일은 아직 약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서 3~4통의 파트너 요청 편지를 받았고, 나는 어쩐지 한 통도 받지 못했다.
나 그렇게 인기 없었나….
"다행이다. 나 이번에 아무한테도 신청 못 받았거든."
그가 넉살을 떨었다. 보통 남자들이 신청하는 것이 관례라, 여자들은 굉장한 용기가 없고서야 개강파티 때 요청장을 보내지 않는데 이렇게 말하는 그의 능청이 기분 나쁘지 않게 다가왔다.
"다행이네. 나도 하나도 못 받았으니까."
시드가 놀란 눈을 하더니 내게 말했다.
"내가 요청하는 걸 기다려준거야?"
"얼씨구?"
그러자 그가 웃었다. 그가 요청 편지를 하나도 받지 못한 나를 배려해주는 게 정말로 나쁜 방식은 아니어서 나는 그에게 났던 화를 조금 풀었다. 그러더니 시드가 자비에르에게 내게서 떨어지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자비에르는 헹, 이라는 얼굴을 하더니 내게 좀더 가까이 앉았다. 사실 자비에르는 딱히 우리 대화에 관심도 없었고, 그냥 앉아있던것 뿐이었는데 그가 괜히 저리가라는 손짓을 한게 자비에르에게 오기를 발동시킨 모양이었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나는 일부러 자비에르에게 친근감있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좀 울컥하던 시드도 나중에는 같이 자비에르가 들을만한 과목을 추천하는 것을 도와줬다.
"라시아, 잠깐 얘기 좀 할까?"
응? 하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다니엘이었다. 순간 심장이 잠깐 빨리 뛰었다. 나는 시드를 잠시 보고 다녀올게, 라고 말했다. 시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작은 방에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약혼 축하드려요, 라고 말했다.
"아…고맙다. 너한테 그 소릴 들으니까 좀 실감이 나네."
가타부타 더이상 말 없이 그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약혼한 줄도 모를 때 그에게 줄거라고 산 물건이라서 사실 좀 주기 창피했지만, 왠지 그가 정식으로 약혼 하기 전에 주고 싶기도 했다.
"오르제국에서 사온 거구나? 애들이 차 아니면 장식물이라고 하던데."
그가 웃으면서 받아들었다.
"차도 아니고, 장식물도 아니에요."
담담하게, 부디 차분하게 들리기를 바라면서 나는 말했다.
"그럼 뭔데?"
"나중에 풀어보시면 아실 거예요… 제가 많이 망가뜨려서, 필요하실까봐…."
지금 풀어보면 안 돼? 라고 그가 물었다. 나는 좀 머뭇거렸다.
그가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더 그랬다. 작은 방에서 두명이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는 것도 우스웠는지, 그가 이럴게 아니라 자리에 앉자, 라고 제안했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사고, 구했던 물건들이었지만… 과연 그가 기뻐할 지를 모르겠는 건 역시 그에 대해 자신감이 없기 때문일까. 천천히 그가 상자의 리본을 풀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
그는 아무말 없이 상자에 든 것을 꺼냈다. 아주 작은 일리아라의 초상이었다.
사실 드네인과 함께 있는 초상화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건 아무리해도 무리였다. 게다가 이리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일리아라의 초상으로 만족했다.
내가 구긴 그의 어머니의 초상. 구하기 힘들긴 했지만 오르제국의 구멍가게 같은 골동품가게에서 운 좋게 2장이나 얻을 수 있었다. 상인 할아버지는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처럼 싸게 팔던 거라 그다지 가치있지는 않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냥 웃돈을 얹어서 샀다.
보존 상태가 좋았고, 무엇보다 그 초상이 전에 다니엘이 들고 있었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소중한 걸 망가뜨렸죠. 어쨌든 보상을 해드리고 싶었고…,"
웅얼웅얼, 변명처럼 중얼거린 내 말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 다니엘은 상자에서 병을 꺼냈다.
"이건… 뭐야?"
"그냥… 모래예요. 오르의 궁에 모래가 있길래."
어쩌면 그가 고국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한번도 못 밟을 그의 고국의 모래를 주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반지는 이리하께서 주신 거예요. …선배님 어머니 것이라고."
사실 이리하에게서 반지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소포를 보내올때, 편지 봉투에 그것을 넣어주었다. 일리아라의 반지라고 적어둔 그의 마음이 조금 궁금해졌지만, 굳이 내게 직접 주지 않았던 것을 고려해서 그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
나는 그냥 미소만 지었다. 그는 천천히 팬던트를 꺼내더니 그 안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을 달라고 한 뒤 펜던트 내부의 조작을 살짝 한뒤 그에게 건넸다.
'달칵.'
펜던트를 열자 두 장 중 하나, 내가 넣어둔 초상화가 나왔다.
"이건 국민들에게 싼 값에 나눠주는 그런거지?"
그가 천천히 그 초상화를 쓰다듬더니 말했다. 나는 네. 하고 작게 대답하고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런 초상화밖에 가지지 못한 그가 안쓰러웠다. 사실은 좀 더…그만의 초상화 였기를 바랐는데.
"난 참 행운아야. 어머니 초상화를 구하려면 구할 수 있어서."
씁쓸한 표정에 나는 아무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건 맞는 말이었지만, 슬픈 말이었다.
"드네인의 약혼반지였데요."
그가 말없이 있다가 그렇군, 이라고 말하더니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었다. 딱 맞았다.
"물론 이리하께 여쭤봤자 아마 모르는 척 하실거지만… 그 분은 그런 입장이잖아요. 당신이 오르안이 되고 싶지 않는한, 괜찮을 거예요."
그는 상자를 꽉 움켜쥐더니 내게 말했다.
"펜던트를 목에 걸어줄래?"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펜던트를 들고 그의 뒤로 가서 그의 목에 그것을 걸었다.
초콜릿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내 손을 스쳤다. 그의 머리색만큼이나 달콤하고 쓰디쓴 감각이 내 손을 타고 올라왔다.
그 느낌을 모른 척 하며 잠금장치를 한 후 다 됐어요. 라고 말했다. 그는 가만히 펜던트를 쥐고 있다가, 옷 안으로 그것을 넣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가서 섰다.
"전할 것 다 전했으니, 이만 갈게요."
"날 좋아하니?"
그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 한 순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진실 외에는, 아무것도 말 하기 싫은 순간이 있다.
"네."
"…바라는 게 있니?"
그 때 순간 아비게일의 약혼이 떠올랐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어요."
"뭐든지 들어줄게… 정말이야. 어떤, 것이라도."
"없어요, 정말로. 그냥… 오래오래 행복하게, 열심히 살아주셨으면 해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은 있지 않을까. 첫 사랑이기 때문에, 당신은 내 첫 사랑이니까 나는 당신을 내 이기심이나 욕심에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당신은 순수하게 내 안에서 지키고 싶고, 보호하고 싶었다. 내 다른 감정이나 상황과는 완전히 별개로… 그저 처음부터 이유없이 좋았으니까. 정말 바보 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나한테 벌어졌고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당신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었다.
내 첫 사랑은 그렇게나 무모했다. 하지만 나는 내 무모함이 좋았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 좋았다.
"만약에 나한테, 어떤 누가 나타나도… 설사 내가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그가 초록색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건 비록 사랑은 아니었지만 신의와 다짐이 굳건히 담겨있는, 어쩌면 기사가 군주에게 바치는 것 같은 맹세의 눈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가 내게 몹시도 단호하게 말했다.
"내겐 네가 첫번째일거다."
그를 바라보았다. 초콜릿 색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 그의 사소한 습관같은 것들… 이 사람은 내 첫사랑이었다. 나는 그를 몹시 좋아해서, 그를 위해 무엇이든 했다. 그에 대한 보답은 사랑은 아니지만 신의였고, 진실된 맹세였다.
첫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이 사람이 너무나 좋아서, 아무 대가가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렇게나 많이 돌려주려고 한 것만으로 큰 선물같이 느껴졌다.
셈이 한참 틀렸는데, 그런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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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이 사람 나오게 해주세여 저 사람 나오게 해주세여!! 남주 얘 시켜주세여 머 이러시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남주 정해져있어요. 앞의 일도 다 정해진 일이므로 그저 즐겨주세여'ㅅ'
언놈이랑 이어질지 모르는게 꿀잼 아니었나여!!!!
그리고 이어진다고 해도 바로 이어지는 게 아니므로 여러분이 안달복달 해봐야... 허허허허허허허ㅓ헣허허 마음만 아프실겁니다.. ...(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