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33화 (33/113)

33화

"라시아!!!!"

이리하의 목소리가 내 귓속을 강타하자 마자, 옆에서 엄청난 압력과 소리가 느껴졌다. 좀 살만 했다하니까, 이렇게 또 죽을 각오를 해야하는 사태라니, 아니, 이번에는 분명히 죽겠지만-

'챙-!!!!!!!'

사람이 죽을 타이밍인가 싶을 때 안 죽으면 자연스럽게 어레, 나 사나보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법이라 슬쩍 눈을 떴다. 자욱한 연기에 제대로 앞을 볼 수 없긴 했지만 일단 멀쩡한 것 같았다.

제대로 감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귀가 멍멍했지만, 그럭저럭 팔 다리도 붙어 있는 것 같고…? 그렇다면 혹시. 가슴 한 켠이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혹시, 혹시.

이리하가 있을 거라 추정되는 방향을 향해 뛰려는 순간 누가 내 팔을 잡았다. 뭐야? 하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닐?"

하닐이 미소를 짓더니 크게 외쳤다.

"레이디 샤펜은 무사하다!!"

"오르안께서도 무사하시다!!! 마법사를 생포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안이 벙벙한 나를 가드하면서 궁 안 쪽으로 하닐이 안내하면서 손수건으로 귀를 막아주었다. 왜 귀를 막나, 했는데 하닐이 귀에서 피나고 있다고 내게 언질을 해줬다.

고막이 상했나보다. 어쩐지 좀 어지럽고 역한 기분이 들었다.

하닐이 나를 부축해서 궁의 방 중 하나로 안내한 후에 대충의 치료를 위해 신관을 불렀다.

"나를 노린게 아니라…오르안을 노린거라고요?"

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하닐을 바라보았다. 내게 신성력을 불어 넣어주고 있던 신관 옆의 하닐이 약간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행 처음에는 보호하기 위해서 베노암측에서 보낸 마법사인줄 알았는데 딱히 레이디를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안 보이더라고요. 레이디께서 가진 물품 중 하나에 좀 관심을 보이더니 또 막상 훔치지는 않아서 뭔가 하고 일단 두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전에 암살 의뢰가 있다는 소문에 혹시나해서 알아봤는데, 딱히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혹시나 싶어서 레이디나 오르안의 호위를 좀 늘린거죠."

"… 저도 호위가 있었어요? 아무도 그런 티 안 내던데."

"호위가 없는 줄 아셨다면 대 성공이네요. 요한은 아직 어리지만 실력자랍니다."

나는 경악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한? 내 시종 요한? 나 따라다니면서 노예 비슷한 역할 한 그 사람?

"요한이요?! 요한 시종 아니에요?!!"

"네. 아니예요. 라젠 강, 이라고 이번에 대결 펼친 사람 기억나시죠? 그 사람 동생이에요. 요한 강이라고 하죠. 요한이나 라젠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귀족인데 그런 일을 해준거니까 다음에 보시면 치하라도 해주셨으면 해서 말씀 드려요."

"맙소사…"

"놀라셨나보네요. 하긴 놀라실만도 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가벼운 타박상으로 끝나서 다행이에요. 오르안 뵐 면목이 없을 뻔 했다니까요."

"… 왜요?"

"오르안께서 혹시 궁극적인 목적이 오르안 당신이 아니라, 레이디일까봐 꽤 신경쓰셨거든요. 마지막에 마법도 연막이 아니라 진짜였으면 사실 큰일날 뻔 했어요."

너무 여러가지 사실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서 급격히 피로해졌다. 그러고보니 오르안도 괜찮다는 말을 멀리서 들은 것 뿐이지 진짜로 괜찮은지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서 약간 불안해졌다.

"이리하께선 그러고보니 괜찮으세요?"

"멀쩡하세요. 레이디께 잠시 정신을 파셔서 저희가 개입하기는 했지만, 사실 저희 도움도 필요없으신 분이니까요."

아. 하긴 그래보이기는 했다. 황가의 사람이 정치보다 오히려 무력을 쓰는 장군에 어울린다니 묘한 일이지만. 무력이나 기타 힘쓰는 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검으로 보통은 뛰어 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저기, 그럼 요한은 더 이상 제 시중을 안 드나요?"

"레이디께서 괜찮으시면 계속 하고 싶다고 요한은 말 하던데요?"

"…미안하지만 됐다고 전해주세요… 불쾌하지 않게. 아무래도 귀족가 집안의 자제에게 계속 제 옷 시중이나 기타 등등을 부탁드리는 건 제 입장에서는 영…. 맨 몸도 다 보인 것 같아 안 그래도 불안한데."

"그런 건 걱정 안하셔도 되는데. 요한은 믿을만한 사람이고 요한이 시중들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없으니까요. 저와 오르안, 요한, 라젠. 이렇게만 알아요. 우선은 요한한테는 됐다고 전할게요."

고맙다고 말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물론 요한이 호위무사역을 했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윌에게서 멀쩡했던 거겠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오르안께서 그 마법사의 처분을 위해 잠시 응접실로 오라고 하셨는데, 가시겠어요? 몸이 괜찮으시면…"

내 몸을 살피던 신관을 바라보자 신관이 약간 망설이더니 말했다.

"피는 멎었지만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신성력이 만능은 아니고, 귀는 워낙 예민한 부분이니까요. 일단은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으신 지 보지요."

얌전히 일어나서 걸어보이자 신관이 몇 군데를 더 살피고 질문을 했는데, 대충 어지럽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어서 괜찮다고 하니 그제서야 다 됐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하닐, 괜찮으면 일단 옷을 좀 갈아입고 가고 싶어요."

하닐과 신관이 방을 나갔고, 나는 옷방에 있는 드레스 중 아무거나 집어든 후 갈아 입고 방을 나섰다. 나서자 요한이 방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식 제복인 듯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있는 그를 보니, 정말 무사태가 나서 솔직히 좀 놀랐다. 그에게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서 애매하게 일단 서 있다가, 말했다.

"저… 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인사가 먼저겠지 싶어서 정식으로 절을 했다.

"아니,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레이디! 죄송합니다.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닌데… 저기, 죄송해요."

그가 곤란한 얼굴로 황급히 나를 만류해서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내 몸을 함부로 보고, 게다가 시중까지 들었던 앙금이 슬쩍 사라졌다. 하기야 저 쪽도 그다지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닐테고.

"아뇨… 공무였던데다 요한을 믿으니까요. 게다가 아직 어리고 괜찮아요. 하고 싶어서 하신 일도 아닐테고."

내가 겨우 웃으면서 말하자 요한의 얼굴이 확, 하고 밝아졌다. 그래, 어쩌겠는가. 다만 이 꼬꼬마 어린이가 내 몸을 평생 잊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혹은 밤에 홀로 침대에 누웠을 때 생각해내지 않기만을 바래야지. 푹, 한숨을 쉬는 내 얼굴이 어지간히 괴로워 보였던지 요한이 약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음… 혹시 신경쓰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제가 레이디의 몸을 봤으니까 말이죠. 걱정하실 필요가 없는 게, 전 좀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답니다."

나는 입을 딱, 하고 벌렸다가 얼른 닫았다. 그리고 말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 말에 온갖 지저분한 상상이 다 날아가서 지금 무척 안심했어요."

요한이 미소를 짓더니, 그럼 이리하께 모셔드릴게요. 라고 말했다. 이리하에게로 가면서 사실 도대체 어떤 취향일까, 라는 의문이 슬쩍 고개를 들었지만, 따로 묻지는 않기로 했다.

로리타 취향일 수도 있고, 피부가 하얀 여자가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 뭐. 요한을 따라 한참 걸어서 얼마 전에 왔었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요한은 같이 들어가지는 않고 내가 앞으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들어가시면 앞으로 레이디를 호위해주실 분이 있을거랍니다."

"이리하께서 저를 호위해주실 건 아닐테고… 요한이 계속 하는 것 아닌가요?"

"하닐이나 그 외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알트라에 들어가는 것에 제한이 심하거든요. 얼마전에 레이디를 덮친 저희 측 사람 문제도 있어서, 아마 더 까다로워질거예요, 당분간은. 그래서 알트라까지 아무 문제없이 호위가 가능한 사람을 레이디의 무사로 발탁했답니다."

요한이 웃으면서 저와 무척 가까운 사이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람보다 더 어린 여자애가 나온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거절하자… 싶어서 네, 그렇군요. 라고는 말하고 별 반응 없이 서 있는 시녀들 쪽으로 다가갔다.

요한이 갑자기 내 팔을 잡더니 잠시만요. 하고 귀를 가까이 하라는 시늉을 했다. 뭐지. 그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자, 요한이 내게 귓속말을 했다.

"레이디, 전혀 제 말을 못 알아들으셨어요. 기묘한 표정도 안 지으시는 걸 보니까 말이죠."

응? 싶어서 그를 바라봤지만, 요한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도대체 쟤는 왜 저럴까, 하고 멍하니 서있는 중에 요한이 궁녀들 쪽에 손짓을 하자, 곧 집무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리하가 느긋하게, 집무실에 있는 소파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내가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면서 그에게 묻자,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대야말로, 괜찮나?"

"저야… 얼굴 베인것 말고는 전혀 다치지도 않았어요."

"지켜주겠다고 한 말이 무색하군. 이거 미안하게 됐어."

"저야말로 지키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사실 저만 아니었어도 그까짓 마법사 잡으실 수 있었을 텐데… 계속 저 신경쓰시면서 싸우셔서 굉장히 죄송했어요."

이리하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내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다가가서 그의 옆에 앉았다. 신관이 치료를 끝내는 것을 바라보다가 나는 말했다.

"그나저나 검술 경지가 상당하신 것 같던데요. 오르안 일하시느라 바쁘셨을텐데, 정말 숨도 안 쉬고 노력하셨나봐요."

이리하가 웃더니 말했다.

"페르게네스 가문의 사람들은 죄다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아마 다니엘 그자도 만만치는 않을거야."

다니엘의 이야기가 그에게서 나와서 좀 의외였다. 다니엘을 자신의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그의 발언에도.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다가 그에게 충동적으로 말했다.

"저는 다니엘을 좋아해요."

이리하의 심홍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이 사람과는 참 많이 눈을 마주치게 되는구나. 마치 깊은 강물 속을 들여다보듯이 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응시했다. 이리하는 손을 흔들어 신관을 물렸다. 신관이 방을 빠져 나가는 소리를 듣고 나는 말을 이었다.

"제 첫사랑이 아마 그 분이겠지요. 그래서 목숨을 구하는 절 보고… 무례한 말이고 제 짐작이지만, 당신의 어머니를 떠올리셨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분은 절 좋아하지 않으세요."

되도록 똑 부러지는 말투로 나는 말을 이어갔다. 고통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사실이자 진실이라 마음이 더 심하게 아프거나 덜 아프지도 않았다.

"그 분은 아마 제가 바라는 방식으로는 아마 절 평생 좋아하지 않으실 거고… 그래서 이리하가 저를 빼앗는다손 쳐도, 그건 빼앗는 게 아니게 되는 일이고, 더불어서."

이리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차분한 얼굴이었고 나도 아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서 그의 다친 손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저는 어떻게 해도 당신의 어머니는 될 수 없어요, 이리하."

과거를 되돌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를 되돌려 거기에서 뭔가를 내가 바꿀 수 있다면, 정말로 얼마나 많은 것이 지금 바뀌어 있을까. 나는 수십 번 그런 것을 상상했다. 만약 이 때. 만약, 만약, 만약에….

하지만 세상은 어째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토록 많은 것들이 정해졌고, 나는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맞았다. 나는 그와 같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고, 우리의 공통점은 무서울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당신도… 당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그리고 다니엘의 아버지가 했던 일들을 고칠 수는 없을 거예요."

내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만큼, 꼭 그만큼 당신도 과거를 어찌할 수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 어린 시절로 돌아가도 우리는 아마 이 미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손에서 벗어난 일들이기 때문이라는, 그 단순하고 처참한 진실 때문에.

그의 손이 내 손을 억세게 잡았다. 너는 사랑을 모르되 질투는 아는 자이며, 받음은 모르되 빼앗음은 아는 자다.

"다니엘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가지고 싶다는 것은, 진짜 당신이 바라던 게 아니에요. 저는 … 당신이 바라는 돌조각이 아닌, 그 천금 중 하나에 불과해요."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다른 비유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리하가 돌맹이와 천금을 비유해서 스스로를 보석에 비유하게 되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다 있나.

"또한, 저는 공작가의 후계자가 됩니다, 이리하. 그러니 저는 당신의 비가 될 수 없습니다. 될 마음도 없고요."

고개를 들어 이리하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마 당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좋아함은 진실되지 아니하고, 나를 가지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하가 심홍색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견 간절해보이기도 했고, 또한 잔인해보이기도 했다. 숨을 멎게 하는, 황량한 사막에서 자란 사람. 인간이기보단 차라리 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사내의 고고한 아름다움에 가만히 그 눈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 사람에게 잔인해질 수 있을까.

"내가 그대를 가질 수 있음은 알고 있겠지."

혹은, 이 사람이 내게 잔인해질 수 있을까. 그가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고정시키던 비녀를 뽑았다. 스르륵, 하고 내 금색 머리카락이 와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쇼파 앞에 서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이리하, 무릎을,"

내가 그를 일으키려하자, 이리하는 내 손을 막더니 내 머리카락 끝을 잡았다. 나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그의 행동을 제지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의 행동에서 뿜어나오는 분위기가 무서우리만치 차가웠기 때문이다. 나는 멈칫해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내가 위에서 앉아있고, 그는 내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나는 위협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는 내가 원한다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한가보군."

순간 든 생각에 그를 빤히 바라봤다. 어쩌면 사펜의 후계자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내게 기회인가. 샤펜의 후계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지금이 때였다. 그냥 입을 열어서, 그렇다면 가져가라고. 나를 주겠다고-.

"그대를 내 샤하레로 요구하는 건 쉬운일이지. …그게 아직 임명되지도 않은 후계자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보다 우선되는 건 당연한거 아니겠나? 아직 베노암에서 우리와 전쟁을 치룰 시기가 아니라면 말이지."

그는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 그대로 내 눈을 응시했다. 사실은 좀 놀라기도 했다.

그냥 비가 아닌, 샤하레라는 말을 그가 꺼냈기 때문에.그리고 잠시 이 순간, 그에게 말한다면... 그렇다면 내 인생이 샤펜의 개입으로 한 순간에 바뀐 것 처럼, 또 그렇게 바뀔 수 잇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심홍색 눈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그게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인가? 이 길이 진정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일까. 나는 이, 나를 제대로 사랑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을 핑계로, 또는 더 심한 구속과 책임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그의 제안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말했다.

"샤펜의 공작위를 바라나?"

"여우가 무섭다고 호랑이에게 갈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러자 그가 비유가 좋군, 하며 웃었다.

"그리고 이리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쥐고 있는 손을 잡아끌어 내 머리에서 떨어트렸다. 조심스럽게 떨어지는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나는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당신의 사랑을 진실하게도 느낄 수 없어요. 저를 가지고 싶은 것은 사랑이 아니고 당신에게 만족을 가져다 주지도 않을 거예요. 어리석은 일이고, 나와 당신 모두를 불행에 빠트리는 일일 뿐입니다."

"그대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나? 혹시 아나, 내가 그대에게 정신 못차리고 홀랑 빠져서 이것저것 다 해줄지. 뭐 역으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게 될 수도 있고. 그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어. 솔직히 나야 아무 상관없어. 지금이라도 당장 그대를 억류한 다음 베노암 제국에 샤하레로 그대를 원한다고 말하면, 아마 페레일라 다마스 렘바로오프가 당장에 발벗고 샤펜가의 후계자 문제를 해결해주리란걸 알고 있지, 나는."

그 깨끗해 보이는 눈이 말하는 잔혹함에 입을 다물었다. 내 말 따위는 콧등으로도 안 듣고 계시는군.

페레일라 다마스 렘바로오프는 베노암의 황녀다. 현재 미혼인 그녀는 다양한 나라에서 약혼제의가 들어오지만, 가장 이상적인 혼처가 바로 이 오르제국의 샤하레 자리다. 하지만 페레일라는 상당한 권력욕이 있는 편이라, 베노암제국의 주인이 되지 못할 경우 오르제국의 샤하레가 된다면, 그저 여자로서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는 삶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동생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였다. 현재 여왕이 있는 나라도, 여황이 있는 나라도 없는 황자 페이 다마스 렘바로오프가 황제가 안 된다면 공작이 되거나 후작이 될 뿐이니까.

"원하시는 게 뭔가요?"

"드디어 말이 통하는군."

화사하게 웃는 이리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말했다.

"가끔 찾아와."

"네? 어딜요? 여길요?"

내가 어떻게 여길 찾아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이리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법사가 그대의 구두가 재밌는 거라고 알려주던데."

죽을 때까지 도움 하나 안 되는 인간이구만. 한숨을 내쉬면서 잡힌 손을 빼려고 했더니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허락할 때까진 안 놔줄래."

이, 이 사람이 왜 이래. 손을 흔들면서 빼도 아까의 무서운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몹시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협박하시던 분 어디로 갔어요!"

"여기 있지."

"… 정말, 뵙고 싶으면 찾아올게요."

"그대는 1년에 한 번쯤 내가 보고 싶을텐데, 내가 뭘 믿고 그대를 기다리나?"

끙.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살살 꼬셔서 최대한 덜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간단한 마법 도구로 해결이 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정말정말 제가 보고 싶으실 때 연락할 수 있는 도구를 마법사에게 만들어달라고 하는 것 쯤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리하? 저는 과제도 있고 수업도 있고 시험도 있는 바쁜 학생이라서 말이예요. 이리하께서도 살인적인 스케줄이 있으실테고."

이리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앉더니 흠. 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주일에 한 번으로 살살 꼬셔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일주일에 한 번은 무리야.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후 얼른 말을 돌렸다.

"저한테 누구 소개시켜주신다고 안 하셨던가요."

그러자 그가 아. 하더니 잡은 손을 쥐고는 나를 일으켰다. 굳이 이런 스킨쉽을 하시지 않아도. 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뭐 이렇게 사소한 걸로 내외해봤자 신경쓰는 걸 들키는 것 밖에 안 되고. 안 쪽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이리하는 내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여기 이리하의 집무실 아닌가? 왜 노크를..

곧 문이 열렸다. 순간 번져오는 피 냄새에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하자, 이리하가 내 손을 꽉 쥐었다.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리하는 내게 어떤 말도 해 주지 않고 그냥 방 안으로 들어갔다.

"라젠."

"… 두 분, 오셨습니까."

라젠 강 이었다. 그는 칠흑색 머리카락에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밀빛 피부에 이리하와 비슷하게 키가 컸다. 나는 그가 칼을 들고 있고, 그 칼에 선명하게 남은것이 피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그의 주변으로 몇구의 시체가 있었다. 담담한 척 했지만, 사실 이렇게 많은 시체를 본 것은 처음이라 솔직히 꽤 놀랐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코를 틀어막으려고 하다가 어쩌면 그에게 실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얌전히 떨리는 손을 그저 세게 주먹 쥐었다.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사람을 죽인 것 치고는 꽤나 순진한 반응이라고 나는 스스로 자조했다. 이리하가 내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그에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 시신들에게서 시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 쪽은 라젠 강, 그대가 알트라까지 가는 길을 지켜줄 사람이지. 어차피 사관학교 학생이라 알트라에 가야하는 길인데다 그는 그대가 봤다시피 뛰어난 실력자이기도 하니, 그대를 잘 보살펴줄거야."

라젠 강은 내게 베노암 식으로 절을 했다. 내 신분이 그보다 딱히 높지 않았으므로, 나는 얼른 절을 하면서 말했다.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록진."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디 샤펜."

이리하는 라젠에게 그만 나가봐도 좋아. 라고 말한 후 쓰러져있는 시체들을 지나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나는 라젠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난 후 그에게 말했다.

"구두면 금방 가서 호위는 필요 없는데요..."

"내 호의니 받아둬. 나도 사실 다른 남자 호위를 받는 그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지만, 라젠은 믿을만 하니까. 게다가 그대의 구두는 알려져봤자 그다지 좋을 일이 없을 것 같군."

애매하게 미소지은 후, 일단 나가면 안될까요, 이리하? 라고 물었다. 이리하는 아, 하더니 나와 함께 방을 빠져나왔다. 집무실에 들어온 자객은 호위무사에게 맡기고 문 하나 사이를 두고 여유롭게 나를 맞이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저 라젠이라는 무사를 믿는지 알 수 있었다. 또 그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말이다.

이쯤 되어서야 윌 사비엥이 정말로 살아있다는 가능성이라고는 한 톨도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을 살려 놓을 사람이 아니다. … 다니엘의 경우만이 예외였을 뿐이지.

============================ 작품 후기 ============================

다니엘은 제 최애지만.ㅎㅎㅎㅎㅎ 그렇다고 남주란 법은 없지여 머..

오늘은 그리고 이리하의 강화기였습니다.. 오 .. 이리하... (무릎털썩)제가 진짜 매력 강화에는 일인자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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