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29화 (29/113)

29화

생각해보니 베노암의 궁에도 발 한 번 디뎌본 적이 없는데, 오르 제국의 궁에서는 잠도 자고 일어나다니 어찌 보면 참 묘한 일이다. 멍하니 일어나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데 기침하셨느냐며 어떤 여성이 들어와 차를 내줬다.

특이한 향의 차였는데, 일당 생긴 것부터가 맑은 물 안에 초록색 잎을 꽉꽉, 그대로 채워줘서 사실 좀 거부감 들었는데, 마시다 보니 독특한 향… 뭐랄까, 상큼하다고 할까, 홧홧한 느낌이라고 할까… 하여간 그런 향이 났다.

어쨌든 처음 마시는 거라 맛이 이상하기도 하고 마셔보니 달기도해서 다시 내려놓고, 향이 좋아서 다시 맡다가 다시 마셔보고 맛은 여전히 이상하기도하고, 달기도해서 내려놓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나중엔 완전히 좋아져서 오르에 있는 내내 마시게 됐다. 그렇게 침대에서 차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자니, 요한이 엎드린 상태로 기침하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오르안께서 건강이 괜찮으시다면 오찬을 함께 하실 생각이 없으시냐고 여쭈셨답니다."

"오찬이면 점심식사죠? 아침이 아니었네요. …보통 어떻게 진행되나요?"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시면 됩니다. 오르안께서는 오르제국의 예의범절을 모를거라고 누구도 따로 초대하지 않으셨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많이 지치셨는지 지금이 마침 오찬의 한 시간 전이라, 참여하시기 위해 준비를 시작하셔야 할 때입니다."

"… 그 말은 저와 오르안 단 둘만 있을 거라는 뜻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괜찮으시면 이제 궁궐예복을 입혀드리고 싶습니다만."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옷을 바라봤다. 난 내가 당연히, 당연히 내가 기절했을 때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요한 하나만 물어도 되나요?"

"하문하십시오."

"제 옷…요한이 갈아입혔나요?"

요한은 엎드린 그 자세 그대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레이디."

나는 아무 말 없이 한숨을 쉬었다. 시집을 다갔다고 해야 하나, 반만 갔다고 해야 하나. 화를 낼 수도 없고 안 낼 수도 없는 이 미묘한 상황. 이런 게 문화적 차이구나. 문화적…

"…궁궐예복 준비해주세요, 요한."

요한은 작게 목을 숙이더니 허리를 숙인상태도 조심스레 이동해서 옆방으로 들어갔다. 거기가 옷 방인가보다.

일단 여자 시종으로 바꿔달라고 말이나 해볼까. 아무래도 이건 문화적 차이라는 말로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다.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남자가 내 옷을 갈아입혔다니… 소름 돋아. 물론 요한이 싫거나 하진 않지만 말이다.

일단 말 한번 해봐야겠네.

일단 넓다 못해 운동장 삼아도 될 만한 침대에서 최대한 우아하게 나갈 방법을 고민하다가 이건 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요한이 나간 틈에 재빨리 낑낑대며 침대 속에서 빠져나왔다. 거울이 있기에 오르제국의 잠옷을 구경하고 싶어서 앞에 한 번 서봤다.

이 실은 실크인가? 나는 내 치맛자락을 만져봤다. 무늬가 없었지만 살랑살랑한 느낌에 만지자 무척 매끄러운 것이 기분이 좋았다.

레이스도 섬세하게 달려있었다. 이건 꽤 베노암제국이랑 비슷하네. 요한이 옷 방에서 나오더니 다시 엎드려서 내게 말했다.

나는 사실 그의 그 행동이 부담스러워서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게 그나 나에게 나쁜 소리를 듣게 할까봐 뭐라고 하지 못했다.

"레이디, 옷이 준비되었습니다. 입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요한. 제가 요한에게 약식으로 이 예를 취하라고 하면 그건 큰 무례일까요? 오르쪽에서 생각하면 말이에요."

"아닙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는 건 좋게 보이시지 않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시는 게 싫으시더라도 오르안께 그에 관한 설명을 들으신 후에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긴 괜히 베노암식으로 마음대로 한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혹은 요한이 그걸 내게 알려 줬다는게 알려지면 서로 좋을 게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가 내 행동을 못 본다는 생각에 얼른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음… 옷은 저 혼자 입을까요?"

"몸을 보이는 게 저어되신다면 이 속의 옷을 먼저 입으시고 나오시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실 혼자 입으시는 게 편하실 것 같지만, 레이디께서 혹여 못 입으실까봐…"

나는 가만히 옷걸이에 걸린 옷을 보다가 말했다.

"솔직히 정말로 저걸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할게요. 속의 옷은 이거지요?… 저기, 몸을 보이는 걸 꺼리는 건 우리나라 관습 때문이지, 절대로 요한이 곤란을 겪는 걸 원해서는 아니에요."

"압니다, 레이디."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것도 요한이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 알리지 할까 하다가 그냥 속의 옷을 들고 옷 방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무척 기뻐요, 요한."

요한이 어쩐지 웃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알 수가 있나. 그는 시종일관 땅만 바라봤다. 나는 그의 눈을 궁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마치 그가 정말 사람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있는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좀 더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나는 고개를 저은 후 얼른 옷 방에 들어가서 잠옷을 벗은 후 안에 입는 옷을 입었다.

적당히 마무리를 한 후 나가자 요한이 내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와줬다.

거울을 보니 꽤 그럴싸하게 오르제국의 책에서나 본 정식 예복차림이었고, 내가 보기에 나는 이 옷이 참 잘 어울려서 단순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요한이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 주었고 나는 웃으면서 방을 나섰다. 내가 문을 나서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안내해 드리고자 합니다."

오르의 궁은 기본적으로 그늘이 있는 모양새였다. 햇빛이 강해서인가?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서 느긋하게 걸어갔다. 제국의 황실에서는 상당히 쉽게 궁녀를 볼 수 있는데, 이 곳에서는 반대로 개미 한 마리 찾기 힘들었다. 너무 흘끔거리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그냥 그녀의 등만 보고 허리를 펴고 걸었다.

딱 봐도 호화로워 보이는 방문 앞에서야 그녀가 이 곳입니다, 라고 내게 언질해주었다. 저절로 긴장되어서 호흡을 가만히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녀가 손짓했고 마치 마법처럼 문이 스르르 열렸다.

떨리는 손끝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치마를 한 쪽으로 잡고 베노암식으로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왼쪽 다리를 뒤로 가져가서 굽힌 후, 허리를 숙이는 절을 한 후 말했다.

"오르제국의 유일무이한 오르안, 이리하 셀리이아 페르게네스를 베노암제국의 샤펜공작가의 둘째 딸인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이 뵙습니다. 오르엘 여신의 품속에 초대해주셔서 큰 영광입니다."

그는 느긋하게 누운 상태 그대로 움직임 없이 나를 바라보는 듯 했다. 나는 예의를 차린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베노암 국의 인사는 이런 상태로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데, 사실 눈을 감고 나서부터 보통 균형 잡기 힘든 게 아니었다. 그가 내 상태를 풀어주지 않아서 나는 상당시간 위태로운 자세로 있었다.

"비쥬하지는 않나?"

나는 그의 말에 드디어, 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똑바로 서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오르안 이시니까요."

"그 때 나는 오르안이 아니었나?"

"그 때는 사절대상이셨고요."

그가 손끝으로 나를 불렀다. 별 생각 없이 조심스레 그 쪽으로 다가가자 뒤에 문이 조용히 닫혔다. 무심코 뒤를 바라보려하다가 이리하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있는 공간은 특이했다. 일단 소파라던가 하는 일체의 가구가 없었고, 두꺼운 카펫과 방석, 쿠션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내게는 무척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베노암과는 달리 테라스로 보이는 공간이 연결되어 있어서 햇빛이며 바람이 그대로 들어왔다. 사실 모래가 섞이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되었지만, 몰랐는데 건물 자체가 높아서 의외로 공기도 깨끗했고, 시야가 탁트여있어서 먼 곳까지 한 눈에 보였기 때문에 마음이 저절로 넓어지는 것 같았다.

"앉지. 오찬을 준비했으니까. 오르안 식이야. 여행은 즐거웠나? 하닐들이 그대가 매우 신나서 돌아다녔다고 하던데."

"네. 운이 좋아서 랄캄의 전경도 볼 수 있었고, 하늘의 별들이 막 떨어지는 것도 사막에서 볼 수 있었어요. 낮의 하늘, 밤의 하늘, 새벽의 하늘… 사막에서는 하늘이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한 송이의 꽃도 가치 있게 느껴지는 곳이라 하나하나가 모두 인상적이었답니다. 신전의 조각도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분수도 있더라고요!"

이리하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짓더니 내게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그가 인도하는 푹신한 방석위에 앉았다.

부드러운 카펫위에는 방석이 두개 있었지만, 이리하는 안쪽의 누울 수 있는 곳에 있었다. 나는 그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최대한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앞에는 아침에 마셨던 차가 있었다. 찻잔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 차구나! 하고 생각을 해서 얼른 주전자를 찾았다.

과연 오르제국답게 내가 처음 보는 형태의 주전자가 있었지만, 솔직히 내가 이 주전자를 건드려도 될 지 의문이라서 먼저 관심을 표해보기로 했다.

"이 차의 이름이 뭔지 여쭤도 될까요? 아주 인상적인 차라서요."

"민트티. 내 나라에서 아주 많이 마시는 차지. 마음에 드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오려나 보다, 싶어서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유난히 남성적 카리스마가 넘쳐나는 사람이라 이 사람과 단 둘이 있다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괜스레 차 시중을 들러 오는 여종이 더 반가웠다. 여종이 다가오더니 향로에 불을 피워서 차를 끓였다.

기대하던 화한 향이 아니라서 신기했지만,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차가 팔팔 끓자 그녀는 차에다 설탕을 한 조각 넣었다.

생각보다 많이 넣네. 그러더니 잔을 따라서 컵에 붓고는 작은 다기에서 아침의 그 녹색 잎을 꺼내 그 안에 넣더니 다시 끓이고 첫 잔을 다시 주전자에 부었다. 곧 나는 향긋한 냄새가 마음에 쏙 들었다.

이걸 민트라고 하는구나.

그 후에 첫잔을 이리하의 잔에 한 잔, 내 잔에 한 잔 따라 주었다. 굉장히 높이서 따랐는데,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솜씨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미묘하게 아침의 것과는 맛이 달랐지만, 둘 다 무척 독특하고 맛있어서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묘한 차이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아침의 차에는 분명 민트잎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무척 독특하고 신기했는데, 지금의 차는 민트의 색깔만 있을 뿐, 찻잎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아침의 것에는 잎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만드는 거랍니다. 보통 아침에 끓여내고 이런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우려냅니다만, 레이디께서 아직 어떤 방식을 좋아하실지 몰라 저희 측에서 이렇게 해드리는 거랍니다. 아침에 우려낸 것 또한 제 솜씨였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이리하가 느긋하게 차를 마시더니 말했다.

"황가의 차를 만드는 여인, 우르암샤라고 한다."

"반가워요, 우르암샤. 아침의 차가 무척이나 향기롭고 좋아서, 단숨에 이 차를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사실 이 찻잔을 보고 무척 기대했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내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은 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상하기도 했던 것은 이 맛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였는데, 몇 모금 더 마시다보니 어렴풋이 시원한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도 이런 시원하면서 달콤한 차를 마셔본 적이 없어서 이 나라를 떠나면 이 차가 무척 아쉬워질 것 같았다.

"맛있어요."

"마음에 든다면 다행이군. 내 나라에 있으면서 이 차를 마시지 못하는 건 끔찍한 일이야. 아침 점심 저녁.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것 없이 있는 차니까."

그건 괜찮을 것 같네요. 하며 나는 웃었다. 우르암샤는 차를 다 끓였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가지 마세요. 저절로 목소리가 나오려고 했지만 영 체신머리 없어 보여서 꾹 참고 그녀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나가자마자 음식이 들어와 또 안심했다. 하지만 내 고민을 비웃듯이 몹시 느긋하면서도 가벼운 태도로 이리하는 방석에 앉아서 내게 음식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어떻게 먹는 건지 말해줬다.

사실 살아있는 신과 같은 사람이라 솔직히 함께 시간을 보내기 편하지는 않겠다, 체하겠다, 뭐 이런 각오를 하고 온 거였는데 그는 그다지 자신의 권위에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는 사람인지, 내가 내 나이 또래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굉장히 어려운 일일테지. 덕에 정말로 편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굉장히 맛있게 음식을 많이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느긋하게 차를 다시 마신 후, 오르안이 종을 흔들자 종들이 음식들을 모두 치우고 나갔다. 그들 모두 물론 나와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내가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우르암샤는 출신이 어떻게 되나요?"

"대공의 부인이지. 가장 차를 잘 끓이는 귀부인이라 황실의 차 여인이 되었어. 이건 그대의 나라와 비슷하나?"

나는 차를 끓이는 전문 여성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하면서 웃었다. 이게 다고 이제 내 방으로 돌아가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른 종 몇 명이 들어오더니 방석과는 또 다른 것을 들고 왔다. 방석보다는 훨씬 더 길고… 푹신푹신 해보였다. 그래, 마치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이리하가 있었던 곳의 것과 같은.

종들이 그걸 차려주고 나가자, 이리하가 나른하게 일어섰다. 방석에서 앉아있던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왔는데, 아까까지의 풀어져있던 분위기에 긴장을 풀고 있던 나는 순식간에 몸을 웅크리다시피 하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리하는 앉아있을 때와 서있을 때의 갭이 컸다. 나른하고 묵직한, 어찌 보면 게을러 보이던 모습이 사라지고 몹시 늘씬하고 재빠르고 잔인한 전사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와 닮은 게 있는데,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서 거기에 집중하며 긴장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다가오는 그의 걸음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촉을 세우는 내가 그도 느껴졌던지 이리하가 입을 열었다.

"여성 손님을 오찬에 대접할 때 하는 관례가 있어서 하려고 하는 거니, 너무 긴장하지 마."

그러더니 그가 내 앞에 해를 등지고서 섰다. 나는 일어설까 어쩔까를 고민하며 가만히 있었는데 그는 일어설 필요가 없다는 듯이 허리를 천천히 숙이면서 손을 뻗어 내 왼쪽 턱을 잡았다. 왼손잡이인가…?

"어떤 관례인데요?"

기세 싸움에 밀리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것도 없을뿐더러, 그가 나를 여기에서 겁간할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겨우 입을 떼자, 그는 그냥 웃었다. 그러더니 다가와 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촉.'

닿은 입술에 순간 얼어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했다.

"오르엘의 축복을 받기를, 나의 귀빈. 오수가 즐겁기를 바라네."

오수?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그에게 다시 물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햇빛이 순간 너무 눈부셔서 나는 인상을 썼다.

…마침 그의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의 행동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나는 알아냈다.

사자. …그는 사자를 닮았다.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 나는 시선을 피하고 그가 내게서 떨어지고 난 이후에 물었다.

"오수라뇨? 오수라면, 낮잠이요?"

"누구도 그대에게 오찬에 오수가 포함 되어있다는 걸 가르쳐주지 않았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찬에 왜 낮잠을 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시각 이후로 두어 시간은 도저히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더위가 지속되지. 그대가 일사병으로 다시 한 번 쓰러지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내가 초대한 손님이 다시 비실대는 꼴은 못 보겠으니, 얌전히 이 시각에는 잠을 자는 걸 추천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오찬에 오수가 포함 되어있는 거예요?"

그러자 이리하가 느긋하게 내 손을 이끌어 푹신한 쿠션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이동하면서도 불만이 가득했다. 왜! 왜 아무도 말을 안 해줬단 말인가! 그랬으면 그냥 몸이 안 좋다고 말 할걸!!!

"초대한 손님을 가장 더운 시각에 바깥으로 보내는 짓은 매우 무례한 일이지. 그래서 오찬은 거의 오수를 포함하고 진행하는 게 내 나라의 문화야. 하긴 아무도 말을 안 해줬을 법도 하지. 시종들에게 이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테니까."

맙소사. 그래서 난 이 남자랑 2시간동안 달랑 둘이서 잠을 자야 한다고?!! 뭘 믿고 대체 이 나라는 이런 관습을 만든단 말인가?

"오르안의 나라에는 남녀를 이렇게 단 둘이서만 두는 법도 있습니까?"

"보통 부부가 함께. 미혼여성이 그 집에 혼자 초대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약혼자나 연인의 집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그럼 저는 오르안의 초대되지 약혼녀도, 연인도 아닌데 왜.."

"그리고 이 모든 법칙에 오르안은 제외야. 난 신의 아들이자 남편이지. 내겐 모든 것이 예외이자 모든 것이 법칙이야. 게다가 아무도 그대가 내게 겁탈 당했을거라 생각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나."

나는 기가 막혀서 한숨을 쉬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대는 내 귀빈이야. 손님에게 그런 무뢰한과 같은 짓을 하는 자는 드물다네. 그리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것 같은데, 그대.”

그가 웃었다. 그건 분명히 농담섞인 비웃음이었다.

"내가 그대에게 그런 일을 할 것 같다고 생각하나?"

내가 어디가 어때서. 솔직히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반박하고 싶어서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어리석은 일 같아서 그만뒀다.

그가 내게 얇은 이불을 건네줬다. 그러더니 느긋하게 하품을 하고는 자신이 쓰고 있던 몇 가지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떼어내더니 대충 아무데나 던졌다. 남자치고는 긴 초콜릿 색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서 거친 분위기를 냈다.

사실 그다지 남자의 긴 머리카락을 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는…. 나도 모르게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조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저은 뒤에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름다운 황금의 장식과 섬세한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햇볕이 걸음을 늘이는 것을 보았다. 뒤척거리면서 테라스 쪽으로 몸을 웅크리자, 테라스 바깥에서 태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펄럭, 하고 휘장이 날려서 잠시 태양을 가렸다.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무척 더울텐데, 습도가 전혀 없어서 불쾌하지 않았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분…

바람이 순간, 불었다.

"뭐라고 하면서 잔 것치고는 굉장히 잘 자던데."

눈을 번쩍 떴다. 엄마야. 벌떡 몸을 일으키자 이리하는 킥킥 웃더니 자신이 떨어트린 장식품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맨발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급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을 다듬으면서 잠버릇이 나쁘지 않은 스스로에게 감사했다. 으, 얼마 전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겨우 눈을 비비고 그를 바라보자, 씨익 웃으면서 그가 말했다.

"잘 잤나, 라시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잘 잤답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그가 자신의 턱을 문지르더니 내게 말했다.

"그대는 생각보다 솔직해서 재미가 없단 말이지."

"하하.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가 내 앞에 느긋하게 한 쪽 다리를 세우고 한 쪽 다리는 굽힌 상태로 앉더니 말했다.

"재미가 없다는 소리에 감사하다?"

나는 말을 고르면서 나를 어떤 미지의 생명체처럼 가만히 관찰하는 심홍색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적막에 오히려 침묵이 더 길어졌다… 흐트러진 이불을 가만히 쥐면서 아무렇게나 내 앞에 서 있는, 잘못 된 대답을 내밀면 철퇴를 내리는 전설 속의 조각 같은 상대에게 대답을 말했다.

“사자에게 먹잇감은 흥미로운 존재지요.”

그러자 그가 눈을 움직이면서 살짝, 아주 살짝 웃었다. 입술 끝이 올라간 얼굴로 내 코 앞에 존재하는 그야말로 이 곳의 옷이 가장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전혀 닮지 않은, 잔혹한 피가 흐르는 진한 피부색의 황제.

“아까의 말은 취소하지.”

남자가 손끝으로 내 턱을 툭, 하니 받쳤다. 햇볕에 오히려 그늘이 진 것처럼 보이는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웃었다.

“그대는 재미있어.”

배부른 사자는 먹잇감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고 한다. 음영진 눈 안에 빛, 그 안에 비치는 내 모습은 어딘가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고, 아예 무감동해보이기도 했다.

“하긴 요르펜 공자를 위해 나한테 덤벼들었을 때부터, 그대는 재미있었지만.”

어째서? 머리 안에 커다란 글자가 불안하게 떠다녔다. 왜, 내가 재미가 있었을까. 도대체 무엇으로 나는 이 사람에게 초대할 마음을 들게 한 걸까.

“하지만 그대를 부른 게 고작 관광이나 주려는 거였다면, 그대가 오히려 실망할거야. 그렇지 않은가. 수작질하려고 부른 건 아니니, 안심해도 돼."

그가 그렇게 명확히 해줘서 오히려 안심이 된 나는 장난기가 돌아서 눈웃음을 치고 말했다.

"저는 제가 알트라 정문에서 했던 제안에 오르안께서 꽤 끌려서 이런 일을 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이리하가 가만히 표정을 지우고 턱을 쥔 손에 힘을 쥐더니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급격히 다가오는 얼굴에 저절로 헉, 하고 몸을 뒤로 젖혔지만 손 힘이 몹시도 억세서 눈가가 파르르 떨릴 정도의 힘 싸움이 벌어질 뿐이었다.

"정말 그렇다면?"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표정을 그대로 내보였다. 이리하는 그 때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소리를 내 웃으며 내 턱을 놔주었다. 턱이 얼얼해지는 아픔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붉어져서 고개를 돌렸다. 이유를 모르는 패배감에 몹시도 기분이 상했다.

"그대가 그대의 나라의 마법사 자랑을 하기에, 나도 보여주고 싶은 게 생겼어. 내일 오후에 즐거운 일이 있을 거야. 그대가 오늘 나를 이렇게 즐겁게 해줬으니, 내 특별히 옷을 하사하도록 하지.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아, 라시아. 그렇지?"

거절할 명분은커녕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황제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으시다니, 즐겁지 않더라도 관람하는 수밖에.

"어떤 옷을 보내실지 기대가 되는군요, 오르안이시여."

그러자 그가 몹시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리하라고 부르라니까. 저번에 말했었지만."

그리고 그가 내 앞에서 일어나 그럼 먼저 나가지, 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머리를 숙이고 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이상하게 저 남자에게는 꼭 이기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놀랐다. 이리하는 내가 싸울 대상이 아니었다.

경계하고 떠봐야하는 대상이었지. 신분이 다른 건 둘째 치고, 상대가 안 되는 자였기 때문이다.

만약 다니엘이 가능성이 있는 패였다면, 아마 오래전부터 오히려 요르펜가에서 오르제국에 관한 일을 추진하고 있었을 거다. 다만, 오르제국의 이리하의 입지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강하고, 단단하게 세워지고 있어서 못했을 뿐이다. 내가 베노암 정부라면 그의 치세 기간의 업적을 인정해서 콩고물을 얻어먹겠어. 사실 다니엘이 그에게 귀찮은 존재 정도밖에 안 되니 겨우 내 말을 들어준 거지, 진짜 귀찮음 수준이 아니라 위험이었다면, 내가 뭐라고… 암살해버리고 말 일을. 요는, 그는 만만한 남자가 아니었고, 싸워봤자 본전도 못 찾을 대상의 상위권에 위치되어 있는 사람인데, 왜 나한테 이런 눈에 보이는 도발을 해대는 지였다.

나도 거기에 왜 응하는 건지.

넘어가지 말자, 넘어가지 말자고, 나는 그의 얼굴을 머리에서 지우면서 생각했다. 하다못해 그 머리카락 색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다니엘이랑 이상하게 닮아서 방심하고 막 대하게 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리하의 ★섹도시발☆

아 섹시 도발 말입니다

뀨.. 저 글자 넘 많져 .. 읽기 힘들져....(시무룩) 알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