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기욤이 나를 느긋하게 신전 안으로 이끌었다. 들어어오자마자 이색적인 풍경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세상에."
"오시는 분들마다 그러시더군요. 확실히 이런 양식은 저희쪽에서는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양식이긴 합니다."
천장에 빼곡하게 새겨진 조각은 분명 신전 바깥에서는 볼 수 없었던 베노암제국의 형식이었다. 사람의 형태가 분명하고 보다 부드러운 형태의 이상적인 조각이 틈 없이 맞물려 있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베노암 형식이라면 분명 내용이 들어가 있을텐데…
"내용은 뭔가요? 오르엘께서 물을 전해주는 것 같긴 한데…"
"정확히 보셨습니다. 여신께서 최초의 오르안에게 물을 주는 장면입니다. 사실 저는 이 조각을 처음 봤을 때 좀 충격 받았습니다. 사람을 상당히 동일한 형태로 그린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놀라셨을 거 같아요. 저도 오르제국의 책에서 한 번 그림양식을 본 적이 있는데, 상당히 신기하더라고요. 붓 하나로 모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나의 붓인데 굵은 선이며 엷은 선이며, 색감도 무척 달랐고요. 처음에는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명암도 있고, 막 튀어나올 것 같아 보이는 장면들도 있고요. 자연을 그린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희는 사람을 주로 그리기보다는 자연을 그리는 경우가 많답니다. 사람을 하나 끼워두는 정도라고 할까요. 옆에는 오르형식으로 벽화를 그려뒀답니다. 보러 가시겠어요?”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이 이끄는대로 총총이 걸어갔다. 신전이 생각보다 굉장히 커서 하루 종일 다녀도 모자랐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랄캄시의 청사 안 손님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다우닌과 요한은 내일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갔고 나는 하닐, 기욤과 함께 머물 곳에 먼저 가 쉬기로 했다.
사실 나는 필요한 물건이 뭘까 싶어서 따라가고 싶었지만, 돈을 쓰는걸 보게 하는 건 국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다들 뜯어말려서 그만 뒀다.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도 꽤 늦은 시간이라서 레이디를 말린 거랍니다."
"지금이요? 별로 어둡지 않은데…"
"우리나라가 원래 그렇답니다. 지내다보면 아시겠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급격하게 밤이 빨리 찾아오는데, 낮은 덥고 밤은 얼음장같이 싸늘해서 레이디의 지금 옷가지로는 무리가 있어요."
"그러면 요한이랑 다우닌은 괜찮은가요?"
"두 사람은 괜찮을 겁니다. 걸음을 좀 빨리 하셔야겠습니다. 이 랄캄에는 놓치면 후회하실만한 것이 있답니다."
"뭔데요?"
"따라오시면 압니다. 입으신 망토는 편안하십니까? 사실 사이즈가 좀 애매해서 걱정이었습니다만…"
"무척 폭신폭신해요. 사이즈도 딱 맞고요."
"가볍지요? 산양망토랍니다."
산양이라니, 베노암에서는 산양은 잘 쓰지 않아서 나로서는 첫 산양망토였는데, 엄청 가벼웠다. 가볍고, 따뜻하고, 폭신하게 나를 감싸는 망토에 단숨에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좀 어린애 같지만 빙그르르~하고 돌아보고 싶었을 정도로, 참자, 라시아. 네 나이가 몇인데.
"굉장히 좋아요. 이런 거 하나 사고 싶네요."
"황족의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는 토라 산양망토입니다. 오르안께서 준비해주신 거죠."
황족의 상… 사는 건 둘째 치고 상당히 질려서 물었다.
"이건 오르안의 초대면 누구나 해주시는 거겠죠?"
"네, 그러니 가볍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왜 이 망토가 황족의 상징이에요?"
"토라 산양이 귀하기 때문이지요. 귀한 진상품 중에 하나랍니다."
사실 요한, 다우닌과 헤어질 때만 해도 망토니 부츠니, 대체 이걸 왜 입히나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유를 알겠다. 밤이 되니 제법 쌀쌀했다.
"발 조심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제부터는 계단을 올라갈 거랍니다."
사막지형인데 청사가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니 상당히 특이한 일이었다. 건물이란 튼튼한 기반 위에 세워져야 오랫동안 버티는 법인데, 온통 모래로 이뤄진 곳에 어떻게 올라갈만한 곳이 있다는 건지 싶어 물었다.
"사막지형인데 올라갈 곳이 있어요?"
"랄캄은 무척 특별한 곳이랍니다. 해양도시라서기도 하지만, 사막권과 가까운 곳 치고는 높은 지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매우 단단한 암반이 받치고 있으니, 무너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무척 신기하네요. 바람이 강하지 않나요? 보통은 깎이고 해서 버섯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들었는데.”
“자연의 신비란 놀랍죠. 신기하게도 바람이 이 곳을 피해서 간답니다. 아까 내렸던 항구에서 사막 쪽으로 계속 걸으시면 랄캄의 번화가가 나온 거 기억나시죠? 거기서 더 가면 아까 보셨던 신전의 정문이 나온 것도요. 정문으로 들어가서 후문을 거치면 지금 저희가 서있는 이 곳이 되고요. 해안 쪽 길을 따라가시면 점점 고지대가 되는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게 시청이랍니다."
"시청이라면, 따로 이 지역을 지배하는 가문은 없는 거예요?"
"랄캄은 전문청사가 있는 얼마 안 되는 곳이랍니다. 보통 그 지역을 다스리는 가문에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서 집과 일체형인 경우가 많은데, 랄캄은 특수한 경우라서 애초부터 청사가 있었죠. 그리고 지금은 외국인들이 많은 만큼 다양한 문제가 발생해서 그 제도가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있고요."
"원래 페르게네스가가 다스리는 곳이어서 주인이 비었기 때문이죠, 그건?"
"상당한 지식이시군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말이죠."
칭찬에 고맙다고 말하면서 낑낑대며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가끔 정말 터무니 없는 높이의 계단이 있어서 하닐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을 정도로 높은 지대라 더 이상의 대화가 힘들었다. 꽤 올라온 것 같은데 언제 끝나.
"아, 제가 오르제국에 관해서 전문 과제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알게 됐어요."
하닐이 죄송한데 걸음을 좀 더 서두르셔야겠어요. 라고 말했다. 이보다 더 라니, 무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뭐라도 보는 걸 강요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놓치면 두고두고 아쉬워 할 거라고 말한 거니… 놓칠 수 없어!!! 금세 날이 어두워져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몇 번 미끄러질 위기도 넘기며 마지막에는 거의 없는 체력을 끌어모아 달려 시청의 문 앞에 섰다. 기욤이 다급하게 입장 절차를 밟았고, 나는 내 머리카락에 꽂힌 나무를 확인받고 나서야 시청에 들어왔다.
유난히 어두운데도 불이 하나도 안 켜져 있어서 시청에라도 불이 켜져 있길 기대했는데, 이 곳도 불을 켜두지 않았다. 원래 불 켜는 시각이 정해져 있는 건가? 시청건물이 궁금했지만, 하닐이 다짜고짜 실례해요! 하면서 내 손목을 잡아채더니 질질질 끌다 시피 나를 데려갔다.
"하닐!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일단 달리세요!!! 얼른!!!"
또 달려?!! 이젠 진짜로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시키는대로 일단 달렸다. 이 쯤 되자 정말로 뭔지 두고 보자는, 약간 악에 받친 마음도 들고 말이다.
하닐과 기욤도 어찌나 기대하고 신난 얼굴인지, 도저히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천천히 가자는 말도 안 나오기도 했고. 사람을 거의 끌다시피해서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시청의 옥상이었다. 숨을 겨우 골랐다.
"헉, 헉… 옥상?"
"레이디, 어서요! 이리 오세요."
하닐과 기욤이 무척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끌었다. 안 멋있기만 해봐라. 물어 뜯어버릴테다.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랄캄 시청은 오각형으로 된 특이한 건물이었다. 각이 잡힌 끝에는 특별히 한 사람이 서있을 만한 테라스 같은 것이 있었다. 그들은 내게 그 5군데 중 한 군데에 굳이 서라고 했다.
"지금이… 조금 있으면 시작될 거예요. 높아서 무섭지는 않으시죠?"
사실 밑에 아무것도 없어서 조금 무섭긴 했지만, 참을 만했다. 기묘할 만큼 정말 바람이 불지 않는 곳이었다.
조용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어둠이 덮쳐오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숨을 고르고 소리를 죽였다.
둘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앞을 쳐다보기만 했다… 적막이 거짓말처럼, 어느 순간 왼쪽에서 바닷소리가 들렸다.
‘쏴아아아… 쏴아아아아…….’
그리고 천천히.
처음에는 신전이었다. 신전이 환하게 불을 켰다. 그 이후, 그 불을 받듯이 아래쪽부터, 민가의 호롱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마치 불이 번지듯, 고요하게. 하나 하나, 아련하게 불이 켜졌다… 천천히 불을 이어받는 모습들. 마치 집이 빛나는 조명이 되는 듯 했다. 그리고 바로 아랫집에 불이 켜지고 난 후에야, 내가 서 있는 곳 아래에서부터 환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하더니, 곧 오각형의 건물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 바다소리 외에는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내 쪽으로 빛이 번져오는… 어디에서도 아마,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광경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내 입을 막았다.
"…어떠십니까, 멋지지요?"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기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우세요?!!"
하닐이 당황해서 물었고 나는 너무 감동적이라서, 하고는 웃었다. 그러자 하닐이 안심한 얼굴을 하더니 쾌활한 표정으로 웃더니 말했다.
"하긴, 저도 이렇게 딱딱 맞는 걸 본 건 처음이에요. 랄캄 최대의 볼거리죠. 특히 청사에서밖에 볼 수 없는 거라, 귀한 분 아니면 보지도 못하는 거예요."
기욤이 어쩔 줄 몰라하며 내게 손수건을 주었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울어버릴 정도로 감동이었어요. 이건 왜 맞추는 거예요? 아래쪽부터 하던데."
"오르안과 오르엘에 대한 경배입니다. 원래 이 청사에 사시던 분이 초대 오르안이시니까 불빛을 옮긴다는 의미가 있지요."
"멋있어요, 정말로. 두 번 다시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거 같아요. 두 분다, 너무 감사해요."
나는 둘에게 다가가 힘껏 껴안았다. 오르제국에서는 친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감사인사를 전한다고 들었다.
그들에게서는 베노암 사람들과는 다른 향이 났다. 이게 오르제국 사람들의 향이구나, 싶었다.
두 사람 모두 웃으면서 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한참을 둘을 끌어안고 있다가 감정이 좀 가라앉아서 약간 쑥쓰러워진 채로 옥상에서 내려오다가 어느 새 청사에 도착한 일행들을 보자마자 나는 흥분해서 내가 본 것을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다우닌과 요한이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줘서 더욱 기뻤다.
"나도 모르는 새에 불빛의 한 부분이 되서 정말 황홀했어요. 무척 아름다웠답니다!"
"좋으셨다니 다행이십니다. 시장에 안 따라오길 잘 하셨죠?"
쑥쓰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요한에게 시장 잘 다녀오셨어요? 하고 물었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좀 더 말을 걸고 싶었지만, 기욤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만 뒀다. 요한이 짐을 들고 사라졌고, 나는 청사의 손님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다우닌이 웬일로 나를 따라왔다.
"응? 왜요? 안내해주시는 건가요?"
"그것도 있고… 숙지하셔야 할 사항이 있어서요."
그의 얼굴이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무척 긴장했다. 말이 길어질 수 있어서 일단 문을 열어 그에게 들어오겠냐고 물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레이디, 요한에게 말 거시는 것은 굉장히 나쁜 일입니다."
"…아. 혹시 시중이 낮은 자의 일이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요한은 천민입니다, 레이디. 레이디께서 먼저 말을 거시는 모양새는 황궁에서 매우 나쁘게 보일 수 있답니다."
나는 그의 배려에 감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황궁에서 큰 무안을 당할 걸 막아주셨네요."
"아닙니다. 제 일인걸요. 레이디의 나라에서는 중인부터 시중으로의 일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베노암제국은 시중을 그리 낮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이해해드리고 싶지만 책을 잡히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친절하시네요. 감사해요."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그는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하더니 내 소매에 입을 맞추고는 좋은 밤 되십시오, 라며 인사하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이 나라의 인사법이란 참 쑥쓰러운 데가 많다니까. 그가 사라지자마자 한숨을 쉬고 방에 제대로 들어왔다.
방은 무척 좋았다. 침대 모양도 베노암과는 다른 디자인이어서 침대마저 감상하고 있었다.
베노암의 서민가정에서는 침대는 있는 집도 있고 없는 집도 있는 반면, 이 곳은 잘 때 찬 기운이 올라와서 침대가 필수적이란다. 그나저나 시중드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게 나쁜 거라니. 하긴 마법사라는 개념 때문에 재능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과 세금문제 등으로 베노암에서 천민은 거의 사라진 개념이나 마찬가지지만, 오르제국은 아니니까. 천민이 필요한 나라… 요한에게 되도록 말 걸지 말아야지. 결심한 지 오분도 지나지 않아 똑똑,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리니 요한이었다.
"목욕준비를 해드릴까요?"
"해도 된다면, 며칠 간 못할 테니까 하고 싶어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시중드는 것은 역시 싫으십니까?"
"네. 벗은 몸을 보이기는 좀 그러네요."
그러자 요한이 고개를 숙이고 욕실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똑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무작정 무시하나 싶어 먼저 말은 걸지 않겠지만, 그래도 말을 해야 할 때만이라도 상냥하게 해야겠다고 혼자 결심했다. 요한이 나가고 목욕을 한 뒤에 정신없이 골아떨어졌다.
꿈도 안 꾸고 몇 분 잔 거 같지도 않게 푹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몸을 흔들어서 깼더니 요한이었다. 응, 하고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요한이 순식간에 세수를 시키고 내 옷까지 준비해줘서 얼결에 갈아입자마자 아침을 먹으라며 또 끌고 식당으로 가서 내일 모레 잡아먹힐 사람처럼 든든하게 식사를 하게 했다.
왜 이렇게 급하지. 인사라도 하고 가야하는 거 아닌가… 야반도주 같은데, 아무리 봐도.
"저기, 이렇게 그냥 떠나도 되는 거예요?"
"어제 말씀 드렸습니다. 괜찮답니다. 아침은 든든하게 드셨죠?"
"네. 저택의 주인이 없는데 혼자하는 식사라 조금 민망했지만요."
그들은 민망해할 필요 없다며 웃더니 새벽 바람에 추울지도 모른다고 나를 또 꽁꽁 싸맸다. 인생 처음으로 정식 오르제국 복장을 했는데 생각보다 편해서 기분이 묘했다.
베일로 몇 겹이나 사람을 싸서 눈만 겨우 보이는 모습에 웃기기도 하고. 나무는 머리에서 뽑아 따로 보관했다. 꽤 이른 시각에 시청을 나서서 도시가 유난히 조용해 어쩐지 경건한 기분이 들다가 인생 처음으로 사막을 건너는데 필수적이라는 낙타란 것을 본 순간 그 기분이 와장창 깨졌다.
속눈썹도 길고 물이 없어도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점은 신기했지만 어찌나 성질이 더럽던지…. 기분이 나쁘면 침을 뱉고 성깔을 부리는 통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낙타를 벌써부터 타는 건 서로에게 기력 낭비인 것 같아서 랄캄에서 벗어나는 경계선까지 걷자 그림에서나 봤던 정말 모래뿐인 곳이 나왔다.
그제서야 하닐들은 내가 낙타를 타는 걸 도와줬다.
"…우와, 꽤 높네요."
"큰 말이랑 비슷할 겁니다."
"네. 그러네요. …으, 그래도 무척 어색해요."
“그래도 잘 타시는 편이네요. …레이디께서는 상당한 기수시군요. 말도 잘 타셨겠습니다."
"그렇지도 않아요."
겸양을 떨면서 감사를 표시하고 다들 낙타에 타고 나서야 우리는 출발했는데, 그 뒤로는 솔직히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모래바람이며, 더위가 말도 못하게 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장시간 앉아있어야 하다 보니 엉덩이도 무척 아팠고. 어찌보면 심심한 여행이었고, 또 한 편으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여행이었다. 모래 풍경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하늘은 정말 시시각각 변했다.
사막의 하늘은 적막한 강가 같기도 했고 태풍 아래의 번개 같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웬일로 구름이 무척 많이 끼었던 날이었다.
한 낮에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하늘과 그 사이로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었던 순간, 그걸 보고서 누가 신성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수십번 고민을 해도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하늘이 열릴 때 저렇게 열렸을 것이다. 신성이란, 자연이란 저런 거구나. 저기서 그들의 여신 오르엘이 내려오는 걸까. 막연히 하늘을 바라보다가도 햇빛에 고개를 찌푸리다가, 그리고 구름이 아른아른 내 머리 위로 늘어지는 것에 기뻐졌다.
그제서야 막연히 오르 제국의 숭배를 이해했다. 햇빛은 두려워하며 숭상하고, 그리고 물은 자애로운 어머니로 받아들이는 나라.
그렇게 며칠 내내 사막을 여행하던 어느 날 내가 간신히 물을 아껴 마시면서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쯤 기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기욤은 우리 모두를 동굴로 인도했다.
나는 뻣뻣해진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면서 그늘에 감사했다. 기욤과 하닐, 요한은 모두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왠지 나도 같이 기도드려야 할 것 같았다. 딱히 믿는 신은 없었지만 나라도 이런 환경이라면 오르엘을 믿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시면 작은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마 나르딘들이 있을겁니다. 구경하고 가시겠습니까?"
"나르딘이라면 뭘 말하는 건가요?"
"아, 나르딘은 모르시는군요. 워낙 뭐든 잘 아셔서…"
"앞으로 이럴 일이 많을 걸요."
그러자 다우닌이 웃었다. 기욤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나르딘은 무희들을 말한답니다. 작은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돌아다니는 유목민족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들은 사막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춤을 추고 물자를 팔거나, 아니면 안내를 하는 등의 일을 한답니다."
"보고 싶어요!"
무희라니, 신기했다. 이 더운 곳에서 춤을 추다니, 그야말로 최악의 노동처럼 느껴지는데 그런 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었다.
"그럼 오늘은 일단 여기서 하루 자고, 작은 오아시스로 내일 이동하겠습니다… 작은 오아시스라도 나무가 있어서 그 그늘에서 쉬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늘에만 들어오시면 꽤 시원하죠?"
"네. 사실 조금 지겹기도 했는데, 하늘이 너무 예뻐서 다닐 맛이 그래도 나요. 하늘이랑 바로 맞닿은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바로 그것 때문에 오르엘의 신관들은 사막에서 훈련을 하기도 한답니다."
내 차림을 요한이 다시 정리해주려고 하기에 그에게 안에서 하자고 했다. 나는 그와 동굴 안에서 옷을 정리하고 내 진짜 용건을 알렸다. 물통을 따서 그에게 건넸다.
"…레이…"
나는 입에 검지를 대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놀란 눈으로 그냥 물통만 바라보고 있었다.
답답해져서 마시는 척을 하니 그제야 받아들어서 마신다. 급하게 먹는 게 역시 그에게는 마실 물이 아주 적게 지급됐나보다.
한참 물을 마시던 그가 민망한 듯 내게 다시 물통을 건넸다. 나는 웃고는, 말하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말했다.
"모래가 다 빠졌습니까?"
"네…이제 나가도 되나요?"
"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내가 나오자마자 들어가서 짐을 정리했다.
가운데에 낙타가 싼 똥을 장작삼아 불을 피우고 담요를 깐 뒤 우리는 똘똘 뭉쳐서 잤다. 낙타 똥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웬걸, 나무를 태우는 것보다 훨씬 깨끗하게 탔다.
여기 오면서 정말 잘 때는 거의 정신을 놓고 자는 나를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멍하니 눈을 떴는데, 요한이었다.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요한이 자기 입에 검지를 댔다. 또 일찍 출발인가, 아니면 지금 물 준 걸 원수로 갚나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요한이 산양망토와 부츠를 준비했다. 일단 시키는대로 신고 나서 왜, 라는 의미로 고개를 갸웃했다.
요한이 내게 동굴 바깥을 가리켰다. 하품을 참으면서 종종 따라나가다가 보이는 광경에 입을 닫는 것도 깜빡해버렸다.
하늘에서 별이…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마치 빗줄기 같았다. 알트라의 축제 때 본 마법 불꽃놀이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별빛들이었다. 평생 단 한번이겠지, 이런 광경은. 이게 사막에서 본다는 환상인걸까? 나는 꿈을 꾸고 있나.
추위도 잊고 한참을 하늘만을 바라보며 아득하게, 온 세상에 나 하나만이 남은 기분을 느꼈다. 저 별이 떨어져서, 이 모래가 되었을까.
추위 속에서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요한은 추위에 발갛게 뺨을 붉히면서 담백하게 미소지었다. 다음 날 아침에 어젯 밤의 여파로 겨우 일어나 출발해 무희들 구경도 하고 낙타들 목도 축였다. 하지만 여행을 지속하기에 내 체력은 정말 저질의 끝이었고, 결국 마지막에는 하닐의 낙타에 거의 매달리다시피해 겨우 도착예정에 맞춰 근처 도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이리하가 보낸 궁정마법사와 만났는데, 그는 내가 몸살로 정신을 못 차릴 때 나를 오르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눈을 떠보니 오르더라… 라는 말도 안 되는 전개에 사실 나는 분했지만, 안심되기도 했다. 사막은 무리였어. 그게 제일 짧은 사막이었다니 말도 안 돼. 이 나라는 정말 전사가 태어날 수밖에 없는 나라구나. 하품을 하고 몸을 쭉 폈다.
오르제국의 수도, 오르의 귀빈궁에서 맞이하는 첫번째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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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요... 좀 많이 기네여! (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