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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26화 (26/113)

26화

<방학>

하지만 급한 건 따로 있었으니, 바로 코라의 약혼식이었다. 어찌나 날짜를 급하게 잡았던지, 약혼 요정인 나는 그다지 약혼식의 디테일에 관심이 없는 코라를 잡아 앉혀놓고 이것 저것 고르게 하는 일을 아주 신물이 나게 많이 해야했다.

예를 들면 꽃이라든가, 약혼식에 입을 이브닝 가운, 그리고 만찬용 드레스, 보석, 식기, 파티 콘셉트, 음식, 케이크, 요리사, 시중 들 하녀들, 초대장, 좌석 배치…. 얼마나 많은 걸 정해야했던지 결정장애가 심각한 코라는 몇 번이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쳐나가려고 했다. 결정을 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던 나조차도 마지막에 가서는 대충 아무거나 해!! 라고 외치고 싶었으니까 코라에게 이 모든 일이 얼마나 고역이었을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앨번 정장을 고르는 데 나도 같이 가자고?”

“응. 남자 옷이 거기서 거기지, 싶어서 도저히 못 정하겠어…”

“…여기서 네가 정하는 게 몇 개라고… 그건 안 해줄거야. 오붓한 시간 보내라고 일부러 이렇게 스케줄도 넉넉하게 잡아줬는데.”

“악!! 왜 네가 내 스케줄 관리를 해!! 너, 그리고 내 식단도 네가 관리하지!!!”

어머 들켰네, 하고 나는 비죽이 웃었다. 딱히 비밀도 아니었는데 이제야 눈치 채다니.

“너희 집 집사가 나보고 부탁했는 걸. 자기 말은 안 듣는다고…. 그리고 네 어머니랑, 아버지랑 아르잔 가 집사까지도 나한테 고맙다고 선물 보내줬어. 내 덕에 일 진행이 엄청나게 빨라졌다고…"

“와, 진짜 너무하네!”

한창 드레스 사이즈를 재고 있는 중이라 코라가 못 움직여서 망정이지 움직일 수만 있었으면 얘가 나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얄밉게 웃으면서 그래도 목표 사이즈에 도달하겠다며 기뻐했더니 코라가 이를 박박 갈면서 말했다.

“네가 약혼 요정이냐? 마귀할멈이지!”

“그건 너무하다, 얘. 아르잔 가문 쪽에서 영상석을 찍겠다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는 안 했을건데, 어쩔 수 없잖아. 평생 가는 기록인데 예쁘게 남아야지.”

“뻥 치지 마! 너는 그냥 해도 날 해골바가지로 만들 애야!”

“너 날 너무 나쁜 사람으로 몬다…. 아, 사이즈 다 나왔어요?”

악악 소리를 지르는 코라를 무시하면서 재봉사와 이야기를 나눴더니 이 정도면 충분히 됐다고 엄지를 치켜올린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신이 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코라의 허리와 여기저기 묶은 핀들을 풀었더니 코라가 비칠비칠 걸어서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죽는 걸까….”

“누가 들으면 한 3일 굶긴 줄 알겠네.”

“안 굶기면 뭐해! 먹이는 게 닭가슴살 뿐인데!”

고맙다고 재봉사에게 다시 한 번 말해준 뒤에 내보냈더니 요 며칠 단 걸 못 먹어서 무척이나 까칠해진 코라가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기왕이면 예뻐진 채로 만나면 좋잖아.”

“아 좋아서 하는 결혼도 아닌데 뭐 어때!”

이것이 예쁘게 해줘도, 하고 울컥했지만 화를 꾹 눌러참고 말했다.

“아니, 앨번 선배님 말고.”

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누굴 위해서 스케줄 관리까지 맡았는데, 당사자는 도무지 내 배려를 알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뭐 어쩌겠나 싶어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오늘 점심부터 저녁까지 시간 비워놨어. …이것저것 같이 기분 전환 겸 쇼핑한다고 말해뒀으니까 난 너네 만나고 있을 때 쇼핑하고 있을 거야.”

그제서야 코라가 당황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채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 없었는데….”

“내가 너 결혼 할 때 책 잡히는 꼴은 못 보겠어서 그래. 그러니까 내 노력을 봐서라고, 제발 사람 없는 쪽으로 다니고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고…”

말을 고르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피하고 싶은 단어를 내뱉었다.

“펑범한 커플처럼 보이도록 해.”

그러자 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식을 핑계로 매일매일 하는 피부 마사지와 관리 덕에 그녀는 어느 때보다 예뻐 보였다. 나는 솔직히 이게 잘 하는 일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이후에라도 후회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난 그래도… 있지, 코라.”

옷을 갈아입으려고 자리에 선 코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난 네가 그래도, 앨번과 사랑에 빠지기를 바라.”

그러자 코라는 멍한 표정을 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인것 처럼, 세상에서 일어날 일이 없는, 아주 재미있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게.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게 덧붙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

옷을 몇 번이고 갈아입으면서 코라는 이게 나아 저게 나아, 하며 나를 귀찮게 했다. 약혼식 드레스 고를 때나 이런 성의를 보여줄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틋한 첫 사랑과의 이별식에 초를 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얌전히 성실한 조언자가 되어 주었다.

결국 챙이 작은 모자에 소매가 짧은 흰 원피스를 차려 입은 코라는 보라색 야생꽃이 수놓아진 원피스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낮은 굽의 샌들을 신고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깊은 보라색의 눈을 빛내는 그녀가 그날따라 참 소녀같아서 내 마음이 다 싱숭생숭했다.

햇빛이 강한 날 분수 옆에 서 있는 우리에게 빛에 반짝거리는 물방울이 다가왔다 멀어지고 있었다.

“있지, 나 사실 카일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여기까지 나온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말을 덧붙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말만 듣고 있었다.

“그런데 약혼식이 되고, 내 인생을 누구랑 보낼 지 결정이 떨어지고 나니까… 그냥 보고 싶어, 첫 사랑이.”

코라의 목소리가 내게는 참 아득하게 들렸다. 이 둘의 애정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거였다.

둘은 서로의 감정을 알지만 둘 모두 서로에게 한 마디를 하지 않는다. 1학년 내내 같은 조였고, 함께 과제를 하고, 가끔 수업이 비거나하면 같이 밥을 먹었다고 했다.

코라는 몰래 카일의 사물함에 초콜릿을 넣어두었고 그러고 나면 그녀의 사물함에는 보라색 꽃이 있었다. 그녀는 내게 딱 한 번 그 꽃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코라가 서툰 솜씨로 소중하게 압화했을 보라색 꽃의 향기를 나는 맡은 적이 있다. …그들의 연애는 그런 식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걱정 마. 그냥 한 번 만나서, 밥을 같이 먹고, 이야기를 하고, 연극 한편을 보기로 했어. 그게 다야."

“이상한 말이지만, 그거… 음. 너희의 첫 데이트네."

그러자 코라가 환하게 웃었다. 자신과는 안 어울린다고 그녀는 깔깔대면서 그러나 분명하게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 웃었다.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나는 그저 웃으며 친구가 할만한 말을 했다.

"끝나고 나면 말해줘. 원래 첫 데이트는 친구한테 모두 보고하는 법이야."

그러고 나서 나는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도 나를 안아줬다.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말하고 그녀에게 비쥬한 후에, 카일이 오는 것을 확인한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살짝 뒤돌아보니, 카일이 그녀에게 뭔가를 건네주고 있었다.

멀어서 분명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건 분명 꽃이었다. 보라색이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코라의 일탈은 끝나고, 지금까지의 반항은 어디에 버렸는지 코라는 더 없이 얌전한… 거짓말은 못하는 주의라 말하자면 그냥저냥 적당히 참는 약혼을 준비하는 여자, 정도는 해주었다. 그것만으로 모든 일이 상당히 편해져서 모두들 행복했으니,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코라의 드레스는 결국 자주색의 레이스로 살짝 장식한 드레스로 결정이 났다. 약혼식은 캘리가의 저택에서 진행되었는데, 과연 전 아르잔 백작과 소피아는 참석하지 않았다.

저택은 아무래도 캘리가의 부를 나타내기 위해서 되도록 화려하게 꾸몄지만, 코라의 드레스 자체가 얌전한 편이라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아르잔 백작가에서는 코라의 약혼 예물로 약혼반지와 그녀의 드레스에 어울리는 티아라를 주었다.

앨번이 그것을 식 도중에 그녀에게 씌워주었는데, 코라에게도 두말할 것 없이 잘 어울렸고 식의 사랑스러움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라 나 또한 몹시 만족스러웠다.

우아한 격식이 돋보이는 앨번의 차림새는 코라가 직접 고른 것이었고 옷을 고르는 동안 둘은 상당히 친해진 모양으로 약혼식 내내 소곤거리면서 웃기도 해서 나는 퍽 안심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가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은 모습을 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니까. 어쨌건 캘리가는 지참금으로 상당한 돈과, 예물로는 앨번과 코라의 커플시계를 준비했다.

나는 시드와의 어색함을 깨트리기 위해서 상당히 작위적으로 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는데, 주로 코라가 결국 약혼 도중의 과정에 지쳐서 34번쯤 불같이 분통을 터트린 이야기와, 둘이서 밤에 떠들어댔던 이야기, 그리고 내가 저 드레스를 수선 하나 없이 코라에게 입혔던 이야기 등 약혼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내 노력이 가상했던지 어쨌는지 시드는 나중에서야 어색한 태도를 없애고 맞장구를 조금이나마 쳐주었다.

드래곤으로서의 그인지 인간으로서의 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랜 친구가 약혼을 한다는 것이 그에게도 어느 정도의 감회는 주는 모양으로 그는 몇 번이나 코라가 약혼을 하다니, 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신기해?”

“응, 아무래도? 어렸을 때는 얘랑 결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으니까.”

이것도 의외의 소식이었다. 하긴 처음 봤을 때 둘이 연인인가, 라고 생각도 하기는 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의외는 아닐지도?

“대충 촌수도 결혼 할 수 있는 정도라서 실제로 몇 번 말이 오간 적도 있어.”

“신기하다…그런데 왜 안 했어?"”

“그냥… 뭐 이것 저것, 일이 있었잖아.”

그 이것 저것에 막연하게 내가 들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주제는 꺼내지 않는게 좋겠다 싶어서 나는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그렇지, 코라도 앨번 선배가 설마 청혼을 할 줄은 몰랐을테니까. 코라도 너랑 결혼 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서로 생각하고."

하기사 어릴 적부터 같이 커왔으니까. 연인으로의 두 사람도, 동반자로서의 두 사람도 나는 쉽게 떠올릴 수 있어서 그렇구나, 하고 웃으며 짝으로서 처음 춤을 추기 시작하는 코라와 앨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떤 사이인거야?”

얼굴을 굳히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애매하게 웃고 있겠지. 시드는 초조해보였고, 한 편으로는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그냥 이렇게 …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되는 거야?”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해, 시드.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넌 인간이고, 난 네 친구야. 그 이상은, 나는 못 해. 그게 괴롭다면….”

일부러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말을 알아 들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선율이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우리 둘 사이에 흐르는 것은 그저 정적이었다. 빤히 연청색의 눈을 바라보고 그의 답을 구하자 그가 말했다.

“춤 추자.”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고만 있자 시드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도… 시간을 줘. 정리할 시간을.”

“춤이 도움이 되니?”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오르에 가기 1주일 전, 코라의 약혼 파티에서 나는 시드와 춤을 추었다….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춤을.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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