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불꽃 놀이의 담당자 중 하나인 시드는 불꽃 놀이가 끝날 때까지 그 쪽 일에 매달려 있어야 해서 꽤 안심하고 나는 코라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수업을 듣는 시기가 아니어서 망정이지, 셋이서 함께 듣는 수업이 있는 이상 분명 금방 코라에게 어색한 기운을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고백을 들은 이후 바로 다니엘의 일이 터졌고, 그 이후로는 다른 고민이 그와 관련된 고민보다 컸기 때문에 나는 아직 시드를 어떻게 대해야할지를 전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것이 가장 낫지 않을까했지만 시드에게는 퍽 잔인한 일이 될 것 같고….
네가 날 좋아하는 것도, 네가 밝힌 진실도 모두 모르는 일로 만들고 싶다니… 나는 언제 이런 감정과 생각을 알게 된 걸까. 쓸쓸하다는 생각에 웃고 말았다. 시드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와서 그에게 그런 걸 묻는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만약 내가 시드였다면 그냥 모른 척 해주는 것을 선호하겠지만, 굳이 내게 모든 일을 알린 시드가 이를 어떻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내가 시드를 예전처럼 대할 수 있을까.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강하게 내 안에 자리매김했는데, 그걸 내가 자연스럽게 무시할 수 있을까. 한참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앉아있었더니 코라가 음료수를 사온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 아니, 별 거 아냐. 고마워, 잘 마실게.”
“뭘. 맞아, 약혼식 일정 물어봤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자 코라가 약혼일을 알려줬다. 생각보다 빠른 약혼일에 솔직히 좀 놀라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애매하게 중간에 위치한 것보다야 나았기 때문에 테이블 위에 펜으로 일정을 적었다.
“그러고보니 넌 방학 때 뭐할건데?”
“아… 너 약혼식 지나고 나서 여행이나 가려고.”
“어디로? 갈 만한 곳이 있나?”
대수롭지 않게 손톱을 바라보는 코라를 보면서 대충 다이어리와 펜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오르제국.”
그러자 잠깐 코라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더니 스르륵, 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네가 어디서 방학을 보내기로 했다고?"
“오르제국의 수도인 오르… 초대장도 주던데.”
코라가 마시던 차를 내 쪽으로 밀어내더니 내게서 초대장을 받아들어 몇 번이고 읽어보면서 눈을 깜빡거리고는 말했다.
"…진짜잖아. 심지어 이거, 펜으로 쓴 거야? 오르안이?"
"응…. 수행비서가 주던데. 일정 맞춰서 연락달라고. "
나는 이게 그렇게 큰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목소리를 꾸미고 말했다. 그녀가 나를 유별난 일을 겪는 사람, 그래서 같이 지내기 피곤한 사람처럼 느끼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내 소망에 걸맞게 코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그럼 내 약혼식은?!”
“그래서 일정 물어본 거야. 너 약혼식 끝나고 여유롭게 가려고.”
그럼 나야 상관없지, 하고 코라가 초대장을 내게 돌려주었다. 받아들면서 그녀의 얼굴색이 좀 불편해 보이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어째서냐고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내게 멀쩡해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펜공작은 허락하셨어?"
“잘 모르겠어. 아직 안 여쭈어봤거든. 아마 허락해주실 것 같은데, 상대가 상대다보니.”
“하기사…. 맞아, 사실 나 네가 오르안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좀 놀랐어."
"음… 많이 불편했니? "
그제서야 그녀가 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생각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거지만, 혹여나 내 출신이 천박해서라든가, 엄마가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라고 나를 비난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너로서는 가장 적절한 행동이었어. 그걸로 결과가 좋았으니까 나도 뭐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딱히 다른 해결책으로 떠오르는 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좀… 어색하기는 했어.”
그러면 됐어, 하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세간의 평가보다 중요한 것은 내 곁에 남을 사람들의 평가였다. 내 최선이 주변 사람들에게 최악으로 다가가거나, 견디지 하는 일이 아니길 바랐다. 이 이야기를 오래해봤자 내게 좋을 것이 없었으므로 나는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선회하기로 했다.
“그보다 약혼 얘기 좀 해보자. 이번 대 아르잔 가주 얘기 하다가 끊겼잖아.”
"아, 맞다. 음, 그러니까… 전대 아르잔 백작이 굉장히 보수적이었는데 반해서 이번 대는 상당히 다른 사상을 가진 분이셔. 전대 아르잔 백작이 여자애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아들을 페드윈에 안 보내려고 할 정도로 치우친 사람인 것도 한 몫 했고. 어쨌든 서로 반대 사상을 가졌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관계도 최악이라서, 전대 아르잔이 너한테 내 손주는 못 맡긴다고 앨번을 데리고 가려고 했었는데, 그게 될 리가 있나."
"하긴, 베노암 국법상 아이는 완전히 부모에게만 친권이 보장되니까."
"응. 그런데 솔직히 그 모습이 그리 자랑스러운 귀족의 모습은 아니니까… 현 아르잔이 옛다 하고 던져준 게 바로."
"소피아구나…."
“그렇지. 뭐 소피아 자체도 부모님보다 오히려 실컷 놀게 해주는 할아버지를 더 좋아하기도 했다지만, 그래도 부모보다 정말로 할아버지가 좋았겠어? 뭐 결국 버림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지, 앨번을 소피아는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굳이 앨번이 아닌 소피아를 보낸 걸 보면 결국 현 백작도 어느 정도 남아우월사상가라니까.”
그 말까지 듣고나니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닌 척 하지만 그쪽 사람이라는 거잖아…. 그런 곳에서 코라가 캘리가의 가주 일이며 상회 일을 하면서 차별받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넌 상회일 계속해야 하잖아. 그 점도 괜찮다고 하셔?"
"당연하지. 내가 후계자로 임명까지 되어 있는 걸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럼 아르잔 가 내부의 일은 어쩌기로 했어? 보통 안주인의 일도 만만찮지 않나?"
그러자 코라가 갑자기 자신 쪽으로 다시 끌고 오던 찻잔을 든 채로 멈췄다. 반응이 왜 이래.
"설마 너 생각 안 해본거야?!!"
"에잇,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집사를 한 명 더 들이던가 하면 돼!!"
얘 정말 이대로 괜찮은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대책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고 테이블 쪽으로 당겨 앉으면서 물었다.
"집은 어쩌기로 했어? 역시 아르잔 백작가에서 사는 거야? 그럼 상회로 출근은 어떻게 해?"
"…역시 약혼 다시 생각해야하나…"
"지나치게 계획이 없는 거 아냐, 너!?!!"
내 타박에 코라가 에잇, 하더니 티 테이블과 세트인 의자에 힘차게 기대다가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재빨리 자세를 다잡은 그녀가 좀 무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그저 차를 마셨다.
"그나저나 이제 도와주려고 손도 안 내밀어주네."
"그렇게 넘어간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그보다 정말 너 고민해봐. 일단 알트라에 살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만, 졸업하고 정말 결혼하게 되면 전-혀 다른 문제라고."
"사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부모님 측에서 다 알아서 해주겠지,라는 생각이…"
코라가 이미 한참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이미 열네번은 봤을 축제 팜플렛을 뒤적거렸다.
“그럼 뭔가 네가 준비하고 있는 건 없어?”
“…이건 비밀인데.”
그녀가 내 쪽으로 당겨 앉는 것을 보고 진짜 비밀인가 싶어 귀를 얌전히 기울였더니, 코라는 몹시 갈등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건 시드한테도 말 안 한건데… 나, 카일이랑 만나기로 했어.”
놀랄 준비까지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놀랄 일이 왜 이렇게 많아!
“내, 가 아는 그 카일이랑?!”
소리를 겨우 억누르며 말하자 코라가 그렇게 놀랄 일인가, 하면서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지금 와서 어째서 그 애를 만나냐고, 뭘 하고 싶은 거냐고… 하고 싶은 말이,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하는 좋아함은, 그렇게 정당한 걸까. 앞으로 내 인생에서 그럴 일이 한 번도 없을까.
“…카일은 알아?”
그러자 코라가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얌전하고 여성스러운, 매우 우아한 귀족가의 아가씨 그대로의 얼굴은 한 코라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할까, 한참을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응원해주거나, 이해한다고 말해줄 수는 없는데… 말해줘서 고마워.”
“그래서 부탁할 게 있는데…. 나중에 카일을 만나는 날에 나랑 좀… 같이 나가줬으면 좋겠어. 물론 싫으면 거절해도 돼!”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이런 부탁을 해준 게 고마웠고 그제서야 그녀의 진정한 친구가 된 기분에 한 편으로는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부탁해줘서 오히려 고마워.”
나는 용기를 내서 코라의 손을 잡았다. 코라는 웃으면서 우리 좀 웃긴다, 그치? 하고 말했다. 난 하나도 웃기지 않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쑥쓰러운, 그러나 전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 불꽃 놀이 시작한다.”
지나가는 행인의 말을 듣고 둘이서 하늘을 바라보자 페드윈의 고풍스러운 건물 뒤로 화려한 빛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절묘한 시간차를 두고 마치 물 위로 물고기들이 지나가듯이, 천천히 빛이 번져가더니 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스러졌다. 밤하늘에 흔적처럼 남는 잘게 뿌려진 광석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예쁘다….”
마법사들이 마법진에서 손을 잡고 터트리는 붉은색 광채가 꽃처럼 하늘에서 피었고, 그 위로는 마치 샹들리에 같은 은색 빛들이 터져나왔다. 그들의 손 끝에서 무도회장이 펼쳐지기도 했고, 빛으로 분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터지는 불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고생하더니, 정말… 고생할만하네.”
코라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트라의 중립지를 체결하는 걸 한다에서 엎어져서 또 그냥 페드윈을 만든다 하더니, 결국 이런 불꽃으로 하는 행위예술로 결정되었나보다. 마력으로 피워낸 불꽃은 몹시 아름답고 눈이 부셔서, 나는 마치 추억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놀이의 끝은 언제나 어수선하기 마련이었다. 축제의 끝이다보니 사람들도 유난히 많았고, 그리고 유난히 아름다웠던 불꽃놀이에 대한 치사로 인해서 시드를 찾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원래 만나기로 했던 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겨우 시드를 만났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고 시끌벅적한지 도무지 말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실은 이에 무척이나 안도하고 어물쩍 그와의 만남을 넘기려고 했는데, 코라가 도무지 물러서지를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사람이 없는 주택가 쪽으로 우리 셋은 걸어갔다.
가운데에 코라가 서서 이런 저런 대화를 주도했지만 시드가 나를 어색해하고 어떻게 대해야할 지 모르는 것이 너무 분명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분위기는 당연히 엉망진창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싶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화를 이어가려고 나름대로 나도 노력했지만, 이제는 코라도 당황하고 어색해하기 시작해서 우리는 그냥저냥 그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축제가 끝난 이후에 학생용 뒤풀이 파티가 열려서 꽤나 열정적으로 사람들이 논다고 오라던 로드리고들의 말이 생각났지만 난 뒤풀이고 뭐고 엄청나게 피곤한데다 마지막 시드와 코라와의 일로 기분이 완전히 틀어져서 저택으로 와 뻗어버렸다. 다음 날이 되어 학교에 가 교수님과 로드리고들에게 인사를 하고 학기를 마무리하자 한결 마음은 편해졌지만… 그래도 마음이 완전히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시드는 나를 좋아해준 첫 번째 사람이었고, 나는 코라와 시드, 이 두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코라의 약혼식에서 시드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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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 약혼식... 으음 자르기 애매... 그냥 방학으로 다 묶어버려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