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24화 (24/113)

24화

오르안을 맞이하기로 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얼마나 발작적으로 하녀들이 나를 씻기던지, 누가 봤으면 거지를 주워다가 아가씨를 만드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거다. 대충 하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잠재적 적국이나 다름없는 제국의 황제를 보는 자리라고 하니 본인들이 더 긴장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셔야 한다는 이상한 말과 함께 병상에서 얼마 전에 일어난 나를 과하게 예쁘게 만들어줬다.

…평소에도 이런 성의를 보여주지, 싶었지만 그랬다간 내가 몹시 피곤할 것 같았다. 알고보니 오르제국에서 오르안이 출발한 지는 이미 꽤 지났고, 내 상태를 고려한 다니엘이 나를 위해 늦게 나를 찾아줬다고 한 거라니 고마워해야할지….

어쨌거나 어제 저녁에 무려 교장 선생님께 불려가 절차에 대한 교육을 바짝 받고 거의 세뇌에 가까운 걱정과 염려를 듣고 만나는 거였지만 어째 전혀 실감은 안 났다. 황제라고 해도 뭔가… 너무 나랑 다른 세계에 있는 거라 솔직히 좀 뜬구름 잡는 소리고. 그리고 황제라고 해봤자 그거 뭐, 드래곤 보다 더 센 건가. 그래서 오히려 다른 사람은 죄다 덜덜덜 떨고 있는데 나 혼자만 으응, 그렇구나, 한 상태로 마중을 하러 가게 됐다.

친절하게도 코라가 나와 함께 가주었는데, 자기 딴에는 나름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중에 정말로 뜬금없이 중요한 소식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나 약혼자를 만들기로 했다고."

"약혼자가 인형이야, 아니면 꽃다발이야? 그게 만들어지는 거야?"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진지한 걸로 잘못 들었겠지 싶어서 에이 설마, 하면서 정문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건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가끔하는 농담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코라는 가끔 애먹네~ 하면서 아이를 먹는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시답잖은 장난을 쳤다.

"얘가 농담인 줄 아나보네. 아니야. 진짜 약혼자가 생길 거라니까. 이름은 앨번 드니에 아르잔."

"…로, 드리고 선배님? 잠깐만, 진짜로?!"

"진짜. 아마 방학 때 아르잔 가에서 발표할걸. 너 초대할거야, 내가. 내 약혼요정은 너다."

"…왜 얘기 안했어? 아니, 언제 그렇게 된 거야? 난 전혀 몰랐는데!"

깜짝 놀라서 약간 소리가 높아지다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긴장된 그들 사이에서 우리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그만두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주제가 지나치게 중요했다.

"딱히 내가 알고 그렇게 된 게 아니라서? 실제로 약혼자를 정하려고 정한 게 아니라, 오빠 둘이서 아무리 집안이 잘 나도 이 자식은 안 돼, 이런 쓸데 없는 목록을 만들다가 부모님한테 걸렸어. 근데 그게 좀 쓸모 있다 보니, 부모님이 또 좀 골라보다 나한테 얘기가 들어오고 내가 얘는 안 된다면서 몇 명 잘라냈더니 남는 사람이 몇 없더라고. 그런데 마침 아르잔 백작이 부모님이랑 할 얘기가 있다면서 오더니, 혼담을 꺼내기에, 괜찮다 싶어서."

"말도 안돼…그래서, 그냥 예스했어? 앨번 선배님은?"

"믿거야 말거나지만, 앨번 선배님이 얘기를 꺼냈다고도 하고… 하기 싫었으면 직접 말했겠지. 뭐, 앨번 정도면 이 쪽에서도 감사하지. 뭐니 뭐니해도 아르잔 백작가니까."

나는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내 사랑해마지않는 친구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귀족 혈통주의의 완성작이라 볼 수 있는 소피아 드니에 아르잔 가문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 이런 말 하는게 부적절 할 수는 있겠지만, 너 거기서 살 수 있어?"

"전대 아르잔이 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긴 해서… 사실 나도 그것 때문에 이 집안에서 날 받아줄 리도 없고, 가주가 나인 이상 더 이상의 거래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 대 아르잔 가주가… 도착하겠다, 곧."

어느새 정문이었다. 오르안의 도착을 대비해서 사절단의 일원들과 함께 알트라 성문으로 가는 중에 이런 폭탄을 던지다니, 코라도 어지간하다 싶었다.

사절단이 아닌 코라는 이 곳에 굳이 올 필요가 없었는데 교장선생님은 그녀를 암묵적으로 용인했다. 그는 그녀가 내 긴장을 풀어주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런 소식으로 사람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만 했으므로.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고 그녀에게 말하고서는 한숨을 내쉬고 가장 앞에 나섰다. 내 오른 쪽 뒤에는 교장 선생님이, 왼쪽 옆에는 마사가 있었다.

마사를 축으로 한 오르국 출신의 사람들은 관례에 따라 사절단의 뒤를 따랐다.

알트라는 중립지고, 고지대에 외치해 있어서 외부의 적을 방어하는 데에 유리했다. 말만 중립지가 되지 않기 위해 높은 외벽을 쌓아 보호하는 형태다.

알트라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단 두 개의 문만을 이용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문, 하나는 후문이었다. 사실 정문이냐 후문이냐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지만, 관례상 제국의 황제급 되는 손님들은 정문으로 들어와서 반대편에 위치한 후문으로 나갔다.

그것은 알트라의 중립을 체결했던 각 국가의 수장들이 했던 방식으로 후대인 그들이 그 약속을 지킨다는 증표로 보여지고는 했다. 똑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만히 서있고 가장 앞서 서있자니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위치에 서 볼 일이 생길 줄이야. 내 압박감이나 긴장감과는 별개로 정문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국을 맞이하는 자리였다. 현 오르제국의 단 하나의 태양이자 제국 그 자체라고 불리는 오르안 이리하는 위용에 걸 맞는 거대한 흑마를 타고 정문을 통과해서 들어왔다.

최소한의 호위전사와 마법사가 극소수인 사막을 가진 나라의 황제는 다니엘과 똑같은 초콜릿색 머리카락과 심홍의 적색 눈을 가진 아름답기보다는 강해보이는 왕이었다.

함께 나온 오르제국의 사람들이 다가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그의 가장 아래쪽 옷자락에 키스함으로써 그를 경배했다. 이게 바로 극존의 인사구나, 나는 무감각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오르안은 그 인사가 끝나자 말에서 내렸고, 그가 내리자 호위로 온 듯한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다. 보통은 호위무사가 내린 뒤에야 내리는데, 안전할 거라 판단하고 그가 내리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몹시 강인해보이는 효과는 있었다.

상황이 안전하건 안전하지 않건 목숨을 건질 힘이 있다는 거겠지.

나는 말에서 내린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키가 나보다 훨씬 컸고, 나를 노골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원칙상, 사절 대표는 손님과 동등한 위치였으므로 그에게 일단 내 스스로를 소개해야했다.

"제국의 황제, 이리하를 뵙습니다. 나는 중립지 알트라의 페드윈에서 당신을 맞이하러 온 당신이 요청한 사절대표,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입니다."

일반외교를 담당하시는 3학년 담당의 아르키제 노빌렉 교수가 어제 교장실에서 피를 토할 것 같은 목소리로 몇 번이고 강조했던 친밀함을 강조하는 예의상의 비쥬를 하려고 했지만, 그가 지나치게 컸다. 이 와중에 그를 올려다보면서 깨달은 건데, 이 사람 참 다니엘과 닮지 않았다.

이부형제치고는 지나치게 닮지 않은 게 아닌가? 이 와중에 다니엘이랑 닮은지를 보다니, 나도 참 한가한 인간이야. 뭐 생각해보면 나도 아비게일과 닮지 않았으니 상관 없나.

"잠깐, 숙여주시겠어요?"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 몹시도 비협조적인 남자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까치발을 하고 그에게 비쥬했다.

"알트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르안 이리하."

얼른 몸을 떼고 돌아오려 했는데,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이 이리하는 내 팔을 억세게 잡았다. 나는 억지로 돌려진 팔에 아파서 인상을 쓰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말했다.

"고작… 그대가 내 제국민의 목을 찔렀다?"

뭐야, 지금 이 상황. 제국민이 나를 겁박한 걸로 알고 있어야 정상이잖아. 힘을 점점 강하게 주는 그의 손아귀에 나는 팔을 비틀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 그래- 근육정도는 있어야지!"

"지나가던 남자분이 도와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랍니다, 오르안이시여. 의문이 풀리셨으면, 놓아주심이 어떠신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이리하는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째서 내 백성이 그대에게 접근했을지 알겠군…. 과연 격투에서보단 침대에서 끝내줄만한 여자니까 말이지."

오르안이라는 작자의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저질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뒤에서 있던 페드윈 측의 엄청난 침묵이 느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화를 내서는 안 됐다. 원칙상과 실제상의 원칙은 언제나 다른 법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가 어떤 경로로든 나와 다니엘, 그리고 사건이 어떻게든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니 이건 어쩌면 자신의 사람을 죽인 사람의 분노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에게 마사를 두고 협박까지 한데다가 잠재적인 위협에 대한 자료까지 가로채고, 그 나라가 마법사가 부족함을 비꼬기까지 했으니 제국의 주인으로서는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례가 내게 불쾌한 것은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여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를 뿌리칠 수도 없었고 따귀를 때릴 수도 없을 거고 분위기가 이렇게나 엉망진창이 된 것을 풀 필요도 있었다.

짧은 시간을 고민하다가 엄마가 가르쳐준 도둑질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에 나는 과감하게 그가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나를 잡고 있는 옷의 소매를 걷어 올려 그의 팔을 살짝, 몹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는 사막을 건너서 왔고, 그 곳에서는 여름이어도 긴 옷이 필수였다.

엄마는… 남자를 유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시선이라고 했다. 긴 속눈썹과 살짝 내리깐 눈, 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그 눈 말이다.

머리카락을 풀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일부러 그의 몸에 내 머리카락이 살짝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팔에 올린 손을 천천히 내려 그의 손 위까지를 애무하듯 만졌다.

"저는… 이리하."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사실 별 신경은 안 썼다. 그가 심홍색 눈으로 나를 빤히 내려보고 있음을 확인하고 장난스럽게 눈을 살짝 휘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희 둘이 침대에서가 아니라… 탁자에서 더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그는 피식, 웃었다. 나도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가 웃음으로서 분위기가 살짝 풀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내 손목에서 떼어내면서 가실까요? 하고 물었다.

"좋아. 얼마나 즐거울 지 기대되는군."

"과한 기대는 성찬을 망치는 법이죠. 요리사가 부담이 되거든요."

나는 웃으며 그의 몸에서 두 손을 모두 때어냈다. 그는 그것을 관망하고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나이스.

"안내해."

몹시도 껄끄러운 침묵을 뒤로하고 이리하를 나는 준비된 곳으로 안내했다. 홀은 몹시 깔끔했지만 그는 이 곳이 만족스럽지 않아보였고 방에서 나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내 편리를 위해서 마법으로 상황이 중계되었고, 목소리는 내 요청으로 나오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었다. 단 둘이 되는 상황이 몹시 껄끄러웠지만, 나눌 이야기는 단 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서류는?"

"보관하고 있어요."

"하둔은?"

"하둔이라면 누굴 말씀하시는건지?"

웃으면서 얄궂게 묻자 그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널 덮쳤다고 네가 주장한 자."

"아, 그 분. 물론 말씀드린대로, 태웠답니다."

“비정한 여자로고. 강간하려고 한 것도 아닌 사람을 그렇게 몰아가 죽이다니.”

그가 이죽거렸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딱히 나쁘게 대우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어쨌거나 사람을 죽이려고 온 게 그리 당당한 일도 아니고."

"한 마디 말을 지질 않는군, 너."

"오르안 치고는 입이 험하시다는 말을 들으신 적 없으신가요?"

파지직, 하고 그의 눈에서 스파크가 뛰는 듯 했다. 솔직히 다 큰 남자가 나를 저렇게 노려보니 안 무서울 수가 없어서 나는 애써 침착한 얼굴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저건 드래곤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다. 그냥 사람.

"원하는 바가 뭐야."

원하는 것. 원하는 것이 뭘까. 내가 다니엘을 구하면서 생각했던 것, 이리하를 이렇게 독대하면서까지 그에게 할 말이 있던가. 사실은 없었다.

나는 그냥… 거기에 다니엘이 있어서, 그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아서 암살자를 죽였을 뿐이었다. 그래도 만약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이 판에서 내가 이긴 게임이라 단 한 번의 내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요르펜 군을 살려두세요. 가능하면 평생."

그가 심홍색 눈동자를 내게 고정했다.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비로소 그가 몹시 카리스마 있는, 나와 또래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황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자고 말을 내뱉었을까, 곧바로 후회가 들이닥쳤지만 물러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그 자리에 그저 그의 눈을 버티고 서 있었다.

“어째서?”

“그가 당신의…”

어째서 그가 요르펜을 살려두어야할까. 다니엘조차 그 이유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가장 통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야했다.

“아니, 당신이 그의 동생이니까요.”

관통하듯 바라본 그의 눈이 흔들렸다. 저 눈은 아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눈일 것이다. 그는 어머니를 닮은 점이 거의 없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의 동생을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그 사람의 정확한 의중이야 저도 몰라요.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은 몇 번이고 암살자를 보낸 당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는 생각해요.”

아니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다 거짓말이고, 사실은 다니엘이 그를 사람으로도 안 여긴다고 해도 나는 그게 아니라, 라고 포장해서 말해야했다. 나는… 나는 다니엘을 살리고 싶었으니까.

“그러니 죽이면 후회하게 되실 거예요. 당신에게 남은 게 뭐가 있나요. 아버지가 있나요, 어머니가 있나요. 남은 건 그 자 하나 뿐이에요. 그러니까… 오르안.”

갑자기 이유 없이 울고 싶었다. 몹시도 뜬금 없이. 어쩌면 황당해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뭐라고, 그 사람의 아무것도 아닌 내가 뭐라고 이런 일까지 해야하나 싶었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거짓인게 들통나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 두렵기도 했다. 내일 당장 암살자가 날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물러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어리석어서겠지.

“오르안, 그를… 그를 살려주세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애절함이 들통나지 않기 위해 웃음을 지었지만, 분명히 엉망일 것이다.

통하지 않을 거짓말을, 누구도 설득되지 않을 말을 하고 있었다. 내 말 중에 진실이 들어있는 거라고는 살려달라는 애걸뿐이었다.

그저 자리에 주저앉아 그의 다리에 매달려, 부디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더 통하지 않을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움직이지 않는 턱을 움직여 말을 줄줄 뱉어냈다.

“직위에 관심이 없는 자입니다. 아마 외교관으로 그럭저럭 살다가 죽을 거예요. 일을 꾸민다고 해도 아마 늦었을 거고요. 저는 오르안의 힘이 그 낌새를 묵과할 정도일거라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 싹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모르지는 않을텐데.”

그의 말에 웃으면서 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 정도야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퍼포먼스만 있다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지 않나요."

초콜릿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 정도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마법으로 잠시 위장해도 얼마든지 만들어지는 게 그런 환상이었다.

내 말에 그는 천천히 등을 펴서 소파에 파묻히듯이 앉았다.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에 나는 얌전히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제 내 손을 떠난 일일지도 몰랐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나는 얌전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때는.

“좋아.”

내 귀를 의심할만한 대답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오르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긋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그의 목숨이나 안위에 대해서는, 내 쪽에서는. 어려울 것도 아냐. 어차피 내 쪽에서 그를 죽이려는 시도는 한 적이 없었고.”

“… 그러면, 암살자는…?”

“내가 보낸 게 아니니 나한테 말해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야. 일을 벌이는 장로들이야 언제든 있는 거고.”

허무한 결과에 하, 하고 힘이 저절로 주욱 빠졌다. 이게 뭐야.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얼굴이 확 붉어지고 허탈해졌다. 그러면 대체 왜, 애초에 화를 낸 거지.

“이 몸은 그냥 네가 궁금해서 와본 것뿐이야. 그 자를 추문에 휩싸일 위험을 감수하고 구하려고 한 여자가 있다기에.”

“그게, 왜…”

그가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어쩐지 알 수 없는 감정같은 것이 어렴풋이 내게 닿았다. 마치 빨려들어갈 것 같은 힘을 가진 눈이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방학 계획이 있나.”

“…친구의 약혼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그건 언제지?”

“아직 확정 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째서 물으시는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그러자 오르안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몹시 오만한 태도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오르제국을 보여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약혼 일정은 그대들이 그토록 환장하는 마법사를 통해서 보내도록 해.”

"초청인가요?"

너무 뜬금없는 초대에 약간 인상을 찌푸리면서 묻자 그가 매우 다정한 목소리로, 몹시도 비틀린 미소를 띈 채 말했다.

"아니. 명령하는걸세, 샤펜 양."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가 가벼운 손으로 내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아파서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누르더니 웃으면서 말한다.

“내 제국에 대해 그대가 어떤 평을 내릴 지 무척 기대가 되는 군,”

나는 아픈 어깨를 티내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면서도 웃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사람을 가지고 놀다니.

"영광입니다, 오르안."

“당연하지.”

그러더니 그가 허리를 숙여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대고 건조하게 쪽, 소리를 내고 다른 쪽으로도 뺨을 대어 소리를 냈다. 세상에서 제일 소름 끼치는 비쥬였다. 내가 질려서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그가 귀에 속삭이듯이 말하면서 내게서 떨어졌다.

“만약에 이 몸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려고 했지?”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아픈 어깨를 무시하면서 미소를 띄었다.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자료와 제가 알아낸 사실들을 종합해서 당신네 반역자 모임 같은 데다가 넘겨주려고 했죠. 지금 보니 많을 것 같군요.”

그러자 오르안은 유쾌한 소리로 웃어대더니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그대가 나의 제국에 올 날이 기대가 되는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겨우 소파에 앉으면서 생각했다. 저 형제는 하는 짓이 똑같아, 아주. 형은 사람 목을 조르지를 않나.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다니엘을 살렸다. 나도 살았다 …. 살았다. 그것을 어깨의 통증으로 실감했다.

오늘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고, 시드가 참여한 불꽃 놀이로 축제는 끝이 난다. 코라와 함께 시드를 봐야한다는 생각에 저절로 머리가 지끈거렸고, 긴장에서 벗어난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여기까지, 라는 생각에 몹시 피로해졌다.

============================ 작품 후기 ============================

이리하 등장! 초반에는 비슷했지만 이후로는 다 고쳐서 리메 전에 보시고 안 보신 분들이 봐야할텐데...(초조) 는 안 보면 어쩔 수 없으므로 뭐...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선작이 오르고 있군요... 떠긴님의 표지로 낚시에 성공..!! 어차피 선작이 많이 되어봤자 볼사람만 볼거 다 압니다.

눈누난나. 주말알바 모두 화이팅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