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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23화 (23/113)

23화

그 뒤로 가끔 꿈을 꿨다. 나는 다니엘을 처음 만나던 날의 꿈을 꾸기도 했고, 그의 비밀을 알게 되던 날의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많이 꾼 꿈은, 서류 정리를 하고 칼을 챙기는 모습이었다.

숲으로 갈까 망설이는 나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제발 그리 가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꿈의 내용은 바꿀 수 없었다. 그렇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런 꿈을 계속해서 꾸는 걸까.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애니가 들어오더니 내게 절을 하고 말했다.

"아가씨, 다니엘 이셀리아 요르펜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셔?"

"응접실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옷을 차려입고 갈 거라 조금 오래 걸린다고 전해줘, 그리고 그 분은 작은 응접실에 모셔줘. 아마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니까."

"그 곳은 밀폐된 곳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무슨 일이 있으면 널 부르면 되니까. 밀폐된 곳이라고 해봤자 그다지 그렇지도 않고. 길어진다고 해도 1시간이니까, 차를 대접해드리렴."

"네, 아가씨."

애니가 나가자마자 침대에서 조금 더 밍기적대다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카락도 정리하고 신발도 제대로 된 걸 신었다.

거울을 한 번 본 후 대충 매무새를 단장하고 시각을 보니 20분쯤 지난 상태였다. 언제 이렇게 사람이 굼떠졌지? 급한 마음에 좀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내려갔다.

애니가 마치 기다린 듯이 나를 안내했다.

"애니,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서 왔어?"

"아가씨 준비하는 시간이야 뻔하죠. 이쪽이에요."

문을 열자마자 다니엘이 보였다.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모자를 벗어 내게 인사했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보는 거였다.

다음 날 다니엘은 내게 내 검을 줬다. 그리고 내 서류도. 솔직히 말하면 오르제국 측에서 시신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 티가 나기에 뭐가 있을까 싶어서 한번 찔러 본건데, 진짜 서류가 있을지 몰랐다. 그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 지 궁금해서 읽어봤지만, 딱히 내가 아는 것보다 많이 아는 것 같진 않았다.

"시체를 태웠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내가 참관했지. …잘 지냈니?"

"못 지낼 건 뭐있나요. 학교도 쉬면서 놀고 먹는 중인데."

“그래, 그러면 다르게 물어볼게.”

근심어린 표정으로 그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괜찮니?”

잘 지냈냐는 말과 뭐가 다르냐고 나는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왜 굳이 내가 괜찮은 척을 해야하나, 이 사람 앞에서. 그와 얽혀서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울컥, 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받아 올랐다. 나는 잡힌 손에 꽉 힘을 주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꿈을 꿔요. 당신과 만나는 날의 꿈이나, 당신의 비밀을 알았던 날. 그리고 나면 숲으로 향하는 꿈을…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은데, 그 쪽으로 가고 싶지 않은데,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눈물이 뚝, 하고 한 방울 떨어졌다. 언제 나에게 상냥했었나 싶을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그저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가 원망스럽고 서러워서 그렇게 노려보고만 있었다.

다니엘은 나를 잡지 않고 있는 손을 들어서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목을 쥐게 했다. 이상했다.

억지로 쥐게 한 거였는데, 어째서 내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을까. 마치… 마치, 그의 목을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만약,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너는 어떻게 했을까, 라시아.”

마치 내게 기회가 있다는 듯이 그는 그렇게 바라보면서 그의 목을 조르기를 종용했다.

“내가 그 상황에서… 죽을 걸 알고 있는 상태라면, 너는 과연 숲으로 오지 않았을까.”

그 질문은 대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선택이었다. 갔겠지. 내가 아는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갔을 거였다.

“내가 아니라 코라라도 혹은 아비게일이었어도 너는 왔을 거야.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사람을 죽이려고 온 게 아니었어, 너는.”

그가 몹시 담담하게 쥐고 있던 내 손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어설프게 그의 목에 걸쳐져 있는 한 손과, 내 허벅지 위에 올려진 내 차가운 하얀 손. 그는 눈을 감은 채 내게 말했다.

“넌 사람을 구하려고 온 거였어, 라시아. 그러니까…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어.”

아주 느리게, 나는 그의 목에 감았던 한 손에서 힘을 풀었다. 다니엘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해주었다.

“그래도 원망스럽다면 내 목을 졸라도 좋아. 내가 네게 그렇게 했듯이.

전혀 다른 상황이었는데 그는 그렇게 말했다. 너만 없었어도, 내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너그러움에 나는 아예 그의 목에서 손을 떼면서 말했다.

“선배 탓이… 아닌 건 알아요.”

“아니, 그건 내 탓이야.”

초록색 눈이 빛을 보이면서 나를 응시했다. 무거운 진실을 매달고 걸어가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숨을 삼켰다.

“내가 너에게 그런 식으로 종용해서는 안 됐어. 네 당황을 알면서 나는- 그저 가장 쉬운 방식을 택했다. 마땅하게 네게 다른 말을 했어야 했는데.”

“…후회하지 마세요. 이미 지난 일인걸요.”

내가 할 말이 아니었는데도, 해줄 말이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래, 그렇지. 하고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지난 일이다. 과거는 어떻게 해도 돌릴 수가 없었다.

“정당방위였어요.”

그렇게 되새겼다. 우리 둘 모두를 위해서. 그래… 그는 칼이 없었고 그 자는 칼이 있었다. 어이 없이 죽을 상황에서 사람을 구했다. 정당방위였다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나는 사건을 잊기 위해 애썼다.

“이런 일 자주 겪으세요?”

“…간간히.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는 차를 마시면서 얌전하게 대꾸했다. 나는 발을 들어서 소파위에 올리고 무릎을 모은 뒤 등을 편하게 소파에 기댔다. 다니엘이 찻잔을 건네 줘서 받아 들고 홀짝 홀짝 마셨다. 그는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서 앉더니 소파의 팔걸이 쪽에 등을 기댔다.

“그러니까 난 이런 거에 익숙해. 흔한 일이지, 그 쪽의 골수분자가 날 노리는 건.”

“어쩐지 격투에 소질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검술도 사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러서, 대련을 제대로 하면 다 들통 날 확률이 100퍼센트야. 그래서 아예 여기 와서는 검도 안 잡았는데, 시드가 2학년 때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시드랑만 기초만으로 하는 대련을 가끔씩 하지. 그 자식은 왜 날 그렇게 물고 늘어졌나 몰라, 지금 생각하면."

그건 그 자가 용이라서… 나는 모른척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널 위해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사람을 처음 죽인 게… 어디보자, 4년 반 쯤 전이었지. 요르펜 공작가에 잔챙이가 들어와서 후계자를 죽여보겠다며 난리 쳤었어. 그 때 얼결에 3명인가 죽였던가."

"자책감이라든지, 회의감 같은 건… 없었어요?"

“니가 칼을 코앞에 둬봐라. 그런 생각이 드나. 살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어. …너도 아마, 앞으로 여러 정치적 상황을 겪으면서 여러 경험을 겪을 건데, 그 때 지금 생각하면 이불 좀 걷어찰거다. 내가 비싼 밥 먹고 왜 저런 생각을 했었지, 하고.”

“와, 그거 정말 기대되는 미래네요.”

시큰둥한 목소리로 내가 비꼬자 그가 싱긋이 웃었다. 그제서야 내가 아는 다니엘의 얼굴이 돌아온 것 같았다.

가끔 보이는 그의 얼굴이 몹시 무서웠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의 전부가 내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인 것은 감사할만한 일이다.

내 두려움과 히스테리가 가라앉은 것을 눈치 챈 그는 자신이 키운 고양이와 강아지들 이야기, 가정교사를 골탕먹인 이야기를 해줬고, 자신의 말투는 요르펜 공작과 쏙 뺀 거라고 거듭 말했다. 나는 실컷 웃은 뒤 다 마신 컵을 어디 둘까 하다가 그냥 컵 받침이랑 같이 소파 위에 살짝 올려뒀다.

쏟을 일도 없고, 괜찮겠지.

“그거 이리 줘, 내가 올려둘게.… 이제 기분 좀 풀렸나보네.”

그에게 컵을 건네자 손을 뻗어서 테이블에 올려둔다.

“네. 거의 완전히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혼자였다면 훨씬 헤맸을 거예요.”

“그럼 이제 우리 괜찮은 거지?”

그가 매우 다정한 미소로 내게 물었다. 마치 내가 사랑스러워서 보는 듯한 얼굴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말하마… 살려줘서 고마워. 비단 살려준 것 뿐만 아니라, 이후의 용기 있는 행동과 지혜로운 처신에 깊이 감명 받았단다.”

그가 매우 세련된 태도로 내게 감사를 전했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동시에 씁쓸했다. 그는 내 표정을 모른 척 해주더니 말했다.

“너는 가끔 날 모두 아는 것 같은 얼굴을 해.”

그 점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그는 내 표정이나 행동을 지나치게 잘 읽었고, 그건… 기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인데….”

그러자 그가 개구지게 웃으면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날까, 너도 쉬어야하고, 라며 일어나 자신의 코트와 모자를 챙겼다. 그가 짐을 챙기는 동안 나는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아, 잊을 뻔 했네. 내가 온 이유가 이거 외에 하나 더 있어."

몹시 가벼운 태도로 다니엘은 코트를 입으면서 내게 말했다. 더 할 말이 없는데 무슨 용건인가 싶어서 고개를 기울였더니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 동생 보고 싶지 않니?”

당신이 동생이 어디 있어, 하고 시큰둥하게 서있다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오르안이 온다더구나, 축제에 늦게나마 동참하고 싶다고 말이야. 공식적으로는 그렇고, 비공식적으로는… 아마 널 보러 오는 게 아닐까 싶은데.”

“동생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지금? 당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인데?”

그러자 다니엘은 낄낄거리면서 자신의 모자를 쓰면서 말했다.

“그 자가 보냈다는 증거가 없잖아.”

“뻔한 일이잖아요.”

다니엘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너무 몰아가선 안 돼, 하고는 내게 웃어보였다. 이 사람은 배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지금 선배랑 똑같은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조차 모르겠네요.”

다니엘은 내 까칠한 태도에 퍽 유쾌한지 다시 한 번 웃더니 내게 다가왔다.

"헷갈리면 안 되지. 이리하가 와. 내일이 축제의 마지막 날인데, 재밌겠지?"

재미는 개뿔. 심지어 날 보러 제국의 황제쯤이 되는 사람이 온다니, 부담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 사태에 대해 내가 뭘 어쩌라는 말인가. 다가오는 그를 불만스럽게 바라보고 있자 그가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왜 이러나 싶어서 어깨를 살짝 비틀었다.

"어허, 가만히 있어. 비쥬할거야, 친애하는 아가씨. 그리고 그가,"

왼쪽, 오른쪽. 그의 뺨이 내 뺨에 닿고, 입으로 낸 건조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색해서 인사가 끝나자마자 얼른 물러섰다.

"널 사절단의 대표로 요청했어."

"…사절단이라면."

"보통은 4학년의 대표가 맡거나 교장이 맡는데, 그 쪽이 하는 요청은 요청이 아니잖아? 명령이지.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요, 후배님."

가까운 얼굴로 보이는 다정해보이는 초록색 눈에는 징그러운 장난기가 듬뿍 담겨있었다.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날 좀 오래 오래 살려두라고 말해주세요, 알았죠? …내가 보기엔 후배님이 내 동생을 상당히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다물었다. 다니엘이 언제 나와 가까이 붙어있었냐는 듯이 잽싸게 떨어져서는 손을 흔들고 응접실을 나섰다. 이를 갈면서 몇 번이고 생각했다.

다시 꿈을 꾸면 그 쪽으론 안 가! 살려달라고 빌어도 안 가!

도대체 어디서 오는 자신감이야, 저건?

충동적으로 쇼파를 걷어차고 후회했다. 애니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우리 아가씨 아니야.. 하며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지.

============================ 작품 후기 ============================

오오.. 다음편.. 드디어 나온다... 이리하... 오오오오ㅠㅠㅠㅠ미친듯이 연재...솔직히 지금 쓰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뿌듯하네요! 휴.. 옛날의 나.. 왜이러게 쓰레기였을까...(쓰담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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