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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22화 (22/113)

22화

부운 눈으로 자리를 모면하고 몹시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일 당장 다른 사람이 곤란에 처한다.

어째서 모든 관계는 내가 바라던대로 흘러가지 못하는 걸까. 차가운 얼음을 손수건에 감아 눈을 문지르면서 서류를 정리하고 나니 시각이 생각보다 늦었다. 평소라면 치안이 좋은 알트라지만 아무래도 그 윌 인가 하는 마법사 때문에 겪은 일도 있고 해서 오늘만이라도 좀 조심성 있게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연무장에 들려서 검을 챙겼다.

내일 제대로 반납하면 되겠지. 지금 내 수준으로 개미 한 마리라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들고 가는 쪽이 훨씬 안심이 되었다. 기왕 가는 거 빠른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숲을 통해서 가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발도는 해둘까. 느긋하게 후원을 통해서 나가는데 긴장한게 무색하게 숲은 조용했다.

괜찮겠지?

숲이라고 해도 오히려 더 밝게 해둔 곳이라 느긋하게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는 중이었는데, 어디서 말싸움 소리가 들렸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곤란해질 게 뻔해서 얼른 지나쳐 가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혹시 아는 사람이 곤란에 처한게 아닐까. 나는 머뭇거리다 그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혹시 나 아는 사람이 아니면 괜한 참견이 될 수 있으니 재빨리 빠져나와야지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갈 수록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습니까?"

"…오르에서는 이를 허용…"

오르? 무시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최악의 경우, 내 예상이 맞다면…. 나는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발소리를 죽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살짝 고개를 내밀고 숨을 가다듬었다. 초콜릿 색. 이런 젠장, 다니엘이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흘러갔다. 같이 있는 쪽은 평범한 여행가 복장의 남자였고, 칼을 들고 있었다.

오르라는 소리가 나왔을 때부터 영 불길했지만 다니엘은 어째서인지 몹시 침착해보였다. 왜 저렇게 침착한거야, 당장 도망이라도 갈 것이지! 칼 한 자루 쥐고 있지 않은 그가 불안해 어떻게든 검을 건네줘야하는 거 아닐까 싶어 위험을 무릅쓴 채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 갔을때, 빛이 반사되어 그 칼 끝의 문양이 보였다.

오르제국의 문양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서 죽이라고 하던가?"

다니엘의 목소리였다. 나는 움직임을 멈춘 채 침을 꿀꺽 삼키고 최대한 바짝 나무 뒤에 서 있었다. 여차하면 들킨다…. 꽤 가까운 거리라 나는 감히 뒤 돌아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칼을 쥔 자는 대답이 없었다.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고 있는 내 귀로 들리는 건 말소리가 아니었다.

'쉬익-!'

칼이 움직이는 소리.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그들의 상태를, 아니 다니엘의 상황을 보기 위해 움직였다. 다치지는 않은 것 같은 다니엘은 제법 침착하게 칼의 동선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몸을 빼더니 재빨리 상대방의 옆구리를 찼다.

상대방은 꿈쩍 하지 않은 채로 다시 다니엘의 목을 노렸고, 다니엘은 앉아서 그 칼을 피했다. 그는 그대로 몸을 뻗어 상대방의 몸을 잡아 쓰러트렸는데, 그 와중에도 상대방은 칼을 놓지 않았다.

전문가다. 적어도 오르 제국 측은 제대로 교육받은 자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끼어들어야하나? 아니, 섣불리 끼어들어봤자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제발, 선배, 그냥 어떻게든…!

그 때 다니엘이 그대로 손을 뻗어 상대방의 오른쪽 흉부를 정확히 찌르고, 그가 잠시 숨을 못 쉬는 틈을 타 무릎으로 배를 찼다. 상대방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려는 것이 보였다.

어, 어?! 끼어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 한 편으로 날아가버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 내가 가진 칼로 그 칼을 쳤다. 캉,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상대의 칼이 떨어지자 마자 욱씬 거리는 손목 통증을 무시하면서 재빨리 칼을 주워들었다.

이제, 이제 어떡하지. 아직도 깔려있는 채인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가 외쳤다.

“찔러, 라시아!!!”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했다.

"컥........!!!!!!!!!!"

그의 동맥에서 피가 분수처럼 나와 다니엘을 적셨다.

"… 설명은 나중에 들을게요."

겨우 숨을 가다듬었다. 엉겁결에 힘을 준 손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아니, 내가 지금 저지른 일의 대가로 이렇게 떨리는 걸지도 모른다. 칼은 죽은 자의 목에 꽂혀서 빠지지 않았다. 손을 늘어뜨린 채 나는 떨면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사관학교 학생들을 부르세요. …오르제국의 사람이 여학생을 노렸는데… "

그의 얼굴에 피가 흥건했다. 나는 메이는 목으로 계속 말했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도 스스로 알 수도 없었다. 이런 게 통할지도, 이게 과연 무슨 일인지 제대로 말이 맞아가고 있는 건지 알지 못한 채 나는 그냥 병신처럼, 웅얼거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다니엘이… 구해주려던 도중에, 도와주려던 여학생이 당황해서…그의 목을 찔러버렸다고요."

나는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말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찌르라고 명령했던 얼굴이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를 조용히 재촉했다.

"어서요, 힐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웃옷을 벗어 나를 덮어주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니.”

움직이지 않는 목을 억지로 움직였다. 마치 몸의 어딘가가 고장난 것 같았다.

손이 마치 재봉틀 위에서 움직이는 바늘처럼 떨렸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고작 1분 남짓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입술이 다각다각 부딪혔고, 내 손에 쥐어진 검은 남자의 목을 뚫고 있었다.

나는 이 숲에, 시체와 함께 있었다. 죽인 것은 난데, 내가 오히려 죽도록 무서웠다.

왜 하필 그 때, 나는 여기를 지나갔고 그는 여기에서 이런 일을 당했을까. 아니, 어째서 그의 비밀을 알아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왜 나는, 이 사람을 만나고, 어째서 그 때 그 숲에서 …

“라시아.”

그럼에도 이 초록색 눈을 보는 순간 어째서 이런 원망의 말을 할 수 없는 거지. 왜, 이 사람의 어디가 도대체… 어떻게 나한테 작용하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나를 껴안아오는 다니엘의 품 안에서 울었다.

“미안해, 무서웠지.”

품에서 나는 향기와 섞인 피냄새. 내 머리 끝에 알알히 맺힌 핏방울이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의 등 뒤로 사관학생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에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이런 나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토록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나를. 사람을 구한답시고 다른 사람을 죽인 나를.

“도망치라고 했어야… 맞는 말이었는데.”

내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면서 그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나를 안아들었다. 맞아. 당신은 나한테 도망치라고 해야했어. 찌르라고 말해서는 안 됐어.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이란 말이야.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찌른 건 나였다.

*

"그러니까, 레이디를 덮쳤다고요, 그 사람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떨렸다.

"오르제국의 사람인 줄은 아셨습니까?"

"아뇨. 검을 확인하고야 알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샤펜양은 지금 무척 흥분한 상태입니다. 제가 대신 진술하면 안 되겠습니까?"

다니엘이 내 떨리는 손을 잡아주면서 말했다. 사건 조사차 교장선생님, 내 보호자인 샤펜공작이 왔고, 시신이 오르제국 측의 사람인 것이 밝혀지자마자 시드의 어머니인 엘리엇의 도움을 받아서 오르제국의 외교부측과 연락을 하기로 했다.

내가 성적인 폭력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중립지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특이사항 때문에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구성하기로 서로 협의했다.

"좋습니다. 다니엘 이셀리아 요르펜군 맞으십니까?"

공식적인 오르 정부와 관련된 일도 아니고 중립지에서 벌어진 일이라 딱히 이 일을 조사할 만한 감찰관을 파견하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상대가 베노암 국의 공작가의 딸인 나이니 말이다.

일단 증인도, 증거도 없으니 피해자인 내 말만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입을 조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솔직히 난 정말로 어떤 말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쩌다가 이런 일까지 겪는 거지. 하루만에 벌어진 모든 일이 내게 너무 벅찼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들은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씻지도 못한 상태로 회의실로 끌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싶은…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내 복잡한 심경과는 달리 다니엘은 몹시 차분하게 증언을 했고, 샤펜 공작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차갑게 엘리엇이 띄워놓은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차갑게 식은 손을 가만히 두고 있었다.

"무장한 남자를 죽이다니…그것도 레이디께서. 차라리 요르펜 군이 죽인 게 더 그럴 듯한데요."

다니엘이 말했다.

"샤펜 양은 모르시겠지만 로드리고 소속입니다. 저와 다른 여러 남자 선배들이 그녀에게 기초적인 훈련을 사사하고 있고, 얼마 전에는 찌르기를 완벽하게 배운 사람입니다.

날도 어둡고 하니 호신용으로 칼을 챙긴 상태였고, 이를 모르는 험한 마음을 품은 자가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려 한 거겠지요. 이를 발견한 제가 도우려 했지만 저도 단순한 외교관으로 큰 능력은 없었고,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를 잡고 있는 와중에 자기를 보호하려고 어쩔 수 없이 찌른 거죠."

진술로는 완벽했다. 그 자가 내 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훈련받은 살상자로 다니엘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라는 진실은 전혀 중요한 일도 아니고 굳이 알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무너뜨릴 필요 없는 완벽한 증언에 오르제국 측에서 입을 닫고 있자 샤펜공작이 엄격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오르제국은 이 일을 반드시 책임져야 할 거요. 샤펜의 후계자 자격이 있는 내 둘째 딸에게 험한 꼴을 보이려는 제국민이 그대들의 백성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

"물론입니다. 레이디 샤펜, 괜찮으신지요."

어떤 대답을 해야할까. 나는 아무 말 없이 허리를 펴고 영상 너머의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괜찮지 않아요. 저는 저 자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타국에서 본국의 평판을 이리 깎아내린 자를, 당신들도 보호해봤자 좋을 게 없을테지요. 저한테…”

그들이 예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내가 무엇을 요구할 지 주시하고 있었지만 내가 할 말은 정해져있었다.

“시신에 대한 권리를 주세요. 그를 불태우고 싶군요.”

잔혹해보이는 요구였지만 증거인멸에 무엇보다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다니엘을 죽이려고 했을 거였다. 공작을 암살하는 것보다는 공작 후계자를 암살하는 쪽이 처리가 간단했고, 아마도 축제라는 정신 없는 틈을 노린 거겠지. 난 거기에 보기 좋게 휘말린 꼴이고.

"… 저희에게 맡겨주신다면 엄격히 다루겠습니다. 극형에 처하도록 하지요."

"그건 제가 원하는 처벌이 아닙니다만.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참… 레이디 마사께서는 여기서 잘 지내신다고, 오르안께 전해주심이 어떠신지?"

내가 웃으며 말하자, 안경알 너머로 외교부측 남자의 까만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이 곳에 있는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다니엘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내 손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오르제국도 그리 큰 외교적 트러블을 만들기는 싫을텐데요, 아닌가요? …아니면, 그깟 시신 하나에 뭐 큰 볼일이 남으셨나보죠?"

침묵이 흘렀다.

"좋습니다, 레이디 샤펜."

“이해해주시니 기쁘네요. 이만 끊으셔도 좋습니다. 마법 유지하기 힘드실텐데.”

그가 미소를 짓더니 영상이 꺼졌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다니엘의 손을 치웠다. 일어서려했는데, 우습게도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샤펜공작이 나를 부축했다.

"시신을 어쩌길 원하느냐."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는 그의 몸에 거의 매달린 채인 것이 창피해서 입술을 깨물고 다리에 힘을 줬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다니엘, 그 곳에 제가 칼을 두고 왔는데, 좀 들고 와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리고 그 자에게 제가 반항하면서 서류를 던졌는데, 그것도요. 혹시 있으면, 말이죠. 그리고 공작님, 바라건대.”

"말해라."

나와 똑같은 은회색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온기라고는 한 점도 없어 보이는 눈에 저절로 몸이 떨렸지만 나는 그것를 무시하고 빤히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신은 불태워주세요. 한 줌도 남김없이요. 저한테 감히 손을 댔던 자의 손끝부터 머리털 하나 끝까지, 모조리…"

샤펜공작이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마치 오랫동안 그의 사랑을 받아온 딸인 것처럼 샤펜 공작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해주마."

다니엘이 내게 말했다.

"얼마 뒤에 찾아갈게."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몹시 피곤했다. 의식을 잃듯이 잠에 빠져들면서 떨리는 손을 잠재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 작품 후기 ============================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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