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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21화 (21/113)

21화

"너 어떻게 내가 거기 있는 걸 알았어?!!"

"일단 기다려봐. 이걸로 끝이 아닐테니까."

그러더니 그는 두어번 정도 더 마법을 부렸다. 내가 아는 시드 그대로의 얼굴로 말이다.

"내가 보기엔 그 남자 보통 마법사가 아닌데 이걸로 되겠어? 너 이 상태에서는 중급마법사라면서?"

"이봐, 드래곤을 무시하지 마. 인간과는 전혀 다른 테크닉이 있다고."

지금 내가 얘랑 이런 대화를 할 줄이야. 순식간에 공간을 몇 번이나 이동한 시드를 미심쩍게 바라보다가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쳐서 그냥 한숨을 쉬고 여긴 어디인지를 살폈다.

"페드윈 안이야. 우리 자주 만나던 후원."

"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다."

골치가 아파서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시드가 고생했다며 웃고는 발 아프지? 하고 묻더니 내 신발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벗을게."

시드가 주저앉더니 내가 발에 손을 대려는 걸 막았다. 난처해서 웃으니 그가 내 발을 한 손에 올렸다.

"이럴 필요 없어. 엄청 더럽기도 할 거고…."

"오페를 대신해서 미안해서 하는 거야. 얼른 끝낼게."

내가 발을 치우려고 꽤 험하게 움직이자 시드는 내 발을 꽉 쥐고는 말했다.

“너 이러다가 속옷 보인다. 그리고 지금 구해준 은인을 발로 차는 거야?”

그 물음에 할 말이 없어져서 얌전히 서있자 옳지, 하고 말하더니 균형을 잃지 않도록 내 왼손을 받쳐주고는 오른 쪽 신발을 벗겼다. 연청색 마력이 은은하게 퍼져나와 내 발을 감쌌고 그 덕인지 발의 긴장이 사르륵,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쪽 발도."

그러더니 조심스레 내 오른발을 내리고 왼발의 구두를 뒤쪽부터 천천히 벗겨냈다. 이게 무슨 낯간지러운 짓인가 싶어서 몹시 난처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주변에 사람은 없겠지. 왼쪽 발의 긴장이 풀리고, 그가 구두의 흙으로 엉망이 된 자기의 손을 털자 금방 빛이 나면서 깨끗해졌다.

"이건 네가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필요하니까."

그러더니 그가 천천히 '르웬'의 모습으로 변했다. 저절로 움찔, 하고 몸이 떨려서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 남자가 누구라고 하던?"

'르웬'은 내 구두에 그 특유의 연초록색 기운을 넣기 시작했다.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바라보는데 순간 그의 연청색 눈의 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이 눈에 띄었다.

" 윌 사비엥이라고… 혹시 아는 사람이야?"

"마탑의 마법사였지, 그 인간."

'르웬'은 인간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단어는 이종족이 우리를 칭할 때 쓰는 말이어서, 나는 그가 조금 어색했다.

"였다,고?"

"쫓겨났다기보다는 탈출했다는 말이 맞겠지. 오페 이 자식은 레어에 박힌 지 오래라서 위장 하는 것도 까먹었나보네. 자, 신어봐."

나는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신겨주는 신을 거부하고는 직접 신을 끌어다 신으면서 물었다.

"탈출?"

"사상이 불순해서 관리감독 대상이 됐거든. 지하감옥 3층에 수감됐었는데, 그걸 깨고 탈출했어. 인간치고는 괜찮은 마법사였는데, 그다지 좋은 식으로 힘을 사용하진 않아서 지금은 아마 암흑가의 마법사 중의 하나. 자, 다 됐다."

"그렇구나… 음. 너 마법 쓸 때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나."

"드래곤의 특징이야. 뭐, 하여간. 조심 좀 하는 게 좋겠어. 오늘 같은 상황이 항상 발생할 수 있으니까."

그가 건네주는 신발을 신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용건이 끝나자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힘들고 당황스러운데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우리의 싸움과 상황이 그제서야 기억났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빤히 아래만 내려다보다가 내가 해야할 말을 깨달았다.

“르웬…이라고 부르면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감사는 전해야할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그냥 반말해도 괜찮아.”

르웬은 약간 서운하다는 얼굴과 몹시 머뭇거리는 태도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바람에 날려 난장판이 되었을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당신의 친구는 아니니까요. …본의 아니게 계속 신세를 지게 되네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보답을, 뭘로 해야할 지 모를 정도로….”

“드래곤에게 나이는 의미 없는 것에 불과해요. 그러니까 반말해도 괜찮아요.”

다른 모습,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 어떤 것에서도 내가 알던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그 점이 내게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르웬’이 자신의 정장 코트를 벗어서 내게 건네면서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네가 날 안 무서워할까.”

다시 태어나 보시든가. 입을 삐죽이면서 혼자 생각하다가 몹시 피곤해져서 한숨을 내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널 좋아하고, 그리고 내가 드래곤인게 너한테… 그렇게 힘든 일이야?”

그가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그렇게 물었다. 분명히 네게도 내게도 힘든 일이다.

너는 왜 하필 나를 좋아해서. 다른 여자애를 좋아하지. 다른 여자애를 좋아해서, 나와 코라가 그냥 웃으며 너를 놀릴 수 있게 해주지. 그랬으면 나는 너를 순수하게 친구로, 정말 좋아할 수 있었을텐데. 하다못해 네가 드래곤이 아니었기만 해도, 나는 너를… 그냥,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텐데.

“나는… 시드, 나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야. 나는 단 한 번도 드래곤이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리고 드래곤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타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상상도 해본 적이 없거든. 그냥 너무 다른 사람이잖아. 너한테는 모르겠지만… 인간한테 드래곤은 그런 거잖아.”

말이 자꾸만, 나답지 않게 더듬거려졌다. 나는 이 애와 삼개월동안 친구였다. 목숨을 나눌 친구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고, 시험이 끝나면 함께 놀러다니고, 시험 때는 함께 공부를 했다. 막연하고도 당연하게 먼 미래에도 친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이 모습도 너도, 저 모습도 너라고 하지만 나한테는… 그런 개념은 너무 어려워. 너로서는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사람인 내가 그렇게 쉽게 나보다 수십배는 크고 위협적인 대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어. 그것도 이렇게 복잡한 존재를 말야. 유희라는 개념으로 어떤 사람도 될 수 있고, 언제나 이 삶을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를 내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단순하게 그래, 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둘 수 있겠니.”

그는 이해한다는 듯이 그저 내 앞에 서있기만 했다. 용기를 내야했다. 단지 누군가 존재함으로, 누군가의 정체성 때문에 거절한다는 것은 보다 용기있어야 했고, 그리고 좀 더 진실된 미안함이 있어야 했다.

“네 마음은… 지금 생각해보면 알겠어. 가방을 들어주고, 연습실에 선배랑 둘이 있으면 내려오고, 날 찾아서 후원으로 와줬고…. 그리고 내 고민이 있으면 손해를 감수하고 내 옆에 있어줬어… 넌 나를 좋아해줬어. 고마워. 정말로 기뻐.”

그 말에 시드가 내 이어지려는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오페가 옛날에 그렇게 말했어. 인간 여자를 사랑하다니 어리석다는 내 질책에….”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다시 미소 짓더니 말했다.

“영원을 찰나같이 느끼게 해주는 인간을 만났으니 사랑에 빠지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고. 드래곤이 아닌 인간이기를 바란 적은 처음이라고…. 나도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알아. 그런데 라시아.”

그 연청색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빛이 관통하는 것 같이 순수하고 파란, 드래곤의 눈에 나는 몹시도 슬퍼졌다. 이 감정을 마주보고 서는 내 감정이 슬픔이라는 것에, 나는 그저 말을 잃고….

“나는 너를 좋아하게 됐어.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모든 시간이 그저 찰나로 변해도 좋아. 나는, 네 앞에서는… 나, 인간 남자가 되고 싶어.”

어째서 신은 드래곤을 인간으로 변할 수 있게 한 걸까. 우리에게 왜 똑같은 외모와, 언어를 허락했을까.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어째서… 받아들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걸까.

“미안해.”

넘어가지 않는 침을 억지로 삼키고 나는 말했다.

“나는 너보다, ‘우리’가 더 소중해.”

친구를 잃는구나. 나는 나를 좋아한다는 너에게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널 한 번도 그런 식으로는, 본 적이 없었어… 네가 날 좋아한다고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어. 나는, 그냥, 이렇게 함께 있고 싶어.”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보였다. 시드는 그렇구나, 하고 웃었다. 괴로울 정도로 느껴지는 죄책감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울고만 있었다. 시드는 나를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채 그렇게 서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우리의 관계는 끝을 맺었다.

============================ 작품 후기 ============================

애매해서 일단 여기서 끊고, 다음 이야기를 진행할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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