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20화 (20/113)

20화

알트라의 축제기간의 시작이 가까이 다가오자 귀족들도 하나 둘 알트라로 향해왔다. 아비게일을 보기 위해 샤펜공작 또한 축제 시작 이틀 전에 알트라에 도착했는데, 그가 도착한다는 편지가 오자마자 제프리는 가장 좋은 방을 비워서 정리하고 온 저택의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심술이 나서 내가 있을 때나 그렇게 하지, 라고 말했더니 제프리는 라시아 아가씨는 피가 초록색이 아니라서 그렇게 안 한 거라고 말했다. 초록색 피를 가진 사람들은 좀 더 깨끗한 환경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아비게일은 제 아버지가 온다니 기분이 약간 들떠보였고, 나는 그저 긴장이 되었다.

그가 내가 낸 결과에 만족했을 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도착한 샤펜공작은 하얀 장갑을 벗어서 제프리에게로 넘기더니 단정히 서있는 모든 고용인들을 보고는 말했다.

"몇 명이 바뀌었군."

"예. 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몇이 정년인데다가 퇴직 희망자를 퇴직시키느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프리가 대답하자 그렇군, 하고 샤펜이 대답한 뒤 아비게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우아하게 절을 해보이더니 그의 뺨에 키스하는 것으로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냈니."

"네, 아버지. 국사를 맡아 그동안 노고가 많으실텐데, 집에서 만큼은 편안하게 쉬시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함께 있지 못하니 알 수가 있어야지요."

아비게일이 자연스럽게 샤펜공작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파란색 피가 흐를것 같이 창백한 얼굴에 뻣뻣한 태도는 어디로 가고, 부드러운 미소가 흐르는 게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놀란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도 후원자에 대한 예의를 차렸다.

"못 지낼 이유가 없지. 네가 이렇게 날 걱정하는데.“

그가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확인했다.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우아하게 절을 하면서 말했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제게 해주신 여러 배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는 그거 잘 됐군. 하더니 올라가 쉬어라, 라고 말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녀가 응접실로 가는 것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제프리."

"네, 왜 그러시죠, 아가씨?"

"저녁식사 때 불러요. 그리고 공작님이 평소에 드시는 달달한 차말고 좀 시원한 차로 드리세요. 구두 바닥에 흙이 묻은 걸 보니 여정이 마냥 상쾌하지는 않았던 것 같으니까."

제프리가 고개를 숙여서 명에 응했다. 몸이 영 무거워지는 기분에 내 방으로 올라가서 축제 관련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애니가 만찬용 드레스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러 올라와서 얌전히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 식사를 했다.

먹다 체할 것만 같이 불편한 자리에 적당한 기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는데 식사가 끝나고 바로 올라가는 것은 또 예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나는 응접실에서 책을 읽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아비게일이 영 빨리 침실로 가지 않아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겨우 아비게일이 들어가자 얼른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샤펜 공작에게 굳이 말을 걸어야해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왜, 여행이 피곤하셨을텐데 일찍 들어가 쉬셔야지!

"학교생활은 어떠니."

내 마음 속의 소리가 들렸나.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했다가 나한테 물어보는 것임을 깨닫고서야 책을 내려놓고는 대답했다.

"재미있습니다."

"성적이 좋다고 메리웨더 교수님이 칭찬하는 편지를 받았다. 생각보다 잘 하고 있더구나."

"감사합니다."

다시 침묵이었다. 나는 책을 다시 펼까말까 하며 한참 있다가 가만히 있었다.

어쩔까 하다가 이런 질문을 어색하게 더 받느니 그냥 내가 먼저 피곤하다는 핑계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잽싸게 그에게 먼저 들어가겠다고 통보했다. 그도 나와 있는게 마냥 편하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 퇴실을 허락해주었고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반쯤 열었을 때 갑자기 그가 내게 말했다.

"뒷모습이 리이와 닮았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살짝 돌렸다. 힐끗 남자를 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날 싫어하는 것도 닮았어."

그가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달그락, 하는 소리가 내 귀에 몹시 거슬렸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공작님.”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는 걸까. 그 날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라시아, 라시아!!!"

"네! 여기요, 팜플렛, 그리고 오늘 참석하는 분들 명단!"

"고맙다!!"

커튼 뒤에서 페드윈의 홀에서 백조처럼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아비게일이 홀을 아름다운 파티장으로 변신시켰다.

물론 아비게일이 혼자 이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가 디자인한 홀이 몹시도 아름다운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였다면 아마도, 직접 다자인하기보다는 사람을 고용했겠지. 나와는 다른 재능이 있는 사람을 보면 언제나 부러웠다.

그다지 가지고 싶지 않은 재능이라도 아련하게, 그런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감탄이 나올 정도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지, 아비게일은 많은 여기저기 불려가는 중이었다.

당연히 입어야 하는 축제용 정복 중 몇 가지를 자체적으로 생략한 시드는 한 부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여성분은 쌍둥이들과 똑같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연청색 눈동자도 어렴풋이 보였다.

아, 에드가 가문의 가주분이신가보다. 뭐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우연히 지나치는 척 하면서 시드에게 아는 척 했다.

"안녕, 시드. 보이길래…"

시드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분과 문득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랐다. 그녀가 정말 깜짝 놀랐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실례죠? 이렇게 빤하게 쳐다보다니."

"아니요, 이해한답니다. 제가 특정 공작님과 꽤 닮아서 말이에요. 안녕하세요, 레이디 에드가."

그녀는 웃더니 시드에게 눈짓을 했다.

"시드, 이 재치 있는 아가씨를 좀 소개해줄래?"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이에요, 어머니. 제 동갑내기 친구고 이번에 편입했답니다. 샤펜의 양녀예요. 그리고 라시아, 이 쪽 여성분은 엘리엇 볼드윈 에드가시고, 이 신사 분은 앙트 로함, 내 부모님들이셔."

소개할 때 엘리엇은 작게 부채를 흔들었고, 앙트는 쓴 모자를 잠시 들었다 다시 썼다. 데릴 사위시구나. 그러고보면 앙트는 평민 출신의 마법사 였던 걸로 기억한다.

"만나서 반가워요, 라시아. 이번에 샤펜 공작이 특별한 인연의 아가씨를 양녀로 맞이한 게 틀림없네요. 쌍둥이들이 샤펜 공작을 닮았다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놀란 건 다른 것 때문이랍니다."

그거 말고 나한테 얼굴을 보자마자 놀랄 게 있나, 싶어서 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멀리서 걸어오는데 … 어머니와 꼭 닮았네요. 분위기나, 서있는 태도나…"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얼른 절을 했다.

"어머니를 아시는 지 몰랐어요. 기억해주시고 닮았다고 해주셔서 정말로 기뻐요."

"리이가 당신을 많이 좋아했겠어요, 그렇죠?"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이 시드를 밉지 않게 툭, 치면서 말했다.

"좀 닮아보렴, 시드. 똑같이 양자인데 너는 왜 이러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양자라고?

"어머니, 밖에서 그런 이야기를 막 하시면.."

"들으라고들 해라, 너 찔리는 것 있니? 난 네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물려주는 거다. 쌍둥이들이 가위바위보에 똑같이 보를 낸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네가 묵부터 내는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럼 그게 사기였단 말이에요?!!"

"시드, 언성 높이지 마라. 어쨌든 네가 졌으니까, 안 그래?"

시드가 뭐 그런 게, 까지만 말하다니 한숨을 쉬었다.

"됐어요, 내가 언제부터 어머니를 이겼다고."

그러자 엘리엇이 감동받은 얼굴을 하더니 그의 아들의 뺨에 키스했다. 나는 둘을 계속 왔다갔다 쳐다보고 있었다. 양자? 어딜봐서 양자란 말인가? 물론 안 닮긴 했지만… 눈이 쏙 닮았잖아?!!

"아가씨가 많이 놀란 모양이네요. 눈이 닮아서 그런가요?"

엘리엇이 웃으며 물었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앙트가 시드와 비슷한, 연갈색 머리카락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둘과는 달리 아버지를 조금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에드가 가문의 핏줄과 가까운 아이들은 모두 흑갈색 머리카락에 연청색 눈동자를 가진답니다. 단 한명의 예외도 없죠."

앙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설명해줬다.

"그러니까 애초에 저와 엘리엇을 반반씩 닮은 아이는 있을 수 없어요. 그건 에드가 가문의 혈통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저희가 방랑하던 도중에 시드를 만난 겁니다. 시드는 저와 비슷한 연갈색 머리카락에 놀라울 정도로 엘리엇과 똑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어요. 저흰 이게 운명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앙트가 엘리엇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데릴사위가 들어오면 흔히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무시하고 그들은 정말로 행복해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운명이었을까. 시드가 그 둘에게 나타난 것은, 정말로.

"둘이 할 이야기가 있었던 거지요?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랄게요."

그러더니 엘리엇과 앙트가 천천히 걸어서 홀의 다른 편 방향으로 갔다. 나는 시드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운명이었어?"

내 차가운 목소리와 비아냥 거리는 말투에 그가 일단 나가자며 나를 끌고 홀을 빠져나왔다. 옆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부자연스러움. 연청색 눈동자. 인간의 몸에서 나올 수 없다던 드래곤. 기시감.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내 발로 가, 하고 쏘아붙였다.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아니, 당황스러운 걸 이렇게 느끼는 건가. 사람이 없는 정원으로 나와 멈춰선 그를 앞에 두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며 팔짱을 꼈다.

시드는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곤란해하는 표정이었고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아는 척을, 해야하나. 순간 그럴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갔다.

그가 드래곤인 걸 알면, 모든 것이 바뀐다. 나는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 밖에 내는 순간 이 자는 내 친구가 아니다. 그 무엇이라 부를 수도 없는, 애매한 존재로 남는 것이다.

“미안, 나 머리가 아파서. 그만 돌아갈래. 좋은 부모님을 만난 거 축하해.”

무슨 말을 하는 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나는 몸을 돌려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아는 척 해서 좋을 게 없었다.

드래곤의 유희는 불문율이었고, 그가 드래곤인 걸 알게 되면 그 사실을 감당해야한다. 나는…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이렇게 큰 비밀을 알고 싶지 않았다. 몸을 돌리는 내 손을 잡아 채면서 시드가 험악하게 말했다.

“왜 모르는 척 해?”

표정을 숨기는 데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째서 그 순간 눈이 떨리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을까.

“뭘?”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잡힌 손이 몹시 아렸지만 그것도 모른 척 했다. 알고 싶지 않아. 네 진실에 나는 조금도 닿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비밀을 가지고 싶지 않았고, 감당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러니까.

“시드, 내 손을 놔.”

“나와 연관 되는 게 싫어?”

그의 직설적인 말에 나는 입술을 떨면서 그를 외면했다. 나는 이미 쓸데 없는 다니엘의 진실을 알았다.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들켜서 죽을 위험도 넘겼다.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시드가 말했다.

“내가 르웬이야. 나는 널 해치지 않을 거야.”

무슨 바보 같은 말인가. 내 떨리는 손을 르웬이 몹시 세게 잡았다. 그 때 내가 끌어 안았었던, 비늘의 감촉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좋다고 생각했었던 그 감각에 소름이 끼쳤다. 인간의 모습인데 그 때보다 네가 훨씬 낯설다.

“왜 나한테, 말해주는 거야?”

“네가 알고 있기를 바라니까.”

“어째서? 내가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말한다면 코라에게 먼저 말해야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광장에서 혹시나 했었던 생각에 불이 반짝, 들어왔다. 나는 네가 할 말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 말 중 단 하나도 듣기 싫었다. 너는 왜 내게 진실을 강요하지? 그게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너는 모르는 걸까.

“답을 알고 있잖아.”

“알고 싶지 않은 답이었어.”

나는 그를 비난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난 널 모르겠다, 시드. 난 네가 누군지도, 널 이제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나는 … 네가 날 좋아한다면서 ‘우리’를 어떻게 네가 깨트릴 수 있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등을 돌려 그를 외면하고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내 어디가 그의 정체를 그렇게 밝힐 정도로 가치 있는 지 모르겠다.

나는 시드, 아니 르웬과 알고 지낸 지 3개월쯤 된 사람일 뿐이다. 나는 코라와 친구였고, 코라와 시드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내게 우리 셋은, 처음 생긴 친구였고 깨트리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긴 순간, 나는 길을 잃었고 그에게 실망했다.

그는 내게만 이 비밀을 말해서는 안 됐다.

며칠간 나는 시드를 완전히 무시했다. 코라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저 좀, 일이, 라고 말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걸 알았다. 코라에게 우리만의 비밀이 있다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이제 시드를 예전처럼 대해야 하는 걸까. 내가 그가 드래곤인 것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보통처럼 대할 수 있을까? 오페가 다스리는 드래곤을 봤고, 그의 힘을 봤다.

나는 르웬의 모습을 봤고 내 무력감을 느꼈다…. 과연 인간은 상위의 포식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을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상대를, 나는 완전하게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엄마가 죽어도 세상이 돌아갔던 것처럼 내 고민과 별도로 시간은 착실히 가서, 어느 새 올만한 사람들이 알트라에 모두 도착했다. 마탑의 일원이며, 엘프며, 드워프며, 여행자며 여러명이 알트라의 거리를 파도처럼 뒤엎었고 그들을 바라보며 아직 남은 일처리에 매진했다. 그래도 가끔씩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파티장에 나올 일이 있었고, 나는 느긋하게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뭔가 일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라시아양."

마탑의 마법사를 상징하는 망토였다. 친근한 척 내 이름을 부르는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고, 그래서 솔직히 불쾌한 마음이 먼저였다. 마탑의 마법사와는 나눌 이야기가 없기에 더욱 그랬지만, 일단은 무슨 용건인가 싶어서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했다.

"저는 보시다시피 마탑의 마법사인 윌,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성이 뭔지 가르쳐 주셔야 겠죠, 윌?"

안 그래도 기분이 좋은 편이 아닌데 그의 태도는 사람을 더욱 불쾌하게 했다. 어딘가 적대적이고 음흉한 태도에 나는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내면서 그에게 말했다.

"사비엥. 윌 사비엥이랍니다."

"절 어떻게 알고 계신지 물어도 실례가 안 될까요?"

"아가씨야 온갖 곳에 이름이 이미 나셨는걸요. 게다가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아가씨 이름이야 알 수 있답니다."

"왜 제게 말을 거셨는지?"

질질 말을 끌기가 싫어서 아예 대놓고 용건을 물었다.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일까 싶어 빤히 그를 바라보았지만 어째선지 안경 너머의 얼굴이 영 흐렸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는 마법 자체가 불법인 건 아시겠죠?"

윌 사비엥인지 뭔지, 가명인지도 알 수 없는 남자가 웃더니 말했다.

"아가씨의 구두, 혹시 파실 생각 없습니까?"

"…제 학생용 구두는 당신 발에 들어가지도 않아 보이는데요. 여자 구두를 모으는 취미가 있으시다면 구두방에 가시는 게 어떠신지."

"아가씨의 구두는 한 켤레가 아닐 것 같은데요."

순간 생각나는 게 있었다. 에티넬의 누구나 탐낼만한 구두, 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던 까닭이다. 정말 이걸 알아보고 원하는 사람이 있군.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물론 사람이 많은 홀이었지만 혹여 무슨 일이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글쎄요, 저는 당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구두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요."

남자가 입으로 비죽, 미소를 짓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순간 위험하다는 판단에 뒤를 돌아서 홀로 뛰어나가려 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어째서…! 순간 그의 손을 바라보자마자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당했다.

단 둘이 있는 공간에서 그가 마법을 쓸 걸 고려하지도 않고 알아채지도 못하다니, 완벽하게 내 실수였다.

"당황한 얼굴이네요, 아가씨. 마력 예민자가 드문데도 높은 대우를 못 받는 건 말입니다. 강력한 마법사일수록 마력을 보이지 않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가씨의 구두는?"

나는 태연하고 자신에 찬 얼굴을 꾸미면서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내 구두에 대해서 알았죠?"

"좋은 건 알아보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리고 아가씨처럼 연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분이 이런 걸 가지고 있으시면.."

그가 허리를 굽혀서 내 구두를 빤히 바라봤다. 여기서 이 구두를 준다면, 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하지만 그 고생을 하고 얻은 구두를 이렇게 허무하게 뺏긴다고 생각하자 몹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마지막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겁도 많으신 분이."

그가 미소를 지었는데 그가 하는 말이 맞았기 때문에 순간 화가 났지만, 일단 참았다. 나는 힘이 없었고, 평범한데다 심지어 대범하지도 못해 이 상황에 겁이 났고, 내가 이 상황에 무력하다는 것이 죽도록 분했다.

"이제 주세요."

"뭘요?"

윌 사비엥은 우습다는 듯이 내 구두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고자, 시간을 끌고 싶어서 나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게 '그' 구두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압니까?"

"이게 무슨 기능이 있는지는 알아요?"

"원하는 곳이 어디든 데려가 주는 구두… 원한다면 베노암 궁의 황제 침소에도, 오르 제국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도 단숨에 데려가 줄 수 있는 거죠. 아가씨가 그 구두의 진가를 모르나본데, 어떤 마법적 구성도 필요없이 단숨에 그 장소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건 보통 능력이 아니야."

"베노암 궁의 황제 침소에도 갈 수 있다고요?"

드디어 나는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 바보 아니야. 베노암 궁의 내실, 즉 황족의 침실은 제국 최고의 마법사들이 수십 가지의 결계로 쌓아둔 곳이었다. 그곳을 갈 수 있다면…

"그래. 아가씨에겐 없어도 되는 기능이지. 그러니.."

나는 구두굽을 세번 부딪혔다. 얼른 입을 가리고 소근거렸다. 사람이 많은 곳, 그가 함부로 내게 마법을 걸거나 공격할 수 없는 곳이어야 했다. 일단 그는 마탑 소속이니까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대담한 짓을 하지는 못하겠지.

"알트라의 축제거리."

베노암의 황실을 뚫을 수 있다면, 이까짓 결계 쯤은 우습다. 순식간에 눈 앞이 밝아졌고 다시 시야가 깨끗해지기도 전에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뜯어질 것처럼 뛰었다.

"아가씨~ 이리 오세요! 맛있는 초콜릿을 팝니다~"

"알트라 축제 기념~ 학교 장식을 팔아요!!!"

마법사니까 일단 체력은 약할테고, 마력의 흐름이 없으니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모르겠지. 축제 때 상인 관련 서류를 맡길 잘했다. 기본적으로 마탑 출신의 마법사 보다야 내 쪽이 훨씬 이 거리에서 유리했다. 최대한 스스로를 달래면서 내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비명소리와 물건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악!!!!!!!!!!!!! 이게 무슨,..!!!!!"

"미쳤어?!!!!!! 개새끼!!!! 마탑소속 마법사가......!!"

"경비병!!!!!!!!!!"

이렇게까지 미친 놈일 줄이야. 그가 나를 향해 시전하는 마법 때문에 난장판이 되어가는 축제 거리를, 그것도 내가 구상한 축제거리에 분노하면서 발이 부서져라 달렸다. 어쨌거나 그가 뛰어난 마법사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했다. 왜냐면, 그 스스로 달려가는 도중에 끊임없이 마법을 뿌려댔으니까!

"저 여자를 쫓는다!!!! 물러서면 피해는 없어!!!!"

그가 외치자 곧바로 상인들이 길을 비키기 시작했다. 젠장!!!! 상인들은 내가 뛰어가는 방향으로 노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 서서 구두 굽을 부딪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나는 서있을 만한 상황이,

"젠...!!!"

아슬아슬하게 마력이 내 신발을 빗겨나갔다. 거치적거리는 정복코트를 벗어서 그의 시선을 가리게 하려고 일부러 던지고, 그 틈에 두 번 정도 뒤꿈치를 부딪혔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 위급한 순간에!!!!!

"으-!"

결국 나는 다시 뛰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신발에서 마력이 터져나오더니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뭐야, 뭔! 시선이 확 밝아지면서 아까의 장소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 보였고 나는 다시 뻣뻣해지는 다리를 움직였다.

이게 뭐야, 두 번 부딪히면 짧은 거리를 이동시켜 주는 건가? 일단 거리는 벌렸으니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다시 뛰었다. 어디로 가지? 옆의 골목길이 보였다.

그리로 들어갔다. 갈림길이 보이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왼쪽으로 들어갔다가 보이는 가게에 냅다 양해도 안 구하고 들어가서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직진. 왼쪽? …직진!!!! 스스로가 어딜 향해 달리는 지도 모른채 달리기를 한참, 숨이 턱턱 막혀서 도저히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나, 진짜 무슨 마가 꼈나.

"헉, 헉…!!! 여기가 어디야."

발이 몹시 아팠다. 심장이 쑤시듯이 아팠고 목도 타들어갔다.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쉴 수 없어.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꾹 감은 뒤에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힘이 빠지고 제어력을 잃다보니 부딪히는 사람도 많았고, 구두라서 뛰는데 엄청나게 부담이 있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나는 죄송하다고 외치면서 골목 사이를 헤쳤다. 어느 정도 떨어졌나, 했는데 또 따라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 이 망할 계집!!!!!!!!!!!!!"

의심할 바 없는 윌 사비엥의 목소리였다. 거의 울기 직전에 이를 악물고 뛰었다. 왼쪽에 길이 나있다 싶어서 갔는데, 막다를 길이었다. 다시 구두를 부딪히려는 순간, 내 옆에 그가 나타났다.

"시...!!"

그가 손으로 내 입을 막더니, 뭐라고 주문을 외웠다.

============================ 작품 후기 ============================

용량 조절 좀 해야겠네여 .. 읽기 힘드실듯.

오늘은 코멘트 오픈 일입니다. ^ㅅ^....

시드와의 대화를 바꾸었으니 참고해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