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우리 집이라고 했더니, 구두가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모르겠다. 아니, 분명 똑똑한 거겠지. 아주 옛날에나 온 것 같이 느껴지는 그리움이 형상화 된 것 같은 풍경에 이 공기를 망치지 않고 싶어서 가만히 서있었다. 내가 집을 정리했을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마지막, 그대로였다. 쌓인 먼지가 시간의 변화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다시 그 때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짐을 정리할 때의 감정이 아련하게 느껴져서 가만히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내다보았다. 아마 내가 집을 판 사람이 꽂아놓았을 팻말이 내게 이 곳이 예전의 나와 엄마, 그리고 집사와 하녀들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팝니다.’
언젠가 이 곳이 도저히 팔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이 집 안이 내 모든 것이고 내가 지켜야할 어떤 것이던 시절이… 하지만, 지금은.
나는 뒤꿈치를 세 번 두드리고는 말했다.
“알트라 15번지.”
그러자 다시 환하게 내 시야를 빛이 가렸다. 그래도 한 번 해봤다고 느긋하게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아가씨…?”
얼떨떨한 얼굴로, 어쩐지 정원용 가위를 들고 있는 제프리가 보였다. 웬 가위?
“…안녕, 제프리. 웬 가위예요?”
“거슬려서 시킨다는 게 깜빡해서 직접 하려고… 아니 방금 그런데 마법이었나요?”
“어, 뭐. 비슷해요. 그나저나 지금 몇 시예요?
“10시 좀 넘었습니다. 오늘 늦게 온다고 하셨잖습니까. 시험 공부를 하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일찍 오신 건가요?”
“음. 네, 그렇게 됐네요.”
아무래도 정원의 한 구석이었던 것 같아서 천천히 건물 쪽으로 걸어가는데, 이제 좀 쉴 수 있겠다고 내가 생각 했던 것과는 달리 제프리는 건물에 달린 조명이 내 모습을 비추자마자 경악한 얼굴로 거의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지금, 옷!! 옷 어떻게 되신 거예요! 옷이 교복이 아니잖습니까. 구두도 그렇고… 아침이랑 화장도 다르신데 지금, 대체… 어디서… 설마 아가씨…!!!”
혼자 무슨 상상을 하는지 얼굴이 사색이 된 제프리의 모습에 나야말로 기겁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고 인상을 썼다. 어쨌거나 변명 정도는 해둬야 맞는 것 같아서 대충 넘어져서 연못에 빠진 걸 지나가던 파르만 교수님이 구해주었다고 둘러대고 그 때문에 몹시 피곤해 자겠다고 한 후에 얼른 저택과 통하는 뒷문으로 들어가 내 방으로 향하려고 했다.
“씨알도 안 먹히는 거짓말 좀 그만하세요, 아가씨! 그리고 정문은 어디다 쓰시려고!!”
“제프리는 잔소리쟁이야!!!”
"아가씨, 너무하세요!! 이게 제가 다 아가씨가 걱정이 되어서…!!"
“아, 몰라요, 몰라요! 피곤하니까 올라가요, 나..”
거의 뛰어가다시피해서 내 방으로 직행한 후에 구두를 벗어서 구두장 안에 넣어두었다. 다음에 언젠가 널 쓸 일이 있겠지. 구두는 단조로운 검은색 구두였다. 아마 코라가 보면 유행과는 엄청나게 떨어져있다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고급이니까 좀 봐주지 않으려나. 나는 실내용 슬리퍼를 꺼내 신고 옷을 갈아입었다. 리콜라티 교수님, 엄청 마르셨구나. 나보다 키가 4센치는 크신 것 같은데, 사이즈는 똑같다니 사기야, 이건. 느긋하게 걸어가 침대에 몸을 투신하려 하는데 옆의 장식용 탁자에 뭔가 올려져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넌 집이 두 개냐? 왜 왔다 갔다 해? 이거 까먹은 거다.’
이 드래곤이 진짜. 일그러진 얼굴 표정으로 툭, 하고 물품을 확인했다. 여름용 교복과 신발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진짜 피곤한 하루였어. 빠진 수업은 교수님이 어떻게 해주시지 않으려나, 하고 멍한 머리로 생각하면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눈을 감자마자 빨려들어가듯이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이 더 피곤한 날일지 나야 몰랐지. 피곤한 눈을 비비고는 하품을 하자 시드와 코라가 너 어제 어디 갔었냐고 물었지만, 그냥 웃고 말았다. 얘기를 다 하기에는 너무 길기도 하고 복잡하고, 뭣보다 남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라 그냥 말 안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엔 내가 너무 피곤했다. 다행히 모두들 모레로 다가온 시험공부로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대충 말해도 둘 모두 넘어가주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과목을 수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훨씬 오래, 많이 시험을 쳐야했는데 빠진 수업이 있었고, 로드리고 중에 나와 같은 수업을 듣는 몇 명에게 부탁해서 꼼꼼하게 필기를 베꼈지만 한 두 개는 혼자 듣는 거라 어쩔 수 없이 교과서를 달달 외워야했다. 오페… 복수할거야… 복수…!
그렇게 정신 없이 공부하다 목이 저려서 스트레칭을 위해 고개를 돌렸더니 코라가 살짝 졸고 있었다. 일단 깨웠는데도 영 졸린 얼굴이길래 산책을 하자고 해서 밖으로 나와 깨끗한 공기를 마시자 머리도 깨고 기분도 무척 상쾌했다. 싱그러운 풀잎을 보다가 문득 그러고 보니, 날 구해준 드래곤의 이름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네… 설마 다시 만나겠나 싶었지만, 그래도 은인의 이름 정도는 아는 게 예의지. 나중에 리콜라티 교수님의 결혼식에 가서 한 번 물어봐야겠다.
한참 말 없이 걷다가 코라를 바라보니 어째 답지 않게 무척 심각한 얼굴이었다. 커피라도 마실까 싶어서 카페로 향하는데 어째 아까부터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영 불안해졌다. 무슨 고민이 있나?
“코라, 괜찮니?”
“나, 시드랑 관련된 비밀을 알았어.”
…요즘 비밀이 유행인가?
“어… 음. 나한테 말해줄 수 있는 비밀이야?”
그러자 코라가 인상을 팍, 쓴다. 약간 답답해하고 화나면서, 동시에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난 사실 둘 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없을 줄 알았고, 그리고 그 비밀이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비밀이 아닌가보다.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척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나온 커피를 그녀에게 준 후에 나도 컵을 쥐었다. 몹시 뜨거운 커피에서 나오는 훈훈한 열에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어, 남의 비밀이니까 알려고 하는 게 실례긴 하겠지만… 생각보다 큰 일인가보네. 괜찮아?”
“응. 시드도 모르는 것 같아. 그 녀석에 관한 걸 우연히 알게 됐는데… 아. 복잡해.”
나는 뭐라 해줘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둘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오랜 시간을 보낸 친구였다. 친척이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내가 그 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둘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훨씬 많을텐데,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뭐라고 해줘야 할지 모르겠네.. 누가 뭐래도 그냥… 너는 시드의 제일 친한 친구잖아. 음.. 네가 내리는 결론이 가장 시드를 위한 거라고 난 생각해. 그러니까…힘내.”
코라는 으으~하고 뭔지 모를 괴성을 지르더니 들고 있던 커피를 쭉 들이켰다가 그대로 뱉었다.
“아 맛없어, 더럽게 뜨거워! 젠장!!!”
“… 코라야… 드러워….”
그녀에게 내 손수건을 건네주자 그제야 좀 수습을 한다. 대충 정리가 되자 가만히 한숨을 쉬고 난 후에 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이거 다시 마시면 무지 더러운거니?”
“.... 니가 뱉은 거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모르지, 나야.”
마침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창피해질 뻔 했다. 그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으면 좋겠고, 시드와 잘 풀어냈으면 좋겠는데. 천천히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한편으로 섭섭한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언젠가는 나도 시드나 코라의 비밀을, 나와 그 당사자만 가질 날이 있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은 섭섭해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세 명이서 친구인 게 아니라, 나와 코라가 친구인 거고, 나와 시드가 친구인 거고… 그리고 시드와 코라 사이는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니까. 공부나 해야지.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나는 쉽게 시드의 이와 관련된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
“시험 끝!!!! 끝끝끝!!!!!!”
시드가 신나게 내 옆에서 염장을 질렀다. 나는 코라에게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고, 코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드를 질질 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디보자. 마지막 시험이 하나 남았고, 2시간 후에 시작이었기 때문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던 도서관으로 갔다. 마지막 시험은 문학이었고, 외워지지 않는 시를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살피자 2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그나저나, 코라는 오늘 얘기하려나? 얼마 전 시드의 비밀을 알게 된 코라는 언제 그걸 말해 줘야 할지 계속 끙끙대다가 시드의 시험이 끝난 후에야 말해야겠다고 했었다. 오늘에서야 시드의 시험이 끝났으니, 오늘 아마 얘기 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시험장으로 이동하면서 생각했다. 시험은 다행히 생각보다 쉬웠고,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끝났어?”
“응. 아, 진짜 피곤하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코라와 시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기분 좋게 대답했더니, 코라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말했거든, 얘한테.”
“어, 진짜? 뭐래?”
“알고 있었데.”
“…뭔진 모르겠지만 너 김 좀 샜겠다. 엄청 고민했잖아.”
“완전 실망했어… 괜히 고민했잖아 싶더라. 내가 이번 학기 성적이 꽝이면 다 시드 놈 탓이야.”
시드가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그게 왜 내 탓이냐? 고작 그런 걸 가지고 끙끙대다니.. 내가 너 바보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왜 별게 아니냐!!! 니가 몰랐으면 이건 완전…”
마음을 추스린 게 얼마 전이건만, 그래도 소외된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아서 얌전히 걸어가기만 했다. 한참을 둘이 투닥투닥거리더니 시드가 내 가방을 들어주면서 시험 잘 쳤어? 라고 묻기에 그냥 그랬어, 라고 대답했다.
“가방 안 들어줘도 돼.”
“코라 가방도 내가 들고 있잖아.”
과연 시드는 책가방을 세 개나 들고 있었다. 코라의 것, 내 것, 자신의 것. 기사 지망생답게 시드가 몸이 그리 허약한 건 아니지만, 솔직히 짐을 세 개나 든 모습이 그다지 멋있지는 않았다.
“너 좋아하는 여자애들 오늘 다 나가떨어지겠다.”
그러자 시드는 갑자기 코라에게 책가방을 돌려주고, 내 가방도 돌려줬다. 코라는 왜 그런 말을 했냐며 나를 째려봤고, 그 말을 했다고 그가 정말 돌려줄 줄 몰라서 엄청 웃겼다.
“진짜로 돌려주는 거야?”
“그럼 가짜로 돌려 주냐.”
코라와 나는 자신의 가방을 바로 매는 시드를 보며 웃어버렸다. 그래, 우린 이게 딱이다, 그냥. 시드의 팔짱을 끼며 내가 말했다.
“시험도 끝났는데 멋~있는 시드가 한 턱 쏘는 걸 어떻게 생각해, 코라?”
“어머, 완전 좋지이~”
우리 둘은 시드의 양 팔에 팔짱을 끼고 억지로 그를 걸어가게 하면서 장난을 쳤다. 시드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더니 좋다, 이 오라버니가 한 턱 쏘겠다며 달려 나가서, 우리는 체신머리고 뭐고 없이 신나게 사람이 없는 페드윈의 교정을 뛰어갔다. 마차를 타지 않고 떠들면서 정문까지 와서야 왜 뛰었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셋 다 왠지 그 말을 입밖에 내면 지는 것 같아서 꿋꿋하게 시내로 걸어갔다. 마지막 시험이 문학이었으니 우리가 좀 늦긴 해서 사람이 많긴 많겠다고 각오를 하긴 했는데도 사람들로 꽉꽉 찬 알트라의 번화가에 기가 질렸다. 시드도 으와.. 하더니 뭐 먹고 싶은 것 있냐고 우리 둘에게 물었다. 요즘 유행하는 파르페가 먹고 싶었던 코라와 나만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줄을 서기로 했는데, 시드가 돈을 내니 기다리는 것은 면제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가위, 바위, 보!!!!”
내가 가위, 코라가 보를 냈기 때문에 나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잠깐 시선이 이쪽으로 왔지만, 오늘은 체면 같은 건 뒤로하고 노는 날이라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자, 이걸로 사와라. 나는 바닐라.”
시드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했고, 코라는 돈을 받아들고는 불퉁하게 알았어, 라고 대답했다.
“라시아 너는?”
“나는 딸기. 고마워 코라~ 어디서 만날래?"
"광장에서 만나지 뭐. 오랜만에 분수나 보자.”
알았어, 하고 나와 시드는 적당히 구경을 하러 길을 따라 걸었다. 이것 저것 공통된 과목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걸어가다 시드가 아 맞다, 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가방 줘, 가방. 너 오늘도 가방 엄청 무겁더라.”
“괜찮아. 안 그래도 돼.”
“뭘 그렇게 빼. 너보다 내가 힘이 세니까 들어주는 거야. 니가 나보다 힘이 셌으면 내 책가방을 네 손에 쥐어줬을텐데, 아쉽게도 내가 힘이 더 세니까.”
얘랑 나는 그래도 친구지 남자 여자 사이지는 않는데, 이렇게 여자 취급을 받아도 될까 싶어서 내가 그래도 가방을 주지 않자, 그는 팔이 떨어질 것 같다며 엄살을 피웠다. 나는 웃음을 참고 그에게 내 가방을 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가방을 내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영 미안하면 이거라도 들어. 나 좀 멋있게 보이게.”
그렇게 하면 어쩐지 평등해질 것 같은 느낌에 시드의 가방을 받아들었는데, 내 가방에 비하니 역시 엄청나게 가벼웠다. 하긴 시드는 오늘 시험 하나밖에 안 쳤으니까.
“어디갈래? 너 시험 끝나면 심심풀이 책 읽는다며? 서점 갈까?”
“아,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하고 있네? 그래도 서점은 시간을 너무 잡아먹으니까 코라가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 그냥 광장으로 가자. 서점은 혼자 갈래.”
시드는 그러지 뭐라고 대답하곤 광장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 어깨에 달랑달랑 매달린 시드의 가방은 내 것보다 훨씬 컸다.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드윈에서는 가방도 정해진 디자인이 있는데, 남학생들의 경우 여학생들 것보다 더 컸다. 물론 돈도 그들이 더 내겠지만, 그래도 큰 가방을 교묘하게 금지당한 기분이 든다.
“왜 남자애들 가방만 이렇게 큰 거야? 왠지 억울하네.”
시드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고는 말했다.
“여자애들이 작으니까 가방도 작은 거지.”
“내가 작다고 해서 내가 들고 다니는 것도 작은 건 아니잖아. 날 보라고. 내가 평소에 들고 다니는 책이 얼만데.”
“사물함 뒀다 뭐할래?”
“사물함 갈 시간이 없을 때도 있단 말이야. 이 강의 끝나면 10분 안에 먼 강의실로 뛰어가야 되는데 사물함으로 갈 시간이 어딨어?”
“넌 너무 수업을 많이 듣는다니까. 잠시만,”
시드가 갑자기 내 팔을 당겨 자기 쪽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응? 뭐지 싶어서 옆을 보니 누가 급하게 뛰어가는 중이었다. 저기 그대로 있었으면 부딪혔겠네.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시드가 내 팔을 풀어주더니 시험도 끝났는데 어디 놀러갈래? 라고 물었다.
“응? 뭐 괜찮은데. 왜, 생각해 둔 곳 있어?”
“교외에 소풍 가도 좋고… 아니면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에 가도 좋고.”
“디저트 가게 새로 생겼구나. 맛있어?”
“가봤는데 괜찮던데.”
“교외에 소풍도 재밌겠다. 코라가 저번에 어디, 가고 싶다고 한 곳 있었는데 소풍을 선택하면 그리 가는 거야?”
그 말에 시드가 약간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아니, 그게 아니라… 라고 말했다.
“그럼 다른 데 가는 거야? 어디?”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시드의 얼굴이 약간 빨개지기 시작했다. 어라? 하고 가만히 보다가 에이 설마 싶어서 그냥 그의 말을 기다렸는데 코라가 멀리서 보였다.
“어, 코라다.”
그러자 시드는 약간 안심하면서도 동시에 허탈한 얼굴을 했다. 그 순간 확신이 들었고, 그리고 난처해졌다. 도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나서는 불안해졌다. 나는 시드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미안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친구지 연인이 아니었고, 그가 나를 좋아했다가 우리의 친구사이가 무너질까봐 몹시 두려워졌다. 불편한 마음에 시드를 외면하고 코라가 파르페를 담은 컵 세 개를 들고 걸어오고 있는 걸 다가가 컵을 받아들었다.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그냥 얘기. 시험 잘 쳤는지, 안 쳤는지. 그리고 프리패스 얘기도 좀 하고.”
“그랬어? 근데 너 왜 시드 가방을 메고 있어? 딱 티 난다, 남자애 가방인거.”
“역시 너무 큰 거 같아. 진짜 부러워. 시드가 가방 안에 들어있는 거 없다고 바꿔들자고 해서. 내 가방이 좀 무겁잖아.”
“은근히 매너가 좋지, 쟤?”
불편한 마음을 뒤로 하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시드는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농담하긴 했지만, 사실 1,2학년 여학생들 사이에서 시드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마법도 조금이지만 할 줄 알고, 그러면서도 기사도 정신이 있고 집안도 꽤 탄탄한데 그러면서 성격은 자유분방했다. 모르긴 몰라도 코라와 나를 싫어하는 여자애가 있다면, 분명 시드와 함께 다닌다는 것에 대한 질투일 것이다. 잠깐만, 생각해보니 그냥 다른 데를 생각 안 했는데 물어봐서 당황한 걸수도 있고… 날 좋아하는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은근히라니, 너무한데. 이래보여도 신사라도 자칭하고 있다고.”
시드가 내 손에서 바닐라 맛을 빼내갔다. 나는 딸기맛 파르페를 한 입 먹었다.
“역시 이 집 파르페가 제일 맛있어.”
“비교가 불가능하지.”
“다음에 너희 집에서 후원하고 분점을 내라고 해봐.”
코라가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 하면서 내게 컵을 들게 하고 노트에 적었다. 상인집안의 뒤를 잇지 않았으면 대체 이 아가씨가 뭘 하면서 살았을지 나는 정말 궁금했다. 코라의 초코맛을 조금 맛보자 시드가 나도, 하면서 숟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코라의 파르페 컵을 시드의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코라에게 시드가 어디 놀러가자고 하던데, 라고 말했고 코라는 어, 그럼 나 거기, 하면서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지명을 말했다. 시간 약속을 잡고 함께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들었는데 계속되는 시험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던 요 며칠간의 긴장이 확 풀렸는지, 나는 이틀 동안 감기몸살로 학교를 결석하게 되었다. 나는 시드와 코라에게 못 가게 된 걸 미안하다고 말하고 둘이서 다녀오라고 했고 둘은 다녀와서 내게 맛있는 걸 사다줬다.
성적 채점이 끝난 이후부터는 출석을 체크하지 않고, 3,4학년들과 축제 준비 공동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아플 수 있었다. 사실 하루는 정말 학교에 갈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 다음날은 반쯤 땡땡이였다. 그렇게 감기가 낫고 학교에 갔더니, 나는 리콜라티 교수님의 채점을 돕는 걸로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내가 친 시험의 채점을 돕는 게 말이 되나 싶어서 알아보러 갔더니, 교수님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말하셨다.
“나 들러리 해주기로 했잖니, 라시아.”
그 동안 뭘 했는지, 그녀는 더 말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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