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낙태요? 하고 나는 놀란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이걸 나한테 허락하게 만들라니, 제 정신이야? 아니, 그보다…
“아직 그렇게 티 나지는 않지요?”
나도 모르게 빤히 파르만 교수의 배를 바라보았다. 아직 판판하고 전혀 임신했다는 티가 안 나서 거짓말인가 싶었지만 이런 것 가지고 장난칠 분이 아닌 건 알아서 축, 하드려요? 하고 애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파르만 교수님은 때에 맞지 않게 환하게 웃으면서 고마워요, 하고 웃어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 완연한 기쁨에 차 있어서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나저나 부디, 부디 리콜라티라고 불러줘요. 이렇게까지 나 때문에 여러 일을 겪었는데, 이렇게 딱딱하게 멀어지면 너무 찝찝해서 그래요.”
“아뇨, 뭐… 딱히.”
돌려서 거절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어찌나 강하게 주장하는 지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얼마나 과감한지 심지어 반말까지 하라고 했지만 그것만은 도저히 못한다고 이번에야 말로 악착같이 버텨서 그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면, 리콜라티 교수님, 아니 리콜라티와 저 오페라는… 드래곤 맞죠?"
“응.”
“그럼 두 분이서 결혼 하신…?”
“그냥 사귀는 사이. 알지? 결혼하고 손 잡아야 애 생기는 거 아닌 거.”
어느 머저리가 아직까지 리콜라티와 결혼하지 않았나 했더니, 저 남자였군. 하기사 결혼하지 않아도 애는 생길 수 있으니까, 가볍게 그녀의 장난에 피식 웃고 넘어가버렸다.
“그럼 드래곤인 거 아시고 사귀기 시작한 거예요?”
"응. 사실 드래곤인 줄 모르고 교제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널 구해준 에메랄드 색 드래곤 기억나니? 그 분이 말해줬어."
가볍게 대꾸하는 그녀의 말이 무척 이질적으로 들렸다.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길래 드래곤을 둘이나 알고 있는 걸까. 게다가 한 쪽과는 심지어 애인사이라니.
"아, 그러면 그 분께 부탁해서 절 구하러 오신 거군요?"
리콜라티는 나를 끌고서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눌러 의자에 앉힌 후에 언제 준비한 건지 내 컵에 차를 듬뿍 따르고는 쿠키까지 준비한 후에 자리에 앉았다.
"아, 그건 아니야.… 내가 오페한테 너 안 구하면 죽어버린다고 협박했거든. 그래서 오페가 부탁했어. 그 분은 오페에게 빚이 있어서 말이야."
살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하는 그녀의 모습에 좀 놀랐으나, 관계에서 어떻게든 힘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안심이 되기도 했다. 하기사 어쨌거나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나의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빚이요?"
“드래곤의 유희에는 아무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는데 그걸 나한테 알림으로써 그 불문율을 어긴거지.”
그렇구나… 사실 워낙 멀게 느껴지는 일이고 또 정신적, 체력적인 소모가 너무 심한 나머지 매우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나는 쿠키를 접시 위에서 조금 부순 뒤, 입에 넣었다. 정확히 어떻게 그 분이 알려주셨냐고 묻자 리콜라티가 이걸로 배가 차겠니? 하고 묻더니 당시의 일을 알려주었다.
"나와 그 분은 원래 사제지간이었고, 우연찮게 오페와 알게 됐어. 아예 그 분과는 따로 알게 된지라 오페와 사귀기 시작하고 그 분께 소개시키니 그 분이 갑자기 그 놈은 안 돼!!라며 심하게 반대하셨거든. 그래서 왜냐고 끈질기게 물었더니 오페가 드래곤인 거랑 드래곤 중에서도 성격이 더럽다는 걸 알리셨거든. 뭐 그렇게 알게 된 거지."
“그렇구나…”
왜 반대했는지 알 것 같아요. 정말, 진짜로. 그 연청색 드래곤이랑 완전히 한 마음 한 뜻입니다. 이 말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그냥 대답했다. 그녀의 선택에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그건 예의도 아니었고.
“그나저나 정말로 이걸로 되겠니? 더 뭔가 내줄 수 있는데.”
“그럼 실례지만 뭔가 요기할 것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리콜라티는 반색을 하면서 당연하지, 하고는 마법으로 간단하게 샌드위치와 이것저것을 챙겨주었다. 한 입 크기로 잘려진 샌드위치를 포크로 찍어 먹으며 어떻게 하면 좀 더 부드럽게 의견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해봤지만, 낙태라는 단어가 나온 이상 베노암의 반을 돌려 말해도 돌려서 좋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티를 숨기지 않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콜라티는 끙, 하더니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내가 물을 말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보통 때라면 남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캐묻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달랐으니까.
“낙태 말인데요, 리콜라티. …정말 왜 제가 이 이야기를,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닌데… 실례이고 무례인 걸 알지만 제 사정이 사정이라서요. …가능하긴 한가요?”
리콜라티는 이해한다는 얼굴을 했지만 그녀 또한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만든 오페라는 드래곤에 대한 짜증과 불쾌감이 점점 더 커졌다.
“마력으로 아기를 공격하면 가능한가봐. 뭐, 오페는 드래곤이니까 이것저것 방법을 알겠지.”
“오페라는 자의 아이이지 않나요.”
설마 리콜라티가 바람을 피웠을리는 없고 멀쩡한 자기 아기를 왜 지우라고 하나. 내 말에 리콜라티는 낙태를 애인에게 권유받은 여자답지 않은 차분함으로 대답했다.
“맞아. 그런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대체 무슨 사정이 그렇게 깊으시기에 자기 애를 지우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가장 힘들 사람은 리콜라티일 것이고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애꿎은 차나 마시면서 그녀가 말문을 틔우기를 기다렸다.
“오페는 지금 상태로도 마력 그 자체를 다룰 수도 있고 뭐 하여간 여러 가지 드래곤의 능력을 어느 정도 가진 상태인, 정확하게 인간이라 말하기 애매한 존재야. 그런 상태에서 나랑 관계를 맺었는데, 오페도 나도 임신이 가능한 지 몰랐어. 그렇게 들어선 애가 오페의 능력을 이어받았나봐. 드래곤은 알 안에서 알 안의 마력을 운용하면서 자라나는데, 얘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네. 그런데 나는 인간이잖아. 그래서 자궁 안에 마력이 있거나 하지 않다보니 얘가 살려고 내 몸 바깥에 맴도는 마력을 끌어당겨서 운용하고 있고. 결론은, 내 아이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결국 내 몸에서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요는 임신상태가 계속되면 리콜라티가 잘못된다는 거군요.”
내 단정적인 말투에 내 의견이 순식간에 오페를 이 부분에서 이해하는 쪽으로 쏠렸다고 생각하는지 리콜라티는 급하고 빠른 말로, 그러나 매우 준비된 것 같은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숫제 이 순간을 매우 간절히 기다려왔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봐, 라시아. 내가 앞으로 얼마 쯤 살 것 같니? 내 나이가 30이야. 살아봤자 20년이나 30년쯤 더 살겠지. 그 이후엔 죽을 거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니. 그에 비해서 오페는 드래곤이라서 앞으로 살날이 엄청나게 길어. 나는… 오페에게 아주 오래가는 기억이고 싶어. 누구도 지울 수 없을 만큼, 어떤 것도 나를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한 기억 말이야. 내가 사랑했던 존재에게 뭔가를 남기고 싶고,”
오페의 마음이야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리콜라티가 둘의 사랑을 얼마나 오래 남기고 싶어하는 지, 그리고 그녀 또한 그에게 강한 감정을- 어쩌면 그를 상처입힐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죽어버린다고 협박했어.’
‘500년이 넘게 드래곤은 살아간답니다.’
‘누구도 지울 수 없을 만큼, 어떤 것도 나를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한기억.’
잔인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녀가 하는 것이 옳지 않은 형태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 이후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 시간이 드래곤에게 너무 길기 때문에 잔인한 일처럼 느껴졌지만, 오히려 드래곤이기에 괜찮지 않을까. 그들은 사랑에 너무 드물게 걸리니까. 그러니까 오페는 리콜라티를 기억하고, 리콜라티의 아이를 키우면서 또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너무 제멋대로인 해석인 걸까.
“난 인생에 단 자기 단 한 명 뿐이었는데, 내가 그렇지 못하는 건 억울하잖아요! 애라도 떠밀고 가야지 안 되겠어.”
그렇게 말하는 리콜라티의 얼굴은 굉장히 장난스러웠고, 그녀 이외의 다른 여자나 사람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이기적이거나 잔인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리콜라티는, 오페를 굉장히 좋아하는군요.”
그러자 그녀는 몹시 슬픈 얼굴로,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얼굴로 웃었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몹시도, 그녀가 그녀의 연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잘 보여서 나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오페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보다는 추억이 더욱 귀중하게 느껴질 거였다. 당장 네가 죽는데 아이가 무슨 소용이냐고 화를 낼, 어쩐지 제대로 말도 해본 적 없는 남자의 단순한 반응을 나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평생을 가더라도 리콜라티나 오페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렵네요, 사랑은.”
짐짓 여유로운 척하고 곤란한 얼굴을 나는 찻잔 뒤로 숨겼다. 리콜라티는 얼굴을 붉히면서 살짝 미소 지었다. 여자의 나이란 사랑 앞에서 얼마나 무색한가.
“그 아기, 낳고 싶으세요?”
내가 도대체 어떤 말로 이 사람에게, 이 여자에게 낙태를 하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 내 복잡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콜라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는 게 옳은 일일까. 그저…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그러면 저는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요, 리콜라티.”
그리고 이런 말을 그녀에게 해야 하는 나에게도.
“그건…”
그녀는 말을 잊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오페란 드래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내게 그녀의 낙태를 권하는 역할을 맡긴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그녀만을 괴롭히는 일일 뿐이다. 리콜라티의 당황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미소지었다.
“오페를 불러주실래요?”
“…이런 일에 엮이게 해서,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
나는 찻잔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아마도 누구의 탓도 아닐거다. 그 점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거였다.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오페.”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서 두어번 더 그를 불렀지만 내 찻잔에 남은 차를 모두 마신 후에도 드래곤은 나타나지 않았다. 리콜라티는 이것봐, 또 못 들은 척이지.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나는 그녀에게 요령을 좀 알려주기로 했다.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한 다음, 일부러 크게 말했다.
“어머, 리콜라티 교수님-!! 그렇게 뛰시면 무리가....”
여기까지 말하자마자 오페란 드래곤이 나타났다. 나타날 줄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그대로 반응하면 좀 기분 나쁜데.
“뛴다면서?
오페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더니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와, 진짜다. 색은 다르지만, 에메랄드 빛 용이 그랬듯이, 그의 눈동자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저는 이걸 믿어주세요 라고 말한 적 없는데요. 멍청한 누가 낚여서 뛰어 들어온 건 제 탓도 아니고요. 어머, 근데 그 상황이 굉장히 저랑 비슷하다, 그렇죠?”
나는 고개를 휙, 돌려서 리콜라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음을 참는 듯 기묘하게 입 모양을 일그러트리더니, 오페에게 말했다.
“얘 돌려보내줘요, 오페.”
“그럼 그 애새끼는 지우는 건가?”
리콜라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피곤함과 조금의 짜증, 그리고 깊은 상처가 묻어나왔다. 부부 싸움엔 절대 끼어드는 게 아니라서 최대한 끝까지 나는 둘을 외면했다. 그러자 리콜라티가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걸 시킨 본인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둘 모두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기도 했고, 제 3자가 과연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한 확신도 내게는 부족했다. 연인이 외롭지 않게 자신이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을 주고 가고 싶은 그녀의 마음도, 사랑하는 연인과 오래 함께 있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사랑조자 겪어보지 않은 애송이인 내가 무얼 알겠는가.
“애 새끼라고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당신만의 아이라면 모르지만…그건 리콜라티의 아이기도 해요. 그리고… 저를 붙잡아 둠으로 인해서 괴로워지는 건 리콜라티 뿐이에요.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은 걸로 알아요.”
오페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입을 놀렸다.
“남은 시간을… 저라면 그렇게 보내지 않겠어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였다. 다른 방법이 없는 한, 둘은 이 문제로 끊임없이 싸울 것이었다. 오페는 나를 죽도록 노려보았지만, 제대로 그를 쳐다보자 희한하게도 그 눈에는 살기가 없어서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오페의 어떤 점이 그녀를 사랑에 빠지게 한 건지 살짝 알 것 같았다. 그는 이기적이고 어릴지언정 결코 저보다 약한 자에게 고의로 험한 일을 할 존재는 아니었다. 나는 그래서 좀 더 발랄하고, 상상력이 넘치는 대답을 해주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 아이가 좀 크고 나면 마법으로 아이를 꺼내서 마력으로 된 알에 넣어주면 되지 않나요? 뭐 그거 아니라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잖아요. 아이와 리콜라티 모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아이를 선택할지 리콜라티를 선택할지 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도 되고요.”
참견이라면 죄송해요. 라고 얼른 덧붙였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거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만 있는 둘에게 중간의 길을 알려주기는 했지만, 사실 내게는 어떤 장담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는 미소를 지었다. 리콜라티가 고마워, 라고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뭘요, 라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농담으로 오페에게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여자를 임신까지 시켜놓고 결혼도 안 하다니. 아니 애초에 리콜라티 같은 여자를 지금까지 온 동네 방네에 자기 여자로 표도 안 한 머저리가 어떤 사람인가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만나서 하나도 반갑지 않았지만, 얼굴은 잘 봤네요.”
그 말에 오페의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화 낼 줄 알고 리콜라티 뒤로 숨을 준비까지 했는데, 의외로 그는 신박한 것을 알아챘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숫제 얼굴이 엄청나게 환해진다.
“그럼 네가 들러리를 해라.”
그러자 이번에는 리콜라티의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겨, 결혼식 하게?”
“왜? 하기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당신은 드래곤이잖아. 그래서 안 할 줄 알았지.”
이 커플 대체 뭐야. 나는 헛기침을 한 두 번 해서 둘의 주목을 끌고는 제안에 응했다.
“그건 오히려 제 영광이 될 것 같네요.”
드래곤과 인간 여자의 결혼식이라니, 분명 내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안 열릴 이벤트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페에게 나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럼 당신 약혼자의 들러리로서, 제 새 교복이랑 신발, 그리고 더불어서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 요청할게요.”
그 말에 오페는 약간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신발을 벗으라고 했다. 사실 리콜라티 교수님이 나보다 발이 조금 커서 다른 옷은 꼭 맞았지만 신발만은 조금 불편했었다. 얌전히 신발을 벗으면서 뭘 줄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에게 선물을 받다니, 나 엄청 운이 좋은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니 뭐, 겪은 일에 대비해서는 별로 운이 좋은 편은 아닐지도.
내가 혼자 중얼거리는 걸 완전히 오페는 무시하더니 가만히 손으로 내 발을 가리켰다. 마력 그 자체가 그의 손에서 회전하며 생기더니, 내 두 발로 다가와서 따뜻하게 내 발을 감싸안더니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어떤 형태를 만들었다.
“…구두네.”
이거야말로 맞춤구두….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확인했더니, 약간 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무척 고급의 구두인 것이 확실했다. 발도 편하고, 굽도 튼튼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오페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력을 주입하면 원하는 대로 변할 거다. 주변에 낮은 급이라도 마법사가 있으면 마력을 넣어달라고 해. 그러면 네가 원하는 구두의 모양이 될 테니까. 그리고, 뒤꿈치를 세 번 맞부딪혀.”
그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게, 이게 뭐야 하며 그를 바라보니 그는 좀 짜증난단 얼굴로 내게 말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봐.”
아, 이제 보내 주는 거구나. 드디어, 드디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 와중에 저 인간, 아니 드래곤한테 고마움을 표현하기는 싫어서 나는 새침한 목소리로 단박에 대답했다.
“저희 집이요.”
그러자 그가 미소 짓더니 말했다.
“그 구두가 데려다 줄거다.”
“꺄악!!!”
제발 예고! 예고 좀 하고…! 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눈 앞이 순식간에 밝아져서 말 할 수가 없었다. 빛이 사라지자마자 눈을 떴더니 크림색 커튼과, 오래된 책상이 보였다. 침대는 새하얀 시트로 덮여있었고 먼지에 뒤덮인 상태였지만,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는 고동색 창과 따뜻해 보이는 카펫에 내 눈을 의심했다.
“.…진짜 내 집에 보내줬네.”
엄마와 나의 집이었다.
============================ 작품 후기 ============================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이 노래 넘 좋아해요.. 요즘 아이유 리메이크 버전으로 몇번이나 듣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