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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14화 (14/113)

14화

바람이 싸늘하게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을 얼릴 것 같은 바람과 구름 속으로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축축함이 현실감을 일깨워줬지만,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자신의 위에 올라와 있을 때의 여러 사태를 대비해서 드래곤은 정령들을 내 옆에 둬서 날 보호해주었는데, 정령도 실제로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내게는 온통 처음인 일 뿐이었다. 내 몸의 몇 배가 큰 생명체에 의지해서 하늘을 나는 기분은, 정말이지 짜릿하고… 도대체 뭐라고 이 기분을 설명해야 할까.

나를 피해서 날아오는 새, 내 몸을 날려버릴 것 같이 달겨드는 바람, 아래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느끼는 그 감각을-. 이런 걸 자유라고 생각해도 될까. 무겁게 내게 매달려 있던 현실이나, 아까전의 위험도 나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고양감과 설명되지 않는 이유로 나는 어쩐지 마구 웃어버렸다. 하하하, 하고 내가 와락 웃어버리는 소리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누가 보면 완전히 미친 여자겠지. 방금 몬스터한테 죽기 직전까지 몰려놓고 잘도 이렇게 신나하는구나. 그래도 전혀 기분을 가다듬고 싶지 않았다. 매달려 있는 동안 나는 몹시 즐거웠다.

내 신이 난 기분과는 별개로 별로 날지도 않은 것 같은데 드래곤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척 아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강하자 바람이 심하게 시야를 괴롭힐 정도로 세게 다가와서 나는 눈을 감고 드래곤에게 바짝 붙었다. 부드러운 비늘로 감싸인 목에 매달리자 손끝을 타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그 소리는 내 심장소리보다 훨씬 느리고, 몹시 컸다. 완전히 내 주변을 채우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숨을 죽이고 집중해서 그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물속에서 아주 깊은 북소리를, 가깝게 듣고 있는 것 같은….

점차 속도가 줄어가는 것을 느끼며 슬쩍 고개를 들자 아쉬울정도로 가까이에 지상이 보였다. 깎아지른 절벽 위여서 지상이라고 말하기 뭣했고 드래곤의 덩치를 감당할만큼 넓어서 나는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다. 절벽에 이게 정말 자연의 힘이구나 라는 감탄을 자아내는 크기의 동굴이 있어서 혹시 이 안에 말로만 듣던 드래곤 레어라는 게 있는 건가 싶어 조금 어지러웠다. 드래곤 등에 타본 걸로 내 모험의 한도가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강제로 탐사해야하는 건가… 좀 당황스러운데.

[저기에 가면, 리콜라티가 있을 거다.]

나랑은 달리 파르만 교수는 그나마 안전해보이는 동굴에 던져졌나보다. …이런 거 차별 아닌가. 하지만 뭐, 파르만 교수도 고생을 하고 여기에 던져졌을 수도 있는 거니까. 같이 가는 건가 싶어서 약간 눈치를 봤더니 드래곤이 절벽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마음이 엄청 조급해졌다. 뭔가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데 들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걸레짝같은 신발이나 양말을 줄 수는 없잖아. 급하게 내가 매고 있었던 목걸이를 풀어서 저기, 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정말 별 거 아니겠지만, 이거라도… 뭔가 더 드릴 게 있으면 좋겠지만 어떤 것도 당신에게는 가치 없는 것일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때의 용의 눈과는 달리 이 연청색 눈은 어쩐지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다. 몹시 상냥한 느낌의, 어딘지 익숙한 것 같은. 하지만 그래도 이 압도적인 크기에 대한 경이감과 미약한 두려움만은 어쩔 수 없어서 나는 발바닥에서부터 용기를 끌어올려 그 눈을 마주보고 목걸이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드래곤은 어쩐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연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데 어째서 이렇게 내가 부끄러워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목걸이는 천천히 움직여 드래곤 쪽으로 날아갔고, 드래곤은 눈을 약간 깜빡였다.

[고마워.]

어쩐지 웃음을 참는 소리였는데, 어디선가…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지 않았나? 하지만 내게 더 이상의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드래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제서야 그가 내게 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준 것을 깨닫고 들고 있던 걸 죄다 주어 감사를 표시해야했나, 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하필 들고 있었던 건 정말 저 목걸이가 다였다. 아쉬움과 고마움에 한참을 드래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긴장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넌 뭐냐."

오늘 하루는 정말 놀람과 긴장, 그리고 공포의 연속인가. 자리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몸을 돌리자 동굴 속에서 나오는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붉은 눈동자…. 사람의 눈이었는데 어쩐지 묘하게 오싹해서 방어적인 목소리로 재빨리 대답했다.

"리콜라티 파르만 교수님을 찾아 왔어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남자의 뒤에서 흑갈색 머리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거의 소리를 질렀다.

“교수님!!”

“라시아!”

10년만에 만난 가족을 부르는 것 같은 우리의 모습이 기가 찬지 남자는 코웃음과 불만어린 얼굴을 해보였다. 그 고생을 겪고 겨우 아는 사람을 만나니 그녀와 내가 친하지 않은 사이라는 건 생각도 안 나고, 그저 죽도록 반가웠다.

그리고 드디어 내 울음보가 터졌다.

*

울다가 내가 지쳐서 쓰러질 정도가 되자 파르만 교수님은 따뜻한 목욕물과 새 옷을 준비해주셨고, 나는 어디로 보나 급조한 욕조에서 몇 시간 동안의 긴장을 완전히 풀었다. 급조한 듯한 입욕제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고, 나는 이제 드래곤 산맥이 있는 쪽으로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라 다짐에 다짐을 했다. 고개도 이쪽으로 안 돌릴 거고, 잘 때도 이쪽을 보고는 안 잘 거다. 난 철없이 가지고 있었던 약간의 모험심과 그래도 열심히 하면 사냥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돌돌돌 말아서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게 종이라면 불 질러서 버렸고, 그 재를 물에 동동 띄워서 사라지게 만들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목욕을 마무리 한 뒤, 깨끗한 속옷과 교수님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을 나서자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불빛이 있어서 그걸 따라 걷자, 교수님이 약간 초조한 얼굴을 한 채로 서있었다. 그녀는 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밝은 표정을 해보이고는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내가 어렸을 때 입었던 옷이에요, 그건."

"아. 그렇구나. 죄송해요. 여러 가지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감사합니다. 목욕물이랑 이것 저것…."

그러자 교수님은 황급히 손을 저은 후에 더없이 미안하고 죄책감 서린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아니에요. 괜히 우리 일에 말려들게 해서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굉장히 안 좋은 일을 당할 뻔 했다고 들었어요. 미안해요, 정말로."

말이 끝나자마자 얼굴이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사실 이게 교수님과 연관된 일인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내 구원자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고, 같은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일에라는 말은 마치 누군가가 돌로 내 머리를 찧어버리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당신과 아마도 저 남자가 관련된 일이라는 건가. 차가운 눈으로 남색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교수님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죽을 뻔했고,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괜찮다는 말도, 웃음도 아무것도 안 나왔다. 내 얼굴이 굳어지자 교수님은 일부러 더 밝은 얼굴을 하고서는 말했다.

"일단, 좀 앉을래요? …아, 아직 소개를 안 했네요. 이쪽이 오페. 제 목 뒤에 마력으로 장난을 쳐둔 사람이에요."

남색 머리카락의 그는 굉장한 미남이었지만, 그만큼 뚱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별로 정이 가지 않았다. 그는 나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는데, 나도 그만큼 그가 싫었다. 누구 때문에 지금 내가 그런 일을 겪었는데, 미안해하지도 않다니. 무례하고 뻔뻔한 이간 같으니라고. 심지어 구하러 오려는 노력도 없었다.

“누가 그걸 입 밖에 내라고 했어? 멍청한 계집애가.”

"오페."

파르만 교수님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화가 나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는데, 파르만 교수의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이 보이는 얼굴에 겨우 참아냈다. 저 자는 용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머리 속 한구석에서 해대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라시아 양. 이래 보여도 미안해하고 있어요. 당연히 나한테 오페라는 진명을 부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알려줘야했는데, 급할 때 부르라는 말을 장난으로 나는 생각했고… 이리저리 변명해봤자 아무 소용 없겠지만, 정말로 미안합니다. 진심이에요."

그리고 리콜라티 파르만 교수님은 내게 허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녀를 오페라는 사람이 얼마나 아끼는 지는 막연히 알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말리지 않고 그냥 오페라고 불린 남색 머리칼의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작게나마 그에게 자신의 잘못이 그가 아끼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와 부끄러움을 입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라도 그에게 분노했음을 알리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통했는지 그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가 무서웠지만 애써 의연하게 버텨냈다.

“허리 드세요. 솔직히 왜 파르만 교수님한테 사과를 받아야하는지는 모르겠네요.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게 너무 분명한데. 어쨌거나 사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제 쪽에게 아무 말 안 하셔도 제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입장이기는 한데도 불구하고 해주셔서, 당신께 사사받은 제자 중 하나라는 게 무척 자랑스럽네요."

나는 가볍게 절을 하고 그녀의 미안한 얼굴을 담담히 응시했다. 나는 여전히 매우 두려운 상태였지만 상대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커오지 않았으므로. 그래서 파르만 교수가 고마웠다. 아무리 높거나 대단한 상대일지라도 잘못에 대해 하급자에게 사과하는, 그 당연하고도 어려운 것을 지켜주는 사람이 내 스승이자 어른이라는 것은, 무척 안심되는 일이다.

"저는 이만 돌려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이 일에 더는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 이런 저를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되도록 상냥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진심으로 내가 보낸 호의에 이런 식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고, 그리고 사실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보니 지나친 정신적 피로에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둘의 얼굴은 심상치 않았다. 파르만 교수는 몹시 난처한 얼굴이었고, 오페라는 자는 아예 내 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게…”

파르만 교수의 말을 끊고 남자가 말했다.

"넌 못 간다."

차가운 목소리에 어이가 없고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나 정말로 눈 앞에 보이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 왜, 왜!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래서 해결되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고,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입을 다물었다.

"리콜라티가 허락할 때 까지, 넌 못가."

그러더니 그는 휙, 하고 사라져버렸고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내 입이 나도 모르게 벌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의지할 구석이 파르만 교수님밖에 없어서 나는 급하게 고개를 그녀쪽으로 돌렸더니 그녀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뭘 허락하셔야 하는데요?"

그러자 그녀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매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낙태."

============================ 작품 후기 ============================

???? 갑자기 선작 왜 올랐져..? 전 선작 오르는 거 안 좋아해여 ...특히 막편까지 올라오는 게 적을 수록 별루임.. 보실 분만 선작해주세여 ㅠㅠ... 아니면 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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