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시간이 꽤 흘러서 시계를 봤더니 움직여야 지각이 아닐 정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나는 자고 있던 시드를 깨우고 이제 가자, 하고 그를 재촉했다.
“요즘 휴강 많으시던데 오늘은 왜 휴강이 아니지…”
"몸이 안 좋아서 휴강이 많은 거였으니까 되려 기뻐해야지."
“내 몸이 더 나쁜데!”
시드의 말에 혀를 차면서 그만 하곡 가자, 하고 그를 당겼더니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설렁설렁 걷기 시작했다. 이 수업은 코라도 같이 듣는 수업인데, 코라는 이 전의 수업을 굉장히 먼 건물에서 듣기 때문에 항상 직전에야 도착했다. 그런 그녀를 배려해주기 위해서 나는 언제나 문에서 가까운 곳에 코라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오늘은 그래도 좀 빨리 도착하려는지 굉장히 열심히 뛰는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오나보다고 우리끼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벌컥 문이 열리고 코라가 자리에 앉았다.
"나 안 늦었어?!!!!"
"빨라. 아직 예비종도 안 쳤는데 뭘."
"아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렸지 뭐야. 진짜 식겁했어, 놓쳤을까봐."
"엄청 뛰어왔나보네. 목 안 말라?"
"이 내가 지각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응. 목은 안 말라."
코라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꺼내들고 필기도구를 꺼냈다. 그리서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파르만 교수님 요즘 휴강 많은데, 오늘은 휴강 아니라서 좋다.“
"어디가 안 좋으신지 궁금해. 혈색도 나쁘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곧 예비종이 쳤고, 강의실이 조금씩 아이들로 차가기 시작하자 코라가 펜 끝을 살짝 물어뜯더니 말했다.
"많이 안 좋으신거 같던데."
"어머, 그래?"
"응. 내가 얼마 전에 우연찮게 교무학장실에 일이 있어서 가게 됐었거든."
"무슨 일?"
"그건 다음에 말하고. 어쨌든..."
코라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더니, 갑자기 종이에 뭔가 쓰기 시작하면서 큰소리로 별거 아냐, 라고 말했다. 뭐야, 싶어서 시드와 내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하고선 그녀를 향해 굽혔던 등을 피자 마자, 쪽지가 날아왔다.
[옆에 소피아가 앉아서 말로 안하고 적을게. 어쨌든, 파르만 교수님이 2년정도 휴직계를 신청하신거 같더라고.]
"그나저나 넌 교무학장실엔 왜 간거야?"
[정말? 진짜 심하게 아프신건가?]
"그건 축제 관련해서.. 음."
[근데 사유가 이상해서 말이야. 사유서에 분명히, 잠시 몸을 숨겨야 할 일이 생겨서, 라고 적혀있는거야. 뭐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설마 진짜라고 해도 파르만 교수가 몸을 숨겨야 할 이유가 어딨겠냐고.]
그리고 본종이 쳐서, 우리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시드는 마법으로 그 쪽지를 태워버렸다. 그리고나서, 유난히 창백한 리콜라티 파르만 교수님이 강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번에 내게 한껏 의뭉을 떨었던 사람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훌륭한 교수였고 나는 그녀가 그리 싫지 않았다. 다만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어째서 그런 정보를 알려주었는지에 대해서만은 묻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우아하고 낮으면서도 매우 매력적인 목소리가 조용히 강의실에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학생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파르만교수는 나와 코라, 시드 쪽을 바라보더니 살짝 웃었다. 좀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호의였지만 어쨌거나 호의는 호의였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리콜라티 교수는 30살이고, 혼기가 한참 지난 여성이지만, 장담하건데 한달에 들어오는 혼담이 어느 적령기의 여성과 뒤지지 않는다. 그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모두들 대체 어느 멍청한 놈이 그녀와 결혼을 하지 않는건지 궁금해했다. 도대체 어디의 바보가 이렇게 미인에 성격도 좋은 여자를 아직도 미혼으로 두는 거지.
"꽤 오랜시간 휴강했었죠? 미안해요. 그리고 정말 미안하게 되었지만, 이번 중간고사를 끝으로, 저는 2년간 휴강하게 되었답니다. 제 후임 교수님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 올 거라 믿어요."
"어머어?!!!"
"에엑?!!!"
나까지 입을 벌리고 놀랐다. 도대체 왜, 어째서 그녀가 그만둔다는 말인가. 그녀 정도로 재미있는데다 실력있는, 거기다 성격까지 좋은 교수님이 과목을 하나 맡아준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완전히 그만두게 된다니. 그야말로 날벼락같은 소식이었다.
"모두 진정하세요. .. 여러분같이 멋진 학생들과 말 그대로 헤어지게 되어서,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2년 뒤에 저는 큰 일이 없는 이상 다시 페드윈으로 돌아올 것이고, 여러분이 원한다면 언제나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3,4학년을 함께 보내지 못한다는 점은 정말로 아쉽게 생각해요."
그녀가 잔잔한 미소를 짓자, 그제서야 나를 포함한 모두는 깨달았다. 아, 진짜 가시는 구나. 그리고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그녀가 그만두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휴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음.. 미안해요, 그건 개인사정이라서. 다만, 몸이 안 좋아서..도 그 이유에 포함되긴 한답니다."
그녀의 가장 멋진 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직접적으로 말해줄 수 없다고 말할지언정, 둘러대거나 대충 얼버무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자, 그럼 수업을 시작해볼까요?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저번에 마무리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요? ...맞나보군요. 사실 결혼이 모든 문화의 시작이라 할 수있지 않을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식문화도 있고, 사냥문화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지만, 결혼이란 것이 사람과 사람을 공식적으로 엮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인간적인 문화라고 느껴지네요. 뭐 세세한 점은 거기 교과서에 죄다 적혀있으니까 그걸 그냥 달달 외우시면 될 것 같고요."
나는 그녀의 이런 점을 가장 좋아한다. 일단 책에 표시를 해둔 후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귀족인 여러분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이신가요? 사회적 입장이 이미 있는 여러분의 모습에서 저는 가장 이타적이면서 가장 이기적인 결혼의 형태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저는 귀족출신이 아니라 여러분의 결혼 형태가 매우 흥미로울 때가 있었어요. 소피아 드니에 아르잔양, 무엇을 보고 결혼을 해야할까요?"
소피아는 펜을 들더니 대답했다.
"먼저 부모님의 의사와 가문의 어르신들의 의견을 알아본 후에, 약혼자를 고르겠죠? 그 다음엔 가장 가문이나 저에게 도움이 될만한 분을 고르는, 그런 식 아닌가요?"
"네, 물론 아르잔 백작가의 방식이 지나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근본적인 부분에서 여러분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가문을 먼저 생각하고 가족을 염두에 두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이타적인 행동이라 볼 수 있죠. 물론 결혼으로 가문의 행보를 결정하는 것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요. 하지만 반대로 이들이 이렇게 가족의 결정에 따르는 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상대와 결혼한다고 해서 그 결혼이 성공적일지는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변할지 스스로 책임질 수 없고요. 그러니 가문을 위한 결정을 하는 건 오히려 본인의 안전을 위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죠."
리콜라티 파르만 교수님은 목이 마른지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이 귀족의 결혼 인 것, 이해하셨나요?"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라니, 퍽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걸 쟁취해낸 아비게일도 대단하게 느껴지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난 결혼이란 제도를 연구하면서 인간사회만큼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도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의아한 눈길이네요. 왜냐면, 드래곤이나 엘프에게는 같이 산다는 개념은 있을지라도, 결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들이 가장 관심이 있을 드래곤 쪽으로 초점을 맞춰서 얘기할게요."
응? 학생들이 드래곤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나 싶어서 나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 했지만 어째 여자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한 것이 순간 짚이는 게 하나 있긴 했다.
“드래곤들은 철저히 개인적인 존재라, 자손을 만약 혼자 낳을 수 있다면 오히려 번성했을지도 몰라요. 그들은 헤츨링을 2개 성질의 마력을 결집시켜 만드는데, 그 과정자체가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구조죠. 2개 성질의 마력이니까 자연적 발생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데, 그들의 구역이 맞닿아있는 경우 생길 수 있다고 해요. 가장 고위급 생명체가 가장 단순하게 산다니, 아이러니하죠? 여기까지 혹시 질문있나요?”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학생이 일어나더니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역사상으로 이존재와 결혼한 경우가 생기는 걸까요? 실제로 판닐에서는 상당한 수의 혼혈인들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죠. 판닐에 대해선 알고 있죠? .. 음. 시간이 다 되었네요. 쉬는 시간동안 편안하게 쉬도록 하세요. 오늘은 연강이니, 어디 가지 마시고요. 아셨나요?"
학생들 대부분 네, 라고 대답했다. 몇몇의 학생들은 그녀에게 다가가 어째서 가시는 거냐는 둥의 말을 했다. 나는 필기를 정리하면서 코라와 시드에게 드래곤이 요즘 유행이냐고 물었거니 코라가 아무래도 고전의 인기는 따라잡기 힘든 법이니까, 하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래도 요즘 서점가에 드래곤과 소녀의 로맨스가 유행인가보다.
“그런 거 너도 좋아해? 연애소설.”
“응? 뭐 싫어하지는 않지.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잘 못 읽어.”
시드에게 대답해주고 셋이서 잠깐 시시덕대다보니 쉬는 시간이 금방 끝나버렸다. 시각을 칼처럼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파르만 교수님이 들어와 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판닐 이야기를 하다 말았죠? 네, 판닐은 상당히 특이한 경우죠. 기왕 이렇게 된 거 판닐 자체에 대해서도 얘기를 좀 해줄게요. 판닐이 엘프의 숲 근처에 있는 건 다 알거예요. 도시국가로 유명한 판닐은 다양한 국가와 교류하고 있는데, 심지어 오르제국과도 100년이상 교류한 신비한 국가죠. 참고로 저는 여기서 4년 정도 살아봤답니다. 판닐은 기본적으로 평균연령이 무척 길어요. 150살이 평균 수명이라고 하죠. 하지만 대개 이종족이 500년이상 사는 것을 감안해보면 무척 짧은 편이에요."
그래서 할아버지 때 그린 초상화를 들고 손자가 판닐에 찾아가면 그 사람이 그 때 그 얼굴로 있단 말도 있답니다. 그걸 두고 무슨 속담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하고 파르만 교수님이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다른 종족과 한 번 섞인 자들을 하프, 4분의 1이 섞인 자들을 쿼터라 부르는 등 그들만의 다양한 개념이 있어요. 판닐의 인구는 2000명정도예요, 많은 편이죠, 한 도시치고는? 그래도 드워프와 엘프의 도움으로 지하와 지상의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해서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고 관광지로도 무척 유명해서, 여러분 중 가본 학생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가본 사람 손들어 볼래요? 하자 코라와 시드가 손을 번쩍 들어서 살짝 소외감을 느꼈다. 코라는 상거래를 위해 갔을 것이고, 시드는 그냥 방랑이었겠지. 좋겠다. 난 그냥 갇혀 살았었는데. 아마 그런 곳에 갈일은 없겠지.
"역시 꽤 있네요. 대개 마법사 가문이나 상인 가문에서 많이 가봤을 거예요. 아니면 여행 좋아하는 집안사람들이거나. 어쨌든 판닐에는 혼혈이 500명정도 있다고 추정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종족과 결혼한 경우는 얼마 되지 않고, 대개 그 자손이 뻗어나가서 그렇게 추정되는 거죠. 음. 결혼이라는 개념이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태어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학생, 설마 결혼하고 나서 손을 꼭 잡고 자면 다음날 임신이 된다고 배우진 않았을 거라 난 믿어요."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물어본 남학생의 얼굴이 정말 새빨개져서 더 웃겼다. 단순히 교수님을 약간 골리고 싶어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좀 귀엽기도 했다.
"판닐의 경우 혼자 아이를 키우거나 독신이 대다수죠. 결혼이라는 책임감 있는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아주 적어요. 그러니 판닐의 경우를 통해 이종족과의 로맨스가 혹독한 대가를 치루는 걸 명심하세요. 요즘 엘프청년과 인간 소녀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 유행하던데, 소녀가 임신한 이후부터 그게 과연 로맨스가 될지 나는 의문이더라고요."
몇몇 여자아이들이 윽, 하는 표정을 지었다. 파르만 교수님이 언급한 소설은 요즘 한창 유행하는 소설로, 엘프청년의 비현실적 외모의 묘사가 어찌나 투철한지, 코라가 한번 읽어준적 있는데 나조차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마치 그려낸 듯한 묘사에 나마저 잠시 그 책을 읽어볼까 싶었다. 고전이자 가장 유명한 드래곤 더 로맨스, 뭐 그 비슷한 이름의 책의 인기를 금방 따라잡고 있다는데 재미있을 것 같지만 읽기에는 과제로 읽는 책이 너무 많이 밀려있어서 그만 뒀다. 방학 때는 심심풀이 책을 한번 읽어봐야지. 공책에 작게 취미 책 읽기. 라고 적었다. 수업시간에 딴생각이 나면 이렇게 적어둔다. 나중에 생각할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가끔 드래곤과의 로맨스가 나오는데, 그래서 드래곤의 능력을 가진 혼혈아가 태어난다고들 한다는 설정을 봤어요. 그건 장담하건데 뻥이에요. 드래곤의 헤츨링은 말했듯이 순수한 마력으로 태어나요. 드래곤이 인간의 상태로 변화하는 마법을 폴리모프마법이라고 하죠? 그 마법은 그냥 인간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 상태는 말 그대로 그냥 인간이랍니다. 애를 낳더라도 인간인 애를 낳지 드래곤의 능력을 가진 아기는 태어날 수 없어요. 태어난다해도, 그 능력을 감당하지 못해서 죽어버릴 거예요, 아마.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본연의 힘을 다 쓰려면, 그 육체에 상당한 개조를 해서야 가능해요. 개조 자체도 한계가 있고요. 그래서 실제로 인간으로 폴리모프했을 때 육체에 언령이랄까, 힘을 싣는 건 무리라고 해요."
왠지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뭔가 묻었나, 하고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대체 어떻게 이렇게 드래곤에 대해 많이 알까? 드래곤이란 신비의 영역에 있는 생명체다. 어디가 그들의 구역인지는 알고 그들이 유희를 나오는 것을 알지만, 유희자체의 텀도 길고, 누구도 그들이 유희중인지를 알지 못한다. 알고 보면 시드가 드래곤일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거다. 그런데, 파르만 교수님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단순히 그녀의 출신이나 생활이 남달라서?
"그러니 드래곤의 혼혈이라는 건 존재할 리 없고…“
파르만 교수님은 그 이야기에 이어서 드워프, 엘프 등의 결혼 이야기와 각 종족간의 상호 관계도와 결혼 예상 가능성을 한참 설명 해주셨다. 워낙 매끄럽게 이야기가 진행되어서 몇 번이고 얘기에 집중한다고 필기를 놓치다가 결국 포기했을 때 그녀가 뭔가를 설명한다고 쓴 칠판을 지울 때, 나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목 뒤에 뭔가가 빛났던 것이다. 깜빡 깜빡 거리는 그것은, 어떤 문양 같기도 하고.. 아니면 마법이론에서 내가 배우는 룬 문자 같기도 했다. 문신이라면 빛날 리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몸을 내밀고 인상을 찌푸려 그녀의 목의 무늬를 바라봤다.
".........? 라시아양?"
"네?"
그녀가 돌아서고 나서도 내가 고개를 갸웃대자 파르만 교수는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왜 그러나요? 뭔가 모르는 거라도?"
"아.. 아닙니다. 잠깐.. 잠깐 헛갈리는게 있었는데, 방금 이해했어요."
파르만 교수는 미소를 짓고는 계속 말을 이었지만, 나는 수업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한 채, 그녀가 뒤를 돌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뭐지? 무슨 문자지, 저게?
"그러면 다시 드래곤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드래곤이 연인을 만드는가에 대해서 여학생들은 많은 호기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드래곤은 무성이니까 남학생들도 혹시 알아요? 가능성 있는 얘기니까 즐겁게 들어주세요."
어, 다시 빛난다. ..? 오…오, 뭐지? 다시 …다시 한 번만.
"드래곤들도 연인을 만들긴 한답니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같은 종족에 연인이 있는 경우가 있고, 또는 다른 종족에 연인이 있기도 해요.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에요.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가 사랑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도 있는 듯 해요. 물론 이해할 수 있답니다. 짧게는 4000년, 길게는 1000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강한 감정의 흔들림을 자주 가질 수 있겠어요."
여자아이들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심지어 코라도! 코라마저도 말이다. 시드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도 이해됐고, 여자아이들의 마음도 이해했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니 사실, 나는 두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목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보통 마력 예민자들은 발현된 마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냥 막연한 어떤 느낌 같은 것이 나는 게 다라고 배웠는데, 그것도 발동될 때의 마력을 느끼는 거였다. 다만 나는 이 감각이 좀 예민한 편인지 가끔 무척 상태가 좋거나 집중을 잘하면 약간 어지러운 느낌과 함께 글자와 같은 게 빼곡하게 적힌 마법진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나한테도 이렇게 보이는 건 워낙 드문 일이고, 나 외에도 좀 예민한 마력 예민자들은 다 이런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한번 이런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면, 마치 각성과도 같은 감각에 빠진다고 해요. 뭐랄까.. 그들의 세상 전체가 강렬한 고동속에 놓인다고 할 수 있죠. 상대가 누구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들은 그들이 누구냐를 밝히고 싶어질텐데, 이후 그 인간이 여러분처럼 로맨틱하다고 여기고 기뻐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죽도록 무서워할 수도 있으니까요. 엘프와 사랑에 빠지면 정말 답이 없죠. 엘프들은 드래곤을 미친듯이 무서워하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드래곤의 본체를 보고도 그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상당히 다른 문제예요."
오..오페? 오페라니. 목에 왜 저런 게 새겨져 있지? 아니, 새겨져 있는 게 맞긴 한 건가? 저건 아무리 봐도 마법.. 아니, 그보다는.. 마력아닌가? 난 마력에 민감한 사람이니까.
"어머, 여러분 웃고 있군요. 실감이 안 나나보네요. "
그 순간 종이 쳤다. 아이들이 모두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이번 시험은 수업이 많이 빠진 상태로 치는 만큼, 오픈북 으로 진행할 거예요. 강의 때 강조한 내용이 나올 거고, 혹은 사고력을 물어보는 물음도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이 여러분과의 마지막 시간인데 제가 짜게 점수를 주진 않을 거랍니다. .. 좋습니다, 이제 나가셔도."
그러자 아이들이 하나씩 자리를 비웠다. 시드와 코라가 왜 그러냐고 나를 쳤지만, 나는 그들에게 그냥 먼저 가라고 했다. 나는 2학년에 편입했고, 그래서 그녀와는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리콜라티 교수가 내게 정보를 준만큼, 나도 정보를 줄 의무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교수님에게 나는 책가방을 들고 가서 말했다.
"저… 교수님."
"왜 그러죠, 라시아 양?"
"혹시, 어디서 뭔가.. 음.. 이건 불쾌하라고 드리는 이야기는 아닌데요."
그녀가 갸웃, 하고 고개를 젖혔다. 그녀의 가녀린 목이 우아하게 젖혀졌다.
"목에 글자가 보여서요. 보통은 이런 게 잘 보이지 않는데, 유난히 선명하고… 아신다면 괜한 참견이겠지만, 모르신다면 알려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요."
"…목에 글자…요?"
그녀가 황당, 이라고 적힌 것만 같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 나는 이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 부끄러웠지만, 꿋꿋하게 참고 말했다.
"네. 교수님 목뒤에.. 교수님은 모르시겠지만, 상당히 진하고 강한 힘인 것 같은데. 근 시일 내에 마법에 걸리신 적은 없으세요?"
“음… 짐작 가는 건 없는데… 혹시 뭐라고 적혀 있어요?”
“오페, 라고…"
“오페라고요?!”
그 순간, 그녀의 목뒤에 빛이 나를 잡아 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매우 큰 용의 눈이 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대체…? 눈이 아플정도로 커진 빛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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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은 예전과 상당히 동일하네요.
마음에 드는 편은 그렇게 심하게 안 고칠 거예요.
그러므로 앞으로는 상당히 진도가 쭉쭉... 나갈듯....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