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리콜라티 파르만>
“자, 그럼 100번, 시작.”
“…백번이요?”
귀를 의심하면서 되묻자 다니엘은 무척이나 상쾌한 얼굴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진짜 백번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200번 할래? 하고 물어서 하는 수 없이 내려치기를 시작했다. 기껏 삼주동안 기본 체력 훈련만 죽도록 시키고 오늘 드디어 처음으로 연습용 목검을 만지게 해주더니 한 시간동안 내려치기 자세 교정을 배운 다음에 이걸 100번 하라는 말을 들은 거다. 똑같은 동작을 계속하는 건 괴롭고 지겹고, 무척 힘이 들었다. 아니, 똑같은 동작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운동은 힘들어서 싫었다. 힘들어서 다른 생각도 안 나고 정말 이것만 멈출 수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허, 딴 생각 하지 말고.”
“힘들다도 딴 생각이에요?”
내가 울상을 짓고 말하자 다니엘은 아직 말할 힘은 있는가보네, 하고 나를 은근히 협박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내가 내리쳐야 할 대상이 다니엘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내려쳤다.
“이번엔 힘이 너무 들어갔다.”
저 놈의 잔소리, 하고 이를 갈았지만 힘이 더 들기는 싫었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내리치기를 하다보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100번이 끝났다. 끝나자마자 재빨리 보기도 싫은 목검을 보관함에 넣고 그에게 제대로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너도 고생했어.”
그러더니 그가 내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쓱쓱 쓰다듬고는 많이 힘들지? 하고 물었다. 그의 친근한 제스쳐에 과민반응하지 않기 위해서 삼주나 지났지만 오늘도 노력하며 약간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이름 부르는 거에는 익숙해졌는데.
“저는 좀 쉬다 갈테니까 먼저 올라가세요.”
“그럴래 그럼?”
“네. 힘들어서 아무래도 좀 앉아 있어야겠어요.”
다니엘이 알았다고 말하고는 나가자마자 체면이고 뭐고, 바지니까 괜찮겠다 싶어서 바닥에 누워버렸다. 손바닥이 계속해서 욱신거리는 게, 까졌나보다. 제발 누가 이대로 씻겨서 침대로 배달시켜줬으면 좋겠다. 덥고, 힘들고… 팔다리를 다 펴고 누워있다가 몸을 기울여서 모로 누웠다. 여기서 자면 안 되겠지.
“나가자마자 누웠니.”
다니엘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부끄러움에 몸을 일으켜서 고개를 푹 숙이자 그가 피식피식 웃으면서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음료수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건네받자마자 느껴지는 냉기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뚜껑까지 그가 따주어서, 까인 손이 고생할 일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배려심이 넘치는 분이시라니까. 물을 마시고 통을 내려놓자 그가 말했다.
“손 줘봐.”
얌전히 손을 내밀자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아주더니 까진 곳에 연고를 발라주고 거즈도 덧대주었다.
“며칠 간은 아마 이렇게 생활해야 할 거야. 굳은 살이 생겨야 더 안 까지는데, 어차피 제대로 검은 배울 일 없을 것 같으니까 그냥 바로 신전 가도 되고.”
“음, 네, 고맙습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도 생각보다는 잘 따라오네.”
“그런가요.”
저는 죽을 것 같은데. 속으로 웅얼거리자 다니엘이 킥킥 거리면서 장하다는 소리야, 하면서 내 머리를 툭, 툭 두드렸다. 긴 머리가 반쯤 풀린 상태라 다시 묶으려고 하는데 붕대 거즈 때문에 영 조심스러웠다. 다니엘과 마주 보고 앉아있는 상태였는데 그가 도와줄까? 하고 물었다.
“할 줄 아세요?”
“아니, 전혀. 난 여동생이 없으니까, 무리지.”
“그럼 됐어요, 그렇게 불편하진 않아요. 조심하면서 하지요, 뭐.”
“그래, 내가 보기에도 미관상 그러는 게 나을 것 같다… 맞아, 악기 배웠니?”
“어떻게 아셨어요? 피아노랑 바이올린이랑 … 이런 거 저런 거 배웠어요. 둘 다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지만.”
“손가락에 굳은 살이 있기에 때려 맞춰본거야.”
아, 하고 손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선배는 뭐 배운 거 있냐고 물으려고 했더니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는 다니엘이 문 열어놓고 나가셨던 거구나.
“연습 끝났어?”
시드였다. 얘는 왜 지금까지 학교에 남아있었지? 금요일 수업이 나와 같은 시간에 끝나기 때문에 2시간이 소요되는 내 훈련이 끝날때까지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응. 넌 왜 집에 안 가고 있어?”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자 시드가 약간 뾰로통한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뭐, 내가 와서 불만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남을 이유가 없으니까.”
“다니엘 선배랑 대련하려고 남았다.”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말에 좀 무안하기도 했다. 왜 저렇게 날카로워, 무슨 일 있나?
“선배, 한 판 하실래요?”
“그러지 뭐.”
내 앞에 꽤 가까이 앉아있던 다니엘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나한테 선뜻 손을 건네서 별 생각 없이 잡았다가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자 다니엘이 웃으면서 까먹으면 안 되지, 라고 말했다.
“나랑 대련하려면 동작 제한 많을텐데, 괜찮나?”
하긴 선배도 외교관 집안이니 많은 검술을 배우지는 못했을 거다. 아무래도 시드는 어렸을 적부터 기사를 지향했다고 하니까 패털티가 없으면 곤란하겠지. 시드는 그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연습용 목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저는 이만 귀가 하겠습니다.”
“가게? 대련하는 거 보고 같이 가지.”
“에이, 뭐하러. 난 이런 쪽은 잘 알지도 못해. 그리고 나 코라랑 약속 있어.”
시드가 아쉬운 얼굴을 해서 조금 많이 미안했다. 코라가 시드는 무조건 귀가한다고 그래서 굳이 안 부른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부를 걸. 하지만 본인이 대련을 하고 싶다는 데 말릴 이유도 없을 것 같아서 로드리고 관을 나오며 죄책감을 털어보였다. 사실 나는 세 명이서 만나는 것보다 코라와 단 둘이서 만나는 게 좋았다.
세 명이서 만나면 아무래도 더 친하고 오래 알고 지낸 코라와 시드,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나름 이러저러해도 로드리고 관에서 만나게 되는 시드보다 각자 바쁜 코라와 만나는 게 훨씬 어렵고, 어렸을 적부터 남자애들이 그나마 코르티잔의 딸인 내게 관대했던 것과는 달리 여자아이들은 나를 싫어하거나 불편해했다. 사실 남자애들은 엄마가 예뻐서 그랬던 것 같고, 여자애들은… 그들의 어머니가 웬만하면 화류계의 여자와 엮여 괜한 곤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멀리하라고 가르친 거겠지.
그래서 오히려 코라는 특별했다. 내 뒷배경을 전부 다 알고있는데다 로드리고에 내가 속해 있기 때문에 내 평판이 상당히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교우관계를 보는 로디나에 속해있는 코라가 용감하게 나와 지내주는 거였다. 게다가 그녀는 내 유일한, 첫 여자친구였다. 냉정한 말일지 몰라도, 시드를 다른 남자 아이들과 대체할 수는 있겠지만 코라는 아니었다. 로드리고에 속함으로써 내게 남자인 친구들은 퍽 흔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사실 꽤 여성스러운 성향을 가진 내게 여자친구는 무엇보다 간절한 존재였고, 코라는 그런 걸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시드와 코라가 너무 친해서 소외된다고 느낄 때 코라는 밉지 않은데 시드는 좀 많이 미웠다.
걷다보니 금방 도착했나보다. 성격이 급한 걸로 페드윈에서 손이 꼽히는 코라가 내가 도착하는 걸 보고는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녀 앞에 앉자마자 말했다.
“나 이렇게 죽나봐.”
“저번주, 저저번주 금요일에도 그 말했는데 아직 안 죽었어, 걱정 마 친구야!”
쾌활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과제를 꺼내서 테이블 위로 올렸다. 내 것도 꺼내서 책상 위로 올리자 코라가 물었다.
“얼마 남았어?”
“어… 아마 오늘 밤 새우면 다 끝날 것 같은데.”
“너 속도 대단하다. 나보다 훨씬 과제 많은데 먼저 끝나겠네.”
“아무래도 급하니까 더 조급해지고, 빨리하려고 하는 건 있지. 그래도 힘들긴 힘들어. 쉬는 날이 언제 오나 싶을 정도로….”
“오히려 너는 축제 때 편할지도 모르겠다, 과제보다.”
“응? 페드윈도 축제가 있어?”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중간고사 뒤에 기말고사 일정이 당연히 있는 줄 알았는데, 축제가 있었구나.
“알트라 전체가 축제야. 페드윈, 사관학교, 마법학교, 정령학사. 이렇게 네 학교가 전부 축제를 여니까 자연스럽게 도시 전체가 축제기간이지. 이주 정도 열리는데, 이 이주를 위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하고, 고학생들은 아예 이걸로 점수가 매겨져.”
“다른 학교랑 경쟁하는 거야?”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마법이랑 정령인데.”
하기사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죄다 잡아끌 수 있는 그들에 비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척 제한적이었다. 코라는 아예 펜을 내려놓고 내게 축제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런 불공평함을 없애기 위해서 우린 파티나 연회, 그리고 이벤트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일을 해. 축제가 성공적이었으면 기획을 잘한거니까 칭찬도 받고. 또 그나마 다양한 동아리가 있으니까 그걸 활용하기도 해.”
“아예 3, 4학년들은 그럼 중간 고사 없이 이걸로 시험을 보는 거야?”
“응. 거의 4학년들이 중심이지. 이거하고 2학기에 졸업시험도 있어.”
“힘들겠다.”
“쉬우면 다 졸업했지. 그보다 로디나랑 로드리고들은 특히 일 많은데, 괜찮겠어?”
“어째서?”
그야, 하고 코라가 목이 마른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로드리고랑 로디나는 학교에서 이름을 누구나 알 수 있을만한 고위귀족이잖아? 상당히 가문의 힘이 작용하는 곳이고. 그러다보니 좀 대외적인 업무가 많은 축제 때는 아무래도 필요할 때가 많지. 특히 협찬 받거나 해야하는 일이 많잖아.”
“고위 귀족이라 명령에 특별히 사람들이 더 달 따르기도 해?”
“당연하지. 사관학교나 정령학사, 마법학교 얘네는 실력 위주라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평민이 많잖아. 다들 학비가 만만치 않아서 보통은 귀족가의 후원을 받기 위해서 축제 자체가 있는 경우가 많아. 그러다보니 고위귀족인 사람들과의 연이 닿는 게 훨씬 유리하고.”
“그렇구나… 하긴 나중에 사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다루는 경우도 많고 하니까, 어떻게 보면 실전 연습이겠네.”
“그렇지, 뭐. 그래도 2학년 때는 할만하다니까, 까라는 대로 까야지.”
까라는…? 뭐? 무슨 말이지 하고 그녀를 바라봤지만, 코라는 당연히 내가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별 생각 없이 이거 참, 도와줘 하고 책을 내밀었다. 나는 책을 받아들면서 까라는 대로 까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
“어제부터 하복 착용 기간이던데.”
“벌써 하복 입을 때가 됐네.”
“몇 년 전만해도 복사뼈까지 가려야 했는데, 지금은 꽤 대담하게 무릎까지 올라오더라.”
“바람 불때마다 살랑살랑 예쁘던데. 시선이 저절로 가더라.”
느긋하게 휴게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행 시작일이 어제였는데 벌써 입고 나온 사람이 있다니, 과연 실용주의자들이 발이 빠르긴 하구나. 난 아직 그래도 덥지 않아서 춘추복 차림인데. 하긴 코라만해도 지겹다며 내일부터 하복으로 갈아입을거라고 했으니까.
“그러고보니 라시아, 너는 짧은 하복 입을 거야? 아니면 긴 쪽?”
물론 이쪽으로 화살이 넘어올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눈을 반짝 거리면서 물어볼 줄이야…
“전 긴 하복이요. 얼마 전에 맞췄어요.”
“왜!! 어째서!! 짧은 걸로 해!! 그거 그냥 길이 조절하면 되잖아!!”
“그래!! 짧은 거 좋아!”
“시원하고!!”
뭐, 뭐야 이 사람들. 슬쩍 엉덩이를 깊숙이 소파에 파묻으면서 좀 질린 얼굴을 했더니 그제서야 묘하게 열렬한 표정을 지우더니 흠흠, 하고 다들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왜 이러셔들…
“짧은 게 더 예쁘고 보기도 좋고 편하지 않아? 그리고 덥잖아, 긴 건.”
“네에…. 저도 짧은 게 편하기는 한데, 아비게일 양이 웬만하면 긴 걸로 하라고 하기도 하셨고 저희 집 집사가 짧은 걸 맞추려고 하니까 거의 울면서 말리더라고요.”
아비게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거의 모든 선배님과 후배님들의 표정이 썩더니 한숨을 팍, 하고 내쉬는 게 보였다. 내 다리가 이렇게 모두가 절망할 정도의 문제였나 싶어서 약간 눈을 가늘게 떴더니 다들 약간 찔린다는 얼굴을 했다. 이 사람들도 얌전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은근히 엄청 밝힌다니까.
“난 긴 치마 좋은데.”
옆에 시드가 갑자기 내가 보고 있던 책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응? 왜?”
“비 오면 아가씨들이 젖지 않으려고 살짝 치마를 걷어올리는 게 좋아.”
“…네가 이 분위기에서 그런 말 하니까 되게 변태같아.”
“아, 너무하네!”
킥킥 웃어버리자 갑자기 자비에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시드 선배… 뭘 좀 아시는군요.”
자비에르는 1학년 로드리고인데, 내가 처음으로 로드리고에 들어왔을 때 살살 눈웃음을 치던, 유난히 잘생겨서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 얼굴 값을 톡톡히 하는 사람이라 학년 전체 최고의 바람둥이로 이름을 날리는데, 심지어 처음 저 눈웃음이 진짜로 날 꼬시려고 했던 게 맞았다고 해서 날 놀래켰다.
“봐! 나만 이러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라도 오래오래 긴 치마로 남아줘라. 그리고 아는 여자애들한테 좀 전해, 나 좋아하면 긴 치마 입으라고…”
이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싶어서 옆에 있던 종이를 돌돌 말아서 시드의 이마를 탁, 하고 쳤다.
“아야.”
“맞을 짓을 하지 않으면 맞을 일이 없을텐데. 애인 같은 거 만들 생각도 없는 애가 왜 이래.”
“야 그건 진짜 아니야!”
억울해 미칠 것 같다는 얼굴로 시드가 말했다.
“나 진짜 연애 결혼할 사람이라고, 우리 집안은 대대로 마법사 가문에 자유로운 분위기라서 정치적 결합 할 필요 없단 말이야.”
얘가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야. 얼떨떨한 얼굴로 알았어, 알았어! 라고 대답하다가 뜬금없이 얼마 전에 코라가 말한 까라면 까가 생각나서 주변의 선배들에게 물었다.
“아 맞아. 저 얼마 전에, 까라면 까? 뭐 그런 말을 들었는데 혹시 무슨 뜻인 줄 아세요?”
그 말에 갑자기 쌩한 분위기로 변했다. 내 멀리 앉아있던 웬델이 엄청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응? 아 저한테 한 건 아니고 들었는데…”
“그래, 걔랑 놀지 마, 앞으로.”
솔직히 까라면 까라는 말 빼고는 이 사람들보다 훨씬 험한 욕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게 나일텐데, 이런 반응이라니 참…
“그래서 무슨 뜻인데요?”
“시킨대로 하라는 뜻이지 뭐.”
이 과보호의 아이콘들을 무시하면서 데릭 샤펜 로웰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그는 4학년인데, 디트리히 젠와 샤펜, 그러니까 현 샤펜 공작의 여동생인 엘리시아 젠와 샤펜의 장자로 진한 검은 머리카락에 은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이 상당히 불편한데, 이 사촌 오라버니와 아비게일이 꽤 친밀해서 비정기적으로 일요일 오전에 여는 티파티에 고정적으로 참가하는 사이인 것도 그렇지만 일단 샤펜공이랑 너무 닮았다. 특히 그 은회색 눈이라든지, 무표정할 때면 엄격해보이는 얼굴 같은 것 말이다.
“아, 그런 거였구나.”
그래도 내 어색함을 티 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모여서 그런 얘기 하고 있는 거야?”
그는 나를 약간 딱하다는 얼굴로 봤는데, 아마 내가 불편해하는 것이 아무래도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사람 탓은 아닌데, 실제로 그는 샤펜 공과는 상당히 달랐다. 소파에 자리에 없으니 카펫 위에 편하게 앉는 태도는 샤펜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싸늘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상당히 상냥하고 웃을 때 분위기가 확 달라져서 사실 친근하다는 평가마저 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 라시아가 선배, 물들어 가고 있다고요. 사촌 오빠로서 나서야 할 때 아닙니까!”
“뭘 그거 가지고 물 든다고. 너희 다 과잉보호야. 그냥 쓰지만 말아, 알았지?”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네, 하고 웃으면서 얌전히 동의하자 다들 약간 안심한 얼굴을 하더니 다시 치마 이야기로 돌아갔다. 한참을 짧은 치마다 긴 치마다 시끄럽더니 다시 이쪽으로 질문이 돌아왔다.
“여자 입장에서는 그럼 짧은 치마야, 긴 치마야?”
“응? 난 둘 다 무난하게 좋은데. 여름에는 더우니까 짧은 치마가 좋고.”
“하지만 역시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짧은 치마 아닌가? 일단 다리가 확 드러나잖아.”
“맞아, 시선도 다르고.”
“애초에 비 올 때 어디가 좋은 건지 모르겠는데.”
그 말에 자비에르와 시드가 아니다, 너흰 뭘 모른다! 이런 반응을 격하게 보이는 바람에 다시 대토론의 장이 열렸다.
“쟤네는 널 앞에 두고 이런 얘기 되게 잘한다.”
“그러게요. 이렇게 험한 취급을 당할 줄이야.”
“아가씨 취급 너무 안 해주는 거 아니냐, 라시아를.”
그러니까요, 하며 맞장구를 치자 한참 토론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약간 시무룩해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처음엔 아가씨였는데, 분명히….”
“애가 가면 갈수록….”
“3개월 지나니 약발이 떨어지는구나….”
그 말에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로드리고 사이에서까지 여자아이이고 싶지는 않았다. 3개월이 지나서 그들이 나를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고, 나도 그들을 편하게 여기는 지금이 난 무척이나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좀 심술은 났기 때문에 나는 어쭈! 하는 느낌으로 이런 식으로 나올 거예요? 하면서 농을 걸었다.
“그래도 너 요즘 진짜 여자 안 같애, 우리한테…”
“여자처럼 보이고 싶은 상대도 없는데 뭐 어때요.”
내가 다시 소파에 몸을 깊게 묻어버리자 다들 목소리를 높여서 너무하다, 자신들도 남자다라는 것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자꾸 떠들어대는 모습이 영 시끄럽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영 여자로 나를 생각 안 하는 것도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면, 하면서 다리를 살짝 꼬았다.
“제가 동작 하나를 할 건데, 그거에 여자처럼 여겨질 것 같으시면 저한테 돈 거시고, 아닐 것 같으면 웬델한테 거는 건 어떠세요?”
“너 코라랑 다니더니 상인의 길을 깨달았니…?”
시드의 말에 웃어버렸지만 약간 찔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다들 바빠 죽겠는 축제 준비기간에 잠시 찾아온 유흥거리에 관심이 가는지 열심히 돈을 걸었다. 거의 반반이라 버는 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뭐, 용돈 벌이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자, 그럼 다 된 거죠? 저 이제 시작할게요.”
어쩐지 과하게 집중된 시선에 속으로 다들 좀 귀여우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표정을 가다듬고 천천히 치마 끝자락을 살짝 들어올렸다. 여름이라 아무 것도 안 신은 다리를 따라 천천히 치마를 끌어올리자 복사뼈가 보였고, 조심스레 다리를 뻗으면서 치마를 더 끌어올리자 종아리 아랫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워!! 이제 그만!!!”
데릭이 갑자기 급하게 소리를 질러서 내가 덩달아 엄청 놀랐다. 시드가 놀란 내 얼굴을 보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것 봐요. 내가 비 올 때 살짝 걷어올리는 게 최고라고 그랬잖아요.”
“복사뼈 그냥도 보이는 건데 나 왜 이렇게 떨렸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확 지나가서 조금 난처해졌다. 내가 진짜 생각이 없었구나. 그래도 남자들 집단인데 조심하고 신경써야하는데, 진짜 남자 편해졌다고 함부로 이런 걸…. 앞으로 더 거리가 벌어질까봐 무척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더 능청스럽게 말했다.
“돈 주세요!”
내 반대에 돈을 걷었던 사람들이 슬픈 얼굴로 터덜터덜 주머니를 털었다. 나는 내 몫의 돈을 챙겼으나 마음은 매우 불편했고,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에 오늘 밤 잠은 다 잤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내가 왜 이랬지…
“그나저나 밖에서 그런 거 함부로 하지 마.”
“그래, 조심해야겠네. 너 완전 예뻤구나.”
다들 여자임을 훌륭하게 증명했다며 호들갑을 떨어주어서 마음이 조금 편해졌기는 했지만, 그래도 후회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 우리 사촌 동생 완전 예쁜 여자애거든. 너희 다 건드리지 마.”
데릭이 왁자지껄한 사람들을 가라앉히며 내 옆에 앉았다.
“와! 치사하게! 선배님 동생이에요? 우리 후배님도 되는데!”
“아무튼 넌 조심하라는 말이다,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
“그래, 다 조심해야해!!”
입을 모아 어찌나 한결같이 막아대는지 참… 기분이 묘했다.
“오빠가 여러 명 생긴 것 같네요.”
한숨을 쉬면서 말하니 다들 약간 쑥쓰러운 듯한 얼굴을 했다. 오빠란 호칭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호칭인데, 집안 내에서도 보통은 다 이름을 부르는 게 대세기도 하고.
"아 맞아, 너 왜 나한테 오빠라고 안 해?“
“네?”
갑자기 내게 툭, 하니 물어보는 데릭의 말에 당황해서 어… 하고 말을 흐리자 다들 에이, 하는 얼굴로 말했다.
“요즘 그 말 쓰는 사람이 어딨어요.”
“맞아. 내 여동생도 저렇게 나 안 불러.”
“아비게일은 하는데.”
“억!! 진짜요?! 그 아비게일이요!?”
거짓말, 하며 이례적인 경악이 포함된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고보면 애교라곤 하나 없을 것 같은 아비게일은 꽤 자신의 사람에게는 애교 있게 구는 편이었다. 샤펜 경에게도 그렇고, 데릭 선배님한테도 그렇고 말이다.
“우와, 무슨 일 났어? 왜 이렇게 시끄러워?”
다니엘이 약간 질린 표정으로 로드리고 관에 들어왔는데, 대개의 남자들이 갑갑하다고 하복을 입기 시작한 것과 달리 그는 아직도 별로 덥지 않은지 춘추복 차림이었다. 다니엘 뒤로 여러명이 우루루 들어오는 것을 보니 지금 회의가 끝났나보다. 요즘 로드리고 관은 시도때도 없는 회의와 정신없는 일들로 한창 바빴다. 1, 2학년들은 거의 내일 모레부터 시험이 시작하고, 교수님들이 시험에 대한 안내를 시작한 2주 전부터 3,4학년들은 축제 준비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린 죽도록 일하고 돌아오는 길인데, 엄청 얄밉잖아.”
잉그럼 소하 미드웰이 더운지 셔츠를 펄럭거리면서 탁자 위의 음료수를 마셨다. 그는 나를 거의 무시하는 상대였는데, 아비게일의 자리를 내가 뺏고 있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아비게일에게 홀딱 빠져 있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와 관련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므로 나도 적당히 그를 무시하는 상태였다. 다른 3학년인 윈프레드 선배님은 어지간히 피곤한지 휴게실로 들어가버렸다.
“잘 해결하고 왔어?”
데릭이 카페트에서 슬슬 일어나더니 물었고, 다니엘이 약간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주 문제였던 쪽은 해결했습니다만… 역시 다른 쪽 문제가 튀어나와서요. 로디나 측에서 공동 회의를 하자더군요.”
그러자 약간의 휴식을 취하면서 늘어져 있던 3, 4학년들이 자리를 옮겨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버렸다. 시끄러움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없어지자 정말 거짓말처럼 정적이 자리잡았다. 소파에 거의 버려두었던 책을 다시 들고 기대 앉자 시드가 말했다.
“파르만 교수님 수업이지, 다음 시간?”
“응.”
“나 너 움직일 때 좀 깨워줘.”
많이 졸린가보다 싶어서 알았다고 대답하자 냉큼 쿠션에 기대서 눈을 감는다. 시드의 숨이 고르게 변했을 때 자비에르가 갑자기 내게 말했다.
“선배, 좀 둔한 것 같아요.”
“…? 내가?”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라 사실 살짝 당황스러웠다. 이 잘생긴 악동이 무슨 말을 하나 눈을 깜빡이고 있자 자비에르가 장난기가 듬뿍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시드 선배 좀 불쌍하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시드가 왜 불쌍해.”
의아한 마음에 물었지만 자비에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면서, 뭐 그냥 그렇다고요, 하고 말하기만 할 뿐, 그 이상의 설명은 해줄 마음이 없어보였다.
============================ 작품 후기 ============================
ㅎㅎㅎㅎ 코멘트 창 닫았어용!
다른 글은 모르겠는데 라시아는 저한테 참 쓰기 힘든 작품이에요 ㅠㅠ 두 세배의 시간이 걸린답니다 ㅠㅠ 그리고 이미 정해져 있는 글이지만 중간 내용이 다 달라지는 거고, 그.. 복붙해서 거기서 수정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전 내용을 참고해서 아예 다시 쓰는 거예요.. ㅠㅠ 이해해주세용..!
참,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