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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10화 (10/113)

10화

고민을 해봤자 나오지 않는 답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원인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할 때도 있는 거고 말이다. 리콜라티 교수님이 어째서 내게 이런 무거운 비밀을 알려줬는지 보다 사실은 보다 현실적으로 내게 위협으로 느껴지는 요르펜 선배가 내게는 더 고민거리였다. 어쨌거나 먼 산맥의 드래곤보다 내 근처에 있는 호랑이가 더 무서운 법이니까.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문제는, 이 진실을 어떻게 내가 다루어야 하는 지다. 우선 그에게 이 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방법은 되겠지만,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더욱 심하게 폭력적으로 나올 경우엔 최악의 경우인 죽음까지 생각해야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좋지. 알아내겠다고 보기 좋게 으름장까지 놨는데… 죽게 생겼네.

아, 진짜 모르겠다. 고민한답시고 정처없이 걷다가 사람이 별로 없어보이는 학교 뒤의 나무가 잔뜩 심어진 숲까지 들어왔나보다. 다리가 아파서 에라, 하고 털썩 누워서 나무에 등을 기댔다. 다른 생각을 해보자 싶어서 과제 생각도 하고, 나무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삶이 그대를 힘들게 할지라도, 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이 나면서 순간 무척이나 억울해졌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래도 무서우니까 일단 수업 끝나자마자 집으로 도망가야지. 오늘 하루 종일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게 영 불안하단말야.

그러고보니 여기 내가 처음 학교 왔을 때 왔던 곳 아닌가? 그 때만 해도 철없이 남자 얼굴 보고 잘 생겼다고 좋아했었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멀게 느껴지네. 그래, 이걸 교훈으로 삼자. 남자는 얼굴이 아니라 성격이야.

“여기서 뭐해?”

“악!!!!!! 잘못했어요!!!”

머리 위로 들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가리면서 외쳤다. 요르펜 선배 생각했더니 나오는 거냐고! 자기가 뱀이야? 생각하면 나오게?!

“으악! 야, 나야, 나. 시드!! 와, 내가 더 놀랐네.”

슬쩍 고개를 들었더니 진짜 시드였다. 아, 깜짝이야. 손을 스르르 내리고선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넌 왜 기척을, 안 내! 놀랐잖아!”

“아가씨, 아가씨답게 행동해주세요… 뭔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놀라?”

“아니, 너는 사람이 있으면 기척을 내야지! 마법사는 다 이래?!”

그 말에 내가 진지하게 놀랐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렇게 놀랄 줄 몰랐다며 사과를 해왔다. 겨우 놀란 마음을 수습하자 내 과민반응도 보이긴 해서 사과하기는 했다.

“그런데 웬일이야?”

“우연히 지나가는데 입구에서 네가 있는게 보이기에 놀래켜주려고 이동마법 써봤지. 왜 이러고 있어? 계속 한숨 쉬더라. 네 성격에 땡땡이도 아닌거 같은데, 여기서 공부도 안 하고 있는게 이상해서.”

“…이런 말 하면 뭣하지만, 네 성격을 봐서 너는 땡땡이니?”

“딩동댕! 메리웨더 교수님 수업이었지요.”

“우와, 간 크다.”

그 분은 엄청 깐깐한 할머니 교수님이신데, 묘하게 남학생들에게는 엄격했다. 유명한 귀족가 출신이셨던데다 당시 단발이라는 충격적인 헤어스타일을 유행으로 이끌어낸 멋쟁이셨는데, 그 단발로 자른 행동만큼 과감하게 귀족의 지위를 버리고 학자의 길로 걷기 시작하셨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100위 안에 항상 상위권에 자리잡아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멋진 분이시긴 하지만, 언제 그런 과감한 행로를 걸었냐는 듯이 깐깐하고 무서운 교수님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멋진 오빠란다.”

“수업 땡땡이 치는 게 멋진 거야? 아야,”

머리카락이 나무 살 사이에 끼었는지 자세를 바꾸려고 하자 대번에 아팠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시드가 내가 빼줄게 있어봐, 하고는 머리카락을 빼주고 슥슥, 빗어넘겨줬다.

“아, 고마워.”

연청색 눈으로 빤히 나를 바라보는 시드가 이상해서 왜? 하고 물었더니 시드가 아냐, 하고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그런데 진짜 고민 있는 거 아냐?”

“음. 지나치게 무거운 남의 비밀을 알게 됐거든.”

그러자 시드가 미소를 지었다. 어? 왜 웃지?

“많이 심각한 거야?”

“응? 응. 좀 많이.”

“잘 됐네.”

이번에는 진짜로 내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무릎을 세운 내 자세를 그가 똑같이 따라하면서 귀여운 척 눈을 깜빡거렸다. 상황에 안 맞는 재간에 피식 웃었더니 시드가 말을 이었다.

“심각한 일일수록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알고 있지? 이렇게 알게 된 게 뭣 때문이겠어, 조심하라고 하는 거지. 조심해서 좋은 상대와는 기왕이면 얽히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은 무척 현실적이었다. 다정하고 장난기 많은 친구의 입에서 나온 차가운 말에 움찔하고 말았다. 어째서 사람들은 내가 아는 모습만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걸까. 왜 다정한 사람은 다정하게만 남지 못하고, 잔인한 사람은 잔인하게만 남지 못하는 걸까.

“그런거겠지, 역시.”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요르펜 선배와는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는 것이 옳은 일이었고, 내게 맞는 일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비밀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이 컸다. 그러니 내가 그에게 선전포고하듯이 던져놓은 말에 대한 자존심은 접고, 그와의 접점을 없애는 것이 이성적인 결론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이 자꾸만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아직도 결론 안 났어?”

“응? 아니. 아냐. 네 말대로 하는 게 맞아.”

“그럼 기운 좀 차려라!”

퍽, 하고 그가 나를 힘차게 때렸다. 일부러 아픈척 심하게 엄살을 떨었더니 그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장난이었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표정을 푸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네가 걱정이 되어서 땡땡이까지 친 내가 불쌍하지 않냐?”

아무리 봐도 땡땡이 치러 가는 길에 나를 발견한 것 같지만, 나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저런, 안쓰러워서 어떡하나.”

“그치? 자, 카페테리아에 신메뉴가 나왔다던데, 가실까요!”

그러더니 그가 내 손을 덥썩 잡고는 카페테리아로 나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뭘 손까지 잡나 싶었지만, 코라랑 시드의 사이를 생각하고 그냥 납득했다. 얘는 다른 친한 애들한테 다 이러는가보지 뭐. 함께 가서 어쨌거나 내가 조언을 받은 거니까 음료수를 샀더니 굉장히 좋아해서 다음에도 사줄게, 라고 대충 말해버렸다.

*

마차를 타고 샤펜 저택으로 돌아오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나는 그와 연관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끈질기게 고민했다. 이렇게 당연한 일에 대해 납득과 설득이 필요한 이유에까지 번뇌하면서 나는 집에 도착했다.

“제프리, 나 왔어요.”

“다녀오셨습니까, 아가씨.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의례적인 인사에 응, 별 거 없었어요, 하고 의례적으로 대답하다가 문득 아비게일과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참, 미안해요. 어제 일 때문에 아비게일 양에게 곤란한 일을 당했죠?”

그러자 제프리는 금시초문의 얼굴을 하고는 네? 라고 내게 되물었다. 그 반응에 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그에게 아침에, 나를 어제 옮겨서, 라고 말했더니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니 기울이더니 말했다.

“어제 좀 무거운 짐을 들어서 허리가 아픈 나머지 아가씨께 휴가를 청할까 고민하고 있긴 했지만 전혀 혼날 일은 안 했는데요.”

그 재치있는 말에 혼난 걸 숨기려고 하나? 싶었지만 그는 만약 아비게일에게 혼났다면 정직하게 그걸 섞은 농담을 할 사람이었지 이렇게 슬금슬금 넘어갈 사람은 아니었다. 뭐야, 정말 나만 혼난거잖아, 하고 기분이 좀 더 상했지만 티내고 싶진 않아서 그냥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너무하네요, 제프리. 내가 나가면 얼마나 나간다고.”

“아가씨, 아가씨가 밀가루 40kg을 안 들어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겁니다. 아가씨는 심지어 그것보다 더 나가… 죄송합니다.”

짐짓 무섭게 노려보자 그가 재빨리 물러났다. 바람둥이 이름 값이 안 아깝게 정말 기분이 나쁘기 직전에서 멈춰버린다니까.

“참, 손님 오셨습니다, 아가씨.”

“나한테요? 별일이네. 올 사람이 없는데?”

거기다 이렇게 능숙하게 빠져나가는 기술은 칭찬 받아야 마땅한 거였다. 대충 빠져나갈 농담이겠거니 하고 장난스럽게 받아치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늦었네?”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휙, 하고 소리가 날정도로 세차게 뒤를 돌아봤다. 제프리가 내 태도에 오히려 놀라서 멈칫할 정도로 말이다.

“안 잡아먹는데.”

싹싹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가 자존심이 상해서 똑바로 섰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비게일양에게 옷을 부탁드렸는데.”

“잠깐 둘이서 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둘이서만 말하려면, 제게 하실 게 있으신데요.”

그러자 내 날카로운 태도에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똑바른 자세에서 갑자기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그 때는 미안했다.”

그가 허리를 숙이자 제프리가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갑자기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내 쪽으로 허리를 숙이더니 말했다.

“설마 아가씨 목에 멍들게 한 게 저 분이십니까? 쫓아낼까요?”

이런 식으로 내게 사과하는 것은 내가 전혀 생각했던 전개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더 위협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나올 줄 알았던 나는 퍽 당황해서 어? 아니, 하고 일단 제프리를 말리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돼서, 약간 이해하기도 해요.”

그러자 그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만약, 어제 휴게실에서 있었던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단 둘이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그가 이름을 걸고 그런 일은 없을거라고 단언했다. 어느 정도 그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으므로 나는 제프리에게 차는 됐으니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한 후에 응접실로 그를 안내했다. 응접실에 들어와 내가 먼저 소파에 앉고 난 후에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우선 내 첫 번째 용건은 미안하다는 거였어. 내가 과민반응 했지.”

“네, 엄청나게요. 그 때는 솔직히 선배님 비밀은 아예 알지도 못했고, 단순히 사진을 발견한 것 뿐인데요. 오히려 그렇게 과민반응 하셔서 알아내고 말거라고 이를 악물게 됐으니, 앞으로는 조심하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미안, 다시 한 번.”

그렇게까지 까칠하게 굴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쉬고는 얌전히 말했다.

“저도 죄송해요. …그냥 기척을 내서 방 안에 들어갈 걸, 괜스레 놀라게 했네요. 그러고 싶지 않으셨을텐데, 어느 정도는 제 잘못도 있어요. …죄송해요.”

선배는 전혀 내 사과를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니, 그다지, 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이 정확히 자신이 생각한 것인지를 궁금해하고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선배님의 상황을 알고 나니, 더 이해가 됐어요. 분명 많이 시달리셨겠죠, 오르 제국의 적통으로서.”

그 말에 그가 눈에 보이게 손을 움찔거렸다. 나는 그의 반응을 못 본 척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알려고 안 건 아니에요. 저도 우연찮게 알게 된 거라서…. 현 오르안인 이리하의 어머니인 샤하레의 성함이 일리아라 야노 셀리이아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 사진을 보고 그냥 과제일 수 있겠다 싶기도 했는데, 이름 때문에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베노암에서는… Esellia를 이셀리아로 읽는데,”

요르펜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르제국에서는 셀리이아라고 읽지. 앞의 E는 묵음 처리 하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가 태어날 때 부여받은 이름을 입 밖으로 내밀었다.

“힐더.”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다정한, 어머니를 닮은 선한 눈매와 아버지 가문이 가진 특유의 여름 신록의 눈, 그리고 현 오르안과 지독하게 닮은 초콜릿 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굳어진 얼굴이었다. 숨겨 놓고 싶은 비밀,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스스로가 위험해지는 그의 비밀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비밀을 알아서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알기를 바랐다. 그에게 내가 알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현 오르안이 정통성을 얻은 건 그의 어머니가 샤하레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녀의 초콜릿 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가 가지지 못한 전대 오르안의 눈을 가지고 있죠. 분명히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현 오르안은 그저 사생아일 뿐일거예요. 그는 더 이상 유일한 페르게네스가 아니니까.”

그의 침묵을 애타게 바라보면서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바람이 불면 생각이 날 것이다. 내가 학교에 온 첫 번째 날, 당신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물감처럼 번져가던 당신의 머리카락,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던, 당신의 눈을 본 그 순간.

사람들이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할 때 나는 그런 일과 내 일상이 너무나 멀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도, 아니 100년이 지나도 내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나는 누군가의 얼굴만을 보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리석은 착각을 가지지 못할 거라고. 그러기에 나는 너무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라는 흔한 이름을 들으면 당신이 생각날 것이다.

“제가 말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선배님.”

“내가 어떻게 네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라고 믿겠니.”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좋아하니까. 아주 좋아해서, 당신이 죽는 걸 보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내가 그 말을 해도 당신은 믿지 못할 거였다. 나는 그래서 가볍게 웃고 말았다.

“선배님의 비밀을 제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저도 위험해져요. 오르제국이 죽인다면 알고 있는 자를 전부 죽이지, 저만 살려두지 않을거예요. 제 증언은 거의 신빙성도 없고요. 그러니까… 저를 믿지 마시고, 사실을 믿으세요.”

그 말에 그가 조금 안심한 얼굴을 하고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다. 그냥 믿지는 못해서. 내 상황이….”

고개를 가볍게 젓고 말했다.

“괜찮아요, 이해하고 있어요. 다만…”

나는 머뭇거리다가 이 말이 실례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냥 조금 안타까워요.”

“내가 오르안이 아닌게?”

“아뇨. 선뜻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저나 선배가.”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그러게, 하고 말했다. 응접실의 침묵은 무거웠다. 무겁고, 슬프고, 그리고 어딘가 안타까운 데가 있었지만 자리를 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멍하니, 그냥 앉아 있었다.

“라시아.”

그 때 그가 나를 불렀고,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다니엘이라고 불러.”

그 제안은 갑작스럽고 때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그러나 전혀 신경쓰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앞으로는 선배라고 부르지 말고, 다니엘이라고 불러.”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착하다, 하고 내게 웃어주었다.

“친하게 지내자.”

그리고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비게일보다 더요?”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입 밖에 낸 것이 부끄럽긴 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아비게일보다는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아비게일을 그가 좋아하는 것은 싫었고, 결혼은 하더라도 내가 더 그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치졸하고 비틀린 마음이 튀어나와 그를 공격했다.

“그래, 그러지 뭐.”

그는 그 말을 가볍게 받아들여주었다. 나는 그 점이 고맙고 동시에 몹시 부끄러웠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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