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다니엘>
한참을 시간을 끌면서 정리를 했는데도 휴게실에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주무시고 있는 걸까. 감기 걸리실텐데. 입술을 깨물다가 조심스럽게 휴게실로 들어가보니 아까와는 다른 자세로 꿈나라를 헤매고 계셨다.
조심조심 다가가는데 발에 밟히는 게 있어서 화들짝 내려봤더니 파일이 떨어져 있었다. 잠투정 하셨나? 아무 생각 없이 정리하는 중에 뭔가가 쑥, 하고 빠져나왔다. 응? 이거 뭐지. 주워서 다시 파일 속으로 넣으려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아주 작은 초상화였는데, 꽤 옛날 건지 상당히 훼손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꽤 귀한 그림처럼 보이는데… 빤히 바라보다보니 어쩐지… 이 사람, 요르펜 선배와 닮았다.
아마도 어머니…? 어쩌면 친척일지도 모르겠다. 반쪽의 얼굴은 상당히 흐려져서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소품같은 것의 유행을 짐작해봤을 때 나이는 30~40대 정도 인 것 같았다… 초상화를 뒤집으니 글씨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겨우 읽을 수 있었던 글자는 베노암의 언어였다.
“일리아라 야노 셀리이아..?”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확, 하고 잡아당겼다.
“헉,!”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자 요르펜 선배가 음영진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상냥한 사람 같았던 인상이 순식간에 사라진 그의 얼굴과 날카롭고 싸늘한 목소리에 나는 지나치게 놀라서 그의 손에서 재빨리 벗어나서 급한 변명을 시작했다.
“죄송해요, 저는… 이게 떨어져 있어서.”
“…너, 뭐야?”
“예? 저는, 그냥.. 집에 가려는, 그런데 휴게실에서 안 나오시길래 걱정이 되어서-.”
그 순간 그가 억세게 내 손목을 잡아당기고는 순식간에 나를 바닥에 눕히고 다른 손으로 목을 눌렀다. 남자의 손가락이 매우 억세게 내 목을 잡아챘다. 목 한가운데가 눌려서 숨이 막혀와, 저절로 발버둥을 치게 됐다.
“어디에서 보냈지?”
“서, 선배님…”
가해지는 힘이 점점 더 무겁게 나를 눌러왔다. 컥컥거리며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를 밀치려고 했지만 요르펜은 내가 반항을 하면 할수록 더욱 힘을 주어서, 나는 거의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놔… 놓-!!”
놓으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목에 힘이 들어갈수록 더욱 괴로울 뿐이었다.
“한 손으로도 네 목숨 같은 거 없앨 수 있어. 조용히 해.”
빛 아래에서 내가 상냥하고 착할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했던 초록색 눈이 번뜩였다. 이름 하나 읽었다고, 지금 이런…!
“조용히 할 수 있지?”
그의 속삭이는, 어르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공포에 질려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힘이 약간 빠져나가자마자 갑자기 들어오는 공기에 한참을 기침을 해댔다. 침이 떨어지고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떨어졌는데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는 내 몸을 거의 짓누르는 상태였는데, 빠져나갈 틈이 안 보이는 능숙한 압박에 나는 머리를 굴리는 것도 포기하고 얌전히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래서, 누가 보낸거야?”
지금 이게 뭔가 아까의 사진이랑 연관된 것 같아서 나는 아직도 쥐고 있는 사진을 힘을 잡아 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를 수습하며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도 절 안 보냈어요. 전 그냥 선배님이 아직도 주무시는 것 같아서, 카일을 먼저 보내고 깨우러 온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 사진을 봤기 때문에 뭔가 추측하신 것 같은데, 뒤져보시면 아시겠지만 저 완전 아무것도 없어요. 무기도 없고, 무기를 다룰 능력도 없다고요.”
내 말이 믿을 법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는 그래? 하고 눈을 치켜뜨고는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는데, 그의 태도가 매우 사무적이고 내 몸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서인지 별로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것보단 이 사람이 언제고 날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고. 나는 울기 싫다는 알 수 없는 오기로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샤펜공의 딸이잖아요. 그런 제가 뭣하러 선배님을 해치려고 하겠어요?”
그 말에 그의 얼굴이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았다. 나는 그가 나를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을 깨닫고 잽싸게 기어나오려다가 그것을 다니엘이 의심스럽게 생각할까봐 얌전히 누워있었다. 선배는 천천히 내 위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머리를 슥, 넘기고는 말했다.
“미안. 자다 깨서.”
자다 깨서?! 잠이 덜 깨서 이런 짓을 했다고 변명하는 거야, 지금?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자 선배님은 조심스럽게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아직 그를 용서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그 손을 일부러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손수건으로 눈물과 엉망이 된 얼굴을 가다듬자마자 그가 다시 한 번 내게 용서를 구했다.
“미안하다. 내가… 알려지면 곤란한 비밀이 있어서.”
과연 이 사람 빠져나가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캐묻기가 곤란해지잖아.
“내가 원래 잘 때 그런 식으로 누가 옆에 있으면 대개… 그렇게 좋은 목적으로 온 사람은 아니었거든. 원래 귀족의 삶이란 그런 거기도 하지만.”
난처한 얼굴로 웃는 남자의 얼굴에 나는 입을 다물고만 있으려다가 더 이상 곤란하게 하기는 싫어 그냥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시간이 꽤 늦었어요. 저는… 이만 들어가 보려고요.”
그의 변명에 있는 어떤 미심쩍은 것을 지워버리며 나는 약간 방어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러자 아, 하던 선배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고 시계를 확인했다.
“와, 진짜 깊이 잠들어버렸네. 음, 데려다 줄게.”
“아뇨! 그러니까. …괜찮아요.”
급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방금 내 목을 조르고 위협한 대상이랑 집을 갈만큼 두꺼운 신경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혹시라도 아비게일에게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 또한 껄끄러웠다. 그 미심쩍은 감각도 사실 아직 남아있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내 무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서 아까의 사고로 인해 엉망으로 흐트러진 책들을 대충 정리한 후에 자신의 파일을 들고서는 나가자, 어둡다, 라고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선배의 뒤를 졸졸 따라서 나왔다.
“과제는 잘 끝났어?”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내 단호함에 그는 미소를 짓더니 오르 제국에 대한 과제였지? 하고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휴게실이랑 너희가 있던 곳이랑 그다지 멀지도 않고. 말 소리 다 들렸어.”
“아. 죄송해요. 시끄러웠나요?”
“아니야, 전혀. 내가 오히려 신경 쓰이게 했네. 깨우러 와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아무리 알트라라도 그렇지, 여자애를 먼저 보내다니, 내일 카일한테 한 소리 해야겠네.”
“카일이 데려다 준다고 했는데, 제가 거절한 거예요. 아무래도 이것 저것 정리해야할 게 있으니까요. 카일이 워낙 우수해서 제가 따라잡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짐이 많은데, 너무하잖아.”
“혼내지는 마세요, 제 의견을 존중해준거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더니 다니엘 선배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쩔 수 없긴한데, 하고 난처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가 능숙하게 내 짐을 뺐더니 가자, 하고 로드리고 관을 먼저 나가서 나는 그 뒤를 따랐지만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협박할 수도,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할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것이. 도망치고 싶다.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은 태도에 매우 혼란스럽고 몹시 두려웠다.
“그래도 아직 사람이 좀 있다.”
어두웠지만 마법등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간간히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요르펜 선배와 함께 인도를 나란히 걷고 있자니 시선도 슬쩍 느껴지고 말이다.
“수업은 재밌어? 단체 생활이 처음이라 난 좀 힘들었거든.”
“재밌어요. 그래서 견딜만해요.”
“그건 다행이네.”
이런 저런 말을 하며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데, 까먹고 있었다며 그가 내게 물었다.
“훈련 말인데. 시간을 잡아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시간표 좀 보여줄래?”
짐을 선배님이 들고 있다고 해도 내 손이 비어있는 건 아니어서, 그럼 잠깐 저기 앉을까요? 하고 벤치를 가르켰다. 요르펜 선배님이 그래, 하고 벤치에 책을 쌓더니 손수건을 꺼내서 의자를 털고는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예의 있는 사람인데도 긴장이 되는 건, 역시 아까의 일 때문일까. 얌전히 시간표를 꺼내서 보여드리자 으아, 하는 소리가 바로 튀어나왔다.
“이거 시간 내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겠네.”
아, 하고 그가 겉옷을 벗어서 내 무릎 위를 덮어주었다.
“저기, 별로 춥지도 않고… 긴 치마여서 괜찮아요, 선배님.”
“네가 당연히 받아야하는 대접에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어. 레이디잖아.”
그의 지적에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그런 당연한 친절에 부담스러워하고 기뻐하는 ‘아가씨’는 없을 거였다. 그 말에야 나와 그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너무 예민한 것일테지.
“고맙습니다.”
“아니, 당연한 거라니까.”
“당연한 거에 감사할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그렇게 배웠어요.”
그리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요르펜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래. 그럴 때가 있지.”
그러더니 그는 내 시간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금요일이 좋겠다. 어때? 하고 내 의견을 물었다.
“네. 저녁에만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아마 처음엔 힘들거야. 기초 체력을 잡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마력은 없었어?”
“어, 그냥 예민성이에요.”
“나도 예민성인데, 반갑네.”
그가 개구지게 웃어서 나도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이제 일어나자, 하고 그가 내 책을 다시 들었다. 나는 내가 깔고 앉았던 손수건을 쥐고 이거 빨아서 드릴게요, 라고 말했다.
“아, 그래주면 고맙고.”
겉옷도 들어서 건넸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웃기만 했다. 깨끗한 향에 평소라면 기분이 좋았을텐데, 지금은 그저 피로했다. 지친 내색을 하지 않고 걸어 밖에 나오자마자 요르펜선배는 마차를 잡아서 내가 타자마자 자신도 마차에 탔다.
“집 앞까지 데려다 주시려고요?”
“당연하지. 이렇게 늦은 시각에.”
밤보다 당신이 더 무서운데. 나는 초조함과 긴장감에 손으로 치마를 쥐어뜯으며 시간을 보냈다. 마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재빨리 내려 나를 에스코트 해주었는데, 이젠 진짜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얼른 허리를 숙이고 오늘 감사했습니다, 라고 인사치례를 하자 선배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라시아.”
“네?”
무심코 고개를 들었더니 그가 순식간에 내 근처로 다가왔다.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는데 그가 한 손으로 내 손을 억세게 쥐는 바람에 나는 선배의 얼굴을, 그 초록색의 싸늘한 눈을 마주보는 수밖에 없었다.
“난 너와 좋게 잘 지내고 싶어.”
입을 열지 못하고 나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위협이다.
“넌 현명하고, 똑똑하니까… 알아야 할 것과, 알지 않아도 좋을 것의 차이를… 알거라고 생각해.”
나는 입이 맞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그는 내 손을 쥐고 있던 힘을 거짓말처럼 풀더니 두 손을 살짝 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그럼 경고는 여기서 끝.”
그리고 그는 내게서 자신이 멀어지면서 자신의 목 주변을 툭툭, 두드렸다.
“약 잘 발라. 멍들 것 같네.”
“…느…네.”
겨우 대답하고 나는 그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주춤주춤 멀어지자 그가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더니 라시아 도착했습니다, 하고 집사에게 말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두세 걸음 떨어지더니 그럼 들어가, 하고 웃었다. 나는 그의 겉옷을 꽉 쥐고 보란듯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일리아라 야노 셀리이아.”
그 말에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의 겉옷을 꽉 쥔 채로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애써 자신있게 웃어보였다. 어리석은 짓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하고 있기만 하기에 나는 지독하게 부당한 대접을 받았고, 이를 간과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덜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세게 준 후에 결심했다.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주머니에 넣은 사진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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