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사실 마차가 얼마 달리지도 않았을텐데, 공기가 어색해서 두시간쯤 갇힌 기분이 들었다. …살려줘. 로드리고 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해방감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부탁해요, 후배님.”
샤펜 양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정석의 말투를 쓰기 시작한 미드웰 선배님이 마차에서 내린 내게 책을 건네주었다. 그럭저럭 들고 갈 수 있을만한 무게라 끌어안고 가다가 로드리고 관 앞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발로 두드리는 건 볼품없어 보일테고…. 책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문을 연 후에 책을 들고 로드리고 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카일이 소리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 도움을 청하지, 들어줬을텐데.”
“누가 있는지도 몰라서, 소리 지르고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
웃으면서 대답하자 카일이 그래도, 하면서 인상을 찌푸리며 친절하게도 내 손에서 책을 가져갔다.
“고마워.”
“당연한 건데, 뭐.”
그래도 고마운 건 마찬가지라서 마냥 웃었다.
“도움은 많이 됐어?”
“확실히 기록 찾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더라. 오르제국의 정통성에 대한 건 게다가 굉장히 예민한 사항인데, 어째서 이런 걸 일개 학생인 나한테 시키셨는지 교수님의 저의가 좀 궁금해졌어.”
볼멘 목소리로 말하자 카일이 그러네, 리콜라티 교수님이 이런 과제를 의미 없이 내주셨다는 가정도 말이 안 되고, 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아, 요르펜 선배님은 어디에 계셔?”
“왜? 안쪽 휴게실에서 주무시고 계실 건데.”
“아, 미드웰 선배님이 도서관에 요르펜 선배님께서 도서관에 이걸 놔두고 가셨다고, 전해달라고 하셔서.”
“별 일이네, 다니엘 선배가 뭐 까먹고 다닐 사람은 아닌데.”
“중간에 교수님이 부르셨대. 잠깐만.”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옆에 놔두고 오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휴게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불도 안 켜진 휴게실 소파에 쑥, 하고 튀어나온 다리에 약간 인상이 써지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왜 저렇게 불편하게 주무시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의외로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얼굴에 어쩐지 좀- 떨렸다. 소년 같은 얼굴로 순하게 잠에 든 얼굴이 유난히 말갛게 보였다. 깨끗하고 단정해 보이는, 다정한 눈매에 초콜릿 색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얼굴을 장식하듯이 늘어져있었다. 잘 생겼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 한 가닥을 넘겨줄 것 같이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중얼거려보았다.
“다니엘.”
급작스러운 부끄러움에 손을 재빨리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무슨 짓이야, 라시아 클레이만. 너는, 너는-, 그러면 안 되지.
파일을 탁자 위에 살짝 내려놓고, 나는 황급히 걸음을 옮겨서 휴게실을 나왔다. 카일이 물었다.
“주무시고 계셔?”
내 쪽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말하는 카일이 이렇게나 고마울 수가 없었다. 빨개지지는 않았겠지. 나는 속으로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응. 너무 곤히 주무셔서, 깨우지도 않았어. 뭐하는 중이야?”
카일은 자신의 셔츠에 꽂고 다니는 펜으로 종이에다 직직,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는 내 물음에 어어, 잠깐만, 하고 한참을 열심히 적길래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별 건 아니고… 페르게네스 왕조 계보…. 책에 너무 어렵게 쓰여있더라고.”
정확한 정보는 보통 오르제국의 언어로 쓴 경우가 많은데, 나는 꽤 훌륭한 오르제국어 사용자긴 하지만 그건 말하기나 듣기에 국한될 뿐, 읽는 데에는 아무래도 카일보다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는 그 말에 감동해서, 카일 옆에 앉아서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감탄하는 표정을 해보였다.
“억. 엄청 부담이야.”
“고마워, 진짜로. 그런데 페르게네스 왕조라고 해?”
“응.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최초 성문법에는 3개의 가문이 왕위를 이을 수 있도록 했거든. 그러니까 페르게네스라는 가문이 현재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있지.”
“아, 그렇구나. 난 아예 처음 시작부터 단일 전제 국가인 줄 알았어. 그래서 황제의 성이 따로 있지 않고 그냥 오르라고 하는 줄….”
카일이 엄격한 얼굴로, 아주 약간의 미소만을 보인 채 나를 교정해주었다.
“오르안전하.”
나는 입매를 일자로 만들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오르안, 이라고만 말했다. 카일은 그 정도로 만족한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오르제국의 시작을 말하자면, 페르게네스 일족, 즉 페르게네스 지역을 다스리던 일족과 오르 지역을 다스리던 일족, 그 외 한 부족, 이렇게 셋이 힘을 모아서 제국을 건설해. 당시 제일 힘이 강하던 오르 일족을 중심으로 오르에 수도가 세워졌는데, 그 와중에서 페르게네스가 가장 먼저 황위에 올랐지. 아마 오르일족은 누가 먼저 하든 힘은 그들이 가지고 있으리라고 믿었나봐. 그런데 웬걸, 페르게네스 황제는 오르 일족을 포함한 다른 한 가문을 성공적으로 제거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지금 법이 명시한 왕위계승자격을 가진 건 오직 페르게네스뿐이야.”
신의 아들로서 최초부터 군림한 것 같은 오르안이 시초가 이런 정쟁의 결과물이었다니,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가지고 있었던 환상이 약간은 깨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페르게네스를 카일이 그들 식으로 적은 것을 보면서 더듬더듬, 베노암식으로 이를 읽어보았다.
“라르…케나…라르케나스?”
“어, 읽을 줄 아네?”
“어깨 너머로 어찌 어찌 배운 적이 있거든.”
“그래도 대단하네. 그럼 문제! 그거 줄여서 말하면 뭔지 알아?”
“…읽은 걸 칭찬하는 걸로 끝내주길 바랐는데.”
“음. 과한 기대였나. 줄여 말하면 랄캄이야. 제 2의 수도이자 근원의 땅이지. 옛날부터 항구도시다보니 타국과의 교류가 그나마 활발한 곳이어서, 그걸 특색으로 삼고 이름도 바꿨어. 페르게네스라는 오르안 전하의 성을 지역 이름으로 막 부를 수도 없으니까.”
납득하자마자 그럼 서론은 끝났고, 라며 카일이 책을 밀어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 독점이 척살로 이루어졌는데 그 정당성을 신에게서 받았다고 사람들에게 납득시켜왔기 때문에, 상당히 혈통에 예민해. 그런고로 일부일처제가 법이고 첩을 뒀다간 사형이야. 오르안 전하의 혈통과 정당성도 그래. 함부로 말을 꺼냈다간 그대로 노예로 떨어져버리지. 심지어 노예는 요즘 별로 남아 있지도 않은데 말이야. 아, 물론 여기 일부일처제에는 오르안 전하가 해당되지는 않아. 워낙 후손 보기가 힘들다보니.”
카일이 한참을 열중해서 설명하는 소리를 듣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서 그에게 물었다.
“만약에 귀족이 첩을 둬서 첩이 임신을 하면, 어떻게 돼?”
카일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매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어.”
“엄마도, 아이도?”
“응.”
그가 무척 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렇구나,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저 나라엔 못 가겠구나.
“넘어가자. 현 오르안 전하의 아버지는 아이작 레완 페르게네스야. 사막의 매장자원을 찾기 시작한 통치자고, 처음으로 오르제국에 마법사 양성소를 대폭 지원한 사람이기도 하지.”
“응? 전대 오르안이라고 안 불러?”
“그 분은 오르안이 아니셨어. 국가 기밀이라 나도 접근할 수 없는 정보고, 있다 해도 너랑 공유는 못 하지. 어쨌거나 그래서 아이작 레완 페르게네스는 오르안의 묘에 오르지 못했어. 역사학자들도 뭐라고 그 사람을 칭해야할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해서 이거에 대해선 내가 해줄 말은 없을 것 같다.”
“음. 그럼 현 오르안께는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 당한 적 없으셔? 어쨌거나 아이작 레완 페르게네스의 친 아들이시잖아?”
“그게 애매한데, 페르게네스 가문에서 정확하게 나온 혈통이긴 하잖아. 전대의 오르안이 아니었다 뿐이지. 즉, 신이 아니나 신의 일족인 사람의 아들에게 나온 자가 신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란 말이야. 그런데 이게 퍽 관념적인 문제다보니 답이 나올 수가 없는 거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니까.”
흠. 결국 전대 신이 직접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지만, 결국은 신의 일족에서 나온 거니 문제가 없다는… 그런 건가.
“솔직히 통치자의 자질로만 따지자면, 현 오르안 전하는 완벽하시지. 지금까지 미뤄둔 국교 개방도 차근차근 성공적으로 일으키기 시작하셨고, 경제력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고. 또 타 부족에 대한 억압을 유화하는 정책을 쓰면서 한민족 국가로서의 정체성도 잘 다지고 있고 말야. 그 분 스스로도 대단한 검사시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군주상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나올 차례인 것 같은데?”
내 말에 카일은 미묘하게 웃으면서 왜? 라고 물었고, 결국 나는 이 어린 천재에게 적당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경제가 수도에 과도하게 몰려있었던데다, 지금까지 지나치게 타부족을 압박해왔는데 그게 정통성에 하자가 있는 오르안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는 모르는 거 아니겠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자 카일이 꽤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다음 대 샤펜이 되지 않는다면, 좀 아쉬울 것 같은데. 나한테 이렇게까지 주눅 들지 않는 사람은 오랜만이야. 천재라고 다들 함부로 말을 못하거든.”
가볍게 말하는 투에 스스로에 대한 확신 짙게 깔려있었다.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지, 대단하기도 하고….
“어쨌든 아이작 레완 페르게네스 또한 전대 오르안이신 올란 브뇌뵈 페르게네스의 아들이긴 하니까. 비록 1후궁의 자식이니 적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자만 없다면 상관없지 않나.”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기록으로는 정실 아들이 있거든. 드네인 아루카겐 페르게네스라는데 관련 자료가 일급비밀이야. 하지만 이 분이 오르안 자리에 올랐다는 것 또한 묘지를 확인하면 알 수 있긴 해서… 아무튼 이것과는 관련 없이, 확실한건 현 오르안 전하의 정통성이 굳건해.”
“왜? 엄청 불안해 보이는데.”
“우리나라에는 특이한 제도가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샤하레야. 오르안전하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한 사람을 정실로 맞아들일 수 있고, 이를 샤하레라고 하지. 일단 한 번 샤하레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는 누구도 그녀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없어. 오르엘 여신에게서 선택받았다고 인정받거든.”
“그럼 레이디 드니어스가 샤하레인거야?”
“아니. 레이디 드니어스가 샤하레가 된다면 우린 그녀에게 지금 하는 것보다 더욱 극진한 예를 갖춰야해.”
“지금도 학생인 아가씨로서는 과분한 예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베노암적인 생각인거고.”
하긴, 그것도 그렇다.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고 극존칭을 쓰는 것 이상의 예란 도대체 어떻게 지키는 것인지에 대한 의아함이 동시에 생겼다.
“현 오르안님 또한 확실히 이 분과 아이작 레완 페르게네스 사이의 자식이시니까 샤하레로부터 정통성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흔들릴 게 없는거지.”
“만약 적통이 안 나온다면, 말이지? 예를 들면 전대의 오르안과 전대의 샤하레 사이의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자 카일이 웃으면서 말했다.
“없는 일을 상상하기 좋아하네. 그러면야 물론 좀 흔들리기는 하겠지. 하지만 라시아, 생각을 해 봐. 이리하 전하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 굳이 내란을 일으키고 싶은 사람이 어딨 겠냔 말이야.”
자신이 모시게 될 군주에 대한 확신이 이렇게 넘쳐나는 천재를 보고 있자니, 카일이 소설책에서나 나올 법한, 황제를 위해 준비된 책사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냉철하면서 맹목적으로 한 사람을 따르는 그가 신기했고, 동시에 이 천재를 따르게 만든 오르안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네 의견은 알겠어. 그리고 무척 유용했고. 오르 제국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게 된 것 같아.”
그러나 천재를 그저 칭송하기만 하면 무슨 재미겠는가. 그건 너희 나라 생각이고, 라고 그의 설명을 일축하는 내 말에 카일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넌 좀 재수 없다,”
나는 그 말에만큼은 더없이 유쾌하게 웃어줄 수 있었다. 활짝 웃는 내 모습에 카일은 코라 친구만 아니었어도, 하고 웅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조금 놀랐지만, 재빨리 표정을 숨기고 상냥한 표정을 해보였다. 그렇구나. 얘네 둘이.
“오늘 고마웠어, 진심으로. …이만 돌아가자.”
나는 그에게 화해의 표시로 손을 내밀었다. 카일은 내 손을 잡더니 웃고는, 너 진짜 얄밉다! 하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번에는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어서 어째서? 하고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그냥, 예쁘기만 한 여자애가 뒷배를 가진 건 줄 알았는데 아니니까.”
보통 다 가진 사람을 얄밉다고 하잖아? 그가 가볍게 말했다. 그 말은 그래도 좀 위안이 됐다. 내가 가진 게 단순히 뒷배만이 아닌 걸 확인받은 기분이라서 말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래도 ‘다 가진’ 것으로 칠 수 있나.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오늘 고마웠어.”
“아니, 나로서도 유용한 시간이었어. 그나저나 난 기숙사 때문에 들어가야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게? 기다려줄까?”
“아니야, 나 이거 대충 정리하고 들어갈 거니까, 그렇게 늦은 시각도 아니고.”
“10시면 충분히 늦었는데.”
“알트라는 치안이 좋잖아.”
“그래도….”
“정말 괜찮아.”
깔끔하게 거절하자 카일도 더 권하지는 않고 로드리고 관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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