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별 생각 없이 가입했던 동아리였는데 학교에서 편안하게 갈 곳이 있단 것은 생각보다 좋은 일이었다. 오히려 머무는 저택보다 가끔은 편하게 있을 때가 있어서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로드리고 관에서 보내고는 했다. 다만 식사는 동급생인 시드와 코라와 함께 했고,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를 망치지 않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특히 코라와는 시간이 맞을 때가 꽤 있어서 곧잘 함께 다녔다. 그녀 쪽이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고 친한 친구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사실 대개의 여자아이들이 출신 성분 때문에 날 과히 좋게 생각하지는 않아서, 나를 편견없이 대해주는 코라의 존재가 더욱 고마웠다.
코라는 내 수업이 공강인데도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멍하니 복도에서 코라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 일 것이다.
“라시아!”
아, 수업 끝났구나. 고개를 돌려서 코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한… 10분정도 기다렸나.”
“아, 정말? 다행이다. 오래 기다린 줄 알았어.”
“도서관에 있다가 와서, 전혀.”
“억, 나 도서관 가야하는데. 책 연장할 것 있거든.”
그럼 다시 가지 뭐, 하고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도서관에서 기다릴걸,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힘든 일도 아니니까.
“넌 빌릴 책 없어? 괜히 미안하네.”
“음. 아, 생각해보니 있긴 하다. 리콜라티 교수님께서 오르제국의 역사 관련한 과제를 내주셨거든.”
“리콜라티 교수님이? 우리 과제 없지 않았어?”
“응. 나한테만…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엄청 의외네. 그런 거 따로 과제 내주실 분이 아닌데. 너 뭐 잘못한 거 있니?”
“짐작 가는 건 없는데.”
애매하게 웃어버리자 내용이 뭔데, 라고 코라가 물었다.
“이번 대 오르안의 가계와 정통성… 뭐 그런 거였어. 진도도 그 쪽이 아니라서 좀 당황스럽더라.”
“너희 아버지가 부탁한 거 아니야? 엄격하게 훈육시켜 달라, 뭐 그렇게?”
“샤펜 공작께서? 아닐 걸? 그랬으면 그 분 말고도 다른 분이 많이 나서서 과제를 내주시거나 해야 하는데, 그 분만 유난히 그러시더라고. 아, 메리웨더 교수님 빼고.”
“메리웨더 교수님은 머리 좋다 싶은 애들한테는 그런 거 시키시고는 하니까. 그건 뭐, 그 분 특징이니까 어쩔 수 없지.”
생각해보니 시간이나 때우지 말고 그 오르제국 과제나 할 걸. 바보 같이 지금 읽어야할 필요 없는 과제도서를 읽었네. 코라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뒤에서 불렀다.
“라시아, 어디 가?”
응, 하고 몸을 돌리자 로드리고의 카일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는 오르제국에서 온 장학생이었는데, 중인 출신이었다. 오르제국은 타국에 비해 상당히 폐쇄적인 국가였고, 그래서인지 중인 출신의 특출한 학생들이 장학생으로 페드윈에 오는 게 대다수였다. 고위급의 귀족들은 주로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왔고 말이다. 이런 중인 출신들은오르제국의 학생들이 매우 적은데다 보통 대개 고국으로 돌아가 높은 직위에 오르는 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로디나나 로드리고에 들어올 수 있었다.
“도서관 가는데… 왜? 부탁할 거 있니?”
“아니, 그건 아닌데. 시드한테서 너 과제 받은 거 들었거든. 리콜라티 교수님이 너한테 희한한 과제 내줬다면서? 오르안 전하의 정통성에 대한 거.”
오르안 전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오르제국은 전형적인 황제 중심의 국가였다. 제국답게 광대한 영토를 지닌 오르제국의 3분의 1은 사막으로, 대륙 최대의 오아시스 오르를 수도로 삼고 신성시했다. 다양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부족들이 발현했고, 이를 통합한 게 제국의 시작이었다. 황제는 곧 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베노암 입장에서 보면 시민권 따위는 없는 희한한 나라다. 어쨌든 오르제국의 황제는 오르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제국의 주신인 물의 여신 오르엘의 남편이자 아들이란다.
“응. 그런데 시드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 시드한테 이야기 한 적 없는데.”
“리콜라티 교수님이랑 친해, 걔.”
조그맣게 코라가 말했다. 카일은 그녀에게 짧게 시선을 주었다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도와줄까, 그거? 나 오르제국 사람이고.”
“혹시 필요하면 부탁할게. 좋은 자료가 있나봐?”
그럼, 하고 카일은 제 머리를 툭툭, 하고 건드렸다. 천재들은 원래 저렇게 잘난 척이 심한가.
“와, 그거 진짜 믿을 만한 자료네.”
내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카일은 웃으면서 너무하네, 하고 나를 타박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쇄국 정책을 펼치는 나라가 페드윈에 얼마나 많은 자료를 허용했을까 싶기도 했고, 또 어쨌거나 그에게서 말을 들으면 상당히 실제적인 자료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나중에 부탁해도 괜찮을까? 8시쯤 로드리고 관에서, 괜찮니?”
“응. 그럼 그때 봅시다. …안녕, 코라.”
“아, 안녕.”
코라는 카일의 늦은 인사에 노골적으로 불편한 얼굴을 하더니 어색하게 인사하고는 카일이 사라지는 것을 힐끔 힐끔, 확인했다. 그녀는 상인 집안의 아가씨답게 싹싹한 성격을 타고 났다. 그녀는 인맥을 넓히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고 이를 이용하는 데 머뭇거림도 없었는데 카일에게만 유독 어색하게 굴었다. 내가 알기로는 카일이 딱히 코라에게 잘못했거나, 혹은 코라가 카일에게 잘못한 게 있지도 않은 데 말이다.
“코라, 이런 거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왜 카일에게 어색하게 구는 거야?”
“티, 티나!?”
그 반응에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랐다. 티가 안 나게 하려는데 그런 반응을 보였단 말야?
“응. 엄청 티 나는데.”
“그, 그게 말야…. 사실은, 내가 1학년 때 카일을 좋아했었거든….”
…응? 내 귀가 잘못 됐나. 벙하니 코라를 바라봤다가 그녀의 약간 빨개진 뺨 때문에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도 내가 귀를 의심할 걸 알았는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도 알아, 의외인 거.”
“솔직히 좀… 화려한 스타일을 좋아할 줄 알았거든. 아, 내 막연한 느낌이니까 틀릴 수도 있지만.”
“카일도 화려한데….”
뚱한 목소리에 나는 어디가, 대체 어디가! 하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으응,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딱히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코라는 내 속의 말을 들었는지, 머릿속이 화려하다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이익, 머리 회전하는 게 보통이 아니라고. 같이 1학년 때, 과제 파트너를 같이 많이 하고는 했는데 그 때 얼마나 놀랐다고.”
“그럼 작업이라도 걸어보지 그랬어. …연애 금지인 집안도 아니고.”
“연애는 금지지만, 약혼자는 곧 생길거란 말이야. 괜히 소문이 나면 곤란하잖아.”
그래도 그렇게까지, 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목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고 없고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 않는가. 나도 샤펜 공작의 요구는 뭐든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우리 집안은 본래 상인 집안이고, 전쟁통에 자작위를 산 가문이니까 지금도 신분의 골이 심한데 내가 오르제국의 중인과 연애를 하면 반응이 어떻겠어.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적당한 위로를 꺼내고 싶었지만 내게 준비된 말이 참 부족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안색으로 살폈지만, 코라는 내 얼굴을 보더니 까르르 웃을 뿐이었다.
“뭘 그렇게 조심스러운 얼굴이야. 큰일도 아닌데! 고충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마침 도서관 앞이라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약간 안심한 채로 도서관 문을 열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책 냄새가 나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중에 앞에서 만나자.”
코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역사 코너로 갔다. 5년 전에 황제위에 오른 이리하 황제는 고작 15살의 나이로 그 어떤 황제보다 강력한 황권을 구사하며 자신의 자리를 공고하게 다졌다. 그를 지키는 무사들이 강력했던 것도 있지만, 그 자신이 대단한 검사이기도 한 이 스무살의 황제는 젊은 황제 특유의 치기도 없이 평탄하게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외교에서는 베노암의 늙은 사자 못지않았고, 강력하기로는 북측 야만족의 젊은 승냥이 못지않았다.
그러고보니 그는 그와 동갑인 마사 레플라 드니어스, 오르제국에서 유학을 온 정말 몇 안 되는 고위 귀족의 자녀인 로디나와 약혼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그녀는 오르제국 출신의 학생들과 만날 때 매우 정중한 대접을 받았고, 나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나저나 자료가 있긴 하려나. 수도가 신성시되는데다 쇄국 정책을 펼치다 보니 제 2수도인 랄캄과의 교류만이 드문드문 있을 뿐이라 사실상 오르 제국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오르에 대한 자료는 극히 부족했다. 일단은 중요해보이는 걸 고르긴 하겠지만…
한참을 그렇게 이것저것 찾다가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코라가 기다리겠다 싶어서 대충 정리하고 책을 빌리고 나서자 코라가 왜 이렇게 늦어, 하며 나를 타박했다. 나는 미안한 얼굴로 미안, 오래 기다렸어? 라고 물었다.
“조금? 원하는 자료는 찾았어?”
“예상했지만 자료가 너무 적어서, 그렇게 수확은 없네.”
“뭐, 남의 나라 정통성에 대해 아는 게 쉬운 일이겠니, 그것도 얼마 전의 일들에 대해 파고들어야 하는데. 아마 그 쪽도 지금 제대로 정리 중일걸. …리콜라티 교수님은 도대체 왜 그런 과제를 너한테 내셨지?”
“그러게 말이야. 일단 카일이랑 한 번 얘기 해보고 그래도 답이 안 나오면 죄송하다고 하는 수밖에 없겠어. 그런데 아까 그… 그 이야기 말이야, 그거 누가 들으면 곤란한 일 아냐?”
코라는 손을 휘휘 흔들더니 웃으면서 신경쓰지 마, 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작년에 학교만 나왔어도 내가 카일 좋아했었던 건 다 알 걸?”
“정말? 고백이라도 했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소문이 났더라고, 내가 걔를 좋아한다는. 그런 소문은 빠르잖아. 게다가 내가 아니라는 공표도 안 해서, 아마 다 진짠 줄 알고 있을 걸? 그 때는…. 그냥 걔가 알아주는 것만으로 기뻤어. 어떻게든 내 마음을 알아줬구나, 싶은.”
“애절하네.”
나는 무거운 책을 꾹, 껴안으면서 중얼거렸다. 안타깝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랬다.
“서로 모르는 척 하는 거지, 카일 본인도…. 딱히 나랑 얽혀서 좋을 게 없으니까. 장학생이잖아, 오르 황실에서 일해야 하는데, 베노암의 귀족가랑 엮여선 곤란하지.”
입 안이 텁텁해졌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싶어 안심이 되기도 하고… 어쨌거나 좋은 사람이 되기는 멀었다, 나도. 한참을 말 없이 걸어가다가 학교 내부에서 운행하는 마차 정류장에 섰다.
“아, 너 로드리고 관에 가야하잖아. 이 방향 아니지 않나?”
“시간도 남았고, 그냥 같이 기다려줄게.”
“오, 의리.”
하하하, 하고 나는 웃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코라가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바라보고 손을 흔들어주고 마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다가 내가 타야할 정거장 앞에 섰다.
“샤펜양!”
큰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나를 부르는 게 아니어서 좀 창피했다.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뭐라 말을 하는 사람은 우아한 다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사펜의 적녀, 아비게일 디트리올 샤펜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두 사람을 피해야할까, 아는 척을 해야 할까 머뭇거리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비게일은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 하고 숙여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 라시아네.”
아비게일 쪽에 과하게 집중하다보니 옆의 남자가 누군지 확인할 정신도 없었나보다. 로드리고의 잉그럼 소하 미드웰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디 가?”
“로드리고 관에 가요. 오르제국과 관련한 과제가 있는데, 자료가 부족해서 카일에게 도와달라고 하려고요.”
“아, 카일이 오르제국 출신이었지. 그보다 잘 됐다, 나 부탁 하나만. 이거 다니엘한테 전해주라. 그 녀석이 수업 중간에 불려나가느라 놔두고 갔더라고. 그렇다고 지금 내가 가져다주기는 애매하고 말야.”
그가 자연스럽게 내 책 위에 파일을 하나 툭, 올렸다. 이 사람… 정말 날 아가씨 취급 안 하는 구나 싶어서 웃기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그랬다.
“전혀 도와줄 생각을 안 하네, 잉그럼.”
아비게일이 차가운 어조로 미드웰을 질책하자 그가 앗차, 하고 소리를 내더니 내게서 책을 빼앗아가듯이 했다.
“신사들의 표본이 되어야 할 로드리고가, 여성의 짐을 들어줄 생각은 없고 오히려 짐을 늘리다니, 무슨 짓이야.”
“미안, 미안. 내가 라시아를 그냥 로드리고로만 봐서 말야.”
쩔쩔매며 당혹스러워하는 미드웰의 사과의 목적은 내가 아닌 아비게일이었다. 아비게일은 흥, 하고 작게 코웃음 치고는 똑바른 자세로 서있었다. 어쩐지 뒤로 물러나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아가씨' 대신 '여성' 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그녀에게 코르티잔의 딸인 나는 아가씨가 아닌, 그저 평민여성에 불과할테니까. 하지만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그녀와 나의 관계가 그 정도인 것을.
“로드리고의 후배긴 하니까요, 이 정도는 후배로서 들겠습니다, 선배님.”
얌전히 그가 든 책 중 네 권을 다시 내 쪽으로 가져왔다. 미드웰은 나를 보고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더니 머쓱한 표정을 했다. 날 아예 까먹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불쾌하지 않고 그냥 좀 웃겼다. 아비게일 양을 좋아하는게 너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마차가 곧 도착해서 우리는 모두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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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