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금요일, 오후 다섯 시의 로드리고 시험이 다가오자 이런 이벤트를 놓칠 수 없다던 코라는 내게 널 두고 내기를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혹여 불쾌하지 않도록 내가 인센티브는 잔뜩 제공하겠다는 둥의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나는 그러라고 했고, 나는 돈까지 벌면서 당당히 로드리고, 남자들의 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샤펜공작이 내가 합격하지 못할 것을 알고도 로드리고에 보냈을 리가 없는데. 물론 검술은 어쩔 수없이 꼴등이었지만, 그래도 체스나 승마는 자신이 있었던만큼 안정적으로 합격했다. 코라는 내게 배당된 금액을 건네주면서 덕분에 즐거웠다며 수익의 일부를 주기도 했다. 어찌나 행복해보이던지 시드조차 놀랄 정도였다. 물론 나도 좀 즐거웠고 말이다.
로드리고는 직속 선후배가 존재하는데, 내 경우 검술이 너무 조악해 아마 직속 선배가 될 사람이 훈련을 시켜줄 거라고 했다. 안타까운 점은, 철저히 직속 관계를 유지하는 로디나에 대한 대응책으로 대충 만든 제도라 그 자리에서 내 직속 선배를 제비뽑기로 뽑았단 점이랄까. 심지어 뽑힌 사람은 제발 다른 사람, 제발 이 사람 빼고 아무나! 라고 간절히 빌었던 나의 바람과 반대로 다니엘 이셀리아 요르펜이었다. 이 사람 빼고는 다 좋은데, 왜 하필 이 사람이야….
“저기,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 요르펜 공자님은 외교관이시니까 검술은 못 하, 아니 안 하시지 않나요?”
그 말에 사람들이 억, 그렇게 돌직구를…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요르펜 선배님의 눈치를 보았다. 편입생 주제에 당돌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나로서는 지금 제일 중요한 게 잘 보이는 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 남자랑 엮였다가는 아마도 샤펜양의 견제도 엄청날 거고, 뭣보다 저렇게 느낌이 좋은 사람을 내 옆에 뒀다가는 후회할 것 같았다.
“하하, 걱정 마세요, 후배님. 외교관이라도 기본적인 체력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받는답니다.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킬 준비가 되어있답니다.”
…잘못 걸렸다. 어쩐지 그의 자존심을 심하게 긁은 모양이다. 난처한 얼굴로 아니, 저기, 보통 외교관은 검술을 배우지 않는다고 들어서, 라고 우물우물 대답을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는지 로드리고들은 나를 측은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망했구나.
“음. 제대로 소개를 해야겠지. 이렇게나 당돌한 아가씨 후배가 우리 로드리고에 들어오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하구나. 아마도 다니엘이 잘 관리해줄 것 같으니 우리는 신경을 끄도록 합시다. 하하하.”
“아뇨,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그것도 너그러운 관심을 기대하고 있어요.”
재빨리 말했지만 모두들 하하하, 불쌍한 녀석, 이라는 짓궂은 반응밖에 내게 돌려주지 않았다. 아니, 구해주세요.
“음, 아무튼 놀리는 건 이정도로 하고.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이라고 한다. 아마 소문이 무성하니까 다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지. 놀랍게도 정말 우리 원년 규칙 어디에도 정말로 로드리고가 남자만 들어와야 한다는 조항이 없으므로 엄연히 정식 절차를 밟고 들어오게 된 아가씨니까, 쓸데없는 텃세 부리지 말고, 계집애라고 따돌렸다간 죽는다. 알아서들 잘 지내, 알았냐?”
다들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사실 좀 의외였다. 생각보다 쿨한 집단이었구나. 신사 클럽 같은 걸 혼자 상상했는데 내 상상과는 좀 다른… 그런 클럽이라서 마음이 꽤 편안해졌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이에요. 2학년으로 이번 학기에 편입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나름대로 예의를 차려 우아하게 절을 했는데 어째 로드리고들의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반응이 왜 이러지 싶었지만 일단은 시드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이제 난 가야겠다. 거지같은 학생회…. 너희는 절대 학생회 들어오지 마, 알았냐.”
“애초에 록산느한테 안 반했으면 되었을 것을, 안타까운 일이야.”
쯔쯔, 하고 누군가 혀를 차며 그를 동정하는 듯이 놀렸다. 어째 들어오자마자 남의 스캔들에 대해 알게 됐네. 이런 거 내가 알아도 되나 싶었지만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시드는 작게. ‘애론이 록산느 좋아하는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호수 물고기도 아는 사실이라서 신경 안 써도 돼’ 라고 내게 말함으로서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 사랑이 뭐라고…. 반한 게 뭐라고! 내가 왜!! 미쳤지, 미쳤어!”
비틀비틀 로드리고 관을 나서는 선배님을 측은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환한 금발에 파란색 눈을 가진 남자가 내게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음, 라시아, 라고 불러도 될까요, 후배님? 참, 나는 윈프레드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네. 후배님이라는 칭호로 안 부르셔도 괜찮아요. 그 칭호가 전 좀 낯간지러워서.”
“이야, 시작이 나쁘진 않네요. 우리도 사실 밖에서나 이렇게 서로를 부르지, 영 어색해서 싫어하거든요, 이런 거. 그런데 영판 아가씨라서…”
우리가 먼저 뭘 어떻게 하기가 좀, 라는 말을 흐리면서 윈프레드가 웃었다.
“어머, 아녜요. 편하게 하세요. 저도 편하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생각보다 아가씨 스타일도 아니라서.”
그 말에는 좀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음, 그건 좀 무리수였나. 애써 싹싹하게 웃어보이자 시드가 내 옆에서 말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석의 아가씨라서 데리고 다니기 민망할 때가 가끔 있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잘 놀더라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들.”
“그러고보니 너랑 놀지….”
누군가가 꺼낸 말에 갑자기 분휘기가 확 풀어지더니 다들 약간씩은 가벼워진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하나씩 시작했다. 어쨌거나 로드리고끼리는 존댓말을 잘 쓰지 않는 듯, 대번에 나온 반말을 쓰다가 갑자기 눈치를 보기에 전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때마다 아 하긴, 시드랑 놀지…라는 반응이라 시드가 얼마나 자유롭고 헐렁하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어서 때아니게 웃음이 좀 나왔다. 얘랑 다니는 것만으로 이미 아가씨 탈락이라니,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알 수가 없네.
“승마 잘하시던데 어디서 배우셨어요, 선배님?”
마찬가지로 제비뽑기로 뽑힌 후배가 눈을 반짝 거리면서 내게 물었다. 아, 웬델 비엥 코르슈카라는 사람이었다. 진홍색의 물감을 짠 것 같은 진한 머리카락이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으로, 남자아이인데도 애교가 있어서 다들 예뻐라 하는 눈치였다. 나도 나쁘지는 않았고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말이나 동물을 좋아해서 10살때부터 기초적인 건 배우기 시작했어요. 마차보다 말이 시야도 트여있고 해서 지금도 승마를 더 선호해요.”
“그러셨구나. 달릴 때도 굉장히 안정적이시더라고요.”
“고맙습니다, 후배님… 으, 그런데 이 호칭 역시 너무 낯간지러워서. 코르슈카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네, 마, 마음껏 불러주세요!”
…어쩐지 이 아이 무척 괴롭히고 싶은…. 내 안의 새로운 나를 발견한 기분이었지만 일단 물러두고 다른 사람의 질문에 주의를 기울였다.
“체스는 어디서 배웠어? 애론이 굉장히 고전적이라서 이기기가 쉽지 않은데, 굉장히 쉽게 이기더라.”
내가 앉아 있는 소파 앞, 뒤로 옹기종기 모이는 모습에 약간 부담스러우면서 부끄러웠다. 하지만 뭣보다 이렇게 남자들만 잔뜩 모인 곳에서 혼자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걸 말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선배님께서 제가 어, 상대하기 좀 쉬운 스타일이셨어요, 일단은. 제 체스 대련 상대가 집사였는데, 그 사람이 주드발 선배님과 굉장히 비슷한 수를 뒀거든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음에 샤펜양이 체스 상대로 나오면 이 아가씨를 내보내자. 쉽게 이기지 않을까?”
“넌 집안싸움 나게 할 일 있냐?”
“아, 뭐 어때. 원래 데릭 선배님도 내보냈었는데, 대충 그 분도 샤펜양이랑 같은 집안이고. 소피아 양도 앨번이랑 친남매인데 맨날 같이 붙이잖아.“
“그거랑 이 둘의 사연이 같냐? 아무튼 생각 없는 건 알아줘야해.”
둘이서 투닥투닥하는 주제가 나와 예민한 공작가의 이야기인데도 딱히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게 되레 신기했다. 아예 답을 기대하지 않고 저 둘이 싸워서 그런가. 그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질문을 받아서 대답을 하고 있는데 문득 시선에 초콜릿 색 머리카락이 잡혔다. 아니, 그 머리카락이 내 시선을 잡았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나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려는 자신을 간신히 억제한 후에 대답을 계속해나갔다. 남자들이 할 말이 더 많다고 한다는 주장을 증명하듯이 그들은 과자를 세 접시쯤 해치워가면서도 이야기를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는 끝이다! 상당히 현실적인 압박을 느끼면서 나는 가운데에서 적당히 입을 놀렸다.
한참 이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서 깍듯한 예절을 찾는 재미로 턱을 괴고 가만히 말을 듣고만 있다가 자세가 불편해 잠시 움직였더니 순간 시끌벅적하던 곳이 순식간에 조용해지고는 시선이 내게로 고정됐다.
“아… 그냥 자세 바꾸려고요.”
어색하게 웃었더니 다들 또 어색하게 마주 웃어준다. 음, 다들 엄청나게 신경쓰고 있구나. 좀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왜 이렇게 신경을 쓰지….
“사실 여기에 부원이 아니면 웬만하면 사람이 안 들어오는데, 남자들 구역이란 느낌에 여자애들은 잘 발을 들이지가 않거든. 그래서 어,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 좀 긴장했나봐.”
“아, 저도 이렇게 홍일점이 된 건 처음이라, 어색하기는 한데… 음, 그래도.”
나는 최대한 싹싹하게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들 좋은 분들 같아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고요. 어…. 잘 부탁드려요, 아까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할 말이 없어서 덧붙인 말이었는데 어째 반응이 심하게 좋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도 좋아서 한참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루퍼트라는, 나와 동갑의 학생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중에 라시아가 고백데이날 받아온 선물로 로드리고 전체가 나눠먹을 수도 있겠네요.”
“자비에르 것까지 합치면 두 달은 먹을 듯.”
“내기할까.”
어째 진지하게 돈이 오가는 것이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나저나 자비에르는 또 누구야, 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내 쪽을 보고 싱글, 웃는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굉장히 잘생기고 매끈한 얼굴이 내 쪽으로 과하게 상큼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저절로 어. 쟤 지금 나한테 추파 던지는 건가?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에이, 아니겠지.
“어쨌거나 다니엘은 좋겠네, 이런 후배를 독점하고 말이야.”
“그럼. 데리고 훈련시킬 생각에 즐거워 죽겠는데.”
“죄송해요,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몰랐고….”
울상을 지으며 몇 번이고 말했는데도, 이 요르펜은 상당히 꽁한 성격인지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니, 뭐, 모를 수도 있지. 하하, 그래서 체력 테스트부터 언제 하면 되나, 하고 나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으으, 하고 소리를 내다가 풀이 죽었다. 그러자 요르펜이 에이, 진짜로 살살해줄게, 약속, 약속. 하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인가, 하고 의심스럽게 그 손을 바라보다가 일단은 믿는 걸로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난스럽게 접힌 눈매에 갇힌 예쁜 초록색 눈에 나는 잠시 그가 누군지 잊었나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손을 들어서, 새끼손가락을 걸려고 했으니 말이다.
“아, 다니엘 선배, 처제 될 사람한테 그렇게 짓궂으시면 안 되죠!”
내 손이 어설프게 들렸을 때 시드가 쾌활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나는 손을 내렸고 다니엘은 아, 진짜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하면서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어울렸다. 시드가 내게 정신없지? 하고 물었다.
나는 어? 어…. 어. 하고 더듬거렸다. 정신이… 그래, 없었다. 나는 거의 닿을 뻔 했던 손가락을 조심스레 갈무리했다. …그제야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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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시드가 좀.. 얄미운 캐릭터가 됐네여.. 근데 그, 어, 개연성 때문에...(주섬주섬)리메이크를 하니까 목적이 분명해져서 좋네요. 그리고 진짜 ;;; 여러분이 습작 된 편이랑 지금 고친 거랑 비교하시면 헐;; 작가 중2였네 란 생각 많이 하시........지 않을까 했습니다. 아 저번 글 정말 쪽팔리네여... (시무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