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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2화 (2/113)

2화

내 이야기를 하고 있던 상대방과 눈이 마주쳤을 때, 보통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저 쪽에서 당황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어째서 내가 이런 기분으로 저 사람을 보고 있는 걸까.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 보고 우리는 한참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아니, 찰나였을까?

“야, 뭐하냐?”

그리고 그가 친구에게 아니, 하고 잠깐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이상한 충동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어째서? 내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상대였는데, 그저 아비게일의 단순한-… 힘껏 달리다가 숨이 벅차서 멈춰 섰다. 두 손으로 눈을 꾸욱 누른 다음에야 내 얼굴이 매우 붉어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놀라서 그런 거야, 그냥 놀라서. 내 얘기를 하는 걸 훔쳐 듣고 있는 거였으니까, 당연한 반응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부드러운 눈매는 단정한 생김새와 맞물려서 짙은 인상을 남겼다. 분명히 인기도 많겠지. 스스로의 양 뺨을 세게 때리고 싶은 것을 참고 약속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광장과 내가 있었던 곳은 거리가 멀어서 광장 시계를 보니 수업 종을 치기 한 15분 전 정도였다. 분수대 앞에 앉아 혼자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곧 수업 종이 울렸고, 학생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 중 유난히 까만 머리가 사람들을 거의 밀치다시피 하면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바로 캘리를 알아보았다. 천천히 와도 된다는 의미로 손을 살짝 들었는데, 캘리는 그 반대의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이제는 거의 코뿔소마냥 저돌적으로 다가왔다.

“라시아!”

“천천히 와도 되는데.”

“내가 시각을 맞춰 나오라고 해놓고는 늦을 수야 없지!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는 않았어?”

“응, 전혀. 넓어서 구경하기 굉장히 좋더라.”

캘리는 괜찮다면 코라라고 불러,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하고 쾌활하게 말하더니 학생회관 쪽으로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코라의 대담한 스킨쉽에 좀 놀랐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학생 회관과 광장은 멀지 않아 우리는 금방 학생회관 앞으로 올 수 있었다.

“어… 뭘 설명해줘야 하나. 우선, 음… 에트왈 제도는 아니?”

“음. 학년 대표라고 들었어.”

“학년 따깔이지, 뭐. 대표는 무슨. 여기, 이름 올라와 있는 사람들은 전부 에트왈이야. 1년마다 한 번씩 선거가 있는데 보통은 연임해. 1학년의 에트왈은 리디어와 오스번이고, 2학년은 나랑 시드라는 남자애야. 3학년은 네 언니 아비게일이랑 다니엘 선배님. 4학년은 록산느라는 선배님인데, 학교의 학생 회장이셔. 그리고 애론 선배님인데, 부회장이셔서 이번 대는 로드리고랑 로디나 대표가 할 일은 거의 마사와 앨번이라는 분들이 대행하고 계셔.”

그렇구나, 하고 나는 짧게 대답하고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 3학년 에트왈의 사진에 올라와있었다. 다니엘 이셀리아 요르펜. 나는 그 이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샤펜양이랑 미묘한 사이인 선배님.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아예 아니라는 의견도 있고. 둘이 친한데다 선남선녀고 가문도 격에 맞아서 대개 호의적이긴한데, 샤펜양이 가문을 이어야하니까 실제로 이뤄질 가능성은 좀 적지.”

아비게일, 그녀는 디트리히 젠와 샤펜, 샤펜의 유일한 적녀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지금은 돌아가신 공작부인의 선명한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우아한 미인이었다. 나와는 이복자매 사이로, 그녀의 아버지와 닮은 구석은 없지만 부녀 사이는 퍽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으로 온 이유이기도 하다.

“잘 어울리네.”

“뭐. 절대 불가침 영역인 알트라의 페드윈은 초대 건국왕이 맹세하고 드래곤이 서약한 곳인데 짧은 로맨스 정도야 허용해 줘야 하지 않겠어?”

어깨를 으쓱, 한 코라는 그러면 또 어딜 가봐야하나, 하고 지도를 펼쳤다. 강의하는 건물 위치라도 보여주거나, 시간표 짜는 걸 도와주고 싶은데, 라며 고민하던 그녀의 등 뒤에서 손이 쑥, 뻗어나오더니 말했다.

“식당을 보여줘야지, 식당을.”

응? 손의 주인을 찾아서 고개를 들자 밀색에 가까운 밝은 머리카락에 연청색 홍채의 소년이 흐릿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내 쪽으로 뻗었다.

“안녕, 난 시드야. 시드 로함 에드가. 만나서 반갑다.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 맞지?”

코라의 등 뒤에서 자연스럽게 뻗어나오는 손을 얼결에 잡고 흔들면서 말했다.

“응. 반가워.”

에드가와 밀착되어 있는 코라는 귀찮은 듯이 왜 내 뒤에서 악수를 하냐, 비켜, 라고 말하면서 에드가를 째려보았다. 애인 사이인가? 하다가 문득 그들의 성을 기억해내고는 말했다.

“외가 쪽의 친척이구나.”

“오. 알아챘어? 닮았지, 닮았지?”

으으음… 하나도 안 닮았다. 이름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둘이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거다. 촌수가 가까운 사이 같은데, 이렇게 안 닮을 수 있구나…. 애매하게 웃자 에드가는 내가 곤란해하는 것을 느꼈는지 그냥 실실 웃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나저나 너 정말 샤펜공이랑 판박이다, 생김새가. 신기하네.”

에드가는 지나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눈에 딱 들어올 정도로 성의 없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 넥타이는 아예 매지도 않고 카라에 걸쳐 놓았고, 조끼와 자켓도 한 손에 헐렁하게 쥐고 있을 뿐이었다.

“너 꼬라지가 왜 이래.”

“운동 하고 왔어, 운동.”

운동 하고 온 오빠 멋있지, 하면서 코라의 한 쪽 어깨를 잡는 에드가의 모습에 정말 친하게 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외가가 바람 계열 마법사들 혈통이 내려와서 말이야, 명망 있는 백작가문인데 쟤처럼 다 자유로운 삶들이야. 얘도 마찬가지고.”

“야, 내가 무슨 자유로운 삶이냐. 나 여기 있잖아, 작위 이으려고. 얼마나 책임감 있게 살고 있는데.”

“뭐 책임감 느껴서 하는 것도 아니잖아. 너 언니랑 오빠랑, 셋이서 진 사람이 작위 잇기 가위바위보 한 거 나 아직도 기억하거든!”

“으으, 난 기사가… 기사가 되고 싶었는데…! 아 둘이서 짜고 날 어떻게 한 거야, 분명히.”

“마법사 가문에서 무슨 기사야, 기사는. 얌전히 작위나 이어.”

둘의 만담 간간히 자리한 대강의 정보를 들으면서 한참을 넓은 교정을 걸어다녔더니 시드는 괜찮은지 몰라도 나와 코라는 완전히 지쳐서, 교내의 카페에 앉아서 조금이라도 쉬기로 했다.

“아, 시간표는 짰어?”

“응. 선생님께도 제출했어.”

“오, 맞춰보자. 혹시 같이 듣는 거 있으면 같이 앉거나 할 수 있을테니까.”

코라는 신이 나서 어서 꺼내봐, 꺼내봐, 라고 나를 재촉했다. 그녀의 애교에 시간표를 꺼내 얌전히 탁자 위에 올렸다. 나란히 앉아있는 둘의 눈이 또르르, 하고 같이 내 시간표 위를 굴러다녔다.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이 움직이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기에 내 앞의 찻잔으로 올라가는 입술을 가려버렸다.

“빡세다…!”

둘의 입에서 동시에 나오는 말에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하하하, 하는 소리를 내버렸다. 정말 귀엽네, 얘네.

“너 이거 진짜 할 수 있겠어? 이 교수님들 진짜 학점의 도살자라고 불리시는 분들이란말야. 까탈스러우시고, 과제도 많고.”

시드도 질색을 하며 나를 만류했다. 하지만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가 나를 진창에서 끌고 나왔을 때 그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나 또한 이 정도는 각오한 것이고.

“뭔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을까? 시간표는 바꾸기가 힘들고.”

코라는 바꾸는 게 좋을텐데, 그렇게 몇 번이나 아쉬운 소리를 하더니 사소한 학교 생활의 팁을 알려주었다.

“너 기숙사 생이야?”

시드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아비게일양과 주택에서 자취해.”

“하긴 대개 그러니까… 밥은 잘 먹고 다니겠다.”

“기숙사는 밥 안 줘?”

“나 기숙사 아니라서 잘 모르는데.”

근데 그 소리가 왜 나와, 하면서 나는 시드에게 웃었다. 시드는 그러게, 라며 실실 웃더니 너 웃으니까 예쁘다, 하고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소리를 했다.

“으응. 어떤지 알겠다. 시드는 인기가 많구나.”

“뭐 없는 편은 아니지. 좀 애가 가벼워서 그렇지, 모자란 덴 없거든.”

“와, 그런 섭섭한 소리를.”

“응? 평범한 칭찬이었는데.”

동아리 광고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내가 웃자 코라가 들어가고 싶은 곳 있어? 라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물었다.

“아니 그런 곳은 없는데…. 로드리고에 들어가는 방법은 적혀 있지 않네.”

“아, 로드리고 장에게 가야해. 그나저나 로드리고는 추천서도 필요하고, 테스트도 필요하고, 또 가문도 보고… 학벌에 능력주의 사회에서도 이런 제도가 남아있다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너 로드리고잖아.”

코라의 말에 시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런데 로드리고는 왜? 라고 내게 물었다. 반응이 너무 예상되니까 말하기가 참 뭣했다.

“샤펜공께서 추천서를 써주셔서, 거기 가입해야하거든.”

“…응?”

코라와 시드가 자신들이 뭘 잘못 들었는지를 의심하면서 내게 되물었다. 뭐라고?

“로드리고에 가입하려고. 가입 조건에 남자라는 게 없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남자 동아린데?”

“샤펜양은 로디나 소속….”

유력가문의 자제들이 주로 들어가는 몹시 까다로운 건 둘째치고서 남자들밖에 없는 동아리에 들어가라는 이유는 나도 몰랐지만, 뭐 싫다고 떼를 쓸 수가 없어서….

“음, 그렇게 됐어.”

둘은 동시에 약간 일그러진 얼굴을 했는데 어쩜 둘이 그렇게 똑같은가 몰랐다.

============================ 작품 후기 ============================

룰루루.. 바꾼답시고 바꾸고 있는데, 좀더 이해하기 쉽거나.. 그랬음 좋겠네요. 라시아도 성격이 좀 더 차분해졌어요.

안팍->안팎으로 수정

?? 밀색= 연갈색 같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갈색 계통이잖아요? 아닌가? 원래 연갈색어린이였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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