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1화 (1/113)

1화

<기묘한 편입생>

인생이 바뀐 시점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여지없이 내 16살의 가을을 꼽을 것이다. 그 일년동안 일어났던 일을 빼고 나면 내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변화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해엔 두 번의 장례식이 있었다. 내가 집을 팔아서 모든 빚을 정산하고 나니 남은 것은 약간의 돈과 몸뿐이었다. 어떻게든 사람은 살아가게 되어있다. 삶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쉽게 끝나서도 안 된다. 짐을 정리하고 집을 나서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이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했는데도 결심은 그저 무서웠다. 여관에 우선 머무를 각오를 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집 문을 열었을 때, 내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그 날 그를 처음 보았다.

“네가…리이의 딸이군.”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것을 운명이나 예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알아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와 내가 같은 혈족임을 알 수 있었을테니까.

“나를 닮았군.”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나와 똑같은 눈동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섬세하게 생긴 눈매에 턱이 딱딱하게 굳은, 매우 금욕적인 생김새의 남자였다. 사람의 분위기를 만질 수 있다면 분명 이 자는 모래같이 버석할 것이다. 은회색 눈이 침착하게 나를 평가했다.

“여기서 몸을 팔 바에야, 공작이 되어라.”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더 나은 대안을 찾지 못한 나는, 그를, 아니 나의 친부를 따라갔다. 그 날 나는 베노암 제국의 공작가 중 하나인 샤펜의 마차에 몸을 실었고, 그리고 나는 더 이상 클레이만일 수 없었다. 내 열여섯의 가을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페드윈에 편입생이 들어온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나를 우수한 학생으로 소개한 선생이 덧붙였다. 학생들은 신기한 생명체를 보는 듯한, 경계 어린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서있었다. 어머니와 샤펜공작의 열애는 한 때 베노암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양녀라고 나를 소개한 선생님의 말과는 다르게, 나는 샤펜 공작, 그리고 내 엄마를 너무 닮았다. 몇몇의 학생들이 수군거리더니 손이 쑥 올라왔다. 선생님은 나를 보고 약간 난감한 얼굴을 했지만, 나는 그저 모른 척 서있기만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샤펜공과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있을까요?”

연습했던 질문이 나오니 되려 반가웠다.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뻔뻔한 거짓말을 위해서 왜 이런 것을 묻지, 라는 불쾌한 얼굴을 겨우 해보였다.

“먼 친척입니다. 저는 샤펜의 외가 쪽 방계 친척으로, 돌보아주시던 어른들께서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갈 곳이 없던 차에, 보호자로 샤펜께서 저를 받아주셨어요.”

친절하게 개인 사정까지 말해주었더니 그 이상 질문하거나 비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것임을 인지한 사람들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철저한 귀족사회인 페드윈의 학생들은 뒤에서야 어떻든 형식적인 예는 빈틈없이 지키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고, 그 점은 내게 유리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으면, 에트왈,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이 선생님은 물었고, 검은 머리카락에 선명한 보라색 홍채를 가진 소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맥없는 얼굴로 네, 라고 대답했다. 보라색 눈은 무척 예뻤지만, 그녀의 눈매가 퍽 사나워서 성격이 꽤나 드세어보였다. 선생님은 몇 가지 안내를 한 후에 아침 조례를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부담스러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를 안내해주기로 한 에트왈의 여자아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아이는 약간 난감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코라 에드가 캘리, 코라라고 불러. 다들 그렇게 날 부르니까.”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손을 맞잡으며 부드럽게 흔들려고 했는데, 캘리 가의 아가씨는 성격이 얼굴과 비슷한 모양으로, 꽤나 힘차게 악수를 해댔다. 페드윈에 이런 애도 있구나, 하고 약간은 얼떨떨한 채로 나는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별로 숨기지도 않네, 클레이만이라는 중간 이름.”

캘리 가의 아가씨는 퍽 직설적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가 전통있는 가문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돌연변이인지, 혹은 그저 자유로운 가풍을 가지고 있는 집안인지를 가늠해보면서 애매하게 웃었다. 내 중간이름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어머니의 성을 따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막연하게 모두가 내가 ‘그녀’와 공작 사이의 딸이겠거니, 했던 추측을 기정사실화 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의외네. 디트리히 젠와 샤펜께서 숨겨진 자식을 지금에야 공개하시다니. 그것도 리이 클레이만과의 딸을 말이야. 알지도 모르겠지만, 초록 피의 공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빈틈없는 분인데 말이지.”

거침없는 그녀의 말에 순간 불쾌해졌다. 그녀는 솔직함과 무례함의 기준선을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내 말에 캘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 하더니 그래, 하고 짧게 대답했다. 가방에 책을 쓸어담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그러고보니 캘리라는 가문을 어디서 들어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 입에서 한참을 말을 굴리다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소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왜? 하는 얼굴을 했다.

“캘리 보석 상회의 차대 후계자구나.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어.”

캘리 보석상회는 업계 1, 2등을 다투는 대상으로, 자작가문위를 가장 최근의 전쟁에서 하사를 받았다고는 하나, 사실 산 것이라고 뒤에서 회자되며 격하되고 있는 집안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날카롭게 말했듯이 그녀에게 어떤 잔인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첫 날부터 적을 만드는 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입을 그저 다물었다.

“쌍둥이 오빠가 대단한 마법사라고 들었어.”

그녀가 어쩐지 빤히 내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나는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그녀의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툭, 하고 꺼내버렸다. 그녀는 자수정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이야. 쳇.”

약간 붉어진 얼굴로 캘리는 말을 내뱉고는, 자신이 1교시에 수업이 있기 때문에 10시쯤에 만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딱히 바쁜 일도 없었고, 혼자 잠깐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인 것 같았으므로 나는 그 제안에 응낙했다.

“그럼 10시에 중앙 분수 앞에서 보자. 난 기본적으로 상인가문의 사람이니까, 늦는 걸 좋아하지 않아. 정각에 봤으면 좋겠어. 괜찮아?"

어쩐지 태도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아서 약간 의아해진 상태로 응, 물론이야, 라고 대답하니 그녀가 남은 책을 끌어안더니 약간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러니까…음, 라시아.”

그러더니 캘리는 재빨리 교실을 빠져나가버렸다. 어쩐지 저 애, 좀 귀엽다… 약간 얼떨떨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교실을 나왔다. 무례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매력적인 애구나, 하고 결론을 내리면서 말이다.

*

교실에서 긴장하기는 했나보다. 나오자마자 한숨이 푹, 하고 나왔다. 하얀 구름이 파란 하늘에 점점이 박혀있고, 드넓은 초지가 마치 그림 같아 정신 없이 걸었다. 학교가 참 돈이 많구나… 한참을 걸었더니 이제는 숲길까지 나왔다. 정통 귀족학교로 백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페드윈은 알트라라는 중립도시에 위치한 곳답게 어떤 풍파의 흔적 하나 없이 매우 고풍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전쟁세대가 두세대 위인데, 지나치게 멀쩡한 건물의 모습이 몹시 신기했다.

왕족의 입학마저 거절한 매우 묘한 정치적 위치를 구축하고 있는 이 학교는 알트라에서 가장 엄격한 입학시험과 특이한 제도들로 유명했다. 능력주의를 표방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여기에 다닐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내 스스로가 여기 있는 게 무척 이상했다.

한참을 걷다보니 제법 피곤해져서 벤치가 보이자마자 앉았다. 학생들은 한창 추복을 입고 있었는데, 비싼 맞춤 교복이라 그런지 다들 꽤 잘 어울렸다. 그래,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값은 해야지, 하는 가난뱅이의 생각을 하고 앉았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잖아?”

“확실한 것도 아니잖나. 닮은 것도 우연일 수 있는 거고.”

“네가 못 봐서 그래. 보면 바로 아, 그 둘의 딸이로구나~ 하고 느낌이 딱, 온다니까.”

뜨문뜨문 들리는 목소리가 등 뒤로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째 훔쳐듣는 모양새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내용이 나를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내 얘기잖아, 어떻게 들어도.

"아무튼 너는 잠재 약혼녀 집안사에 이렇게 관심이 없어서 어떡하냐. 게다가 이름도 클레이만 샤펜이야, 클레이만!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거지. 얼굴도 예쁘장해. 물론 그 두 사람 딸이 못생긴 게 더 신기한 일이겠다만.”

과연 소문은 귀족이건 평민이건 속도가 빠르기로는 마법사 못지 않았다. 빠끔 고개를 들어서 엠블럼을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워낙 작아서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내 얘기를 하는지 궁금해 고개를 더 높이 들고 나무 너머의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헤맸다.

순간 우연처럼 진한 초콜릿 색 머리카락이 나뭇잎 사이로 마치 물감처럼 퍼져나가는 듯이, 내 시야를 스쳐지나갔다. 나무 사이로 한 남자의 부드러우리라 추정되는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내 앞에 나타났다. 시선을 눈치 챘던 걸까, 남자가 나무 사이로 시선을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햇살이 투명하게 초록색 눈을, 마치 새벽녘의 나뭇잎에 내려앉은 것마냥 그렇게 비추었다.

숨이…

“다니엘?

바람이 크게 불어서 내 머리카락이 날려 시야를 가렸다. 한 손으로 머리를 급하게 넘기면서 그 그늘진 하얀 얼굴을 바라봤을 때, 나는 내 양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니엘이구나, 이 사람.

이 사람이-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구나.

============================ 작품 후기 ============================

(빼꼼).....

예에,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이 첫편이 또 이딴 걸 글이라고 쓰다니 ㅠㅠㅠㅠ 하는 때가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음. 아무튼 다시 시작해요.

챰 떠긴님 생일 축하드려요 ^♥^ 이분이 연재하라고 찔러쥬심. . .제대로 찔러주셔서 다시 시작할. . . 뭔가의욕이. . . 예 그렇습니다. 칼잡이님의 탄신일이십니다.축하해주세요! 존잘님 축 탄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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