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
커피를 벌컥 들이켠 채현은 잔뜩 긴장한 채 서윤채를 살폈다. 상대는 집중한 얼굴로 노트북을 빤히 응시했다. 소란스러운 카페 안에서 오직 저희 자리만 침묵에 잠긴 듯했다.
평소답지 않게 대화가 끊긴 건 서윤채가 제 학기말 과제인 소논문을 봐 주고 있어서였다. 몇 주 내내 골머리를 앓으니 도와주겠다고 해서 냉큼 노트북을 들고나왔다.
하아. 기다란 한숨을 터뜨린 채현은 창밖을 힐끔거렸다. 한여름 무더위가 내려앉았던 때가 얼마 전 같은데, 어느덧 겨울을 목전에 두고 있다니.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 기분이었다.
어차피 빠르게 흐를 거면 종강까지 흘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만 비워 갈 때쯤, 서윤채가 시선을 옮기며 ‘채현아.’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나쁘지는 않아. 주제도 잘 잡았고.”
“네…….”
“근데 네가 정확히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지금 이 내용이 썩 설득력 있지도 않고. 근거가 부실하잖아. 자료를 더 찾아야지.”
조곤조곤 문제점을 짚어 주는 말씨였는데도 점차 어깨가 굽어 들었다. 서윤채의 눈에 그리 보인다면 분명 낙제점이리라. 눈에 띄게 절망한 채현은 테이블 위로 풀썩 엎어져 서윤채를 올려다보았다. 그 꼴을 본 상대는 여느 때처럼 입매를 허물어뜨렸다.
“뭘 또 풀이 죽고 그러냐.”
“F 받는 상상 했어.”
“그 정도는 아니고. 너 잘했어. 그냥 조금 더 보충했으면 좋겠다는 거지.”
“보충하면 통과될까?”
“충분히.”
서윤채는 자신 있게 대꾸하고선 노트북 키패드를 두드렸다.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가 끊임없이 그의 손끝에서 피어났다. 그는 한참 동안 집중하고 난 뒤에야 노트북을 돌려주었다.
확인해 본 소논문 파일은 그가 첨삭해 준 것인지 직전과는 달랐다. 거기에 더해 어떤 방향으로 수정하면 좋을지부터 구체적인 방법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진짜 고마워. 바쁠 텐데 내 과제까지 신경 써 줘서…….”
“너도 바쁜데 나랑 같이 가 주잖아. 퉁 쳐.”
대수롭지 않게 답한 서윤채가 씩 웃어 보이며 커피를 마셨다. 고갤 살짝 뒤로 젖혀 더 날렵해진 턱선이 잘 드러났다. 채현은 목울대가 움직이는 꼴을 보다 침을 꼴깍 삼켰다.
쟤는 뭐 커피도 저렇게 마셔……. 평소와 달리 머리를 넘겨서일까. 그도 아니면 옷을 차려입은 채여서일까. 원래도 곱긴 했다만 오늘따라 유독 멋있어 보였다.
“갈까, 이제?”
“어? 어…….”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던 채현은 한 박자 늦게 반응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카페를 뒤로하고 나온 밖은 쌀쌀했다. 서윤채는 찬 바람이 불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며 코트를 여몄다.
“더럽게 춥다. 안 추워?”
“응. 나는 괜찮아.”
“한겨울 같은데.”
원체 추운 날씨에 취약했던 이는 이번에도 덜덜 떨어 댔다.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은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났다. 혹시 몰라 핫 팩을 챙겨 오길 잘했지 싶었다. 숨죽여 웃은 채현은 그의 주머니 속으로 핫 팩을 쏙 넣어 주었다. 기척을 눈치챈 그는 잠시 멈칫하다 미소를 머금었다.
“왜 귀여운 짓을 해.”
그로도 모자랐는지 반대쪽으로 옮겨 서며 손을 꽉 잡아 왔다. 반사적으로 움찔 떨자 아예 손깍지까지 꼈다. 단단히 엮인 것만 봐도 쉬이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너 추위 많이 타니까. 근데 우리 손잡고 걸어?”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럼 잡고 걸어. 핫 팩이 하나밖에 없어서 손이 시리네.”
서윤채는 진짜 추워할 때처럼 손이 차갑지도 않으면서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나랑 손잡고 걷고 싶은 건가. 한두 번 잡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간질간질해진 채현은 괜히 코만 훌쩍였다.
얼마간 걸어 향한 곳은 사진관이었다. 서윤채가 증명사진을 쓸 일이 생겨 방문하게 되었다. 채현도 갓 성인이 되었을 무렵 찍은 게 마지막이라 간 김에 함께 찍기로 결정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예약하셨을까요?”
“네. 서윤채로 두 명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채현은 친절한 직원분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단박에 눈에 띈 건 곳곳에 걸린 사진이었다. 그 속에 담긴 인물은 다양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도, 정장을 입은 성인도 있었다.
“어느 분부터 찍으실 건가요?”
“네가 먼저 해.”
“제가 먼저 할게요.”
툭. 팔을 치며 의사를 표하자 서윤채는 피식 웃곤 직원분의 뒤를 따랐다. 외투를 벗어 빈 의자에 걸쳐 둔 그는 흐트러진 머리만 정리하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고개 오른쪽으로 조금만, 네, 지금 좋아요.”
그는 흠잡을 곳 없는 자세로 붉게 빛나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구석에 선 채현은 시선을 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윤채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셔츠를 차려입고 곧게 앉은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얼마 전만 해도 교복을 입었는데 어엿한 성인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나이테를 두르듯 한 겹 한 겹 덧입은 시간이 느껴지는 듯해 기분이 묘해졌다.
“다음 분 바로 찍을게요.”
찰칵. 연달아 울리던 셔터 소리가 멎고 서윤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심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그는 곁으로 다가오는 동시에 씩 입꼬리를 당겼다.
“반한 눈빛인데.”
“……뭐래.”
“예쁘게 찍고 와.”
서윤채는 조용히 속삭이고서 살살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간지러운 손짓에 소름이 돋은 채현은 입술을 감쳐물고 바삐 몸을 움직였다. 어쩐지 목덜미 주위로 열이 번진 듯했다.
“잘생겼다.”
“얼굴이 작으셔서 그런가, 카메라 되게 잘 받으세요.”
“하하…….”
사진을 찍는 내내 서윤채는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직원분도 신이 나 맞장구를 치셨지만 당사자인 채현은 머쓱하기만 했다. 계속해 와 닿는 서윤채의 시선 때문에 더욱 그러했고.
결과물은 몹시 흡족하게 나왔다. 특히 서윤채의 사진은 후보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근사했다. 채현은 넋을 놓고 제 사진보다 서윤채의 것을 더 열심히 눈에 담았다.
사진관을 나와서도 손에 쥔 사진을 응시하자, 발맞춰 걷던 서윤채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들어?”
“너 진짜 잘 나왔어. 이거면 면접 프리패스야.”
“애인이 잘나서 좋겠다.”
“……그런 말 안 부끄러워?”
“사실인데 왜 부끄러워.”
더없이 뻔뻔하게 대꾸한 서윤채는 손을 잡아 달라는 듯 살살 흔들었다.
“잘난 애인 옆에 두고 왜 사진을 봐. 그런 건 집에 혼자 있을 때 보고 손잡아 줘.”
“내 사진도 혼자 있을 때 보려고 가져갔어?”
“어.”
인화된 사진을 받자마자 한 장을 쏙 빼 가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자연히 웃음이 나 방실대던 채현은 사진을 고이 넣고 서윤채의 손을 맞잡았다. 바로 힘을 실어 엮은 상대는 손가락으로 손등을 살살 문질러 댔다. 조심스럽고 딱 그만큼 간지러운 손짓이었다.
“우리 나중에 취준 할 때 또 사진 찍어야겠지?”
“그렇겠지. 그 전에 우리 채현이 근사한 옷 사 줘야겠다.”
“내가 사 입을게.”
“자립심이 넘치는데.”
놀리듯 말을 늘어놓은 서윤채의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잠시 끊겼다. 저벅저벅. 어느새 날이 저물고 어스름한 저녁 하늘이 내려앉은 거리를 채우는 건 발소리뿐이었다.
겨울의 하루는 다른 계절의 하루보다 유독 짧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함께 있는 시간도 더 빠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채현은 멀리 보이는 제 오피스텔 건물에 걸음 속도를 늦췄다.
아쉽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땅으로 떨어뜨릴 무렵, 상대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할 말이 있나 싶어 바라보니 서윤채는 무언가 고심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물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윤채야?”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순간적으로 걱정이 된 채현은 서윤채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낯을 살폈다. 아파 보이지는 않는데. 샅샅이 뜯어보고 있으려니 서윤채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얕은 숨을 토해 낸 그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내었다. 어느 누가 봐도 반지 케이스처럼 보이는 형상에 채현은 움직임을 멈췄다.
“언제 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질질 끄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우리 오늘 기념일이야?”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받아 주라.”
케이스 안에는 얇고 세련된 은색 반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커플링……. 채현은 그 상태로 굳은 듯이 반지를 내려다보다 조심조심 손을 내밀었다.
“네가 끼워 줘.”
“한 번 하면 못 빼게 할 건데. 후회 안 하겠어?”
입꼬리를 팽팽히 당기며 하는 말은 짓궂었다. 채현은 익숙한 그 웃음을 눈에 담다 고갤 끄덕였다. 저희 관계를 증명할 물건이 생겨 오히려 벅차오르기만 했다.
“대신 너도 빼면 안 돼.”
“관에 들어갈 때도 낄 생각인데.”
장난스러운 기색 너머로 서윤채의 진심이 느껴졌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도 서윤채의 애정을 덧댄 채 손가락을 감싸 안는 듯했다. 감정이 북받쳐 성큼 다가가 끌어안으니, 그는 당연하다는 듯 등을 토닥여 주었다.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눈물이 날 만큼 다정했다.
“그래서 말인데.”
언제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나랑 살자, 채현아.”
이따금 같이 살자 말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뭔가 달랐다.
“당장 옮기자는 건 아니야. 하나씩 준비해 가자는 거지.”
“…….”
“시간 빨라. 금방 졸업하고 취업할 텐데, 나는 너랑 하나씩 다 하고 싶어. 같이.”
다가올 앞으로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서윤채의 음성이 조곤조곤 내려앉았다. 당장 떠올려 말하는 게 아니듯 허황된 것 없이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홀린 듯 떠올린 그 순간들은 퍽 선명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를테면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매 순간 함께할 저희의 모습 따위가.
“너랑 헤어지는 이 시간이 너무 아쉽더라고.”
자신도 별다를 바가 없었기에, 채현은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내가 말한 적이 있던가.”
“……뭐를?”
“사랑한다고.”
그 틈으로 들려온 고백은 몸을 굳게 하기 충분했다. 알고는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고. 저를 향한 서윤채의 애정은 선명했고 그는 늘 자신을 아껴 주었으니. 한데 알고 있던 것과 말로 듣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삽시에 호흡이 흐트러지고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같이 살아 달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욕심내는 거니까 한 번만 봐줘.”
잔뜩 몸을 낮추고 살랑거리는 듯한 말씨였다. 욕심을 낸다고……. 그의 말을 곱씹던 채현은 괜히 벅차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목울대를 두드리던 무언가가 쏟아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있잖아.”
“어.”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전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쉬이 내뱉을 수 없어 삼키고 아껴 두던 마음이었고. 하지만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아니. 꼭 그리하고 싶었다.
“나도 네가 욕심이 나고…….”
서윤채는 듣고 있다는 듯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짓에 기대 채현은 조금 더 몸에 힘을 뺐다. 포근히 지탱해 주는 상대의 몸이 느껴지며 온기와 향기가 밀려왔다.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줘서.”
나지막한 목소리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진정으로 기껍기라도 한 듯이. 채현은 고개를 살짝 꺾어 서윤채를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상대도 시선을 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다정하다 이야기해도 될 만큼 따뜻한 눈빛이 쏟아졌다. 애정이 담긴 상대의 눈길은 삽시에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얼마간 시선을 주고받던 채현은 끝내 환히 웃어 보였다.
“같이 살자.”
서윤채가 내보이는 사랑에 숨이 막힐 만큼 기쁜데 무엇이 중요할까. 그저 똑같은 마음을 주며 어울리고 싶을 뿐이었다. 채현은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한 서윤채를 보다 다시 폭 안겼다. 그러고는 그의 목뒤로 팔을 둘러 감아 상체를 끌어당겨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사랑해 줘서 고맙고…….”
“…….”
“나도 사랑해.”
속삭이는 동시에 서윤채가 짧게 숨을 터뜨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튀어나온 반응인 양. 아……. 길게 목을 울린 그는 곧이어 꽉 껴안아 주었다. 틈 하나 없이 몸이 붙고 맞닿은 심장이 같은 속도로 내달렸다. 서윤채는 호흡하듯 웃으며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 권채현 존나 좋다.”
“……계속 그래야 돼.”
“당연한 소리를 해.”
즉답한 서윤채가 몸을 뒤로하며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 이렇다 할 새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누는 대화는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기엔 충분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서로만을 온전하게 취하고 눈에 담았다. 그 뒤로 소박하게 흰 눈이 내렸다. 또 한 번 익숙한 듯 새로워질 일상을 축하하듯이.
<러브 프리오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