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타닥타닥. 사방에서 키보드를 내리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따금 욕설로 시작하는 고함이 들리기도 했다. 분명 방학이 끝났을 텐데도 피시방 안엔 사람이 꽤 많았다.
시끄러운 공간에 녹아든 채현은 불안한 눈으로 시계를 노려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달달. 다리를 떨기까지 하니 옆에 있던 서윤채가 실소를 내뱉었다.
“어디 뭐 싸우러 가?”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해.”
“어차피 내가 해 줄 건데 왜 네가 쫄아.”
“내 한 학기가 걸린 일이니까…….”
하. 관성처럼 한숨을 터뜨린 채현은 울적한 얼굴을 하고 의자에 기댔다. 불안의 모체는 분명했다. 오늘이 수강 정정 기간 첫날이라는 게 그 실체였다. 수강 신청을 망친 이는 온 세상 시름을 짊어진 양 굴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시간표를 본 서윤채가 대신 수습해 주겠다고 했을까.
‘우리 채현이 시간표는 볼 때마다 놀랍네. 왜 저번보다 심각해졌어?’
‘……나 휴학할까?’
‘수강 신청 망했다고 휴학하는 새끼가 어디 있어.’
‘많던데.’
처음 시간표를 확인한 서윤채는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공강이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강의명만 봐도 앞날이 그려지는 수업이 수두룩했기에.
‘강평은 다 본 거야? 어째 팀플 폭탄일 것 같은 애들만 골라 담았냐.’
〈글로벌 시대의 매체 전략〉 수업을 콕 집은 서윤채는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팀플과 토론 위주의 수업이라 할 말이 없었다. 이번 학기 진짜 좆됐구나. 시무룩해진 채 진심으로 휴학을 고민하던 차, 서윤채는 기꺼이 구세주가 되어 주었다.
‘뭘 또 땅을 파고 그래. 아직 정정 남았잖아. 도와줄게.’
‘진짜?’
‘어.’
짧은 대답과 함께 뺨을 톡 건드는 손짓이 와 닿았다.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수강 신청을 완벽하게 성공한 재학생이 어깰 으쓱이며 씩 웃어 보였다.
‘장담은 못 하는데,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
‘야, 고마워…….’
‘공강 맞춰서 데이트하려고 새끼 치는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짓궂은 음성으로 말한 서윤채는 와서 안기라는 듯 팔을 벌렸다. 채현은 슬금슬금 몸을 기울여 그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는 바로 등을 둘러 감고 본인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이것도 재능이야. 어중간하게 똥손인 것보단 네가 나아.’
‘그거 위로야?’
‘사실을 말한 거지.’
토닥토닥. 등을 토닥여 주는 몸짓은 다정한 말씨만큼이나 포근했다. 상심한 애인을 달래 주기라도 하는 듯했다. 채현도 그 손짓이 싫지 않아 얌전히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었다.
그랬던 게 며칠 전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방학이 끝나 있었다. 수강 신청 정정 기간도 훌쩍 다가와 하루를 밝혔다. 결전의 날을 맞이해서인지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떨렸다.
“나 믿어 봐.”
초마다 신경이 닳는 건 저뿐인 건지, 서윤채는 태연하게 아이스티를 입가에 갖다 대 주기만 했다. 기운이 빠진 채현은 별다른 반응 없이 입을 벌려 빨대를 물었다. 그대로 쪽 빨아 마시고 이제 됐다는 뜻으로 바라보자 상대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고갤 돌린 서윤채는 본인 컴퓨터 화면 가득 수강 신청 사이트 창을 띄웠다. 학번과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손짓은 거침없었다. 지난번에 메신저로 말해 줬는데 안 까먹고 기억한 듯했다.
가장 듣고 싶던 전공 수업은 정정 시작과 동시에 여석이 풀린다고 공지가 떴다. 워낙 인기가 많은 강의라 그마저도 5명이 전부였다. 채현도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다가 장렬히 실패한 터라, 그것만 주워도 성공이었다. 그 수업 하나로 1교시 강의를 치울 수 있었으니까.
“1분 남았어.”
채현은 모니터만 노려보면서 바짝 몸을 굳혔다. 동시 접속을 하면 바로 차단이 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곁에서 서윤채를 응원하는 것밖에는.
56초. 57초. 58초……. 서버 시계가 흐르고 서윤채가 기민하게 마우스를 눌렀다. 접속 대기 팝업이 떴지만 금세 줄어들었다. 서윤채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버튼을 클릭했다. 장바구니로 들어가니 아직 신청 버튼이 활성화된 채였다. 딸칵. 소리와 함께 완료됐다는 알림이 떴다.
“됐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채현은 저도 모르게 ‘와!’ 소리치며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시선을 옮긴 상대는 씩 웃기만 했다. 기뻐서 그런지 오늘따라 잘나 보이는 미소였다.
“너 뭐야? 왜 이렇게 잘해?”
“쓸 만하지?”
쓸 만한 정도일까. 여기가 공공장소만 아니라면 당장 뽀뽀를 해 주고 싶을 만큼 기뻤다. 채현은 신난 걸 못 숨기고 세차게 고갤 끄덕였다. 서윤채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더 짙어졌다.
“또 뭐.”
그는 여유롭게 과목 선택을 누르며 다음 요구 사항을 물어 왔다. 냉큼 가장 최악인 강의를 말한 채현은 뭘 주워도 상관없단 말을 덧붙였다. 정정은 운과 타이밍이 전부인 셈이라 발품을 팔아야 했는데, 서윤채는 불평 없이 계속 마우스를 눌렀다.
그 덕에 피시방을 나설 땐 꼭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비록 소논문 수업 하나가 남긴 했지만 환골탈태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좋아졌으니. 금요일 공강도 생겨 무척 만족스러웠다.
“윤채야, 뭐 먹고 싶어? 다 말해. 나 알바비도 들어왔어.”
“비싼 거 얻어먹어야겠는데.”
그가 원한다면 소고기도 사 줄 수 있었다. 언제고 맛있는 걸 사 주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는데 오늘은 조금 더 그랬다. 때마침 어젯밤 저번 달 알바비가 들어와 여유로웠다.
“말만 해. 열린 지갑이야.”
“큰일 날 소리를 하네. 돈 헤프게 쓰는 거 아니야. 학교에서도 그러냐, 너?”
“왜 또 잔소리를 해…….”
본인은 더 헤프게 쓰면서. 숨죽여 꿍얼댄 채현은 서윤채를 흘겨보다 시선을 거뒀다. 순순히 말해 주진 않을 듯해 알아서 고르기로 마음먹고 주변을 훑었다.
번화가라 식당은 많았다. 서윤채의 취향을 떠올리며 고민하던 끝에 샤브샤브 가게로 들어섰다. 주문을 마치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주제는 서로의 일정이 주를 이뤘다. 서윤채도 복학을 하며 만날 시간이 줄어든 까닭이었다.
“금요일은 무조건 비워 두는 걸로.”
“응. 나 월요일도 일찍 끝나니까 만날 수 있어. 싫으면 안 만나도 되고…….”
“싫단 소리는 하지도 않았는데 왜 혼자 앞서가?”
“귀찮을 수도 있으니까.”
“넌 나 만나는 게 귀찮아?”
“아니?”
무슨 그런 소리를 하나 싶어 즉답하자 서윤채도 마찬가지라는 듯 까딱 고갯짓했다.
“매일 만나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헛소리할 시간에 더 놀아 주기나 해.”
찰나 멈칫한 채현은 대답하지 못하고 목덜미만 매만졌다. 매일 만나고 싶단 그의 말에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면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자신도 퍽 다르지 않아 웃기기도 했고.
언제 만나 데이트할지 계획을 세우다 보니 음식이 준비됐다. 식사를 시작한 뒤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학기가 시작되었을 뿐인데 만날 시간이 훅 줄어들어 못내 아쉬웠다.
“장거리 못 할 짓이네.”
“우리 장거리야?”
“장거리지. 코앞에 살다가.”
하긴 옛날엔 한 아파트 단지에 살았으니 그렇게 여길 만도 했다. 지금도 택시로 30분이면 가 그리 멀지 않은데 상대적으로 멀게 느껴졌다. 그때는 전화 한 통이면 바로 만날 수 있었는데. 당연히 누려 왔던 사소한 편의가 간절해질 줄 누가 알았을까.
“같이 살래?”
곰곰이 생각하며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을 때, 틈만 나면 같이 살자 이야기하던 이가 또 넌지시 물어 왔다. 빤히 쏟아지는 시선은 장난기 없이 진중하기만 했다.
“……사귀자마자 동거부터 해?”
“언제가 됐든 합치긴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랑 같이 살고 싶어?”
“응.”
어떠한 틈도 없이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채현은 상대의 반응에 입술을 씰룩대면서도 대답을 삼켰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 선뜻 결론이 나지 않았다.
“같이 살면 많이 싸운대. 생활 습관 안 맞아서.”
“내가 널 하루 이틀 봐? 네 생활 습관이야 뻔하지. 그런 거야 맞춰 가면 되는 거고.”
“내가 방 지저분하게 쓰면?”
“얼마나 더럽게 쓰려고 겁부터 줘.”
느슨히 웃으며 대꾸한 서윤채가 고기를 집어 개인 접시에 올려 주었다. 한가득 쌓아 주더니 본인 그릇엔 풀만 잔뜩 채웠다. 똑같이 고기를 덜어 주려 손을 움직일 찰나, ‘음…….’ 목을 울리던 상대가 말을 이었다.
“내가 치울게. 대신 밤엔 뭘 하든 어울려 주기. 어때.”
“뭘 하려고?”
“뭐든 하겠지?”
“……너 지금 되게 날강도 같은 제안 하고 있는 거지.”
“그 정도는 아니고.”
“눈빛이 이상한데.”
얄궂게 웃는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침대는 큰 걸로 들여야겠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꼴을 보니 확신이 섰다. 수지 타산이 안 맞는 딜일 것이 분명했다.
“됐어. 내가 치울 거야.”
“같이 살아 준다는 건가.”
“어? 아니, 일단 가정을 한번 해 보는 거지.”
“우리 채현이가 나를 갖고 노네.”
다정한 목소리로 중얼댄 서윤채가 엇비슷한 얼굴을 해 보였다. 미소 띤 낯은 몹시 온화했다. 제게 쏟아지는 시선 역시도. 채현은 그와 눈을 마주하다 코를 박듯 고개를 숙였다.
늘 그래 왔듯 제 속도에 맞춰 주는 상대의 배려와 마음이 느껴져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서윤채가 결코 자신을 억압하거나 닦달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심장이 찡 울렸다.
“……다음에 꼭 대답해 줄게.”
“그래. 못 무르니까 잘 생각해 보고 말해.”
밥을 먹는 내내 함께 사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상상 속에서 자신은 행복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인 양. 머릿속에 그려 본 광경이 실제가 되면 얼마나 더 좋을까. 어쩐지 조급해진 채현은 서둘러 결론을 내리리라 다짐하고 음식을 꼭꼭 씹었다.
여유롭게 식사를 끝마치고 나와선 주변을 걸었다. 평일 낮 거리는 한가로웠다. 그래도 사람이 없진 않아 손을 놓고 걷는데 손등이 계속 간지럽게 맞닿았다. 그 누구도 거리를 벌릴 생각 않고 찰나의 접촉을 누리고 있는 듯해 웃음이 났다.
“윤채야, 소화시킬 겸 저기 갈래?”
“코인 노래방?”
“응.”
“그래.”
고등학교 땐 다 같이 곧잘 가곤 했는데 성인이 된 후로는 간 적이 몇 없었다. 끽해야 술자리에서 3차로 끌려갔을 때일까. 그 탓에 괜히 더 두근거리고 기대감이 차올랐다.
오랜만에 찾은 노래방은 예전과 똑같았다. 잔뜩 상기된 채 동전 몇 개를 집어넣은 채현은 자리에 앉아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네가 먼저 해.”
“네.”
피식대며 순순히 대꾸한 이는 바로 이어 노래를 선곡했다. 채현은 화면을 빤히 응시하다 ‘오…….’ 감탄을 흘렸다. 기억상으론 노래를 무척 잘했기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혹시 영상 찍어도 돼?”
“내 팬이야?”
“팬까지는 아니고……. 그냥, 심심할 때 보려고.”
“찍어.”
마이크를 입가 가까이 댄 서윤채가 나직이 이야기했다. 희미한 웃음 뒤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애쓰지 않고 편히 부르는 듯했는데 가수 못지않게 잘했다. 얘는 뭐 못하는 게 없어……. 한순간 몰입한 채현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상대를 눈에 담았다.
“네 차례야.”
“어? 어…….”
노래 한 곡이 이다지도 짧았던지. 홀린 듯 시선을 내주던 채현은 멍하니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계속 듣고 싶을 만큼 좋았던 음색이 잊히지 않아 정신이 붕 떴다.
그사이 서윤채는 주섬주섬 본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채현도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핸드폰과 서윤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도 찍게?”
“보고 싶을 때 보려고. 안 돼?”
“어? 아니… 돼.”
안 그래도 가수 다음이라 긴장한 채였는데 영상까지 찍는다니. 더 의식이 된 채현은 목을 큼큼 울린 뒤 노래를 시작했다.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소리는 직전과 느낌이 또 달랐다. 노래하며 힐끔 살핀 서윤채는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연스레 웃음이 떠오르기라도 하듯이.
“우리 채현이 데뷔해도 되겠어.”
그러고선 노래가 끝나자마자 놀리듯 말을 늘어놓았다. 흡사 어린애의 재롱을 칭찬하는 모양새였다. 채현은 부끄러우면서도 그리 싫지는 않아 ‘뭐래…….’ 중얼대며 슬쩍 웃었다.
그 뒤로도 노래를 이어 가며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다. 둘 다 신이 나 계속 돈을 넣고 즐겨 밖으로 나올 땐 진이 빠진 채였다.
“와…… 목 찢어진 거 같아.”
“나 가수랑 온 줄 알았잖아.”
서윤채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어깨동무해 왔다. 채현도 자연스레 몸을 기대고 히죽댔다.
“시원한 거 먹으러 갈래?”
“그래.”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입매는 자꾸만 풀어졌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평범한 시간을 더없이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이가 곁에 있었으므로.
“왜?”
괜히 감정이 북받쳐 쳐다보니 서윤채는 곧장 시선을 마주해 왔다. 애정 어린 반응을 보여 주는 그가 너무 좋아 채현은 그냥 웃어 보였다. 상대의 입술도 어여쁜 호선을 그렸다.
“뭘 웃어.”
“너는 왜 웃는데.”
“안 웃었는데.”
“입꼬리 올라간 거 다 봤어.”
일순 멈칫한 서윤채는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깜빡였다. 꼭 본인이 웃고 있던 걸 모르는 사람처럼 굴길 잠시, 한층 더 곱게 웃어 보였다.
“그러네.”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인 이가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실었다. 틈 하나 없이 맞붙어 있던 몸이 더욱 밀착됐다. 그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하고 느릿느릿 발을 내디뎠다.
“오늘 너희 집에 객식구 한 명 들일 생각 없어?”
“자고 가려고?”
“네가 허락하면.”
“……잠만 자고 갈 거지?”
“나 너한테 거짓말하기 싫다, 채현아.”
“나 내일 학교 가서 안 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옹다옹하며 발맞춰 걸어 나아가는 정면으로 저녁놀이 펼쳐졌다. 새로운 일상으로 가득 채워진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