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05. Start over again
Epilogue
<외전>
01.
02.
03.
04.
05. Start over again
때로는 짧은 말 한마디가 일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소리를 타고 전해지는 상대의 진심이어서일까. 찰나 공간을 울리고 멎을 뿐인데도 깜짝 놀랄 만큼 큰 영향을 주곤 했다.
그 때문에 채현도 며칠 내내 멍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숨을 죽인 서윤채의 음성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메아리쳤다. 결코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귀를 기울이게 됐다. 예고 없이 불쑥 흘러나와 훼방을 놓아 대 무시조차 할 수 없었다.
말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천 번을 곱씹었다. 그러한 노력에도 사고의 끝은 언제나 하나로 귀결됐다. 서윤채가 자신과는 다른 끝을 그려 보고 있다는 결론으로.
시간을 달라고 했던 이의 생각은 그쪽으로 정리가 된 듯했다.
그 사실이 반가웠던가. 그도 당황스러울 텐데 자신을 우선해 생각해 줘 고맙긴 했다. 서윤채의 세심한 성정을 잘 알아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또 뛰기도 했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기쁘지는 않았다. 아니, 그런 감정을 느낄 새가 없었다. 애초에 욕심을 버렸던 일이다. 쉽게 상상해 보는 것이 아예 불가했다. 긴장과 당혹스러움부터 치밀었으므로.
연인이라고 하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아닐 수 있다 쳐도 끝을 보는 이들이 더 많을 테고. 저희 또한 안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런 불확실성에 기대서 현재를 잃고 싶진 않았다.
“…….”
그 탓에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요즘이었다. 처음 감정을 깨닫던 무렵보다 어지러운 듯도 했다. 이제부터 무엇이 달라지는 걸까. 아무리 떠올려도 쉬이 상상되지 않았다.
어쩜 바람 잘 날이 없는지.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채현은 자조하며 멀거니 시선을 흘렸다. 편안해야 할 주말 오전인데도 연신 속이 굽이쳤다.
띵. 경쾌하게 울리는 메시지 알림은 더 큰 자극제였다. 흠칫 몸을 떤 채현은 느릿하게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누구의 연락인지 예상이 되는 탓이었다.
[서유난 : 일어났냐?] 오전 11:45
아니나 다를까. 주말 아침을 일깨운 이는 서윤채였다. 새삼스럽진 않았다. 그는 지난번 대화 후로 자주 연락을 해 왔으니. 키패드에 손을 올린 채현은 물끄러미 활자를 직시했다. 그 어떤 일도 없던 때의 모습 같아 헷갈리고 혼란스러웠다.
응. 결국 전송한 답변은 짧고 성의 없는 한 글자가 전부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상대는 답을 보내는 대신 전화를 걸어왔다. 채현은 무의식적으로 목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늘 그래 왔듯 평범한 친구 흉내를 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소릴 냈다.
― 목소리에 잠기운이 없는데. 바른 생활 하는 중?
“생산적으로 살아야지.”
서윤채는 옅은 웃음이 어린 목소리로 놀리듯 말했다. 바로 맞받아치자 듣기 좋은 웃음이 들렸다. 그러한 소리는 자연히 상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꼭 푹신푹신한 침대에 기대 누워 감색 이불을 덮고 편히 웃고 있을 듯했다. 나긋한 음성은 주말 오전과 잘 어울렸다.
“너는 지금 일어났어?”
계속 듣고 싶다가도 이 이상 듣다간 평정이 깨질 듯해 부러 말을 흘렸다.
― 아까 일어나서 운동 갔다 왔지.
“주말인데?”
― 운동에 주말 평일이 어디 있어.
“아…….”
― 밥은.
대단하지만 결코 닮고 싶지는 않은 부지런함이었다. 떨떠름한 반응을 알아챘는지 짧게 웃은 서윤채가 바로 말을 돌렸다.
“아직. 너는?”
― 나도 아직. 오늘 일정은?
“어?”
― 약속 있냐고.
“아니, 없는데….”
― 오늘 컨디션은.
그는 이상할 만큼 꼬치꼬치 캐물어 댔다.
“괜찮아.”
― 그럼 나올 의향은.
“……만나자고?”
― 행간을 제대로 읽었네.
한 박자 늦게 뜻을 눈치채고 대꾸하니 서윤채가 기특하다는 듯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냥 물어보면 되지.”
― 네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대화의 맥락을 짚어 보던 채현은 잠시 멈칫했다. 배려를 해 준 건가 싶어 생각이 깊어졌다.
― 다른 계획은 없는 거 같고…. 나오면 밥 사 줄게. 싫어?
핸드폰 너머로 전해지는 은근한 음성에 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보니 배려가 아니라 물러설 곳을 차단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이제 와 거절하기엔 애매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 네가 나랑 밥 좀 먹어 주라. 내가 친구가 없어서.
서윤채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태연하게도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상대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쉰 채현은 고민 끝에 그가 앞에 있는 양 얕게 고갤 끄덕였다.
“……그럼 고기 사 줘.”
― 오냐. 준비 다 하면 연락해. 끊는다.
통화는 대답할 새 없이 뚝 끊겼다. 핸드폰을 슬쩍 본 채현은 침대 위로 내던지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여느 때와 똑같은 외출이라 생각하면서도, 움직임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 분주해졌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서윤채와 연락한 채현은 여유롭게 집에서 출발했다. 밖에서 단둘이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게 얼마 만인지. 날씨도 딱 걷기 좋을 만큼 화창해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약속 장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얼마간 달리니 금방이었다. 초여름의 정취가 묻어나는 거릴 보며 향해선지 더 짧게 느껴졌다.
만나기로 한 곳에서 기다릴 생각으로 걸음을 옮길 무렵이었다.
“어?”
누가 짜기라도 한 듯 정면에서 걸어오는 서윤채와 마주쳤다. 상대도 바로 알아본 건지 무심했던 표정을 바꾸며 성큼 발을 내디뎠다. 쨍한 하늘을 뒤로하고 걸어오는 그에게서 채현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뭐지? 우리 채현이가 이렇게 일찍 올 리 없는데. 고기 많이 먹고 싶었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시선을 떨어뜨린 이가 장난스러운 투로 이야기했다.
“아니면 내가 보고 싶었나.”
길게 늘어진 음성은 꼭 떠보기라도 하는 듯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채현은 별다른 대꾸 없이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 뒤따르던 상대는 자연스레 옆에 서서 이끌었다.
얼마간 걸어서 향한 고깃집은 가격대가 꽤 나가는 식당이었다. 기껏해야 삼겹살이나 갈비를 생각했는데 한우라니. 찰나 당황한 채현은 서윤채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여기 되게 비싸…….”
“비싼 만큼 맛있겠네.”
그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윤채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쩔 수 없이 함께 발을 내디딘 채현은 통장 잔고만 되뇌었다. 이런 비싼 음식을 냉큼 얻어먹을 순 없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서윤채는 불시에 픽 웃어 보였다.
“하여간 머리 굴리는 건 선수야?”
“뭐가?”
“네 친구 돈 많아. 그냥 좀 처먹…. 먹어라.”
편히 있지 못하는 꼴을 보고 한마디 한 게 분명했다. 말을 잇다 찰나 멈칫하긴 했지만. 의아해서 빤히 바라보니 ‘뭐.’ 양아치처럼 되물으며 젓가락과 물을 놔 주었다.
밥을 먹는 동안 오간 대화는 없었다. 직원분이 옆에서 고길 구워 주셔서 딱히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고기는 아주 맛있었다. 비싸서 기겁을 했는데, 서윤채의 말대로 값어치를 하는 맛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한 점 집어 먹은 채현은 웃기만 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안 먹어?”
“먹어.”
실없이 굴던 이는 그제야 느릿한 속도로 젓가락질을 했다. 고기는 부족하지 않았다. 서윤채가 계속해 주문한 까닭이었다. 그 덕에 가게에서 나올 땐 포만감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고마워. 진짜 잘 먹었어. 나도 다음에 밥 꼭 사 줄게. 비싼 걸로.”
“오냐.”
사탕을 깨물어 먹던 서윤채의 가벼운 대꾸를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그저 나란히 서서 길을 걸을 뿐이었다. 볼일이 끝났으니 이대로 집에 가는 건가. 문득 득 의문에 서윤채를 흘금거리던 채현은 그와 눈이 마주쳐 움찔 몸을 떨었다.
“왜.”
“우리 이제 집 가?”
“가고 싶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일단 좀 걷자. 날도 좋은데.”
주말인 탓인지 거리엔 사람이 많았다. 개중 대부분이 커플이었고. 괜히 의식이 된 채현은 반보 떨어진 채 걸음을 옮겼다.
얼마간 말없이 발을 내디뎠을까. 조용히 움직이던 서윤채가 ‘권채현.’ 하며 소리를 냈다.
“밥은 됐고 저거나 보여 줘.”
말을 맺은 이가 턱짓으로 가리킨 건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공포 영화 포스터였다. 단둘이 영화라니. 애초에 함께 영화관에 방문한 적도 중학교 무렵 다 같이 간 후로 한 번도 없었는데.
“……보고 싶어?”
“어.”
서윤채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즉답했다. 일순 망설인 채현은 결국 고갤 끄덕이며 핸드폰으로 예매를 했다. 가장 빠른 영화가 30분 뒤 상영인지라 조금 시간을 때워야만 했다.
거리를 배회하다 향한 곳은 근처 오락실이었다. 지폐를 동전으로 바꾼 뒤엔 가장 먼저 슈팅 게임을 했다. 서윤채는 분홍색 총을 들고 퍽 진지하게 게임에 임했다. 학생 때부터 게임을 즐겨 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명사수 같지.”
그러면서 꼭 한마디씩을 덧붙여, 채현은 저도 모르게 킬킬대며 화면을 향해 총을 쐈다. 교복을 입던 시절엔 주로 피시방만 찾아 오락실은 오랜만이었는데 몹시 즐거웠다.
“내기할래?”
그다음으로 눈에 띈 게임은 농구였다. 서윤채의 말에 채현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내기라는 말에 승부욕이 본능적으로 들끓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나 농구부 출신이야.”
호기롭게 말을 뱉었으나 상대는 짧게 웃기만 했다. 꼭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모양새였다. 그 반응에 동요한 채현은 바로 동전을 주섬주섬 꺼냈다.
“좋아. 뭐 걸래?”
“진 사람이 팝콘 사기.”
세 판 중 두 판을 먼저 이긴 사람이 승리하는 걸로 정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서윤채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쉽게 공을 내던졌는데, 자석이라도 붙은 양 모조리 망을 통과했다. 덩달아 사기가 오른 채현은 빠른 속도로 공을 던져 넣었다.
첫판은 서윤채가, 두 번째 판은 자신이 이기며 사이좋게 1승씩 나눠 가졌다. 바로 시작된 세 번째 판은 서윤채가 던진 마지막 공이 빗나가며 승패가 났다.
“아. 졌네.”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투로 중얼거렸다. 꼭 일부러 빗맞히기라도 한 것처럼. 의중을 파악하듯 빤히 바라보니 손을 뻗어 머리를 꾹꾹 눌러 댔다.
“역시 농구부야?”
서윤채는 천진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손을 놀렸다. 어서 떨어지라는 뜻으로 머릴 가로젓자, 다행히도 얌전히 손을 거두어 주었다. 능청스레 굴던 그는 핸드폰을 확인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존나 늦겠다.”
“잠깐… 윤채야.”
그러더니 이렇다 할 틈도 없이 손을 붙잡고 뛰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힘을 주며 벗어나려 했지만 더 강하게 옭아매질 뿐이었다.
맞잡은 손은 영화관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서야 떨어졌다. 최선을 다해 손을 물린 채현은 주먹을 움켜쥐고 숨을 골랐다. 여전히 손끝에 감촉이 남아 있는 듯해 소름이 돋았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서윤채의 태도엔 변함이 없어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상영관엔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티켓을 발권하는 사이 서윤채가 팝콘과 음료를 사 온 덕이었다. 곁에 있던 이는 좌석에 몸을 앉히는 동시에 품 안에 팝콘 통을 안겨 주었다. 안엔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는 캐러멜 팝콘이 가득했다.
“너 단거 안 좋아하지 않아?”
“네가 좋아하잖아.”
서윤채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편히 기대앉아 콜라를 마셨다. 불시에 밀어닥친 자극에 또 마음이 울렁인 채현은 멍하니 앞 좌석을 노려보았다.
“뭔 생각을 또 그렇게 해.”
그를 알아챘는지, 입에서 빨대를 뗀 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컵 꽂이에 음료를 내려놓더니 아예 몸을 움직여 손을 붙잡았다.
“이거 때문에? 싫었어?”
“아니, 왜 손을…. 누가 봐….”
“보라고 해. 우리가 뭐 죄지었어? 참고로 난 안 싫었어, 채현아.”
살결에 닿았던 온기가 천천히 멀어졌다. 상체를 숙인 채 낮게 속삭인 서윤채는 아무 일도 없던 양 스크린만 응시했다. 채현은 어떤 소리도 쉬이 내지 못하고 음료만 마셨다. 그저 공간이 어두워 다행이란 생각이 들 뿐이었다.
영화는 포스터만큼 무섭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놀랄 장면이 나와 몸이 움찔대는 정도였다. 한데 그마저도 기력을 앗아 갔는지 영화가 끝나고 공간을 나올 무렵엔 모든 기운이 빠진 채였다.
“집에 갈까?”
채현은 상태를 가늠하듯 보던 서윤채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번화가인 덕에 택시는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대로 헤어질 줄 알았는데, 서윤채는 함께 택시에 몸을 실었다.
한 택시로 움직이려고 그러나. 경유 안 되지 않나. 곰곰이 생각하던 채현은 그가 자신을 데려다주고 있단 결론에 이르렀다.
예상대로 서윤채는 오피스텔 근처에서 함께 하차했다. 특별한 대화 없이 걸음을 옮겨서일까. 서서히 어두워지는 공간이 평온한 침묵으로 뒤덮여서일까. 어쩐지 멋쩍은 기분이 들고 공연히 어색해졌다.
“영화 재미있었어?”
“네가 놀라는 건 재밌더라.”
그에 반해 서윤채의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채현은 듣기 좋은 소리를 좇아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느슨히 입매를 늘어뜨리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그라졌던 혼란이 다시금 고갤 드는 건 그즈음이었다. 문득 떠올려 보니 오늘 하루가 데이트라도 된 듯해 생각이 많아졌다. 그저 친구였을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인데 무언가 달랐다.
“……우리 오늘 뭐 한 거야?”
“뭐 같은데.”
고민 끝에 말을 던졌으나 서윤채는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네 속을 모르겠어. 너는 나랑 이러고 있어도… 안 불편해?”
결국 한탄하듯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신 없이 중얼대니 정면을 응시하던 이가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눈을 마주한 채 수 초를 흘려보낼 무렵, 서윤채의 입술 새로 웃음이 샜다.
“다른 사람이랑 손잡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근데 너는 괜찮더라. 예전부터 그러긴 했다만.”
그는 질문의 요지를 살짝 빗겨나간 듯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런데도 그 한마디가 주는 울림이 좋아서 쉬이 말을 얹을 수가 없었다. 서윤채는 그게 전부라는 듯 어깰 으쓱하더니 재차 발을 내디뎠다. 다시 대화가 이어진 건 집 앞에 다다른 뒤였다.
“채현아.”
초여름의 저녁 거리를 뒤덮은 소음은 고작해야 나무 흔들리는 소리뿐이었다. 그 위로 듣기 좋은 서윤채의 음성이 겹쳐졌다. 때마침 불어온 시원한 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살랑 흔들렸다.
“나는 너 때문에 일찍 간 거 맞아.”
“…….”
“이상하게 기대가 되더라고.”
서윤채는 물끄러미 시선을 흘리며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짓궂은 장난이라기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진심이 느껴졌다.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일까. 채현은 의문을 가득 담아 옅게 웃는 그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들어가라.”
찰나의 대치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상대는 친절히 말을 덧붙여 주지 않았다. 일순 떠올랐던 날것의 속내를 갈무리하고 어서 들어가라는 듯 고갯짓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이냐고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줄 거지.”
“채현이 양아치야? 다 깠는데 더 달라고 하네. 여기서 더 솔직해지면 매력 없어서 안 돼.”
“……매력 있는데.”
“그래. 좋게 봐줘서 고맙고. 오늘은 여기까지 해. 이제 그대로 돌아서 앞으로 가.”
강경한 태도에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채현은 멋들어진 미소를 띤 서윤채를 바라보다 ‘조심히 가.’ 이야기하고 제집을 향해 걸었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서윤채가 그 자리에 서 있어, 멈춰 서고 싶은 걸 꾹 참아 내면서.
* * *
날이 밝고 저물기를 반복하는 사이 사위가 푸른빛을 덧입었다. 완전한 여름이라 불러 무방한 시기가 이윽고 도래했다.
시일이 흐르며 달라진 건 주변 광경뿐이 아니었다. 채현의 체감상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건 서윤채와의 관계였다. 근래 들어 저희 사이는 어떤 한 단어로 쉽게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이전처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도 아닌데, 만나지 않은 날보다 만난 날이 더 많았다. 그 이상으로 빈번히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마저도 용건 없이 메시지를 나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막역한 사이긴 했지만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마음이 달라져서인지 행동에서 묻어나는 느낌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과연 지금의 저희를 친구라 칭할 수 있을까. 확신 어린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연인이라기엔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한 경계를 밟고 선 기분이었다.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머릿속 가지는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다. 만일 서윤채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저는 친구가 아닌 다른 관계가 되고 싶은 걸까. 지금 당장의 마음으론 긍정보다 부정에 가까웠다.
몇 년간 최선을 다해 애정을 삭여 왔다. 반복된 행동은 어느새 습관이 되고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이제 와 당당히 마주하려니 어색하고 주춤거리게 됐다.
정말 싫다면 강하게 서윤채를 쳐 내야 한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 그리하다가 서윤채가 상처받기라도 할까 봐.
“…….”
아니. 더 솔직히 말해서 제 마음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저조차도 모호했다. 그 탓에 지금 이 꼴이 된 것일 테지만.
자조하듯 웃은 채현은 생각을 비워 내며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쥔 손을 놀렸다. 방학이어서인지 학생 식당은 점심시간인데도 한산했다. 널따란 중앙 테이블에 앉은 이는 오직 저뿐이었다.
눈에 익은 이가 보일 때마다 알은체하며 밥을 먹을 무렵, 누군가 식판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과 선배임을 알아차리는 건 금방이었다. 그는 자연스레 앞에 자릴 잡더니 몸을 앉혔다.
“왜 혼자 먹어.”
“형은 왜 혼자예요? 조교님이랑 같이 안 먹어요?”
“교수님이랑 드신다고 해서 바로 튀었지. 한 끼 얻어먹자고 꼈다가 체할 일 있냐.”
“그건 그래요. 고기 사 준다면 모를까.”
“우리 과 교수님들 지갑 잘 안 여시니까 참고해라.”
엄청난 비밀인 양 은밀하게 이야기한 이는 본격적으로 그릇을 비웠다. 채현은 늦게 온 그와 속도를 맞출 겸 여유롭게 밥을 먹었다. 원래도 느리게 먹는 편이라 얼추 비슷하긴 했다.
수 분간 학과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이어 나갔을까. 밥을 한술 떠먹던 채현의 시선이 문득 선배의 손에 가 닿았다. 그의 약지에서 반짝이는 얇은 은색 반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커플링이에요?”
“안목 좋은 애인이 친히 고르신 거다.”
반지를 바라보며 말하는 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가벼이 웃어 보였다.
“오래 만났어요?”
“3년 넘었지.”
“아…….”
목을 울린 채현은 홀린 듯 3년이란 시간을 셈해 보았다. 연인의 3년이라 하면 짧기보단 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꽤 오랜 만남을 가졌구나 싶었고.
그러나 거기에 서윤채와 자신을 대입해 보면 판단이 삽시에 바뀌었다. 17년을 알고 지내서일까.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해 온 인연이어서일까. 찰나라는 생각뿐이 안 들었다.
“넌 연애 안 하냐? 만나는 사람 없어?”
“저는 딱히 생각 없어서요.”
“새끼.”
웃기고 있다는 듯이 흘겨본 그는 다시 열심히 밥을 먹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채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를 지켰다. 때마침 핸드폰이 짧게 진동해 확인하니 서윤채의 연락이었다.
[서유난 : 밥 먹었냐?] 오후 12:40
오후 12:41 [학식먹었어]
오후 12:42 [너는?]
[서유난 : 그걸로 돼?] 오후 12:44
본인이 무슨 끼니 챙겨 주는 사람이라도 되는 건지. 매번 제대로 된 걸 먹고 있냐고 물어 와 기분이 이상했다. 무어라 답하면 좋을까. 짧은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고민이 돼 손이 느려졌다.
“만나는 사람 없다더니.”
“네?”
활자에만 몰두되어 있던 정신을 붙잡아 끈 건 선배의 목소리였다. 소리를 좇아 휙 고개를 쳐드니 그는 핸드폰을 향해 턱짓했다.
“그거 친구 아니잖아.”
“아니, 친구예요.”
“아하, 아직까지는?”
그는 혼자 결론을 이미 다 내린 것처럼 이야기했다.
“네 얼굴에 다 보인다. 누가 친구랑 문자 하면서 그렇게 웃어?”
아. 웃고 있었나.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채현은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져 보았다. 제 표정이 풀어졌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한 채였다.
“소문 안 낼 테니까 걱정 마라. 가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 선배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식판을 챙겨 든 채현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자신이 표정 관리에 그토록 재능이 없었는지 퍽 심각하게 따져 보면서.
“커피?”
“아,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잠시 기다리라 말한 선배는 학생 식당 바로 옆 카페로 들어갔다. 그가 커피를 사는 사이, 채현은 미처 답하지 못했던 서윤채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1 오후 1:03 [충분해너도오늘맛있는거많이먹고와]
어젯밤 통화할 적 그는 ‘모레 뭐 하냐.’ 운을 띄우며 얼굴을 보자 했었다. 내일은 약속이 있어 만나기 어려우니 그다음 날 보자고. 잊지 않고 기억한 채현은 답을 보내고 핸드폰을 넣었다.
선배에게 커피를 받은 뒤엔 과방으로 이동했다. 지금 돌아가 봤자 할 일도 없으니 과제나 하다가 귀가할 생각이었다. 과방엔 아무도 없어 집중하고 작업하기 딱 좋았다.
과제를 하는 중간중간 시선은 핸드폰으로 떨어졌다. 이따금 서윤채에게서 오는 연락이 없어 신경이 흐려졌지만 우선 과제에 힘을 쏟아부었다. 그사이 몇몇이 과방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피피티만 만들다가 졸업하게 생겼네…….”
과열이 된 노트북을 끈 건 과제를 절반 이상 완성한 뒤였다. 집중력이 완전히 소멸된 채현은 과감하게 자리를 정돈하고 짐을 챙겼다. 하도 집중을 했더니 눈도 아파져 더는 무리였다.
밖으로 나오니 거리가 어둑어둑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듯한데, 또 끼니를 챙길 시간이었다. 뭘 먹어야 좋을까. 원래 혼자서도 밥을 잘 먹는데 오늘따라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채현은 무의식적으로 잠잠한 핸드폰을 신경 쓰며 집으로 향했다. 저녁으론 근처 카페에서 파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서 들어왔다.
간단히 샤워하고 홈웨어로 갈아입은 뒤 먹은 빵은 그냥 그랬다. 맛보다는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느낌이 강했다. 근래 들어 누군가와, 서윤채와 함께 먹는 게 익숙해져 그런 건지…….
“…….”
절로 서윤채를 떠올린 채현은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피식댔다. 그가 이 꼴을 보면 제대로 안 처먹는다고 또 잔소리하겠거니 예상된 탓이었다. 그 모습이 선명히 그려지며 입매가 간지럽게 풀어졌다.
온종일 연락이 없던 이에게서 전화가 온 건 10시를 넘길 무렵이었다. 채현은 핸드폰 진동이 길게 울리자마자 반사적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익숙한 이의 이름을 보곤 즉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는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조금 소란스러운 듯한 주위의 소음이 들려올 뿐이었다.
“서윤채? 들려?”
― 잘 들려. 뭐 하고 있었어.
그 사이로 들리는 서윤채의 음성은 평소보다 조금 차분했다. 술자리에 간 건가. 채현은 홀로 추측하며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핸드폰 너머 상대에게 조금 더 집중했다.
“그냥 과제. 너는?”
― 계절이 정규 학기보다 더 빡센 느낌인데.
그는 질문엔 답을 하지 않고 나직이 중얼대기만 했다.
“그래도 한 달이면 끝나니까. 너는 술 마셔?”
― 지금은 아니고.
짧은 서윤채의 대답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이어 누군가 서윤채에게 말을 거는 듯 말소리가 전해졌다. 송화구를 막고 말을 나누는지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진 않았다. 그런데도 그 틈으로 조금씩 밀려들어 오는 이야기가 술집에서 오가는 대화라기엔 영 미심쩍었다.
“너 어디야?”
― 뭐가 그렇게 궁금해.
상대는 이번에도 시원하게 답하지 않고 어물쩍 넘기려 했다.
“윤채야.”
― 왜 무섭게 부르지. 그냥 뭐 하고 있나 전화해 본 거야. 끊어. 과제나 해.
“끊지 마. 어디야, 너?”
그 순간 가슴께를 내리누른 건 이상한 직감이었다. 늘 거침없이 구는 서윤채가 이리 수상하게 굴 리 없었다. 무언가 일이 생긴 거 같단 불길한 예감이 치밀었다.
“너 무슨 일 있어?”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현은 삽시에 심각해졌다. 손끝이 차게 식는 듯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아…….’ 낮게 목을 울리기만 했다.
― 큰일은 아니고.
“무슨 일인데.”
― 혼낼 거야?
“……너 무슨 사고 쳤어? 술 먹다가 시비 걸렸어? 경찰서야?”
― 누굴 양아치 새끼로 보고 있어.
“그럼 뭔데.”
― 지금 병원이야.
그가 말을 맺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일순 호흡이 흐트러지고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됐다. 병원이라니. 왜. 크게 다친 건가. 당장 서윤채를 봐야 한단 생각밖에 안 들었다.
“왜, 많이 다쳤… 아니다. 어디 병원이야? 내가 갈게, 지금.”
― 늦었는데 뭐 하러.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 우리 만나기로 한 건 며칠만 뒤로 미루자.
“심각한 거야? 입원했어? 말해 줘.”
― 그냥 꼴이 영 별로라서 그래.
“지금 가면 안 돼?”
의식하지 못한 사이 절박함을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서윤채가 걱정되기도 했고, 유독 병원을 싫어하는 걸 알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너 이모한테 연락도 못 할 거 아니야. 같이 있는 사람 있어? 없으면 내가 가게 해 줘. 너 병원 싫어하잖아.”
― 아……. 채현이는 나를 너무 잘 알아?
길게 목을 울린 그는 결국 바람 빠지듯 웃으며 위치를 읊어 주었다. 채현은 병원 이름을 되뇌며 전화를 끊은 뒤 지갑만 챙겨 밖으로 나섰다. 옷을 갈아입을 여력 따위 없었다. 애가 타서 한시라도 빨리 병원으로 향하고만 싶었다.
병원 앞 택시 승강장에 내려선 응급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대며 찾던 서윤채는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도 입구만 보고 있던 건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서윤채는 어쩐 일인지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채현은 그 시선을 받아 내며 성큼성큼 그의 곁으로 향했다. 왼쪽 팔에 깁스를 하고 얼굴에 상처가 난 꼴을 보니 울컥했다.
“서윤채, 너 괜찮아?”
뛰듯이 걸음을 옮겨 다가가 상처를 살피는 동안 서윤채는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무언가에 놀란 사람처럼 동요하는 눈을 하고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붉은 입술이 작게 벌어져 소리가 새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윤채야.”
많이 아파서 그런 걸까. 괜찮은 게 맞는 걸까. 불안함에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때였다.
“아…….”
한참을 굳은 듯이 호흡만 하던 서윤채가 뒤늦게 감탄처럼 억눌린 한마디를 터뜨렸다.
뒤를 이어 울리는 말소리는 없었다. 그는 그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큰일 아니라며. 근데 꼴이 이게 뭐야……. 왜 이래. 어쩌다 이런 거야. 어?”
결국 재차 소리를 내는 건 채현의 몫이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서윤채 때문에 피가 마르는 듯했다. 보이는 상처 말고도 다른 내상이 있어 이러는 건지 걱정돼 속이 탔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그에 반해 상대는 태연하기만 했다. 살며시 웃어 보이며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해 댔다.
“팔은. 뼈 부러진 거야?”
“우리 채현이 급했나 보네. 양말도 못 신고 나오고.”
물끄러미 발을 내려다보며 속삭이는 꼴에 채현은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또 한 번 짓씹었다. 서윤채. 가느다랗게 새어 나온 부름은 금방이라도 빵 터질 듯 뭉그러진 채였다.
“너는 지금, 웃음이 나와?”
역정 아닌 역정을 낸 채현은 두 눈을 부릅뜨고 서윤채를 노려보았다. 오면서 많이 걱정했다고. 심각하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너도 놀랐겠다고. 괜찮으냐고……. 차분하게 그의 상태를 살피며 묻고 싶었는데, 화만 내고 있으니 속이 더 뒤집혔다. 저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게 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조용히 속삭인 이는 입매 가득 호선을 그리며 곁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니 손을 뻗어 엉망이 된 옷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이 상태가 된 줄도 모르고 있던 채현은 물끄러미 그의 손길만 좇았다.
“살짝 금 간 거야. 얼굴은 넘어질 때 긁혀서 그런 거고.”
“어쩌다 넘어진 거야.”
“술 처먹고 취한 새끼 부축하다가. 그냥 버리고 올 걸 그랬지.”
취객 뒤치다꺼리만큼 번거롭고 힘든 일이 없을 텐데. 인사불성인 이를 데리고 움직이며 얼마나 곤란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의 친구가 일순 몹시 미워졌다.
“의사 선생님은 뭐래?”
“그냥 조심하라지, 뭐.”
다 됐다. 말끔하게 옷을 정리해 준 이는 퍽 만족스러워하며 손을 뗐다. 다친 사람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여상한 태도였다.
“안 아파?”
“지금은 딱히. 그냥 어떻게 족칠까 생각 중.”
진심이라기보단 상황의 심각성을 옅게 하려는 농담에 가까운 어투였다. 그를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자, 가만히 지켜보던 서윤채가 황당하다는 듯 짧게 웃었다.
“족치고 오라고? 안 말려?”
“그 친구 때문에 너만 다친 거잖아.”
“아…. 이거 든든하네….”
혀를 내어 입술을 핥은 서윤채는 연신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듣기 좋은 소리는 귓가를 간질일 뿐만 아니라 천천히 마음도 진정시켜 주었다.
채현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서윤채를 향해 부축해 주냐는 듯 손짓해 보였다. 상대는 슬쩍 시선을 던지더니 홀로 몸을 일으켰다. 직후엔 멀쩡한 손을 뻗어 머리를 살살 정돈해 주었다.
“뭐가 그렇게 걱정돼서 정신없이 뛰어왔어.”
타박이라기엔 노기가 전혀 없고 힘이 빠져 있었다. 오히려 상대를 걱정하는 듯 다정한 말씨였다. 채현은 제 머릴 쓰다듬는 손길과 귓등에 닿는 소릴 곱씹으며 깁스만 바라보았다.
“친구가 다쳤다는데 당연히 걱정되지…….”
느릿느릿 움직이던 손이 멈춰 선 건 그와 동시였다. 손을 거둔 서윤채는 고갤 비스듬히 꺾더니 ‘음…….’ 길게 목을 울렸다. 그 끝엔 나긋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우리가 그냥 친구는 아니지 않나.”
나긋한 음성은 결코 크지 않았다. 아주 작은 속삭임인데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커다랗게 들렸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바라보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어깰 으쓱이며 앞장섰다.
“채현아.”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기던 서윤채는 택시 승강장에 이르러서야 소리를 냈다. 부름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시선을 잡아채고 깁스한 제 팔을 들어 보였다.
“나 집에 데려다주라.”
그는 결코 거절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기에 더해 한껏 풀죽은 얼굴로 이것 좀 보라는 듯 팔을 향해 눈짓했다.
안 아프다더니, 역시 아픈 거겠지. 저 역시 얼마 전에 발목을 다쳐 봤던지라 쉬이 고통이 상상됐다. 채현은 만면에 떠오른 염려를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거니와 집에 데려다주는 것쯤은 언제든 가능했다.
택시에 오른 뒤 확인한 상대는 평소의 여유로운 낯을 하고 있었다. 직전에 지어 보인 그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병원이라 그랬던 건가. 의문이 일기도 잠시,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생각한 채현은 온몸을 두른 긴장을 덜어 내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고작해야 두 달쯤 지났을까. 그때는 제가 다리를 다쳐 서윤채가 도와주는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였다. 상대도 같은 순간을 떠올렸는지 깁스한 팔을 내려다보았다.
“좋아하면 닮는다더니 이런 것도 닮나.”
그 상태로 뻔뻔히 중얼거리는 말은 심히 낯간지러웠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굴었다.
“조심성 좀 길러…….”
“누가 누구한테 그 소리를 해.”
공연히 멋쩍어져 타박하자 서윤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질렀다. 긴 다리를 자랑하듯 움직여 장난스럽게 툭 건들기도 했다.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길 잠시, 기사님께 방해가 될까 봐 이후론 조용히 이동했다. 길이 막히지 않은 덕에 도착까진 금방이었다.
오피스텔 앞에 선 채현은 군데군데 불이 켜진 건물을 올려다보다 서윤채를 응시했다. 그가 들어가는 모습까지 보고 다시 택시를 호출할 생각이었다. 한데 상대는 미동도 없이 서서 묘한 얼굴만 해 보였다. 덩달아 의아해진 채현은 건물을 향해 슬쩍 눈짓했다.
“힘들 텐데 들어가서 쉬어. 팔 절대 무리하지 말고. 혹시 새벽에라도 아프면 연락….”
“가려고?”
걱정이 되는 마음에 쏟아 내던 말은 서윤채가 뚝 끊어 냈다.
“……그럼 안 가?”
“정 없이 어떻게 그냥 보내냐. 들어왔다가 가. 나도 다쳐서 그런가, 혼자는 좀 그러네.”
그답지 않게 유약한 면을 보이는 서윤채의 태도에 채현은 일순 멈칫했다. 눈을 내리깔며 멀쩡한 팔로 깁스 위를 매만지는 모습이 유독 눈에 밟혔다. 이를 보고서 어찌 싫다 말할 수 있을까.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곤 함께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앉아 있어.”
“어, 응.”
그렇다고 해서 편히 들어선 건 절대 아니었다. 이 공간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라 눈치가 보이고 괜히 행동이 어색해졌다. 그에 반해 집주인은 옅게 웃으며 음료도 갖다주었다.
“나 시키지.”
“널 왜 시켜.”
바로 대꾸한 서윤채는 TV를 틀어 준 뒤 ‘잠시만.’ 하며 방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꽤 지나도 나오지 않기에 걱정했는데, 얼마 뒤 옷을 갈아입은 채 모습을 보였다. 한쪽 팔이 저래서 입기 힘들었을 텐데. 보자마자 걱정부터 든 채현은 유심히 그를 살폈다.
“혼자 입기 괜찮았어?”
“그럭저럭.”
“나 부르지.”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돼서.”
“……뭔 소리야?”
“그런 게 있다.”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대답한 이는 소파에 편히 기대앉았다. 채현의 시선은 자연히 그에게로 향했다. 숨죽인 채 상태를 가늠하듯 바라보길 수 초, 피할 틈 없이 눈이 마주쳤다.
상대는 전혀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마주해 왔다. 꼭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채현이었다. 뺨에 와 꽂히는 시선이 따가워 열이 오르는 듯했으니.
“또 다친 곳은 없는 거지?”
“확인해 볼래?”
“어?”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고갤 쳐들고 바라보니 붉은 입술이 씩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농담. 멀쩡하니까 걱정 그만하고.”
그는 떨어진 눈길을 다시 잡아채는 게 목적이었던 사람처럼 시선을 옭아맸다.
“저녁은.”
“샌드위치 먹었어.”
“빵 쪼가리로 밥이 되냐? 내일 학교 몇 시에 끝나. 밥이나 먹자.”
“한 시 반에 끝나. 내가 사 줄게. 뼈에 좋은 거 먹으러 가자.”
짧게 웃은 이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갤 끄덕이고 눈을 내리감았다.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채현은 그제야 아차 싶어 시계를 확인했다. 푹 쉴 수 있게 해 줘야 하는데 눈치 없이 너무 오래 머물렀다.
“너 혼자 씻을 수 있겠어?”
“이거 혹시 사심 담긴 질문인가.”
“뭐래 진짜……. 이제 집에 가려고, 너 힘들다고 하면 도와주고 가려고 그런 거거든.”
“집에 가려고?”
“……가야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식으로 질문하니 서윤채는 또 팔을 들어 보였다.
“환자 혼자 두고 가려고?”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과는 다소 상반되는 태도였다.
“늦었잖아. 그냥 자고 가.”
“아직 막차 안 끊겨서 괜찮아.”
“오늘만 자고 가. 더 안 붙잡아.”
장난기 하나 없는 음성으로 하는 말은 명령보다 부탁에 가까웠다. 아니, 그보다는……. 메아리처럼 울리는 말을 곱씹던 채현은 찰나의 혼란을 뒤로하고 끝내 긍정을 표했다. 마찬가지로 얕게 고개를 끄덕인 집주인은 갈아입으라며 편안한 옷을 가져다주었다.
“먼저 씻어라. 칫솔은 욕실에 있고.”
“응.”
품 안에 옷을 안고 들어선 욕실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서윤채의 칫솔 옆에 제 것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채현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지는 듯해 최대한 빠르게 몸을 씻고 밖으로 나섰다.
달칵. 문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반응을 보인 집주인은 성큼 곁으로 다가와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 상태로 방으로 이끌기에 채현은 방과 거실의 경계에 발을 딱 붙이고 섰다.
“너 여기서 자. 나 거실에서 잘게.”
“나 때문에 고생한 애를 어떻게 거실에서 재워.”
“왜 못 재워. 재울 수 있어. 잘 수 있고.”
“하여간 말은.”
서윤채는 물러서는 기색 하나 없이 네가 침대에서 자라 일렀다. 집주인이, 더군다나 환자가 양보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지.
“아니면 같이 침대에서 자든가.”
단호히 반박하려 했으나, 그를 알아챈 상대가 먼저 소리를 냈다. 그다지 달갑지는 않은 쪽으로. 움찔 몸을 떤 채현은 서윤채를 바라보다 결국 시선을 떨어뜨렸다.
“다 알면서 그러지 마.”
작게 새어 나온 한마디는 몹시도 볼품없었다. 일순 말을 멈춘 상대는 곧이어 손을 뻗어 콧등을 가벼이 톡 건드렸다. 갑작스러운 손짓에 절로 눈이 깜빡여졌다.
“너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이불 깔아 줄게. 그건 괜찮지.”
조심스레 와 닿던 손길만큼이나 다정한 말씨였다. 채현은 천천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제 뜻을 따라 주는 서윤채 때문에, 솔직히 이야기해 주는 서윤채 때문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침대 옆에 이불을 펴 준 집주인은 ‘씻고 올 테니까 먼저 자.’ 이야기하며 방 밖으로 나섰다. 어두운 방에 홀로 남은 채현은 벽 너머서 들리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윤채의 향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그의 흔적을 좇고 있으려니 신경이 바짝 일어서 잠이 오질 않았다.
수마보다 먼저 찾아든 건 서윤채였다. 소리를 죽이고 들어선 이는 잠시 멈칫하다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그가 자리를 다 잡았으리라 생각될 때쯤 ‘잘 자.’ 조용히 밤 인사를 건네니 부스럭거리던 이불 소리가 멎었다.
“왜 안 자고.”
“그냥, 아직 잠이 안 와서…….”
바삐 뛰어다니며 기력을 다 썼는데도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했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목소리에 잠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너 팔은 괜찮아? 아프면 나한테 꼭 말해야 돼, 알겠지.”
대답 않고 밤의 침묵에 어울리던 서윤채는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낮은 음성을 흘렸다.
“충동이었어. 너한테 전화한 거.”
“…….”
“그냥,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는데…….”
말미를 흐린 이가 몸을 움직였는지 멎었던 이불 소리가 다시 울렸다. 채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누웠다는 것을.
“네가 오더라고.”
고작해야 짧은 한마디였다. 담백하기 짝이 없는 단조로운 어조였고. 그런데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나직이 흘러나와 귓가에 닿은 말이,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는 듯해 긴장이 됐다.
“채현아.”
“……응.”
밤이 내려앉은 방은 어두웠다. 또 그 이상의 적막으로 가득 찬 상태였고.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함께 있는 이의 호흡이 들릴 정도였는데.
서윤채는 기꺼이 그러한 공간의 균형을 깨트렸다.
“너도 이런 기분이었어?”
“…….”
“나 좋아한다는 거 알았을 때.”
결코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익숙한 목소리로, 낯선 말을 속삭이면서.
채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을 온전히 소화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너도 이런 기분이었느냐고. 너도……. 십수 번을 반복해 곱씹어도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억측일 수도 있지만, 도무지 믿어지진 않지만 사실일 결론이.
“말로 설명 못 할 기분이긴 한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싶더라고.”
서윤채는 지금 제게 고백을 하고 있었다.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야. 그냥 예상보다 빨랐던 거지.”
추측에 확신을 더해 주는 낮은 음성이 침묵을 깨고 울려 퍼졌다. 이리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걸까. 서윤채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너라서 그런 건가.”
혼잣말처럼 중얼댄 이가 작게 웃어 보였다. 찰나 귓가를 간질이고 잘게 부서지는 그 소리가 뭐라고 심장을 울리는지.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온 감정이 느껴지는 듯해 소름이 돋았다.
“아…….”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조곤조곤한 속삭임이 머리를 꽝꽝 울려 댔다.
“사실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니었어. 꽤 됐을 거야. 생각 없이 너한테 연락한 거.”
“…….”
“정신 차리면 이미 그러고 있는데… 모르면 등신이지. 이제야 알았다는 게 우스울 지경인데.”
충동. 욕구. 본능……. 이성을 배반하는 말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였다. 제가 아는 서윤채는 분명 그런 사람인데, 지금 이야기는 그와 정반대인 행동을 해 왔단 소리로 들렸다. 서윤채를 마음에 품은 제가 그러했듯이. 다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얼떨떨한 감정이 가장 컸다.
“우리 원래 연락 자주 했잖아…. 다들, 친구랑 문자 그 정도로 주고받고….”
“넌 친구가 하루 종일 뭐 했는지 궁금해?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걱정되고?”
나는 전혀. 바로 이어 들리는 말은 선을 딱 긋듯 몹시 가차 없었다.
“근데 너는…….”
서윤채가 말을 흘리며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대화의 공백은 도리어 생각할 틈을 만들어 주었다. 긴장 어린 공기가 감도는 공간에서 채현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매번 밥을 먹었냐고 물어 오던 서윤채. 늦은 밤 전화를 걸어와 오늘 뭐 했냐고 묻던 서윤채. 자주 만나자고 하던 서윤채……. 그 모든 순간과 시간이 그가 잇지 못한 뒷말을 예상케 했다.
“네 말대로 우정인데 착각하는 거라면.”
“…….”
“적어도 지금 널 침대 위로 올라오게 하고 싶진 않았겠지.”
“침대를 왜…….”
“더럽게 신경 쓰여.”
낮게 뇌까리듯 즉답한 서윤채가 헛웃음을 내질렀다. 본인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목소리에서 황당한 기색이 묻어났다.
“친구 새끼가 땅바닥에서 처자든 말든 알 게 뭐야. 근데 너는 그게 안 돼. 그냥 내 옆에서 잤으면 좋겠다 싶고.”
까칠한 말씨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던 채현은 공연히 기분이 이상해져 입술을 감쳐물었다. 언제고 서윤채가 보이는 다정과 관용이 반가웠다. 남들보다 아주 조금은 특별한 관계로 묶인 듯해 기뻤고. 한데 지금은……. 그 이상을 받아 마음이 울렁였다.
“아직 부족해? 더 솔직하게 말할까?”
채현은 시체처럼 누워 천장만 응시하다 서윤채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며칠 전의 대화를 기억하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니었으면 좋겠어?”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대신한 서윤채가 부스럭 소릴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침대 헤드에 기대며 자연스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눈이 마주친 듯했다.
“그런 거라면 안됐다. 진심으로 하는 말 맞으니까.”
“아니, 난, 솔직히 지금 당황스러워서…. 네가 나를…….”
“좋아해.”
차마 소리 내어 잇지 못한 뒷말을 상대가 이어받아 이야기했다. 담백하고 딱 그만큼 솔직한 고백이었다. 격정적이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그 말 한마디가 삽시에 온몸을 옭아맸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쉽게 판단하고 얘기하는 거 아니야.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너를…….”
보이지 않는 무언가 몸을 짓누른 기분이었다. 어둠에 기댄 채 쏟아지는 서윤채의 눈길을, 이어질 이야기를 피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 숨죽여 침음한 채현은 두 눈을 내리감았다. 감당하기 힘든 자극에 그저 숨고만 싶었다. 서윤채가 권채현을 좋아한다.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말이 쉽게 소화가 되질 않았다.
“채현아.”
익숙한 부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름만큼은 늘 다정히 부르곤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꼭 잔뜩 긴장한 것을 알아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 음성을 좇아 용기 내어 눈을 뜬 채현은 조심스레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박에 알아챘다. 그 누구도 방해도 없는 지금, 어떠한 틈 하나 없이 시선이 맞붙었다는 사실을.
“너는 어때.”
“어?”
“네 마음은 어떠냐고.”
통상적으로 고백의 다음은 관계의 변화를 알리는 말일 터다. 이를테면 연인으로의 발전을 알리는 말과 같은. 한데 서윤채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대신 질문을 했다. 꼭 주도권을 넘겨주기라도 하듯이.
“날 싫어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왜 겁을 먹었지.”
겁도 없는 새끼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것처럼 서윤채가 장난스럽게 중얼댔다. 교복을 입던 때부터 곧잘 하던 말이었다. 귀에 익은 말을 들어서일까. 목구멍을 틀어막았던 감정의 잔재가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숨통이 조금은 트인 채현은 침을 꼴깍 삼키곤 입을 열었다.
“나 너 안 싫어해. 내가 너를 어떻게 싫어해. 그냥, 나는…….”
“응.”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 그다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서윤채는 바로 답하지 않고 얕게 숨을 터뜨렸다. 이해하는 반응이었다. 당연히 답답하고 짜증이 나겠지. 저조차도 이런 자신이 싫은데 상대는 오죽할까. 죄책을 닮은 감정을 느낀 채현은 하릴없이 입술만 짓씹었다. 생각을 이어 가듯 침묵하던 서윤채가 소릴 낸 건 그 직후였다.
“뭐가 그렇게 걱정돼.”
“……감정이 식으면 끝인 관계잖아.”
“채현아 내가 너를 17년째 보고 있어.”
예상과 달리 그는 역정을 내는 대신 나긋하기만 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답답해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속 이야기를 상대에게 전하듯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지겨웠던 적 한 번도 없어. 지금도 똑같아.”
서윤채가 말을 맺으며 일순 침묵이 내려앉았다. 긴장 어린 공기가 감도는 공간에서 채현은 최선을 다해 시끄러워진 속을 진정시켰다. 그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마음이 깊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저를 위해 주는 사람인데.
“예전에.”
생각을 끊는 상대의 음성이 들렸다. 채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서윤채를 응시했다.
“너랑 노는 게 제일 편하다고 했었지.”
“……응.”
서윤채와 관련된 일은 노력하지 않아도 언제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았다. 지금 한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친구와 약속이 있던 그가 제게 와 준 날이었던가. 친구랑 놀지 굳이 뭐 하러 왔냐는 말에 그는 저리 답을 해 줬더랬다.
“그 말 취소할게. 이젠 마냥 편하지가 않네.”
편하지 않단 말은 달리 말해 상대를 의식하고 있단 소리였다. 즉 신경을 쓴다는 거였고. 어쩌면 그 이상으로 긴장했다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정말, 서윤채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채현은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제 상태와 별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어.”
“만약, 우리가 만나다가 헤어지면 그다음은?”
서윤채는 왜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을 말하느냐고 뭐라 했었지만,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5살의 겨울날 처음 만나 지금껏 이어 온 인연이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소중한 만큼 망설임이 차올랐다.
더욱이 17년의 세월이 준 건 서로에게 국한된 우정뿐이 아니었다. 긴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왔다는 건, 그만큼 깊이 엮여 있다는 뜻이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막역한 관계인 가족이 그랬고, 오랜 친구가 그랬다. 오직 감정 하나만 보고 덜컥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너는 나 다시 친구로 볼 수 있어?”
서윤채의 침묵은 긍정과 부정 어느 한쪽에 속한다기보단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는 상황을 넘기기 위해 거짓말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우리 가족이랑 애들은 또 어떡하고.”
“네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제 좀 알겠다.”
깨달음을 얻은 양 대꾸한 서윤채는 곧이어 ‘음…….’ 목을 울렸다.
“너는 왜 중간이 없냐?”
“뭐가…….”
“생각 좀 하고 살라고 했더니, 머리 터질 때까지 하고 있잖아. 적당히 해라.”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듯했던 이가 흘린 소리는 질문의 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머리가 아파질 때까지 생각만 해 불면을 얻기도 했으니까.
“우리 둘이 좋아서 연애하려는 건데 뭘 그렇게 다 신경을 써. 안 그래도 돼.”
“…….”
“겁낼 필요도 없고.”
꼭 속을 다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한 서윤채가 말을 이었다.
“이해했어. 네 뜻 존중하고. 일단 좀 자라. 더 얘기 안 할 테니까.”
“미안…….”
“뭘 사과를 해. 나 차였냐?”
“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생각 그만하고 자. 머리 비우게 도와줘, 내가?”
“아니. 내가 알아서 비우고 잘게.”
본디 빈말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 무슨 짓이라도 할까 싶어 다급하게 답하니 그는 픽 비웃곤 다시 몸을 눕혔다.
“자라.”
“……응.”
조용한 인사를 끝으로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직전의 파랑이 거짓인 양 고요해졌다. 그에 반해 채현의 머릿속은 삽시에 소란스러워졌다. 서윤채의 고백이 연신 파동을 일으켰다. 찰나의 놀라움이 가시자 차례를 잃고 뒤엉킨 감정이 뒤죽박죽 밀려왔다.
좋아한다고…….
기억은 자꾸만 그가 진심을 말하던 순간으로 흘렀다. 어디 그뿐일까. 자연히 반복해 곱씹게 됐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목소리는 어떠했는지…….
그 끝엔 상상만으로도 숨이 가빠져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정작 상대는 직전의 고백이 거짓인 양 고른 숨소리를 흘리며 자고 있었는데도.
……잠이 오나. 난 처음 감정을 깨달았을 당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것 같은데.
“…….”
이불을 방패처럼 두른 채현은 서윤채를 바라보고 누워 눈을 끔뻑였다. 계속해 떠올리고 생각해 봐도 믿기질 않았다. 아니, 현실감이 없단 말이 정확하리라. 서윤채가 제게 고백을 했다니. 차라리 꿈을 꾸고 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을 듯했다.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건가. 답해 줄 이 없는 질문을 거듭 되뇌던 채현은, 서윤채가 몸을 움직인 순간 지레 찔려 시선을 거두고 자는 척을 했다.
그 뒤로는 동이 터 올 때까지 긴장 어린 호흡만을 반복했다. 익숙지 않은 떨림에 휩싸인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늦은 새벽을 흘려보냈다.
날이 밝고 나선 몰래 그의 집을 빠져나왔다. 잠시라도 혼자 남아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으니. 물론 서윤채가 놀랄까 봐 ‘도망가는 거 아니야. 연락할게.’ 쪽지를 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후 정신을 부여잡고 학교로 향했으나, 기계적으로 일과를 처리하듯 행한 행동의 결과는 뻔했다.
강의는 들어도 들은 게 아니었다. 필기는 드문드문 되어 있었고 머릿속에 남은 것은 전무했다. 이미 혼이 반쯤 빠진 채여서 무언가 제대로 소화할 여력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윤채에게서 오는 연락이 없다는 거였다.
강의가 다 끝난 뒤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과 선배가 밥이나 먹자며 붙잡았지만 몸 상태를 핑계로 제안을 물렸다. 그저 아늑한 제 공간으로 돌아가 안정을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고 쉽게 이루어지는 법 없는 바람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집으로 향한 채현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지난밤까지 함께 있던, 제게 고백을 한 서윤채가 눈에 보였으므로.
“…….”
그는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뒤로 보이는 날이 좋아서일까. 입가에 미소를 띤 낯이 근사해서일까. 그저 멋있어 보이기만 했다.
“……왜 여기 있어?”
“네가 내뺐길래.”
“도망친 거 아니라고 쪽지 적어 뒀는데…….”
“언제 연락한단 소리는 없더라고.”
“곧 하려고 했어. 진짜로.”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서윤채는 이내 ‘권채현.’ 작게 호명했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응.”
“겁먹은 애한테 바락바락 연애하자고 우기는 건 멋없지 않냐? 난 그러기 싫거든.”
“……어?”
“그러니까 네 마음이 바뀌면 얘기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 걸까. 채현은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말하던 이는 어느새 진지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며. 이제부터 해 보면 되지. 그러다가 이젠 괜찮겠다 싶을 때쯤 말해 주라. 뭐라고 하든 알아들을 테니까. 내가 네 생각을 모를까.”
“……그래도 안 바뀌면?”
“짝사랑 좀 하지, 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서윤채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그게 전부인 것처럼. 짝사랑이라는 말과 세상에서 제일 안 어울리는 사람이 그리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든 미련 따위 갖지 않는 이가 지금은 달리 행동하는 듯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 안 싫다며.”
“…….”
“익숙해져.”
무엇에 익숙해지라는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달라질 앞으로의 일상을 얘기하는 것일 테다. 지금껏 누려 왔던 당연한 하루와는 결이 다른 시간을 말하는 것일 테고. 채현은 쉬이 그려지지 않는 모습을 떠올리다 서윤채를 눈에 담았다. 빤한 시선이 흔들림 없이 쏟아졌다.
“연락 씹지 말고.”
그 끝에서 서윤채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 * *
집 앞에 찾아왔던 서윤채는 더 머무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진정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듯 미련 없이 굴었다. 꼭 예견된 혼란을 미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밥은 다음에 먹자. 들어가서 쉬어라.’
연신 파랑이 이는 듯했던 상황은 말 한마디로 마무리됐다. 끝인사를 남긴 서윤채는 제자리에 서서 어서 들어가라 고갯짓하기만 했다.
결국 그의 말을 따라 걸음을 물리긴 했지만, 신경은 무뎌지지 않았다. 또 한 번 날이 저물고 밝아 와 하루가 시작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아…….”
정해진 수순인 양 잠을 설치고 눈을 뜬 채현은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내내 서윤채만 떠올려서인지, 꿈에서까지 그를 만났다. 당장만 해도 흰 벽지에 그가 그려지는 듯했다.
“미친…….”
사춘기를 겪는 철모르는 아이도 아닌데 이러고 있는 꼴이라니. 그 옛날 언젠가가 떠올라 한숨을 닮은 웃음이 삐져나왔다. 고백한 건 상대인데 어쩐지 제가 평정을 잃는 기분이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상황을 점쳐 보았다. 제 뜻을 존중해 준 서윤채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운 한편, 낯섦이 주는 어색함이 밀려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연애.”
서윤채와 자신을 한데 묶을 단어로 어울리기나 하던가. 쉬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무얼 떠올려 보기도 전에 긴장이 차올라 끙끙대기 일쑤였다.
깊이 내려앉은 새벽녘. 그리하며 홀로 고군분투했는데 어느덧 아침 해가 밝았다. 마른세수하며 돌아누운 채현은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새까맣던 화면이 밝아진 건 그와 동시였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예상대로 서윤채였다.
‘익숙해져.’
신신당부하듯 말하더니 직접 익숙해지게끔 도와주려는 심산인 듯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아침부터 연락을 해 올 리 없었으니까. 목을 가다듬은 채현은 천천히 수신 버튼을 눌렀다.
― 아직도 처자냐.
귓가에 갖다 댄 핸드폰 너머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자냐고……. 숨죽여 전화를 받은 채현은 고갤 갸웃하며 눈을 깜빡였다. 이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의 말투가 맞는 건가. 찰나 의문이 들었지만, 그러면서도 한결같은 모습에 공연히 입매가 간지러워졌다.
― 뭘 웃어.
호흡하듯 웃자, 장난기를 덧댄 나지막한 타박이 들렸다. 따라 웃고 있는 상대가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냥, 네 말투는 변함이 없다 싶어서…….”
― 갑자기 변하면 너 놀라.
“내가 그런 걸로 왜 놀라.”
― 우리 채현이 잘 잤어?
“아니, 무슨…….”
― 거봐. 놀라잖아.
서윤채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뻔뻔하게 굴었다. 정말 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말을 저리도 태연하게 하다니. 홀로 낯간지러워진 채현은 깜짝 놀라 눈을 확 떴다가 베개에 뺨을 문댔다. 귓가를 살살 간질였던 다정한 목소리가 지금도 살갗을 자극하는 기분이었다.
― 5분 더 자려다 지각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서 준비해. 아침 챙겨 먹고.
“……너는 먹었어? 팔은 어때. 생활하기 불편하지 않아?”
― 불편하다고 하면 네가 와 주려고?
“어? 아니, 못 갈 건 없는데…….”
아픈 친구를 도와주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서윤채가 제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었고. 다만 그의 집에서 단둘이 머무는 상황이 의식돼 긴장이 차올랐다. 서로 고백을 주고받은 사이기도 했으니. 망설이는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상대는 먼저 실소를 흘리며 침묵을 끊어 냈다.
― 됐다. 너 오면 신경 쓰이기만 하지. 팔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정신 차렸어?
“어? 응.”
― 그럼 이제 끊어.
“응. 너도 아침 챙겨 먹고.”
― 오냐.
먼저 전화를 끊은 채현은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키다 핸드폰 화면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어둡게 물든 액정에 비친 자신은 몹시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아……. 침음하듯 목을 울리고선 핸드폰을 휙 내던지고 베개 위로 엎어졌다. 매번 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던 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끊을 때까지 기다려 주다니. 이러한 변화가 저를 향한 서윤채의 마음을 말하는 듯해 기분이 이상했다. 거기에 더해…….
“…….”
다정히 아침 인사를 전하던 그 음성이 잊히질 않았다. 수없이 들은 그 호칭이 무어라고 심장을 뛰게 하는지. 꼭 귓가에 대고 속삭인 느낌이라 온몸이 저릿할 만큼 소름이 돋았다.
“아, 진짜…….”
괴로움에 몸부림치듯 이불을 꽉 쥐었던 채현은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목덜미와 귓가엔 이미 열이 오른 채였다.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손끝이 저려 오고 입이 바짝 말랐다.
“하…….”
이른 아침부터 혼이 쏙 빠진 기분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일찍 정신 차리고 일어날 수 있긴 했지만. 멍한 얼굴을 한 채현은 실소를 흘리다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나갈 채비를 마친 뒤엔 곧바로 학교로 출발했다. 한 달간 듣는 계절 학기다 보니 평일 내내 가야만 했다. 조금 번거롭고 피곤하긴 했지만 빨리 끝나 나쁘진 않았다.
“아, 더워…….”
쨍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따사롭기보단 뜨겁게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채현은 한여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거리를 걸으며 곰곰이 머릴 굴렸다. 날이 더워졌다는 건 서윤채의 생일이 가까워졌단 소리였다. 셈해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채였다.
무얼 해 주면 좋을까. 필요한 게 있냐고 물어볼까. 선물 정도는 챙겨 줘도 괜찮겠지. 아니. 어차피 다 아니까 상관없으려나.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생각을 이어 가던 채현은 일순 호흡하듯 웃으며 멈칫했다. 서윤채가 없어도 서윤채만 떠올리고 있는 제 모습이 퍽 웃겼다.
등굣길에 올라 얻은 고민은 강의를 들을 때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교수님 말씀 한 번. 서윤채에게 줄 선물 고민 한 번. 필기 한 번……. 여러 가지를 한 번에 수행하느라 정신없게 흘렀다.
그 탓인지 강의가 끝나니 진이 다 빠져 있었다. 밥때를 지나쳐 상당히 굶주린 상태이기도 했고. 채현은 과방 소파에 늘어져 함께 있던 사람들과 점심 메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다.
오전 이후로 잠잠했던 핸드폰이 길게 울린 건 그즈음이었다. 화면에 떠오른 익숙한 번호와 이름을 확인한 채현은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 수업 끝났냐?
“응. 이제 밥 먹으려고. 너는?”
도로변 근처에 있는 건지 차 소리가 밀려왔다. 밖인가. 안 그래도 과방이 어수선해 통화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구긴 채현은 스피커에 귀를 더 바짝 붙였다.
― 나도. 누구랑 먹어.
“나 그냥 애들이랑? 아직 수업 안 끝난 애도 있어서 얘기해 봐야 알아.”
― 그러면 나랑 먹어.
“어?”
― 나랑 밥 먹자. 맛있는 거 사 줄게.
살살 꼬여 내듯 은근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너 어딘데?”
― 너희 학교 근처.
“……왜?”
― 알면서 물어보냐? 듣고 싶은 거면 얘기하고.
“아니, 어… 그럼 잠깐만, 금방 나갈게.”
알겠다는 상대의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삽시에 다급해진 채현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대충 이야기하고 공간을 빠져나왔다.
찾던 이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거리를 두고 바로 마주쳤다. 상대는 느릿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자신이 갈 테니 움직일 필요가 없을 텐데 계속해 발을 내디뎠다.
지척에서 본 그는 오늘따라 아주 근사했다. 채현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서윤채를 멍하니 살폈다. 기꺼이 관찰 대상이 되어 주던 이는 수 초가 흐른 뒤에야 씩 웃어 보였다.
“……어디 갔다 와?”
“나? 너 보러 왔지.”
어쩐지 행동이 어색해지는 듯해 침묵을 깰 겸 던진 말인데 썩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서윤채의 말 한마디에 더 의식이 되고 멋쩍어졌으므로.
“왜. 오늘따라 내가 더 잘나 보여?”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사실이잖아. 뭐, 신경을 더 쓰기도 했고.”
약속이 있던 것도 아닌데 신경을 쓴 거면 저 때문인 걸까.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채현은 혀를 내어 입술을 적시며 서윤채를 힐끔댔다. 이렇다 할 틈도 없이 곧장 시선이 얽혀 들었다.
“웃기는. 비웃지 마. 나도 어이가 없으니까.”
가벼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의 태도는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호했다. 다만 눈빛만큼은 감히 오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진중했다.
“이상하지. 너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게.”
“…….”
“잘 좀 봐줘.”
담백하게 대꾸한 서윤채는 자연스레 어깨동무해 오며 방향을 틀어 걸었다. 몸이 바짝 맞닿아 순간적으로 흠칫 떨렸지만, 채현은 꿋꿋하게 정면만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뭐 먹고 싶어.”
“……뼈에 좋은 음식?”
상대는 바로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비웃다가 ‘내가 알아서 고를게.’ 낮게 중얼거렸다.
“오후 일정 있어?”
“나 과 사람들이랑 술 마시기로 했어.”
“권채현이랑 놀기 빡세네. 내일은 나랑 놀아.”
얕게 고개를 끄덕인 채현은 서윤채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냥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걸까. 자신 때문에 여기까지 온 사람인데, 헛걸음하게 만들어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 때문에 온 건데, 밥만 먹고 가도 돼?”
“너한테 말하고 온 것도 아닌데, 뭐. 네 시간 뺏을 생각 없어. 간섭할 자격도 없고.”
아직은. 마침표를 찍듯 말을 덧붙인 이가 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길이 맞닿자 장난스러운 기색을 띠며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게 해 줄래?”
은근히 상기시키는 그의 언행에 채현은 ‘뭐래…….’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걸음을 옮겼다. 실없이 굴던 서윤채도 당연하다는 듯 속도를 맞춰 발을 내디뎠다.
“팔은 좀 괜찮아? 아프진 않고?”
“멀쩡해. 지금 너랑 팔씨름해도 될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대기에 무시하자, 그는 바람 빠지듯 웃음을 터뜨렸다.
“대꾸 안 하는 거 봐라. 야박하기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향한 곳은 한식당이었다. 채현은 직원분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으며 슬쩍 주변을 살폈다. 어쩐지 서윤채와 안 어울리는 곳이다 싶으면서도 어울려서 신기했다. 한 번에 상이 다 차려진 뒤 서윤채는 까딱 고갯짓하며 ‘많이 먹어라.’ 이야기했다.
“넌 혼자 두면 빵 쪼가리나 처먹고 다녀서 안 되겠어.”
하여간 손 많이 가지. 그는 본인 팔 다친 건 안중에도 없는지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만 쏟아 냈다. 채현은 대충 고갤 끄덕이며 그를 곁눈질했다. 평소와 똑같은 그의 태도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행동 하나하나가 의식되는 건 저뿐인가 싶었다.
“수업 잘 들었어?”
질문엔 무어라 답하는 대신 긍정만 표했다. 실은 네 생일 선물을 고민하느라 반 이상을 놓쳤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땠어.”
“똑같지, 뭐. 졸리고 지루하고.”
“혼자 들어?”
“같이 듣는 선배 있어.”
“교수님은.”
“쫌 빡세긴 한데 학점은 잘 주신대.”
“그럼 무조건 A+ 받아 와라. 계절까지 들으면서 이상한 성적 받아 오지 말고.”
서윤채는 별거 없는 일상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되는 양 귀를 기울였다. 관심을 지니지 않는 이상 결코 내보일 수 없는 태도에 채현은 또 기분이 묘해졌다. 신경을 곤두세우기는커녕, 여유롭기만 해 아무렇지 않은 건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거기에 더해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상황에 새삼스러운 감상이 들기도 했다.
단둘이 밥을 먹은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함께 사는 가족과 밥을 먹는 게 당연하듯 서윤채와의 식사도 그랬으니까. 한데 지금은 불쑥불쑥 다른 느낌이 치밀었다. 그 간극이 신기하면서도 얼떨떨했다. 변함이 없는데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쉬이 와닿지 않았다.
“…….”
눈만 살짝 굴려 서윤채를 바라보던 채현은 그를 따라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그릇이 비는 속도는 얼추 비슷했다. 제가 먹는 속도가 느리다는 사실을 찰나 잊을 정도였다. 어쩜 이리도 한결같이 행동할 수가 있는지. 서윤채의 숨죽인 다정에 마음이 부푸는 듯했다.
“왜.”
“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찰나 멈칫하는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인 채현은 밥 한술을 크게 떠먹었다. 달짝지근한 느낌이 혀 밑을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이후론 서윤채의 배려를 모방해 티 안 나게 반찬을 밀어 주었다. 왼쪽 팔이 불편할 테니 먹기 편한 쪽으로 놓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대는 이따금 피식대며 천천히 손을 놀렸다.
여유로이 식사를 끝내고 나온 뒤엔 큰길까지 함께 걸었다. 헤어지는 길목에 다다르자, 그는 학교까지 데려다주냐고 물어 왔다. 진심으로 그리할 사람임을 알아 채현은 한사코 거절했다.
“집 갈 때 전화해.”
“왜?”
“얼굴 보게.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럼 전화해. 데려다줄 테니까.”
아무래도 술자리다 보니 꽤 늦어질 듯해 답을 흐리는데 상대가 말을 가로채고 이야기했다. 망설이는 기색 따위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강경한 태도에 채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갈라져 각자 걸음을 옮겼다. 혼자 거리를 걷게 되자 또 버릇처럼 서윤채가 떠올랐다. 직전까지 함께 있던 사람인데도 전혀 지겹단 생각이 안 들었다.
“…….”
이제부터 어쩌면 좋을까. 서윤채는 예와 다름없이 굴면서도 애정을 드러내는 걸 서슴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어조로 얼굴을 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계속 이 상태로 지내는 건 불가능했다. 이도 저도 아닌 태도를 보이며 서윤채에게 상처 주고 싶지도 않았고.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한 번도 지금 같은 상황을 바란 적 없다면서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어 퍽 웃겼다. 서윤채의 말마따나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는 관계라면…….
제 상태를 되돌아보며 과방으로 향한 채현은 사람들과 함께 일찍 술집으로 이동했다. 일행은 해 떠 있을 때 시작하는 술이 진짜라며 거침없이 주문을 넣었다. 꼭 술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잔을 나누기도 했다.
“채현, 잔 있어?”
“네. 저 아직 있어요.”
채현은 서윤채와 만나야 하니 적당히 조절해 가며 마셨다. 한데 원래라면 마냥 즐겁기만 할 자리가 어쩐지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그저 핸드폰만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버틸 때까지 버티던 채현은 고민 끝에 짐을 챙겨 술집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선 서윤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연락해도 되는 건지 찰나 망설임이 일었지만 손가락을 움직였다.
― 어.
서윤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지고 나서야 들렸다. 짧은 대답 뒤로 주변의 소음도 밀려왔다. 술 마시러 갔구나. 바로 알아챈 채현은 그도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갔음을 직감했다.
“바빠?”
― 아니. 안 바빠. 잘 놀고 있냐?
“술 마시러 갔어?”
― 술을 마시러 온 건 아니고 그냥 얼굴 보러.
“알겠어. 그럼 계속 놀아. 끊을게.”
서윤채가 그랬듯 제게도 간섭할 자격 따위는 없었다. 그의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 풀죽은 목소리로 이야기한 채현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 본인 할 말 다 했다고 끊는 꼴 봐라. 기다려.
상대는 꼭 그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끊지 말라고 낮게 뇌까렸다. 소란스럽던 핸드폰 너머는 머지않아 조용해졌다. 통화할 곳을 찾아 밖으로 나온 듯싶었다.
― 왜 안 놀고.
“이제 집에 가려고.”
― 지금?
살짝 놀라며 되물은 그는 시간을 확인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 너 어디냐?
“나 학교 근처.”
― 30분만 기다려. 택시 타면 금방 가니까. 술 적당히 마시고 있고.
“나 나왔는데.”
― 뭐?
상대는 직전보다 조금 더 격하게 반응을 보였다. 채현은 그 소릴 들으며 사람이 바글바글한 먹자골목을 느릿느릿 걸었다. 스쳐 지나가는 대다수가 취객인 탓인지 몸에 힘이 들어갔다.
― 왜 벌써 나와. 그럼 지금 어딘데. 혼자야?
“나 그냥 걷고 있어. 혼자 집 갈 수 있으니까 계속 놀아, 윤채야. 나 괜찮아. 다음에 보자.”
― 내가 안 괜찮아. 정신 붙잡고 있어 봐. 바로 갈 테니까.
서윤채는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 그를 붙잡는 타인의 소리. 이런저런 주변 소음이 여과 없이 들렸다. 묵묵히 귀를 기울이며 걷던 채현은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야외 테이블에 몸을 앉혔다. 그때까지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 택시 탔어.
“전화 안 끊어?”
― 끊었으면 좋겠어?
생각해 보면 서윤채는 늘 선택권을 제게 넘겨주곤 했다. 지금도 별다를 바는 없는 듯했고. 채현은 그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고갤 가로젓고 ‘아니.’ 작게 중얼거렸다.
― 금방 가니까 이대로 있어.
“응. 근데 너 친구들이 화내면 어떡해. 나왔어도 돼?”
― 내 알 반가.
미련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가차 없는 말투였다. 한결같은 그 태도가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살짝 걱정이 됐다.
“너 그러다 욕먹어. 네 친구들이 너 재수 없다고 같이 안 놀아 줄 수도…….”
― 지금도 씹고 있을걸.
“잘 좀 해. 괜히 욕먹고 다니지 말고…….”
― 나 걱정해? 네가 나 놀아 주면 되겠네. 너는 나랑 평생 볼 거니까.
그는 냉정히 말한 적 따위 없다는 듯 설핏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가벼이 감싸 안는 듯했다. 채현은 불쑥 치미는 갈증에 대답 않고 음료수만 마셨다.
― 하여튼 불리하면 입 다물지.
서윤채는 대답을 종용하는 대신 장난처럼 타박하기만 했다. 이후로 대화는 이어지다 끊겼다 다시 이어지길 반복했다. 정적이 내려앉는 순간도 꽤 있었는데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서윤채를 좋아하게 된 후로는 늘 의식이 돼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살살 부는 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훑어서인지……. 그저 나쁘지 않다 싶었다.
“윤채야, 언제 와?”
그래서였다. 차마 보고 싶다 말하지 못하고 그런 식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은. 서윤채가 충동적으로 연락했었다 이야기한 것이 이제야 온전히 이해가 됐다. 저도 그러고 있는 꼴이었으니.
― 이제 내려.
이 근방에서 택시가 설 곳이라면 뻔했다. 채현은 다 마신 음료를 버리고 그쪽으로 향했다. 아까와 달리 걸음 속도는 몹시 빨랐다.
핸드폰 너머 소리를 들으며 얼마간 움직였을까. 찾던 이가 바로 눈에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입매가 간지럽게 풀어졌다. 때마침 고개를 돌린 서윤채는 잠시 멈칫하다 성큼 발을 내디뎠다.
“생각보다 멀쩡한데.”
시선을 떼지 않고 다가온 이는 자연스럽게 곁에 서더니 자신을 이끌었다. 본인 학교 근처도 아니면서 몇 번 와 봤다고 그새 지리를 다 파악한 듯했다.
“너도 술 마셨어?”
“입만 적신 정도.”
집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번화가를 벗어나 주택가로 들어서니 밤과 어울리는 고요가 밀려왔다. 밤거리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를 듣던 채현은 문득 의문이 들어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나 왜 데려다줘?”
“낮엔 계절 듣는다고 바쁘고 밤엔 술 처먹느라 바쁘고. 어쩌겠냐. 같이 있고 싶은데.”
상대는 일말의 틈도 없이 즉답했다. 당황은 채현의 몫이었다. 이 정도로 솔직히 말할 줄은 몰랐던 터라 말문이 막혔다. 그를 내려다본 서윤채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네가 나랑 다시 같이 살아 줄래?”
“…….”
“이거 봐. 싫다는데 어쩌겠어. 아쉬운 사람이 움직여야지.”
“그런 거 아니야.”
“퍽이나.”
아옹다옹 대화를 나누며 얼마간 걸었을까. 환히 불이 켜진 편의점 앞에서 서윤채는 ‘잠깐 있어 봐.’ 이야기하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거침없이 움직이는 그가 보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엔 흰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자.”
“뭐야?”
“술 마셔서 머리 아플 거 아니야. 집 가서 마셔.”
봉투 안에는 학생 때부터 즐겨 마시던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해장용인 건지 컵라면과 아이스크림도 같이 담겨 있었고. 물끄러미 그를 보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아프면 이 음료를 찾곤 했는데,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고마워.”
“오냐.”
자연히 봉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와 만나기 전 이미 한 통을 다 마셨다는 걸 잊을 만큼 기쁘고 고마웠다. 가슴께가 질리지도 않고 울렁이는 건 덤이었다.
그 뒤로 수 분을 더 걷자 어느덧 오피스텔 앞이었다. 서윤채는 건물 앞에 서서 더 움직이지 않고 어서 들어가라 이야기했다. 가만히 바라만 보니 고갤 비스듬히 기울이며 재차 소리를 냈다.
“뭐. 집 안까지 데려다줘?”
“……어?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당황을 해.”
깜짝 놀라 삐걱거리는 꼴을 본 서윤채는 가차 없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발을 움직여 스니커즈 앞 코를 가볍게 툭 찼다.
“초대는 다음에 해 주고. 가, 얼른. 들어가는 거 보고 가게.”
“어,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너도 조심히 가.”
채현은 얕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윤채를 응시하다 느릿느릿 집을 향해 걸었다. 상대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걸음걸이도 어색해지는 듯했다.
“…….”
집 안으로 들어선 뒤엔 불부터 환히 밝혔다.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씻고 누울 생각이었다. 묘한 예감이 들지만 않았더라면. 채현은 유독 눈에 밟히는 창가를 바라보다 결국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창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는 동시였다. 떠나지 않고 여전히 머물고 있는 서윤채가 눈에 보인 것은. 그는 구석진 곳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있었다. 일방적인 시선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그쳤다. 무심히 연기를 내뱉던 서윤채가 고개를 돌리며 눈이 마주친 덕이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그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그대로 내리고 전화를 걸어왔다.
― 뭘 훔쳐보고 있어.
“왜 안 가?”
― 이제 가려고 했어.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이는 찰나의 침묵 끝에 걸음을 뗐다.
― 들어가서 자라. 덥다고 에어컨 세게 틀고 자지 말고.
“응.”
속삭임에 가까운 대답을 흘렸는데도 상대에겐 충분했는지 가벼이 웃음을 터뜨렸다. 듣기 좋은 소리가 잘게 부서지며 귓가에 틀어박혔다. 간질간질 이상한 기분이 들며 손끝이 저렸다.
― 이제 끊어.
“응. 조심히 가.”
― 어.
상대의 대답을 듣고 끊으려던 찰나 ‘잘 자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똑같이 인사를 하려 했으나 전화는 이미 끊긴 뒤였다. 밖에 서 있던 서윤채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밖을 살핀 채현은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욕실로 향했다. 몸을 씻은 뒤엔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고민을 했다.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놓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결국은 메신저를 켜고 마음에 콕 박혀 사라지지 않는 이의 이름을 눌렀다.
1 오전 12:27 [너도잘자]
용기 내어 메시지를 보내곤 사라지지 않는 ‘1’ 자를 보다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어딘가 낯선 하루 끝에 찾아오는, 설렘을 닮은 감정을 애써 억누르면서.
* *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학생의 방학은 거기서 거기였다. 미뤄 뒀던 자격증 공부 혹은 아르바이트. 봉사와 공모전 등의 외부 활동. 여행……. 두 달이라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기 위해 다들 이것저것 하곤 했다. 채현도 이의 연장선으로 평일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교 근처 개인 카페 아르바이트는 과 선배가 소개해 준 자리였다. 아는 사람이 하는 곳인데 급하게 일할 사람을 찾는다고, 관심 있으면 얘기하라기에 냉큼 손을 들었다. 용돈도 받고 성적 장학금도 있어 돈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제가 쓸 돈은 직접 벌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더군다나 서윤채의 생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채였다. 기왕이면 좋은 걸 사 주고 싶단 욕심이 들었다. 일단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선물을 사고 월급으로 충당할 생각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는 벌써 꽤 시일이 흘렀다. 서윤채는 안 그래도 얼굴 볼 시간이 없는데 더 바빠지는 거냐며 못마땅해했다. 귀가 아플 만큼 하나하나 캐묻기까지 했다. 개인 카페인지. 믿을 만한 사람이 소개해 준 건지. 손님은 얼마나 있고 수당은 다 제대로 챙겨 주는지…….
‘나 애 아니야.’
‘누가 그걸 몰라? 그냥 걱정되니까 이러는 거지.’
성인에게 내보이기엔 유난스러운 걱정이었다. 다만 그 감정의 근간에 깔린 것이 애정이란 걸 알아 싫지 않았다. 아니. 외려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을 엿본 듯해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언젠가 한 번은 그가 손님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바로 근처에 자리를 잡은 서윤채는 태연하게 손을 살랑 흔들어 댔다.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한 채현은 직접 커피를 내려 가져다주었다.
‘너 안 바빠?’
‘바쁘지.’
‘근데 왜 여기 이러고 있어…….’
‘보고 싶으니까 이러고 있지.’
서윤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커피를 한 입 마시고 ‘오…….’ 감탄을 흘렸다. 눈을 살짝 치켜뜨고 씩 웃는 모습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시간 죽이지 말고 일 있으면 가. 연락할게.’
‘제일 알찬 시간 보내고 있는데 뭔 소릴 하시는 건지. 방해하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하세요.’
채현은 갈 생각이 전혀 없이 보이는 서윤채를 살피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했다. 태블릿으로 뭘 하는 듯했던 그는 얼마간 있다가 공간을 떠났다.
‘수고해라.’
일하는 내내 툭하면 시선이 얽히던 손님은 마지막까지 눈을 마주쳐 오다가 휭하니 떠났다. 그 후로 직접 카페에 찾아온 적은 없었다. 안심이 된 건지, 귀찮아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무사히 일을 마치고 귀갓길에 오른 참이었다. 미들 타임이었던 덕에 날은 아직 밝았다. 채현은 살살 부는 바람을 맞으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모든 일과를 마무리하고 맞이한 저녁은 상쾌했다. 핸드폰이 길게 울리며 엄마에게 전화가 온 건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 아들 밥 먹었어?
“아니, 아직. 집 가서 먹으려고. 엄마는?”
― 엄마는 먹었지. 시간 있으면 넘어올래? 윤채도 있는데.
“우리 집에?”
― 아니 윤채네 집.
오늘은 어쩐지 연락이 없다 싶더라니. 모레가 생일이니 미리 부모님을 뵈러 들어간 듯싶었다. 잠시 시간을 셈해 본 채현은 상대가 눈앞에 있는 양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은 가기 힘들 거 같고… 다음 주에 갈게요.”
내일까지 제출인 과제가 있어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노트북 앞에 앉아야만 했다. 얼굴 좀 자주 보이라 이야기한 엄마는 그 뒤로도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귓가에 댔던 핸드폰을 내리고 한 블록 정도 걸었을까. 징. 짧은 진동과 함께 서윤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유난 : 밥 먹지 말고 기다려] 오후 6:16
얼핏 봐도 통화 내용을 듣고 보낸 문자구나 싶었다. ‘왜?’ 답을 보낸 채현은 사라지지 않는 ‘1’ 자를 응시하다 화면을 검게 물들였다. 메시지 답변 대신 전화가 걸려 온 건 그와 동시였다.
― 집이야?
“아니. 아직 가는 중이야.”
― 나도.
복도에서 통화하듯 웅웅 울리던 상대의 소리는 곧이어 밖으로 나왔는지 깨끗하게 들렸다.
― 채현아, 나 초대해 주기로 했잖아. 오늘 해 주면 안 돼?
제가 초대를 하겠다고 제 입으로 말했던가.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런 적이 없는데, 상대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 초대해 주라. 맛있는 거 먹게 해 줄게.
“우리 주말에 만나기로 했잖아. 오늘도 봐?”
― 생일 전야제 모르냐?
“전야제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지.”
― 그럼 내일도 보든가.
생일에 전야제가 어디 있는지.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완강한 상대의 태도에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고민도 해 봤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집으로 초대하면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남는 거였다. 서윤채의 고백 이후 그런 적이 없어 더 바짝 얼어붙게 됐다.
“나 바빠서 너랑 못 놀아 줘…….”
― 누가 놀아 달래? 넌 네 할 일 해. 방해 안 되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방해가 아니라 신경이 쓰이는 건데. 입을 달싹대던 채현은 한숨을 쉬고 알겠다고만 했다. 애초에 의미 없는 걱정이었다. 서윤채를 거절할 재간 따위 제겐 없었으니까. 하물며 모레가 생일인 이였다. 안 그래도 민폐를 끼치고 있는데, 웬만하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도착할 때쯤 전화해.”
통화를 종료한 뒤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도착해선 숨 돌릴 틈 없이 환기를 시키고 룸 스프레이를 잔뜩 뿌렸다. 완벽한 손님맞이는 아니어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긴 싫었으니. 집이 심각하게 더럽진 않아 대충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두니 말끔했다.
채현은 대충 정리를 끝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돌리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좋아하는 걸 아는데 태연히 집에서 단둘이 만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고.
“…….”
잠시나마 긴장이 풀리자 몸이 서서히 뒤로 기울었다. 벌러덩 드러누운 채현은 천장을 응시하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찰나의 여유가 찾아들자 상념이 하나둘 피어올랐다.
근래의 하루하루는 어땠던가. 애정을 밝히고 나면 지난 17년과는 완전히 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이따금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 비집고 들어섰을 뿐.
생각만큼 두렵지 않았고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서윤채는 모든 걸 다 알고서도 자신을 이전과 똑같이 대해 주었다. 그뿐일까. 바란 적 없던 애정까지 손에 쥐여 주었는데.
이쯤 되니 불쑥 치미는 건 의아함이었다. 이토록 무서워하고 주춤거릴 일이었을까. 막연히 떠올렸던 상황과 실제는 달랐다. 서윤채의 말대로 겁낼 일이 아니었단 생각도 들었고. 어쩌면 제겐, 앞으로도 서윤채와 함께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다만 섣부른 결정은 저뿐 아니라 상대에게도 실례고 상처가 될 터였다. 과연 지금의 저를 서윤채와 마음을 나눌 준비가 되었다고 봐도 좋을까. 아직은 그 판단이 서질 않았다.
“…….”
지금은 그저 아슬아슬 서 있던 무언가가 기우는 기분이 들 뿐이었다. 그 언젠가 끝이 도래하고 있음을 직감했던 순간처럼. 하……. 한숨을 쉰 채현은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죽이다 과제나 할 겸 몸을 일으키던 때, 잠잠하던 핸드폰이 울렸다.
“응. 어디야?”
― 5분 뒤 도착.
상대와의 전화는 짧게 끝이 났다. 핸드폰을 휙 던진 채현은 시계와 현관을 번갈아 보았다. 어쩐지 5분이 더디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도착 예정 시간에 가까워졌을 무렵,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선 채현은 바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안녕.”
복도에 선 이는 가볍게 인사하며 입꼬리를 당겼다. 멀쩡한 오른쪽 손엔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대신 받아 주려 팔을 뻗자 됐다는 듯 어서 들어가라 고갯짓하기만 했다.
“들어가. 무거워.”
“팔도 아픈 애가 뭘 이렇게 많이 들고 다녀.”
“이쪽은 까딱없어. 거의 다 났기도 했고.”
가만 보니 본가에서 가져온 반찬인 듯싶었다. 한자리를 차지하고 짐을 푼 서윤채는 군더더기 없는 손짓으로 밥상을 차렸다.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뭘 하는 거냐 물을 타이밍을 놓쳤다.
“밥 먹고 해.”
“아니, 손님이 왜 이런 걸 해…. 오자마자 앉지도 않고.”
“애인 뒷바라지하려고.”
태연히 전해진 낮은 음성에 채현은 일순 멈칫했다. 뭘, 한다고……. 수 초가 흐르고 나서야 반응다운 반응을 내보일 수 있었다. 그마저도 귓가에 열이 올라 썩 정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누가… 애인이야.”
“실수. 말이 헛나왔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럽게 굴 뿐이었다. 본인 집인 양 자연스레 숟가락과 젓가락을 찾아와 놓아 주었다.
경계를 바짝 세운 채현은 서윤채를 기민하게 살폈다. 또 불시에 이상한 말을 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럴 기미는 안 보였다. 슬쩍 눈치를 보며 한술 떠먹은 음식은 몹시 맛있었다. 계속 바라보고 있던 듯 시선을 잡아챈 상대는 턱을 괴며 씩 웃었다.
“초대할 만하지?”
“이모가 만드신 거잖아.”
“나도 정성으로 차렸어.”
“고마워. 이모한테도 연락해야겠다.”
밥을 먹는 동안 서윤채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오디오를 채워 주었다. 팔 다친 걸 걸려서 한 소리를 들었다는 둥, 과외 하는 애새끼가 자주 보고 싶어 해 환장하겠다는 둥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나누었다. 그 덕인지 단둘이 있는데도 미리 걱정했던 것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너 자꾸 그러면 쫓아낼 거야.”
식사가 끝나고 나선 자꾸 본인이 치우려고 해 아옹다옹하기까지 했다. 강경히 막아선 채 으름장을 놓으니 서윤채는 킥킥대며 뜻을 굽혔다. 뒷정리 한번 하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인지. 진이 다 빠진 채현은 정돈을 마친 뒤 침대에 걸터앉은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안 가?”
“갔으면 좋겠어?”
“나 지금 바빠서 너랑 못 놀아.”
“알아. 너 다음 주에 시험이잖아. 할 일 해. 그냥 나 혼자 너 조금만 보다가 집 갈 테니까.”
“시험인 거 어떻게 알아?”
제가 말한 적이 있었던가. 깜짝 놀란 채현이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는 사이, 서윤채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마디 말보다 더 크게 와닿는 반응이었다.
“있잖아.”
서윤채는 듣고 있다는 듯, 말하라는 듯 눈을 마주쳐 왔다. 채현은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고민 끝에 머릿속을 헤집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너는 나 안 답답해?”
그는 무슨 뜻으로 이야기한 건지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깜빡이다 입꼬리를 당겼다.
“너 하는 꼴 보면 속 터질 때 있지. 손이 좀 많이 가야지.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긴 하다만.”
“그게 아니라…….”
“알아. 네가 뭔 말 하는 건지.”
잠시 말을 끊은 상대는 ‘음…….’ 목을 울리며 빤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보내왔다.
“이게 답답할 문제인가? 너랑 내 판단이 같을 수가 없잖아. 천천히 맞춰 가는 거지.”
“…….”
“그렇게 따지면 네 입장에선 내가 성급한 거 아니야?”
아. 숨죽여 외마디 감탄을 흘린 채현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거짓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서윤채의 태도가 새삼스레 마음을 울리는 듯했다. 연애할 때의 서윤채는 이렇겠구나,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낯선 깨달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채현아. 네가 나랑 연애가 하고 싶을 때 말을 해 줬으면 하는 거지. 당장 뭘 하자고 강요하는 건 아니야.”
“…….”
“내가 혹시 부담 주고 있냐? 연애에 미친 새끼 같아?”
부담은커녕 위안만 주는 상대였다. 고갤 가로젓자, 서윤채는 만면 가득 근사한 미소를 띠었다.
“됐어, 그럼. 알아서 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해.”
정말 그뿐이라는 듯, 깔끔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 * *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기분으로 맞이한 주말은 몹시 화창했다. 꼭 이날 태어난 이를 닮기라도 한 듯. 하늘은 새파랗게 빛나고 살살 부는 바람은 기분 좋은 냄새를 가득 싣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활짝 연 채현은 편히 풀어진 얼굴로 바깥 공기를 쐬었다. 따사로운 햇볕에 잠기운은 슬슬 숨을 죽였다. 수 분을 그리 보내고선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눌러 본 서윤채와의 대화창은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12시 2분에 보낸 제 축하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물끄러미 활자를 곱씹던 채현은 제 문자를 보고 피식댔다. 실은 55분부터 기다렸으면서, 정각에 보내면 신경 쓴 티가 날까 봐 결국은 늦게 보낸 꼴이 퍽 웃겼다.
메시지를 확인한 서윤채는 똑같이 답변을 보내는 대신 전화를 걸어왔다.
― 축하해 줘서 고마워.
통화 연결음이 멎고 들린 상대의 목소리는 결코 요란스럽지 않았다. 늦은 밤 침대 속에서 책을 읽어 주듯 조용하고 조곤조곤했다. 듣기 좋은 한편,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느낌이라 소름이 돋았다. 몸부림치듯 빙글 돌아누워 커다란 바디 필로우를 꽉 끌어안아야 했을 만큼.
‘문자로 답해도 되는데….’
― 팔이 아파서 보내기가 힘들어.
‘너 한 손으로 잘 치잖아.’
― 그랬나. 그럼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핑계 댄 걸로 해.
담백하게 늘어놓기엔 퍽 능청스러운 말이었다. 채현은 베개에 뺨을 문대며 입만 달싹였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뭐라고 답을 하고 싶은지 역시도.
― 뭐 하고 있었어.
침묵을 깨고 먼저 소리를 낸 건 상대였다. 그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축하에 대한 인사가 용건이었다면 전화를 끊어도 될 텐데,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공부하다가 잠깐 쉬고 있었어. 너는?’
― 나도.
‘전야제 챙긴다면서 왜 안 놀고 집에 있어.’
―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낮게 들려온 말은 모호한 빛을 띠었다. 이런저런 해석을 해 보던 채현은 차마 저 때문이냐고 물을 수 없어 ‘아하…….’ 기계적으로 반응하기만 했다.
― 가서 공부해. 방해 안 할 테니까.
그를 알기라도 하듯 상대는 옅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리 상냥한 말씨가 아닌데도 다정하게 들리는 듯했다. 조금씩 밀려오던 졸음이 한순간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응. 너도 너무 늦게 자지 말고.’
― 오냐.
서윤채의 대답을 듣고 끊으려던 전화는 그가 ‘아.’ 소리를 내 조금 더 이어졌다.
― 내일 만나도 괜찮겠냐?
‘어? 응. 왜? 만나기로 약속한 거잖아.’
― 네 시험 신경 쓰여서. 무리해서 나오는 거면 말해. 계절 종강하고 만나도 되니까.
생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한 건 꽤 한참 전이었다. 시험이 있다지만 이 정도는 벼락치기로 어떻게든 될 거 같았다. 솔직히 말해 서윤채의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다.
‘생일은 지나고 챙기는 거 아니랬어. 난 괜찮아. 너야말로 나랑 놀아도 돼?’
― 너 아니면 누구랑 놀아. 그럼 저녁이나 먹자. 낮엔 네 시간 가져. 방해 안 할게.
결론이 나오자 통화는 바로 종료됐다. 귓가에서 핸드폰을 뗀 채현은 어두워진 화면에 비친 제 낯을 보고 멈칫했다. 집에 혼자 있을 땐 환히 웃은 적이 없는데 입매가 잔뜩 풀어진 채였다. 황당하고 그 이상으로 마음이 간질간질해 자신을 되돌아봐야만 했다.
“…….”
자기 직전까지 서윤채를 떠올렸는데, 날이 밝아도 상황은 똑같았다. 이 정도면 중증 아닌가. 헛웃음을 흘린 채현은 머릴 비워 낼 겸 욕실로 향했다. 여느 때보다 공들여 씻고 나온 뒤엔 집 안 청소를 하고 전공 책을 펼쳤다. 서윤채를 만나기 전 미리 할 일을 끝마쳐 둘 생각이었다.
시간은 조금 더디게 흘렀다. 꽤 지났으리라 확신하고 시계를 봐도 분침의 움직임이 미비했다. 그래서인지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괜히 더 마음이 울렁였다.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선 지체할 새 없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 놓칠세라 꽉 쥔 쇼핑백엔 서윤채에게 줄 선물이 들어 있었다. 무얼 주면 좋을까 며칠을 고심하다가 겨우 고른 지갑이었다. 지갑 선물을 할 적엔 그냥 주는 게 아니라기에 5만 원도 함께 넣어 두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니 이미 도착해 있는 서윤채가 보였다. 어찌 알았는지 바로 알아챈 그는 미소 지으며 곁으로 다가왔다.
지척에 와 선 서윤채는 오늘따라 멋있었다.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향 역시 좋았고.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을 받아 내던 채현은 버티기 힘들어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생일 축하해.”
“고맙다. 밥은. 점심 먹고 나왔어?”
“아점으로 대충 먹었어.”
“왜 대충 먹어.”
쯧 혀를 찬 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내보였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바라보길 잠시, 성큼 발을 내디디며 사이 간격을 좁혔다.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한쪽 팔이 완전히 붙은 모양새에 서윤채를 힐끗댔으나 아무렇지 않은 양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맛있는 거 사 줄게.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서라. 원래 생일인 사람이 사는 거야.”
차마 떨어지란 소리를 하지 못한 채현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문제는 걸을 때마다 간지럽게 스치는 손등이었다. 살짝만 손을 움직여도 바로 손가락이 엮일 정도였다.
의식이 되자 당연한 수순으로 긴장이 차올랐다. 피하자니 이후 상황이 신경 쓰였고 이대로 가자니 신경이 다 닳지 싶었다. 어떡하면 좋지. 하릴없이 입술만 질근대며 기계처럼 발을 뗐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횡단보도까지 향했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서윤채가 피할 새도 없이 불시에 손을 확 잡아 왔다. 화들짝 놀라 손을 빼내려 하니 한 번 더 꽉 고쳐 잡기까지 했다.
“뭘 자꾸 움찔대.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잖아.”
그는 손등을 엄지로 살살 문지르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어떤 상황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듯했다. 채현은 저를 빤히 보는 서윤채와 주변을 번갈아 응시했다.
“손잡고 싶은 거 참고 있는데 왜 자꾸 건드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일단 손 좀 놓고…….”
“왜? 난 일부러 잡은 건데.”
상대는 절대 안 놓을 것처럼 말하면서도 천천히 손을 놓아주었다. 곤란해하는 걸 알아 배려해 주듯이. 그러곤 느릿하게 손을 떼며 손등을 톡 건드렸다.
“손 한 번 잡는다고 큰일 생기는 거 아니야. 아무도 뭐라고 안 해.”
“…….”
“손잡고 싶으면 얘기해. 나는 언제든 환영.”
퍽 짓궂은 음색으로 속삭인 그는 ‘가자.’ 이야기하며 몸을 움직였다. 직전과는 달리 반보 떨어진 채로. 그 간격이 말해 주는 게 무엇인지 모르지 않아 입이 말랐다.
그렇게 얼마간 걸어 향한 곳은 소갈빗집이었다.
“우리 고기 먹어?”
“너 고기 제일 좋아하잖아.”
오늘만큼은 본인이 주인공인데도 제게 맞춰 주다니. 채현은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인 채 묵묵히 서윤채의 뒤를 따랐다.
식사는 그가 예약을 해 둔 덕에 한적한 자리에서 편히 할 수 있었다. 밥 한 공기를 뚝딱하고 나자 절로 입매가 간지럽게 풀어졌다. 서윤채도 마찬가지인지 시종일관 미소 띤 낯을 유지했다. 후식으로 나온 차까지 마신 그는 옆자리에 고이 모셔 둔 쇼핑백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건 언제 줄 거야?”
“어?”
“내 선물 아니야?”
안 그래도 언제 건네야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울까 고민했는데, 지금이구나 싶었다.
“최대한 네 취향인 걸로 골랐어.”
“우리 채현이가 뭘 샀을까.”
퍽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포장을 푼 그는 지갑을 확인하곤 멈칫했다.
“뭐 하러 이렇게 비싼 걸 샀어.”
“별로 안 비싸. 그리고 비싸도… 내가 너한테 이런 거 하나 못 사 주겠냐….”
우물우물 이야기하니, 서윤채는 나사가 하나 풀린 사람처럼 실없이 굴며 지갑을 살폈다. 안을 살펴보곤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채현아, 나 용돈 줘?”
“지갑 줄 땐 돈 채워서 주는 거래. 나중에 또 줄 일 있으면 그땐 더 많이 넣어줄게.”
“아…….”
목을 울린 그는 돈을 꺼내 주섬주섬 만져 댔다. 뭘 하나 했더니 지폐로 종이접기를 해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예쁘게 접은 돈은 지갑 가장 앞쪽에 꽂아 두었다.
“왜 돈 가지고 장난을 쳐.”
“평생 간직하려고. 고맙다.”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서윤채의 모습에 채현도 덩달아 기분이 들떴다. 겸연쩍은 한편, 흐뭇하기도 해 그와 엇비슷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끄러미 시선을 흘리던 상대는 재차 입꼬리를 당겼다.
식당을 나온 뒤엔 날이 너무 좋아 조금 걸을 겸 한강으로 향했다.
한여름 주말 오후 한강 공원을 찾는 이는 많았다. 주위에서 밀려오는 소음 덕에 생기 넘치는 여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후덥지근하면서도 시원한 계절 바람이 계속해 뺨을 간질였다.
얼마간 주변을 걷고 나선 맥주 한 캔씩을 사 들고 목을 축였다. 워낙 날씨가 좋아서인지 안주가 따로 필요 없었다. 평소 술을 멀리하던 서윤채도 흔쾌히 어울려 주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날은 완전히 저물고 어둑해졌다. 오묘한 빛을 띠던 저녁 하늘이 밤의 장막으로 뒤덮였지만 그로도 꽤 운치가 있었다. 살살 불며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이 한몫했다.
채현은 평화로운 광경에 기분이 좋아져 실실대며 맥주를 홀짝였다. 서윤채와 눈이 마주친 건 젖은 입술을 혀로 핥을 무렵이었다.
“왜… 나를 봐?”
“그럼 내가 누굴 봐.”
상대는 좋은 경치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양 시선을 흘렸다. 직전까지 만끽하던 여름의 흔적이 찰나 잊힐 정도로 올곧은 눈빛이었다. 감히 다정하다 말을 붙일 만큼 정겨이 빛났고.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일순 숨이 턱 막힌 채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쓰레기를 챙겨 자리를 떴다. 잠시 진정시킬 겸 몸을 움직인 것인데 딱히 소용은 없었다. 후다닥 볼일을 보고 되돌아오던 차, 서윤채를 발견하자마자 행동에 제동이 걸려 멈춰 서야 했으니.
“…….”
서윤채는 무심한 낯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서윤채는 저와 있을 때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온전히 순간에 집중하듯.
예전엔 함께 있어도 핸드폰을 보곤 했는데……. 여러 감정이 들어 빤히 응시할 때쯤 고갤 돌린 서윤채와 시선이 맞닿았다. 무심했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한순간이었다. 채현은 그가 가까워짐에 따라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것을 흘렸다.
“시원하게 해결 못 했어? 표정이 묘한데.”
짓궂은 웃음과 함께 쏟아지는 익숙한 장난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생경해 심박동이 빨라졌다. 꼭 긴장이라도 한 양 가슴이 옥죄기도 했다.
“이제 집에 갈까.”
멍한 모습을 살피던 상대는 가벼운 투로 의사를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한강을 빠져나와 잡은 택시에 서윤채는 당연하다는 듯 함께 탑승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나눈 대화는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내린 뒤에야 시선이 오갔다.
“놀아 줘서 고맙다.”
채현은 오랜 침묵을 깨며 울린 감사 인사에 숨죽여 침음했다. 분명 다른 곳에서 오는 연락도 많았을 텐데 저와 있어 준 이다. 특별한 날 기꺼이 타인이 아닌 제게 시간을 써 주었고. 감사는 오히려 이쪽에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신은 여전히 그에게 조금은 더 각별한 사람인 건가. 그저 오랜 친구일 때와는 달리, 감히 애정을 품은 상태인데도. 땅바닥만 보던 채현은 저도 모르게 주먹 꽉 쥐었다 풀며 숨을 흘렸다.
연신 흔들대던 마음이 마침내 완전히 기우는 듯했다.
“윤채야.”
“어.”
“내가 너 좋아해. 알고 있겠지만.”
상대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란 듯했지만 우선 잠자코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채현은 편안한 낯으로 웃어 보였다. 짊어지고 있던 온갖 걱정과 감정의 잔재를 덜어 내니 이토록 개운했다.
“생각해 보니까, 맨정신에 제대로 고백한 적이 없더라고. 너는 해 줬는데.”
“…….”
“있잖아. 이따 밤에 비 온대.”
“어. 예보 봤어.”
낮은 목소리로 즉답한 서윤채가 무언가 직감한 듯 빤히 바라보았다.
“너희 집 여기서 멀잖아.”
정적 속에서 시선이 오갔다. 호흡이 약간 어긋나는 듯도 했다. 채현은 서윤채를 직시하며 손을 뻗었다. 순순히 손끝을 내준 서윤채는 맞닿은 손을 보다가 천천히 눈길을 끌어 올렸다. 기민하게 빛나는 눈빛이 흔들림 없이 와 닿았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채현은 뺨이 따갑도록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 내며 속삭였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살갗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듯했다.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다.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해졌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러지 않고선 영영 변하지 않을 테니까. 변함없는 태도로 자신을 기다려 주는 서윤채에게 못 할 짓일 테니까.
“우리 채현이가 날 시험하나…….”
서윤채는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길게 늘이며 손을 엮었다. 손끝만 겨우 닿았던 손은 어느덧 손깍지를 낀 채였다. 결코 떨어질 수 없게끔 단단하고 촘촘하게.
“아니면 내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는 건가.”
한층 더 낮아진 음성이 내려앉았다. 상대는 이미 무슨 상황인지 알아챈 듯싶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서윤채인 만큼 지금도 제게 일어난 심경의 변화를 눈치챘으리라.
채현은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이리 묻는 건 물러설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저 역시 그에 대해 잘 알기에 알 수 있었다.
“그냥…….”
아주 작고 짧은 한마디인데도 상대는 듣고 있다는 듯 눈을 마주쳐 왔다. 채현은 할 말을 고르며 그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새카만 눈동자에 묻어난 감정이 여실히 느껴지는 듯했다.
말없이 서로를 눈에 담기를 잠시, 불현듯 무언가 머리를 쿵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서윤채는 끝의 끝에선 언제나 지금처럼 자신을 봐 주었다. 그 옛날, 뒤처진 자신을 찾아 홀로 달려와 주던 꼬꼬마 시절부터.
채현은 괜히 벅찬 마음이 들어 심호흡하듯 숨을 가다듬었다. 꼭꼭 간직해 오던 진심을 처음으로 온전히 제 뜻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만큼 조심스레 전하고 싶었다.
“네가 그랬잖아. 말해 달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서윤채였다. 언제고 제게 있어 가장 큰 의미를 지니던 서윤채. 결국은 이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하는 거야. 이제 괜찮을 거 같아서. 네 말대로… 익숙해졌나 봐.”
“…….”
“손도 그래서 잡았어.”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싣자, 가만히 있던 서윤채가 길게 숨을 흘렸다. 그 사이로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 섞여 새어 나왔다. 그는 말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채현은 그의 눈동자에 제 모습이 새겨져 보이는 듯해 멋쩍어졌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침묵이 내려앉아 더욱 그랬다. 자신을 보는 서윤채의 표정이 낯선 것도 한몫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용기를 냈다지만 여전히 두렵긴 했다. 순간적으로 덜컥 겁이 나기도 했고. 혹시 이제 와 뻔뻔하게 고백해서 기분이 상했나. 성난 표정은 아닌데 말이 없어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나 숨넘어갈 거 같으니까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 주면 안 돼?”
“어떻게 아무 말을 해. 귀한 생일 선물을 줬는데.”
물끄러미 지켜보던 서윤채는 그제야 손을 꽉 고쳐 잡으며 속삭였다. 아……. 바람 빠지듯 웃으며 목을 울리는 모습에선 이런저런 복합적인 감정이 묻어나는 듯했다.
“우리 채현이는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그는 붙잡은 손을 들어 보이더니 살살 흔들어 댔다. 애들 장난 같은 몸짓인데 몹시 다정했다. 그러한 행동의 끝에선 불시에 힘을 주면서 확 끌어당겼다.
깜짝 놀란 채현이 몸에 힘을 꼿꼿하게 주었지만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워졌다. 서윤채가 상체를 숙이며 고개를 가까이 해 더더욱. 갈피를 잃은 시선은 어쩔 도리 없이 그의 입술로 떨어졌다. 유독 붉은빛을 띠고 촉촉해 보이는 입술로.
설마. 벌써. 너무 빠른데. 자연히 예상되는 다음 행동이 그려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감쳐물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려니, 상대가 이마를 콩 부딪쳐 왔다.
“또 혼자 앞서갔지.”
“뭐가…….”
“안 해. 기대한 거면 미안하고.”
“기대 안 했거든.”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했던 서윤채는 그저 바람에 날려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채현은 살랑 스치는 다정한 손짓을 받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맞닿자 그는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눈짓했다.
“……근데 왜 안 해?”
“왜. 막상 안 한다니까 아쉬워?”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이런 거 할 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개소리도 진짜 창의적으로 한다.”
즉각 반응한 서윤채는 어이가 없는지 직전과는 다르게 하, 크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모자라 머리를 정리해 주던 손으로 이마를 세게 튕기기까지 했다. 찌릿한 아픔에 채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고백 직후 상황이라기엔 분위기가 퍽 웃겼다.
“연애하자는 걸로도 벌벌 떠는 새끼가 할 수 있겠어?”
“못 할 건 또 뭐야…….”
제가 그렇게까지 벌벌 떨었던가. 채현은 제 모습을 되돌아보면서도 본능적으로 대꾸했다.
“채현아, 나 오늘은 들어가면 바닥에서 안 자.”
“…….”
“그래도 괜찮겠어?”
그가 무얼 묻고자 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서윤채는 아마 연인으로서 응당 겪게 될 상황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 것일 터다. 채현도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당연히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저 오랜 친구였을 땐 행한 적 없는 일이니 겁도 났다. 하지만. 그런데도.
“응. 너랑 있으면 괜찮을 거 같아.”
혼자 모든 걸 견디고 감당해야 했던 짝사랑일 때와는 달랐다. 도망치고 겁먹고……. 케케묵은 습관도 이젠 고칠 때였다. 함께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게 아마, 연애라는 걸 테니까.
“그래.”
서윤채는 꼭 기특하다는 듯 머릴 쓰다듬고선 천천히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언제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는 길가인데도 채현은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안긴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하고 좋았다. 천천히 긴장을 풀고 기대자, 상대는 더 꽉 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좋네.”
듣는 이도 몸에 힘이 풀릴 만큼 나긋한 속삭임이었다. 채현은 귓가를 간질이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고갤 끄덕였다. 그러다 한순간, 용기 내 그를 꽉 끌어안은 뒤 품을 빠져나왔다. 서윤채는 상황 파악을 하듯 잠시 멈칫하다 실소를 터뜨렸다.
“극악무도한 새끼.”
“……뭐?”
“채현아, 줬다 뺏는 게 제일 나쁜 거 알지.”
그는 왜 뒤로 가냐는 듯 손짓하며 한 발을 내디뎠다.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걸음을 물린 탓이었다. 그 꼴을 본 서윤채는 눈가를 찡그리듯 웃었다.
“넘어진다. 이리 와. 잠깐 좀 안아 보겠다는데.”
“집 내버려 두고 왜 밖에서 이래…….”
일단 들어가잔 말에 서윤채는 다행히 반박하지 않고 따라 주었다. 채현은 안으로 들어가며 미리 청소를 해 둬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사귄 첫날 더러운 집에 들일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물 흐르듯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긴 건 방 안에 발을 들일 무렵이었다. 근데…… 사귀는 사이가 맞긴 한 건가. 좋아한단 말을 하고 자고 가라 붙잡기도 했는데 확신이 안 섰다.
연애하잔 소리는 안 했던 거 같은데. 오늘부터 사귀는 게 맞나. 심각하게 고민하며 바라본 서윤채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채현아, 나 옷 좀 빌려주라.”
“어…….”
채현은 가장 크고 깨끗한 옷을 찾아 서윤채에게 건넨 뒤 욕실로 떠밀었다. ‘우리 채현이가 이렇게 적극적인 줄 몰랐네.’ 킥킥거리며 놀려 대는 이를 가두듯 밀어 넣고선 침대에 걸터앉았다.
“…….”
처음 하는 연애는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사귀는 게 맞는 건지 몰라 고민하는 꼴이라니. 서윤채가 알면 비웃지 싶었다. 하지만 서윤채와의 관계인 만큼 대충 넘기고 싶지 않았다.
어찌 대화를 해야 자연스레 물을 수 있을까. 한참 동안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서윤채가 욕실에서 나왔다. 희뿌연 공간을 뒤로한 채 다가오는 그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더군다나 가진 티셔츠 중 가장 큰 것을 줬는데도 그에겐 딱 맞았는지 몸에 딱 달라붙은 채였다. 몸의 윤곽이 선명히 느껴지는 듯해 어쩐지 민망해졌다.
“……졸리면 먼저 자. 나 씻고 올게.”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채현은 황급히 욕실로 들어섰다. 당장은 대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욕실 안에선 서윤채의 향이 나 더 열이 올랐다.
채현은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다 한숨을 쉬며 찬물을 끼얹었다. 평소보다 오래 빡빡 씻고 나가니 침대에 걸터앉은 서윤채가 보였다. 간이 조명만 켜 둔 방 안은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안 피곤해? 먼저 자도 되는데.”
“잠이 안 와서.”
말을 맺은 그는 어서 곁으로 오라는 듯 살랑 손짓했다.
“그리고 하던 거 마저 해야지.”
“……안 한다며.”
“취소. 하고 싶어졌어.”
“마음이 막, 그렇게 금방 변해…?”
“됐으니까 얼른 와 봐. 아니. 와 줘.”
가벼이 귓가를 건드리는 웃음소리에 채현은 결국 서윤채의 곁으로 다가갔다. 지척에 가 서자마자 그는 허리를 휘감아 본인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리를 꽉 붙이며 옭아매기까지 했다.
버둥거리던 채현은 결국 힘을 빼고 서윤채를 내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시선을 올려 바라보던 이는 편히 웃어 보였다. 이어선 꽉 끌어안으며 상체에 머리를 톡 기댔다.
“…….”
채현은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다 조심히 머릴 쓰다듬었다. 직접 만져 본 그의 머리카락은 몹시 부드러웠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고왔다. 살살 만져 주니 서윤채는 작게 웃었다. 듣기 좋은 소릴 흘리며 몸을 뗀 그는 아예 자리서 일어나 침대 안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진짜 여기서 같이 자는 거지?”
“그럼 가짜로 자?”
“아니, 내 침대 좁아서…….”
“더 좋은데.”
침대와 서윤채를 번갈아 보던 채현은 주춤주춤 침대 위로 올라섰다. 가만히 서 있던 서윤채도 바깥쪽에 자릴 잡고 침대 헤드에 기대 누웠다.
서윤채의 집에 있던 침대처럼 큰 사이즈가 아니었기에 신체 접촉은 불가피했다. 절로 긴장이 되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대로 그냥 자는 걸까. 아니면……. 머리는 또 쉴 새 없이 마구 굴러갔다.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 볼 참이었는데, 나란히 누워 몸을 맞댄 채 하긴 좀 뭐했다.
“이리 와.”
상당히 멋쩍은 상황에 천장만 노려보던 찰나 서윤채가 오른팔을 벌렸다. 꼭 팔베개를 해 주려는 듯한 자세였다. 채현은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느릿느릿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공간을 비워 두고 멈춰 서니 서윤채가 팔을 움직여 틈 없이 끌어당겼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이상함도 이미 알아챈 듯싶었다. 여기서 속내를 감추고 대충 얼버무려 봐야 소용없었다.
“있잖아.”
“어.”
“우리 이제 그럼…… 연애하는 거지.”
비웃으리라 예상한 상대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가만히 생각을 이어 가듯 시선을 흘리고 나선 고개 숙여 머리에 입을 맞췄다. 촉. 간지러운 감촉과 함께 가벼운 소리가 터졌다.
“응. 연애하자.”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얼어붙은 채현은 하릴없이 서윤채의 품으로 이끌렸다. 꽉 껴안은 상대는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이다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직 안 해 본 게 너무 많아, 채현아.”
“…….”
“17년으론 부족하지.”
그의 말마따나 연인으로서의 서로를 마주하는 것부터가 처음이었다. 지금 같은 포옹과 입맞춤이 그러하듯이. 공연히 마음이 부푼 채현은 서윤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 지겨워하면 안 돼.”
“지겨울 틈이 없어.”
서윤채는 본인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고개 들어 봐.”
“왜?”
“뽀뽀하게.”
다 큰 성인이 말하기엔 퍽 깜찍한 말이었다. 저도 모르게 설핏 웃은 채현이 고개를 들자, 서윤채는 바로 시선을 마주해 왔다. 지척에서 눈길이 얽히고 호흡이 섞였다. 코끝이 스칠 거리에서 빤히 바라보던 이는 이내 입꼬리를 팽팽히 당겼다.
“너무 놀라지는 말고.”
다정한 속삭임을 끝으로 입술이 맞닿았다. 채현은 간지럽게 와 닿는 입술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촉. 촉. 가벼운 입맞춤을 연상케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채현은 감촉이 멎고 나서야 눈꺼풀을 올렸다. 서윤채는 내리깔고 있던 눈을 느리게 치켜뜨면서 시선을 옭아맸다. 묘하게 눈을 빛내던 그는 그대로 다시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부위에서 초옥,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손끝이 간질간질하고 온몸이 저릿한 기분이었다.
“윤….”
그리고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서윤채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겹쳐 왔다. 직전과 달리 벌어진 틈을 열고 혀를 밀어 넣으며. 호흡이 흐트러져 밀어내려 했으나 고개를 꺾으며 조금 더 깊이 들어설 뿐이었다.
조심스레 들어온 살덩이는 잔뜩 굳은 혀를 느리게 문질렀다. 여린 내벽을 훑다가 입천장을 건드리기도 했다. 그는 숨이 턱 막힐 만큼 느리고 정성스럽게 입 안을 헤집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고개를 뒤로 물린 그는 아랫입술을 빨다가 마무리하듯 가벼이 뽀뽀했다.
“해 본 일 하나 더 생겼네.”
혀를 내어 타액에 젖은 입술을 핥은 이가 매력적으로 웃어 보였다. 채현은 무너진 호흡을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윤채만 바라보았다. 제가 어떤 얼굴을 한지도 모르고.
그 꼴을 직시하던 이는 눈가를 미세하게 구기며 한숨을 터뜨렸다. 이채가 도는 눈빛을 흘리길 잠시, 채현을 이불로 둘둘 감아 품 안에 꽉 끌어안았다.
“이제 자.”
어딘가 꽉 막힌 음성을 터뜨리면서.
* * *
간밤에 몰려왔던 수마가 사그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인 채현은 멍하니 정면만 응시했다. 바로 보이는 서윤채의 가슴팍에 정신이 멍해졌다.
“…….”
서윤채의 품에 안겨 이토록 푹 잘 수 있다니. 이 정도면 기절 아닌가. 분명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리라 예상했는데 상상과 달리 상태는 너무도 개운했다.
채현은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그 난리를 쳐 놓고 숙면을 한 꼴이라니. 서윤채가 잠에서 깨면 꽤나 놀려 대겠구나 싶었다.
‘나 숨 막혀. 놔주면 안 돼?’
‘숨구멍 만들어 놨는데 왜 숨이 막혀. 인공호흡이라도 해 줘?’
‘지금 여름인데 이불 너무 꽁꽁 싸맨 거 아니야?’
‘그거 방어구야. 맨살 닿아도 괜찮겠어? 참고로 난 괜찮아.’
처음 그가 김밥 말 듯 꽉 감싸 안았을 무렵엔 최선을 다해 버둥거리며 항변을 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옭아매는 힘이 세져, 결국엔 지쳐 널브러진 채 말로만 아옹다옹해야 했지만.
‘왜 꼭 이러고 자는 거야…….’
‘더한 걸 할 수는 없잖아.’
‘……음흉하게 보지 마.’
‘애인을 치한 취급 하네, 우리 채현이가.’
서윤채는 시종일관 짓궂게 굴며 장난을 쳐 댔다. 본인이 무슨 족쇄인 줄 아는 건지 힘껏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도 않았다. 이불 밖으로 쏙 빠져나온 얼굴 위로 입술을 내리기도 했다. 그 덕에 에어컨이 서늘히 돌아가는 방 안에서도 몸이 따끈따끈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대체 어느 순간 의식의 끈을 놓고 잠이 든 것인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얕게 숨을 터뜨린 채현은 고갤 살짝 움직이며 서윤채를 살폈다.
“팔 안 아픈가…….”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누운 채 자고 있었다. 잠들기 전 보았던 모습과 같은 걸 보니 밤새 이리 있던 듯했다. 편히 누워 자지 싶으면서도, 지난밤 제게 쏟아졌을 시선이 그려져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물끄러미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기분이 들었다. 서윤채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아침을 맞이하고, 가장 먼저 그의 얼굴을 보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온전히 함께했다. 가능하리라 생각한 적 없던 일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
괜히 마음이 북받쳐 코를 훌쩍인 채현은 눈앞의 서윤채를 양껏 취했다. 조심스러운 시선이 천천히 그의 낯 위를 거닐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눈을 내리감은 그의 얼굴이 망막에 새겨졌다. 예쁘게 자리한 눈매. 음영을 만들어 내듯 길게 늘어진 속눈썹. 오뚝한 코. 붉은 입술. 뽀얀 피부. 때를 가리지 않고 고운 얼굴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리 잘난 이가 제 애인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눈길은 천천히 배회하다 붉은 입술로 가 꽂혔다. 어제 저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던 거지. 멍하니 시선을 흘린 채현은 홀린 듯 제 입술을 살짝 만져 보았다. 서윤채가 손을 댔을 때와는 다르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조금 부은 건가. 일차원적인 생각을 하길 잠시, 변태 같은 제 행동에 지레 찔려 손을 내렸다. 아무 일도 없던 양 자세를 바로 하던 찰나 때마침 서윤채가 눈을 떴다. 화들짝 놀란 채현은 못 본 척 눈을 질끈 감았다. 직전까지 훔쳐봐서인지 너무 부끄럽고 멋쩍었다.
“잘 잤어?”
막 잠에서 깬 상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게 가라앉은 채였다. 나직이 전해지는 다정한 말에도 채현은 잠자코 있었다. 눈꺼풀이 파들파들 떨리는 듯했지만, 차마 눈을 뜨고 그를 볼 수 없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그려졌으니까.
곧이어 상대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리더니 머리를 매만지는 손짓이 느껴졌다. 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해 주면서 귀도 살짝 건드렸다.
채현은 어깨를 움찔 떨면서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젠 자는 척을 관두고 눈을 뜨기도 애매해진 상황이었다. 계속 만지작대던 상대는 일순 호흡하듯 웃으며 낮게 ‘아…….’ 목을 울렸다.
“자는 척을 하네.”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였다. 황당해하는 것 같기도,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키스할 생각인데.”
귓가를 매만지던 손이 아랫입술에 닿았다. 서윤채가 살살 힘을 실으며 입술 틈이 작게 벌어졌다. 하릴없이 이끌리던 채현은 물밀듯 밀려온 낭패감에 초 단위로 초조해졌다.
“싫으면 눈뜨고 나 봐. 아니면 할 거니까.”
그가 말을 맺는 동시에 눈을 떴으나 그 순간 입술도 와 닿았다. 서윤채는 눈이 마주쳤음에도 살며시 눈웃음치며 그대로 입을 맞췄다. 뒤늦게 몸에 힘을 주고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서윤채는 자연스럽게 상체를 세우고 내리누르듯 자세를 잡은 채 행위를 이어 갔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더 깊이 엮이도록 하기도 했다.
“흐…….”
달뜬 호흡이 맞닿은 입술 틈새로 새어 나왔다. 서윤채는 그럴 때마다 숨 쉴 틈을 벌어 주듯 혀를 뒤로 물리고 입술만 갉작였다. 입질하는 개처럼 질근질근 아프지 않게 물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조금 괜찮아진다 싶으면 바로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입 안을 탐했다.
입맞춤은 어젯밤과 달리 길게 이어졌다. 조금 더 물기 어린 소리가 나고 질척이는 느낌이 들었다. 맞닿은 가슴도 뜀박질을 한 양 쿵쿵댔다.
완전히 몸을 붙인 채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하체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이내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같은 남자라 알 수 있었다.
당황이 밀려오자 호흡이 더 흐트러졌다. 채현은 숨이 달려 더는 못 하겠다는 뜻으로 서윤채의 어깨를 툭 쳤다. 다행히 그는 몰아세우지 않고 촉, 소릴 내며 떨어졌다.
“너…….”
채현은 꽉 막힌 숨을 터뜨리듯 소리를 냈다. 얼굴은 붉게 열이 오른 채였고 눈동자는 혼란스레 굴렀다. 그도 그럴 것이 하체에 와 닿는 느낌이 너무도 선연했다.
“아.”
반면 서윤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몸을 떼지도 않고 느릿하게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끌어 올릴 뿐이었다.
“생리적인 현상이야. 아침엔 다 그렇잖아.”
단순히 생리적인 현상이라기엔 정도가 심했다. 이건 거의…….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질근대자 서윤채는 재차 입을 쪽 맞춰 왔다.
“씻지도 않았는데, 자꾸 이러면 어떡해…….”
“같이 씻을까, 그럼?”
“……지금 나 꼬시는 거야?”
“넘어올 의향은 있고?”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인 서윤채가 빤히 눈을 마주쳐 왔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순전히 아침이라서 이렇게 된 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나지막이 덧붙인 이는 곤란하다는 양 웃어 보였다.
“개변태 새끼 같아?”
채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그런 느낌은 안 들었다. 그저 신기하고 부끄러울 뿐. 저를 상대로 성애를 느끼는 서윤채라니. 괜히 자신도 아랫배가 간질간질하고 갈증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은 너무 빠른 느낌이었다.
“있잖아.”
“응.”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어… 처음이라서…. 순서대로 했으면 해…….”
“착실하게 절차 밟고 있어. 손잡았고. 포옹했고. 뽀뽀했고. 키스도 했고. 남은 건 하난데.”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이 있잖아.”
이런 순간에 쓰는 말이 맞았던가. 당당한 서윤채의 말에 채현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물끄러미 시선을 흘리던 서윤채는 실없이 웃으며 얼굴 곳곳에 쪽 뽀뽀를 했다. 채현은 그의 입술이 내려앉을 때마다 눈을 깜빡였다. 서윤채가 이리도 스킨십에 헤픈 스타일일 줄은 몰랐는데.
“너 막, 이런 거 좋아해…?”
“너를 좋아하는 거지.”
“……어젠 안 했으면서 왜 지금은 그래?”
“글쎄. 눈뜨자마자 네가 보이는데…… 그게 뭐라고 되게 좋네.”
서윤채는 본인도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황당해했다.
“싫어? 강요는 안 해.”
“싫은 게 아니라…. 나는 처음이니까 떨려서….”
“나도 처음이니까, 라고 말해야 하지 않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늘어놓은 서윤채의 말에 채현은 일순 멈칫했다. ‘나도’라고……. 그 말은 즉 서윤채도 처음이라는 거였다. 서윤채에게 경험이 없다니 한 번에 믿어지지 않았다.
“너 왜 처음이야?”
“그래서 불만이야?”
하, 실소를 흘린 서윤채가 되물었다.
“아니, 너 학교 다닐 때 연애한 적 있잖아.”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리고 교복 입고 좆 놀릴 생각하는 게 등신 아니야?”
채현이 아는 그의 마지막 연애도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당연히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보수적이다 싶었다. 17년을 보고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새롭기도 했다.
“그 후로 연애 안 했어? 대학 가서는?”
“별 관심 없었는데. 어차피 곧 입대할 새끼였는데, 뭐.”
“제대해서는?”
“너랑 놀았지.”
그의 말대로 다시 만난 뒤로 줄곧 붙어 있어 연애할 틈이 없긴 했다.
“너는. 뗐어? 대답을 잘해야 할 거야.”
“그게 왜 궁금해…….”
“내 건데 간수해야지.”
서윤채는 웃으면서 물어 왔지만 눈은 기이하게 빛났다. 채현은 그 꼴을 보다가 슬쩍 눈을 피하며 고갤 가로저었다. 동시에 서윤채가 꽉 몸을 껴안아 왔다.
“같이 떼면 되겠네.”
그러더니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소름이 돋을 만큼 낮고 다정한 말씨였다. 채현은 귓등을 건드린 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근데 지금 아침이잖아.”
“어두워서 되게 밤 같아. 그리고 진짜 밤에 하면 너무 본격적인 느낌이잖아.”
“그게 뭔 소리야…….”
“채현아.”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은 서윤채가 아프지 않게 질근대며 다정히도 호명했다.
“나 이제 좀 아픈 거 같아.”
유독 진득하니 살갗에 달라붙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가 무얼 말하는지 모르진 않았다. 잠시간 고민하던 채현은 끝내 그의 목뒤로 팔을 둘러 확 끌어안았다. 걱정하고 두려워해 봤자 제 손해라는 걸 이미 겪어 봤다. 그게 무엇이든 서윤채와 함께 이겨 내면 그만이었다.
“너무 빨리는 안 돼.”
“네.”
상대도 바로 속뜻을 알아챘는지 입을 맞춰 왔다. 맞닿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게 느껴졌다. 벌어진 틈을 타고 그의 혀가 들어섰다. 말캉한 살덩이는 유유히 흘러 들어와 점막을 훑었다. 마음껏 입 안을 헤집어 대 억눌린 신음이 샜다.
직전에 한 키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노골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서윤채는 움찔대는 혀를 옭아맨 채 세게 빨아올렸다. 한없이 느리게 붓질하듯 입천장을 간질이기도 했다.
제대로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 안에 고였다. 행위가 길어질수록 물기 어린 소리가 커졌다. 가볍게 시작한 입맞춤이 한순간 끈끈해지며 손끝을 저리게 만들었다.
달뜬 서로의 호흡과 이불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귓가를 두드려 댔다. 이른 오전에 울리기엔 퍽 어울리지 않는 소음이었다. 생경한 흔적은 또 다른 자극제가 됐다.
“흐…….”
커다란 손으로 뺨을 감싸 안은 서윤채는 연신 눅진한 입 안을 탐했다. 끙끙 앓듯 가느다란 소릴 흘릴 땐 신음을 터뜨리듯 목을 울리기도 했다.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한 채 한참을 매달렸다. 채현은 버거우리만치 쏟아지는 그의 온기와 애정을 받아 내다 고개를 뒤로했다. 색색 터지는 숨결에서 직전의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입술 젖었어.”
서윤채 역시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며 뺨을 감싸 안은 손을 움직였다. 몸을 뒤덮은 기세는 여전히 죽지 않은 채였지만, 살결을 쓰다듬는 손짓만큼은 소중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우리 채현이가…….”
“아…….”
“입이 작은 편이었나.”
옅은 웃음이 밴 음성으로 속삭인 서윤채가 귓가를 만지작대며 입술을 핥았다.
“혀 좀 넣었다고 이렇게 힘들어하면 어떡해.”
“누구나 입을 막으면, 숨이 차…….”
“요령껏 숨을 쉬어야지.”
“처음인데 요령이 어디 있어.”
빨리하면 안 된다고 분명 말했는데. 호흡이 달릴 때까지 몰아붙인 게 누군데. 억울한 마음이 든 채현은 하나하나 말대꾸하며 눈을 치켜떴다.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마주해 오며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삽시에 소름이 기어오를 만큼 다디단 웃음이었다.
“우리 채현이 요령 익히게 해 주려면 많이 해야겠네.”
“너 쫌 짜증 나는 거 같아…….”
“그래? 난 네가 좋은 거 같은데.”
얄궂게 굴며 건드려 대는 꼴이 얄미워 괜히 투덜거려도 봤지만 전혀 타격이 없었다. 서윤채는 그저 무언가를 가늠하듯 입 안에 손을 넣고 혀를 내리눌렀다. 고작해야 검지와 중지뿐인데 안이 꽉 차는 듯했다. 그는 세지 않은 힘으로 손가락을 놀리다가 눈살을 구기며 목을 울렸다.
“빨아 볼래.”
직후 새어 나온 목소리는 지독히도 낮았다. 부탁인 듯 명령인 듯 성질이 모호한 말이었다. 채현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서윤채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혀를 슬쩍 굴렸다. 누군가의 손가락을 빨다니, 난생처음인 일이었다. 그런데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혀라도 되는 양 감싸 안고 세게 빨았다. 사탕을 빨아 먹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윤채가 그러했듯 혀끝으로 살살 간질여도 보았다. 그럴 때마다 서윤채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금방이라도 마구 헤집어 댈 듯 자리하다가 끝내는 기세를 죽였다.
“아…….”
그러하길 한참, 갈증이라도 난 사람처럼 제 입술을 축인 서윤채는 손을 거두고 곧장 입을 맞춰 왔다. 손가락을 물고 있던 탓에 벌어져 있던 터라 혀가 들어서긴 수월했다. 단번에 깊숙이 파고든 살덩이는 도망치는 혀를 붙들고 살살 문질러 댔다. 타액과 숨결이 계속해 섞였다.
“…….”
하릴없이 제 안을 내준 채현은 밀려오는 자극을 삼키다 슬쩍 눈을 떴다. 그리고 마주했다. 눈을 감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서윤채를. 지척에서 시선이 얽히자 그는 꼭 웃기라도 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이후론 빤한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입맞춤에 몰두했다.
하나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붙어 있던 몸은 한층 더 바짝 맞붙은 채였다. 하체가 얽히며 단단해진 중심 또한 맞닿았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감각에 채현도 제 아래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상대도 그를 알아챘는지 목덜미로 입술을 내렸다. 간지럽게 살결을 탐하며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채현은 가쁜 숨을 터뜨리며 그의 머리를 살살 건드렸다. 손을 대자마자 고개를 든 이는 타액으로 젖어 엉망인 입술을 예쁘게도 끌어 올려 보였다.
“아!”
바로 이어 침 범벅이 된 손가락을 대충 닦곤 상의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목표로 하는 바가 명확한 듯 거침없이 움직여 바로 가슴께에 다다랐다.
“윤, 채야.”
“응, 채현아.”
다정한 부름과 달리 손짓은 얄궂었다. 느릿느릿 가슴을 문지르길 잠시, 톡 튀어나온 돌기를 살살 건드리며 손톱으로 긁었다. 바짝 일어서게 할 작정인지 연이어 자극을 퍼부었다.
“아, 간지러워, 으, 잠깐만…….”
“간지럽기만 해?”
소름 끼치는 감각이 온몸으로 퍼지는 듯했다. 긴장을 닮은 흥분감이 아래로 빠르게 쏠렸다. 침을 꼴깍 삼킨 채현은 저도 모르게 하체를 움찔댔다. 상대는 화답이라도 하듯 단단하게 일어선 중심을 맞대 왔다. 은근히 힘을 실어 비비더니, 허리를 쳐올리듯 움직이기도 했다.
“아.”
“……어?”
“아, 해 봐.”
낮게 내려앉은 한마디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명령이었다. 채현은 몸을 짓누른 자극에 정신이 없어 홀린 듯 입을 벌렸다. 입술 틈새로 티셔츠 끝자락이 물린 건 그 직후였다.
“잘 물고 있어?”
톡톡 치는 손짓에 자연히 앙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지……. 눈을 내리깔고 바라보던 서윤채는 칭찬하듯 속삭이며 고개를 숙였다. 불안한 눈으로 그를 좇길 잠시, 예상하지 못한 자극에 채현은 ‘아!’ 소릴 내며 옷자락을 놓쳤다.
“잘 물고 있으라니까.”
“아니, 너, 뭐 해…….”
“젖꼭지 빨았는데.”
“아니…! 그… 걸 물은 게 아니잖아. 왜 갑자기….”
“아…. 우리 채현이는 갑자기 이러는 거 싫어하지. 미안. 앞으로는 예고하고 할게.”
입술만큼 새빨간 혀를 거둔 그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동요하는 채현과 달리 몹시 태연했다. 서윤채는 흘러내린 옷자락을 다시 잡고 입술 근처로 가져다 댔다.
“너, 아프다고 했잖아.”
“나만 좋자고 이 짓 하는 거 아니잖아.”
맞닿은 하체는 여전히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더 빨 건데.”
“…….”
“이번엔 잘 물고 있어야 돼.”
옷을 물어 다물린 입술 위로 쪽 입을 맞춘 그는 근사하게 웃어 보이더니 하던 짓을 이어 했다. 채현은 가슴에 와 닿는 뜨거운 숨결에 끙끙 앓기만 했다. 그의 혀가 쏟아붓는 자극이 너무 커 온몸이 저렸다. 꼭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름이 돋으며 호흡이 무너졌다.
“흐…….”
서윤채는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듯 한입 크게 가슴을 삼켰다가, 불거진 돌기를 집중적으로 씹었다. 초옥, 촉. 쪼옥. 물기 어린 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와 침대 위를 적셨다.
“으, 흣…….”
채현은 입을 크게 벌리지도 못하고 신음했다. 가슴에서 피는 간지러움이 강도를 더할 때마다 모른 체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떨렸다. 그와 비례하게 성기에도 힘이 들어갔다. 끝내는 흥분했다는 걸 증명하듯 완전히 발기했다. 꽉 문 옷자락은 타액에 젖어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윤채야…….”
결국 옷을 놓으며 소리 내어 부르는 순간, 오른쪽 가슴만 줄기차게 빨아 대던 서윤채가 멈칫했다. 가느다란 숨결만 닿아도 움찔댈 만큼 자극하던 상대는 얼굴을 확인하고 눈살을 구겼다. 채현은 발라 먹듯 바라보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하도 빨려 부푼 듯한 입술을 움직였다.
“……나 섰는데.”
“아, 씨발.”
가슴만 건드리는 걸 멈춰 달라는 뜻으로 말한 건데, 돌아온 건 뇌까리듯 터져 나온 욕설이었다. 사고를 거치고 흘러나온 말은 아니었는지, 서윤채는 상체를 바로 하며 머릴 쓸어 넘겼다.
“왜 욕을 해…. 너 때문에, 네가 세운 거잖아….”
“미안. 실수.”
쪽. 달래듯 가볍게 뽀뽀한 서윤채가 눈가를 매만졌다. 열에 잠긴 듯 뜨겁게 느껴지는 살갗을 스친 손가락은 곧이어 아래로 떨어졌다.
“옷을 벗는 게 낫겠다.”
몸을 가리던 천을 단번에 벗겨 침대 밑으로 떨어뜨린 서윤채는 본인 상의도 벗어 던졌다. 채현은 제 위에 선 이의 근사한 몸에 저도 모르게 멍하니 시선을 흘렸다.
“왜 보기만 해. 네 건데. 마음대로 만져.”
내 거라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이 차오르는 듯했다. 감히 서윤채를 제 것이라 말하며 온전히 취할 날이 오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울컥한 채현은 코를 훌쩍이며 살며시 그의 어깨를 매만져 보았다. 와 닿는 살결의 감촉이 너무 좋아 가슴이 부풀었다.
그 꼴을 보고 입꼬리를 팽팽히 당긴 서윤채는 바로 이어 바지에도 손을 댔다.
“벗길게?”
어떠한 반응을 보일 틈은 없었다. 서윤채는 말을 맺자마자 바지와 드로어즈를 함께 붙잡고 벗겼다. 트레이닝복이었던 탓에 어려움 없이 단번에 발목까지 내려갔다. 퉁. 튀어나온 발기한 성기에 딱 죽고 싶은 정도의 수치심이 밀려왔다. 귀두 부분이 젖어 있어 더욱 그랬다.
“아…….”
“부끄러워하지 말아 봐. 나도 벗을 테니까.”
상대는 그를 아는지 바로 제 옷도 벗어 던졌다. 흉흉하게 일어선 성기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저게 말이 되는 크기인가. 저걸 달고 살 수가 있는 건가. 옷 너머로 맞닿을 때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데 실제로 보니 더욱 어마어마했다. 더군다나…….
“마음에 들어? 눈을 못 떼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체모가 옅었다.
“진작 보여 줄 걸 그랬지.”
서윤채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제 성기를 느릿하게 손으로 훑었다. 꼭 자위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얼마간 살갗이 스치는 소릴 만들어 내던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아.”
채현은 제 성기에 닿는 서윤채의 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선액이 묻어 축축한 손바닥이 기둥을 감싸 안았다. 조심스럽게 살덩이를 쥔 그는 힘을 싣고 살살 매만져 댔다.
“참고로 나는 마음에 들어.”
“아, 흐읏…….”
기둥을 훑던 손이 귀두를 스친 순간 소름 끼치는 감각이 밀려들었다. 제 손으로 만질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낯선 쾌감에 머릿속이 들들 끓는 기분이었다.
“좆도 주인을 닮나.”
탁탁. 속도 높여 성기를 쳐올리던 서윤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정을 유도하듯 귀두를 세게 문지르고 요도구를 찔러 대는 통에 정신을 못 차리던 채현은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내가, 좆, 흐, 좆같이, 생겼다는 거야?”
“네 좆이 예쁘게 생겼다고 칭찬한 거지.”
수치스러운 말을 잘도 내뱉은 그는 잠시 손을 떼더니 두 성기를 아예 겹쳐 잡았다. 커다란 손안에 갇힌 성기가 맞붙으며 벼락같은 흥분감이 온몸을 내달렸다.
“네 눈에, 후……. 내 좆도,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는데.”
“아!”
“징그러워하면 안 돼?”
징그럽기는커녕 그의 말마따나 성기도 예뻐 보여 충격일 뿐이었다. 정말 주인을 닮는 것인지 그냥…… 엄청났다. 채현은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는 하체를 억누르며 간헐적인 신음을 흘렸다. 무심코 끙끙 앓듯 목을 울릴 때마다 서윤채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서윤채는 양손으로 성기를 쥐고 꾹꾹 누르다가 귀두끼리 비벼 댔다. 하체가 녹아내릴 듯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과한 흥분감에 붉게 달아오른 성기는 선액으로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아, 윤채야, 나, 그만, 흐…….”
“참아 봐. 후, 처음은, 윽, 같이 싸고 싶으니까.”
그의 손짓을 따라 노골적인 소리가 울려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허리 짓을 하듯 툭툭 성기를 쳐올릴 땐 사정감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온몸을 옥죄듯 내려앉은 쾌감이 몸집을 부풀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채현은 서윤채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낮게 신음하는 순간 사정했다. 붉고 축축했던 성기 끝에서 울컥 희뿌연 액체가 새어 나왔다. 오래도록 참은 정액은 서윤채의 성기를 더럽히며 흘러내렸다.
“나한테 쌌네…….”
“일부러,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왜? 더 싸도 돼. 네 흔적, 후, 남는 건데 나야 좋지.”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그 꼴을 바라보던 서윤채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짓에 박차를 가했다. 본인이 싸지른 양 덕지덕지 묻은 정액이 거슬리지도 않는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윽.”
사정하는 순간, 그는 허벅지를 단단히 굳히며 신음했다. 정액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움직임은 멎지 않았다. 잘게 허리 짓을 하며 성기에 희뿌연 액체를 묻혀 댔다.
“아…….”
사정 후 잔존한 흥분을 취하듯 목을 길게 울린 서윤채가 고개를 기울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혀를 내어 입술을 핥곤 씩 웃어 보였다. 채현은 풀어진 그의 얼굴을 보며 입을 벌렸다.
“키스하자고?”
“어?”
“입을 벌리길래. 들어오라는 줄 알았지.”
“무슨……. 그런 생각만 해?”
“지금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한 그는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사정 직후임을 알리듯 느려진 몸짓으로 머릴 쓸어 넘기기도 했다. 그러곤 상체를 숙여 촉,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너 쫌 과한 거 같아…….”
“인정해.”
차마 바라보기도 부끄러울 만큼 엉망이 된 성기를 떠올리며 말하자, 서윤채는 즉답했다.
“애인이 개변태 새끼라 안됐다.”
한술 더 떠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더니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채현아.”
“왜…….”
“이대로 계속하면…….”
말을 늘인 그는 몸을 세운 채 팔을 움직였다. 멈춤 없이 향한 손이 건드린 곳은 누구도 만진 적 없던 회음이었다. 깜짝 놀라 움찔 몸을 떨자, 구멍 주변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내가 여길 만지게 될 거 같은데.”
“…….”
“괜찮겠어?”
그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남자 둘의 관계이니만큼 반드시 한 명은 깔려야만 했다. 다만 아는 것과 별개로 판단은 쉬이 내려지지 않았다. 앞도 써 본 적이 없는데, 뒤를 쓰게 되리라고 어디 상상이나 해 봤을까.
“안 괜찮으면 말해.”
“……안 괜찮으면?”
“네가 박아.”
“어?”
“내가 아래. 네가 위. 대신 살살 뚫어 주라.”
처음이라서 겁이 나네. 꼭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속삭인 이가 설핏 웃었다. 떠오른 미소는 장난스러웠지만 어디에서도 거짓은 묻어나지 않았다. 오롯한 진심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양.
“너는 괜찮아?”
“글쎄. 적어도 싫다는 애 억지로 눕혀 놓고 계속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싶은데.”
“되게 아프면 어떡하려고…….”
“우리 채현이가 알아서 잘해 주지 않을까? 설마 피를 보겠어. 그리고 내가 아픈 게 낫지. 너 아프면 더럽게 신경 쓰여.”
아팠을 때를 떠올린 건지 서윤채는 못마땅하다는 듯 쯧 혀를 찼다. 채현은 어떤 반응을 내보일 새 없이 그런 서윤채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 순간에 와서도 상대를 먼저 생각해 줄 수 있다니.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그가 지닌 애정임을 알기에 심장이 울렸다. 한참을 눈만 깜빡이던 채현은 결국 눈꺼풀을 완전히 내렸다.
“그냥 계속해…….”
“괜찮겠어?”
그저 서윤채가 주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오직 그뿐이었다.
“대신 살살 해. 알겠지. 나 내일 학교도 가야 돼…….”
“네 애인 절제력을 믿어 봐.”
쪽. 입을 맞춘 서윤채는 썩 신용이 가지는 않는 말을 흘리며 다리를 잡아 벌렸다. 거침없는 행동이었지만 결코 거세진 않았다. 오히려 금방이라도 깨질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아…….”
성기에 달라붙은 정액을 긁어모은 그는 손가락에 치덕치덕 묻힌 채 밑을 건드렸다. 긴장을 풀어 줄 요량인지 귀두도 함께 문질러 주었다. 간지러운 자극이 피어오르며 몸에 힘이 풀렸다. 서윤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윽.”
“다 했어. 잘하고 있어.”
“뻥, 치지, 윽, 마.”
한 마디. 두 마디. 한 개. 두 개. 세 개……. 불유쾌한 느낌과 함께 밀고 들어오는 손가락은 계속해 늘어났다. 서윤채는 성기를 애무하는 손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뒤를 넓혔다.
“아파?”
“모르… 흐, 이상해.”
타인의 손이 안을 만져 대는 게 썩 좋지만은 않았다. 무언가 걸려 안 빠지는 듯 찝찝하기도 했고 스치듯이 찌릿한 자극이 느껴지기도 했다.
“싫지는 않은가 봐.”
손가락을 벌려 내벽을 마구 만지던 서윤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얘 다시 섰다, 채현아.”
그는 다른 손으로 귀두를 건드리며 불시에 내벽 깊숙한 곳을 쑤셨다. 찔꺽거리는 소리 위로 채현이 끙끙대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서윤채는 한숨 쉬듯 목을 울리며 양껏 안을 짓쳐 댔다.
“아!”
그 순간이었다. 귀두를 세게 자극했을 때처럼 몸이 떨리며 직전과는 결이 다른 신음이 터져 나온 것은. 눈을 크게 뜬 채현은 본능적으로 버둥대며 벗어나려 했다. 잠시 멈칫하던 서윤채가 재차 손가락을 움직여 내벽을 쑤신 건 그와 동시였다.
“흐, 아, 윤채야, 잠, 아!”
“아…….”
서윤채는 깊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목을 울리며 제 입술을 핥았다. 뚫어져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몹시 집요했다. 넓히는 족족 다시 좁아지던 내부를 건드는 손짓도 조급해졌다.
“채현아, 콘돔 어디 있어?”
애인도 없는데 집에 콘돔이 있을 리가. 대답할 정신도 없어 고개를 가로젓자, 바로 행동을 이어 갈 듯했던 서윤채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양 움직임을 죽였다.
“없다고?”
“어…….”
태어나 처음 겪는 감각에 혼이 빠진 채현은 멍하니 서윤채를 응시했다. 그는 수틀린 사람처럼 몹시 심각한 낯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관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홀딱 벗은 채 성기까지 세웠는데. 서윤채도 엇비슷한 생각을 했겠지 싶어 입을 달싹일 찰나, 밑을 쑤시던 손이 빠져나갔다.
“한 발 빼 줄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뭐?”
“처음인데 콘돔 없이 섹스하긴 조금 그렇잖아.”
그의 판단이 합리적이라는 걸 모르진 않는다. 그가 자신을 배려해 줬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았고. 그도 이미 프리컴을 흘릴 만큼 발기한 채인데 이성을 붙잡은 거였다. 그런데도…….
“……극, 극악무도한 새끼.”
“뭐?”
“줬다 뺏는 게 제일 나쁜 거라면서, 너는 왜 그래?”
쉽게 관두려는 그가 괘씸했다. 용기 내 여기까지 온 김에 끝까지 하고 싶었다. 함께 몸을 맞대고 절정을 맞이하는 순간이 얼마나 짜릿한지 경험했는데, 어찌 뜻을 접을 수 있을까.
“할 거 다 해 놓고 왜 빼냐고……. 괜찮으니까 그냥 해.”
“아……. 우리 채현이 큰일 날 새끼네.”
길게 목을 울린 서윤채는 곤란하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내가 데려와서 다행이지.”
다행은 아닌가. 바로 이어 중얼거린 그는 이내 다리를 벌리고 아래쪽에 자릴 잡았다. 흉흉하게 서 있던 그의 성기가 직전까지 혹사당한 구멍을 툭 건드렸다.
“이번엔 네가 꼬신 거야.”
“…….”
“너도 알다시피… 내가 너한테 약하잖아.”
“아!”
“……이젠 못 물리니까 후회하지는 말고.”
말을 맺은 그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귀두를 밀어 넣었다. 채현은 이불을 그러쥐며 끙끙 앓았다. 손가락을 넣었을 때와는 달랐다.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팠다.
“윤, 윤채야. 아파, 으흑, 살살…….”
“살살, 하고 있어. 후, 심호흡, 좀 해 봐, 채현아.”
숨을 어떻게 쉬는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밑을 뚫고 들어선 성기가 주는 고통이 너무 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삽시에 눈물이 차오른 눈을 깜빡인 채현은 입술만 질근질근 씹었다.
“아, 씹…….”
아픈 건 그도 마찬가지인지 욕을 짓씹으며 인상을 구겼다. 이런 게 연인 사이의 섹스라는 걸까. 이게 전부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삽입 전까지는 좋았는데 지금은 아프기만 했다.
“흐윽, 아, 윤채야, 다, 넣었어?”
“다 못 넣어.”
그는 오직 허릿심만으로 성기를 밀어 넣으며 억눌린 숨을 터뜨렸다.
“긴장 풀어야 덜 아파. 힘을 좀, 풀어 봐.”
“아픈데 힘을… 윽, 힘을, 어떻게, 풀어.”
“그래. 내가… 무리한 요구를, 했네. 그렇지.”
“아!”
느릿하게 진입하던 성기가 일순 꽉 닫힌 내벽을 뚫고 안으로 처박혔다. 채현은 물기에 젖어 흐려진 시야 너머 서윤채를 노려보았다. 믿어 보라고 할 땐 언제고……. 진심으로 몸이 반으로 갈리는 줄 알았다.
“살살 하기로, 했잖아. 왜, 윽…….”
“미안. 내가 개새끼네.”
다정히 속삭인 이는 처박은 성기를 살살 움직였다. 직전처럼 무작정 밀어 넣으려 하지 않고 잘게 짓쳐 대며 내벽을 훑었다. 꼭 무언가 찾고 있기라도 한 듯이. 뭉툭한 귀두가 벼락같은 쾌감을 주던 부위를 스친 건 그 직후였다.
“지금도 싫어? 그러면 욕해. 때려도 되고.”
서윤채는 신체의 변화를 곧장 알아챘는지, 얄궂게 속삭이며 허리를 놀렸다. 채현은 하릴없이 끙끙 앓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안을 쑤셔 박는 성기의 움직임이 너무 잘 느껴졌다.
“왜 울고 그래. 속상하게.”
“으, 흣, 그냥…….”
다정히 눈가를 닦아 주는 손짓과 허리 짓은 상당히 결이 달랐다. 채현은 서윤채와 눈을 마주하며 안아 달라는 듯 팔을 벌렸다. 목을 울린 상대는 곧장 상체를 숙여 왔다.
온몸이 서윤채와 맞닿고 의지할 곳이 생기자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차올랐다. 온전히 하나가 된 듯해 기쁘고 행복했다. 서윤채도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자극에 잠겨 가며 생각하던 찰나, 그의 입술이 촉 가벼이 닿았다 떨어졌다.
“채현아.”
채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입을 열었다간 마구잡이로 신음이 터져 나올 듯했으니. 상대는 그로도 충분한지 씩 웃으며 성기를 콱 처박았다. 그 순간 한계에 다다른 채현은 정액을 싸질렀다.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박아 넣은 서윤채가 파정한 것도 동시였다.
“네가 싫다고 해도…….”
뜨겁게 사출된 액체가 꼭꼭 씹어 삼키듯 요동치는 내부에 흔적을 남겼다.
“나는 너를 좋아해.”
그와 엇비슷한 온도를 띠는 고백 역시 온몸을 둘러 감았다.
관계는 한 번으로 끝이 났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을 뿐 아니라 모든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으므로. 채현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으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숨만 쉬었다.
몰아치듯 쾌감과 고통을 느껴서인지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옷을 입기도 힘들어 이불로 대충 몸을 가려야만 했다. 그마저도 정액 때문에 엉망이었지만 찝찝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
목을 따갑게 울리며 흘러나온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은 채였다. 하도 끙끙 앓아 대 목에도 무리가 간 듯했다. 원래 다들 이 정도의 상태가 되는 건지. 채현은 폭풍 같았던 직전을 떠올리며 힘없이 웃었다. 불과 몇 분 전의 일인데 꼭 전생처럼 아득했다.
가만히 누워 욕실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긴장이 풀리고 잠기운이 밀려왔다. 진짜로 서윤채와 잤구나. 일을 치렀던 공간이 주는 새삼스러운 자각이 찾아들기도 했다.
기어코 여기까지 왔단 생각이 들어 감회가 새로웠다. 단순히 기쁘고 벅차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됐다. 그 이상의 것들이 마음을 채우고 온몸을 내리누른 듯했다. 직전의 행위가 그저 육체적 쾌감만을 주는 게 아니라, 무형의 애정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게 해 준다는 걸 깨달았고.
온전히 살을 맞대고 온기를 나누던 순간이 잊히지 않았다. 쿵쿵 같은 속도로 내달리던 심장 박동이 여전히 남아 가슴을 울리는 듯했다.
여유를 잃고 조급하게 굴던 서윤채의 모습도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서윤채가, 선연한 쾌감에 잠겨 어쩔 줄 몰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지금과 같은 만족을 주는 행위라면 언제든 또 하고 싶었다. 그 상대가 되어 줄 서윤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호흡하듯 가볍게 웃은 채현은 상념에 잠기며 천장을 응시했다. 멍하니 흐르던 시선을 끌어당긴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서 나온 서윤채였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채현은 물끄러미 가까워지는 서윤채를 응시했다. 그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수건을 팔에 걸친 채 성큼 다가왔다. 지척으로 와 상체를 굽히고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는 일련의 행동에선 기분 좋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안 힘들어?”
“왜 힘들어?”
서윤채는 대꾸하면서도 쪽쪽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막 씻고 나와 묻어나는 좋은 향기가 입맞춤과 함께 쏟아졌다. 그의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도 간지럽게 이마를 적셨다.
“머리 말리고 나오지. 드라이기 안에 넣어 뒀는데.”
“말릴 시간이 어디 있어.”
씩 웃으며 이야기한 그는 지겹지도 않은지 연신 입을 맞춰 댔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한참을 그리하던 이는 아쉬움이 남은 양 느리게 입술을 뗐다.
이어선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똑같은 시간을 보내고 홀로 이 상태가 된 것인데, 귀찮아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살뜰히 챙겨 주기만 했다.
“여기 빨개졌네.”
물론 깜짝 놀랄 만큼 다정한 건 손짓뿐이었다. 짓궂은 성격과 말씨는 여전해서 계속 장난을 쳐 댔다. 본인이 하도 물고 빨아 자국이 남은 걸 보며 좋다고 웃기도 했다.
“누가 보고 벌레 물렸냐고 하면 어떡해…….”
“애인한테 물렸다고 해.”
농담일 게 분명한 말을 진심처럼 이야기하는 이가 제 애인이라니. 채현은 아닐 걸 알면서도 ‘설마…….’ 하고 치미는 가능성 때문에 사색이 되어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뭘 또 그렇게까지 기겁을 해.”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던 서윤채는 그 꼴을 보고 얼굴 근육을 다 이용해 웃어 보였다.
“농담이야. 앞으론 티 안 나는 곳만 물게.”
“안 문단 소리는 안 하네…….”
“안 물 생각이 없으니까. 다리 벌려 봐.”
상체를 다 닦아 준 이는 천천히 하체로 손을 내렸다. 한번 그와 끝까지 해 본 덕일까. 죽을 만큼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새 적응이 된 건지 퍽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도 있었다. 몸져누운 이를 보살피듯 손을 움직이기도 잠시, 그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눈을 마주쳐 왔다.
“이제 기운 좀 차렸어?”
“응.”
“그럼 들어가서 씻자. 씻겨 줄게.”
아마 여기서 해결하기엔 어려우리라. 채현도 예상되는 바가 있던 터라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비록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삐걱거리고 후들후들 떨렸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우리 채현이 망아지 같네.”
그러한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의 원흉은 버릇처럼 놀려 대기 바빴다. 홀로 팔팔한 그가 일순 너무도 괘씸해 째려보니, 그는 ‘미안, 미안.’ 사과하며 부축해 주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 빠지듯 웃긴 했지만 한없이 느리게 발을 내디뎠다.
서윤채는 욕실에서도 지극정성이었다. 딱 알맞은 온도인 물로 몸을 씻겨 주고 뒤처리도 전부 도맡아 해 주었다. 어쩔 수 없이 밀려온 수치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니, 그게 또 뭐라고 눈이 돌았는지 달려들어 입을 맞추기도 했다.
“…….”
씻는 게 이토록 진 빠지는 일이었던지. 애먼 짓을 더 많이 하고 나와 지친 채현은 책상 의자에 주저앉아 서윤채를 응시했다. 그는 엉망인 이불과 시트를 벗겨 한쪽 구석으로 치워 두고 있었다. 그러고 나선 환기를 시키고 어디서 찾은 건지 모를 룸 스프레이도 양껏 뿌렸다.
“새 이불 있어?”
“응. 저기.”
가리킨 곳에서 손님용 이불 꺼내 온 서윤채는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침대 정리를 해 주었다. 행동은 집주인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제 집에서 이리도 편안히 움직이는 서윤채라니. 바로 직전 몸을 맞대고 애정을 나눠서일까. 괜히 더 감정이 북받치는 듯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현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양쪽 엄지를 치켜세웠다.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상대는 고갤 가로저으며 마찬가지로 엄지를 들어 주었다.
“배 안 고파? 밥 먹어야지.”
“시켜 먹어도 돼? 나 나갈 기력이 없어…….”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시켜.”
응. 작게 대답한 채현은 배달 앱을 켜 서윤채가 좋아하는 한식으로 주문했다. 결제까지 마친 뒤엔 핸드폰을 내려 두고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상대는 곧장 곁으로 다가왔다.
“있잖아.”
“응.”
다정히 소리를 낸 서윤채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머리를 매만졌다. 채현은 잠이 솔솔 쏟아질 만큼 상냥한 그의 손길을 느끼며 미소 띤 낯을 눈에 담았다.
“……어땠어?”
이런 질문이 별로라는 걸 알지만 묻고 싶었다. 과연 서윤채도 저처럼 만족했을지 알고 싶었고. 만약 아니라면 그 이유를 알아야 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 솔직히 말해 그저 궁금하기도 했다.
“좋았지.”
한데 상대는 그러한 걱정이 무색하도록 환히 웃어 보였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채현은 메아리치듯 머릿속에서 울리는 말을 곱씹다가 팔을 뻗어 서윤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당연한 반응처럼 등 뒤로 팔을 둘러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심장 박동을 닮은 듯 다정하고도 따뜻한 손짓이었다.
밥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때쯤 도착했다. 기력 회복을 할 겸 국밥 두 개를 시켰는데 다행히 서윤채도 맛있게 먹었다.
“남기지 말고 먹어. 그래야 기운이 나지.”
그리고 그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깍두기를 집어서 올려 주었다. 채현은 제가 젓가락을 쓰지 않고 식사하고 있다는 걸 공기를 반쯤 비우고 나서야 깨달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해 미처 몰랐는데……. 국밥 국물보다 서윤채가 보여 주는 애정과 다정함이 마음을 데우는 듯했다.
밥을 다 먹은 뒤엔 한낮의 여유를 닮은 졸음이 밀려와 깨끗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졸리면 자. 깨워 줄게.”
“너 집 안 가도 돼?”
“응. 그냥 이 집 객식구로 살려고. 나 정도면 괜찮은 동거인 아니야?”
“월세 백만 원 받아야겠다…….”
“집주인이 야박하네. 우리 채현이 야무진 건 알겠는데, 애인한테는 살살 좀 해 줘.”
채현은 서윤채의 품에 안겨 농담을 주고받다 낮잠을 잤다. 등을 토닥이는 손짓은 잠들기 직전까지 멎지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된 채여서일까. 꿈속에서도 행복한 것들이 가득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어스름한 저녁 하늘을 응시하던 채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금 자고 일어났더니 기운이 나는 듯했다.
“저거 해결하러 갈래?”
“그래.”
구석에 고이 모셔 뒀던 이불을 가리키자, 서윤채는 흔쾌히 승낙했다. 재빠르게 짐을 챙겨 향한 근처 셀프 빨래방은 다행히 사람이 몇 없었다. 사용 중이지 않은 기계가 있어 기다림 없이 바로 빨래를 할 수 있었다.
이후론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들고 걷다 근처 벤치에 자릴 잡았다. 일전에 서윤채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 장소였다. 이불이 담긴 짐 가방은 텅 빈 옆 벤치에 내려 두고, 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말 좀 해 봐.”
“뭐를?”
“네가 바라는 이상적인 연애?”
“그게 뭐야…….”
“있을 거 아니야. 애인한테 바라는 점.”
가벼이 반응하며 설핏 웃었지만 서윤채는 퍽 진지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처럼.
“내가 친구 권채현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데…….”
“…….”
“생각해 보니까 애인으로선 전혀 모르겠더라고.”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저희는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고 형제였으나, 단 한 번도 애인이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 변화를 인정하지 못해 지레 겁부터 먹었지만 이제는 알았다. 모든 게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저희의 일상은 변함없이 흐를 테고, 그 사이에 애정이 자리하게 됐을 뿐이라는 것을.
“너는?”
“나?”
“응. 너도 있으면 말해 줘. 내가 일등 남자 친구 해 줄게.”
“야망이 엄청난데.”
놀리듯이 말하는 서윤채를 따라 채현도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소리 뒤로 찌르르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도 불어와 주변 나무가 흔들렸다.
“나는…….”
“어.”
“안 변했으면 좋겠어.”
선명한 계절의 흔적이 곳곳에서 밀려왔다. 채현은 한여름의 정취가 묻어나는 공간에서 서윤채만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았다. 다른 무언가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듯이.
“시간이 많이 지나도…….”
“…….”
“그냥, 오늘처럼 같이 있는 게 당연했으면 좋겠어.”
애인으로서의 서윤채에게 바라는 점은 단 하나였다. 그 역시 지금 같은 순간을 당연히 여겨 주기를. 본인의 시간에서 결코 뺄 수 없는 찰나로 다루어 주기를.
“네가 나를 처음처럼 좋아하지 않는 순간이 오게 돼도… 그래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하여 설령 애정의 온도가 낮아진다 할지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너무 큰 걸 바라는 거 같아? 그러면 쫌 바꿀게…….”
어쩌면 가장 간단하고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게 어디 있을까. 사소한 취향도 시간이 흐르며 세월을 덧입으면 변하는 법인데. 그를 알면서도 묻고 있는 거였다. 그만큼 서윤채가, 그와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이 소중했으니.
“네가 바라는 걸 왜 바꿔.”
나지막이 대꾸한 서윤채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음…….’ 목을 울렸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는지 말이 이어지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나는 너한테 솔직하고 싶거든. 그게 뭐가 됐든. 연인 사이라면 그게 예의라고 생각하고.”
“응.”
“근데 지금 말로만 평생 똑같은 마음으로 좋아하겠다고 하면,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 아니야?”
믿음직스럽지가 못하잖아. 마주한 눈을 떼지 않고선 속삭인 이가 씩 입꼬리를 당겼다.
“네가 그런 말로 만족한다면 할 수야 있긴 한데, 나는 그러긴 싫거든.”
“어…….”
“오래 만나다 보면 싸울 일도 있겠지. 서로 감정 상할 일도 있을 거고.”
응. 숨죽여 대답한 채현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채가 늘어놓은 말이 다분히 현실적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여타 연인이 그러하듯 저희도 매일이 행복하고 좋을 수만은 없으리라.
“지금이랑 똑같을 거라고 쉽게 말 안 해. 당장 오늘만 해도 난 네가 더 좋아졌는데.”
웃음 어린 목소리로 말을 맺은 서윤채가 팔을 뻗어 손을 잡아 왔다. 천천히 사이로 파고들어 손깍지를 끼는 행동은 몹시 자연스러웠다.
“그냥, 나는 네가 싫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고…….”
“…….”
“내 시간에서 네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어.”
느릿하게 손등을 문지르는 손짓만큼 다정한 목소리였다. 묵묵히 그를 듣던 채현은 정해진 수순인 양 입매를 늘어뜨렸다. 솔직담백한 그의 말이 고백이라도 되는 듯해 심장이 울렸다.
“……그게 평생 보자는 소리 아니야?”
“그런가. 그러네.”
서윤채에게도 저와 함께하는 시간이 당연한 듯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우리 채현이 매년 감기로 고생하는데, 나 아니면 누가 널 챙겨. 내가 해야지.”
오랜 시간 서로를 알아 왔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일까. 장난스레 전해진 특별할 것 없는 그 한마디가 더욱 크게 와닿았다. 변함없는 일상을 약속해 주는 것 같아서.
“우리 연애는 처음 해 보는 거잖아.”
“응.”
“하나씩 같이 맞춰 가면서 지내다 보면, 또 17년 금방 지나 있지 않겠냐.”
“……그러네.”
같이. 그 두 음절이 주는 울림이 무어라고 좋은지. 채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가 보이도록 환히 웃었다. 상대 역시 엇비슷한 미소를 머금은 건 그와 동시였다.
“내가 바라는 건 되게 쉬워. 엄청 간단해.”
“뭔데?”
“이리 와 봐.”
몸을 틀어 앉으며 붙잡지 않은 팔을 벌린 서윤채가 까딱 고갯짓했다. 와서 안기라는 듯한 몸짓에 채현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공공장소인 거 알아?”
“지금은 우리밖에 없잖아. 안고 싶어서 그래. 안아 주라.”
애교라도 부리는 양 말미를 길게 끌며 속삭이는 이를 이길 재간 따위 없었다. 눈을 찡그리며 웃은 채현은 결국 그의 곁으로 다가가 목을 둘러 안았다. 서윤채는 화답하듯 꼭 감싸 안아 주었다. 와 닿는 온기와 심박동이 마음을 울리는 듯했다.
“……이제 진짜 실감 나는 거 같아.”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응.”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 채현은 서서히 힘을 빼고 그에게 기댔다. 온전히 맞붙어 몹시도 안정적인 자세였다. 바라 마지않던 평온이 밀려와 온 곳을 물들였다.
“우리 그럼 이제 데… 이트도 해?”
“매일 할까?”
그 뒤로도 한참을 오롯이 둘만 존재하는 공간에 머물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그리는 새로운 일상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