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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Closer
04. Closer
틱. 틱. 라이터 부싯돌 굴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두운 골목을 밝히며 담뱃불이 타올랐다. 허공에서 너울대던 불씨는 흰 담뱃대에 옮겨붙으며 사그라졌다.
“…….”
후. 눈을 내리깐 채 깊이 빨아들인 서윤채가 라이터를 넣으며 긴 숨을 흘렸다. 담뱃불이 아른거릴 때 보인 낯엔 표정이 전혀 없었다. 무심한 얼굴로 희뿌연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기만 반복했다.
공간은 골목 밖과 단절된 양 어둡고 고요했다. 밀려들어 오는 소음과 상반되는 침묵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어두컴컴한 곳을 밝힌 빛은 타들어 가는 붉은 점이 전부였다.
가느다랗게 부서지는 연기를 따라 서윤채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졌다. 군데군데 생긴 웅덩이 위로 새카만 인영이 비쳤다. 제 모습을 훑던 이는 느릿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려나.
오래지 않아 무언가 쏟아질 광경에도 서윤채는 심드렁했다. 얼핏 무기력해 보일 만큼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할 뿐이었다.
고요를 덧입은 평온이 깨진 건 코트 속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린 뒤였다. 서윤채는 담배를 입에 문 채 핸드폰을 꺼냈다. 입술에 걸린 담배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경영 김태윤 : 야 군인 술ㄱㄱ?] 오후 7:40
“제대한 지가 언젠데.”
확인한 메시지는 굳이 답장할 수고를 들일 필요 없는 연락이었다. 헛웃음만 흘리며 대화창을 나온 서윤채는 눈에 띈 이름에 멈칫했다.
곧은 손가락이 찰나의 고민을 드러내듯 화면 위를 배회했다. 잠시 생각하던 서윤채는 다른 손으로 담배를 옮겨 쥐며 채현과의 대화창을 눌렀다.
대화는 몇 주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마저도 바로 이어지지 않고 시간 간격이 꽤 있었다. 자신이 군 복무를 하느라 그럴 수 있다 쳐도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분명 다른 문제가 있으리란 불유쾌한 직감이 몸집을 부풀렸다.
[권 : 나중에너제대하면그때보자ㅎ] 오후 7:43
[권 : 마지막까지다치지말고] 오후 7:46
“얼굴 한 번을 안 보여 주지. 정 없는 새끼.”
예감이 확신으로 이어지는 건 쉬웠다. 자신과 채현 사이에 내려앉은 이질적인 기류는 너무나 선명했으니. 아마도 그 시작은 갓 수험생이 되던 무렵, 채현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그날이리라. 몇 년이 지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생생히 떠오를 만큼 뇌리에 박힌 날이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걱정과 분노, 안도 따위가 한데 섞여 신경이 한계까지 닳은 듯했는데. 불쑥 치미는 감정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전 채현을 몰아세웠다.
그 순간 권채현이 어땠던가.
그는 거짓말을 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변함없이 솔직하기만 하던 이가 미안하단 말을 반복했다. 해야 할 말을 모조리 삼키고 사과만 내뱉는 사람처럼.
그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다. 무너질 듯 우는 이를 제 뜻대로 헤집는 대신 침묵하며 어울려 주길 택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선택이 악수였다. 그 이후로 채현의 행동이 달라졌으니.
“…….”
호흡하듯 웃은 서윤채는 쌓인 대화를 휙 위로 올려 보았다.
[권 : 면접잘보고와쫄지말고] 오전 8:30
[권 : 수능별거아니래다맞고와라] 오전 7:13
공부밖에 안 보이는 이처럼 굴던 상대는 이따금 먼저 연락을 해 왔다. 원래도 맥락 있게 구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 무렵엔 특히 심했다.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단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그저 언젠가 채현이 ‘전부 말할 필요가 있느냐.’ 주장했던 게 떠올라 캐묻지 않고 그러려니 넘겼을 뿐.
그 방치가 이런 상황으로 이어질 줄은 미처 몰랐던 거다. 이상 행동을 하던 채현이 느닷없는 통보와 함께 입대할 줄이야.
[권 : 야나군대가] 오전 6:30
오전 7:02 [군대 가는 꿈 꿨냐? 기상 시간이 이른데]
오전 7:03 [아무래도 면제 아니니까 가긴 해야겠지. 언제 갈까]
[권 : 오늘ㅎ;] 오전 8:30
[권 : 나다녀올게건강잘챙기고대학생활잘하고있어]
[권 : 끼니도챙기고알겠지빠이] 오전 8:35
오전 9:11 [?]
어처구니없는 내용에 전화를 걸어 봐도 전원이 꺼져 있단 말만 들려왔다. 이 새끼가 또 헛짓거리를 하는 건가 싶던 상황은 전부 사실이었다.
채현이 정말 입대했단 소식을 듣고 얼마나 황당했던지. 서운하단 생각을 했나. 그보다 괘씸하단 느낌을 먼저 받았다. 말 한마디 없다가 당일 통보를 하고 사라지다니. 자신은 동반 입대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까지 했는데.
졸업식 날, 추위에 뺨을 붉게 물들인 그가 나중을 기약한 말이 설마 이건가 싶었다.
“어이가 없어서…….”
홀연히 곁을 떠난 상대는 그 뒤로도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면회를 가겠다는 말에도 학을 떼며 만류를 표했다.
‘아, 오지 말라고.’
‘왜 가 준다고 해도 지랄이지? 내가 쪽팔려?’
‘아니 무슨 그런 말을……. 너 왜 그런 생각 해? 대학 가서 기죽었어? 누가 뭐라고 해? 꼽 줘?’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됐으니까 왜 선 긋는지부터 말해.’
‘아니, 선을 긋는 게 아니라……. 아, 진짜, 너한테 빡빡이인 거 보여 주기 싫다고…….’
그깟 머리 민 게 뭐 대수라고 유난을 떠는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결국은 뜻을 굽혔다. 1학기가 끝나고 자신도 입대해 채현과는 지금껏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우연인지 뭔지 휴가도 한 번을 겹치지 않았으니.
“…….”
하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던 상황도 이제는 끝이었다. 둘 다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제약 없는 상태로 돌아왔으므로. 서윤채는 어느새 짧아진 담배를 끄고 다시 새걸 꺼냈다.
“아…….”
채현의 흔적을 좇으며 떠올린 탓일까. 담배를 입에 물려던 행동에 제동이 걸렸다. 흰 담배를 내려다보던 서윤채는 문득 치민 의문에 곰곰이 머릴 굴렸다.
내가 이걸 언제부터 피웠더라. 어쩌다가 자연스럽게 찾게 됐지.
생각은 금세 대학교 1학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 당시엔 새내기라는 이유로 질리도록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 술은 안 한다는 말에도 음료수만 마셔도 괜찮으니 함께하자며 붙들려 이동했더랬다. 다들 술만 들어가면 유독 담배를 자주 찾았는데, 그 자리에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피워야겠단 생각은 없었는데. 매일 거절하던 술을 마신 어느 날, 군대 얘기를 하다 연쇄적으로 채현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알딸딸해진 채여서일까. 문득, 그냥, 쫑알쫑알 시끄럽던 이가 사라지고 나서 심심해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형, 저도 한 대만 주세요.’
‘너 안 피운다며?’
‘네. 근데 아무것도 안 해서 그런가…. 심심해서요.’
단조로워진 일상을 채우고자 홧김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순간의 충동이 습관이 돼 지금까지 버릇처럼 찾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징. 담배에 틀어박힌 시선을 움직인 건 길게 울린 진동이었다. 서윤채는 새 담배를 그대로 집어넣고 걸음을 옮기며 전화를 받았다.
“왜.”
거리의 소음과 똑같은 활기가 핸드폰 너머에서 느껴졌다.
“바빠. 용건만 말하고 끊어.”
퉁명스러운 답변에도 상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소리 높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오피스텔 짐 정리.”
― 복학도 안 할 새끼가 너는…. 왜 문자 씹…!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반, 주위의 고성이 반인 통화 상태에 서윤채는 무감하게 반응했다. 가만히 들어 보니 술자리로 오라는 듯해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을 표했다.
“나 빼고 오붓하게 마셔. 나중에 보자. 끊는다.”
상대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는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사라졌다. 핸드폰을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은 서윤채는 사람들 틈에 섞여 든 채 발을 내디뎠다.
소란스러운 밤거리에서 얼마간 고요히 걸었을까. 상가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들 때문에 냄새가 날아왔다. 분명 자신도 흡연자인데 우습게도 그 냄새가 역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더해 공연히 입까지 씁쓰름하고 불쾌해지는 듯했다.
“…….”
볼 안쪽을 혀로 훑던 서윤채는 형형색색 빛나는 전광판을 응시하다 떠오르는 얼굴에 짧게 웃었다. 붉은 전광판을 가리키며 제 터진 입술과 비슷하지 않냐 묻던 권채현. 심심할 틈을 주지 않던 권채현……. 그 끝엔 대체하듯 찾은 담배 대신 채현이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
머지않아 현실이 될 생각을 이어 가며 서윤채는 상황을 정리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 채현의 이상 행동에도 분명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제 와 그 이유를 알려 해도 소용없었다. 캐묻지 않았던 지난날을 후회해도 마찬가지였고.
중요한 건 앞으로였다. 채현의 뜻대로 입을 다물었을 때의 결과가 어땠는지 톡톡히 경험한 지금, 서윤채는 새로이 계획을 세웠다. 앞으로는 순순히 입 닥치고 넘어가 주는 대신 뭐든 토해 내게 해야겠다고. 불유쾌한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니까.
“…….”
조만간 채현을 잡아다 눈앞에 데려올 생각을 하며, 서윤채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새 계절의 시작을 알리듯 거리엔 완연한 봄기운이 가득했다. 이따금 차가운 바람이 불긴 했지만 이마저도 살랑대며 내려앉았다.
그 한가운데서 채현은 말갛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 손엔 커다란 짐을 들고, 다른 손으론 핸드폰을 귓가에 붙인 채 열심히 걸었다.
“응, 엄마. 나 집 앞 도착했어. 반찬 잘 먹을게요.”
멈춤 없이 흐르던 발걸음은 깔끔한 오피스텔 앞에서 멈춰 섰다.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선 채현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이어 갔다.
“다음 주? 나 공강이 없어서 평일은 조금 힘들고 주말에 갈게.”
띵. 소리와 함께 열린 기계에 올라타 4층을 눌렀다. 제대 이후 복학하자마자 얻은 이 집에서의 생활도 이젠 익숙해진 채였다.
“응. 나도 사랑해. 푹 쉬세요.”
전화를 끊은 채현은 집 안으로 들어가 챙겨 주신 반찬만 정리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옷을 갈아입고 청소도 해야 하지만 너무 귀찮았다.
“…….”
침대와 하나 되어 천장만 보고 있으려니, 엄마와 밥을 먹을 때 들은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윤채 제대했다던데 왜 얘기 안 했어.’
‘어?’
‘엄마도 윤채 보고 싶으니까 한번 데리고 와.’
제대를, 했다고…….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긴 했어도 근래 들어 한 적은 없어 소식이 느렸다. 엄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에 채현은 형용 못 할 기분을 느꼈다. 그건 걱정이기도 했고, 기대감이기도 했다.
제 감정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불안에 잠겨 가던 무렵, 이대로 가다간 서윤채에게 모든 걸 들키고 끝이 날 수 있겠단 공포가 치밀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애정을 죽여야만 했다. 채현으로선 그와의 관계가 무너지는 게 가장 무서웠으니. 군대는 유일하고도 최선인 방법이었다. 자연스럽게 거리를 둘 수 있었으니까.
설익은 짝사랑을 무사히 끝냈나. 아직은 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서윤채와 마주한 게 까마득해서 쉽사리 확신할 수가 없었다.
“먼저 연락해 봐야 하나…….”
속절없이 심란해진 채현이 긴 한숨을 내쉴 때였다. 똑똑,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 뭐 시켰나?”
택배인가 싶어 몸을 일으킨 채현은 ‘누구세요?’ 물으며 도어록을 해제했다. 그 상태로 문을 밀어 틈이 벌어진 순간, 눈앞에 선 상대를 보고 그대로 굳었다.
“…….”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빤히 바라보는 이가 너무도 익숙해서, 얼핏 차갑게 보이는 얼굴이 끝내 풀어지며 짓궂은 웃음이 떠오르는 순간이 선연해서.
“야. 뭐 해. 네 친구 안 반겨 줘?”
멍하니 서윤채의 얼굴만 응시했다.
정말 서윤채인가.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반복해 떠올리던 상대를 바로 마주한 탓인지 얼떨떨할 뿐이었다.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복도를 울린 목소리가 멎자 공간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오랜만의 재회엔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어딘지 모르게 긴장 어린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서로의 숨소리까지 전부 들릴 침묵 속에서 채현은 홀린 듯 상대를 바라보았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허공을 기던 시선이 바로 얽혀 들었다.
“…….”
서윤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잘됐다는 듯 빤한 시선을 던졌다. 앞서 그를 살피던 채현이 움찔 놀랄 만큼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그는 낱낱이 뜯어보길 결심한 양 집요하게 구석구석을 훑었다. 제 뜻과는 상관없이 관찰 대상이 된 채현의 평정은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길이 온몸을 옭아맨 듯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자극에 살갗이 모조리 경직된 기분이었다. 손끝이 뻣뻣해지고 원인 모를 초조함이 가슴께를 두드렸다.
“…….”
이 정도까지 긴장할 일이던가. 마른 입술을 적신 채현은 손을 말아 쥐며 침을 삼켰다. 꼴깍 소리가 적막 속에 유독 크게 울렸다. 상대도 그를 들었는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반응이 왜 그 모양이야.”
가만히 지켜보던 이는 그제야 재차 소리를 냈다. 까칠한 말투와 사나운 듯 장난스러운 웃음. 귓가로 파고드는 목소리……. 감히 모를 수 없을 만큼 익숙한 것들이었다. 바짝 일어선 신경이 끝내 아우성을 쳐 댔다.
진짜 서윤채구나. 어긋났던 호흡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심장이 요란스레 뛰었다. 그간의 공백이 우습도록 여전한 그의 모습에 몸이 금세 반응했다.
“안 반갑냐?”
머리를 삐딱하게 기울인 그가 툭 내던지듯 물었다. 채현은 잠자코 고개만 내저었다. 어떻게 안 반가울 수가 있을까. 묻는 의미가 전혀 없는 질문이었다.
“근데 왜 아무 말을 안 해. 내외해?”
“…….”
“우리 채현이가 낯을 가리나…….”
간을 보듯, 혹은 장난을 치듯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성질이 모호한 말을 듣던 채현은 목을 한 번 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깜짝 놀라서 그렇지. 어떻게 알고 왔어?”
그 노력에도 서윤채는 어쩐지 못마땅하단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흠칫한 채현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자, 멈춰 선 채로 만면 가득 황당함을 드러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제 발 저린 채현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으나 그는 까칠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뭔데.”
“…….”
“찔리는 게 있긴 한가 봐?”
있다 뿐일까. 꽤 많기까지 해 할 말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살핀 상대의 기세는 여전했으나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늘 안 그런 척 세심했던 그의 성정도 여전한 듯했다. 결국 먼저 꼬리를 내리는 건 채현의 몫이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확 가까워지니까 놀라서 그런 거지.”
“놀랄 일도 많다. 군대는 어떻게 다녀왔냐? 벌벌 떨고 다녔어?”
“그 정도는 아니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내뱉는 동시에 서윤채가 긴 숨을 내쉬었다.
“채현아.”
“어?”
“넌 지금 순서부터 틀려먹었어.”
영문을 몰라 바라본 그는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에서도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 묻어났다.
“어떻게 왔냐고 먼저 물어볼 게 아니라 반갑다고 말해야지. 지금 나만 반가워?”
“아……. 야.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나도 반갑지.”
“그래? 보고 싶었어?”
뒤늦게 그가 했던 질문을 떠올리고 답하자 뜻 모를 물음이 되돌아왔다. 채현은 서윤채를 힐끗 보았다가 입술을 한 번 적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서윤채가 먼저 질문을 던진 거니까. 친구 사이에도 충분히 보고 싶을 수 있으니까. 납득 가능한 이유를 생각하며 긍정의 뜻을 전했다. 서윤채가 한숨처럼 웃음을 흘린 건 그 직후였다.
“그런 새끼가 연락 한 번을 안 했다, 그치.”
“……우리 하긴 했잖아.”
“팔촌한테 하는 생사 보고만도 못한 걸 연락으로 쳐주는 줄은 몰랐네.”
신랄한 평가에 채현은 또 침묵을 택해야만 했다. 그의 말마따나 생사 보고용 연락을 하게 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잠수 타면 서윤채가 상처받을까 봐 기각하고, 그렇다고 평소처럼 지내자니 제 마음 정리에 도움이 안 될 거 같고……. 꽤 오래 골머리를 앓고 도출한 결과였는데, 그마저도 그의 성엔 안 찬 듯했다.
변명거리가 없어 ‘그래도 혼자 계속 응원은 하고 있었어.’ 중얼거리자, 서윤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짧게 웃고 말 뿐이었다.
“나 여기 세워 둘 거야?”
듣기 좋은 웃음을 흘린 그는 이내 퍽 뻔뻔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근데 나 아직 청소를 못 해서 집이 좀 더러운데.”
“어차피 깨끗할 거라고 기대도 안 했어.”
“아, 그래.”
“아니면 뭐,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 그런 거면 기다리고.”
얼굴을 직시하던 시선이 일순 날카롭게 열린 문 틈으로 흘렀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치우고 불러. 아니면 네가 준비하고 나오든가.”
말을 맺고 고갯짓하는 그는 순순히 돌아갈 생각이 아예 없는 듯했다. 얘는 어쩜 성격도 똑같을 수가 있지……. 거침없는 태도에 새로이 감탄한 채현은 문을 더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와.”
뒤이어 걸음을 옮긴 서윤채는 문을 닫으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묵묵히 신발을 벗던 그가 설핏 웃은 건 여분의 실내용 슬리퍼를 꺼낼 무렵이었다.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은 터라 작은 자극에도 동요하게 됐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빠르게 시선이 그를 향했다. 눈빛으로 의중을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신발을 가리켰다.
“너 이 버릇 여전하다 싶어서.”
“아…….”
덩달아 아래로 떨어진 채현의 시야에 나란히 놓인 두 신발이 보였다. 방 정리는 더럽게 못 하면서 신발 정리는 잘한다고 서윤채가 늘 신기해하던 오랜 습관이었다.
“…….”
크기 차이가 나는 신발을 응시하던 채현은 그에게 실내용 슬리퍼를 내주고 몸을 돌렸다. 서윤채가 제집을 찾은 첫 손님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되고 의식이 됐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해 놓고 사네.”
여유로이 방을 둘러보던 서윤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채현은 아무 데나 던져둔 외투를 바로 걸며 어색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학교는.”
“복학해서 다니고 있어.”
“너 친구 있어? 바로 입대해서 동기들 얼굴 모르지 않나.”
“나랑 똑같이 입대했던 애 있어서 걔랑 놀아. 다른 선배들도 있고.”
말을 맺자 하, 하는 웃음이 들렸다. 끼리끼리 논다는 듯 고갤 저은 그는 자연스럽게 책상 의자를 빼 몸을 앉혔다.
“밥은.”
“집에 가서 먹고 왔어. 너는?”
“너랑 같이 먹으려고 굶고 왔는데.”
“어, 반찬 있는데 차려 줄까?”
순간 당황해 당장에라도 밥상을 차려 주려 했으나, 서윤채는 심드렁히 손만 내저었다.
“됐어. 이따 나가서 저녁이나 먹어.”
“너 배고프지 않겠어?”
“딱히.”
더 권해 봤자 응하지 않을 걸 알기에 채현도 침대에 걸터앉았다. 상대는 노골적으로 그 움직임을 좇았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부산스럽게 굴어도 눈길은 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내려앉자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단 사실이 의식됐다.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닌데, 오랜만인 탓인지 어색하고 행동에 제동이 걸렸다.
“…….”
그러기도 잠시, 서윤채를 곁눈질하다 결국 완전히 시선이 맞물렸다.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 낙담하던 채현은 조심스레 그를 살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눈에 담은 그는 이전보다 키가 조금 큰 듯했다. 운동을 한 건지 몸도 이전보다 탄탄해 보였고.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탓인지 머리도 조금 짧았다. 변함없이 잘난 건 똑같은데 그 사이사이 낯선 느낌이 묻어나 생소했다.
“야.”
기꺼이 시선에 응해 주던 이가 소리 내어 주의를 끌었다.
“나한테 할 말 없냐?”
단순한 질문일까. 채현이 느끼기엔 심문에 가까웠다. 먼저 말하면 봐주겠다는 그의 아량으로 보이기도 했고. 다만 켕기는 게 많은 입장으로선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자 그는 바람 빠지듯 웃어 보였다.
“가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가늠이 안 돼.”
“딱히 별생각은 없는데…….”
“그럼 생각을 좀 하고 살아.”
까칠한 타박에 저도 모르게 낯이 불퉁해졌는지, 서윤채는 조금 더 진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 모습에서 채현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새삼, 서윤채가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
때론 불시에 확 번지는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치밀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진을 봤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어 그가 담긴 사진을 꺼내 보곤 했다. 추잡하게 이러지 말고 털어 내자 마음을 다잡다가도, 속절없이 흔들렸으니.
그 시간만큼 비례하게 쌓인 건 죄책감이었다. 떳떳하지 못한 순간이 쌓일수록 마음은 무거워졌다. 그 끝에 서윤채를 마주한 지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다시 만나 기뻤으며 동시에 죄스러웠다. 철 지난 애정을 마주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앞에 두고 왜 멍을 때려.”
“그냥…….”
서윤채는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말하라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너는 나 안 어색해?”
“어색해했으면 좋겠냐?”
“아니, 그건 아닌데…….”
“나도 신기하긴 해. 네가 똑같이 생겨서 그런가.”
무의식적으로 제 뺨을 매만져 본 채현은 눈앞의 상대를 바로 보았다.
“너는…… 변했네.”
“더 잘생겨졌지.”
감히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능청스레 대꾸하는 그를 눈에 담았다. 홀린 듯 흘리던 눈길에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서윤채였다.
“보고 싶었다, 채현아.”
“……나도.”
그에 채현은 자신이 내뱉을 수 있는 진심 중 가장 단조로운 걸 토해 내듯 고백했다. 이어 서윤채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다.
“서윤채, 밥 먹으러 가자.”
“너 먹었다며.”
“얼마 안 먹어서 배 안 불러. 가자. 뭐 먹고 싶어? 내가 사 줄게.”
다행히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이 이상 단둘이 있다간 큰일이 나리라 생각한 채현은 안심하며 후다닥 움직였다. 먼저 밖으로 향한 서윤채는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문을 잡고 기다려 주었다.
“근처에 맛있는 곳 있냐?”
“더 멀리 가도 되는데.”
“굳이 뭐 하러. 그냥 여기서 먹어. 지리 파악도 할 겸.”
“어? 어.”
강경한 서윤채의 태도에 채현은 휩쓸리듯 대답했다. 떨떠름해하기도 잠시, 어디로 그를 데려갈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끝에 향한 곳은 자주 가던 백반집이었다. 고급스러운 식당은 아니었으나 맛 하나는 장담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장님도 무척 친절하셨는데, 오늘은 훤칠한 친구랑 같이 왔냐며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자주 왔나 봐.”
내내 침묵을 유지하며 빤히 바라보던 이는 자리에 앉아서야 입을 열었다.
“어. 혼자 먹기 편해서.”
“심심했겠네.”
딱히 그런 생각은 안 했었지만 서윤채의 말을 듣고 보니 심심했던 건가, 싶기도 했다. 이후론 음식이 나올 때까지 별다른 대화 없이 마주 앉아 있기만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침묵은 유지됐다. 고등학교 시절, 급식을 먹을 때처럼 가벼운 농담은 주고받지 않았다.
역시 이런 데서 떨어져 있던 티가 나는 건가…….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국물을 먹던 채현은 혀를 덴 듯해 물을 따르려다 멈칫했다. 가득 채워진 물컵이 이미 지척에 놓여 있었다. 물을 따라 줬을 이는 무심하게 제 밥을 먹을 뿐이었다.
“…….”
아……. 탄식을 닮은 숨이 터지는 동시에 고개가 기울었다. 배가 불러 손이 느려졌을 즘엔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유독 먹는 속도가 느린 제게 서윤채가 속도를 맞춰 주고 있었음을.
어딘가 심란한 채로 끝낸 식사는 서윤채가 계산을 했다.
“내가 사 주려고 했는데…….”
“뭐 얼마나 된다고. 야. 잠깐 있어 봐. 손 좀 씻고 올 테니까.”
시무룩하게 고갤 끄덕인 채현은 먼저 가게 밖으로 나서 서윤채를 기다렸다. 정말 손만 닦고 나온 건지 그는 금세 곁으로 다가왔다.
무언가 이야기할 듯 입을 연 서윤채의 목소리보다 먼저 울린 건 긴 진동이었다. 쯧, 혀를 찬 서윤채는 물기가 남은 손을 들어 보이며 코트 주머니를 향해 눈짓했다.
“야. 핸드폰 좀 꺼내 줘.”
잠시 멈칫한 채현은 쭈뼛쭈뼛 그의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핸드폰을 꺼내려던 순간엔 담뱃갑 같은 것이 만져져 한층 더 당황스러웠다. 얼떨떨한 채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 주자, 그는 됐다는 듯 다시 넣어 달라고만 했다.
“……너 담배 피워? 언제부터? 몸에 안 좋은데 왜 해.”
“너 때문이잖아.”
그의 말대로 움직인 끝에 조심스레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성질이 전혀 달랐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네가 나한테 소홀해져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가 여상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는 평상시 주고받는 말처럼 이야기했지만 채현은 그렇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야속하게도 멀끔한 낯을 한 서윤채는 먼저 발을 내디뎠다. 세 걸음 정도 앞서 나간 그는 뒤를 돌아 여전히 박힌 듯 선 자신을 응시했다.
“채현아.”
“…….”
“나 존나 한가해. 날백수야.”
“……축하해?”
영문 모를 말에 성실히 답했을 뿐인데, 서윤채는 스치듯 웃으며 코트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가 한 번 더 입매를 풀며 씩 웃어 보일 찰나 바람이 불어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알아 두라는 소리야. 너 이제 나 놀아 줘야 하거든.”
“…….”
“간다. 연락할게.”
말을 맺은 서윤채는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돌아섰다. 그 모습을 본 채현은 문득 그를 불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
“아…….”
그 끝에 찾아든 건 깨달음이었다.
자신은 여전히, 서윤채를 좋아하고 있다는 자각의 순간이 재차 찾아들었다.
* * *
삑삑. 귀를 찢을 듯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에 채현이 눈을 떴다. 꿈속을 헤매던 정신이 단박에 끌어 올려졌다. 화들짝 놀라 눈을 굴리던 채현은 밝아진 공간에 탄식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과제 하다 잠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다시 모른 척 잠들까 고민하길 잠시, 결국 팔을 허우적대며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그 상태 그대로 숨만 쉬다 눈을 뜨니 부족한 잠을 알리듯 건조한 눈이 아우성을 쳐 댔다. 뻑뻑해진 눈을 겨우 달래며 확인한 핸드폰 시간은 이제 막 8시 4분을 지나고 있었다. 슬슬 일어나 씻으면 여유롭게 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진짜 1교시 죽고 싶다…….”
채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만 깜빡였다. 고등학교 땐 어떻게 매일 9시까지 등교했던 건지 아득하기만 했다. 지금도 수강 신청이 망한 탓에 1교시가 두 번이나 있고 공강이 없어 매한가지긴 했지만. 제 시간표를 보고 놀라던 서윤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수강 신청을 하긴 한 거야? 남은 거 주워 온 거 아니고?’
‘…….’
‘우리 채현이는 시간표로 현대 미술을 하네…. 재능이 있는 거 같아.’
기가 차단 얼굴로 웃으며 놀리는 꼴이 얄미워 ‘그러는 넌 얼마나 잘해서 그러냐.’ 따져도 봤지만, 전혀 소용없는 공격이었다.
‘나 학교 안 다니는데.’
‘어? 왜?’
‘다음 학기에 복학할 거야. 날백수라고 한 거 기억 안 나냐?’
그 순간 서윤채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휴학생 앞에서 재학생 따위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생각을 이어 가던 채현은 핸드폰을 들어 서윤채와의 채팅방을 확인해 보았다.
1 오전 3:51 [잘자]
아직 자는 건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의 ‘1’ 자가 그대로였다. 늦게까지 연락을 주고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스크롤을 올려 대화를 보던 채현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웃음을 머금었다.
연락한다고 했던 날백수는 정말 예고한 대로 행동했다. 이따금 직접 찾아와 만나는 날도 있었다. 끊김 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했다. 꼭, 감정을 자각하기 전 가장 친한 친구로 지냈던 그 시절처럼. 실상 자신은 매 순간 동요하고 여전히 애정을 죽이지 못한 채였지만. 다가오는 서윤채를 멀리할 수 없단 핑계로 사치스러운 시간을 누렸다.
[서유난 : 그러게 밀리지 말고 바로 하라고 했지]
[서유난 : 어차피 네가 하는 건데 왜 게으름을 피워?] 오전 2:12
오전 2:25 [하기싫은걸어떡해대신해줄것도아니면서잔소리하지마]
오전 2:26 [너맞는말만하는거진짜쫌..그래]
[서유난 : 대신 해 줘?] 오전 2:38
오전 3:00 [진짜?]
[서유난 : 못 해 줄 건 없고ㅋㅋ]
[서유난 : 넌 나한테 뭐 해 줄래] 오전 3:14
오전 3:20 [그냥내가할게..나가서커피나사와야지]
[서유난 : 이 시간에 어딜 가] 오전3:22
하물며 어제는 메시지에 답을 안 하자 전화까지 걸어왔다. 당황한 채로 연결한 핸드폰 너머에선 늦은 시간인 게 여실히 느껴질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 시간 감각이 없어?
자려고 했던 건지 서윤채의 음성은 평소보다 더 낮고 까칠했다.
‘왜 갑자기 잔소리야…….’
느닷없는 통화에 놀라 채현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웅얼거리기만 했다.
― 채현아,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해…. 3시 넘어서 기어 나가는 새끼가 어디 있어.
‘많은데…….’
대충 옷을 껴입고 나선 밖은 조용하긴 했지만 불 켜진 가게가 꽤 있었다. 위험할 게 전혀 없는데도 서윤채는 마음에 안 드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 나돌아 다니다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좀 있자.
‘누가 무슨 사고를 친다고……. 그냥 커피 사러 편의점 가는 거잖아.’
― 물 마시면 되잖아.
‘카페인 없이 과제를 어떻게 해?’
그는 어처구니가 없단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소리로 전해질 만큼 기막혀하며 헛숨을 터뜨렸다. 채현은 그 맥락 없는 통화가 의아하면서도, 제게만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좋아서 결국 끊자는 소릴 하지 못했다.
금방 끊길 줄 알았던 통화는 예상외로 길게 이어졌다. 상대는 금방이라도 잠들 듯한 목소리로 이야길 이어 나갔다. 큰 주제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끊고 나면 무슨 이야길 나눴더라, 생각할 만큼 영양가 없는 말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도 채현은 차마 전화를 끊어 낼 수가 없었다. 커피를 산 뒤에도 괜히 큰길로 돌아 집으로 향할 정도로 좋았으니까. 떳떳하지 못한 자신이 먼저 연락할 수는 없으니, 서윤채가 다가왔을 때 누리고자 하는 못된 마음이었다.
하나 남은 양심은 있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도망치듯 전화를 끊었더랬다. 정신을 차리고 메시지를 남겼는데 아직 안 읽은 걸 보니 바로 잠든 듯싶었다.
그 때문에 마음은 더 싱숭생숭했다. 바로 잠들 정도로 졸렸던 이가 통화까지 해 준다니……. 서윤채의 모질지 못한 성정에서 나온 배려라는 걸 알기에 헛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씁쓸할 뿐이었다. 제 감정만 없었더라면 평화로운 날들을 보낼 수 있었으리란 생각에 더더욱.
“…….”
한숨을 내쉰 채현은 마른세수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서윤채 생각만 했을 뿐인데 시간이 훌쩍 흘러 서둘러야만 했다. 애써 머리를 비워 내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준비를 마치자마자 책상에 올려 뒀던 교재와 노트북을 쓸어 담고 뛰쳐나왔다.
지체 없이 학교로 향한 덕인지 수업 시작 전에 강의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채현은 함께 수강 신청을 망친 유일한 동기, 이윤범의 곁으로 가 앉았다.
“왔냐.”
“너 과제 다 했어?”
“제출에 의의가 있는 거 아니겠냐.”
낯빛이 안 좋던 친구는 퍽 위안이 되는 소릴 했다. 채현은 실없이 웃으며 교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와 싱거운 대화를 나눴다.
망한 시간표는 비단 1교시 때문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을 무시하고 채운 수업과 과목 사이사이 생긴 무지막지한 공강도 문제였으니. 그 때문에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해도 일과를 끝내면 5시가 넘어 있었다.
“…….”
녹초가 되어 과방에 늘어진 채현은 이윤범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늦은 거 과제나 다 끝내고 가잔 말에 온 건데, 그는 여자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기만 했다.
“너 여자 친구랑 오래 만났다고 했나.”
“만나기 시작한 건 제대 이후라 얼마 안 됐고, 서로 좋아하는 건 고등학교 때부터 알았고.”
“친구였다며.”
“기승전결이 완벽하지.”
그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뿌듯하다는 듯 답했다. 처음 이 이야길 들었을 때는 묻고 싶은 게 무척 많았다. 걱정되진 않았는지, 망설임은 없었는지……. 하지만 하등 쓸모없는 질문이란 걸 알아 삼켜 냈다. 자신은 서윤채와 그런 관계가 될 수도, 될 마음도 없으니까.
이유 없이 가라앉곤 하던 기분이 또 스멀스멀 기어 내려갔다. 시무룩해진 채현은 ‘그래. 오래 만나라.’ 대꾸한 뒤 과제에만 매달렸다. 집중이 깨진 건 벌컥 과방 문이 열린 뒤였다.
“칙칙하게 둘이서 뭐 해? 과제 해?”
“안녕하세요. 저희 제출 얼마 안 남아서요.”
“에이, 그런 건 술 한잔 마시고 해야 더 잘 되는 거 알지. 술 사 줄게. 가자.”
활기차게 들어선 이는 한 학번 위의 선배 정문영이었다. 껄렁거리는 모습과 달리 언제나 장학금을 싹쓸이하는 이였고. 그녀는 문을 붙잡고 선 채 어서 나오라는 듯 턱짓했다. 이윤범과 눈을 마주하며 고민하던 채현은 이내 짐을 챙겨 일어섰다.
정문영을 쫓아 이동한 술집은 허름한 포차였다. 학교 주변이었으나 학생들이 많이 찾지 않아 조용했다. 도착하자마자 안주 세 개를 시키고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소주병을 기울였다.
채현의 주량은 빈말로도 잘 마신다 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저녁 무렵 마시기 시작하면, 완연한 밤이 되어선 당연한 수순으로 정신이 나갔다.
오늘도 사정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채현은 벽에 기대 졸다 깨길 반복했다. 정문영과 이윤범이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걸 한 귀로 흘리며 연신 꾸벅거렸다.
“채현이 집에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막차 탈 때까지 재우면 지가 알아서 깨요. 그리고 아까 조절해서 정신 남아 있을걸요.”
“그래? 채현이 술버릇은 없으면서 필름은 완전히 나가더라? 나 처음에 깜짝 놀랐잖아.”
“저도요. 이 새끼처럼 깔끔하게 날아가는 애는 처음 봐서.”
둘은 금세 걱정을 지우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테이블엔 술병이 점점 늘어났다. 고갤 처박고 자는 채현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대화가 잠시 멎은 건 테이블에 올려 둔 채현의 핸드폰이 길게 울린 순간이었다. 그를 본 이윤범은 채현의 어깨를 툭 치며 핸드폰을 건넸다. 깜짝 놀라 깬 채현은 일단 시키는 대로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목소리 봐라. 잤냐? 자는 거 깨운 거면 그냥 끊고.
익숙한 이의 음성이 약간의 소란과 함께 들려왔다.
“어. 아니야. 끊지 마…. 깼어. 계속해도 돼.”
술기운과 잠기운이 남아 있던 탓일까. 채현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하며 서윤채를 붙잡았다.
― 어디야. 집 아닌 거 같은데.
“여기가…….”
“친구? 오라고 해.”
주위를 두리번대는 걸 본 정문영이 이야기했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이가 올 리 없으므로 말하지 않았는데, 예상외로 서윤채가 먼저 소리를 냈다.
― 주소 찍어서 보내.
그는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정신이 반쯤 날아간 채현은 얼떨떨한 채 주소를 보내고 ‘억지로올필요어ㅗㅁ어’ 오타 가득한 메시지를 보냈으나 이 역시 답이 오진 않았다.
할 일을 마치고 다시 꾸벅꾸벅 졸다 깼을 땐 서윤채가 눈앞에 있었다. 이윤범이 어깨를 흔드는 손짓에 눈을 뜬 채현은 한심하단 얼굴을 한 서윤채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진짜 왔네…….”
“그럼 가짜로 올까.”
그는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 서윤채입니다.’ 인사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차례로 소개를 마치고 정문영이 술병을 들었을 땐 무안하지 않게 거절을 했다.
“원래 술 안 해요?”
“얘 데려가야죠. 그리고 술 별로 안 좋아해서.”
“의외다. 잘 마시게 생겼는데.”
“잘 마시게 생긴 건 뭐지. 잘생겼단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서윤채는 처음 보는 이들 앞에서도 능청을 떨어 댔다. 경악하는 이윤범과 감탄하는 정문영을 알면서 태연하게 굴었다.
“조금 재수 없으시다.”
“알아요. 얘한테 매일 들어서.”
가볍게 웃은 서윤채는 채현을 향해 고갯짓하다 이내 이마를 손으로 튕겼다.
“야. 주정뱅이. 일어나. 집에 가게.”
“지금? 아직 자리 안 끝났는데…….”
“내일 속 안 좋다고 지랄하지 말고 그냥 일어나.”
까칠한 타박에 채현은 입꼬리를 떨어뜨리면서도 순순히 일어났다.
“다음에 또 뵐 일 있으면 봬요.”
자리를 마무리하는 건 서윤채였다. 그는 멍한 채현을 이끈 채 계산까지 한 뒤 밖으로 나섰다. 막차가 끊겼지만 채현의 집까진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취객의 속도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만취 상태는 아니라 정신이 남아 있던 채현은 서윤채를 눈에 담았다.
“왜 네가 계산해. 돈 줄게.”
“그럼 얼굴 비치고 그냥 올까. 헛소리할 거면 입 다물고 똑바로 걷기나 해. 넘어지면 버리고 갈 거니까.”
취한 친구를 챙겨 주면서도 말본새는 여전했다. 입을 삐쭉인 채현은 숨죽인 채 걷다가 불쑥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갔다 왔어?”
“술자리.”
“아…….”
예전부터 누구에게나 인기 많던 이는 지금도 변함없이 찾는 곳이 많은 듯했다.
“그럼 친구랑 놀지 왜 왔어.”
“너랑 노는 게 제일 편해.”
그런데도 자신을 찾아왔다. 좋은 건가. 좋은 거겠지. 쉽사리 답을 내리지 못한 채현은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 소리 않고 발만 내디뎠다.
“잘 가.”
도착한 후에야 겨우 소리를 내자,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서윤채가 비뚜름히 웃어 보였다.
“나 그냥 가?”
“어?”
“우리 채현이 매정하네. 막차 끊겼는데 친구를 그냥 보내고.”
“택시 타면 되잖아.”
“본인 돈 아니라고 쉽게 말하네. 나 날백수라니까, 채현아.”
먹지도 않은 술을 계산할 돈은 있고 택시비는 없단 친구의 말을 이해하긴 쉽지 않았다. 술에 젖은 머리론 도무지 서윤채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택시비 줄까? 너희 집까지 얼마 나와?”
“이게 어디서 돈으로 해결하려고 들어.”
“그럼 뭐 어쩌라고…….”
“생각을 못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황당하다는 듯 웃은 서윤채가 오피스텔 건물을 향해 턱짓했다. 그를 따라 채현도 똑같이 눈길을 옮겼다가, 다시금 서윤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눈이 빗나감 없이 맞닿은 순간 서윤채는 시선을 잡아채고 말을 이었다.
“재워 주면 되잖아.”
서윤채가 입을 다물자 주위는 삽시에 고요해졌다. 밤거리가 침묵으로 뒤덮였다. 그 한가운데서 채현은 그의 말을 소화하려 애썼다. 와중에 그의 시선은 답을 기다리듯 떨어지지 않았다.
재워 달라고……. 거창한 부탁도 아닐뿐더러 이전엔 종종 함께 자곤 했는데 선뜻 답이 나오질 않았다. 술을 마셔 정신없는 머리에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떨어진 기분이었다. 역시 달라진 마음이 문제인 건지, 오롯하게 둘뿐인 공간에서 괜찮을까 싶은 걱정이 먼저 들었다.
“안 돼?”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고민을 알아챘는지 서윤채가 먼저 소리를 냈다. 조용히 물음을 던지는 음성은 단조로웠다.
“네가 싫다고 하면 그냥 가고.”
나지막이 깔리는 말에 언짢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일전에 찾아왔을 때처럼 무조건 남으려는 생각도 없는 듯했고. 한데 모순되게도 그 순순한 태도에 더 신경이 쓰였다. 싫어해서 그런 거라고 서윤채가 오해라도 할까 봐, 그러다 상처라도 받게 될까 봐.
“그게 아니라.”
썩 유쾌하지 않은 상상 뒤에 튀어나온 대답은 토막 난 채였다. 상대는 표정 변화 없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마음대로 하라는 양 구는 그를 보며 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재워 주는 것쯤이야 친구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야.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돼. 어떤 내색도 하지 말고 평범한 친구 흉내를 내면 될 일이야…….
“너 바닥에서 못 자잖아. 내 침대 좁아서 둘이 못 자.”
그 끝에 장난스러운 말씨를 꾸며 내자, 서윤채의 낯에 밤과 어울리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군대는 폼으로 다녀왔을까. 네 침대에서 잘 생각은 애초에 안 했으니까 앞서가지 말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지르는 답변에 머쓱해진 채현은 목덜미만 매만졌다. 예전 기억을 훑어보면 분명 한 침대에서 뒹군 적도 더러 있었는데, 괜히 앞서간 사람이 됐다.
“그래서. 나 집에 가?”
속으로만 항변하던 찰나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귓가를 건드렸다.
“……같이 들어가.”
고민은 짧았다. 에라, 모르겠단 심정으로 답한 채현은 건물을 향해 고갯짓하고 걸음을 옮겼다. 정적이 깨진 김에 엘리베이터에 올라 집 앞에 이를 때까지 걱정도 늘어놓았다.
조금 더러워도 욕하지 마라. 정돈이 안 되어 보여도 되어 있는 상태다. 이불 빨래를 해 두긴 했는데, 혹시 꿉꿉한 냄새가 나도 화내면 안 된다…….
다소 횡설수설한 말에선 알코올 기운이 여실히 느껴졌다. 서윤채도 그를 느꼈는지, 잠자코 이야길 듣다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뱉었다.
“뭘 그렇게까지 손님 취급을 해.”
말미에 따라붙은 웃음은 금세 숨을 죽였다.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너무 잔소리를 했나. 힐끗 서윤채의 눈치를 본 채현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불을 밝혔다.
한 번 방문한 적 있는 객의 움직임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거는 행동은 집주인처럼 자연스러웠다. 채현을 그를 빤히 보다 그가 입을 잠옷과 새 속옷을 건넸다.
“먼저 씻고 와. 수건은 새거 꺼내 쓰고. 칫솔도 안에 보면 있을 거야.”
“집주인보다 먼저 씻으라고?”
“어? 어. 너 씻는 사이에 조금 치워 두게.”
“술도 안 깬 게 뭘 한다고. 됐으니까 그냥 있어. 일단 씻고 나온다.”
옷을 넘겨받은 이는 순식간에 욕실 너머로 사라졌다. 닫힌 문을 응시하던 채현은 물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고갤 돌렸다.
어떻게 그냥 있을 수가 있을까.
뭐가 됐든 조금이나마 나은 모습을 보이고픈 마음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리라. 짝사랑 상대와 단둘이 밤을 보내다니. 행운인지 악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조하듯 웃은 채현은 자리를 정리하고 이불을 꺼내다 바닥에 깔았다. 탈취제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움직임은 다소 부산스러웠다. 술이 들어가기도 했거니와 욕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이 분산된 탓이었다. 그러한 행동의 끝에선 자신을 향한 의문이 치달았다. 그도 그럴 게 넓게 퍼진 긴장 속에 선명한 설렘이 묻어났으니.
나는 지금 기뻐하고 있는 건가. 멍하니 앉아 생각을 이어 갈 무렵, 달칵 소리와 함께 서윤채가 밖으로 나왔다. 희뿌연 욕실을 뒤로한 그는 젖은 머리를 털며 성큼 다가왔다.
“…….”
그를 보는 채현의 눈 깜빡임은 점차 느려졌다. 막 씻고 나와서일까. 평소보다 더 하얗고 고운 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입술은 또 왜 저렇게 붉은지. 가만히 보다 보면 예쁘단 생각밖에 안 들었다. 착하게 생긴 편이 아닌데, 미소를 머금는 순간 달라지는 것도 신기했다.
“왜 또 정신을 놓고 있어.”
“…….”
“졸았냐?”
고갤 삐딱하게 기울이고 내려다보던 이가 상체를 굽혀 올려다보듯 눈을 치켜떴다. 붉은 입술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장난스러운 낯이 만들어진 건 동시였다.
“눈이 풀렸는데.”
훅 가까워진 그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다. 늘 쓰던 제품의 향이 분명한데 유난히 색다르게 느껴졌다. 똑같이 장난스럽게 대응할 여유가 사라질 만큼. 채현은 지척에서 쏟아지는 그의 시선과 향기를 받아 내다 결국 벌떡 일어섰다.
“뭐래……. 멀쩡하거든. 너 졸리면 먼저 자. 드라이기 저기 있으니까 쓰려면 써.”
말을 맺고선 도망치듯 욕실로 향했다. 시야에서 서윤채는 사라졌지만 별 도움은 안 됐다. 깔끔하게 정돈된 욕실에서 그의 향이 나는 듯했으니까.
“하…….”
홀로 얼굴을 붉힌 채현은 거울 속 제 모습과 문 너머를 번갈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찬물을 좀 뒤집어써야 할 듯싶었다. 문을 확실히 잠갔는지 확인하곤 터덜터덜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샤워는 시간이 꽤 지난 후에 끝이 났다. 상기된 채 밖으로 나온 채현은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할 만큼 조용한 집에선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윤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릴 듣지 못했는데 서윤채가 자리에 없었다. 얌전히 걸어 뒀던 외투 또한 사라진 채였다. 어딜 간 거지. 공간을 가득 채웠던 이가 사라져서인지 더욱더 허전했다.
채현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외투를 챙겨 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는 동시에 서윤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음성은 통화 연결음이 한참 이어지고 나서야 들렸다.
― 왜.
“너 어디야?”
― 집 앞. 금방 들어가. 신경 쓰지 말고 자.
그 말을 무시하고 두리번거리던 채현의 시야에 서윤채가 잡혔다. 그는 오피스텔 옆 흡연 구역에 서 있었다. 전화를 뚝 끊은 채현은 그에게 다가갔다.
상대 역시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한 손에 담배를 든 서윤채는 귓가에 댔던 핸드폰을 내리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피하는 게 확실한 행동에 채현은 박힌 듯 멈춰 섰다.
“……너 지금 나 피한 거야?”
참을 새도 없이 잇새로 튀어나온 음성은 누가 들어도 풀이 죽은 채였다. 고요한 공간을 울린 말에 서윤채는 담배 연기와 함께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가 막힌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야. 네가 나한테 그걸 따질 군번은 아니지 않냐?”
그 말을 들으며 재차 한 발을 내딛자, 서윤채는 인상을 찌푸리고 뒤로 가라는 듯 턱짓했다.
“야. 서. 냄새 역해. 오지 마.”
“알면서 왜 피워? 너 혹시 니코틴 의존… 뭐 이런 거야? 못 참아? 그래서 그래?”
접근 불가 상태에 놓인 채현은 서윤채를 직시하며 중얼거렸다.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서윤채가 자신을 거부하자 못내 서러워졌다. 괜히 담배를 빌미 삼아 말을 붙여 볼 정도로.
“헛소리도 창의적으로 참 잘해? 먼저 들어가. 냄새 빼고 갈 테니까.”
“……같이 갈래.”
“왜. 무서워?”
담배를 입에 문 서윤채가 낮게 읊조렸다. 짧은 물음엔 미약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어린애 취급이 분명했지만 가벼이 무시하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 거 아니거든.”
“어련하시겠어. 상태는 멀쩡한가 보다? 술집에선 정신 못 차리더니.”
“많이 안 마셨어. 아까 좀 자기도 했고…….”
“그러냐.”
나지막이 대꾸한 서윤채는 고갤 끄덕이며 연기를 흩뿌렸다. 처음 보는 그 모습을 채현은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다. 마찬가지로 시선을 흘리던 상대는 혀를 쯧 차며 담배를 껐다.
불씨가 사라진 공간에서 거리를 두고 시선을 주고받을 무렵, 찬 바람이 불었다. 돌연 인상을 찌푸린 서윤채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내보였다.
“그 꼴로 돌아다니다가 감기 걸린다. 머리는 왜 안 말리고 나와?”
“네가 갑자기 없어져서 그렇잖아.”
“금방 들어갈 거였어.”
지체 없이 답하던 이는 생각을 이어 가듯 눈을 깜빡이다 한숨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고갤 가로저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채현도 앞서 나간 그를 졸졸 뒤따랐다.
집에 들어서선 다시 손을 씻고 잘 채비를 했다. 불을 끄고 눕자 공간은 마침내 밤의 모습을 해 보였다. 한데 찬 공기를 맞고 온 탓일까. 바깥처럼 어둑해진 뒤에도 잠이 오질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채 멀뚱멀뚱 천장을 응시하던 채현은 슬쩍 서윤채를 내려다보았다. 상대도 똑같은 상태였는지 바로 시선이 얽혔다. 괜히 찔려 휙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그가 먼저 야, 낮게 호명했다.
“얘기나 좀 해 봐.”
“……무슨 얘기?”
“그냥 얘기. 졸업하고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다시 만난 뒤로 구태여 언급한 적 없는 화제였다. 서윤채가 묻지 않기에 채현도 입을 다물었더랬다. 오늘 하루 어땠는지 묻듯 가벼운 물음이어도 속뜻은 그렇지가 못했으니까.
“네가 머리 민 걸 내가 못 봤다는 게 말이 되냐?”
“안 될 것까지야…….”
“내가 모르는 네 시간이 있다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라.”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자, 서윤채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 그와 달리 채현은 또 한 번 입술을 감쳐물어야만 했다.
“……왜?”
“글쎄…….”
낮게 깔리는 음성은 여과되는 것 하나 없이 느릿하게 귓가로 파고들었다.
“습관일 수도 있고. 네 말대로 내가 과해서일 수도 있고.”
“서윤채, 그때는…!”
“뭐라 하는 거 아니야.”
겪어 본 적 없는 애정에 휩쓸려 괴로운 마음에 내지른 말이었다. 제 감정을 수습하기 바빠 상대에게 상처 줬단 걸 모르지 않았다. 다급하게 덧붙이려 했으나 서윤채가 먼저 소리를 냈다.
“나 너한테 안 물어볼 거야. 왜 거리 뒀는지.”
고갤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대의 시선이 제게 틀어박혀 있다는 것을. 채현은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이불만 움켜쥐었다.
“근데 네가 또 그러면 그때처럼 그냥 보고 있을 생각은 없거든.”
“…….”
“뭐……. 알아 두라고.”
자라. 상대는 단조로운 인사로 대화의 끝을 알렸다. 고요해진 공간에서 채현은 그의 말을 반복해 떠올렸다. 참고하라는 듯 내던진 그 말이 꼭, 또 피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으므로.
소화할 수 있을 만큼 곱씹고 나자 아래서 고른 호흡이 들려왔다. 채현은 그제야 다시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곤히 잠든 듯한 모습에 아예 아래로 내려가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서윤채, 자?”
확인하듯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숨을 참고 침묵하던 채현은 안심하며 그를 마음껏 눈에 담았다. 자신이 놓친 그의 시간을 찾듯, 어느새 어른이 되어 버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 깜빡이는 찰나마저 아까울 만큼 소중한 시간이 깨진 건 서윤채가 눈을 뜬 뒤였다. 잠기운이 선연한 그의 눈빛과 곧장 얽혀 들었다.
“왜.”
“……그냥.”
낮은 음성 뒤로 꽉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서윤채는 픽 웃으며 팔로 눈가를 가렸다.
“어디 안 가니까 얌전히 올라가서 자라….”
아까 쫓아 나갔던 일의 연장선이라 생각한 건지, 꼭 달래듯 이야기한 그는 다시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앉아 쳐다보고 있던 행동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한 박자 늦게 응, 대답한 채현은 자리로 돌아가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무엇이든 자신을 가려 줄 보호구가 필요했다. 붉게 달아올랐을 게 빤한 모습을 숨기고 싶었다.
“서윤채, 잘 자.”
친구 사이에 주고받을 법한 이야기를 건넨 채현은 두 눈을 꾹 감고 몸에 힘을 풀었다. 의식은 오래 지나지 않아 가물가물해졌다. 그 끝에 현실인지 꿈인지 모호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너도 잘 자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익숙한 상대의 목소리가.
* * *
하룻밤을 함께한 이는 다음 날 아침까지 먹고 돌아갔다.
그사이 특별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느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그저 늘 그래 왔던 이들처럼 밥만 먹고 헤어졌다. 간밤에 나눈 대화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인 양.
‘간다.’
찰나에 지나지 않은 짧은 인사. 내내 붙어 있던 이는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몸을 돌렸다. 잠을 설쳤는지 하품을 하면서. 박힌 듯 서 있던 채현은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듯 특별했던 하루의 시작을 생생히 기억한 탓일까. 그날 이후, 시일이 꽤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서윤채와 만나지 못했다.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건지, 다시 만난 뒤로 자주 보던 이와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더 솔직히 말해 보고 싶기도 했다. 불쑥 치미는 허전함에 핸드폰을 들었다 내려놓은 적도 있었다.
다만, 감히 보고 싶어 할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알아 충동을 삼키고 행동을 억눌렀다. 서윤채가 별다른 말을 안 하기에 채현도 먼저 만나잔 이야길 하지 않았다.
그저 바쁘겠거니 생각하며 서윤채가 떠오를 때마다 지난 기억을 곱씹었다. 고작해야 하루. 그마저도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는 제집에도 흔적을 남기고 갔으니.
“…….”
기계적으로 칫솔질하던 채현이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치약 옆에 얌전히 꽂혀 있는 또 다른 칫솔이 눈에 밟혔다. 서윤채가 사용했던 거라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 둔 것이었다. 하물며 끄트머리엔 ‘서윤채’ 이름을 쓴 스티커까지 붙여 놓았다.
이건 뭐, 또 찾아 주길 바란다는 기대가 은연중에 드러났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채현은 자조하며 시선을 거뒀다.
잡념을 지워 낼 겸 빠르게 씻고 나오자 메시지 알림이 계속 들렸다. 채현은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럿 쌓인 메신저엔 생일 축하한다는 연락이 가득했다. 고등학교 친구를 비롯해 대학 동기와 선후배들에게서도 메시지가 왔다.
[정유빈 : 오늘 7시 잊지마셈] 오후 1:12 2
[정유빈 : 신제윤도 부름ㅋㅋ] 오후 1:13 2
[배주희 : 넌 지각이나 하지 마] 오후 1:15 2
활자를 읽는 채현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졸업 이후 오랜만에 모두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그간 시간이 안 맞아 다 같이 모이기가 힘들었는데 제 생일이 좋은 명분이 됐다.
서윤채도 오겠지. 못 온단 말 없었으니까……. 빙긋대며 짧은 연락에 우선적으로 답하던 채현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목록 어디에도 서윤채의 메시지가 없었다.
“……까먹었나?”
새벽에 주고받은 대화를 다시 확인해도 축하의 말은 없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채현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거창한 선물이나 정성 어린 인사 따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축하한단 말 한마디. 딱 그 정도만을 바랐다. 많은 이에게 축하를 받아도 서윤채에게 듣는 건 또 달랐으니까.
군대에 가 있을 때도 축하는 해 줬던 거 같은데.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많이 바쁜가. 친구 생일도 까먹을 만큼……. 상념을 이어 가던 채현은 제 상태를 깨닫곤 실소를 흘렸다.
“아, 진짜……. 속 좁은 새끼…….”
감히 서운하단 생각을 했다.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유치하게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그렇게 수 분을 흘려보냈을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선 밖은 무척 화창했다. 그 덕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봄바람을 맞으며 걷던 와중 엄마에게 전화도 걸려 왔다.
― 생일에 미역국도 못 먹어서 어떡하지.
“주말에 가서 미리 먹었잖아. 그럼 됐지.”
― 학교 끝나고 넘어올래? 엄마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아들 보고 싶다.
“나 오늘은 애들 만나기로 해서 주말에 갈게요. 나도 지금 딱 엄마 보고 싶단 생각 했는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자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덩달아 킥킥댄 채현은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통화를 마무리했다. 핸드폰을 넣고 다시 걸으려던 찰나, 진동이 울려 확인하니 이번엔 아빠가 보낸 메시지 알림이 떴다.
[아부지 : 아들~ 생일 축하한다. ^^]
[아부지 : 200,000원을 받으세요.] 오후 1:37
메시지를 확인한 채현은 답장을 보내는 대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도 안 들려주고 문자만 보내는 게 어디 있냐. 돈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보냈냐. 아들 안 보고 싶냐…….
장난치듯 이야기하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좋은 하루 보내시라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 뒤에야 돈을 받고 하트 이모티콘 두 개를 보냈다.
하루 시작부터 여럿에게 축하를 받아서인지 발걸음이 가볍고 기분이 좋았다. 불쑥 서윤채가 떠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지만 입매가 스멀스멀 풀어졌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많은 축하를 받았다.
전공 수업 두 개를 모두 듣고 과방에 있으려니, 들락거리는 대다수가 알은체를 해 왔다. 밥을 사 줄 테니 나가자고 하는 선배도 더러 있었다.
“술 마시러 갈까?”
정문영이 먼저 말을 꺼내자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들도 눈을 빛냈다. 당장에라도 술집으로 향할 기세라 채현은 괜히 미안함을 느껴야만 했다.
“저 선약이 있어서요.”
“애인?”
“아뇨.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요.”
“여친 안 만들고 뭐 했냐, 채현이.”
함께 과방에서 놀던 두 학번 위의 선배가 어깨 위로 팔을 걸치며 안타깝다는 듯 이야기했다.
“형도 없잖아요.”
“난 연애하면 우리 과 애들 난리 날까 봐 안 하는 거고.”
난리가 날 거 같진 않은데……. 속으로만 생각한 채현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눈빛이 불손하다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휙 쓸어내렸다.
“술이나 마시자. 어차피 우리 오늘 마시려고 했어. 시간 괜찮으면 좀 마시다 가.”
행동이 얼마나 재빠른지 테이블엔 이미 술병이 놓여 있었다. 약속 시간까진 여유가 있는 터라 채현도 술자리에 합류했다.
과방에서 술을 마실 땐 늘 시간이 지날수록 인원이 늘어났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이 끝나고 뒤늦게 온 이들은 자연스레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그때마다 ‘채현이 생일이래.’라는 말을 시작으로 잔을 꺾었다.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나올 무렵엔 이미 상당한 양을 마신 뒤였다.
“저 먼저 가 볼게요!”
“생일 축하한다.”
알딸딸한 정신으로 인사를 남기고 걸음을 옮기는 채현의 얼굴은 불그스름했다. 다행인 점은 약속 장소가 멀지 않다는 거였다. 주인공 배려니 뭐니, 별별 이유를 들며 채현의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정해 준 덕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서윤채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와 있었다.
“채현아, 왔어? 얼른 앉아.”
“야, 제윤아. 너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옅게 웃으며 반겨 주는 신제윤 옆에 털썩 주저앉은 채현은 다른 이들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와, 이 새끼 술 처마시고 온 거 봐. 자신 있냐? 오늘 어디 알코올로 샤워 한번 해 볼래?”
“야. 나 생일인데 안 봐줘?”
술기운이 올라 들뜬 채현이 방싯대며 이야기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온화한 얼굴을 한 배주희가 바로 소주병을 기울여 잔을 가득 채워 주었다.
“응. 채현이 생일 축하해. 마음껏 마셔.”
“와……. 주희야, 의리 집에 두고 왔어?”
“아, 서윤채 말투 불쾌하다. 자제 좀.”
멍하니 제 잔을 보던 채현은 금방이라도 넘칠 듯한 모양새에 실소를 흘렸다. 서윤채처럼 말하지 말라는 타박이 돌아왔으나, 술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대꾸할 수 없었다.
몇 년 만에 다 같이 마주하는 자리는 즐거웠다. 술잔을 몇 번 부딪히고 근황을 얘기하다 보니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신이 나 대화하던 채현은 한 박자 늦게 서윤채의 행방을 물었다.
“근데 윤채는 왜 없어?”
“걔 고3 과외 한다던데. 오늘 갑자기 잡혔다고 하고 온단다. 너랑 연락 안 했냐?”
곧장 확인한 핸드폰은 아까와 다를 바 없었다. 서윤채에게 온 연락 역시 없었고. 핸드폰을 쥔 채현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날백수라더니……. 저도 모르게 불퉁한 표정을 지은 채현은 무용한 기계를 내던지고 술을 벌컥 들이켰다.
“채현아, 천천히 마셔.”
또 혼자 잔을 채우려던 무렵, 행동을 제지한 건 신제윤이었다. 언제나 사려 깊던 이는 지금도 여전한 듯했다.
“너 진짜 인기 많겠다.”
“딱히 그렇진 않은데.”
그는 뜬금없는 소리에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부드럽게 웃으며 물을 홀짝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자주 들은 말이지 싶었다.
“서윤채랑 같은 학교니까 자주 보겠네?”
“과가 달라서 가끔 마주치는 정도야. 다행이지.”
자주 보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순전히 제 기준에서 생각한 채현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둘 사이가 별로임을 알아 이해했을 텐데, 지금은 사고가 엉망이라 힘들었다.
서윤채는 자리가 무르익고도 꽤 지나서야 도착했다.
밤바람을 묻히고 들어선 이는 바로 앉지 않고 테이블만 살폈다. 하나하나 눈에 담을수록 만면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나 그냥 가면 안 되냐?”
“어허, 지각생이 말이 많아.”
정유빈에게 붙잡혀 앉으면서도 찌푸려진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채현과 눈이 마주친 순간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까지 흘렸다.
“쟨 왜 또 꼴아 있어.”
“오기 전부터 취한 상태셨습니다. 저희가 골로 보내 드린 게 아닙니다. 이제 오신 분은 모르시겠지만.”
정유빈은 성실히 답하며 잘도 소주를 들이부었다. 서윤채의 잔만 보고 있던 채현은 덩달아 실실 웃으며 잔을 들었다.
“짠?”
그 꼴을 본 서윤채는 환장하겠다는 듯 하, 크게 숨을 쉬다가도 결국 잔을 맞대 주었다.
서윤채가 와 새로 시작된 듯 불붙던 자리는 정유빈이 백기를 들면서 끝났다. 멀쩡한 셋이 개가 되기 직전인 이들을 하나씩 맡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휘청대던 채현은 자연스럽게 서윤채에게 뒷덜미가 잡혀 끌려갔다.
“먹어. 먹고 정신 좀 차려.”
중간에 편의점에 들른 그는 숙취 해소제와 아이스크림을 사 와 내밀었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움직인 채현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를 좇았다. 핸드폰만 보면서 걷기에, 마음 놓고 훔쳐봤는데 오토바이가 지나가니 휙 잡아끌며 ‘잘 좀 걸어라.’ 타박을 했다.
“핸드폰만 봤으면서 어떻게 봤대…….”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거야. 야. 네가 이쪽에서 걸어.”
끝내는 본인이 차도 쪽으로 서며 어깨에 팔을 걸치고 걷기까지 했다.
“채현아, 내가 보호자야?”
“귀찮으면 그냥 집에 가도 돼.”
“길바닥에서 처잘지도 모르는 새끼를 혼자 두고 가라고.”
누굴 쓰레기로 만들어. 나지막이 덧붙인 이는 팔에 힘을 싣고 이끌 듯 걸음을 옮겼다. 멍해진 채현이 할 수 있는 건 보폭을 맞춰 걷는 게 전부였다. 팔 무거운데. 그래도 닿아서 좋다. 가까이 가면 더 좋으려나……. 마구잡이로 튀는 생각을 이어 가다 보니 잊고 있던 것도 떠올랐다.
“서윤채. 나 엠티 가.”
“또 술 퍼마시겠네. 적당히 마시고 와라.”
“응.”
고분고분 답하던 채현은 불현듯 같은 학교였으면 엠티도 같이 갔겠지 싶어 말을 흐렸다.
“나 공부 좀 더 열심히 할걸.”
“왜 갑자기 자학을 해?”
절로 시무룩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다른 뜻으로 해석했는지 서윤채가 얼굴을 살폈다.
“야. 네가 안 해서 그렇지 너 머리는 좋아. 시험 기간 언제냐? 같이 공부하러 가.”
“너 휴학생이잖아.”
“휴학생은 학생 아니냐?”
까칠한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채현에겐 서윤채가 내보이는 다정함이 그랬다. 지금도 그의 세심한 배려가 온전히 느껴져 입 안에 남은 단맛을 곱씹어야만 했다.
“……너 근데 왜 나 생일 축하한다고는 안 해 줘? 솔직히 말해 봐. 내 생일 까먹었지. 아니면 챙겨 주기 싫어서 그래? 나는 그냥 축하한단 말만 해 줘도 좋은데…….”
그 끝엔 결국 온종일 마음 한구석에 담고 있던 속내를 토로했다. 잠자코 듣던 상대는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기라도 한 양 픽 웃으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난 감당 못 할 짓 안 해, 채현아.”
“……어?”
“축하해, 생일.”
얼떨결에 그를 건네받은 채현은 선물과 서윤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입꼬리를 팽팽히 당기며 장난스러운 낯을 해 보였다.
“그거 존나 비싼 거야. 마음에 안 들어도 버리면 안 돼?”
“……절대 안 버려.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을게.”
“죽으면 같이 넣어 줄게. 가지고 가.”
태연히 헛소리를 한 서윤채는 꽤나 만족스러운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그 상태로 오피스텔 앞까지 함께 왔다가 ‘들어가라. 간다.’ 짧게 인사하곤 몸을 돌렸다.
채현은 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그가 사라질 무렵에야 ‘잘 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재워 달라고 안 하네, 생각하면서.
“…….”
생각의 끝에선 문득 아쉬워졌다.
만일 지금 같은 감정이 없었더라면, 서윤채가 그리던 미래처럼 함께 살고 있었을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가장 가까이서 하루를 보냈을까.
“…….”
일어날 일 없는 상황을 꿈꿔 보던 채현은 코를 훌쩍이며 걸음을 옮겼다. 제게 남은 서윤채의 흔적을 꼭 끌어안으며.
* * *
채현의 하루 루틴에 변화가 생겼다. 새로이 생긴 버릇과도 같은 행동은 손목을 확인하는 거였다. 무슨 일을 하건 그 끝엔 늘 손목을 바라보았다.
옷을 입다가도 힐끔, 필기를 하다가도 힐끔, 핸드폰을 확인하다가도 힐끔. 정확히는 손목을 감싸 안은 은색 메탈 시계를 눈에 담았다. 참을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키면서.
서윤채가 준 생일 선물은 다름 아닌 시계였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그날,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포장을 까 확인하고 얼마나 놀랐던지. 순식간에 술이 다 깨는 듯했다. 본인이 칭하길 날백수인 이가 주기엔 말도 안 되는 선물이었다. 서윤채가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라 왔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벌벌 떨렸다.
이게 진짜 내 건가. 만져도 되나. 착각하고 다른 걸 가져온 거면 어떡하지……. 선뜻 손을 내밀 수 없는 자태에 케이스에 담긴 시계를 멍하니 보기만 했다.
‘미쳤다…….’
아주 조심스레 꺼내 제 손목에 착용해 본 채현은 또 한 번 감탄하며 시계를 살폈다. 안목이 좋은 친구의 선물은 당연하게도 훌륭하고 근사했다. 생전 시계라곤 착용해 본 적이 없는데, 단박에 죽을 때까지 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전 12:22 [저기..이거진짜내선물이야?]
오전 12:23 [이시계가내몸값보다비쌀거같은데..]
[서유난 : ㅋㅋㅋ]
[서유난 : 채현이 더 비싸지겠네] 오전 12:28
오전 12:30 [사진]
오전 12:31 [내몸보다아껴쓸게]
손목에 착용한 모습을 찍어 보내며 고맙다고 인사하자, 서윤채는 그저 웃고 말 뿐이었다. 대화가 끊긴 뒤에도 채현은 한참 동안 시계만 바라보았다.
서윤채가 직접 가서 골랐을까. 자신을 떠올리며 이 시계를 선택했을까. 그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에게 주는 선물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이런저런 상념이 떠올랐다.
시일이 흘러도 상태는 똑같았다.
채현은 모두가 시계를 알아챌 만큼 손목을 의식하고 팔을 들썩거렸다. 촌스럽게 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매번 양 뺨이 솟도록 웃으며 ‘선물받았어요.’ 이야기했다.
한 몸이 되었다 봐도 무방한 시계는 엠티 당일에도 당연히 함께였다. 커다란 백팩을 짊어 멘 채현은 한껏 들뜬 채 분위기에 어울렸다.
다 함께 이동한 곳은 가까운 서해였다. 몇 년째 엠티 장소로 애용하는 장소라더니 숙소도 넓고 깨끗했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막 도착했을 즈음엔 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났는데, 다들 좋다고 달려 나가 사진을 찍었다. 단체로 과잠을 입고 온 신입생은 포즈를 맞춰 프레임 안에 서기도 했다.
“같은 1학년인데 우린 왜 저런 분위기가 안 나오냐.”
“아무래도 저쪽은 신입생이고 우린 복학생이니까…….”
역시 군대가 문제였다며 허망해하는 이윤범 곁에서 채현은 주변을 살폈다. 감탄이 새어 나올 만큼 멋졌던 제주 바다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 괜히 설렘이 차올랐다.
물이 점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엔 장난기 많은 선배들이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사실 엠티는 신입생을 위한 행사에 가까운데 본인들이 더 신난 양 미치광이처럼 놀았다. 학회장 선배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다가 진저리를 치며 새내기들 사진을 찍었다.
그사이 채현도 카메라 앵글에 담겼는데, 학회장 선배는 씩 웃으며 손목을 향해 고갯짓했다.
“시계 잘 보이게 찍어 줘?”
“네!”
하도 시계를 의식하니 놀리려 말하는 게 분명했다. 부끄러워하기도 잠시, 채현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곤 왼손으로 브이 하며 포즈를 잡았다.
“웃긴 새끼라니까.”
어떻게 된 게 과에 정상이 한 명도 없어. 중얼거린 선배는 ‘하나, 둘, 셋.’ 빠르게 외치면서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찍고 뛰어노는 사이 시간은 훌쩍 흘렀다. 모두는 어스름히 물드는 하늘을 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이후엔 외부 바비큐장서 학생회가 준비한 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배를 채운 이들은 정해진 순서처럼 실내로 자리를 옮겨 술을 꺼내 왔다. 어마어마한 양의 술을 챙겨 오기에 깜짝 놀랐는데, 본격적으로 판을 벌리자 마시는 속도가 엄청났다.
처음엔 둥글게 몇몇씩 모여 마셨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탈락자가 생겼다. 시체가 된 이들은 시체방으로 이송됐다. 채현은 양을 조절하며 마신 덕에 용케 살아남아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 한참 술 게임에 몰두하던 이들이 새롭게 화제 삼은 건 연애 이야기였다.
“야. 다른 건 몰라도 관심 없는 사람한텐 돈 안 쓰고 시간 안 쓴다. 이건 진짜야. 누가 너한테 돈도 쓰고 시간도 쓴다? 이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니까.”
“그냥 친구한테도 돈은 쓰잖아요.”
“어허, 뭘 모르는 소리. 그 차이가 있다니까 그러네.”
다들 동조하는 틈에서 채현은 홀로 곰곰이 생각했다. 시선은 자연히 시계로 떨어졌다. 함께 떠오르는 건 서윤채였다. 적어도 그가 제게 관심이 없진 않은 듯해 웃음이 샜다. 물론 친구로서의 관심일 뿐이겠지만. 둘 다 남자가 아니었다면 꽤 많은 오해를 했겠구나 싶었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잔을 비운 채현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미 알딸딸해진 채라 계속 마시는 건 위험했다. 필름이 끊겨 순간을 깡그리 잊는 건 사절이었으니.
바다로 향하자 이미 나와 있는 학생 몇이 보였다. 얼핏 봐도 간질간질한 분위기라 슬쩍 피해 인적이 드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걸음을 옮기며 확인한 핸드폰엔 여러 연락이 쌓여 있었다.
[서유난 : 재미있냐?] 오후 11:09
개중에는 서윤채의 메시지도 있었다. 채현은 무어라 답하는 대신 바다 사진을 찍어 보냈다. 답장은 예상외로 빨리 왔다. ‘1’ 자가 사라지더니 바로 전화가 울렸다. 심지어는 영상 통화라 한껏 당황하며 전화를 받았다. 카메라도 끄려다가 서윤채 얼굴이 보이기에 후면으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 목소리 들으니까 아직 살아 있나 본데.
웃음기를 묻힌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채현은 얼떨떨함을 지우지 못하고 화면 속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둑한 공간에서 잘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멋들어진 미소를 머금었다.
“왜 이걸로 해?”
― 뭐가.
“왜 그냥 전화로 안 하고 이걸로 하냐고…….”
당황과 어색함은 대답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서윤채는 눈에 띄게 비웃었다.
― 네 상태 좀 보려고. 야.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그냥 네 얼굴이나 비춰 봐.
채현은 순순히 전면 카메라로 전환해 제 얼굴을 보였다. 다 보이긴 부끄러워 이마와 눈만 앵글에 잡히도록 조절했다. 그 상태로 화면만 응시하니 상대는 곧이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 눈 풀린 거 봐라. 많이 마셨냐?
“조금밖에 안 마셨어.”
― 깝치다가 취하지 말고 적당히 마셔라.
“나 잘 마셔.”
― 그래?
“어. 너 깜짝 놀라.”
말을 늘이며 강조하듯 이야기했지만, 서윤채는 가당치도 않은 소릴 들은 양 반응했다. 머릴 쓸어 넘기며 ‘이게 또 까부네.’ 중얼거리더니 혼자 실소까지 흘렸다.
― 그럼 와서 나랑 술 마시든가.
“……어?”
― 깜짝 놀라나 보게 술 마시러 가자고.
“너 술 싫어하잖아.”
― 싫어하는 거지, 못 마시는 건 아니니까. 너랑 술 한 번을 못 마실까.
채현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화면 속 서윤채만 눈에 담았다. 싫어하는 일은 죽어도 안 하는 이가 지금처럼 무르게 굴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 엠티는 어때.
끊긴 대화를 잇는 건 서윤채였다. 퍽 상냥한 물음에 채현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실어야만 했다. 열 번 중 아홉 번을 까칠하게 말하는 이가 다정한 투를 구사하니 낯설었다. 원체 목소리가 좋은데 장난기를 빼고 나긋이 이야기하니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재밌어. 지금은 살짝 술로 대동단결된 느낌이긴 한데 장난 아니야.”
― 좋아 죽지. 네 친구 안 그립냐?
혼자 신난 친구를 타박하는 장난일 게 분명했다. 서윤채도 자신이 그를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고 말했을 테고. 평소라면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맞받아쳤을 테지만 채현은 침묵했다.
“……조금.”
그 끝엔 사위에서 울리는 바닷소리와 서윤채의 말을 곱씹다 억누른 진심을 조각내 내보였다. 딱, 서윤채가 이상히 여기지 않고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 뭐? 똑바로 크게 말해.
“나 이제 갈래. 끊어. 잘 자.”
그마저도 겁이 나 서윤채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전화를 뚝 끊었다. 터져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보고 싶다고, 함께 왔으면 좋았겠다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차고 넘쳤지만 또 한 번 최선을 다해 삼켜 냈다.
채현은 그 뒤로도 한참을 서성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로 돌아가면 지금 같은 모습은 꼭꼭 숨기고 서윤채와 마주해야지, 다짐하면서.
* * *
그리고 그 계획이 무너지기까진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
분주한 공간에서 채현은 멍하니 시선을 흘렸다. 아래로 떨어진 시야에 깁스를 한 제 오른발이 잡혔다. 그 앞엔 삐딱하게 선 이가 있었고. 천천히 고갤 올리면 열이 받은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모호한 서윤채의 얼굴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채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대체 어쩌다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걸까. 기껏해야 몇 시간 만에 이 지경이 된 게 믿기지 않아 한숨만 터져 나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대다수가 숙취에 허덕이긴 했지만 제법 평화롭게 엠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채현도 상태가 꽤 괜찮아 학생회를 도와 짐을 나르기도 했다.
분명, 그때까진 괜찮았는데.
‘야, 조심…!’
술이 덜 깬 신입생이 짐을 나르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며 사고가 났다. 하필이면 그 앞에 있던 채현도 피할 새 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먼저 넘어진 이는 멀쩡한데, 채현만 발목이 완전히 나갔다.
다행히 학회장 선배 차가 있어 바로 병원으로 올 수는 있었다. 다만, 그는 또 학교로 가야 했기에 끝까지 있어 줄 수가 없었다. 누구든 보호자 한 명을 불러야 하는 상황에서 떠오른 이는 서윤채였다. 부모님이 아시면 기절할 듯 놀라실 게 뻔했으니.
“…….”
그 과정을 거쳐 지금처럼 뺨이 뚫릴 듯 쏟아지는 시선을 받게 된 것이었다.
― 기다려. 갈 테니까.
딱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은 서윤채는 오래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정신이 없는 듯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채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제 페이스를 되찾은 듯했다.
“귀찮게 해서 미안……. 내가 나중에 꼭 밥 사 줄게.”
반면 채현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상태를 확인하곤 입을 다문 서윤채 때문에 초 단위로 평정이 닳고 조바심이 차올랐다.
“이제 집에 가도 된대. 헛걸음하게 해서 미안. 나 택시 타면 혼자 갈 수 있으니까…….”
“그 다리로 혼자 뭘 하겠다고.”
내내 침묵하던 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도착한 후로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시선이 그의 눈꺼풀 아래로 숨겨졌다 드러났다. 못마땅함이 어린 새까만 눈으로 얼핏 안도가 스쳤다.
“그냥 우리 집으로 가.”
“……어?”
“다리 나을 때까지 우리 집에 있으라고.”
이후 잇새로 새어 나온 목소리에 온몸이 강하게 옭아매지는 듯했다.
“너희 집 들러서 짐만 챙기고 바로 넘어가. 뭐 따로 할 일 더 있어?”
“어? 아니, 그런 건 없는데…….”
“없으면 됐고.”
서윤채는 본인의 집에서 함께 머무는 게 이미 결정된 일인 양 굴었다. 의사를 묻거나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서. 퍽 강제적인 태도를 보이며 부축하려는 듯 손을 뻗을 뿐이었다.
그 행동에 응하지 않고 물끄러미 좇기만 하자, 몸에 손을 대신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싫어?”
채현은 잠자코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그를 본 상대는 손을 거두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손짓에선 마뜩잖다는 기색이 온전히 드러났다.
“말을 해.”
“신세 지기 미안해서 그래.”
“갑자기 전화 와서 응급실이라고 말하는 것보단 나아.”
아. 막힘없이 튀어나오는 대답에 채현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서윤채가 병원에, 응급실에 유독 예민하게 구는 걸 알면서 실수를 했다. 힐끗 눈치를 보다가 ‘미안해…….’ 중얼거리니 제 감정을 진정시키듯 길게 호흡한 뒤 재차 소리를 냈다.
“싫은 거면 얘기해. 아니면 손잡고 일어나고.”
직전보다 조금은 누그러진 음성에 채현은 주춤주춤 그의 손을 잡았다. 거절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윤채가 건넨 말은 권유가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채현이 듣기엔 제안의 탈을 쓴 명령이었다.
“목에 팔 둘러.”
힘을 실어 몸을 일으켜 준 이가 상체를 굽히며 눈을 마주해 왔다. 빤히 바라보며 무언의 종용을 하기에 채현은 숨을 꾹 참고 아주 조심히 팔을 둘렀다. 자칫하다 호흡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라 절로 긴장감이 차올랐다.
서윤채가 자세를 바로 하자 키 차이 때문에 매달린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바로 허리를 감싸 안아 왔다. 단단히 부축하는 손길에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현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삐걱거렸다. 머리 위에서 하, 하는 소리가 터진 건 그와 동시였다.
“채현아…. 괜히 몸에 힘주다가 다리에 무리 가게 하지 말고 제대로 기대.”
“아, 응…….”
성난 기색을 씹어 삼키며 지친 것인지 흘러나온 음성은 살짝 긁힌 채였다. 자괴감에 휩싸인 채현은 그의 말대로 몸에 힘을 풀었다. 안정적인 자세가 만들어진 것과 별개로 심장은 달음박질이라도 한 양 뛰어 댔다.
서윤채는 익숙하게 몸을 부축하고 한 손으론 병원에서 준 목발까지 챙겼다. 직접 들겠단 말에도 단호하게 일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향하는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답답하지 않은지 환자를 배려하며 한 발씩 내디뎠다.
채현은 서윤채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해 택시까지 이동했다. 그 무렵엔 이미 넋이 나간 지 오래였다. 자연스레 목적지를 말하는 그의 곁에서 그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
제대로 사고 쳤다는 자각. 거기에 그치지 않고 민폐까지 끼쳤다는 죄책감. 그 와중에 품 안에 안긴 순간 떨려 하던 자신……. 무겁게 내려앉는 죄의식에 숨이 틀어막히는 듯했다.
예전부터 성가신 일을 싫어하던 이였다. 분명 그도 일정이 있을 텐데 저 때문에 하루를 망친 꼴이었다. 집에서 바로 나온 모습이 아니라 더욱더 마음이 불편했다.
“진짜 미안…….”
상대는 곧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을 바라고 한 사과는 아니었지만 침묵이 길어지자 눈치가 보였다. 서윤채는 한참을 빤히 바라본 뒤에야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몇 번 더 사과해야 그만할래.”
“…….”
“화 안 났어. 그러니까 되지도 않는 사과만 할 거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열받았으니까 입 닥치고 있으란 소린가. 그 뜻으로밖엔 안 들리는 말에 기가 죽은 채현은 고개만 끄덕였다. 시선을 떼지 않던 상대는 한숨을 내쉬며 시트 깊숙이 몸을 기댔다.
침묵 속에 달리던 차는 오래 지나지 않아 집 앞에 도착했다. 서윤채는 기사님께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느냐 양해를 구하고 흔쾌히 수락하시자 감사를 표했다. 곧장 내려선 열린 문을 붙잡고 상체를 숙여 안을 바라보았다.
“비밀번호 뭐야.”
“어, 같이 올라갈게.”
“일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그냥 있어. 비밀번호.”
채현도 바로 따라 내리려 했으나 돌아온 건 얌전히 있으라는 매서운 시선이었다.
“258000….”
“챙길 건? 웬만한 건 우리 집에 있으니까 따로 필요한 것만 말해.”
“어…. 나 그럼 옷이랑 속옷이랑, 노트북…?”
“더 없어?”
“응. 없는 거 같아.”
“옷은 내가 알아서 골라 온다.”
기세에 눌려 술술 대꾸하자, 서윤채는 통보하듯 말하며 문을 닫고 걸음을 옮겼다. 걷잡을 수 없이 미안해진 채현은 물끄러미 뒷모습만 응시했다.
“친구가 참 착하네.”
“그렇죠…….”
환자를 돌보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자처하고 나서다니. 제 오랜 친구의 성정에 새삼 놀라운 한편, 이러니 좋아할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들었다.
서윤채는 금방 밖으로 나왔다. 다시 차에 타 감사 인사와 함께 새 목적지를 말한 뒤 가방을 중간 좌석에 내려 뒀다. 고맙다는 채현의 인사엔 얕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그 뒤로 택시는 20분가량 더 달렸다. 갈수록 채현의 표정은 시무룩해졌다. 그리 가깝지도 않은데 데려다줬던 거구나, 뒤늦은 자각이 들어 거듭해 동요해야만 했다.
도착해선 또 서윤채에게 안기다시피 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 집주인은 외투를 벗으며 ‘마실 거 줘?’ 하고 물었다. 채현은 주위를 힐끔대며 괜찮다고 대꾸했다.
서윤채의 집은 깔끔하고 넓었다. 특별히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것도 아닌 듯한데, 집주인을 닮은 양 근사했다. 익숙한 향이 곳곳에 묻어 있기도 했다.
첫 방문인데 이런 꼴로 오게 되다니……. 겸연쩍어 눈만 굴리고 있는데 서윤채가 다가와 곁에 털썩 앉았다. 그 기척과 함께 빤한 시선이 뺨을 뚫을 듯 쏟아졌다.
슬쩍 고갤 돌린 채현은 꼼짝없이 그의 시야에 갇혔다. 눈을 마주하던 이는 다친 다리를 보았다가 눈길을 끌어 올렸다. 느릿하게 훑듯 움직인 시선은 얼굴에 꽂힌 뒤 흔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한눈을 팔 수가 없어, 채현아….”
그 상태로 서윤채는 실소를 흘리다 마른세수를 했다. 병원을 벗어나서인지 흘러나온 목소리도 아까보다 기세가 누그러진 채였다. 덩달아 기가 조금 살아난 채현도 소리를 냈다.
“나도 다치고 싶어서 다친 거 아니야. 신입생이 내 쪽으로 넘어져서 그런 거지…….”
“놀랐겠네.”
나직한 동조에 괜히 발끝이 곱아드는 듯했다. 많이 아프냐는 질문에 고개만 도리도리 젓자, 그는 깁스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밥은.”
“어? 아직……. 너는?”
아침엔 다들 숙취에 허덕이느라 먹지 못했고, 그 이후엔 정신이 하나도 없어 끼니를 챙겨야겠단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허기가 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밥이나 먹자. 네가 먹고 싶은 거 골라서 시켜. 바로 결제하고.”
몸을 일으킨 서윤채는 본인 핸드폰을 건넨 뒤 무어라 반응하기 전에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사라진 쪽을 보며 당황하던 채현은 이내 배달 앱을 켜 메뉴를 골랐다.
서윤채가 좋아하는 한식으로 선택하고 결제를 마칠 무렵이었다. 징. 짧은 진동과 함께 상단에 메시지 알림이 떴다.
[경영 이예지 : 너 어디야? 전화도 안 받고] 오후 3:44
의도치 않게 내용을 확인한 채현은 숨죽여 탄식했다. 밖에서 왔다 싶더라니 역시 약속이 있던 모양이었다. 택시에서 연신 울리던 진동은 그를 찾는 친구들의 연락이었나 싶었다.
또 생각의 늪에 빠지려던 찰나, 달칵 소리와 함께 옷을 갈아입은 서윤채가 나왔다.
“시켰어?”
“어, 응. 근데 너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연락 계속 와. 아, 일부러 본 거 아니야.”
“안 가도 돼. 봐도 상관없고.”
매정히 답하며 핸드폰을 받아 간 서윤채는 몇 번 화면을 두드리더니 아예 구석으로 내던졌다. 연락에 미련이 없는지 늘어진 태도로 소파 헤드에 머릴 기대기까지 했다. 그러다 아, 목을 울리며 시선을 옮겼다.
“저기가 방이고 저쪽이 욕실. 배고프면 음식 꺼내 먹… 아니다. 그냥 나한테 말해라. 너 목발 제대로 쓸 줄 모르잖아. 익숙해질 때까지 웬만하면 가만히 있어.”
순순히 이야길 듣던 채현은 문득 든 의문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저 방을 가리키지. 직전에 들어갔다 나온 방을 말하기에 ‘설마….’ 하며 삽시에 불안해졌다.
“저기 네 방 아니야? 나도 저 방 써?”
“그럼?”
다른 방법이 있느냔 당당한 물음에 채현은 얼빠진 사람처럼 입을 작게 벌렸다.
“저 방은 뭔데?”
“옷 방.”
“아……. 그럼 나 저 방에서 이불 깔고 잘게. 옷 안 건드리고. 아니면 소파에서 자거나.”
“환자를 바닥에 굴리라고.”
즉각 답을 내지른 서윤채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내 침대 커. 그냥 같이 자. 뭘 내외를 해.”
“…….”
“싫어? 혼자 쓰고 싶어?”
그렇다고 하면 집주인이 바닥에서 잘 기세였다. 입만 달싹이던 채현은 결국 고갤 저으며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건지……. 다가올 밤이 벌써 두려워지는 듯했다.
배달은 예상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함께 식사를 끝낸 후 채현은 잔뜩 쌓인 메시지에 하나하나 답을 보냈다. 개중에는 전화를 걸어와 걱정해 주는 이도 있었다.
여럿과 연락한 탓에 끝내고 나니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그사이 서윤채는 피곤했던 건지 소파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채현은 아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
그러다 불현듯 지금 제 상태가 엉망이란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분명, 어제도 집으로 돌아가 씻을 생각으로 대충 씻기만 했던 것 같은데…….
남의 집에서 더러운 꼴로 있는 손님이라니. 이보다 더 최악은 있을 수 없었다. 사색이 된 채현은 가방에서 편안한 옷을 챙겨 절뚝절뚝 욕실로 향했다. 목발 사용에 익숙지 않아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도 꽤 걸렸다. 혹여나 서윤채가 깰까 봐 조심히 움직이느라 더욱이 그랬다.
“와, 이 꼴로…….”
욕실 거울로 본 모습은 역시나 가관이었다. 잘도 서윤채와 마주하고 밥을 먹었구나 싶어 일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울상을 지은 채현은 서윤채가 미리 일러 준 곳에서 새 칫솔을 꺼내 양치를 하고 세수까지 끝마쳤다. 그 뒤엔 머리라도 감아야겠다 결심하며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샤워 부스 대신 욕조가 있어, 대충 걸터앉아 씻으면 어떻게든 되지 싶었다.
머릿속으로 구상한 계획은 완벽했다. 욕조 근처로 가 따뜻한 물을 틀고 샤워기를 쥔 것까지도 좋았다.
“아!”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어 우당탕 요란스레 넘어질 뻔했으니. 몸을 지탱하느라 샤워기도 놓쳐 물이 사방으로 튀며 옷이 흠뻑 젖었다.
“권채현, 뭐…!”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서윤채까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리만 신경 쓰느라 문 잠그는 걸 잊었던가. 소릴 듣고 바로 달려온 듯한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채현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하…….”
깜짝 놀란 건 서윤채도 마찬가지였다. 자다 깨 정신없이 달려온 그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앞의 채현을 바라보았다.
“나, 나가!”
쫄딱 젖어 어쩔 줄 몰라 하는, 희고 붉은 이를.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자 채현의 낯은 끝을 모르고 붉게 달아올랐다. 샤워기도 그대로라 몸이 계속해 젖어 들었다. 하필이면 흰 티셔츠를 입고 있어 적나라하게 비치기까지 했다.
“참…….”
그새를 못 참고 일을 친 꼴에 황당해하자, 채현이 눈에 띄게 움찔대며 연신 눈치를 봤다. 단잠에 빠졌다가 반사적으로 달려온 서윤채는 물끄러미 채현을 살폈다. 일순 바짝 일어섰던 긴장이 그제야 조금 죽는 듯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얼핏 봐도 그려졌다. 머리를 감으려다 중심을 잃고 넘어진 거겠지. 저를 부르면 될 걸 혼자 끙끙댄 것이 황당하다가도, 애를 쓴다 싶어 참을 새 없이 웃음이 샜다.
“괜찮으니까 제발 나가 주면 안 될까.”
“내 집인데.”
“그럼 눈, 눈이라도 감든가!”
뭘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소리쳐 봤자 아무런 효과도 없는데. 서윤채는 채현의 말을 따르지 않고 성큼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너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어?”
“그러니까 나가라고…….”
채현은 맥이 완전히 꺾였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서도 붉은빛이 감돌았다. 그 꼴을 보던 서윤채는 채현의 상체를 끌어안듯 일으켜 욕조에 앉히고 발광하는 샤워기를 주웠다.
“유치원생도 너보단 얌전하겠다. 나 부르라니까 왜 혼자 움직이다가 처자빠져?”
“넘어지진 않았어. 넘어질 뻔… 한 거지.”
“차이가 있긴 해?”
그 와중에도 입은 살아 말대꾸를 했다. 어떻게 돼먹은 새끼인 건지……. 채현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볼 안쪽을 혀로 훑은 서윤채는 거듭해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예전부터 손이 많이 가더니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한결같은 모습에 고갤 가로저은 서윤채는 입매를 느슨히 하고 채현의 머리를 살짝 내리눌렀다.
“야. 머리 감겨 줄 테니까 욕조로 들어가 앉아. 어차피 젖었으니까 옷은 씻고 갈아입고. 깁스만 안 젖게 조심해 봐.”
“너 피곤하잖아. 그냥 나 혼자 씻고 나갈게.”
“왜. 이번엔 아예 자빠져서 반대쪽도 깁스해 보려고?”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중얼거린 채현이 고개를 쳐들며 손바닥 새로 머리칼이 스쳤다. 간지러운 감촉 탓인지 손끝이 움찔 떨렸다. 주먹을 꽉 쥐었다 푼 서윤채는 채현의 머리를 살살 매만졌다. 꼭 털 동물을 쓰다듬는 듯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뭐. 불만 있어?”
“아니.”
……요.
희미하게 따라붙는 어미에 서윤채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채현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하는 짓이 웃겨서인지, 성가시고 화가 나기보단 보는 재미가 있단 생각만 들었다.
“기다려. 수건 하나 깔아 줄 테니까 그 위에 앉아.”
새 수건을 하나 꺼내 욕조 바닥에 깔고 채현을 앉혔다. 부끄러워하기 바쁜 이는 순순히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목 여기 대고 기대 누워 봐.”
하나 더 가져온 수건은 작게 접어 채현의 목과 욕조 사이에 대 주었다. 조심스레 자세를 잡아 준 서윤채는 제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그 상태로 물을 틀고 바로 씻기려 하니, 채현이 눈을 크게 뜨며 빠르게 깜빡였다. 여길 봤다가 저길 봤다가 하는 꼴을 보니 할 말이 많은 듯해 행동을 멈췄다.
“왜 또.”
“……얼굴 안 가려 줘?”
“뭐?”
채현을 내려다보던 서윤채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끝내 황당함을 머금은 실소를 흘렸다. 참, 지치지도 않고 헛소리를 하는 것도 재주지 싶었다.
“채현아.”
“아!”
“물 뿌려 버리기 전에 얌전히 있어. 기분 더러우면 네가 눈을 감고.”
원래 얼굴도 다 가려 주지 않느냐. 씻기다 보면 가까워서 너도 싫을 거다. 서로 기분 상할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정성껏 개소리를 뱉는 이의 이마를 튕겨 말을 끊었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는데 왜 기분이 상해. 좋아지면 좋아졌지.”
이마를 감싼 채 괴로워하던 채현이 눈을 치켜뜨며 의문을 드러냈다. 눈꼬리에 고인 눈물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서윤채는 입꼬리를 당겼다.
“네 친구 잘생겼잖아.”
“진짜 뭐래……. 하나도 안 웃겨.”
“웃으라고 한 소리 아닌데.”
진심으로 이야기한 서윤채는 부러 곱게 웃어 보였다.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던 채현이 입을 작게 벌리며 멍해진 것도 동시였다. 수 초간 빤히 응시하던 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유난은.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현을 보며 호흡하듯 웃은 서윤채는 조심히 그의 머리를 적셨다. 남의 머리를 감기는 일은 난생처음이라 손짓이 능숙하진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그를 씻겼다.
“넘어진 거 걸려서 창피해? 귀가 불타고 있는데.”
“아, 놀리지 말고 머리나 감겨…….”
“감겨? 명령을 하네.”
“아니, 아, 감겨 달라고……. 누가 감히 명령을……. 부탁한 거야.”
내던지는 족족 반응을 보이는 채현이 웃겨 장난을 치기도 했다. 쉬지 않고 아옹다옹한 탓인지, 씻는 데 시간이 걸려 꽤 오래 지나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서윤채는 베개처럼 받쳤던 수건을 펴 채현의 머리를 털어 주었다. 채현은 움찔대면서도 얌전히 손짓을 받으며 눈만 끔벅거렸다. 사람 손을 잘 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듯했다.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옷만 갈아입고 나와. 샤워는 내일 방수 커버 사 온 다음에 하고.”
“진짜 고마워.”
“알면 됐고.”
혹시 걸려 넘어질 것이 있나 주변을 살핀 서윤채는 손을 닦고 먼저 욕실을 나왔다. 머리 하나 감겼을 뿐인데 큰일이라도 치른 기분이었다.
“애 하나 키우는 것도 아니고.”
실없이 웃은 서윤채는 피로해진 어깨를 두드리며 방으로 향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때마침 채현도 모습을 드러냈다. 수건을 뒤집어쓰고 쭈뼛대기에 낚아채 소파로 이끌었다.
“머리도 말려 줘?”
“아니! 제발 혼자 하게 해 줘.”
까딱하다간 울겠네. 강하게 의사를 표하는 채현을 직시하던 서윤채는 느릿느릿 욕실로 가 뒷정리를 했다. 채현이 나오면서 대충 치워 둔 것인지 정돈할 것이 많진 않았다.
이후엔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죄지은 사람처럼 굴던 채현도 점점 적응하는 게 눈에 보였다. 천천히 스미던 여유는 찰나에 그치고 말았지만.
잘 시간이 되어 방으로 향할 무렵, 채현은 또 어색해 죽으려고 했다. 그뿐일까. 사지로 끌려가기라도 하듯 만면에 낭패감이 그득했다.
“침대가…….”
“커. 둘이 자도 문제없을 만큼.”
“넌 혼자 살면서 무슨, 저렇게 큰 침대를 쓰냐…….”
서윤채는 그를 진작 알아챘지만 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불편하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친구가 괘씸하기도, 웃기기도 해 잠자코 지켜만 보았다.
“자라.”
인간 목발을 자처하며 채현을 눕힌 뒤 서윤채도 반대편으로 돌아가 몸을 뉘었다. 어둑한 공간은 삽시에 침묵으로 뒤덮였다. 깜빡깜빡. 얼마간 멀거니 시선을 흘렸을까.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채현이 보였다.
저러다 굴러떨어져서 어디 하나 또 부러지지. 쯧, 혀를 찬 서윤채는 채현을 확 잡아끌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끌려온 이는 시선이 맞닿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파들파들 떨리는 눈가에선 긴장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뭐가 그리도 떨려서 입을 꾹 다물고 숨까지 참는지. 겁먹은 개처럼 굳은 채현을 보던 서윤채는 그의 눈가를 톡 건드렸다.
반응은 빨랐다. 채현은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시선이 온전하게 얽힌 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주침은 찰나였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상대는 눈꺼풀 아래로 재차 숨어들었다.
그를 목격한 서윤채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채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누가 보면 내가 무슨 짓 하는 줄 알겠다.”
그 끝에 흘러나온 음성은 조금 탁해진 채였다.
“안 건드려 줬으면 해…….”
채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퍽 또박또박 대꾸했다. 귓가에 틀어박힌 말을 곱씹던 서윤채는 한 박자 늦게 헛숨을 터뜨렸다.
“이게 누굴 추행범으로 몰아가.”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자다가 혹시라도… 너, 막, 착각해서 그럴 수도 있고…….”
“개소리야. 널 여자로 착각이라도 할까 봐?”
느릿하게 눈을 뜬 상대는 답 없이 힐끗거리기만 했다.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었다. 덩달아 입을 다문 서윤채는 채현과 눈길을 주고받다 바람 빠지듯 웃었다.
“여자 들인 적 없는데.”
“어?”
더 커질 수 있을까 싶던 눈이 한층 크기를 키웠다. 뒤이어 말간 눈동자 가득 불신이 차올랐다. 그 꼴을 본 서윤채는 더 말을 얹는 대신 시선을 옮기며 돌아누웠다.
“헛생각하지 말고 잠이나 자.”
“…….”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이전과 달리 시종일관 어색해하던 이는 그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슬쩍 이불을 끌어당겨 덮더니 ‘잘 자…….’ 조용히 속삭이기도 했다.
서윤채는 간지럽게 귓등에 와 닿는 소릴 들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채현의 호흡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차 일정해졌다.
이후론 기억이 희미했다. 그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타인과 한 침대서 잔 건 처음인데, 나쁘지 않았단 감상만 짙게 남을 뿐이었다.
* * *
시간이 흐르며 채현의 하루는 안정을 되찾았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긴장은 가라앉고 평온이 찾아들었다.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것들에도 익숙해졌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서윤채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을 만큼 서툴던 목발 사용이 그 첫 번째였다.
그러다 넘어진다. 발 내딛는 순서부터 틀려먹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시키기나 해라. 떠먹여 준다는데 왜 입을 못 벌리냐……. 쉬지 않고 잔소리하던 이도 이제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저기…. 걱정을 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날 잡고 싶은 거야?’
‘진짜 잡는 게 뭔지 보여 줘? 순수한 마음을 매도하네.’
끝내는 귀에서 피가 날 법한 상황을 벗어나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혼자 학교를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목발에 능숙해진 덕이 컸다. 처음 며칠은 서윤채가 직접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기까지 해 죄스러웠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어쩌다 하게 된 룸메이트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잠드는 날이 반복된 덕일까. 꼭 세뇌라도 된 듯 점차 적응이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초마다 상대를 의식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급작스레 맞닥뜨리는 상황엔 면역이 전혀 없었지만.
처음 서윤채에게 제안을 들을 때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오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는데.
“…….”
채현은 침대 한구석에 드러누워 멀뚱히 천장만 보다 웃음을 흘렸다. 주인 없는 집에, 더욱이 서윤채의 집에 홀로 머물며 여유를 만끽하는 제 신세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뒹굴, 옆으로 돌아누운 채현은 서윤채가 자던 공간을 눈에 담았다. 아무도 없는 빈 침대인데 꼭 그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공연히 손끝이 저린 기분이 들어 이불을 코밑까지 당겼다.
“……서윤채 냄새.”
짙게 남은 흔적에 마음은 지치지도 않고 술렁였다. 원래 누군가를 좋아하면 감각이 민감해지는 건가. 그도 아니면 서윤채의 향이 지나치게 좋은 건가……. 변태와 다를 바 없어진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길 잠시, 시답잖은 생각을 이어 갔다.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에 저항하지 않고 머릿속을 여러 상념으로 채울 무렵이었다. 곤히 밀려오던 잠기운을 몰아내는 진동이 길게 울렸다.
흠칫 어깨를 떨며 눈을 뜬 채현은 불을 밝힌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서유난’이라 큼지막하게 적힌 글자 다음으로 6시에 가까워지는 시간이 보였다.
“여보세요.”
― 뭐 하고 있어.
연결된 전화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음과 귀에 익은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나 그냥 누워 있다가 잠깐 졸았어.”
― 잘 거면 침대에서 자라. 다리도 불편한 게 소파에서 깝치지 말고.
“깝… 안 그래도 네 침대 지금 점령했거든. 나중에 딴소리하지나 마….”
― 누가 딴소리를 해. 점령하든 뭘 하든 알아서 하고. 끊을 테니까 더 자.
픽 들릴 듯 말 듯 한 웃음이 사그라들고 까칠한 말씨가 귓가에 틀어박혔다.
“넌 볼일 다 끝났어?”
― 어. 지금 들어가. 한 시간 내로 가니까 괜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자고 있어. 끊는다.
전화는 대꾸할 틈도 없이 뚝 끊겼다.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귓가에서 핸드폰을 뗀 채현은 도드라져 들리던 음성을 곱씹다가 멋쩍어져 입술을 적셨다.
“전화는 왜 했대…….”
통화 시간은 1분이 채 안 되었다. 그사이 나눈 대화도 별것 없었고. 약속이 끝났다 보고하기 위해 연락한 건 아닐 텐데. 용건 없이 전화를 해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하. 길게 한숨을 내쉰 채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의미 부여하지 말자. 행동 하나하나 해석하려 하지 말자.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수백 번도 넘게 되뇐 다짐을 또 한 번 곱씹었지만 쉽진 않았다.
얼마간 달아난 잠기운을 좇으며 눈만 꼭 감고 있었을까. 삑삑.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뜬 채현은 휙 이불을 걷고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윽.”
급히 움직여 발목이 찌릿했으나 금방 안정을 찾고 방 밖으로 나섰다. 절뚝대며 거실 중간쯤 갔을 무렵, 걸어 들어오는 서윤채가 보였다. 기척을 느꼈는지 상대도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무표정하던 그의 낯에 일순 웃음이 비쳤다 사라졌다.
“왔어?”
“어.”
얕게 고개를 까딱인 집주인이 부축해 주냐는 듯 손짓했다. 고갤 도리도리 젓자, 다리를 확인하곤 먼저 소파 쪽으로 움직였다.
“밥은.”
뒤를 졸졸 따르던 채현은 나지막이 깔리는 물음에 주춤하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뭔가 평소랑 조금 다르지 않나.
찰나 스친 위화감은 외투를 소파에 던지듯 두는 이를 볼수록 짙어졌다. 그 낯선 느낌은 뒤를 돈 그와 재차 눈이 마주친 순간 확신이 되었다.
꼭지가 돌았구나.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안 먹었어?”
늘 그랬듯 평범히 물어 왔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거기에 더해 눈빛도 정상이 아니었고. 성난 기색을 억누르고 멀쩡한 척을 하는 듯한데, 채현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아까 낮에…….”
“배고프면 말해. 차려 줄 테니까.”
“넌?”
“딱히. 나 씻는다.”
갈아입을 옷을 챙긴 집주인은 금세 욕실 너머로 사라졌다. 물끄러미 닫힌 문을 보던 채현은 막힌 숨을 터뜨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뭔 일 있었나.”
성질이 곱지 않을 뿐 화를 내는 경우는 드문데 저러는 꼴을 보니 신경이 쓰였다.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했고. 채현은 제 모습이 비치는 텔레비전을 보며 고민하다 배달 앱을 켜 빠르게 손을 놀렸다.
서윤채가 씻는 사이 주문한 음식은 함께 소파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쯤 도착했다. 문 앞에 두고 간다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일어서니, 태블릿만 보던 서윤채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어디 가.”
“잠깐 있어 봐.”
느릿느릿 최선을 다해 현관으로 향한 채현은 바깥에 놓인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그 꼴을 본 이는 성큼 다가와 치킨을 대신 받아 들었다.
“배고프면 말하라니까. 집밥 먹기 싫었어?”
“아니, 그냥 너랑 먹으려고 시켰어. 너 지금… 인상 장난 아닌 거 알아?”
“뭐라는 거야.”
테이블에 치킨을 내려 둔 그는 다시 가까이와 자연스레 부축해 주었다. 보다 안정적으로 자리로 돌아온 채현은 ‘감사…….’ 중얼거리곤 말을 이었다.
“너 열받으면 밥 잘 안 먹잖아. 굶었지? 네가 좋아하는 걸로 시켰어. 먹고 풀라고.”
“…….”
“개빡친 거 다 티 나니까 안 숨겨도 돼…….”
“혼자 왜 자꾸 들썩거리나 했더니.”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서윤채는 침묵을 유지하다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머릴 쓸어 넘기는 손짓에서 직전보다 느슨해진 기색이 느껴졌다.
“맥주? 콜라?”
치킨을 내려다보던 이가 나지막이 물었다. 맥주라고 답하자 금세 맥주 한 캔과 얼음을 가득 채운 컵을 가져왔다. 시원한 캔 맥주를 건네준 이는 본인 컵에 콜라를 가득 따랐다.
“기특한 짓을 했어.”
“같이 지내는 입장에서 쫌 눈치 보여서.”
“왜 네가 눈치를 봐. 내가 너한테 화내?”
젓가락을 넘겨준 서윤채가 의문을 드러냈다. 까닥 가볍게 고갯짓하는 모습에선 아까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는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풀린 건가. 조금 기가 살아난 채현은 그를 힐끔대며 치킨 하나를 집어 먹었다.
“거울 보면 너 그런 말 못 할걸. 눈이 돌아 있었다고…….”
“그러냐.”
픽 짧게 웃은 이가 고개를 살짝 젖히며 음료를 마셨다. 달그락. 얼음이 구르는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서윤채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채현은 그가 젖은 입술을 핥는 모습까지 본 후에야 간신히 소리를 흘렸다.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우리 채현이 눈치가 원래 이렇게 빨랐나.”
흘러나온 음성은 다소 가라앉은 채였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재차 목을 축이곤 실없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느냐고. 이유야 많았다. 오랜 친구니까. 짝사랑하는 상대니까. 서윤채니까……. 작은 변화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널 모를까.”
개중 아무 답이나 골라 중얼거리자, 서윤채의 시선이 뺨에 와 꽂혔다. 눈빛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뚫어져라 주시하는 통에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해 채현은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무슨 일 있는 거면 편하게 말해 줘. 내가 뭐라도 해 줄 수 있으면 다 해 줄게. 위로도 가능.”
그 끝에 말을 늘어놓으니 시선을 거둔 서윤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는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다 고갤 비스듬히 기울이고 테이블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철든 소리를 하네.”
“아무래도 내가 너보다 형이니까….”
“몇 개월 먼저 태어났다고 유세 떨기는. 하긴, 너 옛날에도 형 타령했지.”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그 정도였어.”
단호히 말을 맺은 이는 가볍게 상황을 전했다. 사고가 있었는데 원활히 풀리지 않아 조금 성질이 났었다고. 지금은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고. 이야기를 듣던 채현은 한마디씩 얹으며 대화에 몰두했다. 그 덕인지 서윤채 역시 빤히 눈을 마주쳐 오며 붉은 입술을 끌어당겼다.
분위기는 삽시에 부드러워졌다. 이후엔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며 치킨을 먹었다. 맥주 한 캔을 거의 다 비우자, 서윤채가 새 맥주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만족스럽게 액체를 넘기던 채현은 떨어지지 않는 눈빛에 눈동자를 굴렸다. 옆을 살짝만 바라봐도 곧장 서윤채와 시선이 얽혔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거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부산스럽게 굴기도 잠시, 손짓 하나까지 어색해지는 듯해 결국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할 말 있어?”
물끄러미 시선을 흘리던 이는 짧게 목을 울리곤 입을 열었다.
“글쎄…. 고민 중이야.”
“무슨 고민?”
뜻 모를 말만 중얼거린 서윤채는 이내 바람 빠지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계속 나랑 살래?”
예상치 못한 물음에 채현은 맥주를 손에 쥔 채 굳었다. 동거 제안이라니. 갑작스레 군식구가 생겨 불편하지도 않았던 걸까.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집주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너 남이랑 부딪히는 거 싫어하잖아.”
“어. 근데 너는 괜찮네. 워낙 오래 봐서 그런가.”
누군가와 24시간 붙어사는 모습을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이였다. 빈말로도 곱다곤 할 수 없는 성격과 성가신 일을 싫어하는 성정 탓에 더더욱.
그런 서윤채가 제게는 예외를 두었다. 좋아해야 하는 걸까. 짝사랑하는 입장에선 그리 좋지만은 않은데도. 언제고 제게만 내보이는 관용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개 키우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인가 싶기도 하고.”
가벼이 웃은 서윤채가 눈을 내리깔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뭐가?”
“너 매일 나 들어올 때마다 현관까지 쫓아 나오잖아. 절뚝대면서 열심히 오는 게 보이는데…… 그게 나쁘지가 않더라고.”
아. 짧게 목을 울린 채현은 지난 제 행동을 곱씹어 보았다.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이제야 ‘내가 그랬구나.’ 인식이 되었다.
“그냥 집에 사람 있으니까, 잘 다녀왔냐고 인사한 거였는데…….”
“그래. 그게 좋다고. 집에 사람 냄새도 나는 거 같고. 혼자 살면 심심하잖아.”
심심했던가. 확실히 침묵에 잠길 때가 많아 가라앉는 순간이 더러 있었다. 그에 반해 서윤채와 함께 지내는 최근 며칠은 조용해질 새가 없긴 했다.
목발 하나로 아옹다옹하던 시기가 지나자, 그다음엔 별거 아닌 일로 또 티격태격했다. 그러다가도 의견이 맞아 한밤중에 라면을 끓여 나눠 먹기도 하고…….
‘채현아, 눈 다 뜬 거야?’
‘놀리지 마라…. 라면은 같이 먹었는데 왜 나만 이래?’
‘놀리긴 누가 놀려. 귀엽다는 거지. 너 지금 존나 멋있어. 거울 보여 줄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즐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제 처지를 잊고 순간에 빠져들어 양껏 웃으며 누릴 만큼. 못된 마음이지만, 다리를 다쳐 다행이란 생각도 두 번 정도 했으니까.
“그리고 원래 너랑 같이 살 생각이었어. 네가 군대로 내빼지만 않았어도.”
“아니,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낸대…….”
“왜. 이건 당당하게 말하기 좀 찔려?”
탁. 테이블 울리는 소리가 나도록 컵을 내려 둔 서윤채가 고갤 삐딱하게 기울였다. 비스듬히 기운 시선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내렸다.
“표정 봐라. 두 번 말했다간 기절하겠는데.”
“…….”
“안 캐물어. 그러니까 쫄지 말고 표정 풀어.”
얼핏 명령처럼 들리는 말이 다정히 귓등을 건드렸다. 채현은 서윤채를 한번 보았다가, 테이블 언저리로 눈길을 떨어뜨렸다가 제자리를 찾듯 그를 재차 올려다보았다. 흔들림 없이 와 닿던 시선과 단박에 얽혀 들었다.
얼마간 눈을 깜빡이며 서로를 망막에 새겼을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서윤채가 일순 비뚜름히 입술을 끌어 올렸다. 단조롭던 그의 표정이 삽시에 불량한 빛을 띠었다.
“근데 왜 답이 없어.”
“어?”
“안 캐묻는 건 네 군대 얘기고. 같이 살잔 말엔 대답해 줘야지.”
“……진짜 진심으로 한 말이야?”
“그럼 뭐 구라로 같이 살자고 했을까 봐.”
바람 빠지듯 웃은 그가 까딱 고갯짓을 했다. 대답을 종용하는 행동이었다.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다니. 이런 억지가 어디 있나 싶다가도, 조건반사적으로 덩달아 웃음이 났다.
“우리 학교도 다르고 서로 집 구해 놓은 것도 있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할 수 있는 말은 부정의 답뿐이었다. 이 애정을 서윤채가 모르도록 하면 된다는, 안일한 방치 속에 즐기는 유한한 한집살이와 동거는 전제부터 달랐으니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방법이야 찾으면 되지.”
“번거롭잖아. 지금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주 봐도 충분할 거 같은데.”
“그게 더 번거롭겠다.”
서윤채는 가차 없이 반대 의견을 묵살했다. 열심히 제 살길을 찾던 채현은 ‘이럴 거면 내 의견은 왜 물어본 거지?’ 생각이 들었지만, 구태여 티를 내진 않았다.
“너 그 정도로 나랑 살고 싶어?”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오기가 생기네.”
“아!”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인 서윤채가 손을 들어 이마를 탁 튕겼다. 깜짝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채현은 한 손으로 맞은 부위를 문질렀다.
“어디서 내뺄 궁리만 하고 있어. 네 머리 굴러가는 소리 안 들릴 것 같지. 다 들려, 채현아.”
“성질 좀 죽여…….”
“뭐 하루 이틀이야? 그래도 너한테는 지랄 안 하잖아. 그럼 됐지.”
나지막이 덧붙인 이는 얼음이 거의 녹아 사라진 액체를 비워 냈다.
“네 친구 거절당해서 상처받았으니까 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해.”
“…….”
“그때도 거절할 거면 제대로 된 이유 만들어서 와라.”
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서윤채의 태도에 채현은 한숨을 꾹 삼켰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서……. 그는 지금 고민조차 하지 않고 무작정 거절만 했다는 걸 알아챈 거다. 그를 알면서도 따져 묻는 대신 상황을 넘기길 택한 것이고.
“…응.”
이 상황에서 채현이 고를 수 있는 대답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뿐이었다. 미처 삼켜 내지 못한 한숨이 말끝에 들러붙어 터져 나왔다.
* * *
중간고사가 코앞이라는 사실만 빼면 제법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그사이 다리도 잘 낫고 있어 생활도 더욱더 안정되어 갔다.
그러한 날들의 연속에서 채현은 서윤채와 함께 외출을 했다. 계기는 간단했다. 늦은 밤 갑자기 연락해 온 이윤범이 ‘내일 술 마시자.’ 이야기한 탓이었다.
처음엔 당연히 거절했다. 한데 이윤범은 몹시 강경한 태도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서 힘들다. 아플 땐 알코올로 치료하는 게 진리인 거 모르냐. 친구 집에서 지내고 있어 어렵다. 그럼 그 친구도 함께 와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말이 안 될 건 뭐냐…….
‘간다고 해.’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말다툼을 끊어 낸 건 예상외로 서윤채였다. 통화 소리가 흘러나왔는지 그는 뜻밖의 말을 하며 핸드폰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사장님! 여기 소주 하나랑 콜라 하나 더요!”
초대받아 온 술자리엔 과방에서 종종 함께 마시던 선배도 여럿 있었다. 개중에는 정문영도 있었는데, 단박에 서윤채를 알아보곤 반갑게 손을 붕붕 흔들어 댔다.
이들 모두가 사람이라면 다 좋아해서일까. 서윤채는 그들과 여러 번 만났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학교 다닐 때부터 모두와 잘 지내긴 했었다만 능청스레 웃는 꼴을 보니 새삼 놀라웠다. 그의 친구라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권채현, 벌써 취했어?”
멍하니 서윤채를 보며 안주를 주워 먹던 채현은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였다. 느릿느릿 제 어깨에 걸쳐진 선배의 팔을 봤다가,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갤 저었다. 이유 없이 터지는 웃음도 함께 삐져나왔다.
“아니요. 아직 더 마실 수 있어요.”
“역시, 채현이가 술을 마실 줄 안다니까. 한잔하자.”
선배는 어깨동무했던 팔을 그대로 올려 머리를 마구 헝클이더니 잔을 채워 주었다. 채현은 제 잔이 차오르는 걸 보며 머릴 정리하다 자신을 직시하는 서윤채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뭘 보는 거지…….
눈을 끔뻑이며 의문을 표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권채현?”
“아, 네.”
마주침은 짧았다. 선배의 호명에 고개를 돌린 채현은 열심히 잔을 맞대었다.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술자리에 나와서인지 몹시 즐거웠다.
서윤채와 제대로 대화할 기회가 생긴 건 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빠르게 달리는 택시 뒷자리에 앉아 채현은 서윤채를 살폈다. 그가 아까부터 묘한 얼굴을 한 탓이었다.
자리가 별로였나. 술 강요는 없었던 거 같은데. 분명 잘 놀지 않았나…….
열심히 머릴 굴리며 바라보던 찰나, 휙 고개를 돌린 서윤채와 피할 새 없이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채현이 티가 날 만큼 어깨를 떨었지만 서윤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너 학교에서도 그러고 다니냐?”
“뭐가?”
영문을 모를 물음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답하자, 서윤채의 눈 깜빡임이 느려졌다. 눈을 느슨히 내리깔고 내려다보던 이는 그로부터 수 초가 지나서야 시선을 거뒀다.
“……아니다.”
이후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채현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창밖만 보는 서윤채를 힐끔댔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한데, 상태가 영 이상해 신경이 쓰였다.
택시에서 내린 뒤 서윤채는 오피스텔 건물을 향해 턱짓했다.
“먼저 올라가. 혼자 갈 수 있지.”
“너는?”
“잠깐 담배 좀.”
“기다릴까?”
“뭐 하러. 그냥 올라가서 먼저 씻어.”
가차 없는 말에 채현은 ‘빨리 들어와.’ 대꾸하며 몸을 돌렸다. 서윤채는 제자리에 서서 채현이 절뚝절뚝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흡연 구역으로 향한 건 채현이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익숙하게 구석진 곳을 찾아 들어선 서윤채는 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아 마시자 몸이 반응하는 듯했다. 채현과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의식적으로 줄여서인지, 순간 어지러운 듯도 했다.
“…….”
후. 길게 내뱉은 희뿌연 연기가 어두운 공간을 물들였다. 서윤채는 성의 없는 손짓으로 담뱃재를 떨며 눈을 깜빡였다. 오랜만의 흡연인 탓인지, 혀 밑이 씁쓰레하고 썩 맛이 좋지 않았다.
“아…….”
가느다란 연기와 함께 탁한 음성이 밤거리를 적셨다. 마찬가지로 어둑한 빛을 띠는 눈빛도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너저분한 곳을 훑다 보니 엇비슷했던 술자리 테이블이 떠올랐다. 자연히 그 자리에 있던 채현도 연상되었다. 곰처럼 생긴 남자에게 안겨 실실대던 모습이.
사랑받고 자란 이들이 그러하듯, 사람을 좋아하고 손을 잘 탄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도 종종 그런 모습을 보곤 했으니까. 분명 질릴 정도로 잘 아는 사실이었는데.
자신에겐 쭈뼛대며 어색하게 구는 주제에, 남에겐 곰살맞게 구는 꼴을 봐서일까. 이상하게 속이 뒤집어졌다. 불유쾌한 느낌이 빠른 속도로 퍼져 온몸을 물들였다.
‘뭐가?’
질문의 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이다. 그의 반응으로 보아,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동무하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였다. 다시 말해 아까 보았던 장면이 일상이라는 뜻일 테고.
“아…….”
허공 어딘가에 삐딱한 시선을 던진 서윤채는 담배 연기와 함께 헛웃음을 뱉었다. 입 안에 남은 담배의 맛을 곱씹듯 볼 안쪽을 혀로 훑길 잠시, 피식대며 담배를 짓씹었다.
“내가 씨발, 지금 이걸 왜…….”
신경 쓰고 있지.
유난히 눈에 밟히던 장면이 잊히질 않았다.
* * *
침대 위 둥글게 솟아 있던 이불이 부스럭 소릴 내며 움찔댔다. 끙끙 앓듯 울리는 가느다란 신음도 함께였다. 얼마간 그리 움직였을까. 이불이 슥 밑으로 내려가며 채현의 낯이 드러났다. 방금 막 잠에서 깬 사람이라기엔 심히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
평소보다 배는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은 물을 달라 아우성을 치듯 몹시 건조했다. 한눈에 봐도 퀭한 상태로 눈만 깜빡인 채현은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10시 15분…….”
시험공부를 하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이 7시였으니 고작 세 시간 남짓 잔 거였다. 이러니 죽도록 피곤할 수밖에. 시체처럼 누운 채현은 고르게 호흡만 반복했다.
중간고사가 당장 내일부터 시작인데, 해야 할 공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그저 등록금을 기부한 사람이 될 듯해 며칠 전부터 벼락치기를 시작했더랬다.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게 최고다. 미리 해 봤자 까먹을 뿐이다. 평생을 그 생각으로 살아왔건만. 대학 시험은 이야기가 달랐다. 예상보다 많은 양에 날밤을 까며 공부에 매달려야만 했다. 하물며 망한 수강 신청 탓에 계속 수업이 있어 편히 공부할 시간은 이번 주말뿐이었다.
막판 스퍼트로 새벽을 지새우는 꼴을 보며 서윤채가 무어라 했던가.
‘뭐…. 밤샘을 즐기는 거야?’
그는 ‘나는 널 이해할 수 없다.’ 얼굴에 써 붙이고서 물었다. 여유로울 땐 책을 보지도 않더니 왜 이제 와 밥도 못 먹고 공부를 하느냐고.
‘채현아, 안 들려?’
‘뭐가?’
‘네 건강 조져지는 소리.’
나이 믿고 깝치다가 골로 간다고 악담을 퍼붓기에, 혼자 조져질 테니 너는 들어가서 자라 항변했다. 끝내는 거실에서 코를 박고 졸다 서윤채에게 붙들려 방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얜 벌써 일어났나.”
휑하니 빈 옆자리가 유독 넓어 보였다. 어쩜 게으름 한번을 피우지 않는지. 재학생보다 더 부지런한 휴학생을 떠올리며 채현은 힘없이 웃었다.
딱 30분까지만 더 뒹굴 생각으로 자세를 바꿔 누울 때였다. 문밖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주인이 늦장 부리는 객을 불러내는 건가 싶어 놀란 채현은 후다닥 일어섰다.
“나 불렀….”
“다음엔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동시에 신랄한 말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움찔대며 제자리에 선 채현은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대체 뭘 잘못한 건지 알 수 없어 얼떨떨했다.
요즘 계속 성질부리더니 또 그러는 건가…….
언젠가부터, 정확히는 제 대학 동기와 술을 마시고 온 다음 날부터 서윤채는 이따금 시정잡배처럼 굴었다. 어디서 성질이 뒤집힌 건지 인상을 팍 구기고 맥락 없이 잔소리를 해 댔다.
‘야.’
‘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
무언가를 못마땅해한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뜬금없는 소리부터 들어야만 했으니까. 문제는 그 이유를 지금까지 모른다는 거였다. 원인을 찾아보자니 제 행동이 모조리 문제인 듯해 그냥 두고 봤었다.
“그래. 할 말 있으면 문자로 해. 또 주말 아침부터 전화하지 말고. 끊는다.”
오늘은 뭐가 문제지.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그가 귓가에 댔던 핸드폰을 내리는 게 보였다. 통화 중이었구나. 그렇다면 제 문제가 아니겠거니 생각한 채현은 남몰래 안심했다.
“일어났네?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 아, 통화 소리에 깬 건가.”
아니나 다를까. 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서윤채는 성난 기색 없이 질문을 던져 올 뿐이었다.
“아니. 그냥 저절로 눈이 떠졌어.”
“그럼 와서 앉아. 다리도 아픈 애가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
채현은 이리 오라는 듯 눈짓하는 그의 곁으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공간을 조금 띄우고 소파에 몸을 앉히자, 빤한 시선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다크 봐라. 턱 끝까지 흘러내리겠는데.”
짓궂은 웃음이 지척에서 터졌다. 그제야 그의 목소리에 반응해 뛰쳐나오기 급급했단 걸 깨달은 채현은 얼굴을 가렸다. 몰골을 확인하지도 않고 나오다니. 추레할까 봐 걱정이 됐다.
“이미 다 봤는데 가려서 뭐 해?”
“네가 나 부르는 줄 알고 급하게 나오느라 그런 거야.”
“너? 아.”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서윤채가 손에 쥔 핸드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과외 하는 애 이름이 김재현이야.”
“근데 왜 전화 온 거야? 너 오늘 과외 하러 가는 날 아니잖아.”
“본인 고삼이라고 나까지 수험생이라 착각한 거지, 뭐. 잘 얘기했으니까 이제 안 할 거야.”
확실히 또 한 번 전화했다간 큰일이 날 것 같긴 했다. 말없이 동의를 표하자 씩 웃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물끄러미 고갤 들어 올려 바라보니 ‘밥이나 먹자.’ 하며 걸음을 옮겼다.
채현은 서윤채가 아침을 차리는 사이 서둘러 씻고 나왔다. 이젠 다리가 많이 좋아져 움직이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촉촉이 젖은 머리는 밥을 먹으면서 자연 건조를 시켰다.
“내일은 내가 아침 차려 줄게.”
“아서라. 환자 부려 먹다가 또 병원 가고 싶진 않다.”
“나 이제 그 정도로 환자 아니거든. 그리고 밥은 내가 너보다 잘하잖아.”
식탁에 턱을 괴고 앉은 채현은 설거지하는 서윤채의 뒷모습을 직시했다. 밥도 본인이 차리더니 뒷정리까지 도맡아 해 미안함과 고마움이 비례하게 차올랐다.
“됐으니까 내 핸드폰이나 봐 봐. 누구야?”
객의 마음을 모르는 집주인은 길게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만 언급했다. 힐끗 확인한 화면엔 ‘엄마’라고 적혀 있었다.
“이모.”
“네가 받아 봐.”
일말의 고민도 없이 흘러나온 대답에 채현 역시 자연스레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워낙 가까운 사이여서인지 낯설다거나 어렵단 생각이 안 들었다.
“여보세요? 이모, 저 채현이에요. 윤채가 지금 뭘 좀 하고 있어서 대신 받았어요.”
― 어머, 채현아. 잘 지냈어? 이게 얼마 만이니.
“이모도 무탈하시죠? 못 뵌 지 오래돼서 보고 싶어요. 안 그래도 종종 이모 생각났는데.”
― 이모도 채현이 많이 보고 싶어. 윤채랑 집에 한번 들러. 지금 윤채 집에 있는 거야?
“아, 네. 윤채 집이에요. 조만간 윤채랑 꼭 갈게요. 이모 좋아하는 거 잔뜩 사서 가야겠다.”
하하 웃으며 통화하는 사이 물소리가 멎었다. 설거지를 끝낸 이는 바로 다가오는 대신 싱크대에 기대서서 시선을 던졌다. 와서 전화를 받으라는 몸짓에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모자는 닮는 것인지, 서윤채의 엄마 역시 안부차 한 거라며 끝인사를 남기고 통화를 종료했다.
“너 왜 전화 안 받아?”
“그냥. 네가 너무….”
고정된 눈길을 거두지 않던 이는 실없이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어선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상황을 마무리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채현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그를 뒤쫓았다.
“준비하고 나와.”
“응.”
매일 밤 공부에 허덕이는 걸 본 서윤채는 차라리 함께 도서관에 가자 제안했다. 같이 공부하는 것쯤이야 친구 사이에도 하는 일이니, 채현은 사심을 약간 담아 고갤 끄덕였더랬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수백 번을 곱씹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기분이 두둥실 들떴다.
간지럽게 풀어지던 입매는 밖으로 나온 뒤 완전한 호선을 머금었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도 기분을 좋게 하는 듯했다. 인근 도서관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 걸어가기로 했는데, 걸음마다 호흡을 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꼴을 본 서윤채 역시 하품하다 가벼이 웃었다.
도착한 도서관은 예상외로 사람이 꽤 많았다. 여기저기를 훑다가 중앙 커다란 테이블에 겨우 자릴 잡았다. 바로 앞에 있는 창으로 햇살이 들이치는 자리였다.
“넌 근데 무슨 공부 하게?”
“과외 준비랑 토익.”
소곤소곤 물었던 채현은 나지막한 대답에 작게 감탄하며 제 책을 폈다. 서윤채가 바로 옆에 있어서일까. 긴장되는 한편 집중도 잘돼 딴짓을 하지 않고 꽤 오래 책만 볼 수 있었다.
〈배고플 때 말해.〉
〈엉.〉
그사이 나눈 대화는 없었다. 노트 한 구석에 글을 적어 주고받은 쪽지가 전부였다. 한참을 공부만 하던 채현은 목이 뻐근해 스트레칭을 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숨을 돌린 후엔 자판기에 들러 음료 두 개를 뽑았다. 제 것보다 서윤채가 좋아하는 음료를 먼저 뽑아 웃음이 나기도 했다.
“…….”
자리로 돌아가자, 서윤채는 제 자리 쪽을 바라본 채 엎드려 눈을 감고 있었다. 힐끔 확인하니 얕은 잠에 빠진 듯했다. 채현은 아주 조심히 의자를 빼 앉으며 최대한 소리를 죽였다.
〈생명수(리필 가능ㅎ)〉
이어선 큼지막하게 글자를 적어 넣은 포스트잇을 캔에 붙여 그의 머리맡에 두었다. 얌전히 손을 거두고 공부를 이어 가려던 찰나, 문득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에 밟혔다.
“…….”
하필이면 잠든 서윤채에게 곧바로 닿는 모양새였다. 눈이 부시지 않을까. 잠깐 자도 푹 잘 수 있으면 좋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민하길 잠시. 채현은 서윤채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고 얼굴 근처에서 손차양을 해 주었다. 자연히 호흡은 꽉 틀어막힌 양 멈추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속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기척을 죽인다고 죽인 것인데, 상대에겐 부족했는지 서윤채가 눈을 뜬 탓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서윤채는 이내 설핏 웃으며 손을 들었다. 가벼이 움직인 손이 닿은 곳은 제 손끝이었다. 그는 직접 손을 쥐고 내려 주고선 얕게 고갯짓했다.
“공부해.”
오직 한 사람에게만 들릴 속삭임을 끝으로 서윤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 일도 없던 양 평화로워진 공간에서 오직 채현만이 소리 없이 동요했다.
서윤채와 닿았던 손이 긴장으로 물들어 움찔 떨렸다. 주먹을 움켜쥔 채현은 서윤채를, 자신을 향해 엎드려 무방비하게 눈을 내리감은 이를 바라보았다.
“…….”
쏟아지는 햇살에 젖은 듯, 귓가가 화끈거리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 * *
고요히 가라앉은 집 안에 문고리 돌아가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틈이 벌어졌다. 희뿌연 공간을 뒤로한 서윤채가 젖은 머리칼을 털며 한 발짝 내디뎠다.
탈탈. 서윤채는 그리 세심하진 못한 손짓으로 물기를 날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 행동에 뚝 떨어진 물방울이 훤히 드러난 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
그는 몸 구석구석으로 물이 떨어지는데도 느슨히 기대앉아 핸드폰을 매만졌다. 마치 한량이라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평소와 달리 상의를 입지 않아 더욱이 그랬다. 얕은 호흡을 이어 갈 때마다 선명한 복근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움직였다.
긴 속눈썹이 아래로 기운 채 일정한 속도로 흔들렸다. 느긋하다 못해 느릿한 깜빡임이었다. 그 사이 얼핏 권태로워 보이는 무심한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어. 왜.”
침묵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는 엇비슷하게 낮고 단조로웠다. 서윤채는 짧은 대답으로 전화를 이어 나갔다. 핸드폰 너머 상대는 벌써 밖인 건지 주위가 떠들썩했다.
“걘 아까 나갔지. 5시까지 가면 되잖아. 어. 늦긴 누가 늦어. 알아서 잘 갈 테니까 끊어.”
통화가 종료된 화면 위로 ‘정유빈’ 세 글자가 떴다. 절대 늦지 말라 외치던 친구의 말을 곱씹던 서윤채는 핸드폰을 휙 던지듯 내려놓았다.
타인의 소리가 사라지자 공간은 또다시 정적으로 가득 찼다. 어쩐지 조금 낯설고 생경한 적요였다. 채현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후로는 쉬이 느낄 수 없던 순간인데.
“…….”
흠. 호흡하듯 목을 울린 서윤채는 고갤 비스듬히 기울이고 고요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새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진 것이 우스웠다.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채현이라는 점도 꽤 영향이 있을 테지만.
“좀 신경 쓰이게 해야지…….”
늘 손이 많이 가는 탓에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 이가 떠올라 웃음이 샜다. 시험 기간엔 공부한다고 난리, 평소엔 예사로운 일로 난리……. 또 최근엔 축제 준비다 뭐다 부산스럽게 굴더니 오늘도 빨빨거리다 학교로 향했다.
‘한 달 더 깁스 신세 지고 싶은 거 아니면 조심해서 가라.’
‘너는 날 너무 띄엄띄엄 보는 경향이 있어.’
퍽 억울하단 얼굴을 한 이는 위로 솟은 눈꼬리가 더 뾰족해지도록 눈을 치켜뜨고 항의했다.
‘나 이제 그 정도로 환자 아니고, 매일 넘어지지도 않고. 또 신세 질 만큼 염치없지도 않거든.’
‘그러셨어요.’
‘어? 어……. 그러니까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신경 써. 이따 조심해서 와. 애들 만나면 연락하고.’
야무지게 말을 맺은 채현은 핸드폰을 휙휙 흔들어 보이곤 집을 나섰다. 어째서인지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축제까지만 신세를 지겠다고 했었는데, 끝이 다가와 기쁜 건가 싶었다.
“정 없는 새끼.”
언제부터 독립심이 그리 넘쳤다고. 채현이 이곳에 있는 양 중얼거린 서윤채의 입술이 비뚜름히 솟았다. 같이 살잔 제안엔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하더니. 아주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채현 덕에 서윤채는 뜻밖의 자아 성찰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제 딴엔 제집처럼 생활할 수 있게끔 해 줬다 생각했는데 부족했던 건지. 함께 지내는 것이 그 정도로 별로였나 싶었다. 자신은 나쁘지 않다고, 아니 꽤 괜찮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상대가 워낙 완강히 나오니 덩달아 승부욕이 생겼다. 그는 곤란해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큰코다쳐 봤으니, 이번엔 탈탈 털어서라도 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혼자 살기보단 같이 사는 쪽이 덜 심심해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픽 짧게 웃은 서윤채는 대충 끼니를 때울 요량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막힘없던 행동은 인덕션 위 팬에 가득 담긴 볶음밥을 확인하는 동시에 멈추었다.
“나 참…….”
제가 만든 음식이 아니었으니 범인은 한 명뿐이었다. 대체 어느 틈에 만들고 나간 건지 옆에는 계란국도 있었다. 실없는 웃음을 터뜨린 서윤채는 요리를 확인하며 인덕션 전원을 켰다.
〈약불에 데워서 먹어 맛아점ㅎ〉
“글씨하고는.”
해석하듯 읽고 나서야 쪽지 내용이 파악됐다. 혹 종이가 젖을까 바로 치운 서윤채는 밥을 다 데우고 먹기 시작할 때까지 연신 피식댔다.
실력 발휘를 해 줄 테니 기대하라던 이의 음식은 맛있었다. 본인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쏙 빼닮은 것인지 특별할 것 없는 볶음밥인데도 계속 손이 갔다.
1 오후 1:24 [사진]
1 오후 1:25 [조리학과의 인재가 왜 사과대에서 구르고 있어]
잘 먹었단 말을 덧붙인 서윤채는 핸드폰을 내려 두고 밥을 마저 먹었다. 답장은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설거지를 마친 순간 도착했다.
[권 : 300,000원을 받으세요.] 오후 1:45
“뭐야, 이건.”
한데 대화창을 채운 활자 상태가 영 좋지 않아 황당함이 차올랐다.
오후 1:46 [?ㅋㅋ칭찬했다고 돈 주는 건 아닐 거고]
오후 1:47 [난 돈 빌려준 기억이 없는데]
[권 : 아니그냥]
[권 : 여태얹혀산거미안하고고마워서ㅎ;]
[권 : 성의표시야..쫌늦었지미안밥도내가또해줄게] 오후 1:48
오후 1:50 [채현아 돈이 남아돌아?]
[권 : 돈은없어도양심은있으니까..] 오후 1:51
무슨 생각으로 돈을 보낸 건지 대충 가늠이 됐다. 어디서 또 뭔 얘길 주워들은 건지. 별짓을 다 한다 싶어 헛숨이 터져 나왔다. 머릴 쓸어 넘긴 서윤채는 빠르게 손을 놀렸다.
1 오후 1:53 [이상한 데서 양심 찾다가 멀쩡한 사람 채권자 만들지 말고 그대로 가져가라]
딱 보니 직접 송금 취소를 하진 않을 듯해 자동 환불이 될 때까지 둬야 할 듯싶었다. 하여간 권채현. 필요 이상으로 부채감을 느끼는 친구가 웃기기도, 한편으론 떨떠름하기도 했다.
저희가 고작 이 정도 일로 체면 차릴 사이였는지.
톡톡. 못마땅하게 화면을 두드리던 서윤채는 쯧 혀를 차며 공간을 벗어났다. 이따 채현과 만나면 한 소리를 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못다 한 일을 처리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약속 시간에 맞춰 채현의 학교로 향하자 다른 이들도 모습을 보였다.
“휴학생 때깔 봐라.”
하하 큰 소리로 웃은 배주희가 팔꿈치로 툭 건들며 장난을 쳤다. 본인도 같은 처지면서 말만 들으면 완전히 남 이야기였다. 입꼬리를 당긴 서윤채는 고갤 비스듬히 하고 정유빈을 내려다봤다.
“재학생 때깔은 영 별론데.”
“시선 처리 뭐야? 왜 날 봐? 기만할 거면 그냥 꺼져 휴학생 새끼들아.”
“채현이 주점에 있다는데? 무대 쪽으로 오면 보일 거래.”
화를 내는 정유빈 곁에 선 서아영은 그를 무시하고 평온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태연히 응한 서윤채는 멀리 보이는 무대를 향해 방향을 틀어 걸었다.
처음 와 보는 채현의 학교는 꽤 컸다. 캠퍼스 대부분이 평지고 일직선으로 이뤄져 있어 길을 찾기 어렵진 않았다. 일러 준 곳으로 얼마간 향하자 쭉 늘어선 주점이 나왔다.
“어, 채현이 저기 있다.”
거의 동시에 서윤채도 채현을 찾아 눈에 담았다. 그는 누군가와 붙어 서서 등을 내준 채였다. 상대가 채현의 등짝을 건드리는 게 멀리서도 훤히 보였다. 맞고 있는 건가. 서윤채의 눈초리가 일순 매서워졌다. 뚫어질 듯 자세히 보니, 생글생글 잘도 웃어 대 그건 또 아닌 듯싶었다.
“권채현!”
정유빈의 부름에 채현이 휙 고개를 돌렸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대던 이는 곧이어 머리 위로 손을 붕붕 흔들었다. 곁에 선 이에게 꾸벅 인사하곤 아예 절뚝절뚝 다가오기까지 했다.
“왔어? 너희 자리 빼 뒀어.”
“너도 같이 마실 수 있는 거지?”
“응. 일 안 해도 돼.”
신이 나 답한 채현은 손가락을 쭉 펴 앉을 자릴 알려 주었다. 일행은 고갤 끄덕이며 앞서 걸었다. 느지막이 발을 뗀 서윤채만이 채현의 곁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부축해 줘?”
“나 저기까지 뛰어갈 수도 있어.”
“발목 또 박살 나고 싶단 소리로 들리는데.”
할 말이 없어졌는지 상대는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내려다본 낯이 묘하게 불퉁해 보이는 듯도 했다. 작게 웃은 서윤채는 채현이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도록 신경 쓰며 발을 내디뎠다.
“야.”
모두가 있는 테이블에 닿기 직전이었다. 채현의 눈길이 제게 향하도록 한 서윤채는 상체를 살짝 굽혀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또 돈 보내는 짓 하면 진짜 채무자 만들 거니까 알아서 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어딘가 멍한 시선만이 쏟아질 뿐이었다. 서윤채는 개의치 않고 먼저 테이블로 향했다. 좋게 이야기했으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으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채현까지 자리에 앉고선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채현이 미리 술을 사다 둔 덕에 따로 사러 갈 필요 없이 바로 마시는 게 가능했다. 첫 잔을 함께 맞댄 서윤채는 이후로 콜라만 홀짝였다. 간간이 정유빈이 시비를 걸긴 했지만 모조리 무시했다.
대학 축제 주점이 대개 그렇듯, 주위는 몹시 소란스러웠다.
여기저기서 겹쳐 울리는 목소리. 안주를 나르느라 분주한 이들. 저렴한 가격의 안주. 무엇 하나 서윤채의 취향인 게 없었으나, 특유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잠자코 머물렀다.
사위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해로 금세 붉게 물들었다. 누군가 붓칠이라도 한 듯 번지던 색이 어둠으로 뒤덮이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한 공간에서 술을 마시면 행동도 닮는 것일까. 왁자지껄 떠들던 이들은 어느 순간 무대를 봐야 한다며 뛰쳐나갔다. 유명한 가수라도 온 것인지 주점은 삽시에 휑해졌다.
“넌 안 가?”
“관심 없어.”
“우리 학교 총학이 들으면 울겠다. 저 가수 부르고 되게 뿌듯해했다는데.”
호흡하듯 웃은 채현이 신중히 제 잔에 술을 채웠다. 취한 건가. 서윤채는 물끄러미 채현을 내려다보았다. 의문은 머지않아 확신이 되었다. 취했구나. 술 따르는 속도가 심각하게 느렸다.
졸…. 졸…. 성질 급한 사람은 숨넘어가게끔 술을 채우더니 퍽 만족해하며 잔을 들었다. 슬쩍 올려다보는 꼴을 보니 건배를 원하는 듯해 콜라를 툭 맞대 주었다. 상대는 그로도 실실대며 한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천천히 좀 마셔라.”
어찌 된 게 따르는 속도랑 마시는 속도가 두 배 차이가 나는지. 어이가 없어 한 소리 하자 채현은 ‘천천히…….’ 중얼거리며 아까보다 더 느리게 술을 따랐다.
“너 정신 남아 있긴 하냐?”
“당연하지. 이 정도로는 필름 안 끊기지.”
상황 판단은 되는 걸로 보아 아직까진 괜찮은 듯했다. 완전히 멀쩡한 상태는 아닌 듯했지만.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답한 이는 또 한 번 혼자 잔을 꺾었다.
가수를 보러 사라졌던 이들은 다행히 채현이 만취하기 전에 돌아왔다. 꽤 열정적으로 소리치고 온 건지 자리에 앉자마자 술로 목을 적셨다.
“은호는 대학 축제 안 뛰려나. 실물 보고 싶다.”
“걔 몸값이 어마어마할 텐데 이런 걸 할까?”
서윤채는 그들이 열기에 휩싸인 채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다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시간이 꽤 흘러서인지 아까보단 거리가 한산했다.
조금 걷다 돌아갈 생각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데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불규칙한 발소리도 함께 들려와 휙 뒤돌아보니 언제 쫓아온 건지 채현이 서 있었다.
“왜 쫓아왔어.”
“너 갑자기 혼자 막 가길래…….”
“잠깐 걸으려고 나온 거야. 가서 애들이랑 놀고 있… 아니다. 가자.”
곧 만취인 이를 혼자 보냈다간 사고 나기 십상이었다. 쯧 혀를 찬 서윤채는 산책을 포기하고 채현을 돌려세웠다. 순순히 돌아선 이는 잠시 멈칫하다 발을 내디뎠다.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어딘지 모르게 죽상을 하고 있어 묻자, 잠시 침묵하던 채현이 ‘그냥…….’ 하며 말문을 열었다.
“축제 안 끝났으면 좋겠어서.”
“더 놀고 싶냐?”
“……응. 아쉽다.”
그는 가느다란 웃음을 내뱉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를 좇아 서윤채의 눈길 역시 허공을 기었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더 놀고 싶은 건가. 하긴. 술 마시는 사람들은 일찍 자리를 끝내는 법이 없지. 골몰히 이어 가던 생각의 결론은 금세 나왔다.
“권채현.”
“어?”
비록 술에 젖었을지언정, 여전히 말간 눈빛이 똑바로 틀어박혔다. 그를 보며 서윤채는 나지막이 이야기를 흘렸다.
“집에 가서 둘이 한잔 더 할까.”
상대는 말이 없었다. 밤바람에 실려 밀려오는 주위의 소란 속에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얼어붙은 듯 멍하니 시선만 흘려 긍정을 뜻하는지 부정을 뜻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싫어?”
길어지는 침묵에 마침표를 찍은 이는 서윤채였다. 단 두 음절의 짧은 말이 나직하게 채현에게 전해졌다.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인 채현은 눈을 굴리며 침만 꼴깍 삼켰다.
“싫으면 됐고.”
싫다는 이에게 강요하면서까지 행하고픈 계획은 아니었다. 어차피 채현은 이미 알딸딸해진 상태였고 자신도 술을 즐기진 않았으니까. 그냥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생각이었다.
“싫은 거 아니야.”
고갤 가로저은 채현이 언제 침묵했냐는 양 대답하기 전까지는.
“근데 너 술 싫어하잖아. 마실 수 있어? 아… 아니다. 나만 마시고 넌 콜라 마시면 되겠다.”
그는 다소 횡설수설 이야기하더니 홀로 결정을 내리기까지 했다. 알코올에 잡아먹힌 애한테 또 술을 권하는 게 맞는 건지……. 서윤채는 순간 떨떠름했지만 이내 채현을 향해 턱짓했다.
“지난번에도 말했던 거 같은데. 너랑 술 한 번 못 마실 만큼 싫어하는 거 아니라고.”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싫긴 싫다는 거잖아.”
“왜 초점을 거기에 맞춰.”
채현은 오늘따라 덧붙이는 말이 많았다. 주정뱅이치고 꽤 예리하게 행간을 읽어 놀랍기도 했다.
“네가 더 놀고 싶다며.”
“너도 놀고 싶어?”
“그런 걸로 하고. 술은 내가 어련히 알아서 조절할까. 넌 신경 끄고 네 정신이나 붙들면 돼.”
“……아예? 아예 신경 꺼?”
상대는 또 이상한 데에 정신이 팔려 ‘어떻게 신경을 끄지?’ 중얼댔다. 한 잔 더 마시면 아예 골로 가겠는데. 헛웃음을 뱉은 서윤채는 채현의 이마를 약하게 튕겼다.
“왜. 신경 쓰고 싶냐? 배려 깊은 취객이라 이거야?”
“그냥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하고 싶어서 그렇지.”
예상외로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은 건 서윤채였다. 취한 이가 주절대는 담백하고 솔직한 대답이 꽤 큰 울림을 준 탓이었다. 거리 두기 바쁘고 뻣뻣하게 굴며 어색해하더니. 속으론 꽤 살갑게 굴고 있었구나 싶어 괜히 입매가 간지러워졌다.
“그래. 고마워. 고마운데….”
약간의 침묵 뒤 흘러나온 음성은 살짝 긁힌 듯 탁해진 채였다.
“신경을 쓰든 뭘 하든, 네 앞가림 먼저 하고 해.”
“응.”
빤히 와 닿던 눈빛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연속해 고갤 끄덕인 채현의 눈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퍽 순한 빛을 띠는 낯 위로 선명한 시선이 떨어졌다.
“그럼 정리됐지. 가. 앞장서.”
본인도 모르는 새 채현을 눈에 담던 서윤채는 일순 치미는 흡연 욕구를 억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반보 앞선 채 빙긋대며 걷는 이를 예의 주시하면서.
무사히 갈무리한 줄 알았던 충동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재차 치솟았다.
“얘 왜 이래?”
“가셨어.”
테이블을 살핀 서윤채는 실소를 내뱉으며 고갤 가로저었다. 그 끝엔 생각을 고쳐먹어야만 했다. 채현에게 취객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다. 맥락 없이 말을 늘어놓고 눈에 힘이 풀렸다 뿐이지, 의사소통은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진짜 취객은 테이블에 머릴 박고 잠든 저 새끼였다.
“술도 못 마시는 새끼가 왜 매번 뻗대는 거야? 처마시다가 제일 먼저 죽을 거면서.”
“봐줘. 재학생이잖아.”
“그럼 쟤는 뭐야.”
“……나?”
엇비슷한 처지인 주제에 정유빈의 어깨를 쥐고 흔들어 깨우던 채현이 고갤 갸웃했다. 서윤채는 일일이 응하는 대신 가볍게 무시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다 뭔 꼴인지……. 제일 주량 약한 채현이 남을 챙기고 있는 상황이 퍽 황당했다.
누구 한 명 취했다고 살뜰히 챙길 사이는 아니었다. 취객은 구석에 그대로 자게끔 두고 이어서 술잔을 주고받았다. 달라진 점은 한입에 털어 넣던 채현이 입만 적신다는 것 정도였다.
시끌벅적하게 이어지던 자리는 주점 마무리 시간이 돼서야 끝이 났다. 모두는 다음을 기약하며 택시에 몸을 실었다. 정유빈도 집 갈 시간이 되니 기가 막히게 정신을 차리고 홀로 귀갓길에 올랐다.
“정신 있냐?”
“어? 어. 안 취했어. 취하면 안 되니까 조절했지.”
뒷좌석 시트에 파묻히듯 기대앉은 채현이 퍽 의기양양한 투로 중얼거렸다. 멀쩡한 사람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였지만 서윤채는 고갤 끄덕였다. 노력이 가상해서인지 웃음도 났다.
“안주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 봐. 집 들어가기 전에 사서 가게.”
“과일 사 갈까? 너 딸기 좋아하잖아.”
“네가 먹고 싶은 거로 골라.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럼 딸기 사 가자. 나도 딸기 좋아해.”
마지막 한마디는 꼭 속삭임에 가깝게 새어 나왔다. 말을 맺은 채현은 허공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서윤채는 비스듬히 시선을 내려 채현을 바라보았다.
공간이 어둡고 조용해서일까. 차창으로 흘러들어 온 외부의 빛이 채현을 물들여서일까.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것이 꼭 무성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된 듯했다.
소리를 빼앗긴 차 안은 금세 정적으로 뒤덮였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침묵이었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고 주의를 옮겼다. 고갤 돌린 이의 보이지 않는 표정을 가늠하던 서윤채 역시 침묵에 어울렸다.
밤을 닮은 적요는 택시에서 내려 마트로 들어선 순간 사라졌다. 카트를 끄는 대신 바구니를 든 서윤채는 채현의 속도에 맞춰 발을 내디뎠다.
“토마토도 먹을래?”
“내 거 말고 네 안주를 고르라니까, 채현아.”
“난 과자 하나만 있으면 돼.”
채현이 본인 몫으로 고른 건 감자칩이 전부였다. 술은 맥주 네 캔을 때려 붓더니, 품목 간 빈부격차가 꽤 느껴지는 장바구니였다.
남 과일 신경 쓸 시간에 본인 먹을 안주나 고르지. 과자 하나로 되긴 뭐가 된다고. 못마땅해 쯧 혀를 차는 서윤채와 달리 채현은 어딘가 상기된 채 슬며시 웃어 대기만 했다.
결국 채현의 안주는 서윤채가 직접 골라 담았다. 늘 달고 살던 이상한 젤리와 과자, 혹시 몰라 컵라면과 냉동식품까지 챙겨 넣었다. 채현이 슬쩍 담은 건지 껌과 사탕도 여럿 보였다.
계산은 잽싸게 카드를 내민 채현이 했다. 당연히 제가 결제할 생각이었던 서윤채는 갈 곳 잃은 카드를 들고 헛웃음만 흘렸다.
“왜 네가 계산을 해.”
“나도 돈 있어.”
“우리 채현이가 오늘따라 돈을 헤프게 쓰네.”
상대는 소리 없이 억울하단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대낮부터 대뜸 몇십을 받았던 입장에선 별 효력이 없었지만. 불만 있으면 말하란 뜻으로 바라보자 채현의 눈길이 멀어졌다.
마트에서 집까진 금방이었다. 선선히 부는 밤바람을 길잡이 삼아 걸으니 금세 오피스텔 앞에 다다랐다. 아픈 다리로 오래 걸어 피곤할 법도 한데 채현은 씩씩하게 움직였다.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잘 준비를 모두 끝마친 뒤였다. 씻고 나온 채현은 한층 더 말갛고 투명했다. 그의 주위에 어른거리는 잠기운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곧 잠들겠는데.”
“아니야. 까딱없지.”
칙. 길게 늘어지는 대답 위로 맥주 캔 따는 소리가 겹쳐졌다. 꼭 마시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듯해 서윤채도 더 말을 얹지 않고 맥주를 들었다.
“너 진짜 마시려고? 안 마셔도 돼. 억지로 마시면 안 좋아.”
“넌 네 친구를 아직도 모르냐? 내가 억지로 마실 사람으로 보여?”
“……그 반대가 더 어울리긴 해.”
“됐네, 그럼.”
채현의 캔에 가벼이 제 것을 부딪친 서윤채는 먼저 맥주를 마셨다. 머지않아 채현도 고갤 살짝 젖히고 액체를 들이켰다. 한 번에 꽤 많이 마시더니 소름이 돋는지 어깰 부르르 떨기도 했다. 그를 본 서윤채는 채현을 비웃으며 과자를 앞으로 밀어 주었다.
시선을 조금 옆으로 옮기면 너저분하게 널린 껌과 사탕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간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더니 그 버릇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너 젤리 제일 좋아하지 않았나. 갈아탔어?”
“아, 그거…….”
사탕 하나를 주워 든 채현이 작게 웃으며 앞으로 내밀었다. 서윤채는 제 손끝에 닿은 막대 사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탕을 쥐여 준 이는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천천히 목을 축였다.
“사실 네 거야.”
그 뒤에 속삭이듯 흘러나온 음성은 비밀을 이야기하는 양 은근했다.
“너 가끔 나갔다 올 때 담배 피우고 오는 거 같길래.”
“아.”
짧게 목을 울린 서윤채는 예상보다 민감한 상대의 반응에 아차 싶었다. 냄새가 났던 건가. 신경 쓴다고 쓴 건데.
“몸에 안 좋잖아. 진짜 못 참을 거 같을 때 아니면 담배 피우는 대신 이거 먹어 보라고. 꽤 도움 된대.”
양손으로 맥주 캔을 감싸 쥔 채현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내리깐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 걱정해, 지금?”
“당연히… 하지. 친구잖아.”
마찬가지로 캔을 든 서윤채는 손가락으로 표면을 훑으며 채현을 살폈다. 어쩐지 그의 모습이 어둑한 거실과 잘 어울린단 생각이 들었다. 고요히, 그러나 선명하게 스며든 광경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꼭, 제 공간에 완전히 녹아들기라도 한 듯했다.
“이런 걸 보면 내가 싫은 건 아닌 거 같은데….”
“…….”
“우리 채현이는 왜 나랑 살길 싫어할까.”
그 모습을 보는 게 나쁘지가 않았다. 흡사 조바심이라도 내는 사람처럼 질문을 내던질 만큼.
“……나 떠보는 거야?”
“그렇다고 하면 순순히 대답할래?”
입을 꾹 다문 채현은 벌컥 맥주만 들이켰다. 한 캔을 마저 비우더니 아예 새걸 따 한 입 마시기도 했다. 그로도 부족했는지 젖은 입술을 핥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나 너 안 싫어해.”
“당연히 그래야지.”
채현이 저를 싫어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는 자만 아닌 자신이었다. 알고 지낸 시간만 17년이었다. 그가 어색하게 구는 이유가 따로 있을지언정, 적어도 저를 향한 불호는 아니었다.
서윤채는 분명히 존재하는 그 원인을 알고 싶은 거였다. 이왕이면 해결까지 하고 싶었고. 한 달간 함께 지내며 조금 나아진 듯했으나, 바로 돌아간다는 걸 보면 그도 아닌 듯싶었다.
“……건배할까?”
“닥치고 술이나 마시라 이거지.”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괘씸하고 답답했다. 이전처럼 솔직하게 굴지 못하고 뒷걸음질만 치는 꼴이 성에 찰 리 없었고. 그런데도, 채현이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쳐다보면 결국 뜻을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술이나 마셔.”
하여간. 예전부터 그랬지. 호흡하듯 실소를 흘린 서윤채는 눈을 내리깔고 맥주를 마셨다. 혀 밑을 적시고 흘러내려 가는 탄산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후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 캔만 비웠다. 적적하지 않게 틀어 놓은 TV를 이따금 보기도 했다. 형형색색 빛을 발하며 어두운 거실을 밝히는 외국 영화에 채현은 꽤 몰두했다.
하나 문제라고 한다면, 홀로 맥주 두 캔을 비우고 마지막 캔까지 든 채현의 의식이 간당간당해진 거였다. 그는 확연히 느려진 몸짓을 보이며 이유 없이 웃음을 흘려 댔다.
사고가 발생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반쯤 남은 맥주를 내려 두던 채현이 손을 삐끗하며 캔이 흔들렸다.
“야, 조심…!”
금방이라도 엎어질 모양새에 서윤채는 바로 손을 뻗었다. 다행히 쏟아지기 전에 잡아챘지만, 채현도 몸을 숙이며 팔을 뻗어 사이 간격이 심히 가까워졌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서로 숨결이 섞일 거리였다. 채현은 그 상태로 굳어 미동도 없었다. 그를 내려다본 서윤채는 우선 맥주 캔부터 바로 세웠다.
“야, 권….”
그다음으로 채현을 부르던 때. 천천히 몸의 방향을 튼 채현과 눈이 마주쳤다. 엇나갈 틈 하나 없이 지척에서 시선이 얽혔다. 똑같이 마주할 수밖에 없을 만큼 올곧은 눈빛이었다.
채현이 끝의 끝에 가서야 눈을 깜빡여서일까. 고작해야 수 초. 찰나에 지나지 않을 순간이 이상하게도 길게 느껴졌다. 온 신경을 앗아 갔던 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채현의 낯 위로 TV 화면 빛이 어우러졌다.
“윤채야.”
미약한 숨소리가 귓등을 건드렸다.
“나 있잖아. 진짜 너 안 싫어해. 거짓말 아니야. 싫어서 같이 못 산다고 한 거 아니야.”
“알아.”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현의 행동이 한층 더 느려졌다. 의식의 끝을 알리기라도 하듯 눈꺼풀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네가 싫어서 대답 못 한 게 아니라….”
“…….”
“내가…….”
힘겹게 시선을 갈무리하던 이가 숨죽여 웃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해서 그랬어.
필사적으로 결백을 주장하듯 토해 낸 말을 끝으로 채현은 고른 숨만 내쉬었다.
“…….”
그런 채현의 모습을 서윤채는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여과되지 않은 이야길 새벽이 밝아 오도록 곱씹으며.
* * *
돌풍이 나부끼는 바다 한가운데 던져지면 이런 기분일까.
무의식의 늪에서 막 빠져나온 채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진짜 죽겠다. 머릿속에 든 생각이라곤 오직 그뿐이었다.
머리는 꽝꽝 깨질 것처럼 아프고 속은 금방이라도 무언가 쏟아질 듯 울렁거렸다. 괴롭단 느낌이 가장 먼저 들 만큼 끔찍한 숙취였다. 눈을 떴다가도 다시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술병이 나도 제대로 났구나.
속이 별로임을 알리듯 계속해 침이 고였다. 입 안을 적시는 타액을 삼켜 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금껏 겪었던 것 중 가장 생생한 고통에 채현은 끙끙 앓기만 했다.
“하…….”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몸 상태가 별로였다. 컨디션이 바닥을 기니 덩달아 정신도 엉망으로 뒤엉켰다. 가느다란 숨을 내쉰 채현은 휩쓸린 머릿속을 정리하듯 기억을 되짚었다.
“아.”
그 과정의 어느 지점에 선 순간, 절로 탄식이 샜다. 끝없이 둥글게 말리던 몸이 굳고 눈꺼풀이 떨렸다. 힘겹게 눈을 뜬 채현은 사색이 된 채 텅 빈 옆자리를 응시했다.
“……좆됐다.”
끝내는 비명을 닮은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 머릿속을 아무리 헤집어도 지난밤의 기억이 없었다. 누군가 싹둑 가위로 오려 낸 양 깨끗하기만 했다. 주량을 넘기면 필름이 완전히 끊기는 걸 알기에 늘 조심했는데, 어제의 기억이 댕강 잘려 나갔다.
무리를 했던가.
분명 집으로 돌아와 맥주를 깔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대체 어느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지. 의식이 언제 날아간 것인지조차 모호해 미칠 노릇이었다.
채현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어젯밤 제 행동이 그려지질 않아 초 단위로 초조해졌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쳤을까 봐 더욱 불안했다. 하물며 숨겨야만 하는 사실이 있는 입장이었다. 바보 같은 짓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도 이미 알딸딸하게 술이 오른 상태였다.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단 걸 모르진 않았다. 그를 알면서도 괜찮을 거란 안일한 합리화 속에서 술자리를 받아들였을 뿐. 어느 모로 보나 제 실수고 잘못이었다.
하지만 어찌 거절할 수가 있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서윤채가 제안한 둘만의 술자리였다. 손짓 한 번에도 동요하는 마음이 기우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거기에 더해 싫으면 거절해도 된단 소릴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제가 본인을 싫어한다고 서윤채가 오해하게 두고 싶진 않았으니까.
채현은 초조하게 눈을 깜빡이다 핸드폰부터 찾아 손에 쥐었다. 통화 기록과 문자, 메신저까지 살펴보고 나서야 조금 숨이 쉬어졌다. 다행히 술에 취해 이상한 연락을 하진 않은 듯했다.
서윤채 앞에서도 얌전히 있었으면 문제없을 텐데. 쉬이 확신하긴 어려웠다. 지금 당장 서윤채가 보이지 않는 것도 신경 쓰였다. 미안하고 그 이상으로 자괴감이 들었다.
“……어디 갔나.”
그간 보살펴 준 일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자책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채현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방 밖으로 나섰다.
조심스레 거실로 향하자 서윤채가 바로 보였다. 그는 소파 헤드에 머릴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건가 살피길 잠시, 기척을 느낀 서윤채가 고개를 돌리며 눈이 마주쳤다.
“일어났네.”
“어…….”
물끄러미 시선을 흘리는 서윤채는 어쩐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떳떳하지 못한 죄인은 자연히 몸이 움찔 떨렸다.
“속은.”
기분 탓인지 물어 오는 음성도 평소보다 낮은 듯했다. 단단히 사고를 쳤지 싶어 긴장한 채현은 고갤 가로젓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미안. 나 때문에 어제 고생했지.”
“…….”
“조절한다고 한 건데… 진짜 미안….”
대꾸 없이 이야길 듣던 서윤채의 머리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쏟아지는 시선을 비스듬히 한 그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너 기억 안 나냐.”
말이 멎는 동시에 어딘가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밀려와 틀어박혔다.
“너랑 마시기 시작한 거까진 기억나는데 그 이후론 잘…….”
“아…….”
대답처럼 목을 울린 서윤채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길게 늘어지는 음성과 엇비슷하게 손짓도 추를 매단 듯 느렸다. 와 닿는 눈빛 역시 뜻 모를 빛을 띠며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해장이나 해.”
숨통을 조이던 시선은 서윤채가 몸을 일으키며 사그라졌다. 채현은 말을 얹는 대신 눈치껏 그의 뒤를 따랐다. 식탁엔 그가 나가서 사 온 것인지 콩나물 해장국이 있었다.
“넌 안 먹어?”
1인분밖에 없어 묻자 서윤채는 고개를 까딱이기만 했다. 이 이상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지 않던 채현은 고맙다 이야기하며 얌전히 손을 놀렸다.
의지와 달리 행동은 몹시 더뎠다. 속이 안 좋기도 했거니와 앞에 앉은 서윤채가 계속 바라봐 가시방석이었으므로. 최선을 다해 밥을 먹었지만 오래 못 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권채현, 너….”
꼭 그 순간만을 기다린 양, 침묵을 유지하던 이가 소리를 낸 건 동시였다.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마음으로 힐끗댔으나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아니다.”
그저 말미를 한숨으로 대체하며 해장국을 치울 뿐이었다. 채현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뎠다. 식탁을 닦으려다 매서운 눈빛을 받은 후엔 장식물처럼 서 있었다.
이후엔 빨리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낫겠다 싶어 돌아갈 채비를 했다. 짐을 챙기는 동안 서윤채는 문가에 기대서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감시하듯 빤히 보던 이는 현관 앞에서도 똑같았다.
“어떻게 너한테 신세만 지다 가냐…. 진짜 미안하고 내가 꼭 보답할게. 뭐든 말해.”
“…….”
“나, 갈게. 고마워. 푹 쉬고….”
상대는 마지막까지 말이 없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와 닿던 눈빛이 사라졌다.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온 채현은 이제야 숨이 트이는 듯해 크게 호흡하며 발을 내디뎠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선 지난밤을 떠올리려 애썼다. 다만 암전된 머릿속에 스멀스멀 기어 나와 자리 잡는 건 불안감뿐이었다.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그려지며 극도로 불안해졌다.
신경이 곤두서자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억지로 밥을 먹어서인지 얹힌 듯도 했다. 삽시에 하얗게 질린 채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당장은 무엇도 하지 않고 자고만 싶었다.
집에 도착한 뒤엔 곧바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뜨니 사위가 어두웠다.
“…….”
채현은 달뜬 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였다. 그마저도 눈꺼풀이 무거워 몹시 힘겨웠다. 분명 해가 떠 있을 무렵 잠들었는데……. 단순 숙취라기엔 증상이 꽤 심각했다.
시간이 흐르며 열까지 오르자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늘 이맘때쯤 삐걱대던 몸이 또 고장이 난 것이라고. 매년 겪던 증상이니 무섭진 않았다. 그저 챙겨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달랐을 뿐.
……약이 있던가.
생각은 오래 지나지 않아 열기에 잡아먹혀 휘발됐다.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의식이 계속 흐려졌다. 몇 번인가 진동이 울린 듯도 한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건 주변이 다시 밝아진 후였다. 여전히 머리는 터질 것 같고 온몸이 아팠지만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
얼마나 더 지나야 열이 떨어지려나. 멍하니 이어지던 생각은 길게 울린 진동에 끊어졌다. 이불에 닿는 살갗까지 아파, 채현은 겨우 핸드폰을 들고 귓가에 갖다 댔다.
― 핸드폰은 장식이야? 어?
일말의 틈도 없이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질이 난 듯 까칠한 기색도 전해졌다. 그런데도, 홀로 끙끙 앓다 익숙한 이의 음성을 들어서일까. 결코 다정한 말씨가 아닌데 이상하게 안심이 되며 코끝이 찡해졌다. 억눌린 울음이 흘러나온 것도 거의 동시였다.
―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대답이라 할 수 없는 말인데도 서윤채는 즉시 반응을 보였다. 권채현. 대답을 종용하는 부름 사이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기다려. 지금 갈 테니까.
상대는 무엇도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고요해진 공간을 채우는 소음은 간헐적으로 훌쩍이는 소리뿐이었다. 물밀듯 밀려온 설움에 젖은 채현은 울먹이다 지쳐서 또 잠이 들었다.
야트막한 늪에 빠졌던 의식은 삑삑 도어록 소리에 끌어 올려졌다. 힘겹게 눈을 뜨니 성큼성큼 다가오는 서윤채가 보였다. 그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낯을 딱딱하게 굳혔다. 꼴을 보자마자 상황을 알아차린 건지 응축된 숨을 내지르듯 터뜨렸다.
“약은.”
어느 누가 들어도 화를 억누른 물음이었다. 채현은 그런 그를 응시하다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성난 기색이 느껴지는 몸짓으로 머릴 쓸어 넘긴 이는 바로 상체를 굽히고 팔을 뻗었다.
“아, 진짜, 채현아…….”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온도를 확인한 그는 끝내 낮게 뇌까렸다.
“넌 진짜 사람 빡치게 하는데 뭐 있어. 알아?”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몸을 일으킨 서윤채는 욕실로 직행했다. 매정히 떨어진 온기를 좇던 채현은 입술을 감쳐물며 윽, 소리를 냈다. 차오른 설움이 금방이라도 빵 터질 듯했다.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감정은 이성을 벗어나는 쪽으로만 흘렀다.
아플 때만큼은 다정히 대해 주던 이가 화를 냈다. 역시 함께 술을 마시는 동안 무슨 문제가 있던 건지. 서운함과 비례하게 자괴감이 들어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겨우 참던 울음은 서윤채가 곁으로 돌아오는 순간 터졌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뚝뚝 서럽게 떨어졌다.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셔 와 이마를 닦아 주던 이는 그 꼴에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안 돼? 머리가 안 굴러가?”
화가 잔뜩 난 목소리와 달리 손짓은 조심스러웠다. 그 역시 오래도록 겪은 일에 익숙하게 반응한 것이 분명했다. 채현은 꼴사나운 소리가 터질까 입을 꾹 다물기만 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와서 같이 있어 달라고 했어야지. 어?”
“…….”
“왜 등신처럼 혼자 처박혀서 울고 있냐고.”
가차 없이 쏟아지는 말이 쿡쿡 온몸을 찔러 댔다. 무엇 하나 온전하게 소화할 수가 없었다. 채현은 이불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며 서윤채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널, 왜 불러.”
“말 씨발, 또 좆같이 할래?”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낯을 한 이가 곧장 되받아쳤다. 매섭게 화를 내기도 잠시, 곧이어 그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쓸데없는 말은 잘하면서 왜 와 달라는 소리를 못 해.”
대화의 공백은 또 한 번 서윤채가 채웠다. 직전보다는 누그러진 음성이 한숨을 매단 채 귓가를 건드렸다. 골몰히 생각하듯 눈을 깜빡이던 그는 이내 결심한 양 단호한 눈을 해 보였다.
“너 다시 우리 집으로 가. 싫다 해도 끌고 갈 거니까 머리 굴릴 생각 하지 말고.”
그 태도가 너무도 강경해서, 채현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때로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채현에겐 서윤채를 마음에 품은 이후가 그러했다. 자주, 혹은 이따금. 잊을 만하면 감정이 이성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사고가 멈추곤 했으니까.
긴장이 풀린 몸에 열병이 찾아들었던 날. 서윤채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나선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답지 않게 여유 잃은 모습을 보인 서윤채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으므로. 흡사 끌려가는 모양새였지만 뭐라 말을 얹을 수는 없었다.
서윤채는 병원에 들러 몸살감기 진단을 받고 집으로 향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기꺼이 정적을 깼을 이가 침묵을 유지했다. 채현이 할 수 있는 건 어딘가 낯선 그의 곁에서 평정을 흉내 내는 것뿐이었다.
집 안에 들어선 후에도 별다를 바는 없었다.
‘빈속에 먹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약부터 먹어.’
겨우 들려온 음성은 낮고 건조했다. 직전까지 머문 집이 괜히 어색해 쭈뼛대던 채현은 그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화가 난 듯 굴면서, 직접 약과 함께 유리잔 가득 물을 채워 가져다주었으니.
상대는 까딱 고갯짓하며 어서 먹길 종용했다. 채현은 지척에 서서 내려다보는 이의 시야에 갇힌 채 잠자코 약을 받아먹었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상대는 바로 이어 자연스레 컵을 가져갔다. 모호한 시선을 치우지 않고 흘리길 수 초, 끝내는 짧게 숨을 토해 내며 정적을 깨뜨렸다.
‘죽은. 지금 먹을 수 있겠어? 또 억지로 먹다가 체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공기 중으로 떠올랐다 떨어진 음성은 화가 가라앉은 듯 힘이 빠진 채였다. 해장국 억지로 먹은 거 알았구나. 소리를 좇아 서윤채를 바라본 채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좀…… 누워 있고 싶어.’
계속 빈속이긴 했지만, 머리가 계속 지끈거려 식욕보단 수면욕이 더 크게 자리했다.
‘그래. 들어가서 한숨 자라.’
말을 맺은 서윤채는 일으켜 주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다 일순 멈칫했다. 그 행동에 공백이 생긴 순간 채현은 슬그머니 일어나 거리를 벌렸다.
‘나 감기잖아. 그냥 소파에서 잘게. 너 옮으면 안 되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상대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양 즉답했다. 인상을 찌푸리고 내리깔아 보는 눈빛 가득 기가 차단 기색이 묻어났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지만 채현은 재차 제 뜻을 피력했다.
‘나 너한테 더 미안하기 싫어. 다리 때문에 귀찮게 한 것도 아직 못 갚았는데…….’
‘왜 갚을 생각을 해. 내가 너한테 미안해하라고 한 적 있어?’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갤 삐딱하게 기울인 이가 뇌까렸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그냥 좀 들어가서 자. 내가 소파 쓸 테니까.’
집주인을 몰아내고 공간을 차지하는 객이 어디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내지른 말이 분명했다. 곧장 반박하려 했으나 그는 틈을 주지 않고 팔을 뻗었다.
‘…….’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행동은 뜻하지 않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손목을 잡으려는 듯 가까워진 손과 스치듯 닿기 무섭게 흠칫 몸이 떨렸다.
아. 낭패감에 침음한 채현은 손끝을 말며 서윤채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이상함을 느끼진 않은 듯했다. 행동을 죽이고 바라보다 소매 부분을 붙잡고 이끌 뿐이었다.
불행이라면 채현에게 그 손을 쳐 낼 용기가 없단 거였다.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 익숙한 향기가 내려앉은 공간에 발을 들였다. 그 끝엔 감히 사치스럽게 누렸던 침대에 다시 몸을 눕혔다.
기꺼이 제 공간을 내준 이는 침묵을 유지하다 방을 나설 무렵에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권채현.’
목적이 뚜렷한 눈빛과 함께 새어 나온 부름이 공간을 울렸다. 채현은 귓등을 간질인 나지막한 목소리를 되뇌며 그를 바라보았다. 거리를 둔 시선이 틈 하나 없이 얽혀 들었다.
‘일단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낫기나 해. 다 낫고, 그때 얘기해.’
영영 떨어지지 않을 듯했던 눈빛이 멀어지고 문이 닫혔다. 밀폐된 공간에 홀로 남은 채현은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당기며 몸을 말았다. 피곤을 덧댄 수마에 잡아먹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이후로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시간이 흐르며 몸 상태가 괜찮아지고 화가 났던 서윤채도 다시 평온을 찾은 듯했다. 다만, 그는 일전과는 결이 다른 태도를 보였다.
“……왜?”
“뭐가.”
“자꾸, 쳐다보길래…….”
“안 돼?”
개중 하나는 자신을 살피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거였다. 서윤채는 꼭 탐색이라도 하듯 행동 하나하나를 기민하게 좇았다. 당당히 대꾸하며 시선은 거두지 않는 지금처럼.
“안 될 건 없는데, 쫌, 그래….”
느닷없이 관찰 대상이 되다니. 행동은 자연히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 자꾸 보는 건지 알지 못해 더 애가 탔다.
“그리고 나 감기 다 나았어. 다리도 괜찮고….”
“그래서.”
하물며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허락하질 않았다.
“아니, 너도 혼자 지내는 게 더 편하지 않아?”
“아, 이제 별 볼 일 없으니까 그냥 가려고?”
안 그러던 이가 삐딱선을 타며 긍정하기 어려운 말만 골라 했다. 혼자 지내는 걸 그렇게 싫어했던가. 떠올려 봐도 확신이 안 섰다. 제가 아는 서윤채는 오히려 그 반대였으니까.
“나 오늘 늦으니까 먼저 자.”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손만 꼼지락대자, 소파에서 일어선 서윤채가 선수를 쳤다.
“어디 가?”
“약속 있어. 집에도 들러야 하고.”
“엊그제도 다녀오지 않았어?”
그가 본가에 자주 들른다는 건 함께 지내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였다. 근래 들어선 어쩐지 그 주기가 더 짧아진 듯했고.
“요즘 좀 안 좋아지셔서.”
짧게 일축한 한마디를 알아들은 채현은 숨죽여 탄식했다. 그다음으론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몸이 약했던 그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최근 상태가 조금 이상하더니 이 때문인가 싶었다.
“금방 또 괜찮아지실 거야.”
침묵 후엔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말을 골라 내뱉었다. 그를 들은 서윤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갈 때 나도 같이 갈까?”
예전에도 종종 직접 방문해 그의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 드리곤 했다. 특별하기보단 일상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때를 생각하며 물은 건데, 서윤채는 묘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싫은 건가. 정적 속에 쏟아지는 시선이 긍정의 의미로 읽히진 않아 절로 주춤하게 됐다.
“싫으면 말고…….”
“같이 가.”
상대는 그제야 뒤늦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나지막하게 말을 흘리곤 어쩐지 느릿한 몸짓으로 걸음을 옮겼다. 채현 역시 자연히 그 뒤를 따라 현관까지 쫓아 나갔다.
“다녀와.”
신을 신고 나서던 이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래. 호흡을 닮은 웃음 속에 말을 얹은 서윤채는 곧이어 문을 닫고 사라졌다.
집주인이 사라지고 고요해진 집 안. 채현은 벽 너머 서윤채의 모습을 그려 보다 소파로 돌아갔다. 홀로 남았으니 과제나 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 전에 서윤채 어머니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건강에 관해 언급하진 않고 가벼운 안부 연락처럼 조만간 찾아뵙겠단 인사만 남겼다. 이어선 제 부모님에게도 연락을 했다.
용무를 다한 핸드폰을 내던지고선 과제에 몰두했다. 곧 있으면 기말고사라 미리 하지 않으면 중간고사 꼴 나기 십상이었다. 할 일은 왜 해도 해도 끝이 없는지. 논문 사이트를 뒤지며 미친 듯이 과제만 했을 뿐인데 시간이 훌쩍 흘렀다.
“아, 죽겠다…….”
과제 분량과 집중력은 반비례했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모양새였다. 다 쓴 치약을 쥐어짜듯 붙들고 있어 보기도 잠시, 더 하면 토가 나올 듯해 내팽개치고 드러누웠다.
바닥에 시체처럼 누운 채현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오자 생각은 절로 서윤채와 술을 마신 날로 흘렀다. 까맣게 흐려진 기억 너머를 가늠해 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서윤채도 아무 말을 해 주지 않고 있기에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술을 끊든가 해야지…….”
채현은 힘없이 중얼거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록 뜻하지 않게 객 노릇을 하고 있을지언정 신세를 진 건 맞으니 뭐라도 해야 할 듯했다. 머리도 비울 겸 집 안 청소를 한 뒤엔 나가서 식재료를 사 왔다. 돈을 보내도 받지 않아 이런 식의 방법이 최선이었다.
물론 이따금 멈칫하며 제 행동을 검열하게 되는 순간이 오곤 했다. 괜찮을까. 선을 넘는 건 아닐까. 질리지도 않고 자신감이 마모되었지만 애써 합리화하며 눈을 돌렸다.
집주인은 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문소리에 현관으로 향한 채현은 다소 놀라며 서윤채를 살폈다. 익숙한 그에게서 낯선 향기가 잔뜩 묻어났다.
“술 마셨어?”
그는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이며 대답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너 괜찮아?”
부축해 줘야 하나. 치미는 걱정에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서윤채도 발을 움직였다. 삽시에 거리가 가까워져 채현은 본능적으로 멈춰 섰다. 상대는 느릿하게 바닥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제자리에 박힌 듯 우뚝 선 발 위를 그의 시선이 거닐었다.
“채현아.”
“어?”
괜히 긴장된 탓인지 꽉 막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갤 들어 눈을 마주한 서윤채는 무언가 말할 듯이 굴다가, 끝내 시선을 거두며 실소만을 흘렸다.
“네가 개야?”
느닷없는 말을 중얼거린 이는 천천히 욕실 쪽으로 이동했다.
“나 씻는다.”
멀어지는 그의 걸음걸이는 몹시 멀쩡했다. 하긴. 술을 싫어하는 거지, 못 마시는 건 아니니까……. 그 뒷모습을 향해 ‘응.’ 대답한 채현은 다시 과제를 붙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척이 가까워졌다. 자연히 고개를 든 채현은 기겁하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눈에 보인 광경이 믿기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왜 옷을…….”
옷은 어디다 내버린 건지, 그는 웃통을 깐 채였다. 뜻하지 않게 그의 살결을 엿본 채현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던 이는 몸도 고왔다. 아주 잠시 봤을 뿐이지만 아직도 눈앞에 아른아른하는 듯했다. 제 귓가에 열이 오르는 걸 느낀 채현은 괜히 목덜미를 매만졌다.
“나 원래 벗고 있어.”
“저번엔 입고 있었잖아.”
“그랬나. 그럼 술 때문에 열 올라서 그런 걸로 해.”
집주인은 퍽 뻔뻔한 투로 대꾸했다.
“계속 그러고 서 있을 거야?”
“생각 중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러는 걸까.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채현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친구다. 오랜 친구의 몸을 보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다. 갉아 없어지는 평정을 간신히 붙잡고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굳세게 되뇌며 고개를 들던 찰나, 피할 새 없이 서윤채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상체를 숙이고 있던 탓에 지척에서 시선이 얽혔다. 막 씻고 나와 더 촉촉한 이는 느슨히 시선을 흘렸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이어지던 대치를 깨고 서윤채가 움직임을 보였다. 그가 불시에 뻗은 손이 제 얼굴에 닿기 직전 채현은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흠칫댔다. 마찬가지로 멈칫한 서윤채의 낯에 동요가 스쳤다.
“진짜…….”
낮게 침음하던 그는 물에 빠진 이가 끌어 올려져 숨을 터뜨리듯,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탄식했다.
지척에서 터진 속삭임은 허공을 기다 사그라졌다. 언제 공간을 울렸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짧은 반응이 돌부리라도 되는 양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건 채현뿐이었다.
상대의 동요가 옮기라도 한 걸까. 혼란이 밀려오며 마음이 술렁였다. 한 마디에 지나지 않은 짧은 말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질 않았다.
얼기설기 쌓아 올린 평정은 작은 자극에도 쉬이 금이 갔다. 그 틈을 비집고 파고든 불안이 몸집을 키우기도 쉬웠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멀쩡해 보였는데 술에 취한 건가. 갑자기 이런 행동은 왜 하는 거지…….
엉망으로 뒤섞인 생각은 감히 또 행동의 연유를 밝혀내려 했다. 마구잡이로 흐르다가, 끝내는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 쪽으로 튀었다.
설마.
설마, 제게서 다른 무언가를 본 것일까.
“…….”
이를테면, 저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워 꼭꼭 숨겨 놓은 애정 따위를. 제 딴엔 최선을 다해 이전과 같은 친구 흉내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무심코 흘리기라도 했던 걸까.
“윤채야.”
불안은 뜻을 배반하고 곧이곧대로 흘러나와 상대에게 전해졌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을 실은 음성이 조용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
유일한 청자이자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새까만 빛을 띤 깊디깊은 눈은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박제된 것 같다 느낄 무렵, 서윤채의 긴 속눈썹이 흔들리며 허공을 그었다. 진득하게 들러붙던 시선이 떨어지는 동시에 그의 입술 새로 웃음이 샜다.
“뭘 쫄아.”
가벼이 피식댄 서윤채는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 뻗었던 손 역시 자연스레 거둬 갔다.
“내가 너 때려?”
낯선 기색이 어렸던 얼굴엔 어느새 익숙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순간 낯빛을 바꾼 이는 거리를 띄우고 서며 단조로운 음성을 흘려보냈다.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 겁먹지 마.”
“…….”
“그냥 있어.”
나지막이 전해진 한마디는 어쩐지 직전과 조금 다르게 들리는 듯했다. 공간을 드리웠던 긴장이 깨진 덕인지, 잔뜩 굽이치던 물 표면이 잔잔해진 뒤의 평온함을 보였다.
“갑자기… 손 뻗으니까 놀라서 그렇지. 얼굴 맞는 줄 알고 그런 거야.”
채현은 기꺼이 주어진 상황에 어울렸다. 현실을 외면하고 눈을 가리듯 서윤채를 따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전히 가슴께는 긴장으로 울렁거렸지만.
“놀랄 것도 많다.”
다행히 상대는 더 무어라 이야기하는 대신 상황을 마무리했다.
“놀랄 일 안 만들 테니까 쓸데없이 쫄지 마.”
말을 맺은 뒤 그는 아예 몸을 돌려 서 있던 곳을 벗어났다. 수 분이 흐르고 다시 거실에 발을 들였을 땐 상의까지 제대로 챙겨 입은 채였다.
“안 자냐? 늦었는데.”
시계를 향해 고갯짓하며 묻는 그의 모습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그 덕에 희미하게 남은 긴장을 지운 채현은 애쓰지 않고도 평범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나 과제 급한 거 있어서 밤새 해야 될 거 같아. 네가 들어가서 자.”
“…그래. 수고해라.”
찰나 멈칫한 서윤채는 짧은 인사와 함께 제 방으로 향했다. 느릿하게 멀어지던 그는 공간의 경계를 넘어설 무렵, 불시에 ‘야.’ 소릴 내며 뒤돌아보았다.
“적당히 하고 자. 밤새우다가 네 수명 깎아 먹지 말고.”
쿵. 대답하기도 전 매정히 닫힌 문은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듯했다. 귓가에 닿는 음성이 퍽 다정해 하마터면 걱정이라 오해할 뻔했는데. 물끄러미 바라보다 좇을 대상을 잃은 채현은 공연히 머쓱해져 시선을 거뒀다.
과제를 앞세워 얻은 혼자만의 새벽은 고요히, 그러나 분주하게 흘렀다.
손이 노트북 키패드 위를 바삐 오가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상념으로 가득 찼다. 서윤채와 벽 하나를 두고 함께 있는 이 상황부터, 경각심을 가져야만 하는 제 태도까지.
“…….”
녹음이 내려앉던 어느 해 여름의 초입. 계절의 흔적 한가운데서 애정을 맞닥뜨린 후 결심을 했었다. 결코 자격 없는 애정을 바라지 말고 소중한 관계를 지키자고. 평생 그의 곁에 친구로 머물며 일상을 유지하자고.
오늘에 이르러서도 달라진 건 없었다.
멋대로 품은 감정을 감당하는 건 오롯이 제 몫이었다. 이를 내세워 행동하며 서윤채의 일상을 깨부술 자격 따위 제게 없었다. 그에게 상처 주고 싶단 생각 역시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일일이 동요하며 반응하는 건 결코 안 될 일이었다. 한철 반짝이다 물러나는 계절과 달리 계속해 짙어지는 애정이 버거워질지언정.
“…….”
탁. 키패드 위 손가락이 구르며 생각의 끝을 알리듯 작은 소리가 났다. 채현은 환히 빛을 발하는 화면을 보며 반성 끝에 또 한 번 평정을 가장했다.
길고 긴 새벽이 가시고 동이 터 올 무렵엔 추적추적 이른 여름비가 내렸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는 점차 굵어져 등굣길을 적셨다. 일찍이 눈을 뜬 서윤채는 거실 광경을 살피다 ‘우산 챙겨 가라.’ 한마디 하곤 모습을 감췄다.
주말을 하루 앞둔 평일은 잿빛 하늘 아래 어둡게 이어졌다. 날의 끝이 되어서야 겨우 빗줄기가 약해지고 바람이 멎었다.
― 채현 어디?
“거의 다 왔어.”
― 빨리 와. 애들 다 와서 지금 고기 굽고 있으니까.
온종일 쏟아진 물줄기와 함께 밀려온 건 돌연 생긴 약속이었다. 찰박찰박. 물웅덩이가 남은 땅을 밟아 내려가던 채현은 상대를 달래며 전화를 끊었다. 벌써 다 모이다니.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단 소식에 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때아닌 모임의 주최자는 배주희였다.
[배주희 : 오늘 약속 없는 사람?]
[배주희 : 비도 오는데 삼쏘 어때] 오후 1:12
[정유빈 : ㄱㄱ] 오후 1:27
가득 쌓인 채팅방을 확인했을 땐 이미 일정이 정해진 뒤였다. 그들은 전화까지 걸어와 확답을 받아 냈다. 비싸게 구는 놈들도 불러냈으니 꼭 와야 한다며 자리의 중요성을 읊어 댔다.
당장 급한 일은 처리해 여유가 있던 터라 채현도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다. 언제든 부담 없이 즐겁게 만날 수 있는 이들이라 발걸음도 가벼웠다.
“권채현!”
도착한 가게는 꽤 분주했다. 구석진 곳에 자릴 잡고 있던 이들은 손을 번쩍 들고 존재를 알려 왔다. 들어서자마자 서윤채를 발견한 채현은 그에게 향하는 시선을 거두며 근처로 다가갔다.
“어, 신제윤?”
“안녕, 채현아.”
자리로 향하니 단박에 알아보지 못한 이도 있었다. 신제윤은 변함없는 낯으로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채현은 잠시 고민한 끝에 그의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갤 들자,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던 서윤채의 시선이 와 닿다 떨어졌다.
“학교 때문에 바쁘지 않아? 곧 시험 기간이잖아.”
“나만 학교 다니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너희 볼 시간은 충분히 있어.”
대수롭지 않게 답한 이는 지척에 젓가락과 앞접시를 놔 주었다. 몸에 밴 사소한 배려가 분명했다. 채현은 어서 먹으라는 듯 눈짓하는 그에게 마주 인사하며 주의를 옮겼다. 또다시 서윤채와 눈이 마주친 건 그 직후였다. 착각이라 생각할 수 없게끔 분명하게 시선이 얽혔다.
“…….”
왜 저러고 보는 거지……. 할 말이 있나 싶어 눈짓해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바라보길 잠시, 유독 느리게 눈길을 거둬 갔다.
그 후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틈은 없었다. 한 테이블에 앉았어도 주위가 워낙 소란스러운 탓이었다. 떠들썩하게 터지는 일행의 대화에 어울리며 목소리를 섞는 게 전부였다.
“아영이는?”
“팀플 때문에 못 온다더라.”
참 변함없이 열심히 산다며 질색한 정유빈이 단번에 술잔을 비워 냈다.
“근데 배주희는 왜 남친 안 만나고 우리랑 노냐?”
“헤어진 지가 언젠데 그런 말을 하시는지.”
“야야, 연애 그까짓 게 뭐가 중요하냐. 건배나 하자.”
그들은 서로 소개를 해 주느니 마느니 이야기하며 열렬히 잔을 주고받았다. 중매 현장을 방불케 하더니 서윤채에게도 화살을 돌렸다.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주변에서 난리도 아니었다며 무심히 응하는 그를 찔러 댔다.
채현은 그 상황의 이방인이 되어 덤덤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소란의 한 발짝 뒤에 머문 채 곁에 앉은 신제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서윤채가 반응을 보인 건 화젯거리가 바뀐 후였다. 그는 쉬지 않고 떠드는 이들을 뒤로하고 묘한 눈빛을 흘렸다. 상대가 된 채현은 긴장을 죽이며 시선을 마주했다. 신제윤이 잠시 자리를 비워 다행이었다. 테이블 밑으로 숨긴 손을 말아 쥔 걸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
“받을까?”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내뱉은 말은 고작 그런 거였다. 높낮이가 전혀 없는 단조로운 물음이 귓가에 틀어박혔다. 두 번에 걸쳐 음성을 되뇌고 나서야 그럴싸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받고 싶으면 받아야지.”
“아.”
짧게 목을 울린 이는 말을 잇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손가락만 굴렸다. 톡톡. 얼마간 일정 속도로 울려 퍼진 소음이 멎고 생긴 공백은 피식 터진 웃음이 대신했다.
“그러게.”
호흡에 말을 얹어 전한 상대는 곧이어 담배를 챙겨 자리를 벗어났다. 휑하니 빈자리를 보며 채현은 순간을 곱씹었다. 찰나 떠올랐던 미소가 사그라진 서윤채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실수라도 한 걸까. 그저 그 뜻대로의 물음일 뿐인데 매정히 반응했던 걸까. 공간을 빠져나가는 그의 낯은 분명 차게 식어 있었다. 쉬이 소화하기 힘든 상황에 마음은 또 한 번 술렁였다.
왜 화가 났지.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던 그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꿈틀대며 일던 원망을 좀먹고 선명해지는 감정은 걱정이었다. 목구멍을 틀어막은 숨이 무겁게 터져 나왔다.
테이블 모서리만 내려다보며 입술을 짓씹던 찰나, 바깥바람을 묻힌 신제윤이 자리로 돌아왔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다 그의 젖은 어깨를 본 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밖에 비 와?”
“응. 다음 주까지 계속 온다더니 다시 조금씩 내리네.”
“아…….”
서윤채가 우산을 가지고 나갔던가. 가장 먼저 든 생각에 채현은 빠르게 머릴 굴렸다. 고민은 짧았다. 바로 자리를 벗어나 우산을 챙겨 밖으로 향했다.
밤이 내려앉은 거리엔 부슬비가 엷게 내리고 있었다.
채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찾던 이는 가게 바로 옆 골목길 한편, 빗줄기가 닿지 않는 처마 밑에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 핀 새빨간 불씨가 허공에서 어른댔다.
서윤채는 기척을 알아챘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뿌연 연기를 흩뿌리며 담배를 태울 뿐이었다. 한 대를 다 피운 이는 새 담배를 꺼내 물며 힐끗 눈을 마주쳐 왔다.
“왜 나왔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고요히 잠긴 골목 안을 채웠다. 가만히 우산을 들어 보이자 서윤채는 골목 입구를 향해 얕게 턱짓했다.
“괜찮으니까 들어가 있어.”
“너는?”
“이것만 피우고.”
“방금 피웠는데 또 피워?”
서윤채는 대꾸 없이 라이터를 쥔 손만 움직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담뱃불을 붙였다.
“이거라도 해야 될 거 같아서.”
“…….”
“비 오잖아. 먼저 들어가.”
입술 새로 물린 담배 탓에 대답은 웅얼대듯 불분명하게 전해졌다. 우산 손잡이를 쥔 채현의 손에 점차 힘이 실렸다. 거듭해 들리는 그의 말이 꼭 거절이라도 된 듯해 심장이 내려앉았다.
“왜 화났어?”
서윤채는 그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거짓말로 상황을 무마하기엔 서로를 너무 잘 알았으니까.
“내가 사과해야 할 상황인 거야? 말해 줘. 진짜 모르겠어서 그래.”
이미 충분히 그를 속이고 있는 입장이었다. 꼭꼭 숨겨야 할 비밀 외의 것에선 떳떳하고 싶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무슨 잘못을 했다면 솔직하게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화났는데. 너 지금 기분 안 좋잖아.”
확신 어린 목소리가 그에게 닿았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이는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걸 모르겠네. 그럴 이유가 없는데.”
“…….”
“채현아, 왜 신경이 쓰이지?”
뜻 모를 말에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마땅한 반응을 찾지 못하고 바라보자, 그는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다 담배를 꺼뜨렸다. 새것과 마찬가지인 담배가 그의 발밑에서 숨을 죽였다.
“들어가. 비 맞지 말고. 나도 갈 테니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듯 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의 손짓은 다분히 신경질적이었다. 서윤채는 빗줄기를 뿌리는 하늘을 힐끗대더니 성큼 발을 내디뎠다.
“…….”
스치듯 닿은 시선을 따라 채현도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보인 찰나의 눈빛을, 꼭 걱정이라도 하는 듯한 그 눈길을 감히 멋대로 취하면서.
* * *
설마. 혹시. 만약.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뛰어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도 머릿속에서만큼은 마음껏 끼워 맞추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비록 그것이 허황된 기대라 할지언정, 한 번의 가정으로 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으니.
찰나의 만족을 얻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채현은 단 한 번도 그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상상이 주는 건 더 큰 절망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므로. 자격 없는 애정의 또 다른 끝을 그려 보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
애초에 바란 적이 없는 일이었다. 바라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감정을 받아들인 순간 가장 먼저 무용한 욕심을 내버렸다. 지금의 관계를, 일상을 지켜 내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마음 하나 채우고자 모든 걸 저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윤채와 영영 못 보게 될 수도 있다. 그 자그마한 가능성 앞에서 욕심은 무력했다. 그 두려움을 감당하느니 끝이 있으리라 믿는 애정을 품고 사는 게 낫다 판단할 만큼.
저 역시 처음 감정이 싹텄을 때 의심하고 믿지 못했듯, 서윤채도 알아채지 못하리란 믿음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저흰 평생을 친구로 지냈으니까. 그리 믿고 하루하루를 보내 왔는데.
“…….”
최근 들어선 그 생각이 조금씩 뒤흔들렸다. 몇 년간 품어 온 감정 하나 뜻대로 못 다루는 자신도 문제였지만, 자꾸 예상을 벗어나는 서윤채 때문에 더욱이 그랬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건지, 서윤채는 종종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원래도 무심한 척 세심하긴 했지만 최근엔 조금 더 기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감히 다정하다 느낄 정도로. 그러다가도 홀로 멈칫하며 인상을 찌푸리곤 이해 못 할 욕을 읊조리기도 했다.
채현의 입장에선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의 태도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설마 무얼 알아챘나 싶다가도, 그렇다면 화를 낼 텐데 오히려 더 잘해 줘 어지러웠다.
그 사이로 슬쩍 존재를 드러내는 건 ‘설마’ 하는 불가능을 전제로 한 가정이었다. 그럴 리 없음을 알아 머릿속에서 곧장 지워 내긴 했지만.
“우중충한 하늘 뭐 볼 거 있다고 나와 있어?”
하아. 답답한 심정에 기다란 숨을 토해 내던 찰나, 생각을 끊어 내는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뒤를 돌아본 채현은 다가오는 정문영을 발견하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누나.”
“안녕.”
손을 흔들어 보인 이는 괴상한 소릴 내며 기지개를 켰다. 우두둑. 그 움직임을 따라 목 근육이 무지막지하게 고통을 호소했다.
“공부 좀 어때요?”
“매번 똑같지, 뭐.”
“이번에도 누나가 장학금 타겠단 소리구나.”
“타면 맛있는 거 사 줄게.”
장난스럽게 대꾸한 정문영은 난간에 기대서며 캠퍼스를 내려다봤다.
“중도는 들어가기만 해도 숨 막히는데 여긴 마음에 들더라.”
“저도요.”
중앙 도서관 옥상 정원은 채현도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이었다. 날씨가 좋을 때 보이는 광경이 나쁘지 않아 곧잘 찾곤 했다.
“며칠 내내 날씨가 영 별로네. 아무렴 도서관에 처박혀서 전공 책 보는 것보단 낫다만.”
“누나도 공부 싫어해요?”
“나는 좋아하는 쪽보단 잘하는 쪽이라서.”
아닌 게 아니라 매번 장학생 목록 상단에 오르는 이였다. 덤덤히 사실만을 말해서인지 자랑처럼 들리진 않았다. 시원스레 웃어 보이는 그녀를 따라 채현도 빙긋대며 고갤 끄덕였다.
“너는 왜 여기서 혼자 청승을 떨고 있어. 윤범이는?”
“밑에 있어요.”
흠. 목을 울린 정문영은 무언가 가늠하듯 바라보다가 해답을 찾은 양 말을 이었다.
“고민이 많은 얼굴인데.”
“공부 잘하는 사람은 관상도 볼 줄 알아요?”
“네 얼굴에 다 티가 나는 거지.”
어색하게 웃은 채현은 제 얼굴을 슬쩍 매만졌다. 그 행동이 확신을 심어 준다는 걸 모르고.
“연애 문제?”
단박에 짚어 내는 정문영의 말에 채현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 꼴을 본 이는 ‘맞나 보네.’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도서관에 처박혀서 죽상을 하고 있으면 시험 문제인데, 너 그만큼 성적에 진심 아니잖아.”
그 말마따나 목숨 걸고 성적에 매달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적당히 요령껏. 효율적으로 성적을 내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게 언제나의 목표였으니까.
“벌써 취업 걱정을 할 린 없고. 친구 문제가 있을 성격은 아니고. 남는 건 연애밖에 없잖아.”
무섭도록 정확한 추측이었다. 깜짝 놀라 물끄러미 보기만 하자, 그 꼴을 본 상대는 ‘그럼 그렇지.’ 싶은 얼굴로 고갯짓했다.
“얘기해 봐. 혹시 아니? 도움 될지.”
“그냥…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싶어서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생각 많이 하면 너 병난다.”
쉴 틈 없이 굴러가는 머릿속을 엿보기라도 한 양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직전까지도 뇌를 혹사시키던 채현은 ‘네…….’ 자신 없이 대꾸하기만 했다.
“너 집중 안 되지. 술이나 마시자. 사 줄게.”
“누나 공부 안 해도 돼요?”
“원래 술 마시면 공부 더 잘돼.”
당당하게 말을 흘린 이는 어서 오라는 듯 고갤 까딱이며 앞장섰다. 채현은 얼마간 멍하니 서 있다 정문영의 뒤를 따랐다. 집주인에게 늦은 귀가를 알리는 연락도 잊지 않고서.
[권 : 나오늘셤공부하다가한잔해서조금늦어]
[권 : 신경쓰지말고먼저자] 오후 7:11
그리고 그 메시지를 확인할 무렵의 서윤채도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대학 동기에게 불려 나와 자리를 지키던 서윤채는 거듭해 문자를 곱씹었다.
얼마나 작정하고 마시려 이런 통보를 하는지.
대화창 위로 선명히 떠오른 활자를 뜯어보는 시선이 퍽 날카로워졌다. 술이 들어가면 분명 또 취할 텐데. 챙겨 줄 사람은 있나. 핸드폰 너머 상대를 향한 걱정인지 뭔지 모를 것이 넘실댔다.
“서윤채 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어? 한잔해.”
“너희 많이 마셔라.”
“우린 많이 마시고 있는데 넌 한 잔도 안 마셨잖아.”
동기의 재촉에 고개를 든 서윤채는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술병을 보고 학을 뗐다. 술집 오픈과 동시에 마시기 시작해 지금껏 이러고 있으니 벌써 몇 시간째였다.
“그게 계속 넘어가긴 해? 대낮부터 마셨잖아.”
“술은 낮술이 진짜인 거 몰라?”
“그건 주정뱅이들이 하는 소리고.”
진저리를 친 서윤채는 어서 마시기나 하라는 뜻으로 턱짓했다. 날이 어두컴컴해 꼭 술을 마셔야 한다며 불러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하여간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다른 곳에 있는 주정뱅이를 떠올린 서윤채는 급격히 피곤해지는 듯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서 여길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애초부터 관심이 없던 자리는 지루하기만 했다.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오전부터 컨디션도 썩 좋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며 계속 신경을 갉아 대 한껏 예민해진 상태였다.
“안주 하나 더 시킬까?”
“배부르니까 마른안주로 가자. 먹태 어때. 오징어도 좋고.”
자리에 앉은 후로 입을 쉬지 않던 이들은 안주를 핑계로 술도 추가 주문했다. 벽에 기대앉은 서윤채는 그 꼴을 지켜보며 시간을 죽였다. 딱 8시까지만 함께하리라 생각하면서.
이따금 말을 거는 이들에게 대꾸하며 얼마간 시선을 흘렸을까. 문득 든 생각에 입매가 간지러워졌다. 서윤채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미소를 머금고 테이블 위를 살폈다.
“…….”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른 이 역시 저 안주를 곧잘 먹곤 했다. 주량은 애새끼 수준이면서 술자리는 좋아하고, 매번 알딸딸해지면서 본인 살길은 또 제법 잘 찾는 주정뱅이.
여기 있었으면 좋다고 실실댔겠네.
이곳에 없는 이의 모습은 쉽게 그려졌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니 금세 친해져 어울렸으리라. 제법 볼만한 광경이 만들어졌을 테고. 그 꼴을 봤으면 이 자리가 조금은 덜 지루했을까.
“아…….”
무의식적으로 채현을 생각하던 서윤채는 설핏 웃으며 제 머릴 쓸어 넘겼다. 하도 상대가 신경 쓰이게 해 대니 저까지 이러는 게 분명했다.
“어? 서윤채, 어디 가려고?”
“먼저 간다. 나 없어도 잘 놀잖아. 실컷 놀다 가고 나중에 학교에서 보자.”
“의리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새끼. 우린 그냥 비즈니스 관계야? 동기일 뿐이라 이거야?”
“계산하고 갈게.”
“비 오기 전에 조심해서 잘 들어가라.”
그들은 삽시에 태도를 바꾸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떻게 된 게 주위에 정상이 하나도 없는 건지. 기가 차 헛숨을 흘린 서윤채는 대충 손짓하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언가 뿌려 댈 듯 어두컴컴했다. 며칠 내내 제대로 된 볕 한 번 안 들다니. 비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한숨을 쉰 서윤채는 그 자리서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집까지 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몸을 짓누른 피로를 털어 내며 집으로 향해 안으로 들어서던 찰나, 핸드폰을 확인하곤 제자리에 멈춰 섰다.
[부재중 전화 3건]
[채현 이모 : 윤채야 확인하면 연락 줘] 오후 8:22
“…….”
그 자체만으로도 불안을 주는 것들이 있다. 서윤채에겐 이 연락이 그랬다. 확신 어린 최악의 상황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서윤채는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윤채야.
전화는 바로 연결됐다. 가라앉은 음성이 여과 없이 흘러들어 와 귓가를 적셨다. 핸드폰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당장에라도 자릴 박차고 나갈 듯 움찔대는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네, 이모. 무음이라 전화를 못 받았어요. 무슨 일이세요?”
― 놀라지 말고 들어.
부릅뜬 눈이 아파 오는 걸 모르고 허공을 노려보던 서윤채의 시선이 거실 창을 향했다. 토도독. 어둡게 물든 바깥을 비추던 창문이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젖어 들고 있었다.
― 엄마가 쓰러지셔서 지금 병원이야. 여기가 어디냐면…….
아. 끝내 새어 나오고야 만 탄식이 주위의 소음에 몸을 매단 채 바닥으로 추락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겹도록 보고 겪은 일에 가까웠고. 그런데도 난생처음 맞닥뜨린 사고를 접하듯 손이 잘게 떨렸다.
기어코 일이 터졌구나. 찰나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럴 때면 늘 사고가 부정으로 물들어 최악만을 되뇌게 됐다. 개중에는 자신을 향한 개탄도 있었다.
왜 조금 더 신경 쓰지 못했지. 일이 이렇게 될 걸 정말 예상하지 못했나. 이상 징후는 분명 있었는데. 이제 와 후회하고 생각한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한차례 찾아들었다.
― 듣고 있니? 윤채야?
“아, 네.”
― 갑자기 그래서 놀랐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 큰 이상은 없고 엄마 의식 찾으셨어. 아빠도 오고 계신다니까 조금 진정되면 넘어와. 이모가 계속 있을게.
“감사해요, 이모. 지금 바로 갈게요.”
핸드폰을 쥔 팔을 툭 떨어뜨린 서윤채는 두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손을 뒤덮은 잔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결코 이겨 낼 수 없는 지긋지긋한 무력감에 숨통이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비명처럼 호흡을 흘린 끝엔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정신을 온전히 추스르기 전이었지만 한시가 급했다. 당장 병원으로 가 엄마의 상태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여유를 잃어 조급해진 움직임에 제동을 건 건 길게 울린 진동이었다. 화면엔 ‘권’ 한 글자와 익숙한 숫자가 떠 있었다. 야트막한 숨을 터뜨린 서윤채는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어.”
― 서윤채 괜찮아.
핸드폰 너머는 몹시 소란스러웠다. 그런데도 채현의 목소리는 또박또박 들려왔다. 위로인지 질문인지 모호하긴 했지만, 계속해 듣고 싶을 만큼 기꺼웠다.
“어.”
― 집이야? 밖에 비 오니까 우산 챙겨서 나와. 택시 불러서 그거 타고 오고. 알겠지.
상대는 퍽 분주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평소보다 가쁜 호흡에서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응. 순순히 대꾸한 서윤채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펴며 떨림을 애써 죽였다.
전화는 택시에 오를 때까지 이어졌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그로도 상대의 뜻을 알긴 충분했다. 뒷좌석 시트 깊숙이 몸을 묻은 서윤채는 선명한 걱정에 기대 무거운 눈을 깜빡였다.
계속해 찰나의 안도를 누리고 싶단 생각은 밀려온 소음에 숨을 죽였다. 그러고 보니 술을 마시러 간다고 했었지……. 언제까지 채현과는 관계없는 일로 시간을 빼앗을 순 없었다.
“고맙다. 나중에 연락할게. 끊어.”
통화를 종료하는 손짓은 퍽 성급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대로 있고 싶어질까 염려된 탓이었다. 기다랗게 숨을 내쉰 서윤채는 텅 빈 손만 꽉 움켜쥐었다.
나이를 먹어도 왜 달라지는 건 없는지. 향하는 길의 끝이 병원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평정은 빠른 속도로 깨지고 그와 비례하게 떨림이 찾아들었다.
“…….”
언젠가 이런 적이 또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던가.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고.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따뜻한 교무실 한복판이 춥게 느껴질 만큼 무서웠다. 아빠와 통화하는 선생님의 곁에 덤덤한 척 서 있었지만 속은 삽시에 엉망진창이 됐다.
엄마가 아프다고. 쓰려졌다고. 심각한가. 어떡하지. 이제 엄마를 못 보나. 아침에 엄마가 어땠었지. 난 무슨 말을 하고 나왔지. 사랑한단 인사는 하고 나왔나.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그럼, 그럼 나는 어떡하지…….
수렁으로 처박히는 생각을 따라 고개도 바닥으로 기울었다. 손톱을 박아 넣은 손바닥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그 상황을 견딜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홀로 버티던 그 순간이었다. 잠겨 가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린 것은.
요란스레 다가온 소리의 주인은 곧이어 꽉 쥔 주먹을 덥석 감싸 안았다. 감촉을 좇아 고갤 들자 보인 이는 채현이었다. 양 뺨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한.
‘……뭐야.’
그 덕에 긴장이 조금 풀렸던 것도 같다. 지척에서 온기를 전해 주는 채현이 반가우면서 괜히 툴툴거릴 정도로. 채현은 개의치 않고 씩씩하게 맞잡은 손에 힘을 싣기만 했다.
‘나도 갈 거야. 너 아파서 병원 간다며. 내가 같이 가 줄게. 혼자 못 가.’
‘나 안 아파.’
‘어? 준성이가 너 아프다고 했는데.’
‘나 말고 우리 엄마.’
‘이모?’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을 고쳐 잡고 ‘그래도 같이 가.’ 중얼거렸다. 전화를 끊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선생님이 어찌나 당황하던지.
‘채현아, 채현이는 학교에 남아야 해.’
채현은 안 된다는 말에도 꼭 같이 가야 한다며 박박 우겨 댔다. 곤란해하던 선생님은 결국 채현의 부모님께 연락해 상황을 전했다. 끝내는 함께 조퇴하는 걸로 결론이 났었고.
‘찾아갈 수 있니?’
‘네.’
대신 대답하는 와중에도 채현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교실로 이동해 가방을 챙길 때만 잠시 놓고 다시 힘을 주어 꽉 붙들었다.
‘가자.’
그는 야무지게 가방 두 개를 본인이 다 짊어 메고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제 것을 챙겼을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얌전히 뒤따르기만 했다.
‘한국대학병원으로 가 주세요.’
큰길로 향해 택시를 멈춰 세운 채현은 목적지도 또박또박 읊었다. 그 곁에서 서윤채는 덤덤한 척하며 허공만 노려보았다.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이 잘게 떨리는 것도 모르고.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하며 곪아 가던 때. 옆에 앉은 채현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마주쳐 왔다. 시선을 잡아채는 거로도 모자라 말갛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 내 속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선한 걱정에 울컥 튀어나온 건 형편없는 생각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감정을 죽일 찰나, 채현은 손등을 토닥토닥 느린 속도로 두드렸다. 꼭 달래기라도 하듯이.
‘이모는 어른이잖아. 병원엔 똑똑한 의사 선생님 많아서 꼭 고쳐 주실 거야.’
‘그럼.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꼭 낫게 해 주실 거야.’
대화를 듣고 상황을 알아챈 택시 기사님도 말을 거드셨다. 그 틈에서 서윤채는 최선을 다해 치미는 울음을 삭이며 고개만 끄덕였다.
병원 앞엔 채현의 어머니가 나와 계셨다. 기사님은 아이들이 씩씩하게 왔다고, 쾌차를 바란다고 전하며 택시비를 받지 않고 떠났다.
그를 뒤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양손을 꼭 잡아 준 이들에게 전해질 만큼 손끝이 차게 식으며 덜덜 떨리기도 했고.
‘윤채야,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아빠 와 계셔.’
엄마는 바로 볼 수 없었다. 중환자실 앞에 덩그러니 서서 벽 너머에 있을 모습을 그리는 게 전부였다. 애써 눌러 담으며 참아 왔던 울음은 그 순간 물밀듯 차올랐다.
‘이모.’
‘응.’
‘우리 엄마 죽어요? 나 이제 엄마 못 봐요?’
‘윤채가 왜 엄마를 못 봐. 금방 나오실 거야. 딱 다섯 밤만 이모랑 같이 자면서 기다리면 돼.’
덤덤한 척했던 게 거짓인 양, 눈물은 눈꼬리를 타고 소리 없이 뚝뚝 떨어졌다.
‘어이구, 왜 울어. 우리 윤채 엄마 못 볼까 봐 걱정됐구나. 울지 마. 괜찮아.’
따뜻한 품 안에 안겨 쉴 새 없이 설움을 터뜨렸다. 시끄럽게 공간을 울리는 소리는 없었다. 그저 참다 참다 새어 나온, 억누른 울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채현은 한 발짝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함께 울었다. 서러워 죽겠다는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눈물을 흘려 댔다.
‘이모 안 죽어……. 그러니까 울지 마…….’
울상을 한 채 연신 울먹거리더니 통곡하듯 말을 쏟아 냈다.
‘나도 저기 들어갔다고 했어. 많이 갔는데… 안 죽었어. 그치, 엄마.’
‘…그럼. 채현이 씩씩해진 것처럼 윤채 엄마도 금방 나오실 거야. 그러니까 뚝 하자.’
울음에 묻혀 엉망인 위로가 무어라고 힘이 되던지. 웃기게도 얼굴을 적신 물길을 닦아 내고 마음을 다잡을 용기가 생겼다. 곧이어 의사 선생님을 보고 온 아빠와 만나 더 진정할 수 있었고. 그 뒤로는 밥부터 먹잔 채현의 어머니를 따라 병원 밑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도 기분이 안 좋아? 말해 줘.’
소스가 뿌려진 돈가스는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가만히 보고만 있자, 덩달아 포크를 들고 멈춘 채현은 한껏 걱정 어린 얼굴을 해 보였다.
‘괜찮아.’
‘이모 일어날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
그러더니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외쳤다.
‘너 학교는.’
‘빠지면 되지.’
‘혼나잖아.’
‘혼나면 되지.’
‘개근상은….’
‘나 상 필요 없는데?’
서툰 손짓으로 돈가스를 대신 잘라 주던 채현은 고민하는 기색 하나 없이 즉답했다.
‘이모가 가라고 하면?’
‘엄마가…?’
하도 울어 퉁퉁 부은 눈꺼풀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 길게 목을 울리며 망설이던 채현은 이내 눈을 슬쩍 마주쳐 오며 배시시 웃었다.
‘알아서 할게.’
그 미소가 기꺼워서, 본인도 확신이 없으면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게 웃겨 덩달아 웃음이 났다.
‘알아서 하긴 뭘 해.’
‘우리 집에서 같이 자자. 엄마가 다섯 밤이라고 했으니까. 응?’
그 꼴을 본 채현은 신이 나 이런저런 말을 해 댔다. 환히 웃는 채현의 곁에서 서윤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멎지 않고 계속될 듯했던 떨림은 어느새 숨을 죽인 채였다.
약속한 다섯 밤은 다 채우지 못했다. 엄마가 사흘 만에 일반 병실로 옮긴 덕이었다.
미리 설움을 쏟아 내서일까. 그도 아니면 병원까지 함께 손잡고 와 준 이가 있어서일까. 다행히 울지 않고 의젓하게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그 순간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선명했다. 잊을 수 없었단 말이 더 정확하리라.
“도착했습니다.”
두 눈을 내리감고 죽은 듯 호흡하던 서윤채는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창밖으로 기억 속과 똑같은 병원 건물이 보였다. 장소가 주는 위압감이 차 안으로까지 흘러들어 오는 듯했다.
하……. 애써 평정을 가장한 채 눈길을 돌리던 차였다. 택시 정류장 한구석에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는 채현을 발견한 것은. 그는 초조한 낯으로 연신 거리를 힐끗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서윤채는 채현에게 틀어박힌 시선을 떼지 않고 택시에서 내렸다. 거의 동시에 주변을 두리번대던 이가 자신을 발견했다. 채현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는 몸짓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니, 비 오는데 이러고 왔어? 우산 챙기라고 했잖아.”
“아. 택시에… 두고 내렸어.”
지척으로 와 선 이는 젖은 어깨를 걱정스레 살폈다. 고작해야 몇 방울. 택시에서 내리는 사이 튀었을 뿐인데 큰일이라도 난 양 응시했다. 정작 그러는 본인도 꼴이 완전히 엉망이면서.
“왜 여기 있어.”
“그럼 내가 여기 있지, 어디 있어…?”
형편없이 가라앉은 음성 뒤로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곧장 되물은 이는 이곳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고갤 기울이며 의문을 드러냈다.
“들어가자. 이모 병실 11층이래.”
“너 술 약속 있다고 했잖아.”
“어, 술 냄새 나? 한 잔밖에 안 마셨는데…. 그럼 나 뭐 좀 사 마시고 갈 테니까 먼저….”
“그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왔어도 됐냐고.”
“응. 괜찮아.”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어떠한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 솔직한 목소리였다. 그리 말하는 이의 꼴은 정신없이 오기라도 한 듯 엉망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바짓단엔 물이 튀어 있었다. 계속해 물어뜯은 듯 입술도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왜?”
“어?”
“……왜?”
그 모습에서 서윤채는 눈을 떼지 못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 가슴께를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바라보던 상대는 끝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너 혼자 병원 오는 거 보기 싫어. 또 울 거잖아.”
“울긴 누가.”
“나도 이모 걱정돼. 너도 그렇고. 같이 올라가.”
온기를 덧댄 타인의 손이 그 옛날 언젠가처럼 덥석 손끝을 잡아 왔다. 서윤채는 순순히 끌려가며 탄식했다. 단단하게 저를 붙든 채현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마음이 울렁였다.
치미는 혼란을 삼키며 병실로 향하자 침대에 누워 있던 엄마가 알은체를 해 왔다. 덤덤한 척하려던 노력이 무색하도록, 미소 띤 낯을 뒤덮은 염려를 보자마자 속이 뒤집어졌다.
“윤채 왔어?”
“몸은.”
“괜찮아. 우리 아들 놀랐지. 엄마가 미안해.”
“왜 그런 소리를 해.”
이만해서 다행이란 말을 하고 싶었다. 아무 걱정 말고 어서 나으시란 말을 전하고 싶었고. 겨우 새어 나온 대답은 이토록 꼴사나웠다. 여물지 못해 치달은 감정을 토해 내는 꼴이었으니.
“물 좀 떠올게요.”
속으로 욕을 짓씹은 서윤채는 옆에 있던 물병을 들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바로 정수기 쪽으로 향하는 대신 복도 의자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궜다.
얼마간 그 상태로 놀란 마음을 달래고 있었을까. 저벅저벅. 공간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향기가 가까워졌다. 바로 앞에 선 기척의 주인은 머지않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울어?”
올곧은 시선과 물음이었다. 채현은 눈을 올려 뜬 채로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언제까지든 들어 주겠단 태도였다.
“내가 넌 줄 알아.”
“눈 쫌 빨간 거 같은데…. 눈물 고인 거 아니야?”
“까분다.”
그러한 상대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에, 서윤채는 채현의 콧등을 톡 치며 웃었다.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인 이는 마찬가지로 빙긋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모 큰 이상은 없는데 혹시 모르니까 이틀 입원하실 거래. 좀 지켜본다고.”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위로의 말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수도 없이 들은 말이기도 했고. 한데 이 공간이 병원이어서일까. 상대가 채현이어서일까. 기이할 만큼 크게 다가왔다.
“윤채….”
“잠깐만.”
일순 치민 충동을 참지 못하고 채현의 상체에 머리를 툭 기댈 만큼.
“잠깐만 이러고 있자.”
흠칫 놀라며 굳었던 이는 곧이어 조심조심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손이 내려앉는 부위가 따뜻한 온기를 머금는 듯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떠올리고 있던 서윤채는 눈을 내리감았다.
“이 짓은 왜 해도 해도 적응이 안 되냐.”
“왜. 너 되게 잘하고 있어.”
자조를 닮은 한탄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채현이 말을 덧붙였다. 고심해 고른 게 분명한 위로가 조곤조곤 귓가를 간질였다. 그를 듣던 서윤채는 한숨처럼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야.”
“어?”
상대의 고민이 옮기라도 한 걸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변함없는 권채현이 고마워서, 종내에는 안심이 되는 자신이 보여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왜. 혼자 못 가겠어?”
텅 빈 물병을 가리킨 채현이 같이 가 주냐는 식으로 손짓했다. 별다른 반응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긍정하자, 채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서윤채는 걸음 속도를 맞춰 걸어 주는 이를 따라 묵묵히 발을 내디뎠다.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같이 있어 줄 거냐는 물음은 꾹꾹 눌러 삼키며.
병원에 함께 있던 채현은 늦은 밤이 된 후에야 돌아갔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간단 소리에 ‘같이 있어 줄까?’ 물어 대 하마터면 그러라 할 뻔도 했다.
“윤채야, 엄마랑 자리 바꿀까? 안 불편해?”
“괜찮으니까 편히 주무세요. 어디 안 좋으면 바로 말씀하시고요.”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아빠도 돌아가고 엄마와 단둘이 남은 병실은 고요했다. 조곤조곤 쌓인 이야기를 하던 이는 오래 지나지 않아 고른 숨을 내쉬었다.
깊이 내려앉은 밤은 몹시 길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 올 무렵까지 더디게도 흘렀다. 그 공간에서 서윤채는 멀거니 눈만 깜빡이며 시간을 죽였다.
“이따 오후에 다시 올 테니까 쉬고 있으세요. 빨리 올게.”
병원에선 아침 식사 시간까지 머물다가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쨍하니 비치는 볕이 따사로우면서 현기증이 일어 얼른 택시에 올라탔다. 어서 씻고 잠시 눈을 붙이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뻥 뚫린 길을 달려 집 앞에 다다른 순간엔 우습게도 망설임이 고갤 들이밀었다. 과연 집 안에 채현이 있을까. 계속해 제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데. 본인 집으로 향했을 수도 있지 않나.
“…….”
도어록을 가만히 바라보길 잠시,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부터 소음이 들려온 건 거의 동시였다. 걱정 어린 얼굴을 한 채현은 빠른 속도로 곁으로 다가왔다.
“너 괜찮아? 이모는?”
“학교 안 갔어?”
“얼굴 보고 가려고…….”
“수업 있잖아.”
“괜찮아. 아직 출석 여유 있어서 빼도 돼.”
그 꼴을 본 서윤채는 목구멍을 틀어막았던 숨을 토해 냈다. 아……. 그 새로 함께 흘러나와 공간을 뒤덮은 건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고, 자각이었다.
“채현아.”
왜 몰랐을까. 이제야 알았다는 게 우스울 만큼 선명한 감정이 서린 눈을 하고 있었는데.
“어?”
“한 번 더 말해 주면 안 돼?”
“뭐를?”
이토록…… 뚜렷한 애정을 내보이고 있었는데.
“좋아한다고.”
“……어?”
점차 사색이 되는 채현의 낯을 두 눈에 담으며 서윤채는 쐐기를 박듯 다시금 소릴 냈다.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한 번 더 듣고 싶은데, 다시 한번 말해 주라.”
더는 모른 척 침묵하고 있을 생각이 없어졌으므로.
공간은 소름 끼치는 정적으로 가득 찼다. 환히 빛을 비추던 현관 센서도 빛을 꺼뜨렸다. 무겁게 가라앉는 침묵이 전부인 곳에서 서로의 시선만이 오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로 평온을 유지하는 서윤채와 달리 채현은 하얗게 질려 갔다. 애써 미소 지어 보려는 듯 움찔대는 입꼬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당연히… 좋아하지. 우리 친구잖아.”
“그 말 하는 거 아니란 거 알잖아.”
“무슨 소리…….”
“모르는 척하진 말고.”
저벅. 서윤채가 한 발을 내딛는 동시에 채현이 걸음을 뒤로 물렸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던 듯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어지러이 요동쳤다.
“너 나한테 고백했어.”
“…….”
“이젠 내 눈에도… 보이고.”
채현이 만든 간격을 재차 좁힌 서윤채는 상체를 숙여 시선을 잡아챘다.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멈춰 선 채로 채현의 얼굴을 살폈다. 선명한 동요가 어린 눈부터, 앙다문 입술, 힘이 들어간 턱 근육,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가득한 말간 얼굴까지.
절망과 낭패를 두른 공포가 스치는 순간, 채현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상대는 갑작스러운 손짓에 놀랐는지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이게 더 낫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차오르던 물기가 어째선지 신경 쓰이던 차였는데. 그 꼴을 보던 서윤채는 채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나도 더는 모르는 척할 생각이 없어져서.”
“윤채야. 있잖아.”
목이 졸리기라도 한 듯 가느다란 부름이었다. 상대의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일단 들어가. 여기 계속 서 있긴 좀 그렇잖아.”
채현은 주먹을 꽉 쥐고 제자리에 박힌 듯 선 채였다. 서윤채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반사적으로 흠칫대며 떨어지려는 걸 고쳐 잡기도 했다.
“어제는 잘만 잡더니 왜 피해.”
“어제는, 그러니까, 어제는…….”
어제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을 안다. 놀란 친구를 달래려 제 감정을 잊고 순간적으로 그랬던 것일 테지. 채현이 어떤 성향인지 알기에 속내가 뻔히 읽혔다. 그를 알면서도 철모르는 이가 심술부리듯 괜히 말을 내던지게 됐다.
“생각 정리할 시간 필요해?”
정신이 나간 듯한 채현을 소파에 밀어 앉히며 물었다. 그는 혼란으로 점철된 얼굴을 하고 그저 고개만 얕게 끄덕였다.
잠깐만 있어 봐. 나지막이 말한 서윤채는 부엌으로 가 따뜻한 차 한 잔을 타 왔다. 액체를 가득 담은 머그잔을 채현과 가까운 쪽에 내려 두며 마시라는 뜻으로 고갯짓했다.
“마셔. 학교는 몇 시까지 가야 돼.”
“1시…….”
시계를 확인하니 이야기를 나누기엔 충분할 듯싶었다. 채현의 학교까지 택시로 이동하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으니까.
“권채현.”
상대는 이름만 불러도 움찔 몸을 떨어 댔다. 뭘 저렇게까지 놀라는 건지. 물끄러미 채현을 내려다보던 서윤채는 제 볼 안쪽을 혀로 훑었다.
“우선 씻고 올 테니까 마시면서 진정 좀 하고 있어. 이 꼴로 얘기할 순 없잖아.”
서로 묵혀 뒀던 말을 하기엔 행색이 영 별로였다. 어젯밤 병원에서 밤을 새우고 온 탓에 더욱더 멀쩡하지 않았고. 주의 깊게 다뤄야 할 이야기를 엉망인 채로 하고 싶진 않았다.
“기다려. 딴 데로 새지 말고.”
서윤채는 채현을 이 자리에 묶어 놓듯 빤히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쿵, 욕실 문 닫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
거실에 홀로 남은 채현은 따뜻한 머그잔이 동아줄이라도 된 양 움켜쥐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온전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고백을…… 했다고. 서윤채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아…….”
무심히 전해진 그 한마디가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은 아무리 힘을 실어 봐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머릿속이 삽시에 엉망으로 뒤섞였다. 손을 뒤덮은 떨림은 몸 전체로까지 번졌다. 무서웠다. 서윤채가 날 선 시선을 던질까 봐. 역겹다고 당장 꺼지라고 할까 봐.
불안은 속도를 더하며 심장을 짓눌렀다. 쿵쿵 빠르게 내달리는 통에 평정이 흐트러졌다. 혼란을 그대로 비추는 몸 역시 저절로 잔뜩 굽어들었다. 고개를 처박고 호흡만 이어 가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상태는 평소보다 빠르게 씻고 나온 서윤채가 다가올 때까지 계속됐다.
“하여간 말 안 듣지. 마시고 있으라니까.”
서윤채는 입도 안 댄 머그잔을 가져가 테이블 위에 두고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일순 소파가 기울면서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가 확 풍겨 왔다.
“왜 그러고 있어. 목 안 아프냐?”
여느 때와 다름없는 말씨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채현은 천천히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서윤채는 소파 등에 기대앉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었다. 피곤한 건지 유독 몸짓이 느렸다. 어제 갑작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그런 이에게 지금과 같은 일을 겪게 하다니. 손바닥을 파고든 손끝에 힘이 실렸다. 이기적인 애정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 감정으로 타인을 신경 쓰이게 만든 것이었으니까.
“……언제부터 알았어?”
“집에서 둘이 술 마셨던 날 네가 말해 줬어.”
아. 필름이 끊겼던 그날. 제대로 사고를 쳤단 생각은 했는데 이런 종류의 것일 줄은. 애써 외면하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돼 절망스러웠다. 그 이후로 서윤채의 행동이 조금 묘해졌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미안해…….”
“뭐?”
편히 기대앉아 있던 이가 고갤 삐딱하게 기울이며 되물었다. 따갑게 와 닿는 시선도 결코 곱지 않았다.
“금방 정리할게. 너 신경 안 쓰이게 내가 잘할게.”
“…….”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할 테니까… 모르는 척해 주면 안 될까….”
차마 네가 싫으면 안 보고 살아도 된단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것만큼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빈주먹에 의지한 채 서윤채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기만 했다. 그 끝엔 ‘아…….’ 목을 길게 울렸다.
“내가 뭐라고 했어?”
나직이 깔리는 짧은 물음엔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이 여실히 묻어나고 있었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가지고 뭐라 한 적 있냐고.”
“아니…….”
그의 말대로였다. 서윤채는 수많은 상상 속에서와같이 화내지 않았다. 혐오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내치지도 않았고. 그저 평소와 똑같이 대해 주기만 했다.
“근데 왜 사과를 해, 기분 더럽게.”
확신 없는 투로 대답하자마자, 서윤채가 말을 이어받아 낮게 내질렀다.
“나는 채현아,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보다 그걸 가지고 사과하는 게 더 좆같아.”
“…….”
“나 좋아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냐. 듣는 내 기분이 조금 그런데.”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던 반응이었다. 그래서일까. 울고 싶단 생각이 물밀듯 밀려오며 코끝이 찡해졌다. 저조차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애정을 서윤채가 단박에 인정해 주었다.
“너 나한테 못 할 짓 했어? 내 생각 하면서 다른 사람이랑 뭐, 자고 다니기라도 했어?”
“그런 적 없어. 진짜야.”
떳떳하지 못한 애정일지언정 부끄러운 마음은 아니었다. 그런 태도를 지녀 본 적도 없었고. 처음 겪는 애정에 지레 겁을 먹고 서툴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잘못이라 생각했는데…….
“그럼 사과하지 마. 나 그런 거 안 바라니까.”
“기분, 안 더러워? 나, 남자고… 혼자 오래 좋아한 건데.”
“솔직히 안 놀랐다 하면 거짓말이고. 그럴 거라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
와 닿는 서윤채의 시선에 노기는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고 말을 이어 가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한 상대의 신중함이 고스란히 느껴져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차올랐다.
“그래도 네가 나 말고 뭐, 신제윤이나 정유빈 좋아한다고 하는 것보단 낫지 않나 싶고.”
“…….”
“아… 그건 진짜 기분이 좀 더럽네.”
말을 잇던 서윤채가 미세하게 눈가를 구기며 중얼댔다. 정말 상상이라도 해 본 건지 혀를 쯧 차기도 했다.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헛숨을 흘린 이는 이내 시선을 마주쳐 왔다.
“그냥…….”
듣기 좋은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침묵이 대화의 공백을 채우는 사이, 서윤채는 가장 익숙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었다.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눈이 제대로 달렸구나 싶은데. 나 잘났잖아.”
채현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런 서윤채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선명히도 그려져서. 죽여야 할 마음이 또다시 맥동해서.
“당장 답은 못 해. 뭘 하자는 것도 아니야. 그냥 좀, 솔직해지자는 거지.”
정리를 하긴 해야 할 거 아니야. 조용히 뒤따르는 그의 말에 채현은 잠자코 고갤 끄덕였다.
“응. 얼른, 마음 정리할 수 있어. 어떻게든 할게. 그때까지….”
“뭐라는 거야.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어라. 혼자 앞서가지 말고.”
가차 없이 말을 끊은 이는 실소를 흘리며 가볍게 이마를 튕겼다. 아. 저도 모르게 소릴 내며 이마를 문지른 채현은 불안한 눈으로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나한테도 시간을 조금만 줘. 나 너한테 괜한 죄책감 느끼기 싫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무슨 뜻으로……. 그의 말을 온전히 소화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이리저리 뒤엉켜서 새어 나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권채현.”
“……어?”
“왜 기가 죽었어. 기죽지 마.”
상대는 어울리지 않게 다정히도 말을 늘어놓았다. 꼭 달래 주기라도 하듯이. 그와 동시에 울컥 감정이 치솟아 채현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하지 않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므로.
그 꼴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직시하던 이는 손을 뻗어 머리 위에 툭 얹었다. 꾹꾹. 힘을 실어 내리누르는 손짓은 그 옛날 언젠가를 떠오르게끔 했다.
“눈치 없는 새끼 좋아하느라 애썼다. 고맙고.”
그러한 행동의 끝에서 서윤채는 결코 잊지 못할 모습으로 미소 지었다.
* * *
서툰 애정 앞에선 언제나 무력하고 미성숙했다. 싹튼 마음을 알아챈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까딱하면 떨어질 벼랑 끝에 발을 붙이고 선 기분이었다.
낭떠러지를 뒤로하고 평온한 척하며 평정을 가장했다. 예전과 같은 친구 흉내를 내며 일상을 영위했고. 찰나의 자극에도 하릴없이 흔들렸지만 괜찮을 거라 자위하며 견뎌 냈다.
그 안일한 태도가 끝내는 일을 그르친 것이리라. 애초에 간신히 버티며 유지하던 하루하루였다. 의연한 척 꾸며 내던 모습은 쏟아지는 자극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날 선 질타보다 다정한 웃음 한 번이 더 커다란 파랑을 일으키리라고 누가 알았을까.
‘너 나한테 고백했어.’
‘나한테도 시간을 조금만 줘. 나 너한테 괜한 죄책감 느끼기 싫다.’
‘눈치 없는 새끼 좋아하느라 애썼다. 고맙고.’
상상 속에서도 떠올려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껏 그려 왔던 모습과 현실이 너무 달라 혼란스러웠다. 서윤채의 반응이 고마우면서도, 순간의 공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엉망으로 흐르던 사고의 끝에선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무엇이 달라지는 거지.
서윤채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채현은 불안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겁이 났다. 원하는 건 그저 현재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서윤채와 함께하는 소중한 일상을. 서윤채가 모든 걸 안 이상 불가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갑작스레 뒤바뀐 판도였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채현은 비겁하고도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그의 말마따나 제게도 평온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했으니.
“…….”
도망치듯 그의 집을 빠져나와 바로 제집으로 향했다. 그의 연락에도 ‘미안.’ 한 마디를 보낸 후로 답하지 않았다. 상대에게 못 할 짓이라는 건 알지만 그것 외엔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벌써 며칠이 지났다.
[서유난 : 나랑 술래잡기해?]
[서유난 : 채현아 우리 다섯 살 아니야] 오후 4:22
이따금 핸드폰을 울리는 서윤채의 연락만 봐도 심장이 내려앉았다. 한 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문자를 확인하기까지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열받았겠지…….
말없이 사라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이다. 활자에 불과한 메시지에서도 그의 성난 기색이 느껴지는 듯해 속이 탔다. 일의 원흉인 주제에 도망쳐 나와 하긴 자격 없는 걱정이었지만.
하…….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채현은 기계적으로 손을 놀렸다. 제 일상은 격랑을 만나 완전히 휩쓸렸는데, 그런 와중에도 시험공부는 해야 한다는 현실이 우스웠다.
“아.”
“조심 좀 해라.”
그마저도 제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정신이 반쯤 날아가 허둥지둥하기 일쑤였다. 지금도 책상 위에 놓인 커피를 엎을 뻔했던 채현은 시무룩하게 ‘미안…….’ 중얼댔다.
“채현이 상태가 왜 이래?”
“몰라요. 공부하다가 돈 건지, 뭘 잘못 먹은 건지. 제정신 아닌 지 꽤 됐어요.”
쯧 혀를 찬 이윤범이 관자놀이 근처에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이제 막 과방으로 들어와 건너편 소파에 몸을 앉힌 선배는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파 보이는데? 괜찮은 거 맞아?”
“네? 네. 저 괜찮아요. 멀쩡해요.”
“저도 몇 번 물어봤는데 지 말로는 괜찮대요. 아무리 봐도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빙빙. 느리게 손가락을 돌리던 그는 제 머리를 톡톡 두어 번 두드렸다. 가만히 앉아 있다 머리 아픈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채현은 웃기만 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므로.
“무슨 일 있는 거면 얘기해라, 채현아. 형이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올랐다가 한발 물러선 채현은 묵묵히 할 일을 해치웠다. 저를 향하는 타인의 호의가 감사한 것과 별개로 지금은 누군가를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여럿이 과방을 들락날락하는 사이 날은 빠르게 저물었다.
테이블 한구석에서 맥주를 마시던 선배들은 소란을 떨다가 아예 자리를 떴다. 공부한다면서 전공 책을 안주 삼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답답할 땐 술이 최고다. 먹고 싶은 거 다 사 주겠다. 이야기하며 함께 가자 손을 내밀었지만 채현은 고갤 저어 보였다.
모두가 떠난 뒤의 과방은 고요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야트막한 숨소리와 바깥에서 밀려들어 오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읽히지도 않는 전공 책을 멀뚱히 보던 채현은 버릇처럼 한숨을 흘렸다.
“하…….”
공부한답시고 책을 펴 놓고서 머릿속에 넣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짓누른 짐이 있어서인지. 과부하가 되어서인지.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고 엉망으로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잠이라도 푹 자면 좋으련만. 혼란과 고민이 불러일으킨 건 결코 달갑지 않은 불면이었다. 밤이 삭막하게 가라앉은 공간에서 시간을 죽이는 일은 꽤 고통스러웠다. 서윤채의 집에 안락하게 머물다 와서 더욱 그리 느껴지는 듯했고.
거기에 더해, 혹시나 서윤채가 찾아올까 지레 겁이 나기도 했다. 그를 마주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아직 모호했으므로. 정작 그가 집으로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술이나 마시러 갈 걸 그랬나.”
채현은 힘없이 늘어져 앉아 눈을 깜빡이다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잠시라도 좋으니 머릿속을 비우고 싶었다. 누구 없을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함께 시간만 보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
연락처 목록을 휙휙 내리던 손가락이 움찔 멈춰 섰다. 잠시 고민하던 채현은 화면을 조금 더 내린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단조롭게 이어지던 기계음은 오래 지나지 않아 뚝 끊겼다.
― 응, 채현아. 무슨 일이야?
“제윤아, 바빠?”
공백을 메우며 들리는, 변함없이 차분한 이의 음성을 들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으면 술 한잔할래?”
단박에 눈에 띈 서윤채의 연락처를 누르고 싶단 충동을 억누르면서.
* * *
열흘. 아니, 지금 막 12시를 지났으니 열하루째였다. 채현이 연락을 씹고 잠수를 탄 것은.
“아…….”
쓸데없는 연락만 계속 오는 핸드폰을 노려보던 서윤채가 소파 헤드에 머릴 툭 기댔다. 동네 한량처럼 기대앉은 것과 달리 허공을 기는 눈빛은 매서웠다.
느릿하게 공간을 훑던 시선은 곧이어 텅 빈 옆자리로 떨어졌다. 얼마 전만 해도 이곳에 자리하던 이가 선명히 그려졌다. 지금 같은 적요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이가.
물끄러미 응시하길 잠시, 붉은 입술이 솟으며 실소가 샜다. 정작 눈앞에 없는 이를 떠올리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공교롭게도 채현이 잠적한 후로 줄곧 이 상태라는 점 탓에 더욱 그랬고.
채현의 부재가 도리어 채현을 떠올리게 할 줄이야. 집 안 곳곳 그의 흔적이 남아 있어 과열된 머린 식을 틈이 없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불시에 파고들어 머릿속을 헤집었다.
차라리 그뿐이면 좋으련만. 제 행동에서도 채현이 묻어나 당혹스러웠다. 채현이 없는데도 버릇처럼 그를 염두에 두고 생활했다. 늘 채현이 앉던 자리를 비워 두고 몸을 앉힌 지금처럼.
“하…….”
톡톡. 소파 위에 늘어져 있던 손가락이 일정 속도로 움직이며 소음이 일었다. 하루하루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인내심의 한계를 체험하는 듯했고.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죽을죄를 지었다는 양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연했다. 무엇이 그리 겁이 나서 꼭꼭 숨는 건지. 그마저도 그에겐 모진 말로 들렸던 걸까.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해…….’
사과가 어울릴 상황이었나. 아니 애초에 잘잘못을 따질 일이었나. 제가 생각하기엔 전혀 아니었다. 채현은 어땠을지 몰라도, 자신은 케케묵은 의문이 사그라지는 걸 느꼈을 뿐이었으니.
마음속 한구석에 남아 해소되지 않던 궁금증이었다. 왜 갑자기 태도를 달리했을까. 왜 거리를 뒀을까. 왜 너는. 그 해답을 이제야 알게 된 것뿐이었는데.
뒤처진단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채현만 관련되면 논외였다. 늘 한 박자가 늦고 명쾌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의 감정을 알아채고 시간을 죽이는 지금처럼.
자신이 이토록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던가.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자조의 끝에선 필연적으로 채현이 떠올랐다. 무엇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이였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이였고. 그런 채현이 감정을 숨기기까지 얼마나 애썼을지 보이는 듯해 기분이 이상해졌다.
무작정 채현을 잡으러 가지 못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숨넘어갈 듯 희게 질렸던 꼴을 보고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두어 번 채현의 집 앞으로 찾아가도 봤지만 끝내 들어서지 못하고 걸음을 돌렸다. 그의 속을 다 알진 못하지만 상처 줄 짓을 하긴 싫었다.
‘권채현 요즘 어떠냐?’
― 왜 정유빈한테 전화해서 권채현 안부를 물으시는지?
‘그래서 어떠냐고.’
― 인성 좆된다. 궁금하면 네가 전화해 보든가. 내가 권채현 매니저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씨발, 도움이 안 돼.’
결국 할 수 있는 건 다른 이에게 채현의 상태를 묻는 것뿐이었다. 만족할 만한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지만. 몇 번인가 똑같은 과정을 반복한 뒤엔 그 짓도 아예 관두었다.
하. 기다란 숨을 내쉬며 눈길을 거둔 서윤채는 신경질적으로 머릴 헝클였다. 분명 고백을 받은 건 이쪽인데 왜 제가 조바심을 내는지. 날이 흐를 때마다 신경이 닳아 없어지는 듯했다.
두 번 시간 달란 소리 했다간 영영 못 보게 생겼네. 실소를 내뱉으며 의미 없이 시선을 흘릴 때였다. 상념을 깨듯 핸드폰이 길게 진동하며 몸을 떨었다.
화면엔 뜻밖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저희가 이 시간에 전화할 사이였던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한편, 어떠한 예감이 들어 바로 귓가에 갖다 댔다.
“왜.”
― 채현이 데려갈래?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주위의 소란을 뒤로하고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연락도 없던 새끼가 신제윤을 만나 대체 뭘 한 건지. 서윤채는 치미는 황당함을 삼키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데.”
― 우리 학교 근처.
“위치 문자로 남겨. 금방 가.”
― 싸웠어?
“네가 알 건 없고.”
― 너흰 중학교 때부터 변하는 게 없네.
그답지 않게 통화를 길게 이어 가던 신제윤이 조용히 웃었다. 바로 끊으려 했던 서윤채는 이어 들리는 그의 말에 멈칫하며 걸음만 서둘렀다.
― 채현이 술 많이 마셨어.
“네가 먹였냐?”
― 내가 넌 줄 알아?
“왜 만났는데.”
― 너 때문이지 않을까? 채현이 이런 상태 될 땐 꼭 네가 원인이었잖아.
상대는 결코 큰 소리 내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지만, 꼭 타박이라도 하는 듯했다.
― 어련히 알아서 빨리 오겠다만, 그래도 얼른 오는 게 좋겠다. 끊을게.
끊긴 전화 너머 채현의 상태를 가늠하던 서윤채의 낯이 험상궂어졌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도대체가……. 그 대화를 나누고 다시 만나는 상황이라기엔 퍽 웃겼다.
술을 많이 마셨다고 했다. 채현의 주량으로 보아 이미 만취일 확률이 높았고. 뭘 믿고 또 양껏 처마신 건지. 불만과 비례하게 무의식적인 걱정이 차올라 행동이 분주해졌다.
택시에 오른 뒤에도 신경은 계속해 바짝 일어섰다. 늦은 밤이라 뻥 뚫린 길인데도 기사님이 여유롭게 운전하시는 탓이었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기다렸을 테지만 오늘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저도 모르게 꼬아 올린 다리를 떨던 서윤채는 연신 시계를 확인했다.
차를 사야 하나. 제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진지하게 고민할 무렵, 다행히도 목적지에 도착했다. 신제윤이 문자로 일러 준 장소로 향하자 찾던 이가 바로 보였다. 비록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안심이 됐다. 그와 달리 신제윤은 한 잔도 안 마신 것처럼 멀끔한 모습이었다.
“빨리 왔네.”
“얘는 왜 이래.”
“그냥 잠든 거야.”
태연히 대꾸한 이는 바로 가려는지 몸을 일으켰다. 아예 한쪽으로 비켜서더니 앉으라는 듯 눈짓하기도 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바라만 보니 마음대로 하라는 양 어깰 으쓱했다.
“만나서 술만 마셨어. 별 얘기도 안 했고. 그게 다야.”
“누가 뭐래?”
“열받은 얼굴이길래. 상관없는 거면 됐고. 너 왔으니까 나는 가 볼게. 수고해.”
“야.”
서윤채는 미련 없이 자릴 뜨는 신제윤을 보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그를 멈춰 세웠다. 부름에 뒤를 돌아본 이와 시선을 주고받길 잠시, 혀 밑에 불쾌하게 감돌던 인사를 내뱉었다.
“챙겨 줘서 고맙다.”
잠시 놀라는 듯했던 상대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차분하게 반응했다. 그래. 조용히 대꾸하더니 몸을 돌려 가게를 빠져나갔다. 우두커니 서 있던 서윤채도 채현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채현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테이블에 머릴 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예 안 들리는 듯싶었다. 저러다 진짜 큰일 나지. 버릇처럼 터지려는 한숨을 삼킨 서윤채는 머리맡을 똑똑 두들겼다.
“야.”
취객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야, 눈떠.”
“일행 있어요…….”
테이블 다리를 툭 걷어차니 그제야 혼잣말처럼 웅얼댔다.
“그 일행이 나니까 정신 좀 차리고.”
취해도 경계심은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친구 목소리도 못 알아듣는 괘씸한 새끼라 욕을 해야 할까. 속이 끓다가도 오죽하면 이럴까 싶어 화낼 기력도 사라졌다.
“너 그러고 자다가 담 걸린다. 집에 가게 일어나 봐.”
“응….”
“내 말이 제대로 들리긴 하냐?”
“응….”
완전히 맛이 갔구나. 기민하게 채현을 살피던 서윤채는 몸에 힘을 풀고 조금 더 편히 기대앉았다. 아무래도 바로 이동하긴 그른 모양이었으니.
깨끗한 새 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동안 시선은 채현에게 고정된 채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머리꼭지뿐이었지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조금만 마셔도 볼이 붉어지고 취기가 오르던 이였다. 이 정도가 되기까지 얼마나 들이부은 건지 알 만했다.
저러다가 내일 또 숙취 때문에 끙끙 앓지.
차가운 물 덕에 진정이 된 속과 달리 머릿속은 과열이라도 된 듯 들끓었다. 앞선 걱정이 밀려와 신경이 불쾌하게 긁혔다. 말없이 사라졌다가 이런 꼴로 나타난 것에 대한 분노보다, 그리 행동하는 채현이 더 눈에 밟히고 걱정되는 자신 탓에 더욱이 그랬고.
“…….”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공연히 갈증이 나 물만 들이켜던 서윤채는 텅 빈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죽은 듯 엎어져 있던 채현이 움찔대며 상체를 일으킨 건 그 직후였다.
술기운과 잠기운이 한데 모여 내리누른 눈꺼풀의 움직임은 몹시 둔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비빈 이는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느슨한 시선을 이리저리로 흘렸다.
취객은 입을 작게 벌리고 연신 혀로 입술을 축였다. 서윤채는 침묵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을 발견한 채현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환히 웃는 모습까지도.
“어, 서윤채다.”
말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대답만 흘리던 이가 제 이름만큼은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꼭, 수없이 발음해 틀릴 일이 없기라도 한 듯.
“윤채가 왜 여기 있지……. 꿈인가.”
진짜 잘생겼네. 채현은 붉은 입술을 예쁘게도 끌어당기고 피식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꿈이라 생각한 건지 마지막에 봤을 때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잘도 쳐다봤다.
퍽 맹목적이다 느껴질 만큼 올곧은 눈빛이 불러일으키는 건 옛 기억이었다. 생각해 보면 채현은 늘 그랬다. 언제고 외롭게 시선을 거두는 일이 없게끔 곁에 머물렀다. 때아닌 자각에 기분이 묘해진 서윤채는 채현과 눈을 마주했다.
“왜 여기 있어?”
“꿈이라며.”
“아… 진짜 꿈이구나.”
어떻게 나오나 보잔 심정으로 어울려 주니 채현은 안심한 기색을 내비쳤다.
“넌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집에 혼자 있으면 생각이 많아져서. 생각 많이 하면 병나는데…….”
툭. 뒷벽에 머릴 기댄 채현은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항상 투명한 속내를 내비치던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아래로 숨어들어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생각.”
채현의 앞으로 반만 채운 물을 놔 주던 서윤채는 그대로 멈칫하며 굳어 들었다. 예고 없이 성큼 거리를 좁히는 채현 때문에 순간적으로 호흡이 흐트러졌다.
“요즘 계속, 매일, 네 생각만 해. 머리가 아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만큼 작은 음성이었다. 그마저도 입 속에서 굴리는 듯 잔뜩 뭉개진 채였고. 한데도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들리며 커다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왜 나한테 얘기 안 하고.”
“어떻게 해.”
말도 안 된다는 양 즉답한 이는 곧이어 ‘아…….’ 길게 목을 울렸다.
“꿈이면… 꿈에서는 말해도 되려나.”
“뭐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넌 모르겠지만….”
그 순간 흡연 욕구보다 짙게 치민 건 채현의 시선을 제게 당기고 싶단 충동이었다. 어떤 눈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고 싶었고.
그의 고개를 붙잡아 제게 돌리는 상상을 하는 동시에 손끝이 움찔 떨렸다. 정신이 번쩍 든 것도 동시였다. 미친……. 찰나 평정이 깨진 서윤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거두었다.
“알아. 네가 말해 줬어.”
테이블에 팔을 괴고 나직이 대꾸하자,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채현이 고갤 들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퍽 매서운 눈초리를 해 보였다.
“거짓말. 네가 어떻게 알아. 이거 아무도 모르는 건데.”
걸리기 전이라 생각하는 건지, 그러길 바라는 건지 모호한 태도였다. 하기야 취한 이에게 무얼 바라겠냐마는. 그를 알면서도 쉬이 무시할 수가 없었다.
“몰랐으면 좋겠어?”
“응.”
“말 안 할 거야?”
“죽어도 안 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힘이 잔뜩 들어간 대답이었다. 그 단호한 한마디에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채현이 왜 지레 겁을 먹고 사과부터 내질렀는지. 아마 평생토록 밝히기 싫었던 것이리라. 술에 취해 실수한 게 아니라면 자신은 영영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했다.
“왜?”
“어? 그야, 당연히… 우린 친구니까….”
“나도 너 좋아할 수도 있잖아.”
“절대 그럴 일 없어.”
그럴 일이 없다고……. 저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인데, 채현은 기이할 정도로 확신에 찬 상태였다. 가능성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듯했다.
“윤채는 친구랑 연애 안 해. 그러니까 나 좋아할 일 없어.”
“…….”
“그냥, 나는 윤채랑…….”
희미한 소리를 낸 채현이 말을 길게 늘였다. 입술만큼 붉은색을 띠는 혀가 아랫입술을 촉촉이 적시고 사라졌다.
“너랑 그냥 오래 보고 싶은 거야. 지금처럼. 그거면 돼…….”
틈 없이 얽혀 있던 시선을 먼저 떼어 낸 건 상대였다. 살며시 웃어 보인 채현은 다시 고갤 숙이고 숨만 곤히 쉬었다.
서윤채는 대화가 끊긴 자리에 주변 소음이 몰려들 때까지 채현만 직시했다. 때로는 담백한 한마디가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소박하게 말을 이은 그가 또 한 번 고백이라도 한 듯해 사고가 더뎌졌다.
“…….”
오래 보고 싶은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일상 한구석에 채현이 있으리라고 감히 확신하며 살아왔다. 그러길 바라고, 그리할 예정이었고. 상대가 그토록 바라는 일이 제가 그리는 모습과 별다를 바 없어 생각이 깊어졌다.
채현이 많은 걸 바라지 않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채현을 시야에 가두고 골몰히 생각하던 서윤채는 피식대며 고갤 살짝 기울였다. 어떠한 기로에 서 있는 기분이었는데, 갈피를 잡은 듯도 했다.
“채현아, 단순하게 생각해. 열내지 말고.”
나도 그럴 테니까.
당장에 할 수 있는 이야길 전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현이 빠뜨린 물건이 있나 살핀 뒤엔 조심스레 부축해 일으켰다. 다행히 잠들기 전이었는지 이끄는 대로 무리 없이 걸었다. 그 덕에 가게에서 나오기 전 부른 택시에 오르기까진 어렵지 않았다.
채현은 아늑한 공간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까딱하다간 창문에 머릴 갖다 박을 기세라 서윤채는 제 어깨를 내주었다. 선명히 와 닿는 무게와 어깨를 데우는 호흡에 괜히 감각을 곤두세우게 됐다.
택시는 금방 채현의 오피스텔 앞에 다다랐다. 느리게만 느껴졌던 아까와 달리 빨리 이동한 기분이었다.
“걸을 수 있어? 아니면 업고 가고.”
“응. 가자….”
툭 치면 쓰러질 듯한 이는 휘청휘청 발을 내디뎠다. 본능적으로 제집이 코앞이라는 것을 아는 모양새였다. 혹시라도 넘어질까 불안해진 서윤채는 딱 붙어 서서 신경을 기울였다.
간당간당하던 채현의 의식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동시에 완전히 날아갔다. 대충 수건으로 닦아서 재워야겠네. 해야 할 일을 떠올린 서윤채는 껴안듯 채현을 부축하고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그려 본 계획은 완벽했다. 늘 그랬듯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겼을 뿐이고.
“아.”
채현을 침대에 눕힐 무렵, 옷자락을 붙든 채현의 손에 힘이 실려 몸이 확 당겨졌다. 일순 휘청댄 서윤채는 침대맡을 짚으며 중심을 잡았다.
넘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길 잠시, 시선이 닿는 곳 바로 옆에 채현이 있어 호흡이 느려졌다. 빛이 없는 공간은 어두웠다. 무언가를 살피기에 결코 친절한 환경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채현의 얼굴은 선명히 그려졌다. 눈가를 뒤덮은 긴 속눈썹부터, 그가 연신 축이던 입술까지.
“…….”
서윤채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채현을 바라보았다. 상대의 호흡이 여실히 느껴지는 거리였다. 잘못하다간 입술이 부딪히기 딱 좋은 위치였고. 불쾌해야 마땅한 사고 같은 접촉인데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그 반대에 가까웠다.
“아…….”
단 한 번도 의식해 본 적 없던 것이 신경을 갉작였다. 찰나 소름이 돋을 만큼 기분 나쁜 긴장감이 온몸을 기었다. 볼 안쪽을 혀로 훑은 서윤채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채현아.”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했던가.
“뭘 그렇게 쉽게 단정을 지어.”
글쎄. 적어도 지금 느낀 건 어떠한 가능성이었다.
“해 보지도 않고.”
제 몸을 두른 불편한 긴장감을 뒤로한 서윤채는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가지런히 정리해 준 뒤엔 이마를 가린 머릴 넘겨 주었다. 살랑. 간지럽게 스치는 머리칼에 손끝이 움찔댔다. 자극을 좇듯 반응하는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천천히 말아 쥐었다.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다른 생각이 드네.”
넌 모르겠지만. 채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빌려 내뱉은 서윤채는 미소 지으며 채현을 훑었다.
“그러니까 헛생각하지 말고 푹 자기나 해.”
조용히 내려앉는 그 시선에 흔들림은 전혀 없었다.
* * *
왜 사람은 늘 실수를 반복하고서야 제 행동을 되돌아보는지. 또 한 번 기억의 공백을 만들고 자괴감에 휩싸인 채현은 하루를 꼬박 죄인의 심정으로 살았다.
‘제윤아, 미안. 집에 데려다주느라 고생 많이 했지.’
― 기억 안 나?
‘어? 응…. 혹시 실수한 거 있으면 진짜 미안….’
― 진짜네…. 실수한 거 없고 나 고생도 안 했어. 사과 안 해도 돼.
대뜸 술을 마시자 불러 놓고 혼자 취하는 이가 어디 있을까. 이보다 더 최악일 수가 없었다. 늘 속이 깊던 친구이니만큼 이번에도 배려를 해 준 모양인데, 떠오르는 게 없어 죄스러웠다.
하물며 그는 컵라면과 숙취 해소 음료까지 사다 두고 돌아갔다. 숙취보다 커다랗게 몰려온 건 죄의식이었다. 그 때문에 반성 아닌 반성을 하며 자신을 되돌아봐야만 했다.
그날 후론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아무리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도 술만은 멀리했다. 한잔하러 가잔 선배의 꾐에도 한사코 거절을 표했다.
“채현아, 진짜 안 가? 그래도 종총인데. 술 안 마셔도 돼.”
“저도 가고 싶긴 한데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요. 다음에 불러 주세요.”
“방학하면 얼굴 보기 힘들잖아.”
“저 어차피 계절 들어서 학교 계속 나와요. 그때 보면 되죠.”
그 생활도 계속해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적응이 되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이들과 달리 어서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시험 준비를 하며 이틀 밤을 새웠더니 정신이 붕 뜨기도 했고. 남아 있다간 술자리로 끌려가기 십상이라 서둘러 인사하고 공간을 빠져나왔다.
터덜터덜. 귀갓길에 오른 걸음은 힘이 거의 빠진 채였다. 근래 들어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탓인지, 한 학기를 마쳤다는 기쁨보다 어떻게든 해냈단 안도가 먼저 찾아들었다.
한숨을 내쉰 채현은 핸드폰을 켜 택시를 호출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조금이라도 편히 집까지 이동하고 싶었다. 배차가 된 걸 확인한 뒤엔 고민하다 메신저를 눌렀다.
“…….”
찾던 이와의 채팅창은 목록 아래쪽에 위치했다. 마지막 대화를 끝으로 벌써 수일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가 자초한 일이긴 하다만, 막상 이렇게 되니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잠잠해진 핸드폰은 일상에 찾아든 또 다른 변화였다. 이따금 알림을 띄우던 서윤채가 더는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신제윤과 술을 마신 날 도착했던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첫날은 초조했고, 둘째 날은 겁이 났다. 그다음부턴 애가 탔던가.
연락의 단절이 꼭 관계의 끝을 암시하는 듯해 무서웠다. 당장에라도 연락하고 싶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해 할 수 없었다. 정리는커녕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으니. 몇 번인가 고민 끝에 눌러 본 서윤채의 번호는 그대로 지워야만 했다.
머리론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더는 우유부단하게 굴어선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늘 뜻대로 따라 주지 않던 마음은 이번에도 방향을 달리했다.
감히 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오죽하면 서윤채가 나오는 꿈을 꿨을까. 그날은 가능한 한 오래도록 잠들어 있고 싶었다. 깨고 나면 잊힐 꿈이 그다지도 귀하고 숨구멍이라도 된 듯해서.
“…….”
언제까지 이 상태로 지낼 수 있을까. 어쩌면 마지막 유예일지 모르는 지금, 반드시 봐야 하는 끝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슬슬 한계를 느끼던 채현은 자조하며 시선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선 골몰히 생각하다 머리가 아파져 잠자코 창밖만 바라보았다. 서윤채와 함께 갔던 곳을 지날 무렵엔 아예 눈을 감고 찰나의 어둠에 자신을 의탁했다.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 했던 노력은 집 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린 순간 깨졌다. 제자리에 박힌 듯 선 채현은 눈에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라보길 잠시, 무심한 낯으로 시선을 흘리던 이도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틀었다.
“이제 오냐?”
어스름한 저녁 빛이 감도는 하늘을 뒤로한 서윤채가 한 발씩 느릿하게 내디뎠다. 그사이 간격이 좁혀지고 종내에는 한 걸음만을 남겨 두고 마주 서게 됐다.
“몰골이 왜 이래. 밥 굶고 다녔어?”
서윤채의 태도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꼭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자연스럽기만 했다. 의식이 되는 것은 저뿐인 건가. 치미는 긴장을 억누른 채현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니야. 시험 때문에 그래.”
“애 잡겠네.”
쯧 혀를 찬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살짝 구겼다.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언제가 됐든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말없이 잠적한 저를 찾아와 준 그에게 이 이상 민폐 끼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묵묵히 고갤 끄덕였으나 그는 여전히 탐탁지 않아 보였다.
“괜찮겠냐?”
“……뭐가?”
“나한테 쓸 체력 남아 있냐고. 피곤하면 내일 다시 올 테니까 그냥 올라가서 자.”
그냥 한번 해 보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 주리라곤 예상 못 했지만. 지겨울 만큼 누리고 있으면서 매번 동요하게 되는 그의 다정에 채현은 또 한 번 고개만 주억거렸다.
“오래 안 붙잡아.”
괜찮다는 의사를 밝힌 즉시 상대는 손을 뻗었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 손이 낚아챈 것은 가방이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움찔대자, 그는 가방을 향해 눈짓했다.
“내놔.”
“왜…?”
“더럽게 무거워 보여서. 너 그러다 어깨 내려앉는다.”
“내가 멜 수 있어. 그리고 어깨가 왜 내려앉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채현이가 또 쉽게 장담을 하네.”
짧게 웃어 보이는 그에게 물러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방 손잡이를 잡고 들었다 놓았다 하며 어서 내놓으라는 듯 굴 뿐이었다.
“어차피 집 금방이잖아. 들어가서 내려놓으면 돼.”
“들어가도 괜찮겠어?”
“어?”
“내가, 아니 나랑 같이 들어가도 괜찮겠냐고.”
가방끈을 붙잡고 한사코 거절하던 채현도 그 순간 멈칫했다. 무심한 듯 조심스레 전해진 한마디가 온몸을 옭아맸다. 의식하지 않는 게 아니었구나.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들며 가슴께가 울렁울렁했다.
“그냥 좀 걷자.”
상대는 힘이 빠진 틈을 이용해 가방을 가져가 제 어깨에 대충 걸쳐 멨다. 대답할 틈도 없이 가방을 넘겨준 채현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그를 뒤따랐다.
엇갈린 발소리가 거리 위에 울려 퍼졌다. 타박타박. 다른 소음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채현은 말없이 발끝만 응시했다. 그 사이로 다른 소리가 끼어든 건 좀 더 걸음을 옮긴 뒤였다.
“예전에.”
목소리를 좇아 고개를 드니 서윤채의 시선이 한곳에 꽂혀 있었다. 덩달아 눈길을 옮기자, 저 멀리 노란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가는 게 보였다.
“나 차에 치일 뻔했던 거 기억나냐.”
“너 공 주우러 가다가 그랬던 거?”
“어.”
짧게 대꾸한 서윤채는 그 당시를 회상한 듯 실소를 흘렸다. 채현의 머릿속에도 선명히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언젠가의 여름이었던가. 공을 쫓아 뛰던 그가 다가오는 차를 보지 못해 치일 뻔했던 사고였다. 그와 제 부모님도 찰나 신경을 뗐던 탓에 막을 새 없이 벌어진 일이었고.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던 어린아이였다. 그의 팔을 잡아끌며 함께 흙바닥을 구르는 일 말고는. 그 후로 오열하듯 울어 젖히며 흙 묻은 손으로 서윤채의 무릎을 닦아 주었다. 뒤늦게 달려온 부모님이 상황을 파악하고 어찌나 놀라시던지. 둘의 꼴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제대로 걸을 줄도 모르면서 왜 밖에 나오냐고 뭐라 했었지. 지는 매일 넘어졌으면서.”
“매일은 아니었어.”
“퍽이나.”
가차 없이 반응한 서윤채가 방향을 일러 주듯 턱짓했다. 그곳엔 동네 주민을 위한 벤치와 운동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벤치로 향해 몸을 앉힌 채현은 힐끔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옆자리에 앉지 않고 맞은편 운동 기구에 걸터앉았다. 그 덕에 시선이 엇나감 없이 바로 얽혀 들었다. 얼마간 시선을 흘리던 이는 비스듬히 고갤 기울이며 설핏 웃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때도 너는 나를 봤더라고.”
뜻 모를 눈빛이 저녁 바람에 몸을 싣고 와 닿았다. 나지막한 음성이 함께 들려서일까. 멋대로 순간을 해석해 버릴 것 같았다. 괜히 긴장이 된 채현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감쳐물었다.
“계속 네 생각을 했어.”
일순 내려앉았던 침묵은 서윤채가 재차 입을 열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네가 없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
“…….”
“보통 친구를…… 이렇게 생각하진 않잖아.”
긍정도 부정도 쉬이 내비칠 수 없었다. 그 한마디 대답 뒤에 따라올 상황이 그려지지 않아 머릿속이 삽시에 뒤엉켰다. 객관성을 잃어버린 머리로는 그의 말뜻 하나 해석하기 힘들었다.
“근데 내가 그러고 있더라고.”
“무슨…….”
“그냥, 그랬다고.”
그에 반해 서윤채는 몹시도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나지 않은 사이 생각 정리를 마치기라도 한 양 평온해 보였다.
“솔직히 말할게. 네 고백 듣기 전까지 너 연애 상대로 본 적 없어. 근데 이제 그렇게 봐 보려고.”
“윤채야.”
“너랑 내 사이에 생긴 거리가 싫고… 네가 계속 보고 싶은 거면 그럴 자격 있는 거 아닌가.”
담담하게 들려온 서윤채의 말이 고백이라도 되는 듯해 혼란스러워졌다. 그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단 현실감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당장 너랑 똑같은 마음이라 얘기는 못 해. 아니, 하면 안 되겠지.”
“…….”
“내가 뭐라고 네 감정을 함부로 판단하겠냐. 그냥, 지금 나는 이렇다고 말하는 거야. 쉽게 연애하잔 소리 꺼내는 게 너한테 더 못 할 짓이잖아. 나 그러긴 싫다.”
“나는, 나는 아니야. 나는 그냥…. 마음 접을 거야.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연애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유한한 감정에 어울리다 소중한 일상이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결말에 정돈되지 않은 말이 다급하게 튀어나왔다.
“왜 굳이 접으려고 해?”
“그거야 당연히…! 너랑 계속… 보고 싶으니까 그렇지….”
왜 이런 말까지 꺼내게 하는 걸까. 태연한 그의 모습에 울컥하며 큰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도 잠시, 낭패감이 찾아들어 채현은 입술을 짓씹었다. 정작 서윤채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안 접으면 못 봐? 난 너 계속 볼 건데.”
“그런 건… 헤어지면 끝이잖아.”
“이게 시작도 하기 전에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기가 차다는 듯 예와 같이 비뚜름히 웃은 그가 바로 말을 맞받아쳤다.
“그렇게 따지면 친구도 마찬가지지. 싸우면 끝인 관계인데. 다를 건 또 뭐야?”
“우리 여태 친구였고, 지금처럼만 지내면….”
“그래서 네 마음이 조금은 편했어? 친구든 애인이든 하기 나름이야.”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친구든 애인이든 다를 게 없다고……. 완전히 다른 관계로 봤던 채현으로선 그저 어지럽기만 했다.
욕심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려 했다. 지금껏 지내왔듯 친구로 계속 함께하고 싶다 말하려 했고. 한데 조곤조곤 내려앉는 그의 음성에 말문이 틀어막혔다.
마음이 편했느냐고. 한시도 편한 적이 없었다. 자격 없는 애정을 품었다 생각해 늘 죄를 짓는 기분이었고. 혹시라도 들키면 어떡하지 마음 졸이는 날의 연속이었는데.
아……. 숨죽여 침음한 채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울컥 치솟은 감정 덩어리가 목울대를 아프게 두드렸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을 깜빡였다간 눈물이 떨어질 듯해 제 허벅지만 노려보았다.
“어차피 짝사랑이었고…….”
애써 감정을 삭이며 말을 흘리는 동시에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성큼 곁으로 다가온 이는 몸을 굽히고 앉은 채로 떨어지는 시선을 잡아챘다.
“뭘 그렇게 겁내.”
빤히 마주쳐 오는 그 눈빛은 달래기라도 하듯 다정했다.
“말했잖아. 나는 너 계속 볼 거라고. 그냥 한 소리 아니야.”
“…….”
“내가 싫어진 게 아니면 그게 뭐든 숨기려 애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도 그럴 테니까. 다 해 보고 결정해도 안 늦어.”
나지막한 속삭임을 끝으로 씩 웃는 서윤채를 보며 채현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네 시간 나한테 좀 써 주라.”
그의 말이 꼭 마음껏 좋아해도 된단 소리로 들렸으므로.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