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Runaway (3/10)

03. Runaway

마음을 인정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한 사람에게 쏟는 시간이 늘어날 뿐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시선을 흘렸던 때와 달리, 사고를 거쳐 서윤채를 살핀단 차이가 있긴 했지만.

온전한 감정으로 마주한 일상에선 새로운 것이 보였다. 고작해야 의식의 한 꺼풀. 눈을 가리던 껍데기를 벗었을 뿐인데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일상 구석구석을 찾아들었다. 이를테면, 서윤채를 둘러싼 자신의 감상 따위가.

이 정도로 많은 시간을 서윤채를 바라보는 데 할애해 왔구나. 고운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는데 웃을 때 특히 더 예뻤구나……. 느닷없이 생겨난 애정이 알게 한 건 지난 13년간 의식해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그 때문에 채현은 태연하게 반응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서윤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으니. 서윤채가 자연스레 몸을 기대 오거나 다른 이들과 웃고 떠들 땐 특히 더 그랬다. 뜻대로 되지 않는 신경은 그의 앞에서 언제나 바짝 예민해졌다.

“서윤채!”

계속 이런 상태면 곤란한데……. 멍하니 이어 가던 생각을 끊은 건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소리를 좇아 채현의 고개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시선 끝엔 친구에게 공을 패스하며 달리는 서윤채가 있었다. 흰 티셔츠 하나만 입은 그는 날렵하게 잘도 뛰어다녔다.

“야야야!”

“자리 잡아!”

운동장 한복판에선 축구공을 따라 멎지 않는 소란이 일었다. 세월을 품은 듯 잔뜩 해어진 동그란 물체는 사람들 발에 채며 통통 굴러다녔다. 이리저리 튀던 꼬질꼬질한 공은 곧이어 서윤채의 발끝에 닿았다. 뻥 소리와 함께 공이 높게 떠오른 건 그 직후였다.

“서윤채 또 승부욕 불붙었네.”

골대를 빗맞고 나온 공에 아쉬워하는 서윤채의 모습에 입매가 풀어졌다. 허리께를 붙잡고 숨을 고르던 그는 이내 다시 발을 내디뎠다.

채현은 사과 맛 팩 음료에 빨대를 꽂아 마시며 서윤채를 응시했다. 평소라면 함께 운동장을 누볐을 테지만 오늘은 계단에 앉아 구경하길 자처했다. 이편이 그를 바라보기 용이했으므로.

“…….”

추워서 싫다. 땀나서 싫다. 대체로 심드렁히 반응하던 그가 공을 차는 꼴을 볼 줄이야. 본인이 내킬 땐 빼지 않고 곧잘 어울리는데 그게 바로 오늘인 듯했다. 매점 내기를 운운하며 그를 붙잡아 준 이들에게 내심 고마워졌다.

여름날의 하루는 여느 계절보다 선명한 편이었다. 파란 하늘. 쨍한 햇볕. 교정을 따라 드리운 녹음. 살갗을 훑는 열기. 하물며 그림자처럼 들러붙는 더위까지도.

무엇 하나 흐릿한 것이 없었는데, 그중에서 서윤채가 가장 선명했다. 우르르 옮겨 다니는 이들 틈에서 이질적이다 여겨질 만큼.

“이게 가능한 얘기였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지금 제 꼴이 딱 그 모양새였다. 뒤늦게 품은 애정에 어쩔 줄 모르고 서윤채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권채현.”

문제는 일방적인 눈빛이 상대와 맞닿을 때였다. 제 감정을 받아들인 후, 눈길이 얽히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표정이 어색해지고 몸이 굳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서윤채를 보며 일정했던 호흡이 무너지는 지금처럼.

“땡볕에서 뛴 건 난데 왜 네가 빨개져? 열 있냐?”

“더워서 그래. 더워서.”

무슨 반응이 이렇게 곧이곧대로 튀어나오는지. 속으로는 이미 열댓 번도 더 좌절한 채현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손부채질하며 시선을 분산시키려고도 해 봤지만, 목덜미 위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런 상태로 친구는 무슨……. 지금 상황에선 죽도 밥도 안 될 것이 분명했다. 현상 유지를 간절히 바라는 채현은 괜히 하하 웃어 보이며 머리를 팽팽 굴렸다. 뭐든 간에 방법이 필요했다.

“그럼 그냥 올라갔어야지 미련하게 왜 여기 죽치고 앉아 있어. 또 열 올라서 쓰러지기 전에 신경 좀 써라.”

“언제 적 얘기를……. 누가 들으면 시도 때도 없이 쓰러지는 줄 알겠다. 그냥 너 얼마나 잘하는지 보려고 있던 거거든. 있을 만하니까 있던 거고.”

“어련하시겠어.”

픽 웃으며 맞받아친 서윤채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릴 쓸어 넘겼다. 쏟아지는 빛줄기가 뜨거운지 ‘존나 덥다.’ 중얼거리며 시선을 옮겼다. 느릿하게 흐르던 눈빛은 들고 있는 팩 음료에 닿은 뒤 멈춰 섰다.

“그래서 감상 소감은? 너무 잘하디?”

“골대만 맞히던데.”

“야박한 거 봐라. 그 전에 골 넣은 건 취급도 안 해 주네.”

그는 서운하다는 듯 꾸며 낸 투로 이야기하며 팔을 뻗었다. 손에 쥔 음료를 제 것인 양 자연스레 가져가더니, 꺼리는 기색 없이 빨대를 입에 물고 마셨다.

“어, 야. 빨대, 그거 내가 입 댄 건데…….”

태연한 그의 모습에 당황을 떠안는 건 채현이었다.

“왜. 나 더러워?”

“아니, 누가 그렇대? 그냥, 쫌 그래서 그런 거지. 너 원래 이런 거 싫어하잖아.”

“친구끼리 뭐 어떠냐.”

“친….”

“이거 내가 다 마신다. 하나 사 줄게.”

말을 맺은 그는 제법 갈증이 났던 모양인지 남은 액체를 단번에 비워 냈다. 채현은 멍하니 붉은 입술 새에 물려 있던 흰 빨대가 풀려나는 걸 바라보았다.

지금 이건…… 간접 키스인가.

손아귀에서 구겨진 팩으로 시선이 떨어졌다. 제 모습을 잃은 물체는 쓰레기라 보는 편이 더 마땅했다. 그런데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째서인지. 설마하니 저 빨대를 다시 사용하는 걸 그리기라도 했던 걸까.

미친……. 사춘기 중학생도 하지 않을 상상을 이어 가던 채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닌데, 이제 와 문란한 상상을 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야, 매점….”

“악!”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이 조악하고 변태 같은 생각을 서윤채에게 들키면 어떡하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채현은 제 팔을 툭 건드리는 손짓에 깜짝 놀라 소리부터 내질렀다. 상대는 별 이상한 걸 다 봤다는 듯 황당한 기색을 내보였다.

“혹시 주기적으로 조금 그래? 그런 거면 말 좀 해 주라. 나 놀란다, 채현아.”

“쏘리……. 아니, 네가 갑자기 쳐서 그런 거잖아. 말로 해, 말로.”

“하여간에 까다롭기는. 매점 갈 거니까 그대로 돌아서 앞으로 가. 됐지. 출발.”

손차양을 하고 고갤 가로젓던 서윤채가 움직이라는 듯 턱짓했다. 채현은 열이 오른 뺨을 매만지며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몇 걸음 간격을 두고 들리는 발소리에 맞춰 쿵쿵 심장이 뛰었다. 뜨겁게 쏟아지는 햇살 탓인지 붉게 달아오른 뺨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도착한 매점에서 서윤채는 음료수 하나를 더 얹어서 사 주었다. 양손에 음료를 들고 선 꼴을 보며 ‘시원한 거 마시고 진정 좀 해?’ 놀리듯 말하기도 했다. 매점 아주머니와 살갑게 인사한 그는 제 몫의 포도 맛 탄산음료를 마시며 먼저 발을 내디뎠다.

“권채현 하나 내 거임?”

“네 건 자판기에 있더라. 가서 많이 마셔.”

“아, 왜 싸가지가 서윤채를 닮아 가지?”

채현은 구시렁대는 정유빈을 가볍게 무시하고 제자리에 앉았다. 새 짝꿍이 된 반장은 앞자리 친구와 떠들다가 반색하며 맞이해 주었다.

“채현아, 너 얼굴 빨갛다. 많이 더워?”

“괜찮아. 밖에 있다 와서 그래.”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봐. 너 금방 추워질걸? 이 자리 냉방병으로 가는 지름길이야.”

“추워? 나 동복 체육복 있는데 줄까? 빨아서 넣어 둔 거라 냄새도 안 나.”

카디건을 여민 그녀는 얼어 죽기 직전에 부탁하겠다 말하며 다시 친구와 이야길 나눴다. 어깨를 으쓱인 채현은 서윤채가 사 준 음료수 하나에 빨대를 꽂고 쭉 들이켰다. 시선은 또 자연스럽게 서윤채가 앉아 있는 쪽으로 흘렀다.

“…….”

그는 고갤 살짝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짝꿍의 부채질을 받고 있었다. 운동장에 있을 때만 해도 땀을 흘려 머리가 엉망이었는데, 그새 뽀송뽀송해져 실실대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 만족스럽게 떠오른 미소. 보기 좋게 솟은 양 뺨. 희고 곧은 목선……. 천천히 눈길을 옮기며 바라보던 채현은 불현듯 갈증이 나 시선을 거두고 음료를 마셨다. 이 조급함의 모체를 이제는 모르지 않아 기를 쓰고 모조리 삼켜 냈다.

입 안을 적신 단 음료의 끝 맛은 씁쓰레했다. 품지 말았어야 할 애정의 끝을 닮기라도 한 양. 채현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며 빨대를 질근질근 씹었다.

서윤채가 좋다. 지금도 그를 향하려는 주의를 최선을 다해 붙들고 있어야 할 만큼. 앞으로의 삶에서 서윤채를 빼는 일 따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좋았다.

“…….”

이제 막 숨을 튼 애정은 작은 자극에도 쉬이 불이 붙었다. 그 불길이 잡아먹는 건 평온하길 바라는 일상인지라, 불씨를 잡고자 마음먹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순간의 욕심을 채우고자 굳건할 관계를 버릴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서윤채를 좋아한다. 그렇기에 그를 욕심 내지 않는다.

빨리 붙은 불은 쉽게 사그라들기 마련이니, 무럭무럭 자라 증식하기 전에 없애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 봤자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고 오직 자신만이 눈치챈 마음이었으니.

“…….”

채현은 잇자국이 엉망으로 남은 빨대를 뱉으며 홀린 듯 옆을 돌아보았다. 마침 상대도 시선을 옮기던 중이었는지 허공에서 눈길이 맞부딪혔다.

“더 사 줘?”

무심히 응시하던 그가 손안의 음료수를 힐끗대며 물었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갤 저어 보이자 짧게 웃곤 고갤 돌렸다. 제게서 떨어진 시선을 대신하듯 바라보던 채현 역시 머지않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살랑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창문을 건드리길 반복했다.

가만히 지켜보니 하릴없이 휩쓸리는 모양새가 꼭 자신과 비슷해 채현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나무가 잠잠해지는 순간은 바람이 멎을 때뿐이었다.

그러다 시선을 거둘 때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감정의 근간인 서윤채에게 영향을 받지 않으면 이 애정 또한 고요해지지 않을까, 하는.

“……아.”

작은 가정은 금세 몸집을 부풀렸다. 사고의 흐름을 따라 결론도 선명해졌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와 다름없다 생각했던가. 그렇다면 다시 빠지기 전에 물가에서 멀어지면 그만이었다. 마음이 한순간 결을 달리한 게 아니듯 뒤바뀐 일상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할 터였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의 평온한 일상을 위한 초석이 되리라.

길게 이어진 생각에 마침표를 찍은 채현은 홀로 굳건히 다짐했다.

“…….”

서윤채와 거리를 둬야겠다고.

* * *

달칵. 고요하게 깔린 아침의 침묵을 깨며 방으로 들어온 서윤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교복 차림을 한 그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털며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무심하기만 하던 얼굴 위로 표정이 떠오른 건 징, 핸드폰 알림이 울린 뒤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황당하단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화면을 빤히 응시했다.

[권 : 먼저가ㅎ;ㅠ] 오전 7:30

톡. 톡. 느릿하게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 울려 퍼졌다. 생각을 이어 나가듯, 혹은 못마땅함을 담은 듯 무의식적인 손짓이 이어졌다. 고갤 삐딱하게 기울인 서윤채는 메시지 속 활자가 채현이라도 되는 양 씹어 먹듯 바라보았다.

“아…….”

낮게 목을 울리며 실소를 흘린 서윤채는 채팅창을 위로 휙 올려 보았다. 며칠 동안 쌓인 대화 내용을 보는 동안 헛숨을 닮은 웃음이 연달아 삐져나왔다. 그런데도 화면을 응시하는 눈가는 웃음기 하나 없이 버석 메말라 있었다. 그저 기민하게 내용을 뜯어 살필 뿐이었다.

[권 : 지금일어남ㅠ] 오전 8:02

[권 : 나동아리약속있어서먼저간다집조심히가] 오후 6:21

[권 : 지금일어났어먼저가] 오전 7:55

[권 : 나오늘정유빈이랑피시방갔다갈게너먼저집가] 오후 5:10

오후 5:12 [같이 안 가줘도 돼?]

[권 : 내가앤가ㅡㅡ됐어혼자갈거야빠이] 오후 5:30

대화 목록은 생존 알림용 내지 행선지 보고용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또 뜻 모를 행동을 하는 오랜 친구 때문에 기가 막혀 서윤채는 재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랄을 안 한다더니 알은척까지 안 할 줄이야.

아무래도 때아닌 사춘기가 이제야 그에게 찾아든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처럼 행동할 리가 없었다.

권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일 정도로 오래된 관계였다. 그 누구보다 그에 대해 잘 알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평소랑은 다르다고. 분명 자신이 놓친 무언가가 있다고.

그리고 권채현이 지금 자신을 피하고 있다고.

“관심 좀 가져 달라고 사고 치는 개도 아니고.”

사실 사고라 부를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심기가 썩 편하지 않아 그와 다름없이 느껴졌다. 권채현이 자신을 피하는 건 확실한데 이유를 모른다니. 그게 뭐가 됐든 확실하지 않은 걸 싫어하는 서윤채로선 몹시 거북한 상황이었다.

요즘의 그는 학교에서도 다른 친구와 어울리거나 쌩하니 옆 반으로 향했다. 워낙에 곰살맞고 어지간하면 미워하기 힘든 성격이니 모두와 잘 어울리는 건 자신도 이해하는 바였다.

문제는 중간에 생략된 과정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함께 놀자고 당연히 말했을 이가 독립을 자처했다. 생전 그런 적이 없는 이가 지금처럼 행동하니 자연히 생각이 튈 수밖에.

이거야 원……. 원인 없이 결과만 대뜸 맞닥뜨린 듯해 황당하기만 했다. 직전에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금 확인한 서윤채는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히 올렸다.

“이게 어디서 구라를 쳐.”

진짜 늦게 일어났을 땐 연락을 남기지도 않던 주제에. 함께한 시간만 13년이다. 작금의 행동에 어떠한 의도가 있다는 것쯤이야 훤히 보였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심심할 틈을 안 주고 일을 치는 권채현 때문에 뒷골이 땅겼다.

“피할 거면 제대로 피하든가. 똑바로 하지도 못할 거면서.”

피해 다니기 바쁘신 분이 본인 행선지는 또 꼬박꼬박 보고를 했다. 더욱더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이유였다. 얘는 지금 나랑 뭘 하고 싶은 건지. 쯧 혀를 찬 서윤채는 답장을 보내는 대신 고민 없이 전화를 연결했다.

통화 연결음은 끊길 줄 모르고 이어졌다. 지루하게 계속되는 기계음에 서윤채는 꼬아 올린 다리를 까딱였다. 발끝에 매달린 실내용 슬리퍼가 툭 떨어지려던 찰나, 듣기 싫은 소리가 멎고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 ……여보세요?

잠기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음성이었다. 전화가 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도 느껴졌다. 서윤채는 제 추측이 맞지 싶어 입술을 적시며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슬리퍼를 응시했다.

“이제 일어났어?”

― 어? 어……. 어제 늦게 자서. 미안. 너 먼저 가.

“그래.”

통화는 짧게 끝났다. 애초에 이야기를 나누고자 건 것이 아니니 당연했다. 퍽 다정히 말을 흘린 서윤채는 물기가 거의 사라진 머리를 헝클이듯 정리했다.

“아, 이 새끼가…….”

그러다 불현듯 차오른 괘씸함에 검게 물든 화면을 노려보았다. 대체 뭐 때문에 지랄하는지 모르겠는데 답답한 상황은 딱 질색이었다. 서윤채는 채현을 어떻게 털지 생각하며 가방을 챙긴 뒤 방 밖으로 나섰다.

“윤채야, 아침 먹고 가.”

때마침 거실에 있던 엄마는 그를 보곤 어서 오라 손짓했다. 딱히 밥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면 홀로 식사하실 테니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식탁엔 김이 솔솔 나는 콩나물국과 흰 쌀밥, 몇 가지 반찬이 놓여 있었다.

“속이 든든해야 공부도 잘되지.”

“엄마 아들 원래 공부 잘해. 얼른 드세요.”

“그래.”

한 숟갈 크게 퍼먹은 서윤채가 여상히 대꾸하자, 대견하다는 듯 웃은 그녀도 손을 놀렸다. 서윤채는 심심하게 간이 된 반찬을 골고루 맛보며 엄마를 살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갑자기 쓰러지는 경우도 있어 주의를 기울이는 게 습관이 됐다. 먹는 양이 적긴 하지만 곧잘 드시는 걸 보니 몸 상태가 괜찮은 듯했다.

“요즘 많이 덥지? 힘들진 않고?”

밥 위에 반찬이 놓이는 동시에 질문이 들렸다. 서윤채는 엄마와 눈을 마주치며 괜찮다는 뜻으로 고갤 끄덕여 보였다.

“학교 에어컨 틀어 줘서 괜찮아. 버스도 시원하고. 엄마 아들 튼튼해. 걱정하지 마.”

“그래.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우리 아들 고생하는데……. 엄마가 다 해 줄게.”

“샤브샤브 먹고 싶어요.”

제 엄마가 곧잘 먹던 메뉴를 자연스레 답한 서윤채는 밥그릇을 싹 비웠다. 뭐라도 하나 더 해 주고 싶어 하는 걸 알기에 무작정 됐다고 하는 것보단 이편이 나았다.

“주말에 해 먹자. 채현이도 오라고 해. 요즘은 잘 안 오네?”

식기를 정리하던 서윤채는 잠시 멈칫하다 마저 자리를 깨끗이 치웠다.

“데려올게.”

“자주 놀러 오라고 해. 옛날엔 매일 오더니……. 엄마가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줘.”

“네.”

하여간 권채현, 싫어하는 사람이 없지. 저도 모르는 사이 미소 띤 서윤채는 설거지를 끝내고 주변까지 정돈한 뒤 밖으로 나왔다. 일찍 일어난 덕에 시간은 아직 여유로웠다.

햇빛이 길게 비친 거리는 따사로웠다. 한여름임을 알리듯 화창하고 맑은 날씨였다. 서윤채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채현을 잡아다 불게 할 방법을 떠올렸다. 학교로 향하는 내내 생각을 해서 그런지 등굣길이 심심하진 않았다.

권채현은 9시가 가까워진 시간에 교실로 들어왔다.

핸드폰 게임을 하던 서윤채는 일부러 채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느 때라면 바로 얽혔을 시선이 빗나가고 뜻하지 않은 기다림이 이어졌다.

시선은 꽤 오래 책상을 두드리며 기다리고 나서야 맞닿았다. 서윤채는 바로 눈을 돌리려는 그를 붙잡아 두듯 계속 직시했다. 잠시 당황하던 상대는 이내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린애 같은 인사를 남긴 채현은 풀썩 주저앉아 제 짝꿍과 떠들었다. 서윤채는 시선을 떼는 대신 턱을 괴고 그를 눈에 담았다. 자신은 쌩까고 웃어 대는 꼴에 어이가 없다가도, 또 그 모습이 보기 싫은 건 아니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권채현은 방실방실 잘도 웃어 댔다. 눈꼬리가 위로 솟아 고양이처럼 생긴 주제에 하는 짓은 시골 똥개랑 판박이였다. 멀거니 보던 서윤채는 피식대며 시선을 거뒀다. 괘씸해서 잡아다 족치려 했는데 웃는 꼴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 탓이었다.

점심시간에 간식 하나 사 먹이고 물어보면 되겠지. 서윤채는 탈탈 털 계획 대신 회유로 방향을 틀며 오전을 흘려보냈다. 제법 평화로웠던 오전이 폭풍전야인 줄도 모르고.

“나 오늘 제윤이랑 밥 먹을게.”

“신제윤? 갑자기?”

“어. 오랜만에 같이 먹기로 했어. 이따 보자.”

힐끔 눈치를 보던 이는 꼬리를 말고 재빠르게 도망쳤다. 아무 말 없이 그 뒷모습만 노려보던 서윤채는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살살 눈치 보면서 피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인지. 쫓아와서 잡아 달라는 건가 싶었다.

“서윤채 표정이 왜 그래?”

“왜.”

“아니, 그냥. 오늘따라 뭔가…….”

“원래도 더러운데 더 더럽다. 인상 좀 펴라.”

말을 흐리는 배주희 대신 정유빈이 툭 내던졌다. 서윤채는 채현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어 ‘왜. 나 기분 좋은데.’ 중얼거리곤 급식실로 향했다.

일단 권채현도 밥은 먹어야 할 테니 급식실에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차분히 문제의 원인을 물을 생각이었다. 급식실 출구에서 저를 보자마자 도망치는 권채현만 아니었더라면.

“저 새끼가 진짜.”

계단을 후다닥 튀어 올라가는 꼴에 서윤채는 이성 한 가닥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저걸 그냥 놔두면 안 된다. 승부욕인지 뭔지 불같은 마음이 치달아 반대 방향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권채현의 행동반경이야 뻔했다. 다른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복도를 돌아서 가니 주위를 힐끗대며 걷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서윤채는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쯤, 상체를 굽히고 채현의 어깨 쪽으로 고갤 숙였다.

“뭐 해? 누구 찾아?”

“아, 깜짝…!”

화들짝 놀란 채현이 뒤를 돌아본 동시에 그 시선을 잡아채고 낮게 이야기했다.

“아니면 피하는 건가.”

서윤채는 당황하는 채현을 보며 볼 안쪽을 혀로 훑어 내렸다.

상대는 말이 없었다.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서윤채는 답을 재촉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 정적과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채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누가 봐도 ‘나 지금 죽겠어요.’ 싶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정면 한 번, 복도 창문 한 번, 돌아다니는 친구 한 번 번갈아 곁눈질하며 주춤거리는 꼴만 봐도 훤했다. 서윤채는 어디 한번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입을 다물고 쳐다만 보았다.

“어……. 어, 상훈아!”

혀를 내어 입술을 적시던 채현은 곧이어 구세주라도 만난 양 두 눈을 빛냈다. 그 시선을 좇아 바라본 곳엔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녀석이 있었다.

“여기 서서 뭐 하냐, 둘이?”

“안녕. 바빠 보이는데 잘 가.”

채현이 입을 열려던 차에 나타난 그는 불청객이었다. 서윤채는 안 하느니만 못한 인사를 남기며 어서 꺼지라는 듯 턱짓했다.

“점심시간에 바쁘긴 뭐가 바빠. 야, 시간 많이 남았는데 공 차실?”

“어, 그럴까? 서윤채, 나 축구….”

살길을 찾은 사람처럼 화색이 된 채현은 이상훈의 손목을 붙잡고 자리를 뜨려 했다. 이 새끼가 진짜……. 또 도망칠 궁리를 하는 모습에 서윤채는 헛웃음을 흘렸다.

“야.”

“응.”

채현은 한 마디 부름에 얌전히 멈춰 섰다. 본인이 생각해도 지금 행동은 좀 아니다 싶었는지 기가 살짝 꺾인 채였다.

“나 두고 가려고?”

“아무래도 안 되겠지…?”

“가고 싶으면 가. 같이 가면 되지.”

이대로 순순히 넘어가긴 글렀다는 걸 알아챘는지, 채현은 다음을 기약하며 이상훈을 보냈다. 방해꾼이 사라지고 오롯이 둘만 남자 다시 눈을 굴리며 눈치를 봤다.

서윤채는 그 꼴에 이제 화가 나기보단 황당하고 웃음이 났다. 채현이 때때로 뇌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나사가 많이 풀린 듯했다. 최근 들어 조금 더 심해진 듯했고. 대체 이러는 연유가 뭔지 감도 안 잡혔다. 심심해서 이러는 건 분명 아닐 텐데.

“…….”

생각을 이어 가며 살피는 내내 채현은 날강도를 앞에 둔 사람처럼 행동했다. 워낙에 솔직하고 꾸밈이 없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편이었는데,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 이처럼 굴기 바빴다.

신이 날 땐 눈 밑 살이 도톰히 올라오도록 웃는 이가 지금은 눈매를 굳히고 있었다. 예전부터 거짓말엔 재능이 없더니, 하여간 뭐 하나 숨길 줄을 몰랐다. 넉살은 잘 부리지만 능청과는 거리가 먼 친구는 곤란해 죽으려 할 뿐이었다.

서윤채도 그 성향을 알기에 차분히 일을 해결하려 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부리나케 도망가는 꼴을 보이지만 않았어도. 인내와 아량은 그 모습을 본 순간 바닥을 보였다. 애초에 자신만 피해 다니는 게 달가운 일도 아니거니와 그를 용인할 만큼 제 성격이 좋지도 않았고.

“겁대가리 없는 새끼가 진짜…….”

낮게 중얼거리는 동시에 채현이 눈에 띄게 움찔댔다.

“손은… 손을 왜 들어? 설마 때리려고?”

“뭐?”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절로 목소리가 튀었다. 눈가로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려 했을 뿐인데, 지레 찔린 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내가 널 때리겠어?”

지난 13년 어디에도 진심으로 채현을 때린 순간은 없었다. 기껏해야 속 터지는 언행을 할 때마다 이마를 손으로 튕긴 것이 전부였다.

“얘가 아직도 날 모르네.”

무슨 생각을 해야 때린다는 경우를 떠올릴 수 있는지. 황당하다 못해 힘이 빠지는 말이었다.

“뒤로 걷다 처자빠지지 말고 그냥 얌전히 이리 오지?”

말은 또 잘 듣는 이는 순순히 발을 붙이고 섰다. 찔끔찔끔 잘도 움직였는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채였다. 멀어진 거리를 보던 서윤채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을 남겨 두고 멈춰 서서 바라보니 채현도 위를 올려다봤다.

“……화났어?”

말간 얼굴을 눈에 담다 한숨을 쉬니 그게 신호라도 된 양 채현이 소리를 냈다. 기분을 살피는 게 분명한 물음이었다. 화 돋우려 이런 짓 하는 거 아니었냐고 말하려다가도, 순해 빠진 눈빛을 보면 있던 분노도 숨을 죽이는 기분이었다.

“어때 보이는데.”

투지를 잃은 서윤채는 채현의 손목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힐끗 눈길을 던져 바라본 이는 맞닿은 손목만 빤히 보다 웅얼댔다.

“개빡쳐 보이는데…….”

“틀린 말은 아니고.”

대답과 동시에 상대의 손목이 움찔 떨렸다. 서윤채는 그를 다시 고쳐 잡으며 말을 이었다.

“또 그렇지도 않고.”

“너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갔는데.”

“나만 보면 도망치는 새끼 앞에서 웃을까, 그럼.”

어떤 상황에서든 꼭 할 말은 하던 채현은 지금도 구라 치지 말라는 듯 지적을 했다. 그에 지지 않고 직설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즉시 입을 합 다물었지만.

“오늘은 안 봐줄 거니까 할 말 생각해 둬라. 너 괘씸해서 안 되겠다.”

“뭘 또 그렇게까지…….”

“아니면 또 구라 치고 토껴 보든가.”

서윤채는 채현이 도망치길 포기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약한 성질머리를 드러내듯 괜히 한 번 더 말을 얹었다.

대화 없이 걷다 향한 곳은 텅 빈 영어 교실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서윤채는 ‘앉아.’ 말하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거 혹시 심문이야?”

“너 죄지었어?”

“아니…?”

끝 음이 묘하게 위로 튄 확신 없는 대답이었다. 채현은 우뚝 서서 직전까지 잡고 있던 손목 부분만 만지작댔다. 사고 친 개들이 꼭 저러는 법인데……. 꼬아 올린 다리를 까딱이던 서윤채는 일단 앉으라고 턱짓했다.

“밥은.”

“어?”

“밥은 다 먹었냐고.”

“어, 응.”

채현은 왜 이런 걸 묻지 싶은 얼굴로 답하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족치는 건 둘째 치고, 굶은 애를 쥐 잡듯 잡는 건 마뜩잖아 신경이 쓰였던 서윤채는 한결 마음 놓고 그를 살폈다.

그 뒤로는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소리 없는 추격이 벌어졌다. 한 명은 빤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한 명은 최선을 다해 도망치기 바빴다. 긴 대치를 끊은 건 불시에 울린 핸드폰 진동이었다. 화면을 확인한 채현은 ‘잠시만.’ 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어, 제윤아.”

같이 밥 먹고 전화할 일이 있나. 서윤채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곱씹으며 잠자코 그를 지켜봤다.

“아냐. 너도 놀랐지. 어? 주말에? 어……. 될 거 같긴 한데…….”

대화 내용을 들어 보니 약속을 잡는 모양이었다. 길어지는 통화를 두고 보던 서윤채는 쯧 혀를 차며 채현이 앉은 의자 다리를 가볍게 톡 찼다.

“야.”

저도 모르는 새 미간을 구긴 그는 채현을 향해 상체를 숙인 뒤 핸드폰을 빼앗아 왔다. 당황한 채현이 다시 빼앗으려 했지만, 한 손으로 제지하며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 ……스트레스 풀리니까. 괜찮으면 같이 가자. 어차피 나도 가려고 했거든.

“야. 나중에 다시 전화해.”

― 서윤채?

“어. 끊어.”

― 채현이는?

가차 없는 대꾸에도 신제윤은 주눅 드는 기색 하나 없이 맞받아쳤다.

“권채현 지금 바빠. 나랑 얘기하느라.”

핸드폰 너머 상대가 애타게 찾는 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만 뜯고 있었다. 아랫입술이 붉게 변해 상처가 나려는 꼴을 보던 서윤채는 채현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러는 사이 신제윤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안다는 양 잔소리를 해 댔다.

― 성질 앞세우지 말고 살살 좀 해. 뭘 했길래 널 보자마자 사색이 돼?

“내가 알아서 해. 끊어.”

통화를 종료한 서윤채는 곧장 채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방금은 내가 멋대로 행동했어. 미안.’ 제 무례를 인정하며 사과도 함께 건네자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모습과 통화 내용을 번갈아 떠올린 서윤채는 숨을 고르며 채현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하나만 묻자. 내가 너한테 잘못했어? 그래서 피해?”

문제가 있다면 바로잡으려고 물었으나 채현은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잘못한 거 없어.”

“근데 왜 날 두고 얠 찾아가.”

이런 반응이 나올 줄 몰랐던 건지 채현은 입을 달싹이다 책상만 바라보았다.

“어딜 봐. 나를 봐야지.”

그 외면에 신제윤의 말이 겹쳐져 속이 뒤틀린 서윤채는 제게서 멀어진 시선을 다시 끌어왔다.

“네 친구 서운해하는 거 안 보여?”

“……서운해?”

슬그머니 눈을 치켜뜨며 되묻는 채현의 음성은 묘하게 붕 떠 있었다. 꼭 기대라도 하는 투였지만, 다른 쪽으로 신경이 쏠린 서윤채는 그를 살필 새 없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너 요새 진짜 무슨 일 있냐?”

괘씸하게 도망친 이를 족친다는 목적은 어느새 뒷전이었다. 채현의 상태를 거듭 되새기며 심각하게 물었으나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뭔 일이 있으면 말을 해. 닥치고 도망만 다니지 말고.”

더 캐묻길 포기한 서윤채가 한숨을 내쉬자 채현은 고갤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어. 그리고 너를 피하려고 한 건 아니고…….”

“아니고.”

“내가 너를 너무 귀찮게 하는 거 같아서 쫌, 자제를…? 해 보려고 그랬던 거지, 절대 네가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어, 우리가 오랜 친구인 만큼… 계속 붙어 있으면 질릴 수도 있고….”

“뭐라는 거야.”

횡설수설 이어지는 헛소리에 서윤채는 또 한 번 터지려는 한숨을 삼켜야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작금의 상황 자체는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너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왜.”

“속 터져.”

“아니, 네가 말하라며.”

바로 대꾸하는 채현을 보며 서윤채는 한숨 대신 실소를 내뱉었다. 고갤 숙이고 바람 빠지듯 웃다가 ‘아…….’ 목을 울리며 다시 그를 응시했다.

“그래서 신제윤 앞에서 도망을 쳐?”

“어쩌다 보니…….”

“우리 채현이는 어딜 내놔도 존나 부끄러워.”

“뭔 그런 칭찬을……. 고맙다…….”

멍한 표정을 한 채현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던 서윤채는 야, 소리 내어 채현을 부르곤 그가 올곧게 자신을 보는 순간 책상 위로 엎어졌다.

“질릴 거면 진작 질렸겠지.”

뒤를 이어 채현도 자석에 이끌리듯 따라 눕던 찰나였다. 허공을 기던 시선이 완전하게 얽히고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괜히 지랄하고 다니지 말고 나랑 놀아. 나 심심해.”

그 끝에서 서윤채는 아주 곱게 웃어 보였다. 호흡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굳은 채현과 마주 보면서.

* * *

교실 안은 어두웠다. 불을 끈 공간을 밝히는 건 앞쪽에 설치된 TV 화면 불빛뿐이었다.

수업의 일환으로 영상을 시청하는 시간이었지만, 제대로 집중하는 이는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소곤소곤 떠드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이거 다 시험에 나오는 거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잘 봐.”

느슨해진 분위기를 굳히는 한마디가 떨어지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멍하니 있던 채현도 느릿하게 화면을 응시했다. 여전히 정신은 멀리 흘려보낸 채였지만.

저명한 외국 학자가 열렬히 소릴 냈으나 그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이미 머릿속이 서윤채의 목소리로 가득 찬 상태였으므로. 벌써 며칠이나 지난 일인데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 순간 서윤채가 뭐라고 이야기했던가.

‘그러니까 괜히 지랄하고 다니지 말고 나랑 놀아. 나 심심해.’

웃는 얼굴로 그런 말을 했더랬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마저 아깝다 생각될 만큼 곱게 웃으면서. 지금껏 서윤채가 그리 웃은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를 향한 감상이 달라져서인지……. 이유가 뭐가 됐든 오래도록 잊지 못할 모습이라 확신했다.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거리를 둔 것인데, 정작 얻은 건 길이길이 곱씹을 기억이었다. 본래의 목적과 계획은 그 기억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네 친구 서운해하는 거 안 보여?’

매사 아쉬울 것 하나 없이 구는 서윤채가 직접 서운함을 입에 올렸다. 농담이 반쯤 섞인 진담이었을 테지만 그 한마디의 효과는 컸다.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을까. 우습게도 자신은 그 순간 조금 기쁘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

물론 찰나의 반짝임과 같은 기쁨을 만끽한 후엔 반성을 해야만 했다. 제 감정을 죽이는 데 급급해 서윤채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고.

그런 상황을 막고자 최대한 평소처럼 보이게 노력하며 피한 건데 들통이 날 줄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그의 심경을 헤아리며 도망 계획은 깔끔히 포기했다.

유일한 해결 방법이 사라졌지만 혼란스럽진 않았다. 웃기지도 않은 일을 친 게 도움이 됐는지 제법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그 끝에 채현은 계획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해야 할 일은 끓는점을 넘은 애정의 온도를 낮추는 것뿐이고, 그건 온전히 제 몫이니 어떻게든 감당해 보자고. 특별히 손쓸 도리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책임은 져야 했으니까.

“…….”

그러한 결심과 함께 그를 향한 애정을 감기라 여기기로 했다. 어릴 적 툭하면 열이 올라 쓰러지던 그때처럼, 어찌할 틈도 없이 열에 잡아먹히던 그때처럼.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까지 버텼듯, 이 마음도 깨끗이 없어지는 순간까지 견디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면서.

……무식한 방법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

길게 이어진 상념은 미리보기 알림을 계속 띄우는 핸드폰 때문에 끊어졌다. 교탁을 힐끗댄 채현은 고개를 숙이고 몰래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유빈 : 야 오늘 급식 말고 매점ㄱㄱ] 오후 12:40 2

[배주희 : 왜?] 오후 12:43 2

[정유빈 : 젓가락이 방황할 메뉴임]

[정유빈 : 근대된장국 임연수튀김이 말이 되냐? 뭘 먹으라는 거] 오후 12:44 2

매점 빵 불티나게 팔리겠구나. 눈으로만 내용을 훑은 채현은 다시 핸드폰을 서랍 안에 넣어뒀다. 메시지를 확인 안 한 두 명은 서아영과 서윤채지 싶었다. 서아영은 맨 앞에 앉아서 열심히 영상을 보고 있었고, 서윤채는…….

“…….”

채현의 시선이 힐끔 서윤채를 향했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흥미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한 채.

그 모습에 이유 없이 웃음이 나서, 채현은 입가를 가리듯 턱을 괴며 숨죽여 웃었다. 바로 이어선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아무 일도 없던 양 고갤 돌렸다. 남몰래 그를 눈에 담아서인지 고른 호흡 사이로 떨림을 담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근엔 이런 날의 연속이었다.

꼭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윤채는 모르는 혼자만의 싸움이 일상 속에 매 순간 끼어들었다. 때로 자신은 감정을 숨기려 열심히 도망치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서윤채를 쫓는 술래였다.

특히 밤이 오면 절대적으로 후자가 되어 서윤채를 떠올렸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처음이어서일까. 채현은 여느 때보다 긴 밤을 맞이해야만 했다. 잠을 자는 대신 그를 생각하며 시간을 죽이고 대화 목록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늦은 새벽의 인사를 받으며 잠들던 어느 날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감정을 자각한 그 순간보다 훨씬 더 이전에 그를 향한 애정이 마음 한구석에 내려앉은 것일 수도 있겠다고. 그도 그럴 게 자신은 변함없이 서윤채를 좋아해 왔으니.

막연히 연애에 관심이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서윤채에게 이미 쏟아부은 상태라 그랬던 거라면……. 채현은 허무맹랑한 가정에 피식대며 서윤채를 재차 바라보았다. 그는 수업이 끝나 움직이는 이들 틈에 서서 스트레칭하다 걸음을 옮겼다.

“졸았어?”

제게 다가오는 걸 숨죽여 보던 채현은 머리를 누르며 묻는 그의 말에 평정을 가장했다. 그저 친구였을 적에 자신이 내보였을 법한 반응을 떠올리며.

“아니.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공부해야지.”

“웬일로 철든 소리를 하지?”

“나 할 때는 다 하거든.”

“아… 그치. 우리 채현이가 또 똑 부러지는 구석이 있지.”

기분이 좋은 건지 서윤채는 실실대며 장난을 쳐 댔다. 머리를 마구 헝클이다가 꾹 아프게 눌러 팔을 휘두르니 ‘알겠어, 미안. 진정.’ 하며 혼자 웃기도 했다.

“야, 빨리 매점 고.”

싱거운 대치는 정유빈의 재촉에 막을 내렸다. 서둘러 향한 매점엔 벌써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위기감을 느낀 채현도 급히 안으로 들어가 빵과 젤리를 잔뜩 샀다. 무사히 계산을 마친 것까진 좋았으나, 돌아 나오던 와중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이와 부딪힌 게 문제였다.

“헉, 씨발, 아니, 죄송합니다!”

하필이면 내용물이 교복 셔츠에 덕지덕지 묻어 입기 힘든 상태가 됐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하는 이는 1학년인지 노란색 학생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괜찮아.”

“아, 진짜 죄송합니다. 옷 주시면 제가 깨끗하게 빨아다 드릴게요. 아니면 돈이라도…….”

“아니, 진짜 괜찮아서 그래. 너 아이스크림은 어떡해? 미안. 새로 하나 사 줄게.”

“아뇨! 아뇨!”

정말 아무렇지 않아 말했을 뿐인데, 상대는 더 안절부절못하며 사과만 내뱉었다. 뒤늦게 소란을 눈치채고 다가온 서윤채는 교복을 확인하더니 씩 웃으며 1학년에게 턱짓했다.

“야. 얼른 골라. 나 아직 계산 전이니까 같이하게.”

“그래도…….”

“뭐. 아니면 여기 서서 같이 굶을까?”

굽히는 기색이 전혀 없는 서윤채의 태도에 1학년은 결국 우물우물 이야기했다. 고개를 까딱인 서윤채는 금세 물건을 사서 돌아왔다. 아이스크림을 받은 이는 거듭 인사하며 발길을 돌렸다.

뒤이어 매점 밖으로 나온 채현은 임시방편으로 셔츠를 벗어 팔에 걸쳤다. 안에 다른 티셔츠를 받쳐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왜 네가 계산해. 돈 줄게.”

“입금해. 이자 붙여서.”

하도 정신이 사나워 얼떨결에 넘어갔을 뿐이지, 서윤채에게 상황 해결을 떠넘길 생각은 없었다. 바로 돈을 보내 줄 생각으로 핸드폰을 꺼내자 헛웃음 친 서윤채가 어깨동무를 해 왔다.

“새끼야, 농담이야.”

“아니, 그래도…….”

“아까 개한테 옮았어? 뭔 그래도야. 빵이나 돌려.”

얼핏 들으면 까칠해 보이지만 속뜻은 다른 그의 말에 채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선 안 될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으니까.

무슨 일이냐 묻는 이들에게 대충 설명하며 빵을 돌린 뒤엔 곧장 교실로 돌아왔다. 직후 채현은 서윤채가 대뜸 ‘야.’ 하며 던진 체육복 상의를 뒤집어썼다. 영문을 몰라 바라보니 그는 입으라는 듯 고갯짓할 뿐이었다.

“왜? 나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되는데.”

“네 자리 에어컨 밑이잖아. 감기 걸릴 일 있냐?”

“……여름인데?”

“넌 여름 감기도 걸리잖아. 아, 좀 입으라면 그냥 입어. 말이 많아.”

걱정일까. 잔소리일까. 모호한 말을 늘어놓던 그는 더러운 성질머리를 드러내듯 인상을 구겼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에 휩싸인 채현은 머뭇거리다 결국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체육복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늘 서윤채에게서 나던 향이 묻어 있기라도 한 듯. 거기에 더해 예상과 달리 사이즈가 꽤 컸다. 어깨가 흘러내리고 품도 넉넉했다. 서윤채와 체격 차가 난다고 의식해 본 적 없었는데 지금 보니 차이가 상당했다.

“…….”

얼떨떨해져 옷자락을 매만지던 채현은 서윤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을 감쳐물었다. 상대는 한 번 꼴을 훑어보더니 픽 웃으며 본인 음료수를 마셨다.

예전이었으면 분했을 상황도 지금은 달랐다. 하나하나 자극제가 되어 심장을 내달리게 할 뿐이었다. 채현은 혀 밑에 도사린 감정의 부산물을 겨우 삼켜 내며 자리에 앉았다.

수시로 찾아 드는 혼란의 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성큼 다가왔다. 후식으로 젤리를 먹던 찰나, 채현은 자연스레 몸을 기대 오는 서윤채 때문에 호흡을 멈춰야만 했다.

“…….”

그는 편히 기댄 채 핸드폰 게임을 했다. 더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당연한 행동처럼 자주 그래 왔으니 그럴 만했다. 문제는 더는 예전처럼 반응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야. 무거워.”

혹시라도 제 떨림이 들킬까 퉁명스럽게 말도 던져 봤지만 소용없었다. 서윤채는 도리어 시비라도 걸듯 몸을 부딪치더니 젤리 하나를 집어 먹었다. 눈짓으로 그 행동을 좇다 ‘입맛에 안 맞을 텐데…….’ 생각할 때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달아.”

“원래 그런 간식이니까……. 알면서 왜 뺏어 먹어.”

“네가 하도 맛있게 먹길래. 설탕 덩어리를 씹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너 왜 나 설탕 덩어리 씹는 사람 만드냐? 입맛 존중하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반박하자 서윤채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는 호흡하듯 웃으며 손에 젤리 봉지를 쥐여 주었다.

“그래. 우리 채현이 많이 먹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린 음성은 단내를 품고 귓가를 건드렸다. 소름이 돋아 움찔 몸을 떤 채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힘을 실었다.

감정을 깨닫기 전과 다른 순간이 바로 이럴 때였다. 예전에는 하지 않던 해석을 하게 되는 지금 같은 순간들.

서윤채는 왜 나한테 자꾸 기대는 거지. 다른 애한테 기대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우린 언제부터 당연하게 이랬던 거지. 어쩌다가. 너는 왜…….

“…….”

채현은 제발 그에게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라며 젤리를 씹었다. 아까만 해도 달고 맛있던 젤리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서윤채가 기댄 어깨만 다른 온도를 띤 듯 화끈거릴 뿐이었다.

이후엔 시간이 어떻게 흐른 건지도 모호했다. 정신없이 일과에 따라 움직이니 하루가 저물고 끝을 보였다.

“아.”

집으로 돌아온 뒤 씻기 위해 옷을 벗은 채현은 서윤채의 체육복을 움켜쥐고 잠시 고민했다. 문득, 그냥, 입는 순간 좋은 냄새가 났던 체육복의 향을 계속 맡고 싶단 생각이 들었으므로.

서윤채의 흔적을 좇듯 고개를 슬쩍 숙이기도 잠시, 흠칫 놀라며 방문을 쳐다봤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툭. 힘이 빠진 손에서 떨어진 체육복이 바닥을 굴렀다.

“아! 진짜 왜 이래……. 변태 새끼도 아니고…….”

서윤채가 이 모습을 봤다면 분명 더럽다고 했겠지. 끔찍한 상황을 떠올린 채현은 사색이 된 채 욕실로 향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건 평소보다 오랜 시간 씻고 난 후였다.

얇은 여름 이불을 턱 끝까지 뒤집어쓰고 얼마간 눈만 깜빡였을까.

“아, 서윤채 존나 짜증 나…….”

입꼬리를 뚝 떨어뜨린 채현은 코끝이 찡해 오는 걸 모른 체하며 눈을 꾹 내리감았다.

서윤채가 너무 좋아서. 오늘도 그가 보여 준 다정이 좋아서. 이렇게 말이라도 해 보면 좀 덜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 * *

태어나 처음 두 발로 선 아이의 걸음이 서투르듯, 모든 처음은 어설프고 미숙한 법이다. 이는 처음 하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르익는 것이 계절뿐이면 좋았을 것을. 짙어지는 계절만큼이나 깊어진 마음은 끝을 모르고 흐드러졌다. 연둣빛 신록이 물들고 우거진 한여름, 채현은 시끄럽게 우는 매미와 들러붙는 무더위보다 서윤채의 사소한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고작해야 웃음 한 번, 손짓 한 번. 찰나에 지나지 않을 행동이지만 이성과 시선은 늘 반대로 움직였다. 마치 그리하도록 정해진 양 눈길을 주고 모든 걸 눈에 담았다. 애정은 차곡차곡 소리 없이 쌓여 마음을 내리눌렀다.

그러한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얼마 뒤, 학교는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모두는 지나간 결과를 뒤로하고 당장의 자유를 즐겼다. 채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3이 되기 전 즐겨야 한다는 말에 강원도행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으니.

“…….”

여행의 시작은 평소와 같은 대화였다. 무얼 하며 방학을 보낼까 떠들던 와중, 배주희가 ‘우리 할머니 시골집 놀러 갈래? 개도 있는데. 두 마리.’ 이야기하며 계획이 세워졌다.

‘가도 되는 거 맞아? 싫어하시면 어떡함. 우리 존나 시끄러울 텐데.’

‘친구 데리고 놀러 오라 하셨어. 근처에 강가 있어서 놀기도 좋아.’

‘그래? 그럼 또 거절 안 하지. 야. 방학하자마자 고?’

‘고. 윤채 곧 생일이잖아. 날짜 맞춰 가서 생파 하면 되겠다.’

신이 난 이들이 머리를 맞대며 일정은 금세 구체화됐다. 서윤채는 ‘왜 내 생일에 너희가 더 유난을 떨어?’ 하며 황당해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애들의 모습에 더 말을 얹지 않았다.

“…….”

다소 급조된 면이 있어도 여행은 여행이었다. 서윤채 때문에 바람 잘 날 없는 채현도 오랜만에 한껏 들떠 풀어진 얼굴을 해 보였다. 날이 화창하고 맑아 더 기쁘고 설레었다.

한참을 덜컹거리며 달린 버스는 정오 무렵 정선 시외버스 터미널에 다다랐다. 오는 내내 졸도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어 대던 이들은 도착과 동시에 살아나 무섭게 눈을 빛냈다.

“주희야, 여기!”

“삼촌!”

“안녕하세요!”

“어, 그래. 그래. 오느라 수고 많았다. 얼른 타라.”

터미널부턴 마중 나온 배주희 삼촌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수더분해 보이던 그는 아니나 다를까, 털털한 성미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 덕에 목적지에 당도할 때까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또 수십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시내와는 꽤 떨어진,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기분 탓인지 살랑 부는 바람마저 온화한 기운을 띤 듯했다.

“아이고, 먼 길 오느라 애썼다.”

배주희의 할머니 댁으로 들어서자 마당 한구석에서 놀던 백구와 누렁이가 헥헥대며 꼬리를 흔들었다. 할머니도 한달음에 달려 나와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셨다. 사람 냄새에 기뻐하던 그녀는 이내 배곯아 힘들 텐데 끼니부터 챙기자며 밥상을 차려 주셨다.

투박하지만 인심이 가득 느껴지는 밥상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마당 위 평상에 상을 차리고 둥글게 둘러앉아 먹어 더욱 그런 듯했다.

“할머님, 진짜 맛있습니다. 정선 제일가는 마스터셰프십니다.”

정유빈은 손을 한 번 놀릴 때마다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8년 인생 살며 먹어 본 것 중 가장 감동적인 맛이라며 훌쩍이기까지 했다. 그를 보던 서윤채는 ‘채현아, 저런 새끼가 군대 체질이라는 거야.’ 속삭이며 마찬가지로 한술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참 바르다.”

연신 흡족해하시던 할머니는 채현의 젓가락질을 보곤 흐뭇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제 손녀는 어릴 적부터 고쳐지질 않던데 잘도 한다며 대견해했다. 채현은 싹싹하게 굴며 나물 반찬을 집었다.

“주희도 학교에서 보면 되게 잘해요. 아, 그리고 밥 진짜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생기 넘치는 식사는 꽤 오래 이어진 후에야 끝이 났다. 눈치껏 부엌과 수돗가 위치를 살핀 채현은 애들과 함께 자리를 깨끗이 치웠다. 당장에라도 일어서려는 할머니는 서아영과 배주희가 붙어 앉아 이야기하며 말렸다.

이후엔 정유빈이 밥값도 할 겸 밭일을 돕겠다 나섰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서울 애들이 뭘 할 줄 아느냐며 강가로 내쫓겼다. 집에서 쭉 뻗은 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자 물가는 금방이었다.

“쟤넨 이름이 뭐냐?”

“누렁이는 배황식. 백구는 배백설.”

“와, 이름 센스 한번…….”

똑똑한 애들이라 도망치진 않을 거라며 함께 온 개들은 이 동네의 터줏대감이라 했다. 정유빈은 ‘황식아! 배황식!’ 외치며 눈물까지 매달고 낄낄댔다.

강가는 한산하고 수심도 깊지 않아 마음껏 놀기 편했다. 배주희와 서아영은 언제 챙긴 건지 모를 선글라스까지 끼고 사진을 찍었다. 옷 젖는 게 싫다며 밖에 있던 서윤채는 정유빈 때문에 흠뻑 젖곤 바로 뛰어들어 와 그를 빠뜨렸다.

“악!”

실실대며 관망하던 채현도 쫄딱 젖는 건 매한가지였다. 서윤채와 정유빈이 합심해 손쓸 도리 없이 퐁당 빠져야만 했다. 깜짝 놀라 허우적대니 머지않아 서윤채가 쉽게 건져 올렸다.

“시원하지?”

그는 젖은 머리를 대충 정리한 채 환히도 웃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소리 내어 웃으며 손바닥으로 물을 잘게 튀기기도 했다.

“…….”

채현은 직전의 충격보다 더 큰 자극을 느끼며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물에 비친 빛줄기에 눈이 부신데도 깜빡일 수가 없었다. 눈앞의 그가 새삼 놀라울 정도로 예쁘게 웃어서,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서. 물에 젖은 채 입매를 허물어뜨린 그는 꼭 여름을 덧입기라도 한 듯했다.

“…….”

아, 정말……. 감탄을 삼킨 채현은 혹여 제 동요가 들킬까 서윤채에게 물을 마구 뿌렸다. 그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물싸움이 벌어져 셋, 둘로 나뉘어 기진맥진할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나이를 잊고 유치하게 놀았다지만, 너무 웃어 얼굴이 아플 만큼 즐거웠기에 만족스러웠다.

“서윤채 요즘 운동해? 뭐야?”

“타고났어.”

땅거미가 내려앉은 거리를 밟고 돌아가는 길도 몹시 소란스러웠다. 모두 물을 뚝뚝 흘리며 걷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저들끼리 뛰어놀다 그늘에서 늘어지게 잔 황식이와 백설이도 힘차게 걸었다. 열심히 놀아 지친 채현만이 개들 목줄을 쥐고 살며시 웃었다.

집으로 향하자 고기를 굽던 삼촌이 마침 잘 왔다며 씻고 오라고 이야기했다. 평상에는 낮엔 안 계시던 할아버지도 앉아 계셨다. 모두는 공손히 인사하고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배주희와 서아영이 욕실로 들어간 사이, 남은 이들은 수돗가에서 찬물로 대충 몸을 씻었다.

“배고플 텐데 어서들 들어.”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물놀이 후 먹는 음식은 뭐가 됐든 맛있는 법인데, 노릇노릇하게 구운 삼겹살과 흰 쌀밥이었다. 정유빈은 방금 막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맛이 바뀌었다 너스레를 떨며 손을 놀렸다. 홀로 막걸리를 드시는 할아버지와 제 콜라를 채운 컵을 들고 건배하기도 했다.

복작복작 모여 앉은 덕인지 자리는 몹시 활기찼다. 모두 평소보다 신이 난 목소리를 흘리며 밥을 먹었다. 여느 때라면 쉬이 어울렸을 채현은 정신이 멍해 간간이 샐샐거리기만 했다. 얼마간 그러고 있으려니, 서윤채가 머리 아프면 들어가서 자라고 운을 띄워 주었다.

“자리 비워서 죄송합니다. 한 30분만 쉬다가 나올게요.”

그 덕에 쉽게 일어선 채현은 방으로 향하자마자 눈을 붙였다. 지금처럼 컨디션이 가라앉을 때 잘 관리하지 않으면 늘 크게 아팠던 터라 휴식이 필수였다.

대체 어떻게 안 건지…….

제 상태를 단박에 파악한 서윤채를 떠올리며 실실댄 채현은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와하하 시끄럽게 터지는 바깥 소음을 뒤로하고서.

“…….”

채현이 다시 눈을 뜬 건 사위가 고요해진 뒤였다. 시간은 어느덧 12시를 향하고 있었다. 낭패감에 탄식한 채현은 주위를 둘러보다 널브러진 이들 틈에 서윤채가 없음을 알아챘다.

얜 어딜 간 거지……. 걱정 어린 의문은 밖으로 나온 순간 해소됐다. 찾던 이는 평상에 드러누운 채 팔로 눈가를 가리고 자고 있었다.

“……기절했나?”

곁으로 다가간 채현은 서윤채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살폈다. 순간적으로 걱정이 치밀었는데, 지켜보니 가슴팍이 고르게 오르내렸다.

“여기서 자면 모기 물릴 텐데.”

채현은 그를 깨우는 대신 주위에 떨어져 있던 부채로 살살 부채질을 해 주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그가 덥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기가 그를 못 물길 바라는 마음으로.

흰 티셔츠를 입고 무방비하게 잠든 그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계속 손을 움직일 만큼.

“왜 안 자고….”

그러다 미동도 없던 그에게서 지독히 낮은 목소리가 울린 순간,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안 잤어?”

“깼어.”

서윤채는 그제야 팔을 내리고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눈이 풀린 걸 보니 아직 잠기운에 잠겨 있는 듯했다.

“나 들어가고 늦게까지 먹었어?”

“어……. 자꾸 뭘 주시던데. 존나…… 지금 목 끝까지 찼어. 2키로는 찐 거 같다.”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댄 서윤채가 갈라진 목소리로 횡설수설 이야기했다. 아……. 길게 목을 울리던 그는 재차 부채질을 하자 느릿하게 눈길을 옮겼다.

“뭐 해.”

“여기 모기 많아. 시골 모기 엄청 독해.”

“그래서 자다가 나와서 모기 쫓았어?”

“그냥, 너 보이길래…….”

“모기도 눈치 있으면 알아서 꺼졌을 거야. 우리 채현이 주먹왕인 거 알고….”

싱거운 농담을 던진 서윤채는 실없이 웃다 속이 불편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너 몸은.”

“괜찮지.”

“그래…….”

그런 와중에 몸 상태를 묻는 걸 잊지 않아 채현은 또 평정을 가장해야만 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서윤채는 이내 옆자리를 툭 가리켰다.

“야. 누워 봐.”

“……왜? 안 들어가?”

“누우라면 그냥 좀 누워 봐.”

아무리 넓은 평상이라 해도 나란히 눕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다 좆되는 건 한순간이라 생각한 채현은 최대한 그와 떨어져 몸을 눕혔다. 그마저도 ‘떨어질 일 있냐? 이쪽으로 와.’ 하며 끌어당긴 서윤채 때문에 소용이 없었지만.

“야. 하늘 봐.”

“우와.”

흐려지는 이성을 붙잡고 하늘을 바라본 채현은 곧이어 감탄을 터뜨렸다. 새카만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박혀 있었다.

“여기도 나쁘지 않지?”

서울에선 쉬이 볼 수 없는 반짝반짝한 광경에 다정한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제게도 근사한 하늘을 보여 주고자 했던 서윤채의 마음이 느껴져 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별사탕 먹고 싶다.”

“새끼가 낭만이 없어. 저걸 보고 그런 말이 나와?”

아차 했다간 쿵쿵 내달리는 심장이 튀어나올 듯해 아무 말이나 내던졌더니 황당하다는 대꾸가 돌아왔다. 헛웃음을 흘리던 그는 ‘서울 가서 사 줄게.’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떨림을 잠재우듯 침묵하던 채현은 소리 내어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왜?”

“뭐가….”

“왜 사 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는 주제에, 숨죽인 다정을 품에 안겨 주는 그가 좋으면서 원망스러웠으므로.

“…내가 사 먹을 수 있어. 뭘 그렇게 사 주려고 해. 돈 안 아깝냐? 너 그러다 거지 된다.”

그러기도 잠시, 찰나 예민해진 신경을 드러내고야 만 자신을 더 원망하며 상황을 수습할 말을 던졌다. 부디 서윤채가 평소처럼 장난으로 넘겨주길 바라며.

“글쎄…. 별로 너한테 쓰는 건 안 아까운데.”

“…….”

“왜. 이제라도 아까워할까. 토해 낼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은 짓궂었다. 문득 도망치고 싶단 생각이 들 만큼 다정했고. 채현은 하릴없이 마른 입술만 적셨다.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어 울고 싶어졌다.

다행히도 서윤채가 금방 침묵해 숨을 쉴 순 있었다. 편히 잘 태세를 한 그를 보며 얼마간 고민했을까. 결국 작은 목소리로 ‘서윤채.’ 이름을 불렀다.

“생일 축하해.”

나오기 직전에 본 시간이 12시를 목전에 두고 있었으니 지금쯤 넘었으리라. 애써 떨림을 잠재우고 단조롭게 축하 인사를 건네자 서윤채는 실없이 웃기만 했다.

“왜 웃어.”

“그냥. 권채현한테 첫 번째로 받는 축하도 나쁘지 않다 싶어서.”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하자, 그는 ‘선물은?’ 하며 눈을 마주쳐 왔다.

“있긴 한데, 가방에…….”

“기특하게 선물도 챙겨 오고….”

고맙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인 서윤채는 다시 눈을 감고 금방 잠이 들었다.

채현은 입을 앙다문 채 그런 서윤채를 오래도록 빤히 바라보았다. 예쁘고 고운 제 오랜 친구를 한참 동안 눈으로만 취하다가 뒤따르듯 눈을 감았다.

“…….”

먼저 옆으로 와 누우라 한 그의 말을 방패 삼아 방으로 향하지 않고, 그를 향해 몸을 웅크리고 똑같이 의식의 끈을 놓았다.

코끝을 간질이는 시원한 여름밤의 냄새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 미소 지으며.

* * *

왈. 단잠을 깨우는 소리가 귓등을 간질였다. 안온한 침묵에 뒤덮여 고른 숨을 쉬던 채현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의식의 경계 너머에서 너울대던 정신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정적을 깬 소음이 멎었지만 잠기운은 숨을 죽였다. 눈을 감은 채 호흡하던 채현은 또렷해지는 제 신경에 집중했다. 시야가 가로막히니 그를 대신하듯 다른 감각이 예민해졌다. 이를테면 후각이나 청각 따위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풀 내음 서린 공기가 느껴졌다. 먼 곳에서부터 메아리치는 새소리와 지척에서 울리는 거친 호흡도 들렸다.

사위를 가득 메운 흔적을 좇으며 얼마간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찬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주위를 물들였다. 일순 달라진 기온에 소름이 끼쳐 몸을 웅크리자, 움츠러든 어깨를 따라 무언가 흘러내렸다. 그 감촉에 눈을 뜨니 제 몸을 덮은 여름 이불이 보였다.

“…….”

채현은 이불을 코밑까지 당기며 한 차례 더 몸을 둥글게 말았다. 고작해야 얇은 천이었지만 한기가 가시고 아늑해지는 듯했다. 그 상태로 엷어지는 잠기의 끝물을 취하며 눈만 깜빡였다.

바로 보이는 주위는 이른 아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밤이 머물던 자리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며 어슴푸레 날이 밝아 왔다. 아직은 모두가 잠에 빠져 있을 시간,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자연의 생명만이 제 존재를 알렸다.

멍하니 시선을 던지던 채현이 정신을 다잡은 건 텅 빈 옆자리를 인지한 뒤였다. 지난밤 곁에 머물며 온기를 전해 주던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어딜 간 거지. 여차하면 찾으러 갈 생각으로 상체를 일으킨 채현은 주위를 둘러보다 서윤채를 발견하곤 움직임을 멈췄다.

“…….”

서윤채는 드러누운 황식이와 백설이 앞에 주저앉아 배를 살살 만져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공연히 입가가 간지러워질 만큼 자연스러웠다.

숨죽여 웃은 채현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서윤채를 응시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편한 차림, 흔하디흔한 삼선 슬리퍼까지. 무엇 하나 특별한 것이 없는데 신기할 정도로 눈에 밟혔다.

그는 어서 더 만지라는 듯 앞발을 흔드는 개들을 달랬다. 여유롭게 번갈아 가며 쓰다듬는 태도는 주인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고요히 어우러진 그들은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

편히 바라보게 되는 광경에 하염없이 시선을 던질 무렵, 고갤 돌리던 서윤채와 눈이 마주쳤다. 자고 있으리라 생각한 건지 멈칫하던 그는 이내 입꼬리를 당겼다.

“일어났냐?”

“응. 넌 언제 일어났어?”

“조금 전에.”

나지막한 대꾸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황식이었다. 말소리를 좇아 벌떡 일어난 그는 평상으로 와 꼬리를 붕붕 흔들어 댔다. 반가워 죽으려 하기에 채현도 상체를 숙이고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사람 손을 타는 개라 콧등과 목덜미를 만져 주니 좋다고 핥아 주었다.

“얘네 데리고 나갔다 올까.”

“지금?”

“어. 싫어? 더 잘래?”

싫을 리가 있나. 황식이와 교감하던 채현은 고갯짓으로 의사를 표하고 평상 아래로 내려왔다. 밤새 딱딱한 곳에서 잔 탓인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우두둑 요란한 소리가 났다.

“두 번 여기서 잤다간 우리 채현이 몸 박살 나겠는데.”

그를 들은 서윤채가 가차 없이 비웃으며 놀려 댔지만 무시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사이 서윤채는 개들에게 목줄을 채우고 배변 봉투까지 챙겨 들었다.

준비를 마치고 다가가자, 그는 한량처럼 평상에 걸터앉아 있다 옆에 놓인 회색 후드를 집어 던졌다. 반사적으로 옷을 받은 채현은 영문을 몰라 이걸 왜 주냐는 뜻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입으라고. 아침 기온 낮아서 추워. 감기 걸린다.”

“너는? 너 추위 많이 타잖아. 나 괜찮은데.”

“본인 걱정이나 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여름 감기는 안 걸리니까 입기나 해.”

꾹. 옷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통증을 닮은 간질간질한 느낌이 가슴께부터 퍼지는 듯했다. 잠시 망설인 채현은 얌전히 집업을 입었다. 서윤채의 옷이라 그런지 소매가 늘어지고 품이 컸다. 군말 않고 기다리던 이는 다 입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가자는 듯 턱짓했다.

이른 아침의 시골길은 고요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껴 정적이 더 크게 와닿았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 머리도 잡아먹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한가운데서 사이좋게 목줄을 하나씩 잡고 걸었다. 개들은 두어 걸음 앞서서 엎치락뒤치락 신나게 발을 내디뎠다.

“…….”

편안한 침묵 속에서 나아가던 채현은 시선을 내리다 실없이 웃었다. 똑같은 삼선 슬리퍼가 꼭 커플 신발이라도 된 듯해 기분이 들떴다. 괜히 발가락이 신경 쓰여 꼼지락대며 힐끔 본 서윤채는 느슨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신기할 만큼 개와 함께하는 산책이 익숙해 보였다.

“너 개 키운 적 없지 않나?”

“없긴 한데….”

생각을 이어 가듯 말을 늘인 서윤채가 홀로 피식거렸다.

“개 비슷한 건 키워 봐서.”

허공을 기어 뚝 떨어진 눈길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채현은 그가 제 이야길 하는 걸 알면서도 마땅한 반응을 찾지 못해 눈을 돌렸다.

“너 속은 괜찮아? 더부룩하진 않고?”

“까딱없지.”

평상에 드러누워 힘겨워하던 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을 떨었다. 나지막이 울린 장난스러운 말씨가 좋아서 채현도 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대화가 끊긴 공간은 주변에서 밀려온 흔적으로 가득 찼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걸음을 따라 퍼졌고, 흙바닥과 신발이 맞닿는 소리가 울렸다.

정적을 느낄 새 없이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사위가 밝아졌다. 모두가 잠에서 깬 듯 간간이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한참을 거닐다 돌아온 집 역시 분주한 생활 소음이 그득했다.

개들에게 물부터 챙겨 준 후엔 부엌으로 가 아침 식사 준비를 거들었다. 상을 나르고 식기를 정리하는 수준이었지만 할머니는 몹시 흐뭇해하셨다. 복스럽게 한 공기를 다 비운 채현은 마무리 정돈까지 함께했다.

그 뒤엔 풀어 뒀던 짐을 챙기고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후다닥 몸을 움직이니 생각보다 이르게 끝이 났다. 다른 이들은 아직이라 방 안에 벌러덩 누워 시간을 흘려보냈다.

“…….”

눈을 깜빡일 때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천장과 벽지가 보였다. 옆에선 오래된 선풍기가 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열린 방문 너머로 들리는 바깥 소음은 후덥지근한 바람을 타고 밀려들어 왔다. 그 까닭인지 잠이 솔솔 쏟아지고 나른한 기운에 잠기는 듯했다.

“야. 내 선물 내놔.”

찰나의 단잠에 빠질 찰나, 선명히 파고든 훼방은 서윤채의 목소리였다. 그는 맡겨 놓기라도 한 듯 날강도처럼 굴었다. 채현은 그 태도에 황당해하면서도 순순히 일어나 선물을 꺼냈다.

고심 끝에 결정한 선물은 파란색 볼캡이었다. 서윤채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단 생각으로 산 물건이었는데 예상대로였다. 포장을 뜯자마자 모자를 쓴 그의 모습은 상상보다 훨씬 근사했다.

“왜. 너무 잘 어울려?”

“뭐래…….”

멍하니 바라보던 채현은 짓궂은 음색에 최선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거뒀다.

“반응하고는. 고맙다. 잘 쓸게.”

픽 짧게 웃은 서윤채는 모자를 벗는 대신 고쳐 썼다. 미소 띤 얼굴을 보니 꽤 흡족한 모양이었다. 직전에 다른 이들에게도 선물을 받았는데, 그중 가장 만족해하는 듯해 채현도 덩달아 입매가 풀어졌다.

케이크가 없어 초는 못 불었지만 그 외의 것은 빼먹지 않았다. 다 같이 모여 축하 노래를 부르고 생일빵을 때렸다. 그를 지켜보시던 할머니가 용돈을 주시려 해 거절하느라 진땀도 뺐다.

서윤채가 당황하는 모습을 얼마 만에 본 건지.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가 다시금 떠올라 실실 웃음이 났다. 곁에 앉아 있던 서윤채는 ‘뭘 쪼개.’ 중얼거리며 발로 다리를 툭 쳤다.

그를 시작으로 또 아옹다옹할 무렵, 준비 끝났으면 이만 가자는 부름이 들렸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 어르신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개들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으나 손을 붕붕 흔들며 걸음을 물렸다.

터미널까진 삼촌 덕에 편히 이동할 수 있었다. 다음에 또 놀러 오란 말을 마지막으로 헤어져 버스에 올라탔다.

“…….”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조용했다. 모두가 지쳐 자는 와중, 채현만이 멀뚱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쌩쌩 빠르게 달리는 차를 눈에 담으며 홀로 순간을 되뇌었다.

여행은 무척 즐거웠다. 또 오고 싶단 생각이 들 만큼 행복했고. 한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했다. 평화로운 시골집 평상에 누워 있던 시간이 거짓인 양 현실감이 없었다. 분명 직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존재했는데.

“…….”

멀거니 밖을 응시하던 채현은 버스 창에 비친 이를 눈에 담았다. 한여름 밤의 꿈같았던 순간을 꾸민 서윤채를. 차마 직접 돌아볼 자신은 없어 맞닿을 일 없는 창으로나마 바라보았다.

모두가 잠든 지금,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일방적인 시선을 흘리기도 잠시 결국 눈을 내리감았다. 방학이 끝나기 전, 한 계절의 기억을 그와 함께한 지난밤으로 칠한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여름이 저물고 있었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천고마비의 계절이 됐다.

그사이 학교도 2학기를 맞이해 또다시 매일을 드나들었다. 입시를 목전에 두었기 때문인지 교내엔 1학기 때보다 침착한 분위기가 흘렀다. 기대할 행사라곤 축제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모두는 학생의 본분을 다했다.

채현도 습관처럼 학교로 향해 공부를 하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별다를 바 없는 순간들을 영위했지만 마음만큼은 질리지도 않고 술렁였다. 오직 서윤채와 한 공간에 머문단 이유로.

아무리 즐겁게 지낸다 하더라도 학습을 위한 공간이니 달가운 적이 없었는데, 이젠 학교라는 장소가 좋고 반갑기까지 했다. 당연한 일상 속에서 서윤채와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

“…….”

선생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던 채현의 시선이 힐끗 서윤채를 향했다. 그는 방과 후 수업이 지겹지도 않은지 무심히 정면을 보고 있었다. 틈틈이 유인물 한구석에 필기를 하기도 했다.

글씨 진짜 잘 쓰네…….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성의 없이 끄적인 듯한데 무척 반듯하고 예뻤다. 제 필기와 비교해 본 채현은 괜히 머쓱해져 팔로 종이를 슬쩍 가렸다.

그 움직임이 느껴졌는지 서윤채가 시선을 마주해 왔다. 허공에서 얽힌 눈빛엔 옅은 의문이 어려 있었다. 빤히 응시하기에 소리 없이 웃어 보이자,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눈길을 거뒀다. 이어선 고갤 가로젓더니 호흡하듯 피식댔다.

“…….”

다시 정면을 바라본 서윤채와 달리 채현은 계속 그를 눈에 담았다. 둥글게 말려 보기 좋은 입술에 꽂혔던 시선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교복 재킷 없이 니트 조끼만 입고 넥타이를 맨 채였다. 그마저도 느슨히 착용해 바른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채현의 눈엔 근사해 보였다.

얼마 전까지 입던 하복도 맞춤 의상인 양 잘 어울렸는데, 동복도 마찬가지였다. 빳빳한 셔츠를 입어서인지 넓은 어깨와 바르고 곧은 몸 선을 새삼 의식하게 됐다.

어쩜 이리도 한결같이 고울 수가 있는지. 세월을 덧입고 어른스러워졌을 뿐, 동네 어른들에게 예쁨받던 그 시절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신기했다.

서윤채를 눈에 새기는 사이, 지루하기만 하던 수업도 끝을 보였다. 어수선해진 공간에서 몸을 일으킨 서윤채는 낮게 야, 소리를 냈다.

“뭘 자꾸 야려. 집중 안 하냐?”

“……티 났어?”

“그럼 안 났을까. 왜 계속 꼼지락대. 정신 사납게.”

“뭐…. 정서불안인가 보지. 그리고 너만 본 거 아니거든. 나 멀티 돼.”

“자랑이세요. 하여간 말대꾸는.”

철 안 든 동생 보듯 굴던 이는 곧 상대하길 포기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채현도 그 뒤에 바짝 붙어 졸졸 뒤따랐다.

교실로 이동해선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사며 짐을 챙겼다. 평소라면 석식을 먹으러 갔을 테지만, 오늘은 엄마 생신 기념 식사를 하기로 해 자습을 뺐다.

“어…….”

그렇게 모두와 인사하며 나선 것까진 좋았으나, 문제는 살살 내리기 시작한 비였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올 건 뭔지. 1층 입구에 오도카니 선 채현은 그냥 맞고 갈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딱 보니 오래 내릴 비는 아닌 거 같은데. 교실에 남는 우산이 있던가. 다시 올라가서 가져올까. 그러긴 또 귀찮은데. 버스 정류장까지만 뛰면…….

“야.”

교복 재킷만 만지작대며 생각을 이어 갈 때쯤, 익숙한 부름과 함께 무언가 가방 밑을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우산을 든 서윤채가 서 있었다.

“신나서 뛰어가신 분이 여기서 뭐 하세요.”

서윤채는 꼭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으며 성큼 다가왔다. 아예 밖으로 향해 태연히 우산을 펼치기까지 했다. 집에 갈 심산인지 가방까지 메고 온 상태였다.

“너 뭐 해?”

그 덕에 어안이 벙벙해진 채현은 그를 좇다 결국 소리 내어 물었다.

“집에 가는데.”

“자습은?”

“하루 안 한다고 지장 없어.”

고민하는 기색 따위 없이 답한 그는 누가 봐도 두 명이 쓸 것처럼 우산을 잡았다. 여유 있게 공간을 비우더니 어서 들어오란 듯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하던 채현은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발끝을 응시했다가, 다시 서윤채를 바라보곤 손바닥 깊숙이 손톱을 박아 넣었다.

“나 때문에 가는 거야?”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

끝내 튀어나오고야 만 질문에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쳐다만 보지 말고 빨리 움직이지? 네 친구 비 맞는 거 싫어해.”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로 움직임을 종용했을 뿐. 숨죽여 탄식한 채현은 그제야 주춤주춤 그의 곁으로 가 섰다.

“고마워.”

“복 받은 줄 알아. 나 같은 친구 없다.”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은 양 요동치던 마음이 차게 식는 건 한순간이었다.

“응.”

잠시 멈칫한 채현은 태연을 가장하며 살며시 웃었다. 유난히 가슴에 틀어박히는 친구, 두 글자를 반복해서 되뇌며.

정류장까지는 티 나지 않게 사이 간격을 버리고 서며 이동했다. 다행히 버스는 오래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덜컹거리며 멈춰 선 차 안에는 사람이 많아 빈자리가 하나뿐이었다. 서윤채에게 양보하려던 채현은 맥없이 이끌려 털썩 주저앉았다.

“넌 비만 오면 이러더라.”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난 지금, 바퀴가 툭 튀어나온 자리에 앉아 서윤채의 손짓을 받아 내야만 했다. 그는 비가 와 부스스해진 머리를 만지작대며 연신 장난을 쳤다.

본디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게 마음인지라, 채현은 또 하릴없이 동요했다. 어느 누가 좋아하는 사람의 손짓 앞에서 태연할 수 있을까.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꼭 긴장한 이처럼 소름이 돋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아, 하지 마.”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씨알도 안 먹힐 말을 하며 손을 밀어내는 게 전부였다.

“왜 또 심통이 났어.”

그마저도 서윤채에겐 소용이 없었다. 날뛰는 감정을 진정시키려다 일순 예민해진 걸 눈치챘는지 그는 퍽 다정히 굴었다.

“부끄러워?”

“…….”

“네가 지금 이 버스에서 제일 있어 보여. 개성 넘치는 스타일 알지. 살짝 시대를 앞서 나간.”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말은 짓궂은 놀림에 가까웠으나 의도가 분명했다.

“그냥 산발이라고 말을 해…….”

자신을 달래기 위함이란 걸 알기에, 채현도 체념하고 대답했다. 지금 상태와 머리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말 못 할 이유보단 우스운 이유가 나았으니.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버스는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다. 금방 그칠 줄 알았던 비는 그즈음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가 한번 쏟아지고 나면 기온이 떨어진다던데, 금세 또 겨울이 오려나 싶었다.

찰박찰박. 바짓단을 적시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밟으며 발을 내디뎠다. 주택가로 접어드는 내내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으슬으슬 추워 몸을 떨면서 걸을 뿐이었다.

서윤채는 평소 헤어지던 놀이터를 지나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들어가라. 이모한테 생신 축하드린다고 전해… 아니다. 내가 연락드릴게.”

“고마워. 비 더 오기 전에 얼른 가.”

“오냐.”

간다. 채현은 짧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선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른쪽과 달리 축축하게 젖은 왼쪽 어깨가 유독 눈에 밟혔다.

“…….”

몸이 닿을세라 옆으로 피할 생각만 했지, 우산을 기울여 주고 있다는 건 미처 몰랐다. 한순간에 걷잡을 수 없이 착잡해진 채현은 멀어진 서윤채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은 밖보다 따뜻했지만 여전히 몸이 떨렸다. 채현은 그 떨림이 비단 추위 때문은 아니리란 걸 알았다. 곁에 서서 발맞춰 걷던 서윤채의 흔적이 짙게 새겨진 듯했으니.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순간을 곱씹은 끝엔 허탈한 웃음이 삐져나왔다. 비 맞는 걸 싫어하는 이가 순순히 제 어깨를 적셨다. 왜 피하느냐 묻는 대신 우산을 기울여 주면서.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판단한 것일 테지.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아 절망스러웠다.

“아, 진짜…….”

채현은 잇지 못한 말을 씹어 삼키며 손바닥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처음으로 서로에게 환한 서윤채와 제 관계가 두렵다 느껴졌다. 혹시라도 제 감정을 들키는 날이 오게 될까 봐.

추적추적 비가 계속 내렸다. 쏟아지는 빗물에 간신히 쌓아 올린 평정이 마모되는 듯했다.

* * *

꽤 오래도록 내린 가을비가 멎은 뒤 찾아온 건 이른 추위였다. 그사이 하루가 다르게 낮이 짧아지고 바람이 차졌다.

그러다 초겨울의 문턱에 선 어느 날, 학년 마지막 행사인 축제가 열렸다.

반마다 제각기 다른 부스를 운영해 즐길 거리가 많았다. 오후에 있을 장기자랑 시간엔 다른 학교 찬조 공연도 있다고 했다. 학생회가 애쓰더니 전체적인 행사 구성이 깔끔했다.

채현도 애들과 함께 팸플릿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고3이 되기 전 마지막 여유라 생각하니 별거 아닌 것도 재미있었다. 학생회 부스에선 신제윤을 만나 이야길 나누기도 했다.

이후론 빨빨거리며 교내를 헤집고 다니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맞춰 대강당으로 향했다. 다른 반 친구와 놀다가 뒤늦게 도착한 채현은 서윤채를 찾다 그 상태로 멈춰 섰다.

“…….”

그는 사람이 득실득실한 중앙에 서 있었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눈에 띄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여자애의 머리를 만지는 모습까지 선명히 새겨졌다.

그 광경이 꼭, 서윤채가 제게 보이던 모습 같아 채현은 새삼 충격을 받았다. 여자애가 부탁하듯 내보인 손짓을 제대로 소화할 여유도 없을 만큼.

그 순간 치민 감정은 우습게도 서운함과 배신감이었다. 그의 성격상 별 뜻 없는 행동이란 걸 알면서 눈에 보인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분명 나한테만 하던 행동인데…….

서윤채가 보이는 다정과 관용에 우쭐했던 건가. 실은 특별한 사이도 뭐도 아니었는데.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 마지막 하나까지 무너진 듯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왔다.

“아…….”

비슷한 순간 웃는 둘은 감히 잘 어울린단 말을 붙여도 될 듯했다. 그를 보던 채현은 문득, 본인도 모르는 사이 서윤채의 곁에 자신을 세워 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꿈꿔 보지도 않은 가정의 결말을.

서윤채가 내보이는 행동은 똑같은데 한순간 끝이 달라졌다. 애초부터 자격이 없던 것처럼.

“…….”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도 없었을까. 채현은 자조하며 시큰한 눈을 깜빡였다. 감히 오랜 친구를 마음에 품고, 도리어 주제도 모르고 원망하는 자신이 싫었다.

“…….”

더는 이래선 안 된다 생각하던 차, 서윤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잘도 자신을 발견하곤 손짓하며 입을 벌렸다. 꼭 이름을 부르려고 하듯이.

그를 본 채현은 휙 돌아 도망치듯 걸어 나왔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분명 거절하지 못하고 다가가 엉망인 상태를 들켰을 테니.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도망치길 관뒀는데, 혼란에 잡아먹힌 지금 결심이 흔들렸다. 서윤채에게서 멀어져야겠단 생각뿐이었다.

대부분이 강당으로 향한 덕에 복도는 한산했다. 방황하며 걷던 채현은 이내 교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이 자리에 계셔 바로 용건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많이 안 좋아? 보건실에서 약 먹고 잠깐 쉬어 보는 건?”

속이 메슥거려 조퇴하고 싶단 말에 선생님은 회의적이었으나, 결국은 수락해 주었다. 꾸벅 인사한 채현은 곧장 짐을 챙겨 학교를 빠져나왔다.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서둘러 정류장으로 향한 뒤 가장 먼저 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몇 정류장을 지나고 나서 확인한 핸드폰엔 서윤채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유난 : 왜 쌩까고 가] 오후 2:34

단순한 물음. 평범한 연락. 오직 그뿐인 짧은 메시지였지만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보다 화면을 까맣게 물들였다.

무거운 숨을 내쉰 채현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어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집에 갈 수도 없고…….”

끝내는 방랑자 신세가 되어 정신을 반쯤 놓은 채 버스를 타고 빙빙 돌았다. 기사님이 이상하게 보기 전 다른 버스로 갈아타는 용의주도함도 잊지 않았다.

때아닌 버스 투어를 하는 동안 날은 빠르게 저물었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현은 한숨을 내쉬길 반복했다. 그사이 서윤채에게 연락도 왔지만 모조리 씹었다. 그게 그를 화나게 하리란 걸 알면서도 정작 답은 할 수 없었다.

[서유난 : 너 어디야] 오후 6:40

미리보기로 메시지를 확인하던 찰나, 또 진동이 길게 울렸다. 채현은 아예 전원을 꺼야겠다 생각하며 전화가 끊기길 기다렸다. 부재중으로 넘어간 뒤엔 곧장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엄마. 나 오늘 친구네서 자고 갈게. 어? 아니, 윤채 말고. 응. 연락할게. 걱정하지 말고 안녕히 주무세요. 네.”

제 용무를 다한 핸드폰은 그대로 가방 깊숙이 처박혔다. 간헐적으로 울리던 진동까지 사라진 지금에서야 온전히 혼자 남은 기분이었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현은 하룻밤 묵을 곳을 떠올렸다. 친구 집으로 향하면 좋겠다만, 제 모든 친구는 서윤채와도 아는 사이라 기각이었다. 그를 피해 온 마당에 쉽게 들킬 곳으로 갈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이게 웬 팔자에도 없는 노숙인지……. 자조하며 고민하기도 잠시, 이대로 종점까지 가야겠다 결심하곤 창밖만 내다보았다.

요란한 소릴 내며 달린 버스는 낯선 동네에 멈춰 섰다. 채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다 작게 조성된 공원으로 들어섰다.

어둑해진 공간엔 운동하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걷던 채현은 구석에 놓인 벤치에 주저앉았다. 가만히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다 보니 제 꼴이 웃겨 실소가 샜다.

“……열받았겠지.”

뚝 끊겼던 이성이 서서히 돌아오자 상황 파악이 됐다.

자격 없는 애정에서 비롯된 치기 어린 질투로 일을 그르쳤다. 괜히 원망할 구석을 찾듯 성난 힐난을 표출한 것과 다름없었다. 처음 겪는 애정에 서투른 자신이 문제였음에도.

제 감정 하나 억누르지 못하고 휘둘리는 꼴이라니. 제대로 사고 쳤지 싶었다. 멋대로 실망하고 일을 쳤단 자각은 있어 좆됐다는 생각뿐이었다.

역시 하루빨리 이 마음을 죽였어야만 했는데.

“하아…….”

떳떳하지 못한 이가 할 수 있는 건 반성과 자책이 전부였다. 시무룩하게 ‘나는 진짜 구제 불능인가.’ 생각하던 채현은 이내 터덜터덜 찜질방으로 향했다. 교복을 입어 혹시라도 쫓겨나면 24시 스터디카페로 가려 했는데 다행히 입장이 됐다.

문제는 12시가 넘은 후였다. 미성년자가 혼자 있는 걸 들키면 쫓겨날 게 분명했으니.

채현은 눈만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을 살핀 뒤, 수면실로 향해 숙면 중인 어른 옆에 자릴 잡았다. 누가 보면 아들처럼 보이도록 옆자리에 누워 수건으로 얼굴도 가렸다.

모두가 잠든 공간에 울리는 소리는 숨넘어갈 듯한 코골이가 전부였다. 드르렁 소리에 맞춰 눈을 깜빡이던 채현은 어느새 의식의 끈을 놓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와, 미친…….”

그렇게 맞이한 아침은 심히 통탄스러웠다. 이 상황에서 팔자 좋게 늘어져 잘 수 있다니. 자괴감이 밀려와 또 한 번 자기반성을 해야만 했다.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울적해하다 보니 또 시간은 훌쩍 흘렀다. 자리를 정돈한 채현은 위로 올라가 몸을 씻고 밖으로 나섰다.

거리엔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사람이 꽤 많았다. 채현은 그 틈에 섞여 정처 없이 나돌았다. 괜히 집 근처로 갔다가 서윤채와 마주칠까 최선을 다해 시간을 죽였다. 그러다 해가 뉘엿뉘엿 진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

“…….”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놀이터를 지날 무렵 누가 짜기라도 한 듯 서윤채와 맞닥뜨렸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다 일어서는 그의 낯에 표정은 없었다. 단단히 꼭지가 돈 양 매서운 기색이 묻어났을 뿐. 그 기세에 눌린 채현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몸을 굳혔다.

“씻었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서윤채가 뇌까렸다. 짧은 한마디가 심문처럼 느껴져 채현은 침만 꼴깍 삼켰다.

빤한 시선을 치우지 않던 이는 한숨을 내쉬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곁눈질로 힐끔대며 눈치를 살피니 제 엄마와 통화한 듯했다. 걱정 마시라는 말과 함께 정중히 전화를 끊은 서윤채는 야, 낮게 내질렀다.

“넌 따라와.”

매정히 앞서 나가는 상대는 평소와 달리 조금 풀어진 행색이었다.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사람인 양. 그 때문에 채현은 무겁게 내려앉는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벤치로 향해서는 누가 숨통을 죈 듯 숨쉬기도 힘들었다. 서윤채는 먼저 말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침묵과 시선이 버거워, 채현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서윤채의 인내심이 다 닳아 없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입이 틀어막혔어?”

한껏 예민해져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짓씹듯 울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피로가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채현이 찜질방에서 잘 동안, 서윤채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안 하던 짓을 하며 사라진 채현을 신경 쓰느라 날밤을 새워야 했다.

핸드폰은 꺼져 있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새끼도 없지. 속이 안 좋다며 조퇴를 했다지……. 환장할 노릇이었는데 정작 눈앞에 나타난 채현은 멀끔한 낯을 하고 있었다. 안심이 되는 한편, 그와 비례하게 속이 뒤집어졌다.

“핸드폰은 장식이야?”

서윤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꼭지만 보여 주는 채현을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시선을 흘리길 잠시, 이내 입을 꾹 다문 채현의 신발을 발로 툭 찼다.

“야.”

채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겁을 먹었다는 걸 모를 수가 없는 반응이었다.

“하나하나 캐물어야 입을 열래, 채현아.”

“…….”

“어? 닥치고만 있을 거야?”

그를 알면서도, 몰아세우는 게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자제가 안 됐다. 기이할 만큼 예민해진 신경에 머리가 끓는 기분이었다.

미치기 직전인 것은 채현도 마찬가지였다.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가출을 감행한 건데, 서윤채가 성큼 다가오니 또 혼란스러웠다.

“…….”

저 역시 서윤채가 말없이 사라지면 똑같이 했을 거다. 그뿐인 행동이다. 충분히 잘 아는데도 자꾸만 행동의 속뜻을 따지고 들게 됐다. 욕심을 내지 않는 것과 별개로, 이따금 의지에 반해 솟아나는 일말의 기대가 있기 마련이었으니.

“내가… 너한테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

애정에 수몰되길 피하고자 내뱉은 말은 날이 바짝 선 채였다. 서윤채도 화가 치미는지 헛숨을 흘렸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험악한 분위기가 선연히 느껴졌다.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한테 말하기 싫다고.”

“권채현.”

“너 조금 과해. 알아?”

대답 대신 질문을 던진 채현은 붉어진 눈을 하고 서윤채를 올려다보았다. 서윤채의 입술이 비뚜름히 말리며 실소가 샌 건 동시였다.

“그럼 네가 뭘 처하든 말든 신경 끌까. 어?”

날카롭게 틀어박히는 말에 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처박는 게 최선이었다. 그에 상대는 낮게 욕을 내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좆대로 하든가, 그럼.”

“…….”

“근데, 채현아.”

낮은 부름이 사형 선고처럼 떨어졌다.

“사고 치기 전에 씨발, 생각을 좀 해. 걱정하는 사람 병신 만들지 말고.”

말을 맺은 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든 채현은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뛰어나가 서윤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놔.”

“서윤채.”

“놓으라고 했어.”

“잠깐, 진짜 잠깐만…….”

퍽 간절하게 붙들었지만 상대는 손을 쳐 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눈에 띄게 동요한 채현 역시 뒤따라가 서윤채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다행히 이번엔 움직임을 멈춰 주었다. 하지만 또 내쳐질 수 있단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미안해.”

사과하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흔들렸다. 어느새 채현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잘못했어.”

그 사과에도 서윤채는 입을 떼지 않았다. 화가 가라앉지 않는 사람처럼 숨을 고를 뿐이었다.

“안 그럴게. 화내지 마.”

채현은 쌓아 올린 둑이 무너져 설움이 터진 양 끅끅대며 울었다. 이다지도 이기적인 애정이 어디 있을까.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서윤채만 화나게 한 듯해 너무 속이 상했다.

서윤채의 팔을 간절히 붙든 채현은 손에 힘을 더 실으며 고갤 숙였다. 툭. 이마에 그의 팔이 닿는 게 느껴졌다. 그는 성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 떨어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한쪽 팔을 내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 힘겹게 호흡한 채현은 탄식하며 목구멍을 틀어막은 말을 쏟아 냈다. 털어놓지 못할 진심은 꼭꼭 씹어 삼키며.

“미안해.”

“…….”

“다신 안 그럴게. 화내지 마.”

혼자 착각하고 좋아해서 미안해. 이제 진짜 잘 정리하고 내 감정으로 너 화나게 안 할게.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채현아, 내가 너한테 사과하라고 했어?”

한풀 꺾인 서윤채의 음성이 내려앉았으나, 채현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미안하단 말만 반복했다.

최선을 다해 단 한 번도 피워 보지 못한 감정을 죽이면서.

* * *

겨울의 초입, 채현은 한참을 울었고 서윤채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결코 잊지 못할 한 계절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삭막하고 건조해졌다 뿐이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무사히 학년을 마치고 해를 넘긴 시점, 채현은 굳세게 마음을 다잡았다. 서윤채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독이 될 애정을 뿌리째 뽑아 버리자고.

언젠가 감정을 깨달았을 무렵, 제 상황이 엉망진창인 실타래를 손에 쥔 것과 같다고 생각했더랬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도 실을 풀어 보고자 노력했다. 계속해서 만지다 보면 결국 실올이 풀려 너덜거리게 되는 줄을 모르고.

엉망이 된 실을 해결할 방법은 딱 하나였다. 완전히 잘라 내는 것. 손쓸 수 없는 부분을 깔끔하게 도려내는 것. 그리하여 채현도 이번에야말로 짝사랑을 끝내자고 뼈에 새기듯 다짐했다.

수험생이라는 신분은 좋은 핑계가 됐다.

[서유난 : 집에 틀어박혀서 뭐 해]

[서유난 : 죽었어?] 오후 9:20

오후 10:11 [그냥요즘]

오후 10:13 [공부하느라핸드폰확인을잘안해ㅎ;ㅠ]

[서유난 : 철들었네?] 오후10:24

오후 10:49 [고3이잖아]

[서유난 : 너무 애쓰지 말고 적당히 해라]

[서유난 :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더라]

[서유난 : 우리 채현이 오래 살아야지] 오후 10:57

오후 11:25 [너도무리하지마]

오후 11:27 [밥잘챙겨먹고잠도꼬박꼬박자알겠지]

[서유난 : ㅋㅋ오냐] 오후 11:46

방학 내내 서로의 집을 들락거리며 놀던 때와 비교하면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으나, 서윤채는 지적하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는 것인지 이따금 연락을 해 올 뿐이었다. 고작해야 짧은 말 한마디. 근황을 묻는 몇 글자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채현으로선 천만다행이었다.

실제로 채현은 서윤채의 연락이 오면 몇 번이고 답장을 썼다 지웠다. 별거 아닌 말인데도 고민이 생겨 한참을 생각하고 꾹꾹 내리눌러야 했다. 일부러 메시지 확인을 늦게 하기도 해 채팅이 순조로이 이어진 건 옛일이 됐다.

그 덕이라고 해야 할지, 결과적으로 채현은 이상적인 수험생이 되어있었다.

[신제윤 : 채현아 인강 이 선생님 거 보면 도움 될 거야. 파이팅^^] 오후 4:30

단 한 번도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한 적 없던 공부를 자발적으로 했다. 틈이 생기면 서윤채가 떠오를까 정성 들여 문제집을 풀고 활자를 욱여넣었다.

서윤채에게 변명처럼 덧붙인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채현의 하루는 책상에서 시작돼 책상에서 끝이 났으니. 일망무제한 문제의 나열이 선사하는 건 모순되게도 안식이었다.

[정유빈 : 권채현 초심 잃음 개짜증나는 새끼]

[정유빈 : 가증스럽게 공부 처한다고 잠수 타는 거 봐라 니 읽고 있지]

[정유빈 : 저 새끼 개학하면 쌩깐다에 내 모고 점수 건다] 오후 8:30

[배주희 : 넌 제발 초심 좀 잃어봐 공부 안 해?] 오후 8:33

[서아영 : 5등급을 걸어서 뭐해 유빈아ㅎㅎ..] 오후 8:40

[서유난 : ㅋㅋㅋ] 오후 11:44

그저 이따금, 불현듯 치미는 충동에 서윤채의 흔적을 좇으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개학한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도와주기라도 한 양 서윤채와 다른 반이 되어 정신 차리기가 한결 쉬웠다. 거기에 더해, 서윤채가 오전 자습까지 하게 돼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야. 혼자 다닐 수 있겠어?”

“내가 앤가…….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쯧, 혀를 차며 못마땅해하는 서윤채에 반해 채현은 기회구나 싶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지론 삼아 하루빨리 애정이 식기만을 기다렸다.

공부. 시험. 공부. 입시 특강. 공부. 자기소개서 작성. 진학 상담. 공부……. 쳇바퀴 돌듯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는 동안 옷차림이 바뀌고 달력이 휘리릭 넘어갔다.

그사이 진정이 조금 되었냐 하면,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었다. 원인은 당연하게도 불시에 쳐들어와 평정을 헤집고 사라지는 서윤채였다.

서윤채는 교실 붙박이가 된 자신을 대신하듯 곧잘 드나들며 흔적을 남겼다. 하물며 남의 반에서도 본인 반인 양 거리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너 바쁘지 않아?”

“살이 좀 빠졌나.”

바로 앞 책상에 걸터앉아 빤히 내려다보는 통에 넌지시 말을 건네도 꿋꿋했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 뜯어보다 혼잣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너 밥 제대로 챙겨 먹고 있냐?”

“당연히 먹고 있지.”

“근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내던지는 그 때문에 채현은 또 할 말을 잃어야만 했다. 단순한 잔소리든 욕이든 아무리 까칠하게 말해도 꼭 걱정처럼 들렸으니.

“잠깐 신경을 안 쓰면 이 모양 이 꼴이지.”

“그 정도 아니거든.”

“너만 수험생이야? 요령 없이 공부하면 누가 알아줘?”

……걱정은 무슨. 욕이었구나. 눈살까지 찌푸리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채현은 괜히 뺨을 매만졌다. 근래 들어 교복이 좀 헐렁해지긴 했어도 다른 이가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 성질부릴 거면 너 그냥 가. 애들 공부하잖아.”

“애들은 뭔 애들이야. 다 밥 먹으러 가서 몇 없는데. 자꾸 구라 칠래?”

말을 맺은 서윤채가 하,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채현이는 왜 걱정을 해 줘도 지랄이지?”

“……걱정이었어?”

“그럼 내가 할 짓이 없어서 네 얼굴 뜯어보고 있을까.”

“아, 진짜 말투 봐. 누가 걱정을, 말을 그렇게 하냐? 난 그냥 네가 욕하는 줄…….”

“그래서. 짜증 났어?”

몸을 일으킨 서윤채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삽시에 다정해진 말씨에 채현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가슴께에 떨어진 불씨가 손끝까지 번지는 기분이었다.

“짜증까진 아니고…….”

“그럼 좀 봐줘. 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알아듣잖아.”

뻔뻔한 태도에도 말을 얹지 못하는 건 필히 예쁘게 휜 눈매 때문이리라고, 차마 반박할 수 없게끔 사근사근하게 구는 서윤채 때문이리라고 채현은 생각했다.

“일어나. 밥 먹으러 가게. 좀 먹여야겠다, 너.”

양아치처럼 발로 의자를 툭 건드는 행동과 달리, 염려 섞인 시선을 해 보이는 지금처럼.

서윤채의 숨죽인 다정은 이후로도 일상을 물들였다. 경계를 세우기도 전에 훅 파고들어, 채현은 그때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기분의 고저를 찍어야만 했다.

“엄마 오늘 내 생일이야? 밥상이 너무 근사한데.”

“우리 아들 요즘 학교에서도 공부 열심히 한다며. 기특해서 그렇지.”

“누가 그래?”

“윤채가. 저번에 단지에서 마주쳤거든. 한결같이 곱더라, 윤채는.”

“아…….”

서윤채가 좋은 만큼, 그 배 이상으로 힘들었다. 마음 정리 하나 뜻대로 못 하게 구는 그가 야속하다가도, 또 속절없이 웃음이 나 끝내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이 떠올랐다.

그 끝에 채현이 기댈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시간뿐이었다. 내일이면 괜찮겠거니, 또 하루가 지나면 조금씩 닳아 없어지겠거니……. 얄팍한 희망에 기댄 채 당장의 일에 충실했다.

내신을 올리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수능 공부를 하고, 면접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괴로워할 일들이 채현에겐 좋은 도피처가 됐다.

찬 바람이 불 무렵엔 서윤채도 바빠져 마주하지 못하는 날이 꽤 많았다. 멀찍이 그가 보이면, 채현은 속으로 조용히 그를 응원하며 걸음을 돌렸다.

하나둘 수시 합격자가 발표될 즈음엔 학교 분위기도 몹시 어수선해졌다. 설렘과 부러움, 불안과 시기가 한데 섞여 학생들 사이에 떠돌았다.

아슬아슬 외줄 타듯 시간이 흐르면서 끝나지 않을 듯했던 수험생 생활도 결국은 끝을 보였다.

휩쓸리지 않고 제 몫을 다하려 노력하던 채현은 보상이라도 받듯 상향 지원한 대학교에 합격했다. 그간의 고생이 싹 씻겨 내려가는 듯해 기뻐하는 가족들 품에서 코를 훌쩍였다.

서윤채가 한국대에 붙었단 소식을 들었을 땐 저도 모르게 전화를 걸었다. 제 합격 소식에도 울지 않았건만, 울먹이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왜 네가 울려고 그래. 나도 안 우는데.’

‘으, 너, 진짜 윽, 고생했는데, 한국대, 너…….’

‘그래. 고마워.’

상대는 횡설수설 이어지는 말을 탓하지 않았다. 바람 빠지듯 웃으며 간간이 대답을 들려줬을 뿐.

길고 긴 학창 시절에 마침표를 찍는 날은 유독 맑았다. 사회로 한 걸음 내딛는 모두를 축하하기라도 하듯이. 뺨이 엘 듯 칼바람이 불었지만 하늘만큼은 청명했다.

“…….”

학사모를 쓰고 뺨을 붉게 물들인 채현은 사람들 틈에서 서윤채를 발견했다. 그는 같은 반이었던 이들에게 붙들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잔뜩 성가셔하다가 결국 카메라를 응시해 주는 모습을 채현도 똑같이 망막에 새겼다.

“권채현.”

부름을 좇아 시선을 옮기면 어느새 다가오는 서윤채가 보였다. 곁으로 와 선 그는 씩 웃으며 들고 있던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졸업 축하한다.”

“너도.”

그에 화답하듯 채현도 제 꽃다발을 건네자, 서윤채의 눈매가 보기 좋게 휘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그 모습을 보던 채현은 천천히 눈길을 거뒀다.

하릴없이 발끝만 응시하길 잠시, 용기를 내 다시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앞에 선 이는 여전히 목울대가 아프도록 고운 낯을 하고 있었다.

“……서윤채, 나랑도 사진 찍자.”

그래서 채현은 이번만큼은 욕심내길 택했다. 3년을 함께한 공간에서 이 정도 추억은 새겨도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면서. 다시 찾지 않을 이곳에 서툴렀던 제 짝사랑도 다 묻고 가리라 다짐하면서.

“그래. 야, 우리 사진 좀 찍어 줘.”

지나가던 친구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순간, 채현은 최선을 다해 환히 웃었다. 제 어깨를 감싸 안은 서윤채의 온기에 저항하지 않고 오롯하게 만끽하며.

“사진 내가 가질래.”

채현은 흔쾌히 수락하는 서윤채를 뒤로하고 사진을 손에 쥐었다. 행복하다는 듯 웃는 자신. 매일을 드나들던 학교 건물. 그리고 감히 행복하단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이.

모든 걸 빼놓지 않고 눈에 담다 결심을 내렸다.

“야, 우리 같이 독립할까. 학교 별로 안 머니까 중간에 방 하나 얻고.”

함께할 앞으로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오랜 친구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지내기 위한 결심을.

“있잖아, 윤채야.”

“어.”

“……아니다. 나중에 얘기할게.”

부디 지금의 결정이 틀린 선택이 아니길, 그가 너무 상처받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후련한 얼굴을 해 보였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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