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More than friends
수학여행이 끝났다. 몇 시간을 기다린 놀이기구가 몇 분이면 끝나듯, 똑같은 하루하루에 즐거움을 준 3일은 눈 깜짝할 새 흘렀다.
돌아온 일상 앞에 기다리는 건 시험뿐이었다. 여독을 풀 틈도 없이 중간고사 기간을 마주해야만 했다. 학교도 흐트러진 기강을 잡으며 학업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모두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열심히 쳇바퀴를 굴렸다. 채현 역시 현실에 승복했다. 본디 효율을 추구해 시험 직전에만 열의를 불태웠는데, 공부하기 싫다는 마음보다 해야 한다는 압박이 더 커 결국 펜을 들었다.
“…….”
울며 겨자 먹기로 시험공부를 시작한 채현과 달리 서윤채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미리 공부를 다 해 둔 것인지 동아리 활동까지 병행했다. 그에 채현은 감탄하면서도 학을 뗐다.
“글만 보면 멀미 안 나?”
“번갈아 보면 돼.”
“너도 진짜 무섭다…….”
서윤채는 연신 메시지 알림을 띄우는 핸드폰도 무시하고 종이만 내려다보았다. 쉬는 시간에 자진해서 자료를 들춰 보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웬만큼 성실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할 텐데. 그가 겉보기와 다르게 착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럴 때마다 새롭게 놀라웠다.
채현은 벽에 기대앉으며 서윤채를 살폈다. 방해할 생각은 없기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머릿속은 꽤나 시끄러웠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 목격한 장면 탓이었다. 답을 얻지 못한 의문은 지금도 잔존하며 물음표를 띄웠다. 그로 인해 꽤 오래도록 혼란을 겪고 있는 참이었고.
그를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얼마 안 가 서윤채가 힐끗 눈길을 옮겼다.
“뭐. 할 말 있어? 괜히 눈치 보지 말고 해.”
“누가 눈치를 봤다고……. 할 말 없어. 그냥 너 구경하는 거야.”
“사람을 구경거리 삼네. 심심하면 가서 네 짝이랑 놀아.”
짧게 웃는 서윤채의 모습에 채현은 침묵했다. 사실 당장에라도 묻고 싶은 건 많았다. 그 여자애랑 번호를 주고받았는지, 계속 도착하는 메시지 속에 그 여자애의 연락도 있는지……. 그저, 입이 떨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어도 엿들은 내용에 불과했으니까.
숨을 죽인 질문 틈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하나는 제 몫이었다. 나는 왜 이걸 지금껏 신경 쓰고 궁금해할까. 제일 친한 친구를 빼앗기기 싫다는 소유욕이라도 되는 걸까.
“엄마가 너 집에 데려오래. 갈비찜 해 준다고.”
이 또한 도통 답이 떠오르지 않는 의문이기에, 채현은 생각을 비워 내고 화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가까웠지만 서윤채는 웃으며 고갤 까딱였다.
“주말에 간다고 말씀드려. 밥 먹고 공부나 하자. 밥 얻어먹은 값은 해야지.”
“……공부가?”
“어. 너 공부시키는 거.”
비록 썩 달갑지 않은 의견이 뒤따랐지만 채현은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수업 종이 울려 ‘그럼 엄마한테 말해 둔다.’ 전하곤 제자리를 향해 걸었다.
“…….”
분단을 건너 창가 쪽으로 향하다 돌아본 서윤채는 한사코 무시하던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유심히 바라보게 될 만큼 고운 낯으로. 물끄러미 그를 좇던 채현은 한숨을 내쉬며 애써 시선을 거뒀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생각의 무게가 어쩐지 버거웠다.
* * *
평일 뒤의 휴일은 언제나 반가웠다.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일까. 일분일초가 아쉽고 소중하기까지 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만 보내다 맞이한 시간이라 더 특별하기도 했고.
반복되는 하루 가운데 남다른 한때는 대체로 오래 떠오를 기억이 됐다. 꼭, 지금 이 순간처럼. 채현은 흰 쌀밥을 크게 한 입 먹으며 우물거렸다. 시선은 살살대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서윤채에게 고정된 채였다.
“음식 입에 맞니? 짜진 않고? 간 세게 안 하긴 했는데.”
“집에서 먹는 거보다 맛있어요.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말은 잘해. 밥 더 줄까? 고기도 많으니까 실컷 먹어. 밑반찬 부족하면 말하고.”
“이모, 자꾸 그러면 나 이거 공짜로 못 먹는데.”
서윤채는 친아들보다 더 싹싹하게 굴며 능청을 떨어 댔다. 가족이라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원래부터 그를 예뻐했던 엄마는 한껏 신이 나 반찬을 밀어 주었다. 식사를 끝마친 후에도 성에 안 찼는지, ‘윤채 과일도 좀 먹으라고 해.’ 하며 후식을 내밀었다.
“너 그냥 이 집 아들 할래? 엄마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데.”
졸지에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채현은 헛웃음을 흘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권씨 집안 명예 아들은 제 방인 양 편히 누워 있다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네 형이냐, 그럼?”
“뭐래. 태어난 순으로 해야지.”
별다른 대꾸 없이 씩 웃은 서윤채는 쟁반을 받아 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체 어디서 찾은 건지 접이식 좌식 책상까지 이미 꺼내 둔 채였다.
“뭐 해? 책 가지고 와서 앉아.”
자연스러운 그의 모습에 채현도 얼떨결에 교과서를 챙겨 자릴 잡았다. 행동에 제동이 걸린 건 그 직후였다. 내가 왜 얘 말을 듣고 있지. 까딱하다간 완전히 말려들어 공부를 시작할 뻔했다.
“아니, 소화도 안 시키고 바로 시작해?”
“그럼 뭐 하게. 소화는 하다 보면 돼.”
“가끔 너 미친놈 같아…….”
“평가가 후하네.”
눈썹을 한 번 들썩인 서윤채는 문제집을 펼쳤다. 기를 쓰고 노력하는 스타일도 아니면서 바로 수학 문제를 풀어 나갔다. 여백을 채운 풀이는 쓰는 이를 대변하듯 무척 곧고 반듯했다.
질리지도 않는 건지…….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채현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펜을 쥐었다. 차마 서윤채처럼 수학 문제를 풀 자신은 없어 영어 지문을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둘뿐인 공간은 고요했다. 소음이라곤 사각거리는 펜 소리와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전부였다. 옆 사람의 기척이 전부 느껴질 만한 정적이었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시험 기간이 되면 자주 지금처럼 같이 공부하곤 했으니까. 몸에 익을 대로 익어 편안한 침묵이었다.
익숙한 환경은 몸의 긴장을 풀리게 하고 느슨함을 불러일으켰다. 닳아 없어지는 집중력에 반해 잡생각은 점차 몸집을 부풀렸다.
“…….”
채현은 영어 문장을 반복해 중얼거리며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문제를 풀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집중력도 뛰어난 건지, 핸드폰이 울리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화면을 밝히는 메시지가 신경 쓰이는 건 외려 채현이었다.
공연히 사기가 떨어진 채현은 슬금슬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드러누웠다.
“나 쉬는 거 아니다. 암기 중인 거야.”
“그래. 파이팅.”
느릿한 대답은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성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꼭 웃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멀뚱히 천장을 보던 채현은 그 음성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그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 두고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편히 풀어진 얼굴로 화면을 확인하는 모습에 채현의 눈 깜빡임이 점차 느려졌다. 일방적인 시선이 향하길 한참, 불현듯 혀 밑에 도사리고 있는 말을 내뱉고 싶단 충동이 일었다.
“윤채야.”
“왜.”
홀로 꾹꾹 삼키던 무형의 생각이 전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때 그 여자애랑 연락해?”
“누구. 김민솔?”
“아니, 말고. 사실 나 제주도에서 너 여자애랑 얘기하는 거 봤거든.”
“제주도? 누구… 아.”
기억을 되짚는 듯했던 그는 이내 ‘매점?’이라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쥐새끼처럼 뭘 숨어서 봤냐. 그냥 나오면 되지.”
“뭔가 그러면 안 될 거 같아서.”
“누가 들으면 뭔 짓 한 줄 알겠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시간이 무색하도록 서윤채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상황을 궁금해하는 것에도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그 여자애랑 연락하는 거야?”
“내가 연락을 왜 해.”
그에 용기를 얻은 채현이 다시금 말을 던졌으나, 돌아온 대답은 퍽 매몰찼다. 낮은 목소리에선 황당하다는 기색이 짙게 묻어났다.
“그때 그 여자애가 인사해도 되냐고 물어봤잖아. 그거….”
“넌 친구끼리 인사를 허락 맡고 하냐.”
“아…….”
고민 없이 흘러나온 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서윤채도 그 여자애가 내보인 호감을 알았다. 그저 친구라는 말로 에둘러 거절했을 뿐.
“이 새끼 뇌에 딴생각만 차 있네. 암기 중이라며. 집중 안 해?”
눈살을 찌푸린 서윤채가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혀를 찼다. 빤히 응시하는 꼴을 보아하니 곧 잔소리를 쏟아 낼 듯해 채현은 꾸물꾸물 책상 앞으로 내려갔다.
“헛소리할 거면 공부나 해.”
“하고 있거든…….”
교과서를 다시 펼치고 내용을 눈에 담는 동안 머릿속을 채운 건 직전 대화였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 조명 하나 닿지 않는 구석에서 홀로 삭이던 질문이 마침내 해답을 얻었다. 왜 그리도 궁금해했느냐 묻는다면, 여전히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지만 입매가 풀어졌다.
“뭘 야려.”
아주 잠시 눈길이 맞붙었을 뿐인데 서윤채는 까칠하게 반응했다. 하여간 말투하고는……. 채현은 입을 삐쭉이며 고갤 돌리곤 얌전히 교과서를 눈에 담았다.
공간은 다시 처음과 같은 공기가 흘렀다. 고요하고 편안했다. 어느 누구의 방해도 없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잘게 부서지는 호흡에 섞이는 웃음 정도였다.
“윤채야, 내일 너희 집에서 공부할까?”
“그러든가.”
또 한 가지. 침묵 속에 대화가 섞였다. 채현이 한마디를 던지면 서윤채가 대답을 들려주는 식이었다. 때론 서윤채가 먼저 질문을 하고 채현이 답을 하기도 했다.
오래된 상념을 털어 낸 덕일까. 근래 들어 머리가 가장 가벼웠다. 드러누운 채 교과서를 보던 채현은 다리를 쭉 뻗었다. 발끝에 서윤채의 다리가 닿은 게 느껴졌다. 고작해야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자세 봐라. 아예 잘 준비를 하네. 잠들면 안 깨워 준다.”
“너 가기 전까지는 안 자니까 공부나 해.”
“나 오늘 안 갈 건데.”
“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서윤채가 뭘 보냐는 듯 눈짓했다. 아래를 깔보는 새카만 눈동자엔 희미한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익숙하디익숙한, 채현이 가장 잘 아는 서윤채의 모습이었다.
“누가 재워 준대?”
서로를 빤히 바라보길 잠시, 채현은 무의식중에 씩 웃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안도를 닮은 미소였다.
* * *
하루는 길고 일주일은 짧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오지 않기를 바란 날은 빠르게 눈앞에 당도해 제 존재를 알렸다.
중간고사를 맞이한 학교는 어수선했다. 학년 첫 시험인 탓인지 긴장 어린 분위기가 교실 안을 감돌았다. 학생들은 일렬로 배열을 바꾼 자리에 앉아 각자 마지막 점검 시간을 가졌다.
요약 노트를 급히 달달 외우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저 시험 기간엔 일찍 끝나서 좋다고 낄낄대는 학생도 있었다. 물론 이미 준비가 끝났는지 여유를 떠는 이도 존재했다.
“선생님, 이 마지막 20분간 뭘 외우면 좋을까요? 제발 살려 주세요.”
“내가 왜.”
“어? 양민 한 번 돕는다 생각하고 어떻게 안 될까요. 10점이라도 더 맞고 싶습니다.”
“웃긴 새끼네, 이거. 뭐. 필기 보여 줘?”
“윤채 형! 감사합니다! 매점 털어다 드리는 걸로 보답하겠습니다.”
“징그러우니까 꺼지기나 해.”
태평하게 자료를 훑어보던 서윤채는 매정한 대답과 함께 노트를 툭 던졌다. 가차 없는 태도에도 정유빈은 서윤채를 모시는 신도처럼 굽실대며 노트 내용을 훑었다. 눈에 불을 켜고 읽는 꼴을 보아하니 시험 직전에 모든 걸 건 듯했다.
채현은 제 교과서를 읽다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는 정유빈의 모습에 킥킥댔다. 서윤채의 눈길이 느릿하게 달라붙은 건 그 직후였다. 그는 비스듬히 턱을 괴고 노트를 향해 고갯짓했다.
“넌 필요 없어?”
“이미 머릿속에 다 있지.”
“자신 있나 본데.”
“어. 전교 1등 한번 해 보려고. 2등은 너 해.”
마치 선심 쓰듯 으스대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서윤채가 헛웃음을 흘렸다. 커다란 손에 반쯤 가려져 있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동시에, 심드렁한 표정을 만드는 데 일조한 눈매가 길게 늘어졌다. 한참을 그리 웃던 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가방을 정리했다.
“가려고?”
정기고사는 부정행위 방지 차원에서 학년과 반을 섞어 진행됐는데, 이번엔 앞 번호가 본 교실에서 시험을 볼 차례였다. 뒤 번호인 서윤채는 1학년 교실로 이동해야만 했다.
“왜. 가지 마?”
“뭐래…. 안녕히 가세요.”
“반응 봐라.”
가소롭다는 듯이 대꾸한 서윤채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일어섰다. 채현은 고개만 살짝 들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아래를 내려다본 서윤채의 눈이 일순 짓궂은 빛을 띠었다. 새카만 눈동자에 어린 장난기는 금세 만면으로 번졌다.
“꼭 전교 1등 해?”
놀리는 기색이 다분한 투로 말한 서윤채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붙잡을 틈도 없이 걸어 나가선 금세 교실 너머로 사라졌다. 요란을 떨어 대던 정유빈도 ‘이따 보자.’ 외치곤 걸음을 서둘렀다.
주변은 순식간에 휑해졌다. 채현은 건너편에 있던 배주희와 눈인사하며 제자리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책을 훑을 때쯤, 바짝 굳은 채 이동해 온 1학년이 빈자리를 채웠다.
“다들 책 넣어라.”
어수선한 교실은 머지않아 침묵에 휩싸였다. 예비 종이 울리는 순간 들어온 선생님은 바로 황색 봉투에서 시험지를 꺼냈다. 먼저 받은 답안지를 작성하는 동안 시험지도 모두 배부되었다.
“본인 학년 시험지 맞는지, 인쇄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시고 이상 있으면 손 드세요.”
첫 시험은 영어였다. 서윤채와 공부하는 내내 반복해서 봤던 과목이라 떨리진 않았다. 공연히 아옹다옹 함께 보낸 주말이 생각나 채현은 시험 직전의 긴장을 잊고 숨죽여 웃었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은 첫 페이지 마지막 문제를 눈으로 읽을 무렵 울렸다. 모두는 고개를 푹 숙이고 펜을 들었다. 따뜻한 히터 바람으로 데워진 공간이 사각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약간의 소음이 간헐적으로 들리는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누구는 몇 번이고 시험지를 넘기며 문제를 확인했고, 누구는 한쪽으로 시험지를 치운 뒤 엎어졌다.
“…….”
채현은 칠판 위에 걸린 시계를 힐끗대며 한 문제씩 풀어 나갔다. 답을 표시하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 * *
시험은 5일 동안 계속됐다. 주말 없이 연달아 이어진 탓에 마지막에 가선 모두 시체처럼 빌빌거렸다. 채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섭도록 멀쩡한 서윤채를 붙잡고 ‘일주일 내내 시험을 보는 건 사실상 학대가 아니냐.’ 토로하다 이마를 얻어맞기도 했다.
“난 왜 이 시간이 제일 싫지?”
“나도.”
끝이 오긴 오는 거냐며 절망하기도 한때, 어느새 성적표를 나눠 받을 시기가 왔다. 과목별 성적은 이미 확인을 마쳐 점수를 알지만 석차 공개는 처음이라 몹시 떨렸다.
“권채현.”
정유빈과 바들바들 떨던 채현은 교탁으로 가 성적이 적힌 꼬리표를 받았다. 잔뜩 긴장하며 확인한 등수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끄트머리에 기재된 석차를 본 채현은 작게 감탄했다.
“채현, 몇 등?”
“야, 나 전교 15등이다.”
“와, 배신자 새끼. 졸렬한 새끼. 음침한 새끼. 공부 안 하는 척하더니 또 나만…….”
“나 원래 시험공부는 해.”
당당히 속삭인 채현의 입매가 잔뜩 풀어졌다. 기대 이상의 결과에 밤까지 새우며 공부한 보람이 물밀듯 몰려왔다. 1학년 마지막 시험 때보다 석차가 올라 더 기쁘기도 했다.
“서윤채도 이번에 존나 잘 보지 않았냐?”
“윤채 수학 전교 1등이래. 다 맞아서. 전체 석차도 높을걸.”
서윤채를 바라본 정유빈이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터뜨렸다. 친구라는 새끼들이 어떻게 위안이 하나도 안 되냐……. 웅얼거리던 그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가 이내 고개를 쳐들었다.
“야, 끝나고 피시방이나 가.”
“애들 다 간대?”
“몰라. 안 물어봤는데. 갈 놈은 가겠지. 일단 너랑 나.”
억지에 가까운 제안이었지만 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채는 당연히 갈 테니, 그를 제외한 애들도 꾀어내 함께 갈 생각을 하며.
종례 이후, 청소 시간을 틈타 다른 반 친구와 떠들던 채현은 서윤채를 발견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 손에 대걸레를 들고 가자 그는 픽 비웃으며 턱짓했다.
“그건 왜 들고 다녀.”
“청소하려고 들고 다니지. 너 오늘 약속 생겼어. 끝나고 피시방 가야 해.”
“이게 이제 아예 통보를 하네.”
“어차피 갈 거면서…. 야, 시험 잘 봤어?”
“그럭저럭. 넌 전교 1등 했어?”
최고 등수를 갱신한 제 성적을 말하려던 채현은 ‘…어?’ 하며 입을 작게 벌렸다. 책상에 걸터앉아 묻는 서윤채의 태도가 오늘따라 더 여유로워 보인 탓이었다.
표정만 봐도 어떤 상태인지 알 만큼 서로에 대해 환했다. 평소에도 천연덕스럽게 굴던 그이지만 지금은 뭔가가 더 있었다. 단순한 질문이라기엔 마음에 걸렸다. 넌 전교 1등을 했냐고……. 골똘히 머릴 굴리던 때 떠오른 건 시험 직전의 대화였다.
분명, 그때 전교 1등 한번 해 보겠다 하며 그에게는…….
“……너 설마 2등 했어?”
전교 2등이나 하라고 했었는데.
“네가 하라며.”
“아니, 진짜 했다고? 진짜? 너 뭐냐? 일단 축하는 하는데, 와…….”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가볍게 뱉은 말을 현실로 만들어 버린 그 때문에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정유빈이 ‘상대적 박탈감 미친다.’ 하며 분개할 모습이 벌써 상상됐다.
“기말 땐 네가 해. 양보할게.”
문제집과 펜을 챙긴 서윤채가 걸음을 옮기며 무심히 한마디 내던졌다. 그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휑하니 교실을 벗어났다. 직전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멍하니 있던 채현은 종이 울리고 나서야 몸을 움직였다.
방과 후 수업은 재미없고 지루했다. 언제 끝날지 고대하며 5분에 한 번씩 시계를 힐끗거리는 게 전부였다. 졸음을 꾹 참고 듣던 채현은 수업이 끝나는 동시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유빈 : 끝나고 1층ㄱㄱ] 오후 5:30 2
얘는 벌써 내려간 건가. 자음으로만 간결하게 답장을 보낸 채현은 서둘러 교실로 이동했다. 가방을 챙기는 동안 반 애들이 계속 들락날락했지만 서윤채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5분쯤 기다렸을까. 채현은 결국 그의 가방까지 챙겨 복도로 나왔다. 가장 먼저 면학실로 찾으러 갔으나 들어서진 못하고 교실 앞에서 멈춰 섰다. 안쪽에서 사납게 울린 목소리 때문이었다.
……방금 서윤채 이름이 들리지 않았나.
욕과 함께 들린 말은 분명 그의 이름이었다. 반쯤 열린 문 틈 사이로 안쪽을 살펴보자, 서윤채는 없고 다른 반 애들 두 명만 보였다.
“이번에 2등 했다던데. 교무실 갔더니 걔네 담임 신나서 떠들고 있더라.”
“지랄하지 말라고 해.”
“수학 만점이라잖아. 원래도 좋아했는데 평균 올려 주는 애니까 더 좋아하겠지.”
“만점은, 씨발. 그 점수를 누가 믿어. 분명 수작질 부렸겠지. 수능 볼 자신은 없으니까, 좆같은 새끼.”
귀 기울여 대화를 듣던 채현은 인상을 구겼다. 서윤채를 찾으러 왔을 뿐인데 찾는 이는 없고 웬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만 들렸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꼭 들으라는 듯이 당당하게 욕하는 그들의 모습에, 채현은 결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더러운 인상의 다른 반 학생이었다. 채현이 알기로 매번 전교 2등을 도맡아 하던 이였고. 평소 행실이 별로인 것에 비해 1학년 때부터 성적이 좋아 기억하고 있었다.
“야, 뒷담 깔 거면 쫌 조용히 까. 밖에 다 들려. 일부러 그러냐?”
“갑자기 들어와서 뭐라는 거야.”
“그리고 서윤채가 수작질을 부리겠냐? 머리 좋은 애가 뭐 하러 그런 짓을 해.”
“염병을 떠네, 씨발. 너는 뭔데 지랄이세요.”
“남 탓할 시간에 공부나 해. 그러니까 매번 2등이고 윤채한테 지는 거지.”
꿋꿋하게 제 말만 늘어놓던 채현은 상대가 굳은 낯으로 눈을 희번덕거리는 걸 목격했다. 아마도 그다음 순간이었다. 그가 몸을 비틀고 팔을 크게 휘두른 것은.
“씹새끼가…….”
“아!”
이렇다 할 틈도 없이 날아온 샤프가 눈가를 세게 긁고 땅에 처박혔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틈이 필요했다. 왼손을 들어 눈가를 짚은 채현은 작게 신음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펜촉이 살갗을 찢은 건지 손바닥에 피가 묻어 나왔다.
“안 그래도 기분 좆같은데 왜 지랄이야.”
이 정도면 살인 미수 아닌가. 잘못해서 눈이라도 찔렸다간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작금의 상황이 너무 황당해 실소를 흘린 채현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살인 미수범은 뻔뻔하게도 눈 하나 깜빡 않고 고갤 쳐들고 있었다.
“재찬, 일단 진정 좀…….”
당황을 떠안은 건 오히려 그 옆에 함께 있던 이였다. 그는 채현과 제 친구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피까지 보리라곤 전혀 예상 못 한 듯싶었다.
주제에 양심은 있나 보지. 그래 봤자 허무맹랑한 말로 서윤채를 욕보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채현은 그들을 노려보며 상처에서 손을 뗐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억울하면 교무실 가서 말해. 아니면 너도 치든가.”
“미친 새끼. 너 뭘 믿고 그러냐?”
한쪽 다리를 꼬아 올리며 말한 그에게서 반성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런 새끼가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대우받는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실수로 그랬다고 하면 조심하라 하고 끝날 일이야. 대학 한 명이라도 더 보내려는 사람들이 생기부 더럽히는 짓을 하겠냐고. 서윤채 편들기 전에 상황 파악부터 해.”
“너나 잘해. 네가 나보다 나은 게 뭔데 훈계야? 서윤채한테 져서 괜히 지랄하는 거잖아.”
곧장 그의 말에 반박하며 내지른 채현은 밑에 떨어져 있던 샤프를 발로 찼다. 조명을 받아 반짝 빛나는 펜촉을 보니 눈가가 더 아픈 듯해 꼴도 보기 싫었다.
“너는 그냥 병원비 물 생각이나 하고 있어.”
마음 같아선 받은 만큼 되돌려 주고 싶었지만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어쨌거나 서윤채가 계속해서 볼 사람이니 이 이상 멋대로 하기 곤란하기도 했고.
재수 없는 낯짝을 한 번 더 노려본 채현은 휙 몸을 돌려 걸었다. 이대로 공간을 벗어난 뒤 일이 커지기 전에 치료나 할 생각이었다. 뒤에서 짓씹듯 중얼거린 말이 들리지만 않았어도.
“…….”
문고리를 쥔 채현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신경을 긁기 위해 뱉은 말임을 알았다. 무시하고 교실을 벗어나면 그만이었는데……. 발이 묶인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징. 핸드폰 진동이 길게 울렸다. 자신을 찾는 누군가의 연락이 분명했다.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현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문을 잠가 버리고 다시 뒤로 향했다.
그 뒤로는 엉망진창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항변하며 손을 든 건지 기억이 희미했다. 잔뜩 화가 나 열까지 올랐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난동을 부리고 나온 뒤에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사고 쳤다는 자각은 있어 더 암울하고 속상했다. 내일이 주말이라 학교에 안 가도 된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씨, 존나 아파…….”
집 근처 놀이터 벤치에 주저앉은 채현은 얼굴 상처를 확인하며 울상을 지었다. 애들에게 같이 못 간다는 연락을 남기고 곧장 집으로 왔는데, 꼴이 영 별로라 결국 길바닥 신세였다.
1 오후 6:18 [너가방나한테있는데낼갖다줄게]
“피시방 갔나.”
심지어 정신없이 오느라 서윤채 가방까지 들고 온 상태였다. 버스에 올라탄 뒤에야 깨달아 연락을 남겼는데 여태 답장이 없었다. 확인도 하지 않는 걸 보니 게임 중인 듯했다.
채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괜히 바닥을 툭툭 찼다. 일을 친 건 후회하지 않지만 뒷수습이 걱정됐다.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 눈가가 갈수록 더 아파져 서럽기도 했고. 혼자 청승 떨고 있는 꼴이 겸연쩍어 자꾸만 시선이 땅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들어가야 안 걸리려나. 멍하니 눈을 끔뻑이며 덜 혼날 방법에 대해 떠올릴 무렵이었다. 자박자박 땅을 밟아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지가 아직도 중학생인 줄 알아요.”
나지막이 중얼거린 기척의 주인은 이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깜짝 놀라 휙 머릴 쳐든 채현은 바로 보이는 서윤채의 모습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애새끼냐? 싸움이나 처하고.”
“어떻게 알았어? 아니, 그리고 뭐, 나도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거든…….”
“네 얼굴만 봐도 알겠는데. 겁대가리 없는 새끼가 왜 안 하던 짓을 해. 너 이모한테 뭐라고 말할래.”
“……넘어졌다고?”
“누가 봐도 처맞은 얼굴인데.”
낯을 훑은 서윤채가 가차 없이 혀를 쯧 찼다. 그 반응에 채현은 괜히 울컥해 두 눈을 부릅떴다. 안 그래도 아파서 서러운데 서윤채가 냉정하게 구는 걸 보니 목울대가 아팠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 가.”
“알아서 하긴 뭘 해. 이거나 먹어.”
그의 품 안에 가방을 안기며 가라고 떠밀었으나, 서윤채는 편의점 봉투를 휙 던질 뿐이었다. 안에는 아이스크림과 이온 음료가 들어 있었다.
“입술 터진 거 봐라. 안 울었어?”
“울긴 누가…….”
놀리는 건지 달래는 건지 모호한 음성이 다정하게 귓가에 닿았다. 채현은 웅얼웅얼 답하며 봉투 안 내용물을 꺼냈다. 음료는 그에게 건네고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찢으려 부스럭거리니, 머지않아 서윤채가 피식대며 가로채 갔다.
“야. 내놔.”
봉지를 찢은 그는 이렇다 할 틈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렸다. 갑작스레 퍼지는 냉기에 깜짝 놀라 바라보자 뭘 보냐는 듯 가볍게 턱짓했다.
“뭐 해. 씹어.”
채현은 직접 막대를 잡고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혀끝에 느껴지는 달콤함에 침이 고였다. 끄트머리를 씹어 삼키자 웃기게도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서윤채의 고개가 기울고 빤한 시선이 쏟아졌다.
“할 말 없냐?”
“……존나 맛있어?”
“뭘 바라냐.”
나직하게 대꾸한 그는 실소를 흘리며 벤치 깊숙이 기대앉았다. 정면으로 눈길을 옮긴 서윤채를 대신하듯 그를 바라본 채현은 ‘고마워.’ 속삭이며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었다.
“진짜 왜 싸웠는데.”
말없이 옆자리를 지키던 이는 나무 막대를 봉투에 넣을 때쯤 침묵을 깼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빛과 어우러지는 목소리였다.
“말 안 해.”
“왜.”
“내가 너한테 다 말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
그답지 않게 정색한 채현은 거절을 표했다.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기도, 치고받고 싸울 만큼 기분이 더러웠던 말을 들려주기도 싫었다. 애초에 너 때문에 싸운 거라 으스댈 생각도 없었고.
“안 말할래. 더러워. 너 귀 썩어.”
“뭐…. 그래. 네 마음대로 해. 근데 앞으로 싸울 거면 머릿수 맞춰서 싸워라. 쪽수가 후달리니까 처맞는 거 아니야.”
놀이터만 바라보던 서윤채가 불시에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온몸으로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내보이던 그는 이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 둬서 뭐 해. 써먹어. 처맞고 다니지 말고.”
바람결에 몸을 실은 음성이 훅 다가와 내려앉았다. 진심과 장난이 반쯤 섞였을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뭐래……. 됐어. 나 운동할 거야.”
“오, 무슨 운동. 함 뜰까 지금? 어?”
흠칫 놀라며 눈을 피한 채현은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윤채는 주먹으로 장난스럽게 어깨를 툭 쳤다.
“아, 치지 마.”
“왜. 운동한다며. 예습한다고 쳐.”
낮게 웃은 그는 꼴답잖은 양아치 흉내를 내며 장난을 쳐 댔다. 세게 때리는 건 아니라 아프진 않았지만 이유 없이 맞긴 싫었다. 하지 말라니까……. 그를 흘겨보던 채현은 주먹을 피할 요량으로 몸을 움직였다. 합이 완전히 어긋난 것처럼 주먹이 터진 입술에 닿은 건 그 직후였다.
“아!”
“아, 씨발. 나 봐 봐. 입술 찢어졌어?”
서윤채는 맞은 당사자보다 당황하며 표정을 무너뜨렸다. 심각한 얼굴로 뺨을 감싸 쥐고 입술 상처를 살피기까지 했다.
“아, 존나…. 권채현, 미안. 아파?”
채현은 그런 그 때문에 더 놀라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서윤채는 인지하지 못한 듯한데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숨결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야……. 너 지금 콧김 완전 세.”
“닥쳐 봐. 아, 씨발. 피 또 나잖아.”
유례없이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채현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피 난 건 난데 왜 네가 당황하냐? 나 때려서?”
“누가 누굴 때렸다고….”
“네가 나를. 10년 우정 별거 없다.”
“13년. 계산 안 되냐?”
“그런 거로 트집 잡지 마.”
“일어나. 약 바르러 가게.”
가방 두 개를 다 들고 일어선 서윤채가 손짓했다. 터진 입술을 보는 시선이 퍽 암담해 채현은 킥킥대며 몸을 일으켰다. 병 주고 약 주기. 작게 속삭이자 서윤채는 대답 없이 뒷머리만 헝클이곤 평소보다 느리게 걸었다.
채현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실없이 웃었다. 서윤채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바닥을 기었는데 지금은 입매가 계속 허물어졌다. 걷는 길에 눈에 띈 붉은 전광판을 보며 장난칠 만큼.
“서윤채, 저거 봐. 내 입술 색이랑 똑같다.”
“아, 미안하다고.”
“그럼 너도 입술 터져 볼래?”
“터뜨리든가.”
“진짜?”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라 깜짝 놀라 바라보니, 서윤채도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의중을 묻듯 눈썹을 들썩였다.
“때릴래? 눈 감아?”
“어? 아니? 잠깐……. 보류돼?”
“뭔 보류야. 너 나 패고 싶냐?”
“응. 아니.”
“어느 쪽이야.”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은 서윤채는 금세 시선을 거뒀다. 그의 눈길이 향한 정면에 편의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 진짜 아주 가끔 너 재수 없어서 패고 싶을 때 있긴 해. 근데 안 그럴 때가 더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고맙다…. 닥치고 있어 봐. 입술 움직이니까 피 더 나는 거 같아.”
상처를 힐끗거린 서윤채가 떫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마디 더 했다간 뒷목을 잡을 듯해 채현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 앞에 도착하자, 서윤채는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순식간에 연고를 사 오더니 야외 테이블로 이끌었다. 채현은 얌전히 그의 손짓을 따라 자릴 잡고 앉아 치료를 받았다.
“여기도 맞아서 이래?”
“아니. 샤프 던진 거에 긁혔어. 나 실명될 뻔했다.”
“미친 새끼네, 그거. 너도 같이 찢어 놓지 그랬어.”
서윤채는 험악하게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손을 놀렸다. 직접 해도 되는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어색하진 않았다. 이런 것쯤이야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서윤채도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행동하는 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마찬가지였다. 서윤채는 괜찮다는 채현의 만류에도 집 근처까지 함께 움직였다. 꽤나 걱정이 됐던 모양인지 가방과 연고를 들려 보낸 뒤에야 걸음을 물렸다.
“…….”
늦은 밤, 자려고 누운 채현은 새것과 다름없는 연고를 응시하며 히죽댔다. 하여간 서윤채 유난은 알아줘야 했다. 그가 난리 법석을 떨어 댄 덕에 낮에 쳤던 사고가 잊힐 지경이었다.
얼마간 물끄러미 시선을 흘렸을까. 연고를 담아내던 눈 깜빡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든 건 거의 동시였다. 채현은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시야를 가렸다.
갈피를 잃은 시선 대신 기억은 착실하게 한순간으로 흘렀다. 생전 안 하던 싸움을 한 탓일까. 그 끝에 서윤채를 만난 탓일까. 머릿속이 온통 그로 뒤덮였다.
“…….”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움직이던 긴 속눈썹이, 부드러우면서 오뚝한 콧대가, 꾹 다물린 붉은 입술이, 집중한 표정이, 새까만 눈동자 가득 담긴 제 얼굴이 선명하게 다 떠올랐다.
“미친, 얻어맞은 게 충격이었나.”
기억을 되짚던 채현은 사색이 된 채 베개를 꽉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이상하게 심장이 콩닥거렸다.
* * *
시험이 끝난 학교는 늦봄과 어울리는 공기로 가득 찼다.
날이 섰던 분위기는 유해지고 학생들은 한껏 해이해졌다. 시험공부를 하며 고생한 보상을 받듯 편안한 날이 주를 이뤘다. 화기애애한 환경에서 모두는 체육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
그에 반해 채현의 낯은 어둡게 물들었다. 평소처럼 웃고 떠들어도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한 탓이었다. 머릿속은 시험 기간보다 복잡해지고 속은 여느 때보다 시끄러웠다.
다행인 점은 최근 며칠간 느낀 혼란의 모체를 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바로 곁에서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으므로. 떨떠름한 심정을 숨기지 못한 채현의 시선이 서윤채를 향했다.
“…….”
그날 이후부터였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 서윤채에게 신경이 흐르는 것은.
대형 사고를 친 주제에 다 잊은 양 웃어 댄 까닭인지. 붉은빛과 푸른빛으로 오묘하게 섞인 저녁 하늘이 뇌리에 박혔기 때문인지. 암울한 순간 대신 소소한 찰나를 기억에 새긴 덕인지……. 정신을 차리면 이미 시선이 그를 향한 뒤였다.
한데, 불행히도 시선이 향하는 이유가 모호했다. 대체 왜 서윤채를 신경 쓰는 걸까. 이끌리듯 시선을 내주면서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왜?’라는 물음은 여전히 답을 구하지 못한 채였다.
이전 상황과는 문제부터가 달랐다. 그에게 서운했던 건 함께하는 당연한 일상을 누리지 못해서였다. 불안의 색을 띤 불만을 가진 건 오래된 만큼 소중한 관계가 변할까 염려된 탓이었고.
적어도 그땐 납득 가능한 연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 원인을 계속 생각하다 보니 자연히 행동도 어색해졌다. 서윤채 앞에만 서면 반응이 느려지고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게 됐다. 그가 움직이기라도 하면 덩달아 움찔대는 일의 연속이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
“아니?”
“근데 왜 자꾸 똥 마려운 개처럼 굴어. 가만히 좀 있어라.”
눈치 빠른 서윤채가 그를 알아채는 건 당연했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상황이지만 채현은 정신을 다잡았다. 허상과도 같은 의문에 언제까지고 얽매여 있을 순 없었으니까.
“뭐래……. 개 취급 사절한다.”
채현은 주의를 분산시키며 교실을 훑어보았다. 꽃망울을 터뜨리며 만개했던 계절이 지는 시기인 탓인지 공간은 점심시간인데도 한산했다. 한자리를 차지하고 떠드는 서너 명과 교탁 앞 컴퓨터로 영상을 보는 이들이 전부였다.
멍하니 시선을 옮기던 채현은 칠판에 붙은 종이를 발견하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저건 언제 붙인 거지. 두 장의 종이엔 체육대회서 입을 반티 후보가 인쇄되어 있었다. 결론이 나질 않아 투표를 진행한다더니 반장이 뽑아다 붙인 모양이었다.
“너희 반티 투표 뭐로 할 거야?”
“뭘 물어. 당연 농구 유니폼이지.”
“체육복이랑 똑같이 생긴 농구 유니폼을 뭐 하러 돈 주고 사.”
“편한 게 최고다, 주희야.”
“뭘 모르는 소리 하네. 체육대회 땐 무조건 튀는 게 최고야.”
애들 사이에서도 쉽사리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문자만 하던 배주희는 열렬하게 제복이 최고라 항변했다.
“응원상 평가에 반 단합이랑 센스도 분명 들어갈 텐데 저 유니폼을 입겠다고?”
“그냥 경기 이겨서 종합 우승 노리면 되지 무슨 응원상이야.”
“우리 반이 이길 수 있는 종목이 뭐가 있어.”
“존나 많지. 줄다리기 우리 거고. 농구도 이미 우승한 거나 마찬가지지. 우리 다 나갈 건데.”
넌지시 눈치를 주는 정유빈의 몸짓에도 서윤채는 심드렁했다.
“누가 그래. 나 안 할 건데.”
“김정훈 기절하는 소리 하고 있다.”
기겁한 정유빈은 꼭 배신당한 사람처럼 굴었다. 체육부장을 운운하지만 실은 본인이 기절하기 직전인 양.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채현은 덤덤했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서윤채가 순순히 참여한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너 잘하잖아. 우리 반 이기려면 너도 해야 해.”
“뛰면 땀나서 싫어. 우리 채현이가 내 몫까지 하고 와.”
다만, 모두가 인정하듯 참여 명단에서 제외하기엔 아까운 실력이라 포기할 순 없었다.
“너 써먹으라며.”
지난번 일을 언급하며 속삭이자 그는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 이 새끼가 이걸 이렇게 써먹네.”
“농구는 진짜 머릿수 맞춰야 해.”
핸드폰에서 눈을 뗀 서윤채의 눈매에서 황당함이 묻어났다. 꼭 눈으로 ‘그렇게까지 이기고 싶냐.’ 묻는 듯했다. 채현은 긍정의 의미를 담아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본 서윤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 뿐이었다. 모호한 반응이었지만 뜻을 알기엔 충분했다.
……반티 투표 농구 유니폼에 해야겠다.
서윤채가 참여하리란 확신을 얻은 채현은 마음을 굳혔다. 그를 기준으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
“그래. 권채현이 혈투를 벌였는데 서윤채도 그쯤은 해 줘야지.”
“아, 진짜 작작 해라.”
눈가 상처를 가리키는 정유빈에게 채현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너스레를 떨어 댔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죽어라 웃더니 계속 놀려먹고 있었다.
면학실에서 다툰 건 결국 소문이 났다. 다행히 크게 혼나지는 않았지만 상처 난 얼굴로 돌아다니기 머쓱한 상황이 됐다.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이 없던 채현으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친구라는 놈이 짓궂게 굴어 더 곤란했고.
“다음에 또 싸울 거면 꼭 불러라. 관전하게.”
“꺼져.”
“진짜 미친 새끼. 다시 생각해도 웃기네. 하. 근데 쟤는 아까부터 왜 혼자 실실대?”
실컷 웃다가 사레까지 들린 그는 숨을 고르며 배주희를 힐끗거렸다. 시선을 알아챈 그녀는 밝기를 최대로 높인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귀엽지.”
전혀 관심이 없는 서윤채를 제외한 모두가 화면 속 인물을 눈에 담았다. 셀프 카메라로 찍은 듯한 사진엔 해맑게 웃으며 브이를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얘가 누군데.”
“의찬이. 밥 먹고 축구 한대.”
“씨발, 괜히 봤어. 커플 꺼져.”
“부러우면 너도 연애해.”
가볍게 대꾸하는 그녀는 기분이 꽤나 좋아 보였다. 격한 정유빈의 반응에도 시종일관 헤실대며 손을 움직였다. 온갖 신경은 핸드폰 너머 상대에게로 향한 채였다.
“연애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거냐고. 안 그러냐, 아영아.”
“왜 날 콕 찍어서 말해? 난 연애 안 하는 거야.”
연애를 주제로 떠드는 애들 틈에서 채현은 골똘히 머리만 굴렸다. 물끄러미 시선을 흘리다 보니 이상하게 위화감이 든 탓이었다. 어쩐지 생각이 많아지고 지난 며칠을 떠올리게 됐다. 주위 환경이 어떠하든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이 엿보였으므로.
생각의 꼬리를 밟아 올라가던 채현은 다시금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무심코 입가도 매만져 보았는데 다행히 웃고 있진 않았다. 그저, 계속 그래 왔듯 시선 안에 서윤채를 둘 뿐이었다.
뭘까. 대체 왤까.
또 한 번 심각하게 제 상태를 되돌아보던 찰나 서윤채와 눈이 마주쳤다. 할 말이 있냐는 듯 눈짓하는 모습에 채현은 고갤 좌우로 젓고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내가 눈을 왜 피하지?’ 싶어 다시 머릴 쳐들었다. 그때까지 빤히 보고 있던 서윤채와 곧장 눈길이 얽혔다.
“왜.”
“너는 뭐.”
지기 싫어 눈빛을 주고받다 보니 때아닌 눈싸움이 벌어졌다. 기를 쓰고 맞받아치던 채현의 시선은 서윤채가 눈을 깜빡인 순간 주위로 흘렀다.
얘는 뭐 눈매도 저렇게 생겼냐. 입꼬리는 왜 위로 솟은 거야. 피부는 예전부터 하얗더니 변하질 않네. 머릿결도 주인을 닮는 건가……. 서윤채의 낯을 따라 그리던 눈길이 멎은 건 그가 비웃은 뒤였다.
“눈 벌게진 거 봐라. 누가 보면 우는 줄 알겠어.”
“……내가 이겼지.”
“그래. 축하해. 무서우니까 눈 좀 깜빡여.”
채현은 그제야 시린 눈을 질끈 감고 눈가를 꾹꾹 내리눌렀다. 잔상처럼 남은 서윤채를 지워 없애듯 손을 놀렸다. 그사이 예비 종이 울려 5교시 체육 수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윤채.”
가서 농구 연습이나 하자는 말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향하던 와중, 서윤채의 친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분위기가 꽤 심각해 채현은 조금 떨어져 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로는 동아리와 관련된 이야기지 싶었다.
몇 마디 나눈 친구는 의견이 안 맞는지 먼저 휙 가 버렸다. 기분이 상해 보였는데 서윤채는 무심하기만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채현이 걱정할 정도였다.
“쟤 그냥 가게 둬도 돼?”
“알아서 하겠지.”
“화난 거 같은데.”
“상관없어.”
딱 잘라 말하는 그는 냉정하다 싶을 만큼 친구에게 관심이 없었다.
“너도 진짜 무섭다…….”
“뭐라는 거야. 물기나 닦으세요. 입술 터졌다는 자각이 없지?”
서윤채는 잔소리를 닮은 타박을 내던진 뒤 앞서 걸었다. 채현도 그를 따라 재차 걸음을 옮겼다. 한 발씩 내딛는 사이 작은 궁금증이 차올랐다.
서윤채는 나랑 싸워도 상관없단 말로 일축할까. 모르는 사람인 양 취급할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움직임이 느려졌다. 정면을 향한 곧은 뒷모습이 보였다.
“…….”
세 걸음. 고작해야 세 걸음 앞에 있는 서윤채를 따라잡는 게 어쩐지 어렵게 느껴졌다.
확신 없는 의문은 이윽고 망설임을 불러일으켰다. 형체 없는 주저는 행동을 통해 드러났고. 수업 종이 친 뒤에도 채현의 걸음은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와 엇비슷했다.
“걷고 있긴 해?”
코너를 돌다 뒤를 힐끗거린 서윤채가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당연히 먼저 갈 줄 알았던 그는 제자리에서 잠자코 기다렸다. 거리가 좁혀지자 목덜미를 낚아채 끌고 가다시피 하기까지 했다.
왜 안 버리고 가지. 직전에 친구와 다투던 모습과 상반돼 더 의문이었다. 채현은 어정쩡한 자세로 끌려가며 서윤채를 살폈다. 돌아온 건 용건 있냐는 듯 까딱이는 고갯짓이 전부였지만.
“……그냥 빨리 걸으라고 말로 하면 되지. 누가 보면 개 산책시키는 줄 알겠다.”
“개도 너보다 빨리 걸어.”
나직한 목소리가 흘린 말은 친절과 거리가 멀었다. 태도며 눈빛이며 상냥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데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대체 뭐가 뭔지……. 채현은 실소를 흘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서윤채도 별다른 반응 없이 팔을 거두고 걷기만 했다. 두 사람임을 알리듯 겹쳐진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발끝에서 피어나는 소음은 체육관 앞에 다다를 때까지 멎지 않았다. 작은 기척에 기대어 움직이는 동안 술렁이던 마음은 천천히 진정되었다.
“…….”
채현은 먼저 내부로 들어간 서윤채를 뒤따르다 건너편을 확인하고 멈칫했다. 때때로 다른 반과 수업이 겹쳐 공간을 나눠 쓰곤 했는데 지금도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특별히 불편한 건 없었지만 눈에 박힌 인물이 문제였다.
아무리 속이 좋아도 치고받고 싸운 놈과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채현은 괜히 상처 부위가 아픈 듯해 인상을 구기며 자리로 향했다.
“쟤지?”
먼저 줄 맞춰 서 있던 정유빈이 뒤를 턱짓하며 속삭였다. 채현이 긍정하는 동시에 서윤채도 시선을 옮겼다. 무심히 눈을 깜빡인 그는 시간이 꽤 지나서야 정면을 바라보았다.
상황은 더 거북하게 흘러갔다. 지난 시간에 이어 진도나 나갈 줄 알았더니 별안간 합동 수업을 하게 된 탓이었다. 두 체육 선생님은 반별 피구 시합이나 하라며 공을 던져 주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와중에 채현만이 떨떠름한 낯을 해 보였다. 쟤랑 마주 보고 경기를 해야 한다니. 공으로 안면이나 안 터뜨리면 다행이었다.
“타이밍 좆된다. 야. 이참에 한 판 더 떠.”
안 그래도 심란한데 정유빈은 낄낄거리기 바빴다. 응축된 숨을 터뜨리며 코트 안으로 향하던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새끼와 눈까지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노려보자 그는 조소를 띠었다.
“처웃네….”
서윤채도 그 모습을 본 건지 낮게 뇌까렸다. 상체를 숙인 그는 귓가 가까이 고개를 갖다 댔다.
“깽값 받았어?”
“아니.”
가끔 눈가가 아플 때마다 억울하긴 했지만, 병원을 가지 않아 치료비를 청구하기 뭐했다. 어차피 그 정도로 큰 상처도 아니었고. 일이 마무리된 것에 만족하고 있던 이유였다.
“그래?”
한데 서윤채는 아닌지 답하는 음성이 묘했다. 한 걸음 앞으로 가 뒤를 돌아본 채현은 뭐라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윤채만 보았다. 그는 정면을 직시하며 비뚜름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도 찢어 놓을까.”
“……뭐를?”
“쟤.”
날렵한 턱을 자랑하듯 고갤 기울인 그가 턱짓했다. 삐딱한 몸짓이 가리킨 상대는 분명했다.
“억울하잖아. 쪽수 후달린 것도 빡치는데.”
“아니, 싸운 건 난데…. 그리고 나 이제 괜찮은데…?”
“채현이 호구야?”
시선을 거둔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무릎만 까져도 아프다고 지랄하는 새끼가 퍽이나 괜찮겠다. 티 존나 나는데 왜 구라를 쳐.”
어쩌면 자신보다 저에 대해 잘 아는 게 서윤채였다. 꼭꼭 씹어 뱉듯 흘린 말이 전부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저 조금 민망하고 어색할 뿐이었다. 꼭 그가 편을 들어 주는 듯해서.
각 반에서 한 명씩 나와 떨어지는 공을 붙잡고 선공을 결정짓는 순간, 서윤채도 생각을 정리했는지 얄망궂게 웃었다.
“내가 쟤 대가리 터뜨려 줄게.”
짓궂은 속삭임에 대답하기도 전에 시합이 시작됐다. 때가 타 더러워진 피구 공이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진영을 빠르게 오갔다.
인원이 많은 초반엔 다들 우후죽순으로 탈락하며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운동깨나 한다는 이들은 자신 있게 앞으로 나가 공격에 가담했고, 어떤 이들은 살살 때려 달라 부탁하며 일부러 수비 쪽으로 빠졌다. 중앙선을 딱 밟고 서서 몸을 은신하는 이도 있었다.
적당히 움직이던 서윤채가 공을 낚아챈 건 공간이 조금 한산해진 뒤였다. 그는 상대 진영을 살피더니 ‘존나 많네.’ 중얼거리곤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아, 씨발!”
빡. 직후 대가리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다들 놀라 쳐다볼 만큼 엄청난 세기였다. 머리를 감싸 쥐고 욕을 내지른 이는 당연히 그 새끼였다.
“어…. 미안?”
채현도 당황을 금치 못한 순간 서윤채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한 기색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투로 사과까지 했다.
“씨발, 공 하나를 제대로 못 던져.”
“어디 가? 머리 맞으면 아웃 아닌데.”
끝내는 코트 밖으로 나서려는 그를 상냥히 붙잡아 그대로 머물게 했다. 상대가 바라지 않는 친절은 불친절보다 언짢은 법이었는데.
와. 진짜 친구라서 다행이다……. 채현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 서윤채를 쫓았다.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한편 가증스럽기도 해 제 위치가 새삼스레 감사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욕하며 공을 든 그의 공격을 시작으로 경기가 계속됐다. 상대도 처음보다 세게 공을 내던져 우리 팀 몇이 연달아 수비 진영으로 이동했다.
물론 그사이에 서윤채도 상대 팀 여럿을 죽였다. 공이 날아오는 족족 그가 낚아채 채현이 나설 틈도 없었다. 직전처럼 세게 던지진 않았지만 놀라기엔 충분했다. 늘 귀찮아하는 서윤채가 이 정도로 열심히 한 적이 없었으므로.
“서윤채!”
대가리를 터뜨린다는 말이 진심이었구나. 할 수 있는 추측은 그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비 진영에서 넘어온 공을 잡는 동시에 그 새끼 머리를 노려 던질 리가 없을 테니까.
빠악. 아까보다 조금 더 크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여태껏 다른 애들만 노려 방심한 건지, 운동 신경이 원래 쓰레기인 건지 상대는 너무 쉽게 또 얻어맞았다.
“대가리가 비어서 그런가. 소리도 존나 크네.”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엔 낮잡아 보는 기색이 가득했다. 채현은 속으로만 작게 감탄했다. 상대도 꼭지가 돌았는지 서윤채에게 공을 던졌지만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공격과 수비를 반복하며 몇 번이나 공이 오갔을까. 코트에 남은 이가 두 명이 된 순간이었다.
“아… 이제 씨발 머릿수가 맞네.”
가볍게 공을 가로챈 서윤채가 휙 패스하며 짓씹듯 말했다. 상황 파악이 덜 된 채현이 눈으로 묻자 상대편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채현도 그제야 눈치를 채고 상대를 훑었다. 서로 둘씩 남은 상황에서 떠오르는 건 홀로 고군분투했던 지난 다툼이었다.
이게 뭐라고 웃음이 나는지. 끝내 머릿수를 맞추고야 마는 그의 집념에 긴장이 풀렸다. 채현은 입매를 허물어뜨리고 재수 없는 낯짝을 지나쳐 다른 애부터 공격했다.
“유치하게, 씨발….”
수비로 나간 이들과 공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코트에는 그 새끼 혼자였다. 그도 이제 와 그냥 죽기엔 자존심이 상하는지 눈을 부릅떴다.
서윤채는 공을 받으면 던지는 대신 넘겨주었다.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식이었다. 체력도 남아도는 마당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안면을 뭉개 버려. 코피라도 터지면 더 좋고.”
“안 돼. 죽여야 하잖아.”
“아…….”
어깨를 으쓱인 서윤채의 품 안에 착 공이 안겼다. 그는 미련 없이 패스한 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채현은 공을 받고 이 악물며 팔을 휘둘렀다.
제 눈가가 아팠듯 똑같이 느끼게 해 주고 싶었지만 시합은 시합이었다. 머리는 노 아웃이니 탈락이 가능한 부위를 노려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퍽. 이윽고 울려 퍼진 시합 종료를 알리는 소음은 경쾌했다. 채현은 너무 통쾌해 소리 내어 웃으며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야. 너 진짜 뭐냐?”
속이 다 시원하다고, 그 새끼 표정 봤냐고 말하려던 채현이 숨을 죽인 건 다음 순간이었다.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넘기던 서윤채는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피식댔다.
“쓸 만하지?”
조용히 울린 목소리는 낮고 짓궂었다. 그런데도 다정히 다가와 귓가에 닿았다. 약간의 장난기를 묻힌 채 속삭인 그는 말을 맺고 반대편 코트로 들어갔다. 채현은 바로 뒤쫓지 못하고 그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
퉁. 누군가 던진 공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또 다른 무언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어떠한 거센 힘에 의해 아래로 이끌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뭐 해. 안 오고.”
“어? 어……. 지금 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던 밤, 이불 하나에 의존해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던 그 순간처럼.
* * *
채현이 처음 겪는 혼돈에 당황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시계를 빨리 감기라도 한 듯 하루하루가 지나 체육대회 날이 밝았다.
학교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한철 반짝이고 끝나 가는 계절 틈새로 흘러들어 온 초여름의 공기가 주위를 에워쌌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면 그에 화답하듯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활기차게 즐기는 동안, 채현은 반쯤 고장 난 채로 상황에 어울렸다. 서윤채를 보며 동요했던 일이 잊히지 않아 분위기에 맞추면서도 연신 속이 요동쳤다.
옷을 갈아입은 채현은 헤어밴드까지 착용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서윤채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마찬가지로 환복을 끝낸 그의 모습에 헛웃음만 나왔다. 분명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새파란 농구 유니폼인데, 혼자서만 다른 옷을 입은 양 근사해 보였다.
이쯤 되면 서윤채가 문제인 건 아닐까. 여태껏 자신에게서 혼란의 원인을 찾던 채현은 멍하니 서윤채를 살폈다. 책상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만지던 그는 곧이어 시선을 느끼고 턱짓했다.
“뭘 봐.”
“……뭐. 쫌 보면 안 되냐?”
“어. 안 돼. 네가 보면 닳아.”
“너 진짜 재수 없다.”
서윤채 때문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대답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익숙해질 때 안 됐어?”
물 흐르듯 대꾸한 서윤채는 짓궂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 내던져 뒀던 헤어밴드를 챙겨 움직이더니 건방지게 손을 까딱였다.
“이리 와 봐.”
“왜?”
“일단 좀 와 봐. 내가 뭐 해?”
채현은 경계를 바짝 세우고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멀끔한 낯짝 위로 떠오른 미소에 괜히 불안해졌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선 순간 머리를 움켜쥔 서윤채는 헤어밴드를 씌우고 목까지 끌어 내렸다.
“아, 진짜! 너 뭐 하냐…?”
버둥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던 채현은 황당함을 담아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채현이 목걸이 만들어 주는 중.”
“뭐래. 지금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나한테 버린 거잖아.”
“말을 섭섭하게 해. 거울 볼래? 존나 잘 어울리는데.”
그는 목에 걸린 것이 메달이라도 된 양 감탄하며 톡 건드렸다. 장난스러운 기색이 손끝에서까지 묻어났다. 누가 누구 보고 애새끼라는 건지……. 서윤채를 흘겨본 채현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몸을 휙 돌렸다. 어쩐지 그의 손이 닿았던 살갗이 화끈거리는 듯했다. 뒤따르는 이의 기척도 몹시 신경 쓰였지만 꿋꿋이 앞만 보고 걸었다.
도착한 운동장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스탠드를 중심으로 펼쳐져 앉은 각 반이 계단을 꽉 채운 채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옷을 갖춰 입은 이들은 응원 도구를 사용하며 큰 소리를 냈다. 본격적인 행사는 시작도 안 됐는데 의지가 대단했다.
― 모든 학생은 운동장으로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회식과 준비 체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바로 이어 시작된 50m 달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옆 반은 아예 커다란 깃발을 만들어 와 흔들어 대기까지 했다.
“쟤네 깃발 뭐야? 작정을 했는데.”
“야. 장비빨에 지진 말자. 더 크게 응원해.”
시시덕거리던 이들이 덩달아 승부욕을 불태우는 건 당연지사였다. 나사 하나가 빠진 상태인 채현과 일관되게 심드렁한 서윤채를 제외한 모두는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경기는 동시에 두 종목을 실시하며 진행되었다. 운동장을 두 구역으로 나눠 한 곳에선 단체 줄넘기를, 반대편에선 줄다리기 경기를 했다. 하도 복작거려 정신이 없긴 했지만 학생회의 진행에 따라 퍽 순조롭게 이어졌다.
― 2학년 2반과 2학년 7반 줄다리기 경기 준비해 주세요.
스피커를 통해 울린 부름에 모두는 우르르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2반 우승 가자! 무조건 누워!’ 큰 소리로 외치며 패기 넘치게 밧줄을 잡았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삽시에 질질 끌려가 아쉽지도 않았다. 정유빈은 최단 경기 시간을 경신했을 거라며 어이없어했다.
“씨름 나갈 새끼들이 왜 다 줄다리기를 나온 거야.”
그에 동의하던 채현은 이내 음료수만 챙겨 공간을 벗어났다. 옆 친구와 이야기하던 서윤채가 어딜 가냐는 듯 눈짓했지만 무시하며 자리를 떴다.
한동안은 경기가 없어 자유 시간이라 봐도 무방했다. 어차피 곧 점심시간이기도 했고. 소란의 중심지에서 한 발짝 멀어진 채 홀로 돌아다녔지만 적적하진 않았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어우러져 밀려온 생기가 곁을 채웠으므로.
“…….”
선선한 바람은 딱 기분 좋을 만큼 살랑였다. 한껏 예민해진 마음이 쉽게 자극받아 지치지도 않고 술렁거렸을 뿐. 파장을 일으키는 건 당연하게도 서윤채였다.
“……기가 허해졌나?”
아니면 미쳤거나. 채현은 한숨 같은 웃음을 토해 냈다. 오랜 친구를 보며 떨려 하다니. 제 상태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착각일 게 분명한 순간에 지금껏 사로잡혀 있는 것도 기가 찼고.
처음 겪는 혼란에 당황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 이상은 곤란했다. 찰나에 매몰돼 하릴없이 곱씹는 상황 역시 사절이었다. 정신을 좀 차릴 필요가 있었다.
더는 신경 쓰지 말자. 크게 숨을 내쉰 채현은 머릿속 서윤채를 지우고자 주위 것들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족족 눈에 담으며 주변을 빙빙 도는 동안 시간은 훌쩍 흘러 점심시간이 됐다.
“혼자 어딜 싸돌아다녀?”
“산책 좀 했다.”
“잠깐을 가만히 못 있지.”
서윤채는 별것도 아닌 일로 건수 잡은 양 굴다가 밥이나 먹자는 듯 턱짓했다. 그대로 급식실로 향해 식사를 끝낸 뒤엔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다음 경기인 농구가 종목 특성상 운동장이 아닌 실내서 진행되는 탓이었다.
“서윤채 너 귀찮다고 대충 하면 안 된다.”
“너나 잘해. 의욕만 앞세우다 사고 치지 말고.”
사탕을 씹어 먹던 서윤채는 실소를 흘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에 질세라 채현도 몸을 쭉 늘어뜨리고 스트레칭했다. 함께 참여하는 이들과 전략을 되새기는 동안 시간이 돼 코트 위로 올라섰다.
심판의 신호에 시작된 경기는 느낌이 좋았다. 일단 내던지고 보는 채현과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3점 슛을 쏘는 서윤채가 주축을 이뤄 점수를 쌓았다.
마룻바닥을 튕기는 공 소리와 운동화 밑창이 마찰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그물망을 통과하거나 아쉽게 골대를 빗맞을 땐 주변의 응원도 덩달아 커졌다.
채현은 날쌔게 코트 위를 누볐다. 딱 두 점이 뒤처진 상황이라 가능성이 있었다. 한 골만 더 넣으면 동점에 연장전이다. 오로지 그 생각으로 이 악물고 코트를 뛰어다녔다.
만회할 수 있는 점수 차. 계속해서 끝을 향하는 시간. 희망과 절망 사이에 서서 최선을 다했으나 추는 절망 쪽으로 기울었다. 차라리 그뿐이었으면 좋으련만. 시합 종료를 알리는 호각이 울린 순간, 채현은 들러붙은 이들 틈에서 발이 엉켜 넘어졌다.
“아씨, 아…. 내 무릎 박살 났어….”
“그래 보인다. 너 넘어지는 소리가 쟤들 함성보다 컸어.”
쯧 혀를 차며 가까이 다가온 서윤채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주저앉았다. 그는 가지가지 한다는 얼굴로 시뻘게진 부위를 힐끗거렸다.
“너 지금 존나 쪽팔리지.”
“알면 묻지 마라…….”
“우리 채현이는 참… 다방면으로 사고도 잘 쳐? 그만 낑낑대고 일어나기나 해.”
채현은 울상을 한 채 서윤채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운동장에 있는 운영 본부로 향할 때도 수치심이 더 크게 몰려왔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하고 있단 사실에 더더욱.
불행 중 다행으로 큰 이상은 없었다. 위급 상황을 대비해 대기하고 있던 보건 선생님은 친절히 연고를 발라 주었다. 찜질팩도 내주기에 하고 있으려니 신제윤이 다가왔다.
“채현아.”
“하이.”
“어디 다쳤어?”
스태프 조끼를 입은 그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다정한 성정을 나타내듯 찜질 부위를 훑는 눈빛과 목소리도 온화했다.
“업보지.”
그에 반해 대신 대답하는 서윤채는 무심하기만 했다. 벌써 얼룩덜룩 멍이 든 무릎에 꽂힌 시선도 엇비슷했다.
“서윤채 경기 참여 안 해?”
“권채현 보호자 노릇 하느라 바빠서. 넌 일 안 해?”
그들은 서로 꺼지라는 소리를 정성스럽게도 하고 있었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매번 그래 와서 익숙해진 채현은 멀거니 줄다리기 결승만 구경했다.
시간이 흐르고 무릎 멍이 번질수록 마음은 심란해졌다. 잠시 자리를 지키던 신제윤이 무전을 받고 떠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졌다. 하기 싫다는 서윤채를 꼬드겨서 나간 경기였는데. 괜히 자신 때문에 진 듯해 한숨만 나왔다. 성가신 걸 제일 싫어하는 서윤채에게 결국 보호자 노릇이나 하게 만들고.
“채현, 계주 가능?”
“어? 엉……. 뛸 수 있어.”
제자리로 돌아와 계주 대기를 할 때에도 울적함은 가시지 않았다. 곁에서 바라보던 서윤채가 실소를 흘려 고개는 더 땅을 향했다.
“이기고 싶어?”
구태여 대답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소리였다.
“1등 만들어 줘?”
“어?”
떨어진 시선을 단박에 끌어당긴 건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대답을 바라듯 턱을 까딱이는 행동에 응, 대답하자 서윤채는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잘 보고 있어라.”
제 위치로 향하며 내던진 말의 의미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뭘 어쩌려는 건가 했더니. 채현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앞선 상대를 추월하고 엄청난 속도로 제게 다가오는 서윤채에게 집중하며.
와아. 트랙 주위에 서서 응원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데도 귓전에 닿는 소리는 바다 깊은 곳에서 울리듯 전부 뭉그러진 채였다.
“권채현!”
점점 가까워지는 이의 부름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채현은 서윤채에게 몰두하며 팔을 뒤로 뻗었다. 동시에 손안에 바통이 가득 찼다. 찰나 스친 손끝은 그답지 않게 따뜻했다.
채현은 그 옛날 어느 순간들처럼 다가온 서윤채를 뒤로하고 달렸다. 오로지 앞만 보고 숨이 터져라 발을 내디뎠다. 팽팽히 늘어져 공간을 구분 지은 흰 띠를 제 몸으로 가를 때까지.
“하아. 하아…….”
모두가 제 이름을 부르며 다가올 때 채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청난 활약을 해 승리를 떠안겨 준 장본인이 보이지 않았다.
“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찾던 상대는 뒤에서 나타났다. 불시에 오금을 툭 쳐 겨우 중심을 잡고 돌아보니 만면 가득 웃음을 띠었다.
“만족하세요?”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은 서윤채가 물어 왔다. 채현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쏟아지는 햇살에 찌푸린 눈, 그런데도 호선을 그린 붉은 입술까지. 장난 어린 가벼운 물음을 곱씹다 고개를 끄덕인 순간, 그의 낯에 떠올랐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당연히 그래야지.”
제 몫의 물을 마시며 새걸 내민 그가 받으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
계주 경기 도중 스쳤던 서윤채의 손과는 상반되는 냉기가 손끝을 감쌌다. 깡깡 언 액체는 움찔 떨릴 만큼 차가웠다. 천천히 뚜껑을 열고 그를 마시는데 속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대체 왜 이런……. 채현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모랫바닥을 노려봤다. 운동장 모래를 태운 햇빛이 온몸으로 바짝 들러붙는 듯했다.
역시 미친 걸까. 내리쬐는 태양 빛을 한 몸에 받으며 달려 더위라도 먹었거나.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말도 안 되는 상태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했다.
온 신경이 자극 받아 열이 오르다니. 찰나에 그치고 말 상태라 생각했다. 단순한 착각이라 치부하며 넘겼고. 뜻하지 않은 순간들을 겪은 탓에 그랬을 뿐이라고 여겼는데.
“…….”
끝내 평정을 잃었다. 더 나아가 심장이 쿵쿵 빠른 속도로 뛰었다. 쐐기를 박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성을 벗어나는 반응이 뒤따랐다. 손쓸 새도 없이 번진 낯선 감각이 마음을 좀먹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뿐이 아니었다.
편의점 앞에서 서윤채에게 치료를 받았던 날도, 얼마 전 체육관에서 복수를 했을 때도. 필요 이상으로 서윤채를 신경 쓰고 익숙지 않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게 결국 이 지경이 되도록 이끈 것이리라.
“…….”
생전 안 하던 싸움을 해서, 마음에 안 드는 상대에게 앙갚음을 해 줘서, 숨이 터져라 뛰어서……. 답이 보이지 않는 혼란에 애써 이유를 만들어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는데…….
“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을 끊어 내는 부름이 들렸다. 채현은 소리를 좇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서윤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숨 쉬는 게 부자연스러워질 만큼 빤한 시선을 흘렸다.
멀쩡한 상태에서 가슴께가 찌르르하며 쿵쿵거릴 수 있나. 진짜 돌았어. 제정신이 아니야……. 채현은 자조하며 고갤 돌리고 응축된 숨을 터뜨렸다. 뒤를 이어 서윤채도 짧게 목을 울렸다.
“뭐지? 표정이 영 별론데.”
“……아닌데. 나 지금 되게 신나는데?”
“네가 지금 여기서 제일 칙칙해. 기껏 1등 만들어 놨더니 반응이 왜 그 모양이야.”
“생색은…….”
“생색은 원래 내라고 있는 거고.”
서윤채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뻔뻔하게 답했다. 재수 없는 말인데 그게 또 그다워서 복잡한 심경에도 웃음이 났다.
상태를 살피듯 잠시간 바라보던 그는 곧이어 시선을 거두고 물을 마셨다. 꽤나 더운 건지 인상은 구겨진 채였다. 원체 피부가 하얘서 그을리기보단 붉어지는 편이었는데, 얼굴과 팔도 발갛게 물든 상태였다.
“…….”
더 빨개지면 간지럽고 따가울 텐데. 겪어 본 적이 있어 더 신경이 쓰인 채현은 결국 그를 이끌고 그늘로 향했다.
“왜.”
눈썹을 들썩이면서도 얌전히 끌려온 서윤채는 계단에 다다라서야 의중을 물었다.
“너 얼굴 빨개졌어. 팔도. 선크림이라도 바르지 그랬냐.”
“지는.”
신경이 쓰였다고 어찌 바른대로 말할 수 있을까. 괜히 머쓱해져 잔소리만 쏟아 내자, 서윤채는 짧게 웃으며 물병으로 이마를 톡 쳤다. 한기가 훑고 간 살갗을 매만진 채현은 물끄러미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반쯤은 자의로. 반쯤은 이끌리듯 자연히.
계주를 마지막으로 행사가 끝이 나 주위는 어수선했다. 모두 왁자지껄 떠들며 사진을 찍고 자유롭게 놀기 바빴다. 그 사이에서 서윤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핸드폰만 만져 댔다.
직전 경기에서 제대로 한 건 한 서윤채 주위는 한껏 상기된 이들로 가득 찼다. 당사자보다 흥분한 그들은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대박이었다고 어깨를 내리쳤다.
“근데 왜 때려. 손버릇이 별로네.”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거잖아.”
“두 번 잘했다간 어깨 박살 나겠다.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더워.”
“선크림 바를래? 나 있는데.”
“너 해.”
대화를 듣고 한 친구가 선크림을 내밀었지만 서윤채는 가차 없이 거절했다.
“너 그러다 기미 생긴다.”
“생겨도 잘생겼을걸.”
“헐, 자신감 뭐야. 어이없어.”
“왜. 아니야?”
핸드폰만 응시하던 서윤채가 힐끗 눈짓하자, 그녀는 ‘진짜 미친놈!’ 외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채현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스스럼없이 모두와 어우러져 짓궂게 구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빤히 응시하던 찰나, 고개를 든 서윤채와 눈이 마주쳤다.
“쟤나 줘.”
서윤채를 뒤로한 이들은 즉각 손을 뻗어 왔다. 거침없이 팔을 붙들고 끌어당기더니 옆자리에 주저앉혔다.
“채현아, 얼굴 대 봐.”
“아니, 나도 괜찮아. 체육대회 끝났잖아.”
“가만히 있어.”
한사코 거절했으나 뺨에 크림을 묻혀 주기까지 했다. 하는 수 없이 손을 든 채현은 직접 크림을 펴 발랐다. 구석구석 바르는 동안 옆에서 피부가 어쨌느니 속눈썹이 어쨌느니 해 댔지만 별다른 생각이 들진 않았다. 친한 사이여서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신나게 떠들던 그녀는 머지않아 친구와 함께 자리를 떴다. 크림을 다 바른 채현이 마주한 건 저를 바라보고 앉은 서윤채였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시선을 흘리던 이는 불시에 팔을 뻗어 왔다. 깜짝 놀라 눈에 띄게 움찔거리자 그 역시 멈칫했다.
“쫄기는. 내가 너 때려?”
그러기도 잠시, 그는 다시 손을 움직여 눈 밑을 문질렀다. 낮은 목소리에 실린 장난기는 여상했지만 채현은 숨을 삼켰다. 한번 의식한 탓인지 손끝이 닿은 살결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으므로.
“야……. 뭐 해.”
“덜 발렸어.”
서윤채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떼고 다시 핸드폰을 만졌다. 동요한 게 우스울 만큼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확연히 비교되는 반응에 채현은 또 한 번 제 상태를 곱씹어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회식이 시작돼 신경은 다른 곳으로 분산됐다.
“야. 끝나고 뒤풀이하러 가자.”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최종 순위는 낮았지만 응원상을 받아 모두는 종합 우승이라도 한 양 기뻐했다. 교실로 이동해 종례하고 마무리할 때도 뒤풀이 계획을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기니 치킨이니 메뉴 선정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들 틈에서 서윤채는 하품만 해 댔다. 뭘 하든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였다.
얜 안 갈 건가. 같이 가자 말하고 싶다가도 제 상태가 영 별로라 덜컥 망설임이 생겼다. 마음이 싱숭생숭해 물끄러미 바라볼 무렵, 시선을 느낀 서윤채가 할 말 있냐는 듯 눈짓했다.
“너 갈 거야?”
“혼자 가게 했다가 또 뭔 소리를 들으려고.”
그는 까칠한 언사를 구사한 주제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친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채현의 입매는 속절없이 풀어졌다. 그가 먼저 긍정의 뜻을 비쳤으니 어울려도 되겠지 싶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한다고…….”
“갈수록 뻔뻔해져? 본인 행동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
“어차피 갈 거면 좋게 가 주면 안 되냐? 넌 꼭 한 소리를 하더라.”
“버릇 나빠져.”
“이미 나빠졌어.”
아무리 난감한 처지여도 오랜 습관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말을 맞받아치자, 황당한 기색을 엿보인 서윤채가 실없이 웃곤 먼저 몸을 움직였다. 느긋하게 걸어가는 그의 뒤를 쫓아 채현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다 같이 떠들썩하게 향한 곳은 학교 인근의 치킨 체인점이었다. 고기 구울 시간에 닭 하나를 더 주워 먹는 게 이득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바로 결정지었다.
“채현, 서서 뭐 함? 와서 앉아.”
“어? 어…….”
화장실에 들르느라 늦게 들어간 채현은 엉거주춤히 자릴 잡고 앉았다. 왜 당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을 거라 생각했는지……. 멋대로 예상한 주제에 떨떠름해하는 자신이 황당했다.
신경은 통제할 새 없이 서윤채에게 흘렀다. 둑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탄산음료로 건배를 하고 대화에 집중하는 와중에도 그를 힐끗거리게 됐다.
거기에 더해 서윤채에게 주의를 기울여서일까. 소란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그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이 정도면 병인데. 심각하게 고민한 채현은 숨을 터뜨리며 콜라를 들이켰다.
엉망인 상태는 뒤풀이가 끝날 때까지 똑같았다. 노래방에 가서도, 빙수를 먹으러 가서도 어디 한 구석이 고장 난 사람처럼 반응이 더뎠다.
복작복작했던 자리를 떠나온 지금은 더 그랬다. 둘만 남아 한적한 공간에서 서윤채는 핸드폰을 보며 걸었고, 채현은 그런 그를 살폈다. 무심한 옆모습에 떠오르는 건 아까 전 다른 애들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떠들던 모습이었다.
“…….”
혼란의 색이 짙어질수록 고민은 깊어졌다. 걸음 역시 서서히 속도를 죽였다. 발이 묶이기라도 한 듯 움직일 수 없어 제자리에 굳어 있을 무렵이었다. 조금씩 멀어지던 서윤채가 뒤를 돌아보았다. 벌어진 거리를 인식한 그는 의아해하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피식댔다.
“왜 또.”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린 순간, 그의 뒤에 있던 가로등이 불을 밝혔다. 조명은 작은 소음을 내며 점멸하다 완전히 환해졌다. 채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흔들렸다. 어둑한 밤하늘이 내려앉는 시점에서 서윤채만이 밝은 빛을 덧입는 듯했다.
그 찰나, 반짝 스쳐 지나간 또 하나의 생각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안 와?”
아. 어쩌면. 나는 너를.
“계속 정신 놓고 있을 거면 먼저 가고.”
올 거면 빨리 오라는 듯 고갯짓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난 시간이 엿보였다. 채현은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제 오랜 친구를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가는 뒷모습까지.
“…….”
아닐 거라고. 기우일 뿐이라고. 헛된 추측에 불과하다고 애써 부정하면서.
* * *
누구에게나 특별한 사람이 한 명쯤 있기 마련이다. 어떤 관계에 속하든 마음 깊이 품은 이가. 채현에겐 가족과 서윤채가 그랬다. 그들 없는 일상을 상상하는 게 어려울 만큼 각별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이들은 부모라는 이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그 안에서 채현은 안정을 느끼고 결핍을 채웠다. 아픈 아이가 슬퍼할까 언제고 쏟아지는 애정을 받으면서.
서윤채는 그 울타리 밖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이였다. 다섯 살의 어느 겨울날, 문턱이 닳도록 방문한 병원을 벗어나 맞닥뜨린 생애 첫 친구였고.
‘안녕!’
유치원에 가서 친구랑 만나면 안녕, 하는 거야. 다정한 가르침을 되뇌며 수백 번도 더 연습한 말을 내뱉는 순간 얼마나 떨렸던지.
‘어.’
대답이 돌아왔을 적엔 얼마나 기뻤던지. 볼이 새빨갛게 물들도록 추운 날씨에도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채현의 하루는 완전히 바뀌었다. 서윤채와 한 쌍처럼 붙어 다니며 가장 친한 친구로, 더 나아가 때로는 가족같이, 또 어떤 날은 형제처럼 자라 왔다. 구태여 헤아려 볼 필요도 없을 만큼 긴 시간이자 언제나 서로가 한구석에 존재하는 날들이었다.
함께한 세월이 모든 걸 대변하진 않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감히 당연한 일상이라 불러 온 지난날이 소중하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
그렇기에 작금의 상황이 더 당혹스러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날이 밝고 지길 반복해도, 똑같이 학교로 향해 공부를 해도 외줄 타듯 위태로운 하루처럼 여겨졌다. 자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흔들릴 것처럼 부실한 곳에 서 있는 듯했다. 진정되지 않는 감정 상태와 똑같았다.
차마 소리 내어 말하기도 민망한 감정을 점쳐 봤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를 지금까지 생각한다는 것 또한. 한번 의식되기 시작한 가능성은 아예 머릿속에 뿌리를 내렸다. 인지하지 못했던 상처가 눈에 띄면 아파져 오기 시작하는 것처럼 급격히 몸집을 부풀렸다.
“하…….”
본디 사람이란 궁지에 몰리면 무엇이든 하는 법이었다. 닥치는 대로 행동하고 말을 쏟아 내듯, 저 역시 그랬을 뿐이라고 합리화도 해 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계속된 혼란에 수몰되길 피하고자 떠올린 답안에 오히려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초상집 가?”
계속해서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던 찰나, 낮게 울린 목소리가 상념을 끊었다. 기계처럼 움직이던 채현의 시선이 느린 속도로 옆을 향했다. 한쪽만 삐딱하게 솟은 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황당함이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는 의중을 묻듯 가볍게 까딱 턱짓을 했다.
채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서윤채를 바라보기만 했다.
“누구 죽었어?”
오랜 친구였다. 가족이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소중한 이였고.
“아니면 어디 끌려가기라도 해? 왜 자꾸 한숨이야.”
떨림이 어울릴 관계이던가. ‘설마’ 하는 감정을 들이대기에 적합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하물며 같은 남자였다. 어릴 적 동네 목욕탕을 방문할 때도 함께 들어가던 동성 친구.
그를 향한 모든 반응이 하나의 감정으로 귀결된다 할지라도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아니, 솔직히 말해 떠올린 이후부터 선명해져 가는 가능성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정신을 못 차리네.”
빤히 응시하다 기가 차다는 듯 웃은 서윤채가 결국 고갤 가로저었다. 미약한 움직임을 따라 그의 머리칼이 흔들리며 좋은 향기가 풍겼다. 최근 들어 더 예민해진 신경이 바짝 일어섰다. 이성을 저버린 심장은 또 속절없이 속도를 더했다.
“네가 봐도 그래?”
“뭐가.”
“나 지금 쫌… 제정신 아닌 거 같아?”
“원래도 제정신은 아니었고.”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답한 서윤채가 관자놀이 근처에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지금은 나사가 한 다섯 개는 더 풀린 거 같은데.”
결국 미친 거 같다는 소리 아닌가. 차라리 묻지나 말 것을.
하아. 또다시 깊은 한숨을 쉰 채현은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뒤 터덜터덜 걸었다. 제가 생각해도 미쳐 가는 과정이지 싶은데, 눈치 빠른 서윤채가 보기엔 얼마나 이상할까 싶었다.
“밥 잘 먹어 놓고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넌 몰라도 돼……. 알려고 하지 마.”
“선을 긋네. 채현이 사춘기야?”
되묻는 말씨는 꼭 애를 어르기라도 하듯 장난스러웠다. 정작 사춘기 때도 겪지 않은 고뇌를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는 채현에겐 이 역시 버거웠다.
얜 왜 쓸데없이 목소리도…….
새삼스러운 감탄은 갈 곳 잃은 원망이 되어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를 거름 삼아 다시금 자라나는 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든 고민 덩어리였다.
정말 ‘그런’ 감정인가. 내가 얘를, 서윤채를, 오랜 친구를, 남자를……. 필히 좆같아야 마땅할 가정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좆됐음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좆…….”
진짜 좆된 건가. 깊디깊은 혼란의 바닥에 닿는 순간이 머지않았음을 어렴풋이 깨달을 무렵, 서윤채가 대뜸 ‘뭐?’ 하며 시선을 던졌다. 살짝 찌푸린 눈가엔 기막히단 기색이 역력했다. 뭘 보냐는 뜻으로 고갯짓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까지 흘렸다.
“좆?”
“어?”
“상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너 진짜 사춘기냐?”
“뭔 개소리야…….”
제가 소리 내어 중얼거린 줄도 모르고 번뇌하던 채현에게 서윤채의 말은 뜬금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뭔 생각을 해야 복도 한복판에서 좆을 찾을 수 있지? 맥락을 모르겠네.”
픽 바람 빠지듯 웃은 서윤채가 짓궂은 얼굴로 아래를 힐끗거렸다. 그 느릿한 시선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미친놈……. 귓가를 옅게 물들인 채현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발을 내디뎠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해 봤자 들은 척도 안 할 게 뻔했으니.
“교실로 가. 혼자 으슥한 곳 가지 말고?”
아니나 다를까. 실컷 놀려먹던 서윤채는 웃음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렸다. 그 웃음 한 번이 무어라고 잊히질 않는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던 채현은 무의식중에 마른 입술을 적시며 교실로 향했다.
서윤채를 다시 마주한 건 토론 대회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학기 초에 공지된 공개 토론은 5교시 수업 시간을 활용해 시청각실에서 진행됐다. 미리 참관 학생 신청을 받았던 터라 채현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수업을 듣느니 토론을 보겠다는 정유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 신제윤도 있는데? 서윤채 저 새끼 왜 죽어라 하나 했더니.”
그의 말마따나 서윤채가 앉은 테이블 반대편에 신제윤이 있었다. 보아하니 상대 팀인 듯싶었다. 친구라 할지언정 서로 치를 떠는 이들이기에 얼마나 득달같이 달려들지 훤했다.
열심히 하는 이유가 있다더니. 지기 싫어 투지를 불태웠을 그를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하여간 여유롭게 굴다가도 이상한 곳에서 승부욕을 내보이는 성격엔 변함이 없었다.
“본격적인 토론 시작에 앞서 개회 선언과 진행 순서 발표가 있겠습니다.”
사회자가 전반적인 규칙을 소개하는 동안 채현의 시선은 조금 더 뒤를 향했다. 가지런히 놓인 종이를 훑어보고 있는 서윤채에게로.
그는 떨리지도 않는지 태연하게 제 할 일만 했다. 심지어 무심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낄낄대며 장난치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 보긴 어려웠다.
“A팀이 찬성, B팀이 반대 입장으로 토론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발언권을 얻은 A팀부터 입론 발표 시작해 주세요. 발언 시간은 각 팀당 3분입니다.”
그 서늘한 모습이 공연히 낯설어서, 채현은 덩달아 긴장한 채 토론을 지켜보았다. 서윤채가 속한 A팀이 논거를 제시하며 핵심 쟁점을 부각시키는 과정을.
반론을 맡은 서윤채는 상대 팀 반론인 신제윤과 예리한 교차 질의를 주고받았다. 논리적 오류를 찾아 지적하는 시간은 오싹해질 만큼 거침없었다. 제게는 늘 무르던 이였기에, 저를 향한 날이 아님을 알면서도 움찔 몸이 떨렸다.
하물며 늘 느슨한 상태로 있던 평소와 달리 교복도 단정히 챙겨 입은 채였다. 그는 어느 누가 봐도 번듯한 모습을 하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상대의 눈을 바로 보며 또렷한 발성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태도는 자연히 신뢰감을 더해 주었다.
“이상으로 심사위원 강평이 있겠습니다.”
총 30분에 달한 토론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청중 평가단과의 질의응답부터 최종 변론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중간에서 서윤채는 중심을 잃는 법 없이 제 주장을 펼쳐 나갔다.
그랬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A팀의 승리와 서윤채가 최우수 토론자로 선정된 것은.
채현은 꾸벅꾸벅 조는 정유빈 곁에서 서윤채만 응시했다. 이제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심드렁히 있던 이가 고갤 돌린 건 동시였다. 신기하게도 단번에 시선이 얽히고 눈이 마주쳤다.
“…….”
무표정을 고수하던 이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씩 웃었다. 미소 어린 얼굴은 장난스럽기만 했다. 채현은 그가 까딱 턱짓할 때까지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지겹도록 오래 본 모습이었다.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매일같이 반복된 일상이었고. 당연하게 주고받던 말과 행동일 뿐이었는데…….
찰나 뒤바뀐 시선의 온도가, 그 간극이 버거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뭘 봐.
그러다 서윤채가 입술을 움직여 속삭인 순간, 호흡이 무너지고 심장마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고동이 들릴 만큼 빠르게 쿵쿵 뛰어 대면서.
채현은 터지려는 탄식을 씹어 삼키며 주먹을 힘껏 쥐었다. 가능하다면 아니길 바랐다. 아니어야만 했고. 희박한 가정은 힘을 잃고 땅으로 처박혔다. 당연하게 이어지던 일상에 끝을 선고하며.
가슴께에서 시작된 떨림이 손끝까지 번져 온몸을 긴장시켰다. 시선은 서윤채에게 틀어박힌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끝이 가리키는 건 자명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아. 나는 너를…….
“…….”
그 어떤 경계나 대책 없이 겪던 일상에 돌연 몰아친 폭풍 같은 자각이었다.
* * *
설마. 그럴 리가…….
확신 없는 가정은 대체로 무력하다. 언제고 뜻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던 현실은 이번에도 냉정했다. 기우이길 바란 감정이 기어코 완전히 싹을 틔웠다. 안일했던 외면이 이끌어 낸 결과였다.
서윤채를 좋아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으로. 답답하게 가슴 한구석을 내리누르던 혼란의 모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바보 같은 물음을 반복하며 구하려 했던 고민의 해답이었고.
의문은 사라졌다. 다만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더 큰 혼란이 주어졌을 뿐.
“…….”
서윤채를 향한 애정이 답이길 바란 적은 없었다. 눌어붙은 궁금증을 떼어 낸 자리에 남은 흔적이 이런 종류의 것이길 원하지도 않았고. 엉킨 실타래의 끝을 겨우 찾아 손에 쥐었는데,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엉망이라 결국 아무것도 못 하는 기분이었다.
“미친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묻고 또 물었다. 대체 왜. 아니, 언제부터. 어쩌다가. 얼마나……. 끝내는 선명해진 감정을 외면치 못하고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럴 리가 없지. 희망을 담아 생각하기도 잠시, 채현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정신 나간 새끼…….”
지난 13년을 뒤로하고 급변한 마음이 무섭고 불시에 치달은 감정이 버거웠다. 이제부터 서윤채를 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시청각실에서 도망치듯 나온 후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
“아……. 진짜…….”
왜 하필 서윤채였을까. 왜 하필 이제 와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을까. 반복해서 떠올려도 봤지만 마땅한 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단 하나 확실한 건, 채현은 이 변화가 달갑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해 싫었다. 소중하디소중한, 평온한 일상에 끼어든 감정의 발현이 불청객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하…….”
깜깜한 새벽부터 막힌 숨을 터뜨리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날이 밝았다. 흰 천장을 노려보던 채현은 실소를 흘리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눈꺼풀은 갑갑한 마음만큼이나 무거웠다.
“좆됐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만개한 아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웠다. 난생처음 겪는 풍랑에 휩쓸린 마음을 제외하고서.
날은 또 왜 이다지도 좋은지. 뻑뻑한 눈을 떠 바라본 창 너머는 화창하기만 했다. 가능하다면 흘러들어 온 빛줄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빛에 닿은 제 감정이 더욱 선명히 발하기라도 할까 무서웠으므로.
[서유난 : 일어남?] 오전 7:04
가장 커다란 격랑은 역시나 서윤채였다. 화면에 그의 이름이 뜨자마자 발 구름을 한 양 큰 소리가 났다. 제게만 들리는 쿵쿵 소리에 채현은 또 한 번 절망했다. 고작해야 몇 마디. 그마저도 메시지일 뿐인데 심장이 꽉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
무시하려던 채팅을 실수로 확인한 채현은 바로 대화창을 나오며 핸드폰을 내던졌다. 도무지 태연하게 반응할 자신이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된 이 상황에서.
[부재중 전화 1건]
[서유난 : ㅋㅋ씹네]
[서유난 : 씹어버릴까] 오전 7:40
평소라면 무사히 일어났음을 피력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신 차리고 학교 갈 채비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준비를 끝마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등굣길에 올랐다간 엉망인 상태를 전부 내보일 듯해, 예의가 아닌 걸 알면서도 메시지를 무시하고 홀로 학교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선 신호에 걸릴 때마다 제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절대 당황하지 말자고. 결코 티 내지 말자고. 반드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자고……. 그렇게 깊은 감정은 아닐 거란 얄팍한 희망에 기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잡으면서.
결과는 어떻던가. 임시방편의 유효 시간은 짧았다.
서윤채가 교실에 도착한 순간, 태연함을 가장하던 채현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무심한 얼굴을 한 주제에 시선을 떼지 않고 다가오는 서윤채 때문에 더더욱.
“야.”
그는 삽시에 곁으로 와 책상을 툭 쳤다. 시야를 가로막은 탓에 자연히 채현의 눈길도 서윤채를 향했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선 이는 빤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찰나 상태를 판별하듯 훑어보기까지 했다.
“손가락 멀쩡한데 왜 답을 안 해? 기다렸잖아. 어제도 혼자 째더니.”
낮은 목소리에 노기는 없었다. 행동의 연유를 묻듯 단조로울 뿐이었다. 미안해. 사과 한마디면 끝날 일이다. 서윤채가 깊이 따져 묻지 않으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누가 기다리래?”
그를 알면서도 정작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까칠하기만 했다. 화를 내기는커녕, 이상이 있나 살피는 서윤채의 숨죽인 다정에 또 한 번 속이 뒤집혔기에.
“기다리라고 한 적 없어. 그냥 혼자 갔으면 됐잖아.”
낯선 감각에 휩쓸리지 않으려 행한 일은 고작 경계를 세우는 거였다. 수영이라곤 할 줄도 모르는 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듯 발버둥 치는 꼴이었다.
아. 최악이다. 겨우 내보인 반응이 싸가지 없는 날 선 대답이라니. 제가 대답하고도 잔뜩 굳은 채현은 혀를 씹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
정유빈도 당황하며 힐끗거릴 정도였는데, 서윤채는 짧게 목을 울리곤 피식댈 뿐이었다.
“채현이 아침이라 예민해?”
연이어 울린 말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기분이 상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말씨였다. 그는 더 대화를 이어 가는 대신 제자리로 돌아갔다.
채현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하릴없이 입술만 질근질근 깨물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엎드리자 정유빈도 덩달아 상체를 숙였다.
“야, 너 오늘 왜 이렇게 띠껍냐?”
“심했어?”
“존나. 나였으면 죽탱이 이미 갈겼어.”
“아…….”
“쟤 성질머리에 아가리 여물라는 소리 안 한 걸 다행으로 알아. 뭔데. 싸웠냐?”
어서 말하라는 듯 툭툭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설명을 요하는 행동거지에선 호기심이 짙게 묻어났다. 곧 죽어도 솔직히 말하지 못할 이유에 채현은 침묵을 고수했다. 잠시간 기다리던 이는 이내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타인의 관심이 사라지자마자 물밀듯 밀려온 건 좌절이었다. 이제 막 발한 감정을 외면해 벌을 받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머리까지 차올랐다. 소음으로 가득 찬 버스에서 했던 다짐은 떠밀려 내려간 지 오래였다.
평상시와 같이 행동하자고 결심했던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서윤채의 시선 한 줄기에 동요하는 주제에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단 한 번도 의식하지 않고 영위하던 일상에 둘린 테두리는 생각 외로 견고했다. 억지로 떠올려 꾸며 낸다고 한들 똑같이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
첨예하게 일어선 신경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버둥 쳤다. 상처는 고스란히 채현에게 전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닳고 닳아 더욱 예민해질 뿐이었다. 끝내는 머리까지 아파져 왔다.
수업 시간 내내 생각의 꼬리를 물던 채현은 종이 울린 순간 책상에 코를 박고 엎어졌다.
“얘 자?”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구태여 침묵에 잠긴 구석을 찾은 이는 서윤채였다.
“어. 아프대.”
“아파? 어디?”
“어? 글쎄……. 정신?”
“뭐라는 거야.”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네가 좀 보고 있어.’ 명령하며 자리를 떴다. 제 임기응변에 만족한 양 실실대던 정유빈은 ‘와…….’ 감탄하고는 진저리를 쳤다.
“야. 너 띠껍다는 거 취소다. 저 새끼 빈곤한 싸가지는 왜 적응이 안 되냐.”
“윤채 원래 말 까칠하게 하잖아.”
“까칠은 무슨, 그냥 싸가지가 더럽게 없는 거지. 너는 대체 왜 지랄한 거냐? 딱 보니까 싸운 건 아닌 거 같은데.”
“지랄병이 도졌나 보지…….”
혼잣말처럼 대꾸한 채현은 상체를 일으키며 주위를 살폈다. 하나둘 교과서를 품에 안고 나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동 수업 시간인 듯했다. 경황이 없어 시간표 확인을 못 해 이제야 알아챘다. 서윤채가 곁으로 다가온 이유도 이거지 싶었다.
뜻하지 않게 자는 척을 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됐다. 당장 서윤채와 마주해 봤자 별다른 도리 없이 어색하게 굴 게 뻔했으니까.
주섬주섬 짐을 챙겨 영어 교실로 향해 멍을 때리고 있으니 누군가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철제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향기가 밀려와 살갗에 닿았다.
“왜 혼자 가.”
그 새로 울린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주의를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채현은 공연히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수선하게 책을 만지작거리는 손짓은 덤이었다.
“그냥.”
“아프다며.”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
대화는 티가 날 만큼 뚝뚝 끊겼다. 꼭 누군가 가위로 도려내기라도 한 듯이. 결코 침묵이 어색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수초에 불과한 정적에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저희가 있는 곳만 온도가 낮아진 듯했고.
“오늘따라 까칠하네.”
탁. 책상 위에 음료수를 올려 둔 서윤채는 그 뒤로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심한 눈빛과 다시 맞닿는 일은 없었다.
“…….”
채현이 그 순간 느낀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매정한 옆모습이 못내 야속해 섭섭하다가도 결국엔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서윤채만 보면 멋쩍게 구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 자기방어 하듯 행동한 주제에, 그에게 화살을 돌리는 꼴이 형편없었으므로.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점심시간까지 이어졌다.
모두와 어울려 대화를 나눌 때도 채현의 태도는 여전했다. 의식적으로 뻣뻣한 자세를 고수하며 서윤채를 외면했다. 시선이 스치기라도 하면 슬그머니 고갤 돌렸다. 그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민하게 좇는 이가 있었으나, 일찍이 눈을 돌린 채현이 알 턱은 없었다.
“권채현 어디 가. 매점 안 가?”
“안 가.”
교실과 매점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선 서윤채가 나지막이 물었다. 점심 이후 늘 정해진 루틴처럼 매점으로 향했기에 의아해하는 듯했다.
“너 가려면 가.”
매점으로 달려가는 다른 이들과 함께하라는 눈짓에도 서윤채는 삐딱하게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얼굴 한 번, 바닥 한 번. 번갈아 힐끗거리는 동안에도 옥죄듯 직시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왜 저러고 보는 거야……. 표정 관리가 힘들어진 채현이 곤란해할 무렵, 서윤채가 발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온 그는 빤히 얼굴을 응시하다 손을 뻗었다. 이마를 짚어 보려는 듯한 손을 무심코 세게 쳐 버린 건 그다음이었다.
“어…….”
한껏 당황한 채현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금세 붉게 달아오른 서윤채의 손에 닿았다가, 한쪽 입술만 비뚜름히 끌어 올리며 웃는 그의 얼굴로 향했다.
“아…. 진짜.”
그리고 알아챘다.
“불만이 있으면 씨발 말을 해, 채현아.”
단 한 번도 제게 화낸 적 없던 서윤채의 심사가 뒤틀렸음을.
“기분 더러워? 알아 달라고 이러는 거야, 지금?”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꽂히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짓씹듯 흘러나온 낮은 음성도 아프게 틀어박혔다. 크게 소리를 내지르며 화를 내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한테 뭐 했어?”
표정이 사라진 그의 낯은 몸이 떨릴 만큼 낯설었다. 늘 장난스럽게 휘어지던 눈가가 굳어 있어 마주 보기도 힘들었다.
“지금 내가 눈치 없이 좆대로 굴고 있는 거냐고.”
“…….”
“문제가 있으면 제대로 말을 해. 사과할 테니까.”
채현은 잔뜩 굳은 채 입술만 감쳐물었다. 성난 힐난에 울컥 가슴께부터 감정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제가 자초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서윤채가 화를 내니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워졌다.
“아니면 뭐, 심심해서 지랄 한번 해 보는 거야?”
처음이었다. 서윤채가 정색하며 화를 내는 건. 여태껏 크고 작은 일로 다툰 적은 있었어도 이토록 매서운 감정을 앞세운 경우는 없었다.
“왜 사람을 살살 건드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응시하는 눈초리가 따가웠다. 평소의 웃음기가 사라졌을 뿐인데 모질게 살갗을 할퀴는 듯했다. 서윤채를 향한 마음의 온도가 변하기 시작해서일까. 꼭 발가벗겨진 채 그의 앞에 놓인 기분이었다. 괜히 더 서럽고 인정하기 싫지만 무섭기까지 했다.
따끔한 시선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경계하듯 바짝 세웠던 가시는 부러진 지 오래였다.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친 고통이 여린 살갗을 헤집었다.
“말 못 해? 아니잖아.”
잠시간 내려앉은 침묵은 일종의 유예였다. 무얼 말하든 들어 주겠다는 아량이었고. 다만 채현의 망설임은 길었고 서윤채가 허락한 시간은 짧았다.
“…….”
대치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답을 기다리던 서윤채는 끝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채현은 제자리에 박힌 듯 서서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
뒤늦게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온 목소리는 숨죽인 비명을 닮아 있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게 아니라는 변명은 힘이 없고, 너를 좋아하게 돼서 그랬다는 진실은 침묵만도 못한 대답일 것이 분명했는데.
씁쓰레한 자조와 함께 감정의 부산물을 묻힌 긴 숨이 터져 나왔다. 껍데기를 벗은 애정을 깨달았을 뿐인데 돌이킬 수 없어진 듯했다. 발이 묶인 채 물속으로 던져지기라도 한 듯이.
“…….”
물에 빠진 이가 하릴없이 발버둥만 치듯, 태어나 처음 겪는 열병에 몸부림만 치고 있었다. 숨 쉬는 법을 깨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깊디깊은 혼란의 바닥에 닿는 순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던가.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끝없이 침잠하게 만드는 감정에 묶인 몸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았다.
내려앉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점점 숨이 막혔다.
* * *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모를 하루였다. 멍하니 움직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자율 학습을 빼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졌던 채현은 멀거니 창밖을 응시했다.
“…….”
밤하늘은 어두웠다.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내리더니 지금까지 먹구름이 껴 있는 듯했다. 우중충한 분위기는 방 안도 만만치 않았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정적인 공간은 몹시 깜깜했다.
죽은 듯이 눈만 깜빡이던 채현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흘렀다. 난데없는 소나기에 젖어 걸어 둔 교복, 책상 위에 던져둔 가방, 그 옆에 놓인 음료수가 차례로 시야에 잡혔다.
서윤채가 준 음료수. 익숙한 상표의 이온 음료.
유독 오래 눈길이 닿는 음료는 머리가 아플 때 자주 마시던 거였다. 자판기엔 없어 매점에서만 살 수 있는 물건이었고. 받는 순간 손에 꼭 쥔 차가운 음료는 결국 미적지근해질 때까지 마시지 못했다. 일부러 1층까지 내려가 사 온 것이 빤히 보였으므로.
“귀찮은 일 싫어하면서…….”
까칠한 척해도 끝의 끝에선 언제나 상냥하던 이다. 제 몸 상태에 관해서는 특히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고. 성정이 모질지 못해 결국 살뜰히 보살펴 주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여느 때와 달랐다. 고작해야 그를 향한 애정을 깨달았단 이유로 색다른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자각이라는 게 뭔지, 삽시에 번져 아차 하는 사이 일상을 얼룩덜룩 물들였다.
기가 막힌 상황에 헛숨을 흘린 채현이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흠뻑 내린 비에 젖었던 바짓단이 눈에 밟혔다. 시간이 지나 마르긴 했지만, 날이 밝았을 적엔 물 자국이 선명히 남았었다. 짙은 자국은 빗물 몇 방울에도 순식간에 범위를 넓혔다.
그 모습이 유달리 기억에 남는 건 지금 처한 상황과 엇비슷해서였을 터다. 아무래도 물방울이 제겐 자각이란 형태로 떨어진 듯했으니.
“화 많이 났겠지.”
결코 서윤채를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사고처럼 맞닥뜨린 순간에 당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서윤채로선 더 황당했으리라. 그를 알기에 미칠 노릇이었다.
서윤채와는 점심시간에 다툰 이후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혼자였다. 약간의 비약을 더해 견고했던 우정에 금이 간 듯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속상했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싸우는 건 너무하지 않나…….
극악으로 치달은 상황에 한숨을 내쉴 때였다. 정적을 깨는 진동이 길게 울렸다. 흠칫 놀라며 확인한 화면엔 익숙한 열한 자리 숫자가 떠 있었다.
“…….”
끊이지 않고 전해지는 떨림이 꼭 서윤채가 내민 손길 같아서, 망설이던 채현은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통화가 연결되자 바깥 소음이 여실히 들려왔다. 이제 집으로 오는 중인가. 홀로 생각하며 침묵하고 있으니 한숨처럼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 나랑 말하기도 싫어?
“그런 거 아니야.”
오해하지 않도록 바로 대답했으나 정작 흘러나온 건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 왜 기죽고 그러냐. 속상하게.
서윤채도 그를 알았는지 언제 싸웠냐는 양 어르고 달래듯 이야기했다. 약간의 웃음기를 묻힌 다정한 음성 뒤로 밤거리의 소음이 밀려왔다. 혼자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 아이스크림 사 줄 테니까 나와.
“……지금?”
― 싫어? 아직 아니야?
어딘가 많이 생략된 말이었지만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채현은 그제야 알아챘다. 온종일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한 게 진정할 시간을 주려 했던 것이라는 걸.
“아니야. 나갈게.”
밤이 깊어 오는 시각, 평소처럼 걸려 온 전화는 냉전의 끝을 선고하는 신호였다. 그를 거절할 재간 따위 채현에겐 없었다.
통화는 금방 끊겼다. 그저 나오라는 말뿐이었지만 어디 있을지는 뻔했다. 예전부터 항상 놀이터에서 만나곤 했으니. 무의식적으로 서두르며 향한 곳엔 교복 차림의 서윤채가 서 있었다.
채현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전화론 괜찮았다 해도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을까 봐 땅만 보며 발을 내디뎠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말하지. 골똘히 고민하며 곁으로 향했으나 서윤채는 별다른 말 없이 벤치로 이끌기만 했다. 일전에 사고 쳤던 날 나란히 앉아 아옹다옹한 곳이었다.
“앉아. 여긴 안 젖었더라.”
그땐 어스름히 물드는 저녁 하늘이 펼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새까만 장막이 보였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날이 갠 덕인지 밤하늘은 깨끗했다.
“자.”
서윤채는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본인 걸 입에 물었다. 채현도 끄트머리를 녹여 먹으며 그를 힐끗댔다. 걱정과 달리 그의 표정은 평소와 같아 보였다. 먼저 용기 내어 말할 수 있을 만큼.
“……왜 그랬는지 안 물어봐?”
“말할 거였으면 네가 진작 말했겠지. 말하기 싫다는 애한테 물어서 뭐 하냐.”
머릿속을 읽은 양 정확한 판단에 얌전히 아이스크림만 먹자, 서윤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이제 물어봐?”
“아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겁게 웃은 서윤채가 남은 아이스크림을 씹었다.
“네가 저번에 그랬지. 다 말해야 하는 거 아니라고. 이유 없이 지랄할 새끼도 아니고…. 뭐, 그냥 알아서 생각하기로 했다.”
채현은 혀끝에 남은 단맛을 한숨과 함께 삼키며 체념한 듯 웃었다. 스치듯 흘린 한마디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 반칙 아닌가. 거기다 알아서 생각한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라니. 그의 입장에선 화를 내도 무방한데 꼭 기분을 풀어 주는 듯했다.
생각에 잠긴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윤채의 검은 스니커즈 바로 옆에 비 때문에 만들어진 웅덩이가 있었다. 비 오는 걸 싫어하는 이는 군말 않고 자리에 머물렀다. 깨끗한 신발 위에 이질적으로 튄 얼룩을 보던 채현은 몸에 힘을 풀었다. 마침내 끝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미안해.”
인정하기 싫어 몸부림치던 애정에 순응하며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 인정이 불러일으킨 건 또 다른 깨달음이었다.
“뭐가.”
“지랄해서……. 앞으로는 지랄 안 할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안 까불면 이상하니까 기죽지 마라.”
다른 사람과 다퉜을 땐 신경도 안 쓰던 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것이 말하는 건 분명했다. 서윤채에게 권채현은 특별하다. 남들보다 조금은 더 가깝고 소중한 사람이다.
“우냐? 겁도 없는 게 왜 울려고 해.”
속삭이듯 다정히 울린 음성을 통해 깨친 사실에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친구인 권채현에게 서윤채는 다정하다. 그건 아마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이기에 베푸는 관용일 것이다.
“우는 거 아니거든. 그냥, 나는, 솔직히 쫌 속상해서…….”
“속상했어?”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너 화나게 할 생각 없었는데 막 욕을…….”
“그래. 미안해. 나도 말이 심했다.”
“아, 왜 사과하는데……. 내가 더 미안. 지랄한 것도 미안하고 사과하게 해서 미안…….”
“뭐 어쩌라는 거야. 일단 존나 못생겼으니까 입꼬리부터 좀 올려. 그렇지.”
깨달음은 결심으로 이어졌다. 결코 이 감정을 들키지 말고, 그의 곁에 쭉 친구로 남아 있어야겠단 결심으로.
제게 허용되는 이 관계가 소중해서, 제게만 쏟아지는 다정함이 좋아서 채현은 마주한 애정을 꼭 끌어안았다.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도록 제 몸으로 가리듯 웅크리며.
“진짜 미안.”
“됐으니까 아이스크림이나 먹어.”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비 냄새를 묻힌 바람은 살며시 불어와 주위를 적셨다. 계절의 일부가 남기고 간 흔적은 온몸을 뒤덮은 마음이었다.
여름이 시작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첫사랑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