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01. Friends
02. More than friends
03. Runaway
01. Friends
어린아이가 땅을 박차고 달렸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마구 내뱉으면서.
힘껏 내딛는 발은 멈추지 않았으나 앞서 나아간 친구들과의 거리는 여전했다. 또랑또랑 빛나는 두 눈이 정면에 박혔다. 주먹을 꽉 쥔 아이의 다리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익숙한 상황인 듯 흔들림 없던 시선이 뒤집힌 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뒤였다. 반바지를 입은 아이의 다리가 엉망으로 쓸렸다. 흙바닥을 구른 탓에 흙투성이가 되고 피까지 비쳤다.
‘아…….’
잔뜩 긁힌 손과 사라진 친구들을 번갈아 보던 아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넘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는지 눈망울도 촉촉했다.
‘너무 멀리 갔으면 안 되는데……. 아씨, 아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던 아이는 코를 훌쩍이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로 일어나 달리기엔 무릎이 너무 아팠다.
미련 가득한 눈길을 거두곤 무릎을 붉게 물들인 상처를 호호 불었다. 따끔한 통증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탁. 탁. 누군가 이쪽으로 뛰어오듯 발소리가 들린 건 입꼬리를 뚝 떨어뜨릴 때였다.
아이의 시선이 기척을 좇아 정면으로 향했다. 눈에 보인 건 익숙한 흰색 운동화와 길쭉한 다리였다. 조금 더 위로 고개를 치켜들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동네 어른들이 말하길, 남자애라기엔 곱고 예쁜 제 친구였다. 아이는 잔뜩 구겨진 친구의 표정에도 반가워서 배시시 웃었다.
‘뭘 쪼개.’
그 애는 열심히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그러곤 아주 매서운 눈으로 아이를 노려보았다. 얼굴엔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너는 쫓아오지도 못하면서 왜 끼냐? 넘어지기나 하고.’
힐난의 눈초리가 아플 법도 한데, 아이는 굴하지 않고 손을 턱 내밀었다.
‘나 일으켜 줘.’
‘더러워서 싫어.’
흙 묻은 손을 힐끗 본 그 애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거절했다. 그러나 아이는 알고 있었다. 제 친구가 비록 착하지는 않지만, 모질지도 못하다는 것을.
‘나 무릎 아파. 피 엄청 났어. 잡아 줘.’
‘아, 진짜 귀찮게.’
끝의 끝에선 언제나 상냥했던 친구는 이번에도 손을 내밀어 주었다. 구박할지언정 두고 가지는 않는 제 친구를 향해 아이는 활짝 웃어 보였다.
어서 잡으라는 듯 까딱이는 손을 힘주어 꽉 쥔 순간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며 부르르 거센 진동이 팔을 타고 기어올랐다.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겨울 이불에 파묻혀 꿈속을 헤매던 채현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좌우를 살피는 밝은 눈동자 가득 잠기운이 선연했다.
“아…….”
맞잡은 손의 온기라 생각했던 건 연신 울리는 핸드폰의 열기였다. 채현은 의식을 반쯤 날린 채로 몸을 웅크렸다.
“…여보세요.”
끊이지 않고 발광하는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며 중얼거리자, 그 너머에서 기가 차다는 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 목소리 봐라.
듣기 좋은 음성이 여유롭게 깔렸다. 약간의 타박과 웃음기를 얹은 나직한 목소리 위로 꿈속에서 듣던 소리가 겹쳐졌다.
“새벽부터 왜 전화야.”
― 귀는 장식인 거 알았는데 눈도 장식이냐? 눈 뜨고 시계 좀 보자, 채현아.
어느 누가 들어도 친절한 어투는 아니었으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큼은 다정했다.
“미친놈이 뭔 소리….”
다시 잠을 취하려 온몸에 힘을 뺀 채현이 인상을 구기며 시간을 확인했다. 단잠을 방해받아 험악해졌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건 순식간이었다. 잔뜩 굳은 채현은 녹슨 기계처럼 창밖과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새벽이라기엔 지나치게 밖이 밝았다.
“야, 시간 이거 뭐야……?”
― 늦잠 처자는 거 깨워 줬더니 미친놈? 은혜를 욕으로 갚네.
답할 새도 없이 우당탕 침대에서 내려온 채현은 욕실로 직행했다. 좆됐다는 자각도 잠시, 지각하면 좆도 못 된다는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의리 없는 새끼야! 나 버리고 혼자 갔냐?”
― 양심 없는 새끼야. 전화 씹고 처잔 게 누군데. 학습 능력이 없어? 왜 매일 처자다가 지각을 해.
말마따나 매일 처자다 지각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따져 물었다간 귀에서 피가 날 때까지 욕먹을 걸 알기에 채현은 잠자코 칫솔을 물었다. 스피커폰으로 돌린 뒤 세면대 구석에 놓은 핸드폰 너머에서 ‘이 새끼는 불리하면 입을 다물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1교시 담임인 건 아냐?
“엉.”
모르지 않아 더 절망적이었다. 교칙대로 처리하는 담임이 지각을 봐줄 리 없었으니까. 이왕 늦은 거 여유롭게 등교하면 좋겠다만, 그렇게 할 만큼 뻔뻔하진 못했다.
― 지각 수고. 끊는다.
“야!”
그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상대는 작게 키득대며 그대로 전화를 뚝 끊었다. 치약을 뱉자마자 소리쳤으나 핸드폰은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이웃사탄]
통화 종료 01:12
채현은 화면 위에 떠오른 열한 자리 숫자를 노려보다 관심을 거두고 머릴 감았다. 5살 꼬꼬마 시절부터 열여덟 살이 된 지금까지 빈틈이라곤 없는 제 오랜 친구를 생각하며.
“서윤채 이 새끼는 지도 맨날 늦게 자면서 어떻게 저러지.”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에 경외를 닮은 거리감까지 느껴졌다. 귀신같은 새끼. 질색한 채현은 상념을 털어 내고 씻는 데 집중했다.
그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 뛰쳐나온 집 밖은 봄이라기엔 상당히 추웠다. 부르르 몸을 떨며 호출한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야속하게도 빨리 흘렀다.
“안녕하세요. 와, 오늘 날 엄청 춥죠. 꽃샘추위라더니 진짜인가 봐요.”
“우리 같은 사람이야 차 안에만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학생도 감기 조심해요. 근데 학교 늦은 거 아니에요? 수업 시간 아닌가?”
“하하, 어쩌다 보니……. 수업은 9시에 시작해요. 혹시 그 전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요?”
“내가 택시만 20년을 했어요. 보자, 인현고……. 10분이면 가지.”
기사님은 자신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하며 액셀을 밟았다. 채현은 안전하고 빠른 운전 부탁드린다 넉살 좋게 말을 얹은 뒤 핸드폰을 응시했다.
1 오전 8:44 [담임옴?]
초조하게 액정을 두드리며 바라보던 ‘1’ 자는 금방 사라졌다.
[이웃사탄 : ㄴㄴ넌 어디] 오전 8:45
오전 8:45 [나존ㄹ뛰는중]
오전 8:46 [물론택시가뛰고있긴함ㅎ]
[이웃사탄 : ㅋㅋ애쓴다]
[이웃사탄 : 뛰다 자빠지지 말고 와라] 오전 8:48
채현은 그 메시지에 답하는 대신 대화창을 나왔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볼 때쯤 주의를 잡아당긴 건 기사님의 목소리였다. 그에 맞장구치며 열심히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학교 근처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10분 내로 도착한다던 말대로 차에서 내리니 8시 53분이었다. 채현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최선을 다해 달렸다. 본관 건물에서 확인한 시간이 55분인 탓에 숨 돌릴 틈은 없었다.
2층 계단까지 다 오르고 나자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바로 하던 차, 한눈에 알아볼 만큼 익숙한 서윤채가 시야에 잡혔다. 그는 건방진 자세로 자판기 옆 벽에 기대서 있었다.
“어?”
채현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흘리자 핸드폰만 보던 서윤채가 고개를 들었다. 아침인데도 때깔이 고운 그의 낯에 미소가 어렸다. 짓궂은 표정을 한 그는 성큼성큼 곁으로 다가왔다.
“야, 지각생. 볼에 베개 자국 남았다.”
“왜 나와 있어?”
“음료수 뽑으러.”
서윤채는 손에 든 캔을 흔들어 보이더니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교실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었다.
“제발 일찍 좀 일어나세요. 듣지도 못할 거면 알람은 왜 맞춰?”
“네가 뭘 알아.”
채현은 순간적으로 발끈해 그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더럽게 예민한 서윤채 같은 놈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잠귀 어둡고 아침잠 많은 이들의 전쟁 같은 아침을. 늘 여러 개의 알람과 싸우는 시간을 모르는 주제에 말을 쉽게 했다.
“늦게 자니까 더 못 듣는 거 아니야.”
“너 잔소리하려고 나와 있었지.”
“어. 들켰어?”
시시껄렁하게 중얼거린 서윤채가 피식대며 손을 움직였다. 차가운 음료를 쥔 손이 향한 곳은 제 오른쪽 볼이었다. 깜짝 놀라 움찔 떨자, 실실대며 아예 캔을 뺨에 꾹 붙여 버렸다.
“아, 뭐 하는데.”
“채현이 창피할까 봐 베개 자국 가려 주는 중.”
“이러고 들어가는 게 더 쪽팔리니까 좀 떨어져 봐.”
“싫은데.”
결국 그 상태로 교실로 들어가니 여기저기서 알은척을 해 왔다. 반갑게 인사하며 제자리로 향한 채현은 서윤채를 밀어낸 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속 긴장 상태였던 몸이 이제야 조금 안정되는 듯했다.
멍하니 호흡을 가다듬으며 오늘 점심이 뭔지 생각할 무렵이었다.
“야.”
부름에 고개를 들기도 전, 책상 위로 빵 두 개가 툭 떨어졌다. 캐릭터가 그려진 초코 빵과 크림빵이었다. 채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위를 바라보았다.
“눈빛 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그대로 드러난 것인지, 서윤채가 껄렁하게 뇌까리며 바람 빠지듯 웃었다.
“배고프다고 지랄하지 말고 처먹어.”
“내가 사랑한다고 얘기했던가?”
“안 받아. 꺼져.”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오냐.”
서윤채는 계속 들고 있던 음료도 내려놓은 뒤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채현은 그를 바라보다 크림빵부터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특유의 달콤함이 만족스럽게 퍼졌다.
“윤채 형, 다음엔 크림빵으로 두 개 부탁드려요!”
행복에 젖은 채로 외치자 서윤채는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으로 답했다. 개의치 않고 빵을 꼭꼭 씹어 먹은 채현의 입매가 잔뜩 허물어졌다.
“기특한 놈.”
채현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다음번엔 결국 크림빵 두 개를 사 오리란 것을. 제 오랜 친구는 여전히 착하지 않지만, 모질지도 못했으니까.
예민 떨어도 오늘은 다 받아 줘야지.
서윤채의 잘난 옆모습을 보며 다짐한 채현은 흐뭇하게 남은 빵을 먹어 치웠다. 수업 종이 울렸는데 담임이 들어오지 않아 짝꿍과 떠들 여유도 있었다.
“미안. 오전 교무 회의가 길어져서 조금 늦었다. 어디 할 차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앞문으로 들어온 담임은 곧장 교과서를 펼쳤다. 채현 역시 아침 먹은 값은 하리란 다짐으로 삼색 볼펜을 손에 쥐었다.
그렇게 두 눈을 빛내며 수업에 임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눈두덩을 짓누른 잠기운이 무게를 더해 졸음이 몰려온 탓이었다.
지옥 같은 1교시. 히터가 나오는 따뜻한 교실. 적당히 부른 배. 불면증 치료제와 다름없는 담임의 목소리. 모든 요소가 잠자기에 적합한 상태를 만들었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채현의 머리는 뚝 떨어졌다 제자리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졸지 않은 척 영어 지문에 밑줄을 그었으나 삐뚤빼뚤 난리도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필기를 하며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담임 눈에 띄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교실을 돌아다니다 그를 발견한 담임은 한숨 섞인 음성으로 호명했다.
“권채현.”
“…….”
“권채현!”
“네, 네?”
“이다음부터 읽어 볼래.”
상황 파악이 덜 된 채현은 눈만 깜빡이다 슬쩍 짝꿍을 바라보았다. 이다음이 어디인지 알 리가 없었다. 교탁 앞에 있던 담임이 왜 제 앞에 서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으니까.
“야, 어디야…?”
“여기. 일곱 번째 문장부터.”
“아.”
심지어 페이지도 넘어간 지 오래였다. 소리 없이 웃은 채현이 태연하게 책을 넘기고 읽으려 하자, 담임은 됐다는 듯 손짓하며 한 소리를 했다.
“채현이는 학교에 자러 왔어?”
“아뇨. 아주 잠깐, 내용을 곱씹어 보느라….”
“시끄러워, 인마. 침이나 닦아.”
흠칫 놀란 채현은 바로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묻어나는 게 하나도 없어 힐끗대니 담임은 웃는 것도 화난 것도 아닌 표정을 해 보였다.
“다음 시간에도 침 흘리고 자면 복도로 내쫓는다.”
“침은 안 흘… 네! 제일 열심히 듣겠습니다.”
“말은 잘해.”
하하. 머쓱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매만질 무렵 아주 한심하단 얼굴을 한 서윤채와 눈이 마주쳤다. 턱짓과 함께 입 모양으로 ‘뭐.’ 하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 뒤로는 수업에 집중할 뿐이었다.
……뭐야. 저럴 거면 왜 쳐다본 거야. 쟨 졸리지도 않나.
채현도 뺨을 긁적이며 눈길을 거뒀지만 머릿속에선 자연히 서윤채가 싹을 틔웠다. 진짜 쟤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똑같이 조는 꼴을 목격하고 놀리고 싶은데,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안 그렇게 생겨선 전교 석차도 늘 한 자릿수를 기록했고.
지겹도록 오래 보고 있는데 서윤채는 여전히 신기했다. 하나둘 피어나던 생각은 저절로 아침에 꿨던 꿈으로 연결됐다. 서윤채와 함께 뛰놀던 그 무렵이 두둥실 떠올랐다.
“…….”
어린 시절, 채현은 체구가 작고 자주 아팠다. 열성 경기를 겪어 툭하면 병원으로 업혀 가는 게 일상이었다. 다만 아픈 몸과 달리 마음은 건강해서, 뛰어놀지 못하는 걸 가장 괴로워했다.
그러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다행히 열나는 횟수가 줄고 점점 몸 상태가 괜찮아졌다. 매일같이 드나들던 병원 선생님과 긴장을 내려 두고 볼 수 있을 만큼.
단 한 번도 울지 않고 곁을 지킨 부모님은 이제 안심해도 될 거 같단 의사의 말에 눈물을 보였다. 한참 동안 쏟아 낸 건 아픈 아이에게 품었던 부모의 죄책이었다.
그 이후, 유약했던 시절을 묻고 새롭게 생활해 나가자는 목적으로 이사를 했다. 그 동네에서 마주한 이가 바로 서윤채였다.
서윤채와는 또래 아이라서인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집이 가까웠던 덕에 가족끼리 자주 왕래하며 막역한 사이가 됐다. 특히 그는, 채현이 많이 아파 또래 친구와 잘 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심히 챙기려고도 했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13년이 흘렀다.
“진짜…….”
언제 저렇게 컸냐. 생각의 끝에서 서윤채를 힐끔 본 채현은 처음 봤을 때처럼 곱게 잘 자란 그의 모습에 씩 웃었다. 자신이 부모는 아니지만 괜히 흐뭇해 웃던 찰나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서윤채는 묘한 표정을 짓다 인상을 구긴 채 먼저 시선을 휙 돌렸다.
“…….”
까칠하기는. 채현도 그를 따라 눈썹을 들썩이곤 나름대로 수업에 집중했다. 오래된 기억에 편승한 덕인지 잠이 달아나 끝날 때까지 멀쩡하게 버틸 수 있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교실은 금방 시끄러워졌다. 채현의 짝꿍도 득달같이 매점을 향해 달려 나갔다. 채현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늘어진 채 느릿느릿 교과서를 정리했다.
“뭘 야려.”
그런 그의 곁으로 다가온 서윤채가 텅 빈 옆자리에 앉으며 낮게 한마디 내던졌다. 수업 시간에 눈이 마주친 걸 의미하는 듯했다. 멀뚱히 그를 보던 채현은 아침에 꾼 꿈을 간략히 전달했다.
“나 오늘 꿈에 너 나왔다.”
“출연료 내놔.”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라는 반응을 예상했으나 그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진심으로 받아 갈 듯 구는 모습에 채현의 표정도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나도록 내려치자, 서윤채는 픽 웃으며 손을 물리곤 책상에 낙서를 했다.
“뭐 하디?”
“우리 옛날에 동네에서 뛰어놀 때 나 자주 뒤처졌잖아.”
“우리 채현이가 존나 잘 넘어지긴 했지.”
그림을 그리며 답하는 나지막한 음성엔 웃음이 스며 있었다.
“그때 네가 다시 와서 일으켜 주는 꿈 꿨어.”
“애 하나를 키웠다, 내가.”
“미친,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예, 그러시겠죠.”
실실대는 서윤채의 만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채현은 문득 ‘그 정도였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입을 꾹 다물고 짝꿍의 책상을 뒤덮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입술 사이가 갈라지고 말이 쏟아진 건 순식간이었다.
“너 지금 뭐 그린 거야? 남의 자는 얼굴은 왜 그려? 너야말로 모델료 내놔. 남 얼굴 막 그리기 있냐? 그리고 거기 정유빈 자리라고.”
“우리가 남이야? 말 존나 서운하게 한다, 채현아. 단물 다 뽑아 먹었다 이건가.”
“뭐래.”
잠깐 낙서한 수준이라기엔 너무 잘 그려서 더욱 황당했다. 가볍게 서윤채를 무시한 채현은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림이 꽤 마음에 들었으므로.
너는 왜 재수 없게 그림도 잘 그리냐. 그러는 넌 왜 그림도 못 그리냐. 말 다 했냐. 아직 한마디밖에 안 했다…….
싸움인지 대화인지 모를 것을 주고받다 보니 매점에서 돌아온 정유빈이 곁에 서 있었다. 그는 과자를 씹으며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했다.
“그냥 자리를 바꿔 줄까? 너희 둘이 앉을래?”
“정유빈, 나랑 앉기 싫어?”
“나는 이제 여기가 내 자린지 서윤채 자린지 헷갈린다.”
“너 해. 양보할게.”
산뜻하게 웃은 서윤채가 일어나는 순간 때마침 예비 종이 쳤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태연히 정유빈의 과자도 하나 빼앗아 먹었다.
“야, 그거 다시 내려놔. 과자 도둑이 지갑 도둑 되는 거 몰라?”
“달아 놔.”
외상값을 달듯이 말한 서윤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를 본 정유빈은 아주 치를 떨며 털썩 주저앉았다.
“재수 없는 새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서윤채 나쁜 애는 아니야.”
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정유빈의 표정이 한층 더 험상궂어졌다.
“손은 뭔데.”
“나도 하나만.”
“내가 왜. 넌 서윤채보다 더 악질이야. 빵을 두 개나 처먹고.”
“야……. 나 그거 아침이었어. 다음 시간에 매점 가자. 내가 사 줌.”
그는 그제야 흔쾌히 과자를 내놓았다. 채현은 매점에 가는 김에 서윤채가 좋아하는 간식도 사 와야지 생각하며 한입에 털어 넣었다.
오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열심히 필기하고 졸다 깨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다. 아직 자신이 성장기라 믿는 채현은 밥 먹는 일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음식을 나눠 주시는 아주머니들과 친해져 식판도 푸짐하게 채웠다.
서윤채는 질색하면서도 다른 친구들이 떠난 자리에 끝까지 남아 기다려 주었다. 물론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잘 먹는데 왜 땅에 붙어사냐.’ 중얼거리며 장난을 쳐, 결국 욱한 채현이 그의 다리를 걷어차게 만들었다.
“이거 폭행 아니냐? 여기 CCTV 다 찍혔어, 지금.”
“고소하시든가.”
“난 선처 합의 그딴 거 안 해 줘.”
“그럼 무릎 다시 대 봐. 성장판 닫힐 때까지 차 버리게.”
다 기다려 주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들었지만, 서윤채는 피식대며 재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채현은 씩씩거리다가 다음 시간이 체육임을 떠올리곤 남은 밥을 마저 퍼먹었다.
체육 수업은 채현이 가장 눈을 빛내는 시간이었다. 반면, 서윤채는 춥고 체육복 갈아입기 귀찮다며 아주 질색을 했다. 오늘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체육복 상의를 목 끝까지 채운 그는 계단에 걸터앉아 오들오들 떨어 댔다.
“채현아, 눈에 힘 좀 풀자. 너 지금 무서워. 광인 같아.”
“넌 아파 보이는데……. 그렇게 추워? 내 옷 벗어 줄까? 입을래?”
“그러다 감기 걸리면 누구 탓을 하려고. 됐으니까 너 해. 아, 존나 체육관은 관상용인가. 이 날씨에 뭔 운동장이야.”
옆에 앉아 있던 정유빈은 예민한 새끼라서 추위를 뒈지게 탄다며 낄낄댔고, 배주희와 서아영은 담요를 나눠 덮자고 손짓했다. 그를 본 서윤채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만 저었다.
수업이 시작된 후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피구를 하게 돼 이리저리 뛰어다닌 덕이었다. 투덜거리던 이들도 막상 시합이 시작되니 소리 높여 몸을 움직였다. 개중 가장 승부욕을 불태운 건 채현이었다.
“서윤채. 이번에는 내가 해 줄게.”
“뭘.”
“어……. 뒷바라지? 너 그냥 맞고 죽을 생각이었잖아. 그 꼴은 내가 못 보지. 형만 믿어라.”
채현은 추워 죽겠다는 표정을 한 서윤채의 앞에 서며 가드를 자처했다. 헛웃음을 흘리던 그는 머지않아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채현은 공이 날아오는 족족 자석인 양 붙잡고 역공을 했다. 지킬 사람을 한 명 달고 움직였으나 문제 될 건 없었다. 추울 때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할 뿐, 서윤채도 운동 신경 자체는 좋았으니까. 신이 나서 팔을 휘두르니 그는 꽤 열심히 어울려 주었다.
시합은 채현이 속한 짝수 팀이 먼저 2승을 거둬 깔끔하게 승리했다. 한껏 들뜬 채현은 바람에 날려 엉망이 된 머리를 하고서 서윤채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멋있냐?”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구는 꼴을 본 서윤채의 표정 또한 허물어졌다. 그는 채현의 머리 위에 툭, 손을 올리곤 칭찬하듯 꾹꾹 내리눌렀다.
“존나.”
하는 이도, 받는 이도 아주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다.
체육 수업은 늘 애매하게 시간이 남았다. 한 판 더 경기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모여 앉아 떠들다 보니 곧이어 끝을 알리는 종이 쳤다.
교실로 직행하는 이들 틈에서 채현은 매점으로 향했다. 몸을 움직였으니 당 충전을 해야 한다는 뜻에 다들 동의하며 이동했으나 서윤채는 심드렁했다. 정유빈이 빵을 계산하는 꼴을 보더니 먼저 가겠다며 발까지 뗐다.
“윤채야, 기다렸다가 같이 올라가자. 유빈이 빵만 돌리면 되니까.”
“추워서 싫어. 그냥 나 보내고 넷이 오붓하게 올라와.”
그는 서아영의 만류에도 가차 없이 거절을 표했다.
“그렇다고 의리 없이 혼자 가냐.”
“여기까지 같이 온 의리는 취급도 안 해 줘? 난 지금 히터가 간절해, 아영아.”
“이왕 의리 보인 김에 적선한다 치고 기다려 주면 되겠네. 담요 너 쓰고 있어.”
“너 나 좋아해?”
노선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서윤채의 질문에 모두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제게 집중된 시선을 알면서 뻔뻔하게 눈짓했다.
“그래서 붙잡는 거면 다시 생각 좀 해 보고.”
“혹시 추워서 미쳤어? 뇌가 얼었나? 진심으로 욕할 뻔했어.”
채현도 서아영의 말이 가능성 있다 싶어 퍽 심각한 눈빛으로 그를 살폈다. 대체로 상식적인 서윤채도 완전히 돌아 버린 것처럼 굴 때가 있었으니까.
“그래. 미친 일이지. 나 좋아하지 마.”
“돌았나 봐. 뭐라는 거야. 내가 널 왜 좋아해? 야, 너 가.”
서아영은 언제 그를 붙잡았냐는 듯 아예 등까지 밀어 주었다.
“재수 없으니까 그런 착각 또 하기만 해. 꿈도 꾸지 마. 난 너보다 채현이 쪽이 더 취향이야.”
“……나?”
대뜸 지목되어 놀란 채현이 손가락으로 자길 가리키는 동시에, 씩 웃으며 밀리던 서윤채가 멈춰 섰다. 그는 채현과 서아영을 번갈아 보다가 멀어진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권채현 인기 많네.”
그러곤 채현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조금 더 자신 쪽으로 당겼다. 대처할 틈도 없이 끌어안긴 채현이 올려다보니 선명한 웃음을 걸친 채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둘은 안 돼.”
“……너 지금 뭐 해?”
“단속.”
채현은 그저 ‘얘가 지금 완전히 돌아 버린 건가? 눈깔은 정상인데 저것도 돌은 눈인가?’ 생각하며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와중에 어깨에 닿은 손이 차가워 염려스럽기도 했다.
“친구끼리 뭔 연애냐.”
“하긴. 사귀다가 깨지기라도 해 봐.”
“그건 둘째 치고 쟤네가 사귄다고 하면 난 좀 안 믿길 듯.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배주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자, 전자레인지 순서를 기다리며 빵 봉지를 찢던 정유빈도 말을 던졌다. 그는 실제로 상상이라도 한 듯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단체로 미친 거야? 우린 사귈 생각도 없는데 왜 앞서가?”
“그럼 다행이고.”
“죽었다 깨어나도 너희랑은 안 만나. 특히 서윤채 너는 친구 아니어도 안 만날 거야.”
“그래. 그런 걸로 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윤채가 같이 노는 친구 사이에서 연애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선 후자 같았다.
“교통정리 끝. 나 가도 되지?”
“제발 가.”
서윤채는 이제야 원하는 대로 됐다는 듯 어깨를 감싸 안았던 손을 물리고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채현은 그런 서윤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머지않아 코너 뒤로 사라진 그 대신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가 보였다. 좇을 대상이 사라졌으니 시선을 거두면 될 일인데 어쩐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뜻 모를 상태에 의아하던 찰나, 불현듯 오늘 아침 꾼 꿈이 떠올랐다. 그는 멀어지고 자신은 제자리서 바라보던 광경이.
“…….”
케케묵은 기억은 당시의 감각도 함께 불러일으킨 게 분명했다. 주위의 소란이 서윤채가 머물렀던 곳을 뒤덮은 후에도 복도 끝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서윤채 한 번씩 진짜 재수 없어서 빡쳐.”
“대체로 재수가 없지. 근데 아영아, 중학교 때 서윤채 좋아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야, 그건! 얼굴만 봤을 때, 처음에 진짜 얼굴만 봤을 때 그런 거고. 지금은 줘도 안 가져. 소름 끼치니까 그런 말 꺼내지도 마.”
배주희의 폭탄 발언에 정유빈이 전혀 몰랐다며 낄낄거렸다. 순간을 곱씹던 채현도 상념을 밀어내고 시선을 옮겼다. 직후 붉어진 얼굴로 해명을 늘어놓는 서아영과 눈이 마주쳤다.
“진짜 안 좋아해.”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이제 할 거잖아.”
“혹시 나한테 마음 있….”
“없어. 죽어도 없어. 한마디만 더 하면 서윤채랑 같이 묻어 버릴 거야.”
잔뜩 화가 난 서아영이 미간을 구긴 채 사납게 눈을 빛냈다. 채현도 반쯤 장난으로 말을 던졌던 터라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직전 대화의 연장으로 친구와의 연애에 대해 떠들었다. 누구는 서윤채처럼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누구는 아무렴 어떠냐는 식이었다.
“막말로 우리 중에 누가 사귀다 깨져 봐. 다신 다 같이 못 보는 거야. 서로 배려하는 거지. 윤채도 그런 뜻으로 말한 거 같은데.”
“서윤채가 그 정도로 남을 배려하겠냐? 걘 그냥 성가신 게 싫은 거고. 근데 연애야 뭐, 사실 마음 맞으면 사귀고 깨지면 따로 만나면 되지. 그렇게 하나하나 재다간 평생 혼자 산다.”
“채현, 너는 어느 쪽?”
“어? 나?”
양쪽 의견에 모두 공감하며 이야길 듣던 채현은 아이스크림을 꿀꺽 삼킨 뒤 ‘어….’ 목을 울렸다. 연애에 큰 관심이 없는 탓일까. 솔직히 말해 정말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서윤채도 의외로 세심한 구석이 있어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 * *
하루를 밝힌 해가 저문 자리에 초승달이 떠올랐다. 짙은 밤의 색으로 어둑하게 물든 하늘 어딘가에 걸린 채 흔들림 없이 빛나며 주위를 밝혔다.
채현은 위를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밤거리는 낮과 달리 조용하고 추웠지만, 하굣길이 외롭진 않았다. 옆에서 속도 맞춰 걷는 서윤채가 있었으므로.
늦잠을 자느라 따로 가는 아침을 제외하곤 이변이 없는 한 등·하교는 항상 같이했다. 너무 어릴 적부터 그렇게 해 이젠 당연해진 일이었다.
“앞을 보고 걸어라. 또 무릎 깨 먹지 말고.”
“언제 적 얘기를……. 몇 번 넘어진 거 가지고 되게 그러네.”
자연히 아침에 꾼 꿈을 떠올린 채현이 머쓱하게 웅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한창 무릎을 깨 먹고 다니던 시절, 지금 걷는 이 길에서 넘어진 적도 있었으니까.
“몇 번? 내가 네 무릎에 있는 흉터를 다 아는데 어디서 구라를 쳐.”
그때도 서윤채는 다른 이들을 뒤로하고 반대로 달려와 손을 내밀곤 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꿈을 통해 본 옛 모습이 반가울 만큼 선명한 순간이었다.
“채현이 양심 학교에 두고 왔어?”
“아니? 나 무겁게 다 들고 다니는데? 까서 보여 줄까?”
“뭘 까.”
버스에서 내린 순간부터 춥다고 덜덜 떨던 서윤채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뭘 쪼개느냔 뜻으로 바라보자, 차가운 손으로 뒷덜미를 마구 만져 댔다. 무지막지한 냉기에 머릿속 생각이 전부 휘발됐다.
“너 죽었어? 사람 손이 뭐 이렇게 차? 야, 나 소름 돋아. 손 떼. 으, 차갑다고!”
“진짜 더럽게 춥다. 3월 봄 아니냐? 나 동사하면 어쩌지.”
후드 밑으로 손을 옮긴 서윤채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주제에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얼어 죽으면 저승 갈 때 쓰게 꼭 핫 팩도 같이 넣어 줘라.’ 중얼거렸다.
“미친놈……. 목도리랑 장갑도 넣어 줄게.”
황당해하기도 잠시, 하루 이틀 들은 헛소리가 아니기에 채현은 자연스럽게 말을 얹었다. 한술 더 떠 ‘근데 저승도 춥나?’ 묻자 서윤채는 안 가 봐서 모른다고 말을 흐렸다.
“이모가 갈비찜 해 주신다 했는데 그건 먹고 죽어야지.”
“갈비찜? 그런 소리 없었… 너 우리 엄마랑 연락해?”
“응. 우리 카톡 친군데.”
당당한 서윤채의 대답에 채현은 ‘헐…….’ 하고 탄식했다. 친아들한테는 언질도 없이 남의 아들을 꾀어내고 있었다니.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뭐야. 나도 이모 뵈러 갈래.”
“그러든가.”
워낙에 오래된 사이라 서로의 부모님을 뵙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엔 번갈아 가며 며칠씩 하숙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이모 요즘은 어떠셔?”
“좋아. 괜찮아.”
느릿하게 답하는 서윤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조로웠다. 아마, 자신이 태어난 이후 쭉 몸이 약했던 제 어머니를 생각한 것이리라.
“아, 또 아들이 가서 기운 북돋아 드려야겠네.”
“그래. 네가 와서 좀 해라. 난 이모랑 수다나 떨러 가야겠다.”
“너 갈비찜이 목적이지? 엄마한테 다 말할 거야. 서윤채 사리사욕 채우러 오는 거라고.”
“까분다.”
그런 그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채현은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야. 초승달 서서 보면 그다음 해에 건강하대. 나 옛날에 초승달 뜰 때마다 봤거든.”
“그러냐.”
“어. 너도 집 가서 창문 열고 이모랑 봐. 꼭 서서 봐야 해.”
서윤채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위를 본 채현은 반짝이는 초승달을 응시한 채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맥락 없이 이어지는 헛소리에 불과했지만 서윤채를 웃게 하는 데엔 충분했다.
나란히 내딛던 발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뒤 멈춰 섰다. 늘 헤어지는 놀이터 앞에서 서윤채는 어서 가라는 듯 턱짓했다.
“내일도 늦으면 안 깨울 거니까 알아서 해. 각자도생하자.”
“또 늦으면 내가 사람도 아니다. 걱정하지 마. 못 지키면 개 할게, 그냥.”
“그래. 개채현 파이팅하고.”
그는 한번 비웃더니 먼저 걸음을 옮겼다. 괜한 오기가 생긴 채현은 반드시 일찍 일어나리라 다짐하며 ‘너야말로 늦지 마라!’ 외쳤다. 서윤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빠르게 멀어질 뿐이었다.
꿋꿋이 뒷모습만 보이며 사라진 이에게 답이 온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이웃사탄 : 사진] 오전 12:47
“진짜 미친놈 아니야.”
침대에 드러누워 메시지를 확인한 채현은 실소를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도착한 사진 하나는 알록달록한 애견용 목줄이었다.
오전 12:48 [이걸왜나한테]
[이웃사탄 : 조만간 개 한 마리 들일 예정이라] 오전 12:51
오전 12:52 [누가키우게해준댓나ㅡㅡ]
[이웃사탄 : 나 아니면 누구한테 가려고]
[이웃사탄 : 근데 답장 속도가 빨라?]
[이웃사탄 : 처자기나 해] 오전 12:58
“지는…….”
실실대며 ‘ㅗ’ 하나를 보낸 채현은 제 메시지가 씹힌 걸 확인한 뒤 착실하게 눈을 감았다. 밤공기에 몸을 싣고 밀려온 졸음에 잠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머지않아 방 안엔 고른 호흡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 끝의 모습이었다.
* * *
3월은 대체로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지난 1년의 기억 위로 새로운 일상을 덧씌우는 시기이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두르고 있던 어색함을 떨쳐 내는 과정이었으니.
학교도 학생들의 적응을 돕기 위한 노력으로 여러 행사를 주최했다. 그중에서도 모두가 고대하는 건 3월 말 제주도로 떠나는 수학여행이었다. 채현 역시 기대감을 부풀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껏 겪어 온 일상에 변화가 생긴 건 그즈음이었다.
“권채현, 매점 안 가?”
“어? 어. 너희 다녀와.”
수학여행이나 기대하며 여유롭게 지내야 할 학기 초, 본인 혼자 다른 세상에 사는 양 바빠진 서윤채 때문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채현의 자리로 출석하던 그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꼼짝 않고 이상한 종이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면 엎어져서 잠을 자거나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 꼴을 본 정유빈은 ‘너희 혹시 싸웠냐?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데.’ 묻기까지 했다. 다른 이들이 의문을 품은 만큼 채현의 머릿속도 물음표로 가득 찼다.
대체 뭘 하는 건지…….
때가 되면 말해 주겠지 싶어 그냥 다른 이들과 어울렸으나 더는 무리였다.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 하고 며칠을 보낸 탓에 슬슬 답답해진 참이었고.
복도 자판기에서 서윤채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뽑은 채현은 곧장 그의 자리로 향했다. 똑똑. 책상을 두드리자 서윤채는 기민하게 고개를 들었다.
“너 살아 있지?”
“죽은 사람이랑 대화하는 재주도 있었어? 몰랐네.”
잔뜩 예민해진 낯을 하고 있던 그는 상대를 확인하고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불그스름해진 눈을 깜빡이더니 설핏 웃어 보였다. 그답지 않게 정말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상태가 왜 이래? 모의고사도 끝났는데 뭐가 그렇게 바빠. 설마 벌써 중간고사 준비해?”
“동아리 때문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 둔 서윤채가 의자에 기대며 낮게 속삭였다.
“거기서 뭐 시키는데.”
“모의재판이랑 토론 대회 준비.”
거기까지 들은 채현은 대충 짐작이 가 질색하며 서윤채를 살폈다. 두 행사 모두 다양한 활동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교내 대회였다. 시체처럼 이러고 있는 꼴만 봐도 동아리에서 얼마나 굴리는지 알 만했다.
하물며 공부 잘하는 애들을 깡그리 납치해 간 시사 토론부였다. 생활 기록부는 물론 자기소개서에도 요긴하게 쓰일 활동에 목매지 않을 리 없었다.
“야, 쉬엄쉬엄해. 요새 계속 늦게 잤지? 너 지금 눈 엄청 빨개. 그러다 병난다, 진짜로. 단명이 꿈이야? 불효하고 싶어서 그래?”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 정신 얼얼하다. 귀 안 빨개졌냐? 피 나는 거 같은데.”
음료수를 건네며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늘어놓자 서윤채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 뒤엔 캔을 흔들어 보이며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는 넌 꼴이 그게 뭐야. 아침에 학교 그러고 왔어?”
“엥, 내 꼴이 어디가 어때서?”
“옷을 입다 말았잖아. 너 그러다 얼어 죽는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서윤채가 심각하게 뇌까렸다. 진지한 눈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 듯했다. 문제는 채현이 기모 후드까지 챙겨 입은 상태라는 점이었다.
“유난은…….”
“뭐?”
“아니야.”
잠시간 빤히 바라보던 서윤채는 이내 픽 웃으며 음료를 마셨다. 채현은 덩달아 헛웃음을 흘리다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 상태로 가득 쌓인 이야기를 쏟아 낼 무렵이었다.
“윤채야.”
열린 뒷문으로 고개를 내민 누군가 서윤채를 불렀다. 상대를 확인한 서윤채는 예상외로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의 대화는 그가 어깨를 한 번 툭 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
홀로 남은 채현은 멀뚱히 서윤채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는 순식간에 멀어져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교실 너머로 사라졌다. 곧은 뒷모습이 유독 뇌리에 짙게 남았다.
서윤채는 수업 종이 울린 뒤 선생님과 함께 들어왔다. 피곤해한 적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수업에 집중했지만 채현의 눈에는 보였다. 신경이 잔뜩 예민해진 상태라는 것이.
“…….”
자신도 모르게 서윤채를 살피던 채현은 눈길을 돌리고 교과서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기운 없는 그에게 뭐라도 사 먹여야겠다 생각하면서.
다만, 막상 닥친 점심시간은 계획과 상당히 달랐다.
“나 오늘 먼저 간다.”
맛있는 걸 사 먹이기는커녕, 서윤채는 붙잡을 틈 없이 급식실을 벗어났다. 늘 끝까지 남아 기다리던 그였기에 다른 이들도 의아하단 반응을 보였다.
“윤채 요즘 뭐 해? 툭하면 사라져.”
“쟤 어디 가냐?”
“몰라. 동아리 때문에 바쁘대. 나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줘.”
당연하다는 듯 제게 쏟아진 질문에 답한 채현은 애들을 붙잡고 밥을 먹었다. 평소보다 급히 먹어서인지 좋아해 마지않는 메뉴였음에도 썩 맛있진 않았다.
“…….”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며 음식을 씹던 채현의 시선이 앞자리에 닿았다. 서윤채가 떠나고 텅 빈 공간이 유난히 넓어 보였다. 꼭꼭 씹어 삼킨 음식이 어쩐지 목에 콱 걸린 기분이었다.
떨떠름하게 식사를 마치고 향한 매점에선 같은 중학교 출신인 3학년 형과 마주쳤다.
“친구는 어디 가고 혼자냐?”
“친구들 저기 있는데요.”
“말고.”
어깨를 툭 친 그가 서윤채를 찾고 있다는 것쯤은 단박에 알아챘다.
“몰라요. 바쁜가 봐요.”
그저, 서윤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를 뿐이었다.
머쓱하게 웃은 채현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힘이 들어간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
“채현아, 소화시키게 산책 좀 하다가 올라가자.”
“어? 춥지 않겠어?”
“내가 서윤채야? 바람 별로 안 불어서 걸을 만해.”
“아…….”
그러고 보니 저번 주보다 확연히 날이 풀린 상태였다. 온 세상 추위는 본인이 다 타는 양 구는 이에게 익숙해진 탓에 인지가 느렸다. 채현은 뺨을 긁적이며 잠자코 서아영을 따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건물 주위를 뺑뺑 도는 동안 시간은 훌쩍 흘렀다. 교실로 올라와 양치까지 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끝이 났다. 휑하니 사라졌던 서윤채는 그제야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와 함께 걸어왔는지 웃으며 인사하곤 자리로 향해 책을 펼쳤다.
기분 좋아 보이네.
물끄러미 그를 좇던 채현은 확신에 가까운 답을 내놓으며 눈을 깜빡였다. 함께한 시간만 10년이 넘었다. 상태를 아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에 반해 알 수 없는 것들도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디서 뭘 하고 온 건지……. 평소라면 구태여 알려 하지 않아도 알게 됐을 일이 아리송했다. 묘한 거리감이 느껴져 수업 시간 내내 무의식적으로 힐끗거렸으나 시선은 맞닿지 않았다.
5교시 후엔 동아리 시간이라 더 마주할 새가 없었다. 체육관으로 향한 채현은 마음 한구석에 물음표를 띄운 채 열심히 뛰어다녔다. 서윤채로 가득 찬 머리를 비워 내려 노력하면서.
“와, 폐 찢어졌다…….”
“폐만 찢어졌냐? 난 너 미친놈인 줄 알았다.”
“쟤 중학교 때부터 저랬음. 서윤채는 왜 농구부 같이 안 들어왔냐? 걔도 잘하잖아.”
“서윤채 시사 토론부로 납치당했어.”
“이름부터 좆같을 수가 있구나.”
상황은 채현의 편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서윤채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 이어졌다. 그럴수록 의문은 비대해졌지만 다행히도 경기가 또 시작돼 오래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종례 시간에도 서윤채와 이야기하긴 마땅치 않았다. 그는 잠시 자리를 지키다가 홀연히 공간을 벗어났다. 이후론 방과 후 수업이 있어 흩어져야 했기에 의문은 여전했다.
수업을 끝마치고 맞이한 석식 시간은 한가로웠다. 교실로 돌아온 채현은 보이지 않는 한 사람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서윤채 어디 갔어?”
“윤채 밥 따로 먹는대. 제윤이랑 먼저 갔어.”
“신제윤? 서로 싫어하더니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결국 똑똑한 놈들끼리 붙어먹겠다 이거지.”
짧게 웃은 정유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채현 역시 멀뚱히 눈을 깜빡이며 서윤채의 자리를 응시했다. 익숙지 않은 상황에 찾아드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 뒤론 어스름한 저녁 빛으로 물든 공간에서 떡볶이를 시켜 먹었다. 이따금 원인 모를 허전함이 느껴지며 ‘밥은 제대로 챙겨 먹었으려나.’ 걱정이 들었지만 찰나에 그쳤다. 어차피 집에 갈 때 볼 얼굴이란 걸 알았으니까.
“…….”
고요하게 잠긴 자습실에서 자율 학습까지 끝낸 뒤, 채현은 서윤채가 있는 면학실로 향했다. 기다려도 나올 생각을 않기에 직접 들어가 등을 치니 그는 움찔 놀라며 고갤 들었다. 장장 몇 시간 만의 만남이었다.
“집 안 가? 끝났어.”
“아…. 너 먼저 가.”
“어? 왜?”
“아직 할 일 남아서.”
두 눈을 깊이 감았다 뜬 그가 느릿하게 이야기했다. 갈라진 음성 곳곳에 스민 피로가 느껴지는 듯했다. 커다란 손으로 훑어 내린 낯빛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기다릴까?”
“언제 끝날 줄 알고. 그냥 먼저 가. 혼자 못 가?”
“뭐래……. 갈 수 있거든. 너야말로 춥다고 덜덜 떨지 말고 일찍 들어가. 밤 되면 더 추워.”
“오냐.”
눈가를 꾹꾹 누르던 서윤채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채현은 힘내라는 말 대신 죽지 않을 만큼만 하라는 응원을 남기고 돌아섰다.
서윤채가 없다고 하굣길이 쓸쓸하진 않았다. 야자가 끝난 뒤의 학교 근처는 늘 포화 상태였으니까. 근처에 있던 다른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문제는 버스에서 내린 다음이었다.
“아, 추워.”
코를 훌쩍이며 혼자 걷던 채현은 오늘따라 어두운 길에 새겨진 그림자 하나를 응시했다. 늘 두 개가 함께 흔들리다 하나만 있는 것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
그 꼴을 한참 바라본 끝에 채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실소를 흘렸다. 여느 때와 똑같을 밤거리가 몹시도 적적하게 느껴졌다.
* * *
일상의 궤도를 벗어난 날들이 연이어 이어졌다.
돌고 돌아 다시 금요일이 될 때까지 서윤채는 계속 바빴다. 같이 있던 순간보다 각자 움직인 시간이 훨씬 길었다. 그 탓에 채현은 최근 본인도 모르게 예민해진 상태였다.
“웬일로 윤채랑 따로 있어?”
“버려졌어요.”
마주치는 사람마다 서윤채를 찾아 대서 더 신경이 긁혔다. 하다못해 1학년 때 담임 선생님도 자신을 보고 서윤채를 찾았다. 그동안 얼마나 붙어 다녔던 건지 새삼스럽게 깨달을 판이었다.
그즈음 채현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하나였다.
서윤채에게 유기당했다.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 주위 사람의 반응에 그런 느낌만 들었다. 서윤채가 없어도 놀 친구는 많았지만, 타의로 거리를 둬서인지 묘한 불편함이 가시질 않았다.
온종일 그러한 상태로 보낸 하루의 끝에서, 채현은 뚱한 얼굴로 서윤채의 뒷모습을 직시했다.
“오늘도 혼자 가?”
“어. 가라. 월요일에 보자.”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성의하게 대답한 뒤 옆자리 남자애와 이야기를 나눴다. 미소 띤 얼굴로 무어라 말하는 모습을 보던 채현은 작게 ‘응.’ 대답하곤 혼자 돌아섰다.
벌써 일주일째 이어진 심심한 하굣길이었다. 익숙해지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채현은 그러지 못했다. 여태껏 서윤채와 함께하는 것이 숨 쉬는 것만큼 당연했으니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요함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었다. 이는 시끄러운 번화가를 거쳐 주택가로 들어설수록 더욱 짙어졌다. 채현이 나름의 방법으로 선택한 건 노래를 들으며 걷는 거였다. 오직 제게만 들리는 커다란 소음은 적요를 없애기에 제격이었다.
오늘도 그렇게 밤거리를 걸을 때였다. 늘어진 그림자를 꾹꾹 밟아 내리던 채현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둥근 달 주위로 달무리가 진 게 눈에 담겼다.
“비 오려나…….”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꿉꿉하게 느껴졌다. 발걸음도 유난히 땅에 쩍쩍 달라붙는 듯했고. 무언가가 몸을 타고 기어올라 끌어당기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공연히 소름이 돋아 몸서리친 채현은 걸음을 빨리했다. 서윤채와 늘 헤어지던 놀이터를 지나 집 안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고 발을 내디뎠다.
“아들 왔다!”
“왔니? 수고했어. 어휴, 볼 빨간 거 봐. 밖에 춥든?”
“조금? 밤이라 그런가 봐. 바람이 막 불어.”
“보일러 올려 둘 테니까 일단 씻고 나와.”
“응. 씻고 일찍 잘래. 피곤해.”
엄마에게 씩 웃어 보인 채현은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뜨거운 물 아래서 정성껏 피로를 씻어 낸 다음엔, 가족과 시간을 보내다 묘하게 머리가 무거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날 새벽, 안락한 꿈 대신 찾아든 건 머리를 짓누른 열기였다. 채현은 지겹도록 겪은 익숙한 열감에 눈을 떴다. 열이 올라 흐려진 시야 너머 어둑한 방이 흔들렸다.
“아.”
눈가와 머리는 뜨겁게 끓는데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게 식었다. 몸을 감싼 옷이 소름 끼칠 만큼 오한도 들었다. 연례행사처럼 꼭 한 번은 앓던 감기가 또 찾아든 듯했다.
엄마 놀라면 안 되는데……. 채현은 걱정에 잠길 가족을 떠올리며 무력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어서 거실로 나가 약을 먹어야 함을 알면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서윤채가 떠올랐다. 아플 때마다 부모님 다음으로 살뜰히 보살펴 줬던 그가. 서윤채한테 또 욕먹겠네. 아, 근데 어차피 바쁘니까…….
마구잡이로 이어지던 생각은 끝을 맺지 못하고 휘발됐다. 작게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다 그대로 다시 잠든 탓이었다.
채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사이, 자는 아들을 들여다보다 이상함을 눈치챈 부모님이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 주었다.
“…….”
애달픈 간호를 받는 동안 채현은 의식을 놓고 꿈속을 헤매었다. 서윤채를 생각하다 잠들어서일까. 자연스럽게 그가 꿈 손님으로 찾아들었다. 아주 익숙한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바보냐? 혼자 왜 자빠져?’
‘내가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진 거 아니거든. 거기에 돌 있는지 몰랐단 말이야.’
‘멍청아, 앞을 보고 뛰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매일 넘어지지.’
동네를 휘저으며 뛰놀기 바쁘던 그때, 서윤채는 늘 툴툴거렸지만 단 한 번도 뒤처진 친구를 버린 적이 없었다.
‘매일 넘어진 거 아니거든. 그리고 앞 봤어. 너희 보면서 뛴 건데.’
‘말대꾸할래?’
‘그냥 대답한 건데…….’
머리를 콩 쥐어박을지언정 맞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절뚝이는 친구의 속도에 맞춰 걸음을 옮기고, 더럽다 말하면서도 직접 흙을 떨어 주는 이가 바로 서윤채였다.
‘야. 네 무릎 색이랑 똑같다.’
언젠가는 심하게 까져 피범벅이 된 무릎을 보고 저녁놀을 가리켰다. 징그럽지도 않은지, 상처 위로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을 겹쳐 보았다.
‘멋있지.’
그 덕에 채현도 아픔을 잊고 킥킥댔다. 짓궂은 장난이었지만 지금도 무릎 흉터를 보면 흉하단 생각보다 서윤채의 말이 먼저 떠올랐다.
채현에게 서윤채는 늘 그랬다. 가장 가까이서 곁을 지켜 주는 친구이자 아픔마저 잊게 해 주는 존재였다. 펄펄 끓는 열에 잠긴 이 순간, 무의식적으로 그를 떠올릴 만큼.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던 채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창 너머로 언젠가의 저녁처럼 어스름히 빛나는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본인 책상인 듯 자연스럽게 앉아서 무언가 들여다보는 서윤채가 있었다.
이것도 꿈인가. 비몽사몽인 채로는 확신이 안 섰다. 채현은 흐릿한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서윤채.”
조용한 방 안에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게 가라앉아 묻히기 쉬운 음성이었지만 그를 일어나게 하는 데엔 충분했다. 서윤채는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곁으로 다가왔다. 감기 때문에 코가 꽉 막혔을 게 분명한데 좋은 향기가 나는 듯했다.
“잘한다. 아프기나 하고.”
그는 침대맡에 주저앉으며 타박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그런 주제에, 식은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넘겨 주고 온도를 확인하는 손짓은 다정했다.
“아까보단 낫네.”
“……언제 왔어?”
“너 끙끙대면서 잘 때. 물 마실래? 일으켜 줘?”
“지금 말고……. 어떻게 알고 왔어?”
선반 위에 놓인 물을 따르려던 서윤채는 물병 대신 물수건을 쥐고 이마를 닦아 주었다. 툭툭. 차가운 수건으로 열을 식히는 손짓은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네가 전화 씹길래. 너 원래 이맘때쯤 아프잖아. 혹시나 해서 이모한테 연락하니까 앓아누웠다더라. 어떻게 넌 예상을 빗나가질 않냐? 옷 좀 잘 챙겨 입고 다니라고 했잖아.”
추운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제 손을 차갑게 만들며 쏟아 내는 말이었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울컥하며 코끝이 찡해졌다.
“왜 화를 내……. 아픈 게 내 탓이냐? 나도 아프기 싫거든…….”
“화낸 거 아…. 그래. 미안해.”
“나 아파. 목도 아프고 머리도 울려.”
“많이 아파?”
서윤채가 확연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본인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듯했지만 이마를 닦는 손끝에 염려가 가득했다. 괜히 감정이 북받친 채현은 코를 훌쩍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서윤채.”
“응.”
“너 언제까지 바빠?”
“뭐?”
“나 언제까지 집에 혼자 와야 해?”
감히 추억이라 부를 만한 시절의 모습을 꿈으로 보고 눈을 떴다. 그 직후 마주한 이가 하필이면 서윤채였다. 꽁꽁 내리누르던 속내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나 심심해. 너 그만 바빴으면 좋겠다.”
그를 봐서 반갑고 좋았다. 낯설게만 느껴지던 지난 며칠이 그만 이어졌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동시에 존재를 드러낸 감정은 몸집을 키운 서운함이었다.
“다 너 찾는데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랬냐.”
“너랑 나랑 제일 친한데…….”
“알겠으니까 일단 더 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게.”
애 같은 칭얼거림에도 서윤채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계속 손을 움직이며 열을 내리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는 직접 눈을 감게 하고선 이불도 정리해 주었다.
“야, 너 집에 가…….”
“이게 간호해 주는 친구를 쫓아내네.”
“그게 아니라, 너 감기 옮을까 봐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너냐? 괜찮으니까 신경 끄고 잠이나 자.”
일정한 속도로 토닥거리는 손짓은 금세 잠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열에 취해 몽롱한 정신이 흐려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채현은 ‘너까지 아프면 안 되니까 가라고…….’ 중얼거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잔잔한 호수에 파동이 일듯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마다 서윤채가 있었다. 친구 집에서 종이를 들여다볼 만큼 바쁜 주제에 그는 꼼짝 않고 자릴 지켰다.
깊이 잠들지 못한 채 얼마간 시간을 보냈을까. 채현은 이마를 스친 손이 이불을 끌어당겨 주는 감촉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감은 눈을 뜰 기력은 없어 귀만 쫑긋 세워 기척을 좇았다. 곁에 머물렀을 행동의 주인은 달칵 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졌다.
“가려고? 밥이라도 먹고 가지. 종일 있느라 피곤했을 텐데.”
“이모야말로 피곤할 텐데 좀 쉬세요. 아픈 건 권채현인데 이모가 더 수척해 보여. 밥은 다음에 먹으러 올게요.”
“그래도 네가 와서 한숨 덜었어. 고맙다, 윤채야. 이모가 갈비찜 맛있게 해 줄게.”
“채현이 다 나으면 그 기념으로 해 주세요.”
“그래. 네 엄마한테 안부 전해 주고. 조심히 들어가라.”
“네, 쉬세요.”
채현은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의식의 끈을 놓았다. 어둑한 방이 서윤채의 온기와 향기로 가득 차자 안심이 되는 듯했다. 그간 느낀 공허가 채워지는 기분이었고.
“…….”
그 끝에 찾아든 건 바라 마지않던 평온이었다.
서윤채가 떠나는 소릴 자장가 삼아 잠든 채현은 꿈도 꾸지 않고 내리 잠만 잤다. 약 먹고 자라는 소리에 겨우 일어나 죽을 몇 숟갈 퍼먹고 다시 잠드는 일의 연속이었다.
“…….”
그렇게 주말 내내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잔 덕일까. 월요일 아침 일찍 정신이 들었다. 납덩어리로 누른 것처럼 무겁던 몸과 머리도 아주 가볍고 개운했다.
“아…….”
빠르게 날아간 병마. 어느 때보다 상쾌한 몸 상태. 슬슬 들이치는 아침 햇살.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지만, 천장을 보고 드러누워 눈을 깜빡이는 채현의 낯빛은 어두웠다. 마음 한구석에 내려앉은 심란함이 그를 만끽하지 못하게 했다.
“……미쳤나?”
아픈 게 싹 사라지고 정신이 드니,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자각이 됐으므로.
‘너랑 나랑 제일 친한데…….’
“아, 쪽팔려……. 미친, 아!”
그저 함께하는 일상이 소중하다는 걸 전하고 싶었을 뿐인데 나 좀 놀아 달라고 생떼 쓰고 심술부린 꼴이 됐다. 이만큼 애처럼 굴 생각이 결코 없었는데도.
“별짓 다 했다, 진짜. 아오. 권채현 미친놈아.”
숨죽여 외친 채현은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지난 이틀간 방치해 뒀던 핸드폰엔 여러 사람에게 온 연락이 잔뜩 쌓여 있었다.
[배주희 : 근데 권채현은 왜 안 읽어]
[배주희 : 안 읽씹 죽을래? 너 미리보기로 읽고 있지] 오후 7:12
[이웃사탄 : 권채현 아파] 오후 7:34
[배주희 : 엥.. 그런 건 빨리 말해야지 윤채야ㅎㅎ; 나만 쓰레기 됐잖아] 오후 7:35
[서아영 : 헐 채현이 어디 아파? 괜찮아?] 오후 7:55 1
[정유빈 : ㅉㅉ 내구도 개쓰레기]
[정유빈 : 개깝치다 앓아누웠죠] 오후 8:47 1
‘300+’가 떠 있던 단체 채팅방은 엉망진창이었다. 맥락 없는 말로 가득 찬 대화에 채현은 휙휙 화면을 내렸다. 중간부터 한 사람은 아예 읽지도 않았는데, 보아하니 서윤채 같았다.
4 오전 6:41 [나이제괜찮ㅎㅎ]
4 오전 6:42 [그리고정유빈인성개쓰레기새끼야..]
톡톡 손가락을 굴리며 답을 보낸 채현은 개인 채팅도 싹 훑었다. 익숙한 프로필의 서윤채가 보낸 메시지도 있었다. 단톡은 보지도 않더니……. 피식 웃으며 확인한 메시지는 얼굴 근육을 절로 풀어지게 만들었다.
[이웃사탄 : 죽었냐?] 오후 4:12
[이웃사탄 : 야 일어나면 약 먹고 자] 오후 9:44
[이웃사탄 : 내가 깜빡했다 대가리만 컸지 아직 애새낀 거]
[이웃사탄 : 다음 주엔 놀아줄 테니까 몸이나 제대로 챙겨] 오후 11:51
1 오전 6:45 [오늘학교같이가]
1 오전 6:46 [애새끼일어남ㅎ]
서둘러 답을 남긴 채현은 방실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제가 한 짓이 부끄러워 영영 잠들고 싶기도 잠시, 어서 씻고 나가야겠단 생각만 가득했다.
평소와 달리 재빠르게 움직여서일까. 준비를 마쳤는데도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어떡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채현은 핫 팩 하나를 챙겨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아프다는 핑계로 서윤채에게 진상 짓을 했으니 작은 보답으로 줄 요량이었다.
이른 오전의 아파트 단지는 평화로웠다. 아침 이슬을 매단 바람이 살살 부는 동시에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울렸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도 속이 뻥 뚫릴 만큼 시원했다.
미소를 머금은 채현은 안면 있는 주민과 인사하며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다들 출근길에 오른 모양인지 낯빛이 칙칙했다. 채현 역시 무의식적으로 제 얼굴을 만져 보다 정신을 차리고 서윤채에게 연락을 남겼다.
‘애새끼집앞으로가는중’이라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그는 물음표 하나를 보내왔다. 참 일관적으로 재수 없는 말투에 킥킥 웃음이 났다.
서윤채는 오래 지나지 않아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곁으로 다가온 그에게 채현은 핫 팩을 쓱 내밀었다.
“뭐지. 나 혹시 벌써 죽은 건가? 권채현이 일찍 나와서 핫 팩을 준다고?”
“받기 싫으면 말든가…….”
정말 놀랐는지 당황하던 그는 이내 장난기를 가득 얹은 낯으로 시선을 흘렸다. 상체까지 숙이고 살피는 통에 무안해져 손을 물리려 하자 씩 웃으며 받아 갔다.
“우리 채현이는 죽으면 아마 천국 갈 거야?”
그러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뺨에 핫 팩을 대 주었다. 온기와 냉기가 한데 섞여 뺨에 닿은 순간, 채현은 공연히 소름이 돋아 먼저 몸을 휙 돌렸다.
“너 머리 뒤에 덜 말랐어. 그러고 다니다가 감기 걸린다? 지금 감기 엄청 독해.”
서윤채는 익숙하다는 듯 피식 웃곤 걸음 속도를 맞춰 나란히 섰다.
“누가 빨리 나오라고 해서.”
“아니, 그냥 집 앞에서 기다린다는 뜻이었는데.”
“책임지란 소리 안 하니까 앞서가지 마. 몸은.”
“이렇게 멀쩡할 수가 없다. 너는? 팔팔해? 나한테 옮은 건 아니지?”
“어.”
“나 죄책감 느끼니까 절대 아프면 안 돼. 쓰러지면 간호는 해 줄 건데, 그래도 아프지 마.”
알겠지. 채현은 퍽 간절하게 읊조리며 서윤채를 힐끗댔다. 하품하며 이야기를 듣던 그는 고개만 까딱거릴 뿐이었다.
대화는 정류장으로 향하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연신 요란스럽게 굴어 싸우는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이었지만 만면엔 웃음이 가득했다. 버스에 올라탄 후에도 침묵이 가라앉을 틈은 없었다. 여러 화젯거리로 실컷 떠들며 자그락거렸다.
“권채현 살아 있네? 웬일로 쟤랑 같이 왔냐?”
도착한 학교 역시 복작복작했다. 이미 도착해 빵을 먹고 있던 정유빈도 알은체를 해 왔다. 채현은 그의 등을 툭 치며 자리에 몸을 앉혔다.
“집 앞에서 낚아 왔지. 윤채 이제 좀 한가하대.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라… 넌, 씨, 진짜… 짝꿍으로서 됨됨이가 쓰레기야.”
“오자마자 뭔 개소리야.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거 모르냐?”
“친구가 아프다는데 내구도 타령이나 하고 있고.”
“맞는 말이라 반박 못 하죠.”
얄밉게 말하는 정유빈은 채현의 두 번째 상대였다. 애들처럼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수업 시간이 다가왔다.
연달아 이어진 오전 수업은 흡사 불면증 치료제였다. 졸음을 껴안은 채현은 쉬는 시간을 틈타 잔뜩 늘어진 채 젤리를 우물거렸다.
서윤채는 그런 채현에게 기대 누워 핸드폰 게임을 했다. 자리 주인을 책상으로 내쫓고 앉은 주제에 담요까지 두르고 당당히 굴었다. 얼마간 곧은 손가락을 놀리던 그는 ‘아…….’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재미없다. 심심해.”
“보통 못하는 사람들이 그 소리 하더라. 허접한 실력 때문인지 모르고 게임 탓을…….”
“이 새끼가 또 자존심을 건드리네. 내가 실력을 뻔히 아는데. 함 뜰래?”
“뜨긴 뭘 떠. 너나 실컷 해라.”
“까불지 마.”
시비라도 걸듯 몸을 툭 부딪친 서윤채가 피식대며 주머니에서 핫 팩을 꺼냈다. 채현은 그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제일 큰 핫 팩인데도 서윤채의 손안에 갇히니 작아 보였다.
처음 건넨 순간부터 지금까지 잘 만지작대는 꼴을 보자, 어쩐지 매일 챙겨 줘야겠단 다짐이 섰다. 서윤채에게 하도 고마운 일이 많아 그런지 귀찮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
근데 저 핫 팩이 저렇게 작았나. 서윤채 쟤는 왜 쓸데없이 손도 크지. 그래서 추위를 많이 타는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이어 가던 찰나, 불청객에게 자리를 빼앗겨 책상에 걸터앉은 정유빈이 큰 소리를 냈다. 책상에 엎드려 이야기를 듣던 채현의 주의가 그를 향했다.
“그런 옷 입고 돌아다니면 우리 사진 찍혀. 학교 망신이다.”
“재밌잖아. 얼마나 웃기겠냐. 그리고 이런 게 다 추억이야.”
“추억 좋지. 근데 나중에 가서 봐라. 뭐 했는지 기억도 못 해. 쪽팔림만 남는 거라니까.”
“기억을 왜 못 해. 뇌 용량 그 정도밖에 안 돼?”
아까부터 한창 토론 중인 주제는 수학여행 드레스코드였다. 배주희가 의상을 맞춰 가자고 말을 꺼내며 이야기가 길어졌다. 취지는 좋았으나 취향이 완전히 갈린 게 문제였다.
“가서 같이 사진 찍고 그럼 얼마나 재밌겠어?”
“사진을 꼭 그런 옷 입고 찍어야 해?”
“주말에 다 같이 쇼핑 가서 서로 골라 주는 것도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주희야, 나 지금 혹시 벽이랑 말하냐? 대화가 안 통하는 기분인데.”
대화가 길어질수록 정유빈이 한숨을 내뱉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 꼴을 보던 서윤채는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리며 정유빈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래. 제주도까지 가는데 인간답게 가야지.”
“왜? 재밌을 거 같은데. 단체 사진 찍으면 장난 아니겠다.”
반면, 채현은 눈을 빛내는 배주희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원체 빼는 성격이 아니거니와 서윤채를 제 마음대로 꾸미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탈한 사람처럼 비행기에 오를 그를 상상하니 벌써 웃음이 났다.
“열여덟 맞아? 아무래도 여덟 살인 거 같은데.”
“그래. 넌 철들어서 좋겠다.”
서윤채는 꼭 머릿속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고갤 가로저으며 손을 뻗어 왔다. 담요를 휙 덮어씌우더니,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꾹꾹 눌러 대며 악력 행사까지 했다.
“아! 서윤채, 야, 나 두개골 깨질 거 같아. 윽, 아, 쫌!”
그는 파닥거리며 휘두른 팔에 맞아도 실실거릴 뿐 힘을 빼지는 않았다. 짓궂은 손짓은 제발 말로 하자는 애원이 쏟아진 뒤에야 멎었다.
“그러게 까불지 말라고 했잖아.”
“미친놈. 너 고소할 거야. 여기 증인도 있어.”
“아무도 관심 없어 보이는데.”
열이 오른 얼굴로 토로하는 꼴을 보며 서윤채는 눈물을 매달고 웃어 댔다. 제 성에 찰 때까지 장난칠 땐 언제고 헝클어진 머리를 직접 정리해 주기도 했다.
“이상 없네. 선처해 줘.”
채현은 씩씩대며 서윤채와 거리를 벌렸다. 분하게도 정말 다들 이야기만 나누는 중이었다. 신경이라곤 전혀 쓰지 않고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대화하기 바빴다.
“어떻게 아무도 관심이 없지? 친구 머리가 쪼개지고 있는데.”
“나 있잖아.”
“넌 필요 없어.”
“매정한 거 봐. 존나 상처받는다, 채현아.”
방금까지 머리를 터뜨리려 했으면서. 서윤채를 흘겨본 채현은 담요를 다시 그에게 던진 뒤 대화에 합류했다. 왜 조용히 떠드나 했더니 수학여행 날 밤, 몰래 모여 놀 계획을 짜고 있었다. 솔깃하며 금세 집중한 채현과 달리 서윤채는 심드렁하게 핸드폰을 들었다.
“선생님한테 걸리면 혼나는 거 아니야? 취침 시간 정해져 있잖아.”
“설마 걸리겠어. 그리고 걸려 봤자 한 소리 듣고 말겠지, 뭐.”
“그래. 다른 반 애들까지 불러서 노는 것도 아니고. 아, 서윤채. 나 물어볼 거 있는데.”
열심히 말하던 배주희는 대뜸 박수를 치며 서윤채를 불렀다. 그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며 말하라는 듯 배주희를 바라보았다.
“너 여자 소개받을 생각 없어?”
“응. 없어.”
“아니, 고민도 안 해 보고?”
“귀찮아.”
“친구로도 괜찮은데. 그래도 싫어?”
거기까지 들은 서윤채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누구길래 친구를 팔지?”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웃음 섞인 목소리에, 배주희 역시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 중학교 같이 나온 친구. 6반 앤데 너랑 같은 동아리래.”
“동아리? 누구?”
“김민솔. 알아?”
“아.”
애초에 서윤채는 인간관계에 연연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관심을 가질 성정은 더더욱 아니었고. 심드렁한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반응 한번 솔직하다. 거절이야?”
“어.”
퍽 냉정한 대답이었으나 배주희는 아무렇지 않게 뜻을 접었다. 가벼이 화제를 정리하고서는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채현만이 지나간 이야기에 머무르며 홀로 침묵했다.
누가 서윤채에게 호감을 보인 걸까.
정작 당사자는 궁금해하지 않은 상대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본디 제 친구는 예쁜 얼굴과 달리 까칠한 성격 탓에 호감을 사기 쉬운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호감을 비쳤다는 게 신기하고 조금은 놀라웠다.
“…….”
또 누가 서윤채가 다정한 사람이란 걸 알아본 걸까.
아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채현이 멀뚱히 서윤채를 바라보던 때였다. 피할 수도 없게끔 완전히 눈이 마주치며 시선이 맞물렸다.
“뭘 봐.”
“너 본 거 아니거든. 무슨, 다 지 보는 줄 알아…….”
보고 있다 딱 걸린 게 민망해 괜히 툴툴거리자, 서윤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왜. 너도 소개받고 싶어? 연애하고 싶냐?”
“아니. 나는 학생의 본분을 다하는 중이라서. 연애는 대학 가서 할 거야.”
“그런 분이 오전 내내 주무셨어요.”
“시끄러워.”
더 놀릴 거란 채현의 예상과 달리 서윤채는 짧게 웃고 말았다. 경계를 세운 채현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살폈지만 아까처럼 기대 누울 뿐이었다.
크게 하품한 서윤채는 금방이라도 잠들 듯 눈을 내리감았다. 피곤한 건지 만지던 핸드폰도 책상 위에 던져둔 채 미동 없이 색색거렸다. 그 덕에 채현은 종이 칠 때까지 서윤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굴었으나, 본인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자각은 전혀 없었다.
오전 마지막 수업은 유독 더디게 흘렀다. 필기 한 번에 시계를 힐끗거리는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50분이 지나갔다.
미련 없이 책을 덮고 노닥거리다 향한 급식실은 분주했다. 이미 내려와 있는 친한 이들도 많이 보였다. 채현은 익숙하게 섞여 앉아 밥을 먹은 뒤 함께 공을 찼다.
서윤채는 함께하자는 권유에도 질색하며 먼저 교실로 올라갔다. 동아리 때문이라곤 했지만, 추워서 거절한 것이 더 큰 듯했다.
“어, 나 왜 핸드폰…. 아씨, 야, 나 폰 가지러 갔다 온다!”
그렇게 얼마간 열심히 뛰어다녔을까. 한 게임을 끝낸 채현은 핸드폰이 없음을 깨닫고 교실 쪽으로 몸을 틀었다. 열이 많이 나 벗은 외투는 팔에 걸고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내딛던 발은 2층 복도를 지날 무렵 제자리에 박힌 듯 굳었다. 교실 앞 복도 창가에 기댄 서윤채가 어떤 여자와 마주 서 있는 게 보인 탓이었다.
저도 모르게 멈춰 선 채현은 호흡을 갈무리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예의 심드렁한 얼굴로 대화하던 그는 일순 아주 옅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어…….”
그 모습에 작게 소리를 흘린 찰나, 귀신같이 고개를 돌린 서윤채와 시선이 얽혔다. 빤한 눈빛을 보내던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윤채가 눈길을 거뒀다.
“…….”
마주한 적 따위 없다는 듯, 눈앞의 여자와 말을 주고받으며 평소와는 다른 얼굴로 웃었다. 그를 본 채현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지금 날 무시한 건가?
황당함과 함께 밀려온 얼떨떨함이 채현의 낯을 뒤덮었다. 서윤채에게 씹혔다는 사실이, 그가 자신을 외면하고 다른 이와 마주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거기에 충격을 받는 자신 또한 이해가 안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서윤채가 나를 피한 적이 있었던가.
제게서 떨어진 시선을 집요하게 좇던 채현이 헛숨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친구는 모르는 사람인 양 대해 놓고 남에겐 웃어 주는 그의 모습에 괜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
뭘 저렇게 친절하게 굴어……. 채현은 왜 속이 뒤틀리는지 원인도 찾지 못한 채 서윤채를 빤히 응시했다. 머지않아 대화가 마무리됐는지 여자가 걸음을 옮기고 서윤채는 고개를 돌렸다. 잠시간 이쪽을 바라보던 그는 씩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꼴 봐라. 머리로 축구 해?”
그러더니 전혀 무시한 적 없는 사람처럼 장난을 쳤다. 지겹도록 보고 겪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제가 아는 서윤채가 눈앞에 있는 듯해 채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아세요?”
“뭐?”
“쌩까길래 모르는 사람인 줄…….”
“뭐라는 거야. 누가 쌩을 까.”
쌀쌀맞은 어투로 말하며 머리를 정리하니 서윤채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곧은 손가락은 훤히 드러난 이마를 세게 튕기고 멀어졌다. 골이 띵할 정도의 통증이 느껴져 채현은 이마를 문지르며 씩씩댔다.
“너 아까부터 왜 자꾸 내 머리 깨려고 하냐?”
“사람 머리 잘 안 깨져. 시험해 볼래?”
“그렇게 궁금하면 네 머리로 하든가. 때려 줘? 숙일래?”
“이게 어디서 사심 채우려고. 까불기 전에 옷이나 제대로 입고 다녀. 너 그러고 뛰어다녔냐? 아직 겨울이야.”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한 서윤채가 질색하며 잔소리를 쏟아 냈다.
“지금 3월인데.”
“그러니까. 겨울 같은 봄이라고. 또 감기 걸려서 아프다 지랄하지 말고 생각을 좀 하고 다녀.”
빈말로도 예쁘다 할 수 없는 말본새는 빵점이었다. 그런데도 그 속에 담긴 게 제 걱정임을 모르지 않아 결국은 입매가 허물어졌다.
“너무 뛰어서 그래. 내려가자마자 옷 다시 입을 거야.”
“왜 올라왔어.”
“핸드폰 찾으러. 넌 왜 나와 있어? 누군데?”
“배주희가 말했던 애.”
여자애가 멀어진 방향을 턱짓하며 묻자, 서윤채는 교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게임 친구 하기로 했다. 나 하는 거 보더니 자기도 한다 하더라고.”
“너한테 관심 있어서 그런 거겠지. 아니, 여태 연애 어떻게 했냐? 이렇게 눈치가 없는데…….”
“우리 채현이도 아는 걸 내가 모를까. 훈수 두려면 조금 더 그럴싸하게 해 봐.”
“……너 오늘 좀 재수 없다. 친구는 쌩까고 남한테 착한 척이나 하고.”
“뭔 개소리야. 운동장에 정신 두고 왔어?”
헛웃음을 흘린 서윤채는 크게 하품하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몸을 완전히 의탁하듯 힘을 빼고 기댄 채 ‘알아서 처신 잘하고 다니니까 걱정 마라.’ 중얼댔다. 거기에 할 말이 없어진 채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말해 어련히 알아서 했으리란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나 땀 흘렸어. 계속 뛰어서.”
“하루 이틀이냐?”
땀 냄새가 날 수 있으니 떨어지라는 뜻으로 한 소리였는데, 서윤채는 몸을 더 붙여 오는 것으로 화답했다. 깔끔이란 깔끔은 다 떨면서 이럴 때는 또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졸려.”
“너 졸다 왔지.”
“지금 조는 중.”
“어쩌다 그런 동아리를 들어서…….”
“그러게 말이다.”
그답지 않게 진심으로 괴로워한 서윤채가 한숨을 내쉬며 지옥이 따로 없다고 뇌까렸다.
“토론 대회에 한 맺힌 사람들 같아. 재판도 그렇고. 거기선 너 무슨 역할이야? 변호사?”
“그럴 이유가 다 있다. 변호사는 다른 애가 하고, 나는 검사.”
“오… 잘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멋있냐?”
언젠가 운동장에서 자신이 그러했듯, 서윤채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꼬리를 당겼다.
“아무래도 서윤채가 남 족치는 일 전문이긴 하지.”
“이 새끼가.”
비뚜름하게 웃은 서윤채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팔에 그대로 힘을 실었다. 목을 조일 듯 꽉 짓누르는 통에 ‘아!’ 비명을 내지른 채현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 서윤채는 뒷문에 기대서서 얌전히 기다렸다. 핸드폰을 챙겨 가까이 다가가자 먼저 나가라는 듯 턱짓했다.
“잘 좀 챙겨. 흘리고 다니지 말고.”
“정신만 잘 챙기면 됐지. 넌 지금 그것도 흘린 거 같은데……. 그렇게 피곤해?”
“어. 졸려 죽겠다.”
계속 하품하던 서윤채의 눈은 잠이 쏟아지는지 묘하게 풀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 밑이 평소보다 어둡게 물든 거 같기도 했다. 채현은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서윤채를 요리조리 살폈다. 어쩐지 그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훅 밀려왔다.
“이따 석식 때 배달시켜 먹을까? 맛있는 거 먹으면 스트레스 좀 풀리잖아. 너 먹고 싶은 거 있어? 매운 거 먹을래?”
기운 빠진 친구를 위한 메뉴를 머릿속으로 훑으며 질문을 던진 무렵이었다. 아, 소리를 낸 서윤채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빼고 먹어.”
“또?”
“어. 이따 집은 같이 가.”
“아……. 응. 알겠어.”
채현은 어딘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대수롭지 않은 척 말을 맺었으나 표정은 썩 개운치 못했다. 공연히 머쓱해진 상태로 얼마간 걸음을 옮겼을까. 서윤채가 계속 함께 걷고 있다는 걸 깨달은 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너 어디 가?”
“안 가는데.”
“그럼 왜 쫓아와. 너 동아리 교실 이쪽 아니잖아.”
“또 쌩깐다고 헛소리할까 봐.”
소란스러운 복도에 울린 목소리는 낮고 작았으나 채현의 귓가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헛소리라 치부하는 주제에 신경을 기울였다는 것 또한 너무 잘 보였다.
“됐으니까 가서 잠이나 자.”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채현은 손을 휘휘 젓곤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뒤에서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애써 무시하며.
운동장에 도착해선 자신을 부르는 이들을 뒤로하고 옷부터 챙겨 입었다. 감기에 걸리면 제 오랜 친구가 또 화를 내고 걱정할 게 분명했으므로.
그 뒤론 번잡스러운 머릴 비울 겸 열심히 뛰어다녔다. 상념은 알알이 흩어지는 흙먼지와 함께 조각조각 부서졌다. 마음 한구석에 바윗덩어리처럼 내려앉은 생각을 제외하고서.
“…….”
서윤채가 등을 돌린 순간, 왜 그토록 동요했을까. 답을 찾지 못한 물음이 잔존하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 *
오랜만에 같이 걷는 밤거리는 아침과 달리 고즈넉했다. 채현이 입을 꾹 다물고 골똘히 머리만 굴리는 탓이었다. 그 곁에서 서윤채는 입김을 후 불며 역시 아직도 겨울이라 중얼댔다.
“윤채야.”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린 채현이 이름을 부르자, 서윤채는 말하라는 듯 턱짓했다.
“……나 애정 결핍인가?”
“이모가 들으면 기절하시겠다.”
고심하여 고른 유력한 답이었는데 비웃음만 샀다. 한숨을 내쉰 채현은 다시 침묵하며 서윤채를 힐끗댔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왜 또 뇌에 힘이 풀렸지?’ 뇌까릴 뿐이었다.
어이가 없는 건 채현도 마찬가지였다. 왜 서윤채의 외면이 충격적이었을까. 온종일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는 일쯤은 유약했던 어린 시절 늘 겪던 일이기에 익숙했는데. 깊어진 고민이 초래한 건 얻고자 하는 답이 아닌 더 큰 혼란이었다.
“가라.”
그러는 사이, 갈림길에 도착해 서윤채가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점점 작아지는 서윤채의 뒷모습이 망막에 선명히 새겨졌다. 제자리에 박힌 듯 서서 지켜보던 채현의 눈 깜빡임이 느려진 건 그때였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한 곳만을 향했다.
“서윤채.”
지나간 계절을 품은 듯 매서운 바람이 몰아칠 무렵, 채현은 결국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충동적인 외침이었으나 서윤채는 성실히 반응했다. 가만히 바라만 보자 아예 전화를 걸어왔다.
― 왜. 집 못 찾아가?
“윤채야.”
― 아, 왜. 어디 아파? 안 하던 짓을 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채현은 조용히 답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행동이 보였는지 핸드폰 너머로 기가 차다는 듯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참 손 많이 간다. 뭐가 문젠데. 추우니까 빨리 말해. 쓸데없는 말이면 죽는다, 진짜.
희미해진 웃음 뒤로 낮은 음성이 깔렸다. 까칠한 언사엔 어울리지 않는, 다물고 있던 입이 절로 벌어질 만큼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혹시 내가 너한테 집착해?”
― 뭐?
“내가 막, 너한테 의지를 좀… 하나?”
― 뭐라는 거야. 맥락 없이 개소리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을 해.
거리가 꽤 멀어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눈살을 찌푸렸으리란 게 훤했다. 숨을 크게 몰아쉰 채현은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냥, 네가 나 쌩까면 기분이 이상해서. 아까 학교에서도 그랬고, 저번에 너 바빴을 때도 그랬고…. 여태 너 그런 적 한 번도 없잖아. 그래서 그런 건지…. 내가 심보가 못된 건가?”
대뜸 쏟아 낸 혼란에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서윤채는 나름대로 생각을 이어 가듯 침묵했다. 나도 애새끼처럼 구는 거 아니까 화내지 마……. 작게 덧붙이는 순간 그의 웃음이 들렸다.
― 이상할 것도 많다.
침묵을 깨고 울린 서윤채의 목소리는 아주 조금 누그러진 채였다.
― 야. 너 먼저 가.
“어?”
― 여기 있을 테니까 먼저 들어가라고. 설마 데려다 달라고 할 만큼 양심이 없진 않지?
“미친, 내가 왜 너한테 집을 데려다 달라고 해.”
― 그래. 그러니까 얼른 가라고. 나 추워. 30초 넘으면 그냥 갈 거니까 뛰어라. 일, 이, 삼…….
“어? 서윤채, 잠시만……. 어?”
서윤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주춤거리는 순간에도 숫자를 읊었다. 멈춤 없이 목소리를 흘리는 그를 보던 채현은 힘껏 달렸다. 남은 거리에 비해 주어진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다.
― 30초 끝. 간다.
간신히 아파트 동 입구에 도착했을 땐 30초가 지난 지 오래였다. 채현은 거친 숨을 터뜨리며 제가 달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 잘 뛰네.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서윤채를 목도했다. 그는 웃음이 스민 목소리로 낮게 이야기했다. 추운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주제에 군말 없이 찬 바람을 쐬며.
― 들어가라.
“어? 어, 너도. 잘 가.”
용건이 사라지자 전화는 바로 끊겼다. 채현은 서윤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열심히 달린 탓인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뒤에도 심장이 쿵쿵 내달렸다.
“…….”
차가운 바깥 공기 대신 훈기가 몸을 감싸는 동시에 입매가 허물어졌다. 참을 새도 없이 웃음이 삐져나왔다. 채현은 탄성을 흘리며 입가를 가렸다.
“진짜 친구 하나는…….”
까칠하게 굴지언정 끝끝내 다정한 서윤채가 친구라 좋았다. 계절이 수십 번 바뀌며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가 가장 소중하고 각별할 만큼.
종일 머릿속을 부유하던 물음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진 채였다.
* * *
낮과 밤의 경계가 흐려졌다 또렷해지길 반복하는 사이, 고대하던 수학여행 당일이 됐다. 모두의 들뜬 마음을 대변하듯 날씨도 화창하고 맑았다. 순간순간 부는 바람은 코끝을 시리게 했지만 쏟아지는 햇살만큼은 따사로웠다.
그 계절의 한가운데서 채현은 누구보다 환히 웃었다. 집에서 나온 순간부터 제주도에 도착할 때까지 기분은 최고조를 달렸다.
“제주도다!”
터질 듯 꽉 채운 가방을 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산책 나온 개와 다를 바 없었다. 그 곁에 선 서윤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품을 했다.
“와, 진짜 제주도 같아.”
“제주도니까.”
“너도 하품만 하지 말고 저기 봐 봐.”
채현은 심드렁한 서윤채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연신 눈을 빛냈다. 고작해야 공항에서 주차장으로 이동했을 뿐인데 엄청난 걸 본 양 감탄을 터뜨렸다.
“앞이나 잘 봐.”
그런 채현을 앞지른 서윤채는 가방을 고쳐 메며 버스에 올라탔다. 매정하게 쌩 가 버린 그를 보다 채현 역시 얌전히 뒤를 따랐다. 거침없이 걷던 서윤채는 뒤편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고 까딱 고갯짓했다. 채현은 그에 의문을 품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 몸을 앉혔다.
멀뚱히 서 있던 서윤채는 그제야 복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잘 준비를 했다. 비행기에서도 그러했듯 창가 자리를 내주려는 배려가 분명했다. 어릴 적부터 곧잘 멀미를 하던 친구를 생각해 준 것이리라. 그를 모르지 않기에 채현은 방싯거리며 그의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자려고? 제주도까지 왔는데.”
“눈 감으면 여기가 서울인지 제주도인지 몰라.”
“공기가 다르잖아.”
“차 냄새밖에 안 나는데.”
“아, 말이 안 통해.”
“그래. 그러니까 난 신경 끄고 창밖이나 봐.”
물론 잠에 취한 서윤채 때문에 대화는 금방 끊겼다.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내다보길 한참, 학생을 가득 실은 버스는 해안도로로 올라탔다.
첫째 날인 오늘은 바닷가를 구경한 뒤 숙소로 가는 일정이라 했다. 채현은 창에 바짝 붙어 앉아 얼핏 보이는 바다를 눈에 담았다.
“나 제주도 처음이야.”
“나도. 와, 유채꽃 너무 예쁜데? 꽃 있는 곳도 가면 안 되나.”
대답을 들려준 이는 뒤에 앉아 있던 배주희였다. 그녀는 이따금 스치는 노란 유채꽃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다. 찰칵 소리에 채현 역시 사진을 찍어 가족끼리 있는 채팅방에 보냈다.
“서윤채, 저기 꽃 좀…….”
서윤채를 부르던 채현은 잠든 그의 모습에 목소리를 낮췄다. 유심히 지켜보니 꽤 깊게 잠든 듯해 침묵하고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랐다. 좋은 건 같이 봐야지, 생각하면서.
― 왼쪽에 보이는 곳이 협재 해수욕장입니다.
소란을 입고 달리던 버스는 얼마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본 모두는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금세 떠들썩해진 버스는 곧이어 주차장에 멈춰 섰다. 담임은 주의 사항과 집합 시간을 고지한 뒤 자유롭게 구경하다 오라고 전했다.
채현은 차에서 내린 이들 틈에서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요령껏 밟으며 바다 근처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바람이 세졌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도 근사해졌다.
거세게 몰려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멈춤 없이 물결쳤다. 푸르게 빛나는 맑은 바닷물은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길 반복했다. 마치 환영 인사라도 하듯 에메랄드빛 바다가 연신 오르내렸다. 귓가를 적시는 선명한 파도 소리는 덤이었다.
“바다 미친 거 아니야? 어떡해.”
“그렇게 좋으면 들어가든가.”
“넌 닥쳐. 아영아, 우리 사진 찍자.”
셔터를 마구 누르던 배주희는 정유빈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뒤 서아영을 불렀다. 낄낄대던 이는 그새를 못 참고 또 장난을 치다 결국 한 대 얻어맞고 사진 기사가 됐다. 채현은 사이좋게 노는 그들을 보다 앵글 가득 서윤채를 담았다.
“서윤채 여기 봐! 너도 찍어 줄게.”
멋진 사진을 찍으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가 헝클어졌어도 서윤채는 근사하고 뒤로 보이는 광경은 훌륭했으므로. 아무렇게나 찍어도 삭제할 사진이 보이지 않았다.
특별히 멋을 부리려고 옷을 챙겨 입은 것도 아닌데, 얼어 죽기 싫다고 목도리까지 두른 채였는데,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 웃고 있는 낯짝을 보면 평범한 모습마저 달라 보였다.
쟤는 어떻게 매일 저렇게 생겼냐. 얼굴에 비수기가 없어……. 우스운 옷으로 드레스코드를 맞췄어도 분명 멋있었을 거다. 결국 무산된 계획이지만.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실실대던 채현은 핸드폰을 내리고 조금 더 바다 쪽으로 향했다. 굽이치는 파도와 서윤채가 점점 가까워졌다. 물끄러미 응시하던 서윤채가 팔을 뻗은 건 그때였다. 그는 어깨에 손을 댄 순간, 진심으로 밀어 버릴 것처럼 힘을 실었다.
“악!”
깜짝 놀란 탓에 다리 힘이 풀려 넘어지려고 하자 그제야 팔을 꽉 잡아 주며 킥킥댔다. 한쪽 손힘만으로 지탱한 채였지만 무척 안정적이었다.
“한번 들어갈래?”
“야, 넌 진짜…….”
말문이 막힌 채현은 그를 흘겨보다 뒷걸음질 쳤다. 또 붙잡혀 예정에도 없는 입수를 하기 전에 안전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어딜 내빼.”
“너 진짜 나 빠뜨리려고 했지.”
“어. 티 났어?”
“너는 진짜 개새끼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젖어 중얼거리니 서윤채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도 잡아 줬잖아.”
“사람 죽이고 미안하다고 사과할 놈이네.”
“알았으니까 그만 좀 가 봐. 다 돌인 거 안 보이냐? 뒤로 걷다가 넘어지면 대가리 그냥 깨져. 황천길 걷고 싶어?”
이리 오라는 듯 손을 까딱이는 서윤채의 모습에 채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타박에 가까운 까칠한 말이 걱정임을 알아서였다. 다만 술렁인 마음이 지금도 요동쳐 긴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방금 네가 나 황천길 보내려고 한 건 잊었냐?”
“사진 찍어 줄 테니까 이리 와서 서 봐.”
그를 알아서인지 서윤채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를 흘렸다. 바닷바람에 몸을 실은 음성은 마치 달래기라도 하듯 상냥히 와 닿았다. 어쩔 수 없는 셈 치고 발을 뗀 채현은 금방 또 신이 나 실컷 사진을 찍었다. 바위 탑을 발견한 정유빈을 따라 이동해 돌을 쌓고 소원도 빌었다.
늘 영위하던 일상에서 벗어난 덕일까.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하지 않는데도 즐거웠다. 한참을 놀다 버스로 향한 뒤에도 기분이 들떴다. 다들 마찬가지인 건지 버스는 처음처럼 복작복작했다.
다음 목적지는 3일간 머물 숙소였다. 깜빡 졸다 깨는 사이 도착한 리조트는 제법 근사했다. 뒤로는 녹색의 나무가, 앞으로는 굽이치는 바다가 보였다. 건물도 오래되지 않아 깨끗하고 산책로도 잘 조성되어 있었다.
“와, 한 것도 없는데 왜 피곤하냐.”
“체력이 쓰레기라서.”
“밤에 놀려면 지금 자 둬라. 피곤하다고 애원해도 안 봐줌.”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와 짐을 푼 이들은 여기저기 널브러진 채 시끄럽게 떠들었다. 선생님들 방이 어디라느니. 배달되는 가게가 어디라느니……. 점호 이후 놀 생각만 하느라 내일 일정과 장기자랑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우리 오늘도 늦게까지 놀아? 내일 밤만 노는 거 아니고?”
“늦게까지? 밤새 놀 건데 뭔 소리를 하는 건지? 괘씸죄로 너는 무조건 밤샘팟이다.”
“여행 와선 무조건 무박인 걸 모르네. 잠은 버스에서 자는 거지. 아직 멀었다, 채현아.”
괜히 물었다가 면박만 당한 채현은 머쓱하게 웃으며 과자를 씹었다. 떨떠름하긴 했으나 다 같이 모여 놀 생각을 하니 내심 기대가 차올랐다.
모두가 기다린 시간은 10시가 넘어 시작됐다. 혹여 선생님이 들이닥칠까 창문도 다 막아 버리고 본격적으로 판을 펼쳤다. 치킨과 피자를 비롯해 먹을거리가 많아 제법 그럴싸했다.
미리 시켜 뒀던 배달 음식은 리조트 입구에서 몰래 받아 올라왔다. 저희 반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인지 로비를 어슬렁거리는 이가 꽤 있었다. 매점에서 과자를 사 오던 친구가 담임과 마주치긴 했지만, 적당히 놀고 일찍 자라며 눈감아 준 덕에 큰 문제는 없었다.
“야, 다 앉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노는 거다. 알겠지.”
“서윤채, 너도 와서 앉아.”
“싫어. 난 그냥 없는 사람 시켜 주라.”
“와서 좀 먹기라도 해. 배 안 고파?”
“우리 채현이 많이 먹어.”
두 눈을 반짝 빛내는 채현과 달리 서윤채는 심드렁했다. 혼자 소파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만질 뿐이었다. 그럴 거면 왜 왔냐는 다른 친구의 비난에, 여기가 원래 내 방이라 즉답하며 일말의 여지마저 없앴다. 꼬리를 내린 건 먼저 시비를 건 친구였다.
“재미없는 새끼. 야, 우리끼리 먹자.”
“어? 어…….”
썩 시원하지 않게 대답한 채현은 치킨을 집어 먹으며 서윤채를 힐끗댔다. 홀로 무리에서 빠져 조용히 있는 꼴을 보니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그가 이런 자리에 흥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길이 향했다. 기척을 느낀 그가 고갤 들며 눈이 마주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채현아.”
“어?”
“뭘 자꾸 훔쳐봐.”
서윤채는 핸드폰만 직시하던 눈을 떼며 입꼬리를 당겼다.
“할 말 있어?”
“할 말… 은 없는데.”
“그럼 왜 나를 봐. 음식 앞에 두고.”
“……너 때문이잖아.”
“나?”
황당해하며 되묻는 그를 보면서 채현은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역시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독단적인 행동을 하는 서윤채 탓이라 결론 내리며.
“그러게 왜 신경 쓰이게 해?”
“내가?”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되묻는 그는 한층 더 어이없어했다.
“채현이 양아치야? 이젠 생사람을 그냥 막 잡네.”
“너 혼자 그러고 있는 거 되게… 청승 떠는 거 같단 말이야. 왕따 같고…….”
“이야, 왕따 취급까지.”
끝내는 감탄하듯 중얼거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붉은 입술 새로 웃음을 흘려보냈다. 실없이 굴던 그는 곧이어 머릴 괴고 비스듬히 누우며 눈짓했다.
“나 신경 쓸 시간에 먹기나 해. 저 새끼들 전투적으로 먹는 거 봐라. 네 거 다 없어져.”
서윤채의 말마따나 모두는 저녁을 먹고 난 후인데도 무섭게 손을 놀렸다. 아까만 해도 먹으면서 게임을 하자는 둥 여러 계획을 세우더니 다 뒷전인 듯했다.
“아 씨, 내 치킨.”
대체 언제 이만큼이나 먹은 건지. 한창때인 이들의 먹성은 무서울 정도였다. 빠르게 바닥을 보이는 치킨 박스에 안타까워한 채현은 치킨 하나를 더 주워 먹었다. 새 종이컵에 두 조각을 담아 서윤채에게 전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먹어. 냄새만 맡는 건 쫌 고문 같잖아. 그리고 너 저녁도 남겼고. 굶으면 속 다 상해.”
“아… 이걸 신경 써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고갤 가로저으며 몸을 일으킨 서윤채는 종이컵을 확인하고 눈을 치켜떴다.
“왜 두 개를 줘. 하나만 줘도 되는데.”
“하나만 주면 정 없다고 했어.”
“누가.”
“우리 엄마가.”
아. 짧게 목을 울린 그는 그제야 젓가락까지 순순히 받아 들며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고마워. 이제 가서 네 몫이나 챙겨. 나 챙겨 주다가 쫄쫄 굶는다.”
“나는 저녁 많이 먹어서 괜찮아.”
“하긴. 우리 채현이 야무지게 챙겨 먹긴 했지.”
칭찬인가. 욕 같은데. 성질이 모호한 말에 채현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서윤채를 바라보았다. 배가 고프던 차에 향한 숙소 식당 밥이 맛있어서 열심히 먹었을 뿐인데…….
“눈빛 봐라. 욕한 거 아니니까 얼른 가서 먹어. 또 급하게 처먹다가 체하지는 말고.”
서윤채는 꼭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선수를 쳤다. 손가락으로 빈자리를 가리키며 움직임을 종용하기도 했다. 채현은 어딘가 찜찜한 채로 자리에 앉아 다시 음식을 먹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다들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런저런 의견을 냈다. 이걸 하자. 저걸 하자……. 토론장을 방불케 하는 모습에 채현은 몸을 사리며 피자만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게임할까? 벌칙 걸고.”
“뭐 걸지.”
“옆 반 갔다 오기?”
“단체로 좆될 일 있냐? 기각.”
“그냥 사약 하나 만들자. 있는 거 다 때려 붓고.”
머지않아 그들은 새 종이컵에 온갖 음료수를 섞어 넣고 괴상한 걸 만들어 냈다. 과자 몇 개를 조각내 띄우기까지 해, 도무지 사람이 마실 수 있는 거라 보이진 않았다. 그를 증명하듯 색부터가 무척 탁했다. 마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시면 바로 지옥행이라는 걸.
“진실게임 어때.”
“주희야, 하고많은 게임 중에 왜 하필 그거냐.”
“쫄리면 다른 게임 해도 돼.”
“얘가 또 오기 생기게 만드네. 야, 해.”
배주희의 반응에 얼굴을 붉힌 정유빈은 바로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둥글게 모여 앉은 대형 가운데 자릴 잡고선 젓가락을 휙 돌렸다. 빠르게 돌던 젓가락 끝이 멈춰 서며 가리킨 사람은 채현이었다. 소란의 중심에서 벗어나 피자를 먹던 채현은 깜짝 놀라 캑캑댔다.
“딱 걸렸어. 권채현.”
누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박수를 쳤고, 누구는 종이컵을 앞자리로 대령했다. 이미 게임에서 진 사람을 대하는 이들 같았다.
마시면 죽지 싶어 얌전히 있었는데 하필이면 제가 걸리다니. 맛있게 먹던 피자가 목구멍에 걸린 듯했다. 사레 걸린 양 연신 기침을 하니 옆자리 친구가 음료수를 밀어 주었다.
“야. 수위 딱 정해. 어디까지 가도 되냐? 어?”
“권채현이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재미있는 질문 좀 해 봐. 진부하게 ‘지금 여기에 좋아하는 사람 있니’ 하기만 해.”
“첫 키스? 아니면 뭐… 첫…?”
“와……. 친구 숨넘어가고 있는데 질문을 정하고 싶어?”
“안 넘어갔으면 됐지, 채현아. 뭘 따지고 그래.”
그들은 곧 죽을 사람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기침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큰 소리로 외치며 은근한 눈빛을 해 대 분위기는 한층 달아올랐다. 까딱하다간 모두가 모인 공간에서 선 넘기 딱 좋은 언행이었지만 다 열광하기만 했다.
“야…… 처음이니까 쉽게 가자.”
이 분위기에서 한발 빼는 건 무리였다. 답하기 쉬운 질문을 받아 저 괴상한 걸 입에 대는 일을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뭐, 첫판이니까. 그럼 첫 뽀뽀 기승전결 갖춰서 얘기해 봐.”
“……어?”
“이 정도면 많이 봐줬다. 아니면 마시든가.”
제발 쉽길 바란 질문은 무어라 말을 얹기가 애매했다. 길게 목을 울린 채현은 요리조리 눈을 굴리며 힐끗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
애들 틈새로 보이는 서윤채를 응시할 찰나, 마침 그도 이쪽을 보고 있던 듯 눈이 마주쳤다. 무심히 쏟아지는 빤한 시선은 오래된 기억에 불을 지피는 기폭제였다.
재촉하는 이들 틈에서 채현은 서윤채를 보며 생각했다.
“얘기 안 해? 권채현, 마실 거야?”
……쟤랑 했는데, 하고.
이제는 희미해진 옛 순간의 기억이었다. 노란 원복을 입고 유치원에 다닐 무렵의 일이었으니.
그 당시엔 연말이 되면 꼭 재롱잔치를 열었다. 열심히 준비한 무대를 꾸미고 부모님을 모신 뒤 선물을 드리는 연례행사였다. 마지막엔 1년간 함께한 친구와 포옹하며 고맙다고 말하는 순서도 있었다. 꼬까옷을 걸친 아이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웃음을 터뜨렸더랬다.
어느 해, 채현이 마지막 인사를 나눌 친구로 마주한 이는 서윤채였다. 둘씩 짝을 짓는데 하필이면 서로의 짝꿍이 됐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네가 와서 안기라는 식으로 굴었다.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 탓이었을까. 그럼에도 시선을 떼지 않고 눈을 맞춰 주던 모습 때문이었을까. 채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뺨에 입술을 붙였다. 시간이 흐르며 색이 바래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선명했다.
‘윤채도 채현이 볼에 뽀뽀해 줄까?’
다정하게 울린 선생님의 말에 서윤채는 의외로 순순히 움직였다.
‘야. 눈 감아.’
하기 싫다고 화를 내는 대신 눈을 감게 하고선 뺨에 입술을 내렸다. 부모님을 제외하고서 타인과 나눈 첫 뽀뽀였다. 사이좋게 뽀뽀를 주고받던 순간의 사진은 지금도 앨범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마실 거면 빨리 마셔라.”
“아, 지루하다. 지루해.”
말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 한순간을 꾸민 해프닝일 뿐이었으니까. 한데 이상하게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닳고 닳은 옛 기억 속 마모되지 않은 찰나이기 때문일까. 공연히 겸연쩍은 마음이 들고 남들 앞에 내보이기가 거북했다. 곰곰이 생각하며 침묵하던 채현의 눈에 미소 띤 서윤채가 보였다. 한쪽 입꼬리를 팽팽히 당긴 그는 ‘뭘 봐.’ 중얼거리곤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
그 순간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겠단 결심이 선 것은. 채현은 서윤채를 응시하다 음료를 들이켰다.
“오, 뭐야. 권채현 너 이 새끼 뭔데?”
한눈에 봐도 최악이던 액체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찌 음료에서 이런 맛이 날 수 있는지, 솔직히 말해 쓰레기를 먹는 듯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며 구토감이 치밀었다. 특히 과자가 씹힐 땐 참지 못하고 뱉을 뻔도 했다.
“됐지.”
탁. 기어이 음료를 다 마시고 텅 빈 종이컵을 내려놓자 모두 호들갑을 떨어 댔다. 요란스러운 반응에 서윤채도 다시 고갤 들고 시선을 보내왔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그는 꼭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듯했다.
“자자, 시간이 없다. 권채현, 네가 다시 시작해.”
확 달아오른 분위기에 채현이 답할 시간은 없었다. 오랜 추억에 젖어 있을 여유 역시도. 금세 다른 게임이 또 시작되며 이상한 음료가 계속 만들어졌다. 문제는 그를 마시고 뒤집어진 채현의 속이었다. 완전히 얹히기라도 한 건지 자꾸 침이 고이고 속이 울렁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게 질린 채현은 인상을 구긴 채 침만 꼴깍 삼켜 댔다. 멀쩡한 음료를 마셔 보고 심호흡도 해 보았는데 속이 진정되질 않아 죽을 맛이었다.
“채현아, 속 많이 안 좋아?”
“넌 절대 마시지 마. 저거 진짜 쓰레기 맛 나…….”
본인도 모르는 사이 울상을 지은 채현은 앓는 것에 가깝게 이야기했다. 친구가 등을 토닥거려 주자, 종잇장처럼 맥없이 흔들리면서도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서윤채는 채현의 꼴을 눈에 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만두면 등에 손자국만 가득 남지 싶은 탓이었다. 뚝 떨어진 입꼬리도 신경이 쓰인 참이었고.
“야, 일어나.”
“……어?”
채현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으로 등을 툭 치니 평소보다 느린 반응이 돌아왔다. 서윤채는 희고 붉은 채현을 바라보다 코끝을 아프지 않게 쥐고 비틀었다.
“음식 냄새 맡으면 속 더 뒤집히잖아. 일단 방으로 가 봐. 등 두드려 줄 테니까.”
“아… 응. 그럼 나 좀 일으켜 주면 안 돼? 힘이 안 들어가.”
어서 잡아 달라는 듯 팔을 쭉 뻗는 채현의 행동에 서윤채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하는 게 당연한 일인 양 구는 모습이 예사로워 순순히 응하면서도 황당함이 차올랐다.
방으로 향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채현은 자연스럽게 등을 보이고 앉으며 끙끙 앓았다. 그 와중에 속 편히 ‘나 체한 건 진짜 오랜만인 거 같은데. 그치…….’ 웅얼거리기도 했다.
아프다는 새끼가 말은 잘하네.
물끄러미 채현을 살피던 서윤채는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태도에 고갤 가로저었다. 골 때리는 짓만 골라 해서인지 입가가 간지러워졌다.
“누가 누구보고 신경이 쓰인대. 한 번을 그냥 못 넘어가지.”
“나도 이럴 줄 몰랐다고…….”
툭. 툭. 아프지 않게 등을 두드리며 쓸어내리자 꼿꼿이 서 있던 채현의 상체가 점차 기울었다. 끝내는 풀 죽은 사람처럼 몸을 굽히고 시선을 땅바닥으로 떨구었다.
“토할 거 같아?”
“울렁거려. 막 핑핑 도는 거 같기도 하고…….”
“진짜 가지가지 한다.”
“아, 너 잔소리만 할 거면 그냥 가……. 나 혼자 쉬고 있을 테니까.”
“청승 떨 생각 하지 말고 심호흡이나 크게 해 봐.”
채현은 또박또박 말대꾸를 해 대면서도 말은 잘 들었다. 후우. 하아. 시키는 대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차라리 토를 해 볼까?”
“속 다 버릴 일 있냐?”
“……그럼 네가 내 등 좀 밟아 볼래?”
“또 어디서 이상한 민간요법 듣고 왔지.”
“이상한 거 아니거든. 이거 진짜 효과 있어.”
체했을 때 밟으면 우두둑 소리가 난다는 둥, 체기가 바로 내려간다는 둥 진지한 말이 뒤이어 울렸다. 서윤채는 ‘우리 채현이 의사 다 됐네.’ 건성건성 대답하며 옆으로 자릴 옮겼다.
“손 줘 봐.”
“어? 응.”
“말고 한쪽만.”
양손을 들이미는 꼴에 실소를 터뜨린 서윤채는 한 손만 잡아채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눌렀다. 단단히 체한 건지 채현은 ‘어윽.’ 이상할 소릴 내며 바르작거렸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아! 근데, 으, 너무 세게 누르는 거 아니야? 아프단 말이야.”
“이래야 풀려.”
힘을 실어 더 세게 눌러 주니 항의하듯 눈을 치켜뜨기도 했다. 안 그래도 올라간 눈꼬리가 더 위로 솟았다. 붉게 달아올라 무섭기보다는 우습다는 느낌이 먼저 들긴 했지만.
“뒷바라지해 주는 친구를 왜 그런 눈으로 봐.”
“너 지금 감정, 으, 실어서 누르고 있지.”
“진짜 실었으면 네 앞니가 이미 다 털렸겠지?”
“……뭐?”
“구라야.”
건드는 족족 반응을 보여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바람 빠지듯 웃은 서윤채는 퍽 성심성의껏 채현의 손을 눌러 주었다. 상대 역시 말로는 툴툴거려도 얌전히 손을 맡긴 채였다. 남의 손을 잘 타는 티가 이런 데서 묻어났다.
“뭘 어떻게 먹어야 이 꼴이 돼. 내 말은 다 흘려들었냐? 급하게 처먹지 말라고 했지.”
“급하게 안 먹었어. 그 쓰레기 맛 나는 음료수가 문제였던 거야.”
“미련하게 그걸 왜 다 처먹어서.”
“……게임이잖아.”
잘못한 애처럼 눈동자를 굴린 채현이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한시를 쉬지 않고 일을 만드는 꼴에 한마디 하려다가도, 이런 모습을 보면 맥이 탁 풀렸다. 하도 많이 겪어 이제는 익숙하기도 했고. 호흡하듯 웃은 서윤채는 계속해 손을 놀리며 채현의 낯을 살폈다.
“지금은 좀 어때. 못 견딜 정도면 약 구해 보고. 담임한테 비상약 있을 거야.”
“아냐. 약은 안 먹어도 돼. 그냥 살짝 울렁거리고 어질어질한 정도야.”
“센 척하기는. 거울 볼래? 네 얼굴 존나 창백해. 시원한 물이라도 마시면 좀 낫겠냐?”
“어……. 근데 물이 없어. 애들도 없다고 하고.”
“밑에 가서 뽑아 오면 되지. 있어 봐. 갔다 올 테니까.”
기억상으론 1층 로비 자판기에 물이 있었다. 그 옆엔 정수기도 있었고. 뭐라도 마시게 하는 게 나을 듯해 자리에서 일어서니 채현이 눈을 크게 뜨며 올려다보았다.
“지금 갔다 오려고?”
“왜. 혼자 못 있어? 금방 오니까 잠깐 쉬고 있어 봐.”
“걸리면 어떡하려고.”
“갈증 나서 죽기 직전이었다고 하지, 뭐. 안 먹히면 그냥 혼나면 되는 거고.”
“같이 가, 그럼.”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채현은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두 발로 딛고 선 뒤엔 급히 움직이며 무리가 갔는지 휘청댔다. 대체……. 쯧 혀를 찬 서윤채는 채현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쉬고 있는 게 낫지 않겠냐.”
“나 때문에 가는 건데 어떻게 혼자 보내. 같이 가. 나도 찬 바람 좀 쐬고 싶어.”
“그럼 그러든가.”
그 상태로 향한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대형 중간엔 여전히 탁한 액체가 놓여 있었다. 다들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뒤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나갈 거면 옷 입어.”
“응.”
채현은 구석으로 향해 본인 후드 티셔츠를 껴입었다. 하는 짓을 지켜보던 서윤채는 먼저 문가로 가 복도를 확인했다. 이왕이면 안 걸리는 편이 좋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방 너머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뭐 해?”
그 상태로 기다리고 있자니,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채현이 똑같이 밖을 주시했다.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망보듯 구는 꼴이 제법 웃겼다. 피식대던 서윤채는 채현의 옷차림을 보고 혀를 쯧 찼다. 알아서 잘 챙겨 입는 줄 알고 내버려 뒀는데 다리를 훤히 내놓은 채였다.
“옷을 왜 입다 말아? 너 그러고 나갔다가 얼어 죽어.”
“이거 기모야.”
“겁대가리 없는 새끼가 추운 줄 모르고……. 난 책임 안 진다. 조용히 따라와.”
서윤채는 입을 달싹이다 꾹 다물고 고갤 끄덕이는 채현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지럽다기에 비틀거리진 않을까 유심히 살폈는데, 발소리를 죽이고 사뿐사뿐 걷기까지 했다.
하여간. 입꼬리를 당기며 코웃음 친 서윤채는 시선을 거두고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 1층에 다다를 때까지 마주친 이는 없었다. 자판기에서 물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덜커덩 큰 소리가 텅 빈 공간을 울려 주의를 기울였으나, 주변은 여전히 적막하기만 했다.
“마셔.”
“고마워. 너밖에 없다…….”
“알면 됐고.”
감정이 북받친 얼굴을 해 보인 채현은 곧장 물을 홀짝댔다. 조금씩 들이마시다 심호흡하는 꼴을 보던 서윤채는 채현을 건물 밖으로 이끌었다. 얌전히 따라 나온 그는 입구에 쪼그려 앉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속은 어때.”
“한결 낫다. 제주도는 밤공기도 좋은가 봐. 되게 개운한 느낌이야.”
“그런 거 느낄 여유도 있어?”
“체한 거지, 코가 막힌 건 아니니까……. 우리 여기 조금 있다가 가도 되나?”
너 추우면 들어가도 돼. 나지막이 따라붙는 채현의 말에 서윤채는 주위를 살폈다. 아직 건물 곳곳 불 켜진 데가 많았지만 주변이 어두워 잠시 있는 것쯤이야 괜찮을 듯싶었다.
“따라와 봐.”
“어디 가게?”
“저쪽 벤치. 이왕 있을 거면 편히 있어야지.”
아픈 애를 땅바닥에 앉혀 둘 순 없었다. 설사 걸린다 한들 숙소 바로 앞이니 크게 한 소리 듣진 않을 터였고. 딱히 감시가 심한 분위기가 아닌지라 걸릴 확률이 희박하기도 했다.
서윤채는 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벤치 뒤편으로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채현이 말했던 밤공기가 더 잘 와 닿았다.
“저긴 가로등이 없네. 야맹증 있는 사람은 어떻게 걸어?”
“그 사람들은 밤에 저길 안 가겠지.”
“아…….”
다소 맹하게 대꾸한 채현이 입을 다물며 주위엔 이따금 부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상대는 밤의 정적을 겹겹이 두른 공간에서 물만 홀짝였다.
“아.”
주변 나무를 흔들던 바람이 거세지며 채현도 어깨를 움츠렸다. 서윤채는 인상을 찌푸리고 채현을 살폈다. 잠옷으로 입고 있던 반바지가 새삼스럽게 눈에 밟혔다.
“안 춥냐?”
“너 화낼 거야?”
“왜 화를 내.”
“화내지 마. 사실 아까부터 다리에 감각이 없어.”
하필 입고 나와도 저런 옷을 입고 나오더니.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는 그 때문에 이젠 웃기지도 않았다. 외투를 쥔 서윤채는 이걸 벗어서 줄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자신 역시 안에 입은 건 맨투맨이 전부였다. 추운 건 끔찍하게 싫었고, 워낙 추위를 잘 타 옷을 벗으면 추울 게 뻔했다.
애새끼도 아닌데 옷까지 챙겨 줄 필요가 있을까. 체했을 땐 바람을 좀 쐬는 게 낫지 않나. 근데 저러다 또 감기 걸리면 피곤한데…….
한데 어쩐 일인지, 그냥 내버려 두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때마다 바람이 쌩쌩 불었다. 함께 흔들리는 건 그냥 한 명이라도 따뜻하게 있자는 결심이었다.
“너 진짜 손 많이 간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권채현이 아프면 더럽게 신경 쓰인다. 그럴 바에 잠깐 추위를 견디는 편이 이득이었다. 서윤채는 결국 외투를 벗어 그의 다리를 덮어 주었다.
“딱 3분만 더 있다가 들어가.”
물론 오래 앉아 있을 생각 따위 없었다. 3분 이상은 추워서 있을 자신도 없었고.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채현은 외투를 움켜쥐며 말갛게 웃었다.
“넌 진짜 가끔…… 안 어울리게 착하단 말이야. 아프다니까 잘해 주는 거야?”
“좋게 봐 줘서 고맙긴 한데, 분당 만 원이야. 3만 원 가져와라.”
“아, 됐어. 그럼 너 다시 입어. 도둑놈 아니야.”
그러기도 잠시, 기겁하며 외투를 치우려 하기에 서윤채는 채현의 신발을 툭 걷어찼다.
“어디 가서 사기는 안 당하겠네. 진짜 돈 받아 내기 전에 얌전히 덮고 있어라.”
“그럼 딱 1분만 더 있다가 가자. 너 추위 많이 타잖아.”
“그러든가.”
요란스레 반응하던 채현은 이내 기세를 죽이고 물만 홀짝였다. 그 모습을 보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야.”
“응?”
“왜 말 안 했냐?”
벌칙 음료랍시고 만들어 둔 액체는 얼핏 봐도 사람이 마실 게 못 됐다. 채현이 마시기엔 고역일 게 분명했고. 당연히 그가 예전 일을 말하고 벌칙을 피할 거라 생각했다.
“아까.”
입을 꾹 다물고 그걸 다 마실 줄은 미처 몰랐는데.
“……어? 컥.”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건지 궁금했지만, 지금의 채현에게 듣긴 요원해 보였다. 곧 죽을 사람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콜록대기 바빴으니까.
“……됐다. 하던 거나 마저 해.”
눈가까지 촉촉해진 모습을 본 서윤채는 한숨을 쉬며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젠 물도 제대로 못 마셔?”
“네가 갑자기 말 걸어서 사레, 후, 사레 걸린 거잖아…….”
“어련하시겠어.”
와……. 감탄인지 뭔지 모를 것을 흘리며 벤치에 기댄 채현은 머쓱하다는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눈동자를 슬쩍 굴리는 꼴을 보아하니 본인도 퍽 민망한 모양이었다.
“……윤채야.”
“왜.”
“수학여행 재밌지.”
“바다에 빠질 뻔했던 주제에 말은 잘해요.”
서윤채는 본인이 밀어서 그랬던 걸 까맣게 잊은 양 뻔뻔하게 대답했다. 다행히도 기침하느라 진을 다 뺀 채현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 물 흐르듯 넘어갔다.
“제주도 또 오고 싶다.”
“오면 되지.”
“그럴까? 또 올까?”
실없이 굴던 채현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물기 어린 눈동자는 또렷하게 빛났다. 어둡고 고요한 공간에서 이질적이다 느껴질 만큼. 맞닿은 시선의 온도는 밤바람과 달리 따스했다.
“거기 나도 있냐?”
“네가 왜 없어?”
당연한 물음에 ‘함께 가지 않는다.’란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게 뭐라고 웃음이 나는지, 서윤채는 피식대며 채현의 이마를 손으로 튕겼다.
“그때도 귀찮게 하면 죽는다.”
“응. 비상약 다 챙겨 갈게.”
“안 아플 생각을 해야지.”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한데… 노력할게.”
“그래. 힘내고. 이제 들어가. 추워.”
“천천히 걸어도 돼? 아직 쫌 울렁거려서…….”
따라 일어선 채현을 힐끗댄 서윤채는 작금의 상황이 황당해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끝내는 얕게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몸을 돌려 걸었다.
“윤채야.”
“왜.”
코가 빨개진 채현은 소곤소곤 쉼 없이 떠들었고 서윤채는 그에 반응했다. 귀찮고 성가실 법도 한 상황에 서윤채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느린 속도로 발을 내디딜 뿐이었다.
* * *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지옥 불구덩이에 빠지면 이런 기분일까.
“…….”
멍하니 천장을 보던 채현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가시질 않는지. 온몸이 무겁게 축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어젯밤 뒤집어졌던 속 역시 개운치 못했고.
주위가 고요한 걸 보니 아침 시간인 듯한데, 일어나서 내려가야겠단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지금 필요한 건 오직 숙면이었다.
“하…….”
다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진 않았다. 결국 다시 눈을 뜬 채현은 몸을 뒤척여 둥글게 웅크렸다. 자초한 일이긴 하다만 몸이 아프니 서럽고 힘들어 그저 잠들고 싶었다.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당긴 뒤엔 최선을 다해 의식의 끈을 놓았다. 그래 봤자 선잠일 뿐이었지만 짧은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주변 소음을 무시한 채 얼마간 자다 깼을까. 어느새 복작복작해진 공간과 막 들어오는 서윤채가 보였다. 소리 내어 부를 기운은 없어 눈으로 좇고 있자니 그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잘하는 짓이다.”
눈이 마주친 서윤채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하고 곁으로 다가왔다. 막 씻고 나온 참인지 젖은 머리를 터는 그에겐 좋은 향기가 났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서윤채 특유의 향이었다.
“나 기가 다 빨린 거 같아…….”
“그러게 일찍 자라고 했지. 아프다는 새끼가 깝치긴 왜 깝쳐.”
“나도 지금 후회 중이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방으로 돌아와 곧장 자지 않고 시간을 보낸 게 이 사태의 원인이었다. 조금만 놀다 자라는 말에 넘어가선 안 됐던 건데. 제 팔을 붙든 이를 무시하지 못한 여파가 이리도 컸다.
채현은 어렵사리 상체만 일으켜 세워 벽에 기대앉았다. 그냥 이대로 누워 하루 종일 자고만 싶었다. 핸드폰 액정에 슬쩍 비춰 본 얼굴도 초췌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건지……. 감당 못 할 피로에 지난밤이 후회됐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기억을 되짚는 동안 서윤채가 이온 음료를 가져와 내밀었다.
“마셔.”
“야…. 고마워.”
채현은 울먹임에 가까운 대답을 흘리고 입을 적셨다. 마른 목을 축이니 다른 의문도 치달았다. 졸음을 참다 기절하듯 잠들어서인지, 마지막 순간이 가물가물했다.
“애들 몇 시에 잤어?”
“몰라. 3시 넘어서까지 떠들긴 하더라. 질긴 새끼들.”
“와, 난 언제 기절했지……. 이불 내가 가져다 덮었나.”
“머리 대자마자 자던데. 이불은 네 친구가 덮어 줬고.”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친구가 바로 서윤채라는 것을. 역시 친구 하나는 잘 뒀다니까…….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이 든 채현은 빙긋이 웃으며 그를 툭 쳤다.
“지금 나 쳤냐? 웃긴 뭘 웃어.”
“아, 고맙다는 뜻이잖아…….”
“말로 해야 알지, 대뜸 주먹부터 날리면 어떻게 알아.”
“척하면 척 알아들어야지. 그리고 누가 주먹질을 했다고……. 오버하지 마.”
서윤채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눈에 봐도 짓궂은 웃음이었다. 장난스러운 눈빛을 해 보인 그는 작게 콜록대며 몸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코를 훌쩍이더니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저 때문이지 싶어 삽시에 시무룩해진 채현은 ‘미안…….’ 중얼거렸다.
“됐으니까 가서 씻기나 해. 그 꼴로 나갈래?”
고갤 도리도리 젓자, 그럼 어서 움직이라는 눈빛이 돌아왔다. 채현은 매정히 멀어지는 서윤채를 응시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마따나 일단 씻고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화장실로 이동해 확인한 몰골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고작 하루 놀았다고 이 꼴이 되다니. 거울 속 제 모습에 아득해진 채현은 비척비척 샤워기 아래로 움직였다.
샤워를 이어 나가는 동안엔 지난밤 자신을 돌봐 주었던 서윤채를 떠올렸다. 아플 때 혼자 끙끙 앓는 것만큼 서러운 게 없는데, 곁을 지켜 줘 너무 고마웠다.
그와 비례하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성가신 일을 싫어하는 이에게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게 한 거였으니. 못 할 짓을 한 것과 다름없어 반드시 보답을 해야만 했다.
다부지게 눈을 빛낸 채현은 성큼 밖으로 나섰다. 방 안엔 그사이 준비를 끝마친 이들이 꽤 보였다. 서윤채 역시 벽에 기대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채현은 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기척에 고개를 든 서윤채는 왜 앞을 가로막느냐는 듯 눈짓했다.
“서윤채, 진심으로 고맙고 미안.”
“씻으면서 회개라도 했어? 갑자기 뭐가.”
“그냥, 뭐…. 어제 네가 나 챙겨 줬으니까. 너 먹고 싶은 거 사 줄게. 다 말해.”
느슨히 눈을 깜빡이던 서윤채는 머리를 툭 밀며 짧게 웃었다.
“말은 잘해요.”
“사람 된 도리로서 감사와 사과를 전해야…….”
“그래. 잘 받은 거로 할게. 이제 가서 네 할 일 해. 머리 물 뚝뚝 흘리고 다니지 좀 말고.”
성가시다는 듯 덧붙인 말은 까칠했으나, 젖은 옷을 살피는 시선은 부드러웠다. 낮은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채현은 방긋거리며 답하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를 이어 나갔다.
채비를 서두르고 밖으로 향하니 시체처럼 눈 밑을 시꺼멓게 물들인 이들이 꽤 많았다. 채현은 저와 비슷한 상태인 이들을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개중에는 계속 헛구역질을 하는 정유빈도 있었다.
“야, 우리 오늘 어디 간다고?”
“성산 일출봉.”
“씨발…….”
그는 웩웩대며 숨을 몰아쉬다가 이게 다 업보라 뇌까리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를 응시하는 채현의 표정도 초연하긴 마찬가지였다. 성산 일출봉이라니……. 얼마나 힘들지 벌써 눈앞에 그려졌다.
도착한 후엔 아니나 다를까 상상이 실제가 됐다. 말 그대로 참회의 시간이었다. 채현은 정유빈과 함께 헉헉거리며 발을 내디뎠다. 서윤채는 다른 이들과 앞서 나간 지 오래였다. 같이 가자는 말에도 ‘내가 네 보호자냐?’ 하며 매정히 나아갔다.
“야, 채현, 그냥 여기서 기다릴래? 지금 씨발 좀 죽고 싶은데.”
“나도. 사실 처음부터 포기하고 싶었어.”
“우리 이 정도면 선방했잖아. 애들한테 사진 찍어 오라 하고….”
채현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당장 어딘가에 몸을 앉히고 쉬고 싶었지만 지금껏 올라온 게 아까워서 멈출 수 없었다. 올라가면서 보이는 광경이 근사한 것도 한몫했다.
매초 자신과 싸우며 오기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정상이 가까워졌다. 푸릇하고 광활한 자연에 언제 힘들었냐는 듯 또 잔뜩 신이 났다. 수평을 이루는 지평선을 보니 마음도 편해졌다.
주변 감상을 마친 이들은 기념사진을 남기기 바빴다. 채현은 자연스레 끼어들며 포즈를 취했다. 환히 웃는 순간 카메라 소리가 연달아 찰칵찰칵 터졌다.
“채현아.”
“어? 신제윤!”
역할을 바꿔 채현이 열심히 셔터를 누를 무렵, 주의를 끌어당긴 건 나긋한 부름이었다. 반가운 얼굴에 채현은 핸드폰을 친구에게 넘기고 달려갔다.
“너희 반도 여기부터 들른 거야? 애들 다 저기 있는데. 가서 같이 사진이나 찍자.”
“올라오면서 봤어. 넌 없길래 어디 갔나 했더니…. 어제 잠 못 잤어? 컨디션 안 좋아 보여.”
“잠을 자긴 했는데…. 사실상 기절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런…. 그래서 그런 거지, 멀쩡해.”
“밤새 놀았구나. 몸은 괜찮은 거야?”
눈살을 찌푸린 신제윤이 염려 섞인 눈빛을 해 보였다. 걱정을 한 몸에 받은 채현은 으하하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괜찮아지는 중. 이쪽으로 와. 서윤채 얜 어디 간 거야. 단체 사진 찍어야 하는데.”
“걘 없어도 돼.”
“너희 아직도 내외해? 동아리도 같이하잖아.”
“우린 그냥 안 친한 거야.”
몇 년 지기 친구를 떠올리며 하는 말이라기엔 제법 신랄했다. 잘만 다니면서 서로를 싫어하는 건 대체 뭔지……. 이런 태도도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채현은 그저 웃어넘겼다.
결국 서윤채까지 데려와 아옹다옹 사진을 찍는 사이,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 됐다. 다른 반 친구들과는 이따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보자 인사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우리도 장기자랑 할 걸 그랬다.”
“왜 우리야. 내 의사는 안 물어?”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하산 길에 채현은 서윤채와 발맞춰 걸었다. 정상에서 주차장에 이를 때까지 말씨름을 해 댔지만 분위기는 여느 때와 같았다.
“채현아, 잘 좀 걸어라. 무릎 갈고 싶은 거면 말을 하고.”
“돌부리를 못 봐서 그래.”
“눈은 장식이야?”
“뭘 또 그렇게까지……. 두 번 넘어질 뻔했다간 귀에서 피 나겠다.”
“네 무릎에서도 나겠지. 그땐 안 잡아 줄 거니까.”
……잡아 줄 거면서. 속으로만 말대꾸한 채현은 서윤채를 살짝 흘겨보고 조심히 발을 내디뎠다. 서윤채가 한층 느린 속도로 걸어 주는 걸 알기에 욕을 먹어도 화가 나진 않았다.
좋지 않은 몸 상태로 움직인 후폭풍은 커다랬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멍해진 채현은 다시 활기를 잃고 골골댔다. 꾸벅꾸벅 졸다 도착한 식물원에서도 영혼 없이 움직여 다녔다.
한계를 시험하는 일정은 딱 죽겠다 싶을 때쯤 끝이 났다. 누구보다 빨리 버스에 오른 채현은 얌전히 자릴 잡고 앉아 눈만 깜빡였다. 어서 이불 속에 누워 기력을 충전하고 싶었다.
차는 창 너머 제주도 풍경을 눈에 담는 동안 빠르게 달렸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향한 숙소에서는 저녁 식사 이후 쭉 자유 시간이었다. 이후 있을 장기자랑 준비 시간인 듯했다.
채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반 애들의 춤 연습을 지켜보다 곯아떨어졌다. 주위에서 연신 쿵쿵대며 요란스럽게 굴었지만 개의치 않고 레크리에이션 때까지 눈을 붙였다.
잠깐이나마 푹 잔 덕분인지, 행사 시간엔 체력이 어느 정도 돌아온 채였다.
― 오늘 종합 점수 1등인 반에는 끝나고 치킨 넣어 드립니다. 다들 준비됐습니까?
채현은 환호가 터지는 대강당 안에서 함께 소리쳤다. 반별로 열을 맞춰 앉은 아이들은 한껏 달아오른 채 수학여행 마지막 행사를 즐겼다.
― 함성 제일 큰 반엔 응원 점수 500점! 자, 1반?
2반 차례가 되길 기다린 채현은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는 단체로 저녁 두 번씩 먹고 왔냐며 하하 웃었다.
― 4반, 오, 맨 앞에 잘생긴 친구가 앉아 있는데? 이 반 뭔가 잘할 거 같아. 마음에 들어.
반장이 맨 앞자리에 앉게끔 되어 있으니 4반이면 신제윤이 분명했다. 외모로 점수 얻는 건 반칙 아닌가. 순간 다급해진 채현은 더 열심히 응원해야겠다 다짐하며 주먹을 쥐었다.
장기자랑은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환호가 커지며 분위기는 점차 달아올랐다. 한참을 신나게 놀던 채현은 목이 따끔거리고 갈증이 나 몰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미니 게임을 진행 중이니 그사이에 빨리 다녀올 생각이었다.
“아, 목 아파….”
괜히 승부욕을 불태우다 이 꼴이 되다니. 채현은 어이가 없어 킥킥대며 매점을 향해 걸었다. 기분 좋게 내딛던 걸음이 멈춘 건 매점 근처에 서 있는 두 인영을 본 뒤였다.
익숙한 이와 낯선 이를 동시에 확인한 채현은 저도 모르게 벽 뒤로 숨었다. 스스로도 이해 못 할 행동에 눈 깜빡임이 느려지고 웃음이 멎었다.
“……나 왜 숨었지?”
뒤늦게 제가 한 짓을 인지하고 다시 바라본 이는 서윤채가 맞았다. 아까부터 안 보인다 싶더라니 아예 밖에 나와 있던 듯싶었다. 곁에 선 이는 얼굴과 이름만 아는 다른 반 여자애였다.
“나 아까 성산 일출봉 갔을 때 너 봤어.”
“그러냐.”
“응.”
거리가 꽤 가까운 탓에 목소리가 또렷이 다 들렸다. 그 안에 스민 선명한 호감까지도. 몇 발자국 떨어진 채현에게 전해질 정도였다. 눈치 빠른 서윤채가 그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는 심드렁히 핸드폰만 만져 댔다.
“있잖아. 다음에 학교에서 마주치면 인사해도 돼?”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오직 핸드폰만 바라보던 서윤채가 여자애의 얼굴을 눈에 담은 것은.
“…….”
고요한 밤바람이 서윤채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는 순간, 채현은 뒷걸음질 쳤다. 약간의 당황과 놀람이 찾아들며 걸음을 뒤로 물리게 했다.
봐선 안 될 걸 보았다. 들어선 안 될 이야기를 들었다. 어서 이 공간에서 벗어나야겠단 생각만이 맴돌았다. 그래야 쿵쿵 뛰는 심장이 조금이나마 진정될 듯했으니까.
서윤채가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는 걸 처음 본 것도 아닌데 느낌이 이상했다. 상대방의 호감이 여실히 느껴진 탓일까. 이루 말할 수 없는 꺼림칙함이 자꾸만 표정을 굳혔다.
“훔쳐 들어서 그런가.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강당으로 들어선 채현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섰다. 무대가 한창 진행 중인 공간에서 채현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조명이 닿지 않는 구석에 쥐 죽은 듯이 서서 직전 기억을 곱씹었다. 그 끝에 여과되어 남은 건 궁금증이었다.
서윤채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닫힌 문 너머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