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디펜스 - 9
마리우스와 로마의 민병대를 피해서 도망가던 알라리크의 병사들은 뒤이어 몰려오던 마리우스의 병사들에 의해 토벌되었다.
지난 몇 년간 끈질기게 마리우스의 앞을 막아왔던 알라리크 또한 이번 로마에서의 전투로 그 질긴 악연의 고리를 끊어냈다.
“으음···.”
“각하, 눈은 좀 괜찮으십니까?”
“크게 다친 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마리우스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알라리크의 마지막 일격으로 눈을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시력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 아닙니까? 다 나을 때까지는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요.”
“으음···. 알겠네, 그나저나 로마의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거지?”
“각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무장한 민병대들을 무장해제 시켜서 집으로 돌려보냈고, 올리브리우스에게도 칙사를 보냈습니다.”
“그래, 올리브리우스가 스스로 내려오지 않겠다고 버티면은 강제로라도 끌어내려야 해···. 알고 있지?”
“예, 이미 아에티우스에게 사람을 보내서 나폴리로 진군할 것을 명령해뒀습니다.”
“아에티우스라면 믿을만하지.”
마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데키무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고드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가? 심각한 건가?”
“예, 많이 심각한 겁니다.”
데키무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래야지. 이번엔 또 뭔가?”
“조금 전에 시체들을 확인하는데···. 교황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니, 알라리크에게 살해당한 듯싶은데···.”
“알라리크 녀석은 갈 때도 예술로 가는군.”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대로 가면 도시 내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이 크게 흔들릴 겁니다.”
데키무스의 물음에 마리우스가 한껏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말했다.
“굳이 내가 신경 써야 할 문제인가? 어차피 저들끼리 알아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겠지···. 늘 그래왔듯이 말이야.”
“그렇지만···.”
“솔직하게 내 심정을 말하자면 이번 기회에 교회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고 싶어, 그놈들이 그동안 설쳐대면서 귀찮게 군 게 얼마인데.”
물론 마리우스는 말로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를 않았다.
교황을 잃고서 혼란에 빠진 아타나시우스파는 교황을 뽑느니 마느니, 아니면 새로운 과두정체제로 새롭게 구성하는 너를 두고서 첨예하게 대립 중이었다.
“올리브리우스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사람을 보낸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어?”
“올리브리우스는···.”
******
스틸리코에게 참패를 당한 이후로 나폴리에 틀어박혀서 곧이어 내려올 스틸리코를 대비하고자 했다.
그의 생각에는 마리우스나 알라리크가 내려올 때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알라리크가 스틸리코를 무찔렀다는 소식과 마리우스가 그런 알라리크를 참살했다는 소식은 올리브리우스의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마리우스와 알라리크가 크게 한판 붙었다고···?”
“예, 덕분에 알라리크가 이끌던 부대가 전부 무너져버렸다고 합니다.”
“허허···. 이게 무슨 상황인가···.”
그의 숙적이었던 스틸리코가 몰락하고 알라리크 또한 마리우스의 손에 가버렸다.
이렇게 되면 미미하더라도 아직 살아남아 있는 올리브리우스가 승리한 것 같아 보였지만, 정작 마리우스가 그의 휘하에 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현 정국에서 운전대를 잡은 것은 올리브리우스가 아니라 마리우스였다.
그리고 오늘 올리브리우스는 마리우스가 보낸 전령을 만나고서는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올리브리우스, 당신은 폐위됐습니다!”
“뭐라고···?”
“이놈이 정신이 나간 모양이로구나···!”
친위대장이 검을 뽑아 들고서는 마리우스가 보낸 사절의 목에 들이밀었으나 파라몬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면서 올리브리우스에 말했다.
“결정하시오. 지금 평화롭게 내려올 것인지, 아니면 게르마니아 대추장이신 마리우스 전하의 손에 추잡하게 끌려내려올것인지를 말이오!”
“이놈이 그래도···!”
친위대장이 분노하면서 검을 휘둘렀지만, 오랜 세월을 전쟁터에서 마리우스의 곁을 지켜왔던 파라몬드는 간단히 이를 피했다.
그리고서는 빈틈을 보이는 친위대장을 옆구리에 돌주먹을 한 방 먹이는 것으로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면서 파라몬드를 위협하자 판금 갑옷을 입고 있던 파라몬드의 호위병들이 대검을 꺼내 들면서 주변을 에워쌌다.
“전하께서는 폐하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실 것이라 믿고 계십니다.”
“허, 내가 늑대 새끼에게 목줄을 채워놓는 것을 깜빡했구나···.”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전하께서는 게르마니아에 오실 때부터 다 자란 늑대이셨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이 무리를 만드신 것이지요.”
“후우···.”
올리브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떨궜다.
이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머리 위에 있던 황금 월계관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면서 무릎 위에 올려뒀다.
호노리우스로부터 공동 황제직을 제안받고서 이에 원로원이 호응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도 어언 삼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와 로마를 지켜왔다.
고트족의 침입, 원로원 의원들의 배신, 스틸리코와의 대립과 마리우스의 이탈리아 침공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로써 모든 것들이 끝나버렸다.
올리브리우스는 거칠게 월계관을 바닥에 내팽개쳐버리면서 말했다.
“가서 마리우스에게 전해주게.”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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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쪽의 황제관을 얻은 마리우스는 자신의 손자이자 호노리우스의 사생아인 테오도시우스를 황제의 자리에 올리기 위한 즉위식을 준비했다.
평소라면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지방 토호들이 불만을 터뜨려댔겠지만, 지금의 마리우스에게 제정신으로 덤벼들 만큼 용감 한자는 없었다.
게르마니아와 장벽 너머의 게르마니아를 정벌하고 브리타니아를 평정했으며, 이제는 갈리아까지 발아래에 두며 제국의 삼 분의 일을 장악하고 휘하에 수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거느린 이를 누가 막겠는가.
거기에 그동안의 혼란을 잠재움으로써 로마시민들의 지지까지 받았으니 현재로서는 마리우스에게 쓴소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테오도시우스 2세의 즉위식은 천천히 진행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호노리우스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 아니 테오도시우스를 황제로 올린다고.?”
“마리우스 전하께서는 동방의 황제 폐하께서 새롭게 제위에 오르시는 테오도시우스 폐하를 지지해주실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뭐 요구?!”
마치 맡겨놓기라도 했다는 듯이 강력하게 나오는 마리우스의 모습에 호노리우스가 분노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 보고 있으니 마리우스의 오만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폐하, 진정하시지요.”
“진정은 무슨 놈의 진정! 지금 마리우스 놈의 행태를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건가?!”
“마리우스 각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늘 그렇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는···.”
폴로가 호노리우스를 잘 타이르려고 했으나 이미 화가 난 황제를 말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폴로, 마리우스의 편을 들겠다는 거야?”
“지금 편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는 게 편드는 게 아니면 뭐야!”
호노리우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만 가고 분위기 또한 험악해져만 가는 가운데, 마리우스의 사절로 온 데키무스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화내시는 것은 전부 이해합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는 폐하의 아들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황제직에 오른다면 다시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크흠···.”
테오도시우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불처럼 타오르던 호노리우스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그런 황제의 반응을 본 데키무스가 재빠르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더불어서 새로운 황제를 지지해주신다면, 안토니나 양과 폐하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시겠다고도 하셨습니다.”
“뭐? 마리우스가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데키무스의 말에 호노리우스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 가지고 있는 세력으로는 마리우스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미 로마의 절반 이상이 마리우스의 손에 들어간 지라 그가 발버둥 친다고 해서 마리우스를 제치고 다시 우위를 가져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답은 간단했다.
“어디에 서명하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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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테오도시우스의 즉위식 날.
로마 전역에서 몰려든 수많은 군중이 새로운 황제를 보고자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테오도시우스가 마리우스와 손을 잡은 채로 광장에 나타나자 함성이 로마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지? 다 너를 축하해주려 모인 사람들이다.”
“축하가 뭐에요?”
어린 손자의 귀여운 물음에 마리우스가 테오도시우스의 오른팔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네가 손을 흔들어주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와아아아-!”
“내 말이 맞지?”
“와아···. 신기해요!”
테오도시우스가 두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내려다보았지만, 짧은 팔다리로는 도저히 광장의 모든 풍경을 눈 안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어린 테오도시우스는 마리우스에게 두 팔을 떨라면서 말했다.
“안아주세요!”
“으, 응? 여기서 말이냐?”
“네!”
갑작스러운 손자의 요청에 마리우스는 당황했으나, 이내 피식 웃으면서 어린 테오도시우스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열광하면서 어린 테오도시우스의 이름을 외쳤고 하늘 위의 태양도 어린 황제를 비춰주고 있었다.
“우와···. 사람들이 전부 제 이름을 불러요!”
“테오도시우스, 네가 태어나던 날에 너의 이름을 불러주던 이가 나와 네 엄마뿐이었지만, 이제는 로마의 모든 이들이 네 이름을 부르고 있구나.”
“네!”
“이게 로마 황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곧 앉게 될 자리이기도 하지.”
마리우스가 신나서 몸을 들썩거리는 테오도시우스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으니 황금 월계관을 들고 대기 중이던 게르마니아 아리우스파의 대주교이자 도미티누스가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신께서도 오늘의 일을 기쁘게 생각하실 겁니다.”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하하···. 전하께서는 언제나 저희의 충성심을 의심하시는군요.”
“나는 원래 종교인들은 안 믿는 편이야.”
“그렇습니까···. 하하···.”
도미티누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전하의 덕분에 아리우스파의 교인들이 다시 로마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다시 돌아온 감상이 어떤가? 막 가슴이 벅차오르나? 아니면 자네들을 쫓아낸 모든 이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싶은가?”
“그럴 리가요···. 저희가 쫓겨난 것도 모두 신의 뜻이고 돌아오게 된 것도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재미없기는···.”
마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황제관을 머리에 쓰고서 제위에 앉는 테오도시우스를 바라보자 도미티누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께서 황제가 될 수도 있었는데···. 아쉽지는 않으신지요?”
“아쉽긴···. 처음부터 저긴 내 자리가 아니었어. 그리고 테오도시우스가 황제가 되면 저 어린 녀석이 뭘 알겠나? 내가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지.”
“그렇습니까···. 역시 전하십니다.”
마리우스는 말없이 로마를 둘러봤다.
“뭐 별거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