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187)

로마 디펜스 - 8

스틸리코의 앞에서는 굳건히 닫혀있던 로마의 성벽이 알라리크의 앞에서는 자동문처럼 스르르 열렸다.

로마의 교황인 성 이노켄티우스 1세는 알라리크를 크게 반기면서 그들을 해방자라고 불렀다.

“어서 오시지요. 신앙의 수호자여!”

“신앙의···. 뭐요?”

“신앙의 수호자 말입니다. 이단에 심취한 저 마리우스와 스틸리코 연합의 손에서 고통받던 어린양들을 구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알라리크는 이노켄티우스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올리브리우스 폐하께서는 언제쯤 로마로 오시는 겁니까? 못해도 이번 달 안에는···.”

“올리브리우스는 스틸리코에게 패하고서는 나폴리로 돌아갔습니다.”

알라리크의 말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던 이노켄티우스와 교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들은 당황하면서 서로를 돌아보면서 어찌할 줄을 몰라고 하면서 우왕좌왕했다.

“그, 그러면 폐하께서는 언제쯤 다시 로마로 진군하실 요량이신지요···?”

“글쎄요···. 당분간은 힘들겠지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올리브리우스는 이제 끝난 거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 그게 무슨···!”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줄을 잘못 탔다는 거지요.”

알라리크의 말에 이노켄티우스의 두 눈이 크게 흔들리더니 앞에 있던 알라리크를 붙잡으며 물었다.

“장군께서 로마를 지켜주시겠습니까?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사례는 무슨···. 나는 형제들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로마로 왔을 뿐입니다.”

“약속이라면···?”

알라리크는 품속에서 단검을 뽑아 들더니 그대로 로마의 성벽에 이름을 새겨넣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난 지도 벌써 몇 년째.

그동안의 오랜 싸움 끝에 하나둘씩 떠난 동료들과 훨씬 전에 세상을 떠났던 비디메르의 이름까지 묵묵히 새겨넣었다.

강철과 돌이 맞부딪히면서 기괴한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주변에서는 묵묵히 그를 지켜보기만 할 뿐. 뭐라고 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일이 다 끝나자 날카로웠던 알라리크의 칼끝은 뭉툭해져 있었고 칼날 또한 투박하기만 할 뿐이었다.

알라리크는 멍하니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이노켄티우스에 단검을 쥐여주고서는 병사들을 돌아봤다.

전투로 인해 다들 어딘가가 깨지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오랜 행군과 격렬한 전투로 인해 패잔병이나 다름없었다.

“형제들이여, 나는 로마의 성벽에 형제들의 이름을 새기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제 너희들에게 남은 마지막 약속을 지키고자 하노라.”

“약속이라···. 좋은 말이로군요.”

알라리크의 말에 어느샌가 정신을 차린 이노켄티우스가 넉살 좋은 모습으로 알라리크에게 말을 걸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라리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축 쳐져 있던 고트족 병사들이 무기를 빼 들고서는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니 이노켄티우스가 물었다.

“가, 갑자기 다들 왜 이러신지···?”

“오늘 이 도시는 너희들의 것이다.!”

“와 아아-!”

“자, 장군?”

알라리크는 당황하면서 자신을 부르는 이노켄티우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하들과 약속을 했고 이를 지켜야만 합니다.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게 무슨···.”

“이 도시는 불타올라야 합니다.”

“장군, 지금 로마를 약탈하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요.”

알라리크는 실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 들어 이노켄티우스를 단칼에 베이어내면서 소리쳤다.

“오늘은 참으로 슬픈 날이로다.”

“지랄은 거기까지 다 알라리크!”

“...!!”

뒤편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알라리크가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마리우스가 있었다.

“너희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기병대를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마리우스···! 네놈은 언제나 내 앞길을 방해하는구나! 오냐, 좋다. 여기까지 왔는데 네놈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와라!”

******

마리우스는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병사 천명만을 이끌고서 단숨에 로마로 달려갔다.

병사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마리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에게 패배함으로써 계획이 많이 어그러진 탓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 조금만 힘을 내라! 로마고 코앞이다!”

“예에···.”

“쯧···.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짝 따라와!”

마리우스는 정신없이 말을 몰아 로마로 향했다.

점점 로마에 가까워질수록 마리우스의 몸에서는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활짝 열린 로마의 성문 너머로 누군가를 베어 넘기는 알라리크의 모습을 본 마리우스의 이마가 찌푸려지면서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지랄은 거기까지 다 알라리크!”

마리우스의 말은 한계에 달했다는 듯이 마구 헐떡거렸지만, 그는 멈추어 서지 않고 오히려 속도를 올렸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빽빽하게 세워진 창날들이 마리우스의 목숨을 노렸으나 마리우스는 능숙하게 이를 쳐내면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의 목숨을 거둬갔다.

고작 한 명이었지만, 고트족 병사들을 이를 막지 못하고 연신 뒤로 밀려나기만 했다.

사방에서 힘껏 창을 내질렀지만, 마리우스는 태연하게 이를 피하거나 비껴냈고, 운 좋게 마리우스의 몸에 닿은 것들도 그가 입은 갑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자신들의 공격은 통하지 않고 마리우스의 일방적인 폭력에 노출된 병사들의 사기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뒤이어 들어오는 게르마니아 기병대의 차징에 진형이 크게 흔들렸다.

“모두 동요하지 마라! 내가 여기 있다!”

알라리크 병사들 틈에 섞여서 흔들리는 병사들을 다독이며 진형을 유지하게 했다.

하지만 지난 베로나 평원에서 마리우스가 보여준 어마어마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고트족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거기다가 마리우스를 뒤따라온 게르마니아 기병대 또한 만만찮은 상대였다.

보병 방진을 정면으로 들이박은 탓에 그들의 피해도 만만찮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서 싸웠다.

누군가가 쓰러지면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메웠고 그 숫자는 고트족 병사들보다 한참이나 적었지만, 전황은 마리우스에게 기운지 오래였다.

“죽고 싶은 녀석들만 내 앞으로 와라!”

“전하의 뒤를 따라라! 모두 전하를 지켜라!”

“알라리크는 어디 있나! 당장 튀어나와!”

마리우스는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에 있는 적들을 무참히 도륙 내고 있었다.

로마 시내에서 벌어진 전투였기에 전투가 길어질수록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던 시민들이 마리우스의 분전을 보고 무기를 들고 전투에 합류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민병대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이따금 퇴역군인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이면서 고트족 병사들을 괴롭혔다.

“주군, 사방에서 무장한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 자칫 포위되기라도 한다면···.”

“이대로 도망이라도 치자는 건가?”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좋아, 그럼 어디로 물러나면 좋겠나? 이곳은 이탈리아의 심장부인데, 우리의 고향까지 어떻게 도망칠 수 있겠나?”

“그, 그건···.”

알라리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전부 죽던가, 아니면 마리우스를 죽이던가 둘 중의 하나일세 이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어.”

“...알겠습니다.”

“누가 누구를 죽인다고.?”

알라리크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보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충격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뒤로 날아간 알라리크는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고 울렁거리는 속에 있던 것을 토해냈다.

“우웨엑-”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있었구나! 알라리크.”

“마리우스···.”

마리우스는 투구에 달린 바이저를 올리면서 알라리크와 눈을 마주쳤다.

공포에 질린 고트족 병사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겁에 질리지 않은 눈으로 마리우스를 올려다보던 알라리크는 손에 든 검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고트족의 진형은 무너진 지 오래였고 병사들은 제 한 목숨을 지키고자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라리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속을 비워낸 탓인지 이전보다 또렷해진 정신으로 마리우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외로이 서 있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후우···. 마리우스, 너는 언제나 내 앞길을 가로막는구나···. 늘 그렇듯이 말이야.”

“너는 매번 두들겨 맞고서도 매번 내 앞에 서는구나···. 근성 하나는 인정해주지.”

마리우스는 진심으로 알라리크를 칭찬했다.

매번 자신에게 패하고서는 몰락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기에 성공하여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지어 한번은 마리우스를 위기에 빠트리고서 그를 끝장낼 뻔도 했으니 말이다.

“네놈에게 인정받는 날이 올 줄이야···.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드는군.”

“너도 그러냐? 나도 그런다.”

마리우스와 알라리크는 오랜 친구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여전히 병사들과 시민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가만히 알라리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던 알라리크가 거친 숨을 가다듬고서는 검으로 마리우스를 겨누었다.

“그래, 이제 준비는 끝났겠지 마리우스?”

“난 예전부터 준비를 끝냈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있나? 내가 책임지고 후대까지 전해주지.”

“뭐로 말인가? 어리석은 지도자이자 멍청한 지휘관의 전형으로 말인가?”

알라리크의 비아냥에 마리우스가 씩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위대해질수록 자네의 이름값도 드높아질 거야. 위대한 게르마니아 대추장 마리우스의 앞을 번번이 막아댔던 용감한 고트족의 지도자로 말이야.”

“허, 결국에는 네놈을 높이는데 쓰겠다는 거로군.”

“꼬우면 이겼어야지.”

“그래, 네 말이 맞는다.”

알라리크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다음 전장은 저 하늘 위가 되겠어.”

“한 백 년쯤 먼저 가 있으라고.”

“헛소리를···!”

알라리크가 마리우스를 향해 냅다 검을 내질렀다.

마리우스는 이를 간단히 막아내고서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알라리크를 밀어붙였다.

“큭···. 여전히 괴물 같은 놈이군.”

“벌써 지치기라도 한 건가? 내게 분노하던 알라리크는 이미 죽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럴 리가 있나···!”

마리우스가 두 손으로 검을 잡고서는 연신 알라리크를 향해 휘둘렀다.

벼락처럼 이어지는 마리우스의 검격에 알라리크의 손이 어지러워졌고 금세라도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졌다.

그렇게 몇 번의 공방이 더 오가던 찰나에 알라리크가 회심의 일격으로 마리우스의 눈을 노리면서 검을 내질렀다.

“죽어라!”

“어딜.”

마리우스는 왼팔을 들어서 알라리크의 검을 간단히 튕겨내었지만, 투구로 인해 가려진 사각지대에서 올라오는 알라리크의 단검을 보지 못했다.

순식간에 단검이 마리우스의 오른눈을 훑고 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알라리크의 목이 잘렸다.

“각하!”

마리우스의 부상에 데키무스가 화들짝 놀라면서 뛰어왔지만, 마리우스는 태연하게 알라리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난 멀쩡해.”

“누, 눈이···.”

“이 정도면 멀쩡한 거지.”

마리우스는 알라리크의 단검을 들어 올렸다.

한껏 날이 무뎌진 알라리크의 단검을 만지작거리는 마리우스의 상처에 데키무스가 붕대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아직 적들의 잔당이 많습니다. 이곳의 지휘는 제게 맡기시고 뒤로 물러나서 상처를 다스리시지요.”

“조금 긁힌 것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

“피가 많이 나고 있습니다.”

“원래 상처에서는 피가 나는 법이야.”

마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손에는 검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알라리크의 머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네는 가서 올리브리우스에게 전해, 한 달 내로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면 알라리크처럼 만들어주겠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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