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187)

로마 디펜스 - 7

위기였다.

알라리크의 연약한 중군을 뚫어낸다는 스틸리코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해버렸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파상공세를 버텨냈고 이제 그의 양익에 배치된 병사들이 움직이면서 스틸리코의 뒤를 잡고 있었다.

“장군!!”

“코모두스···. 어떻게 된 것이냐.”

“죄송합니다···. 적의 공세가 너무 거센 탓에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가···.”

스틸리코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예상한 바였기에 스틸리코는 침착하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이번 싸움은 우리가 졌다. 적의 전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탓에 무리한 싸움으로 병사들을 끌어들였구나.”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동안 알라리크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자신감에 올리브리우스를 상대한 뒤에 지친 병사들을 데리고서는 곧바로 알라리크를 상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여러 번의 실전을 거친 정예병들은 올리브리우스의 징집병들과는 비교를 거부했다.

오랫동안 서로 합을 맞춰온 정예병답게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스틸리코의 병사들을 압박하면서 진형을 무너트렸다.

스틸리코의 병사들도 근 5년간 스틸리코를 따라다니면서 북아프리카의 반란 진압에도 투입된 병사들이었지만, 숫자도 적었고 올리브리우스와의 전투로 조금 지친 상태였던 게 패인이었다.

“장군···. 제가 로마까지의 길을 뚫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부탁하지.”

“저만 믿으십시오.”

결국, 스틸리코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서는 로마로 퇴각하기로 했다.

아직도 알라리크의 중군과 스틸리코가 이끄는 중군의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스틸리코는 태연하게 말을 몰아서 전장에서 몸을 빼냈다.

그런 그의 곁을 몇몇 병사들이 뒤따랐고, 말이다.

“스틸리코가 도망가는군.”

“쫓을까요? 형님?”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하지만 마리우스 놈에게 내 의지를 보여주려면 스틸리코의 목이 필요하겠지?”

“기병대를 시켜서 추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반드시 스틸리코의 목을 가져오도록.”

아타울프가 물러나자 알라리크는 포위당한 채로 분전 중인 로마군을 돌아봤다.

본인들을 지휘하던 지휘관이 도망갔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면서 고트족과 싸우고 있었다.

어느 하나 포기하고 자리를 벗어난다거나 겁을 집어먹고서 도망가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단단한 강철 모루처럼 자리를 지키면서 몰려드는 고트족 병사들의 공세를 견뎌냈다.

“단단한 진형이군.”

“아군의 피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차라리 항복을 권유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항복을 권유한다고 항복할 이들이 아니야.”

알라리크는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이윽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하면 됐다. 퇴로를 열어줘.”

“그랬다가는 스틸리코가···.”

“스틸리코는 병사들만 남기고 도망쳤어.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주군···. 아무리 그래도 지금 스틸리코의 주력군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해가 너무 커.”

“감수할만한 피해입니다. 지금 저들이 로마에 남은 마지막 정예병들이 아닙니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부하의 말에 알라리크가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리우스가 내려오는 건 알고서 하는 말인가?”

“그렇기에 하는 말입니다. 마리우스가 스틸리코의 병사들과 합류하기 전에 처리해야 합니다.”

“자네 말에도 일리 있군···.”

알라리크는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다시금 각오를 다지면서 말했다.

“최대한 아군의 피해를 줄여보게나.”

“노력해보겠습니다.”

******

일부 병사들과 부관의 호위를 받으면서 로마로 도망친 스틸리코의 눈앞에는 굳게 닫힌 성문이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뭣들 하는가! 스틸리코 장군께서 돌아오셨다. 문을 열어라!”

“그건 못 해 드리겠습니다.”

“이노켄티우스···.”

현 로마의 교황인 성 이노켄티우스 1세가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스틸리코의 두 눈썹이 요동쳤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 빨리 문을 여시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노켄티우스! 지난 세월 동안 장군께서 그대에게 베푼 은혜를 잊으셨다는 말이오?!”

“그래봤자 스틸리코 장군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이단이 아닙니까?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요.”

“뭐? 이단!! 이···.”

“공공연히 아리우스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마리우스를 사위로 두고 있으니, 스틸리코 장군 또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이노켄티우스의 말에 스틸리코가 대로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내 사위가 아리우스파인 것과 내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그리고 마리우스가 아리우스파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냔 말이야!”

“게르마니아에 만연한 아리우스주의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증거입니다. 그나저나 여기서 이리 시간을 보내실 수는 없을 텐데요?”

이노켄티우스는 지팡이로 저 멀리 달려오는 아타울프와 기병대를 가르키면서 말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너 이 자식···.”

“장군, 적이 근처까지 쫓아왔습니다. 차라리 북쪽으로 가셔서 마리우스와 합류하시지요!”

“...알겠다.”

스틸리코는 성벽 위에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노켄티우스를 한번 노려보고서는 말을 몰아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마리우스는 미친 듯이 가도를 내달렸다.

중무장한 중기병들이 한꺼번에 내달리는 탓에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울려댔고 귀가 저릿저릿 해질 정도의 소음에 귀가 먹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난 5일간 쉬지도 없이 가도를 달려가던 게르마니아 기병대의 앞에 익숙한 인물이 나타났다.

“저게 뭐야?”

언덕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사람 형체에 마리우스가 손을 들어서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게르마니아 기병대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가도 한복판에 멈춰 섰다.

말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투레질을 했고 병사들 또한 지친 몸을 달래고자 수통을 꺼내서 안에 든 물로 목을 축였다.

“전하, 무언가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저 앞에 이상한 사람 형체가 보이는데···. 매복일 수도 있어서 일단 멈춘 거야.”

“아, 그렇군요···. 흐음···.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제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저기 말에 탄 사람 형태가···. 어?”

마리우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잔뜩 집중했다.

아른거리는 형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 형태가 명확해지기 시작했고, 익숙한 얼굴을 본 마리우스가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장인어른이잖아.”

“예? 스틸리코 장군이란 말씀입니까?”

“그래, 다들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어.”

“손님이라면···. 스틸리코 장군이겠군요.”

“아니, 그 뒤에 쫓아오는 이상한 놈들 말한 건데?”

마리우스의 말대로 스틸리코는 아타울프가 이끄는 기병대에 쫓기는 중이었다.

그를 호위하던 병사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스틸리코 홀로 온 힘을 다해서 도망치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리우스가 검을 뽑아 들면서는 말했다.

“아무래도 장인어른이 진 모양이로군.”

“으음···. 스틸리코 장군이 패하셨을 줄···.”

마리우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일단 장인어른을 구하고 봐야겠지···. 모두 날 따라와라. 내가 선두에 서겠다!”

그렇게 소리친 마리우스가 앞으로 뛰쳐나가니, 뒤에서 잠시 쉬고 있던 게르마니아 기병대가 말고삐를 틀어쥐면서 그 뒤를 따랐다.

하나같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기다란 창을 옆구리에 끼고서는 고트족 기병대를 향해서 돌진하자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아타울프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게르마니아군이 벌써···!”

아타울프는 다급하게 말고삐를 뒤로 잡아당기면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후퇴! 전원 후퇴한다.! 저 이상의 추격은 위험하다!”

“이미 늦었다! 죽어라. 야만인!”

“지금 누구보고 야만인이라는···. 어억!”

아타울프는 마리우스가 힘껏 휘두른 검을 자신의 검으로 막으려고 했지만, 마리우스의 검이 아타울프의 검과 맞부딪히는 순간 대번에 두 동강이 나버리며 아타울프의 오른쪽 어깨에 큰 상처를 입혔다.

“장군!”

“장군을 구해라!”

“게르마니아 기병대 돌격 앞으로!”

아타울프가 휘청거리자 고트족 기병대가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기 시작했고 게르마니아 기병대 또한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면서 두 무리의 부대가 충돌했다.

게르마니아 기병대의 날카로운 창끝은 인정사정도 없이 고트족 기병대를 후벼팠다.

고트족은 한 번의 충돌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마리우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 기병대는 고작해야 다섯 정도가 다쳤을 뿐이었다.

그만큼 전투는 일방적이었고 고트족 기병대는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크윽···. 후퇴한다. 뒤로 물러나!”

“전원 후퇴!”

결국, 병사들이 일방적으로 패하는 것을 본 아타울프가 퇴각을 명령함으로써 짧은 전투가 끝이 났다.

마리우스는 잔뜩 지친 스틸리코에 다가가 수통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으음···. 이런 곳에서 자네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하하하, 저도 이런 곳에서 스틸리코 장군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목이 말랐던지 수통을 받아들고서는 허겁지겁 물을 마시던 스틸리코는 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쯧···. 일이 이렇게 돼버릴 줄···.”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마리우스의 물음에 스틸리코가 침울한 표정으로 로마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처음에 올리브리우스의 부당함에 맞서서 봉기했던 일과 올리브리우스를 쫓아낸 일, 그리고 올리브리우스의 대군을 격파했던 일까지 말한 스틸리코는 이후 허탈한 목소리로 알라리크에게 패한 일까지 설명했다.

“전부 내 실수였어. 차라리 올리브리우스의 병사들을 뒷전으로 미뤄놓고 알라리크부터 상대했다면, 올리브리우스의 병사들은 스스로 무너졌을 텐데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요. 너무 상심하지는 마십시오.”

“후우···. 나도 늙긴 늙은 모양이야.”

스틸리코는 수척한 손으로 구불구불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리우스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늙긴 하셨죠.”

“에잉, 쯧···. 이럴 때는 아직 정정하십니다. 라고 해주는 게 맞지 않는가?”

“에이···. 늙었으니 늙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은퇴하시고 집에서 손주나 돌보시지요.”

“허허···. 자네가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구먼.”

“게르마니아를 제게 맡긴 시점에서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리우스는 웃고 있었지만, 그 말은 카이사르를 찌른 브루투스의 단검만큼이나 날카로웠다.

“자네가 이렇게나 빨리 게르마니아를 장악할 줄 알았으면, 그곳에 보내지 않았을걸세.”

“늘상 드는 생각이지만, 장인어른께서는 군략으로는 지금의 로마에서 제일이시지만 정치적인 안목에서는 저보다 밀리는 것 같습니다.”

“으음···. 쉽게 반박할 수가 없군.”

마리우스는 스틸리코가 주저앉아있는 바위 옆에 그루터기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제가 로마로 가게 되면은 많은 것이 바뀔 겁니다.”

“그렇겠지, 자네도 이날만을 기다리면서 칼을 갈고 있지 않았는가?”

“음···.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가 그렇게나 천방지축으로 날뛰는데, 내가 왜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스틸리코의 말에 마리우스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군요.”

“그런 거지.”

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없이 서로를 마주 봤다.

늙은 스틸리코는 묵묵히 손을 내밀었고 마리우스는 그 손을 잡으면서 둘은 가볍게 악수를 했다.

“호노리우스는 어찌할 셈인가.”

“그쪽도 이미 손을 써뒀습니다.”

“철저하구먼.”

“전부 장인어른께 배운 것이지요.”

“그런가? 하하하.”

스틸리코는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던 투구 끈을 풀어내고서는 무겁기만 한 투구를 바닥에 내던지고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그래, 이렇게나 시원하고 편안한 것을.

그동안에는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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