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디펜스 - 6
스틸리코와 알라리크는 로마 평원에서 끝나지 않을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알라리크의 부대건 스틸리코의 부대건 간에 둘 다 식량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둘 다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알라리크야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서 군영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었지만.
올리브리우스를 격파한 스틸리코는 언제 올지 모를 마리우스를 기다릴 뿐이었다.
“알라리크가 고생이 많군.”
“악으로 버티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법이지.”
식량이 조금 부족하기는 했으나 스틸리코는 최대한 여유로움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어차피 정 급하면 로마에서 강제로 징수해올 수도 있었기에 알라리크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반면에 알라리크는?
그런거 없었다.
이미 스틸리코가 인근의 민가들까지 전부 로마 시내로 소개한 탓에 얻을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제법 먼 거리까지 돌아다녀 봤지만···. 사람은커녕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도 찾지 못했습니다.”
“스틸리코···. 이렇게 나오시겠다?”
“형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무리 식량을 아낀다고는 해도···. 일주일이 고비입니다.”
“일주일···. 일주일이라···.”
“이것도 하루에 한 끼씩 배급해야 일주일입니다.”
알라리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정녕 신은 우리를 버렸단 말인가···.”
“형님, 기운을 차리시지요. 분명히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것입니다.”
“허허···. 기회는 무슨···. 매번 이런 식이지 않았느냐? 항상 내 앞에는 고난만이 가득했지, 조금 잘나가고 싶으면은 위기가 찾아와서 그동안 이뤄놓은 것들을 앗아가고 말이야.”
“형님···.”
“그렇게 내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비디메르를 보내고, 일궈놓았던 모든 세력을 올리브리우스가 토막내어 가져갔지.”
알라리크는 잠시 자신의 삶을 돌아봤다.
초원에서 태어나서 초원에서 자란 그에게 있어 세상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었다.
성공의 보상은 손에든 모래알처럼 빠져나갔고, 언제나 실패의 쓴맛만이 가득한 삶이었다.
“그런 삶이었지.”
“형님, 인제 와서 모두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아직 형님을 따르고 있는 부하들을 생각하셔서라도 마음을 굳건히 하시지요.”
“아타울프, 내가 포기한 적이 있더냐? 매사에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다시금 일어나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왜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게 된 거지?”
마리우스.
그놈 때문이었다.
마리우스와 엮인 뒤로는 모든 일이 어그러지고 뭉개지기 일쑤였다.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비디메르또한 마리우스의 손에 비명에 가버렸고 그가 일군 세력을 정면으로 박살 낸 것 또한 마리우스였다.
이제 알라리크에게 남은 것은 증오와 복수심.
그것뿐이었다.
알라리크는 말없이 검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자리에 앉아서 과거나 곱씹으면서 투정 부리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그는 부족민들의 지지로 방패 위에 선 자이자 고트족의 왕 알라리크가 아니었는가?
그래, 몰락하기는 했어도 그는 여전히 왕이었다.
“아타울프, 지금 병사들은 몇이나 남았느냐?.”
“보병이 35000 정도에 기병이 4000쯤 될 겁니다.”
“그럼 충분하지.”
“무엇이 말입니까?”
“남은 식량을 병사들에 전부 나눠줘라.”
“예···? 그렇게 되면···.”
아타울프가 당황하면서 말했지만, 알라리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말대로 해.”
“...나가시는 겁니까?”
“따라오겠느냐 아타울프?”
“형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저도 가야지요.”
아타울프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들어 올리자, 알라리크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초원에서 태어난 이가 로마까지 구경해봤으니 썩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안 그렇나?”
“에이···. 형님, 죽으러 나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비장하게 말씀하십니까?”
“죽으러 나간다고.? 하하···. 틀렸다 아타울프.”
“예?”
알라리크의 두 눈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죽이러 가는 거지.”
“!!!”
“스틸리코 놈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라고 우리가 싸움을 준비한다고 알려!”
“예, 형님.”
돌연 알라리크 군영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동물을 잡기라도 하는 듯이 동물들의 소리로 시끄러워지면서 부산스러워졌다.
이를 지켜보던 스틸리코는 슬슬 전투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닫고서는 미소를 지었다.
“결국, 참다 못해서 뛰쳐나오는군.”
“저희도 준비해야지 않겠습니까?”
“준비해야지. 병사들을 준비시키게. 오늘은 참으로 긴 하루가 될 것 같으니, 다들 든든하게 먹이는 것도 잊지 말고.”
“예, 장군.”
평원에서 대치 중이던 두 부대는 오랜만에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우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병사들은 그동안에 먹던 맛없는 짬밥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맛보는 제대로 된 음식에 기뻐하면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모든 즐거운 일과 슬픈 일에는 끝이 있듯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고 두 군데는 로마 인근의 평원에 모였다.
스산한 바람이 병사들의 사이를 후벼 파면서 몸을 들썩이게 했고, 내리쬐는 태양 빛에 감옥과 무기들이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양측 모두 몇 번의 전투를 경험해본 정예병들이었지만 긴장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는지 저마다 식은땀을 흘리거나 긴장감에 속을 비워내고 있었다.
“알라리크가 기세게 검을 뽑기는 했어도 그걸 휘두를만한 용기는 없는 모양이로군.”
“이미 장군께 몇 번이고 패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겁을 먹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거기에다가 알라리크에게 남은 것은 저 병사들뿐이니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라도 지켜보겠다고 더 소극적으로 움직이겠···.”
뿌우우우-
스틸리코의 예상과는 다르게 알라리크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스틸리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면서 두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미친놈···. 전부 다 버리기라도 할 셈인가···!”
“손에 쥔 것은 언젠가 흘러내려 가기 마련이다. 아끼다 보면 쓸모없어질 뿐······.”
알라리크는 침착하게 병사들을 지휘했다.
병력을 셋으로 나눈 알라리크는 중앙의 군대를 얇게 배치하면서도 양익을 두텁게 하는 독특한 포진을 시도했다.
스틸리코보다 병력이 더 많았기에 단숨에 적의 양 날개를 꺾고서는 포위하여 한 번에 전투를 끝낼 생각이었다.
물론 스틸리코도 알라리크의 생각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을 타개할만한 기병이 없었기에 그가 꺼내 들 수 있는 카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도 나간다.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라!”
“장군, 역으로 공세에 나신다는 말씀입니까?”
“알아들었으면 빨리 신호를 보내라. 이번 싸움에서는 조금이라도 먼저 움직이는 쪽이 유리해!”
스틸리코는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려는 알라리크에게 맞서서 병사들을 출진시켰다.
적의 연약한 중앙을 돌파해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알라리크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본인이 직접 중군을 지휘했다.
“적이 몰려오는군.”
“여, 역시 주군의 예상대로입니다···!”
알라리크는 눈을 돌려서 덜덜 떨고 있는 부하에게 물었다.
“겁이라도 먹은 건가? 몸을 많이 떠는군.”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주군께서 제 곁에서 함께하시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겁먹은 것도 이해하네, 그렇지만 자네가 흔들리면 병사들도 흔들리는 것을 명심하게.”
“제, 제가 언제···.”
“그렇다면 다행이고.”
알라리크는 피식 웃으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긴장한 탓에 움츠러든 병사들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들이어서! 우리는 초원에서 태어나 문명의 중심지라는 로마까지 왔다. 이곳까지 오면서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우리는 살아남았고 결국 로마 땅을 밟았다!”
알라리크는 머리 위로 든 검을 천천히 내리면서 전방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스틸리코의 병사들을 가르키며 말했다.
“자, 이제 고지가 코앞이다. 그동안 우리를 억압하고 핍박하던 로마인들에게 우리의 방식을 보여줄 차례다! 가자 형제들이여! 오늘 로마는 불타오르고 우리의 이름을 그 성벽에 새길 것이다!”
“와아아아-!”
“전원 전투-준비!”
알라리크의 우렁찬 목소리에 병사들이 자세를 잡고서는 방패와 무기를 앞세웠다.
전장에 피와 살로 이루어진 벽이 세워졌지만, 로마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전진했다.
“장군, 놈들의 기세가 범상치가 않습니다.”
“언제는 만만했던가? 좌우익의 병사들이 흔들리지나 않게 잘 다독이게나.”
“알겠습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부관이 병사들을 지휘하러 떠나자 스틸리코는 뒤에서 대기 중이던 궁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군 보병대와 바짝 붙어서 직사로 사격하여 놈들을 괴롭힌다. 전원 사격개시!”
스틸리코의 명령대로 로마군 궁수들은 보병 방진 뒤에 바짝 붙어서는 틈새로 고개를 빼꼼 내리면서 연신 화살을 쏘아댔다.
얼굴에 있는 점도 세밀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기에 시위를 떠난 화살은 목표로 했던 곳에 자석처럼 빨려 들어갔다.
“악! 내 눈이···!”
“모두 머리 숙이고 방패 단단히 잡아!”
어마어마한 화살이 고트족 병사들에게 쏟아졌지만, 병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곧이어 알라리크의 진형에서도 화살이 날아들면서 로마군을 덮쳤고 지지부진한 사격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악!”
“아아악!”
“크으···.”
곳곳에서 비명과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왔지만, 스틸리코나 알라리크 둘 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묵묵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먼저 사격전을 시작했던 로마군의 화살이 떨어져 버리자 이번에는 로마군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틸리코는 한숨을 내쉬면서 돌격명령을 내렸다.
“중군 돌격해서 적의 깃발을 가져와라.”
“부대, 돌격 앞으로!”
“가자!”
로마군은 그동안 훈련받은 대로 한 몸이 되어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로마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기병대를 내보내라. 적들을 귀찮게 해.”
알라리크는 꼭꼭 숨겨놓았던 기병대를 내보내면서 로마군의 방진을 두들기게 했다.
궁기병이 대부분인 알라리크의 기병대는 연신 방진 사이의 빈틈으로 화살을 쏘아대면서 로마군을 뒤흔들려 했지만, 이미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단단한 로마군의 진형을 깨트릴 수는 없었다.
“온다.!”
“모두 충격에 대비해!”
그리고 로마군이 고트족 병사들의 방진에 들이박으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방진끼리의 싸움에서는 어느 쪽이건 간에 둘의 실력이 비슷하다면 극적인 승리를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미식축구의 라인 싸움처럼 먼저 밀리는 쪽이 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악을 써가면서 자리를 지켰고 최대한 침착하게 배운 대로 행동하면서 차근차근 적의 숨통을 끊어놓을 뿐이었다.
한 번에 한 놈씩 말이다.
이런 싸움에 능숙하면서도 숫자가 많은 로마군이 조금 앞서고 있었지만, 알라리크의 병사들은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양익의 병사들이 합류할 시간을 벌었고, 기병대 또한 신나게 로마군을 두들기면서 그들을 괴롭혔다.
전장의 상황이 점점 교착되어 갈 때쯤.
돌연 로마군의 뒤편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오더니, 알라리크의 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후···. 역시 그렇게까지 오래 버티지는 못했군.”
뒤편에 알라리크의 병사들이 나타나자 스틸리코는 침음성을 흘리면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이대로 병사들을 후퇴시킬 것인지, 아니면 밀어붙여서 알라리크와 끝을 볼 것인지···.
선택은 스틸리코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