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187)

로마 디펜스 - 4

스틸리코는 남부에서 몰려오는 올리브리우스 군보다는 플로렌스에서 몰려오는 알라리크의 고트족 병사들을 더 위협적으로 판단했다.

비록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도 여러 전투를 거친 정예병이었고 오랫동안 알라리크를 따라다닌 만큼 유대감도 남달랐다.

반면에 올리브리우스가 급하게 끌어모은 군대는 제대로 된 장비를 받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징집병들뿐이었다.

비록 그 숫자는 많았지만, 강제로 끌려온 탓에 행군 중에도 탈영병이 발생할 만큼 군율이 엉망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눈치챈 스틸리코는 단숨에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천천히 올리브리우스의 군대를 유인하면서 몇 번이나 맞서 싸웠다.

“으음···. 도저히 못 버티겠군. 후퇴한다.!”

“전군 후퇴!”

스틸리코는 올리브리우스의 부대와 맞서 싸우면서도 몇 번이고 일부러 패퇴하는척하면서 도망치자 이를 본 올리브리우스가 흥분한 채로 친위대장에게 말했다.

“봐라! 스틸리코가 도망치고 있다. 이제 승기는 내 쪽으로 넘어왔다. 이제 되었어!”

“폐하, 무언가 이상합니다. 스틸리코가 저리 무력하게 도망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허허···. 자네는 걱정도 많군. 스틸리코의 군재가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식량을 통제당했는데 어떻게 힘을 쓰겠나? 이 세상에 굶으면서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은 없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너무 이상합니다. 제대로 무장하지도 못한 징집병들에게 스틸리코의 정예병들이 밀리는 것은···.”

“허허···. 자네도 참 걱정이 많다니까 그러네.”

올리브리우스는 스틸리코가 무엇을 꾸미고 있을 줄 꿈에도 상상치 못하고 있었다.

올리브리우스의 정치적인 감각은 제법 뛰어났지만, 군사적인 능력은 스틸리코는커녕 그의 휘하에 있는 친위대장만도 못했다.

스틸리코가 일부러 패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의 계획이 제대로 맞아떨어져서 스틸리코 휘하의 병사들이 잔뜩 지쳐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올리브리우스는 신나게 군대를 이끌고서 스틸리코의 뒤를 쫓았고, 스틸리코는 아슬아슬하게 잡힐 듯 말듯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올리브리우스를 로마 인근의 평원까지 인도했다.

로마 인근까지 도착한 올리브리우스는 잔뜩 흥분하여 병사들에게 공격을 지시했으나 수십 킬로를 쉼 없이 행군한 올리브리우스의 징집병들은 잔뜩 지친 탓에 행군 중에 뒤로 쳐지거나 평원에 도착하고 완전히 퍼져버렸다.

“에잇···. 이런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폐하, 병사들이 너무 지쳐버렸습니다. 더 이상의 전투나 행군은 무리입니다.”

“쯧···. 앞으로 조금만 더했으면 스틸리코를 사로잡을 수 있었거늘···. 아쉽군.”

“폐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쉬어야 할 것 같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후우···. 로마를 목전에 두고 이런 곳에서 멈춰서야 하다니···. 참으로 아쉽군.”

“내일이면 로마를 탈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지···.”

올리브리우스의 병사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서 군영을 꾸렸고, 군영을 꾸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곯아떨어져 버렸다.

보초들 또한 낮에 있었던 연이은 전투와 행군 탓에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장군, 놈들이 모두 곯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요 며칠간 신나게 달려왔으니 지칠 만도 하지···. 병사들은 준비되었겠지?”

“예, 인근의 민가에서 잘 숨어있을 겁니다.”

“그래···. 정확히 두 시간 뒤에 놈들을 덮칠 테니 병사들을 불러오도록.”

그리고 그들이 가장 지치고 힘들 무렵에 스틸리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을 은은히 비춰주던 달빛도 사라지고 태양도 떠오르지 않은 가장 어두운 밤에 스틸리코가 병사들을 이끌고서 올리브리우스의 군영을 습격했다.

“적이다! 적의 습격이다!”

“굳이 전부 죽일 필요는 없다! 저항하는 녀석들만 죽이고, 올리브리우스를 찾아라!”

“모두 침착하게 자리를 지켜라!”

스틸리코의 예상대로 습격은 성공적이었다.

피곤함에 찌들어있던 올리브리우스의 병사들은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밤중에 쳐들어온 스틸리코의 습격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버리기 일쑤였다.

그나마 올리브리우스 휘하에서 정예병들이라 부를만한 친위대가 나서서 도망치는 징집병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상황은 그들이 나선다고 해결될만한 일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폐하,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모두 전멸입니다!”

“이,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럴 수가···.”

“뭣들 하는가! 어서 폐하를 모시지 않고!”

“내, 내 병사들이···. 허···.”

올리브리우스는 불타오르는 군영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친위대 병사들의 손에 짐짝처럼 끌려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스틸리코의 병사들은 불타는 군영을 오가면서 올리브리우스의 미련을 쳐내고 있었다.

곳곳에서 비명과 슬픔에 잠긴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에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포로들과 잿더미가 된 군영만 남아있었다.

“올리브리우스는?”

“놓쳤습니다···. 뭐가 그리 빠른 것인지···.”

“흠···. 아쉽군. 볼일을 보고 나서 뒤처리를 안 한 것 같은 찝찝함이 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병사들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스틸리코의 질문에 부관이 활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승입니다. 올리브리우스가 이끌던 병사들의 대부분이 장비들도 내팽개치고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부상자와 전사자를 합쳐도 백 명이 채 안 됩니다.”

그야말로 대승이었다.

올리브리우스가 급하게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그 숫자는 많았지만, 정작 훈련도는 바닥을 기고 있었고 사기 또한 바닥이었다.

이런 병사들을 데리고서 나폴리에서 로마까지 열흘이나 되는 거리를 행군하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는데, 이런 병사들로 전투까지 치렀으니 통제가 될 리가 없었지만, 올리브리우스는 마리우스와 합류하기 위해서 무리했고 스틸리코는 이점을 예리하게 찔렀다.

그 결과 올리브리우스는 목숨만 건진 채로 도주했고, 스틸리코는 자신의 건재함을 이탈리아 전역에 알리는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이제 알라리크의 차례로군요.”

“그래, 놈이 내려오기 전에 병력을 가다듬고 올리브리우스가 버리고 간 물자들을 챙겨라···.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지.”

“알라리크가 과연 로마로 내려오겠습니까?”

“내려오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겠나?”

“그거야···. 장군께서 올리브리우스를 격파하셨으니, 이 소식을 듣고 나서도 로마로 올 수 있겠습니까?”

“하하···. 자네의 생각도 틀리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한 가지 큰 문제를 떠올리지는 못했군.”

“큰 문제라니요···?”

부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스틸리코가 검지를 피면서 말했다.

“마리우스.”

“아···.”

“지금 알라리크는 뒤에는 마리우스가 있고, 앞에는 내가 있는 상황이야···. 자네라면은 누구를 선택하겠나?”

스틸리코의 말처럼 북쪽에서는 마리우스가 내려오고 있었고 남쪽에서 올라오던 그의 유일한 아군인 올리브리우스는 스틸리코의 손에 박살 난지라 포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자체가 그의 감옥처럼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니 알라리크가 살아날 방법은 그나마 만만한 스틸리코와 싸워서 이기는 것뿐이었다.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올리브리우스가 스틸리코한테 깨졌다고?”

한창 볼로냐를 지나서 본격적으로 플로렌스로 들어가는 길이던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올리브리우스가 박살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크게 당황했다.

“아니, 아니···. 왜?”

“야습한 번에 부대가 와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왜!!”

마리우스는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을 느끼고서는 머리를 싸매고 있자 데키무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각하께서 이탈리아로 내려온다는 소식에 올리브리우스가 급하게 병사들을 끌어모아서 움직이다가 이 사달이 난 것 같습니다.”

“쯧쯧···. 장인어른과 둘이서 상잔하다가 둘이 같이 나가떨어지기를 원했는데···. 한쪽이 먼저 꼬꾸라져 버렸군.”

“그래도 알라리크가 플로렌스의 포위를 풀고 남하하고 있으니 그쪽에 기대를 걸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름대로 숫자도 많은 정예병이니···.”

데키무스의 말을 듣고 있던 마리우스가 알라리크라는 말에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허, 참···. 살다 보니 알라리크 놈에게 도움을 받는 날도 다 오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그 건은 알라리크에게 맡기고···. 플로렌스에 주둔 중인 콘스탄티우스는 어떤가?”

“콘스탄티우스는···.”

******

알라리크가 물러난 이후 콘스탄티우스는 플로렌스를 정비하고 남쪽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 포위 기간에 소모된 물자를 보충하고 쓸만한 병사들을 추리던 중에 마리우스가 볼로냐 인근까지 왔다는 소식에 소수의 병사만을 이끌고서 그를 마중 나온 상태였다.

“장군, 아무리 마리우스가 내려온다고는 하지만 장군께서 마중 나올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원래 급한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 법이야.”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리우스를 마중 나온 것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알라리크의 다음 목적지가 로마인 것 말인가?”

“그게 아니라···. 마리우스가 이곳으로 온다는 게 조금 이해가 가지를 않아서 말입니다.”

부관의 물음에 콘스탄티우스가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생각이로군. 그거야 스틸리코 장군께서 마리우스에게 연락을 넣어서 그런 게 아니겠나? 자네도 생각을 조금만 해보면은 알겠지만···.”

“압니다. 그런데 과연 올리브리우스도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남부에서 몸을 똬리 틀고 있던 올리브리우스가 갑자기 움직이고···. 거기에 맞춰서 마리우스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잠깐···. 뭐?”

부관의 말에 콘스탄티우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식으면서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 자네 말대로라면···. 올리브리우스가 급하게 병사들을 끌고 올라오는 이유가 마리우스와 합류하기 위함이라는 거군···.”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그래···. 아무런 증거는 없지만···. 굉장히 그럴듯한 말이로군···.”

콘스탄티우스의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잦기 시작하면서 산길 너머로 병사들을 이끄는 마리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마른침을 삼킨 콘스탄티우스는 조심스럽게 부관에게 물었다.

“지금 플로렌스에 있는 병사들과 물자들로 마리우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겠나···?”

“글쎄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럼 역으로 지금 데리고 있는 병사들로 마리우스를 공격하는 건 어떤가? 그건 가능하겠나?”

“글쎄요···. 몰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부관의 말에 콘스탄티우스의 두 눈이 좌우로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마리우스가 아군인지 적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몰려오는 마리우스를 상대할만한 수단도 없었다.

“장군···.”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는 일념 하나로 스틸리코의 밑에서 고생했던 일들과 북아프리카에서 길도의 반군과 싸우면서 보낸시간들···.

그리고 알라리크의 공격 속에서 플로렌스를 지키고자 고생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건 모두 로마를 위한 일이야.”

“예? 그게 무슨···.”

콘스탄티우스는 말에서 내리더니 무릎을 꿇고서는 허리춤에 있던 검을 풀고서는 두손으로 자신의 검을 마리우스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플로렌스에 주둔 중인 제 휘하 군단병들은 마리우스 전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장군!!”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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