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187)

로마 디펜스 - 3

갑작스러운 게르마니아의 침입이 있었지만, 갈리아의 시민들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처지에서는 윗대가리만 빠르게 바뀐 것일 뿐이었고, 자신들을 지배하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리우스를 환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적대하지도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르마니아 대추장 마리우스 전하! 저를 포함한 갈리아 전역의 군인과 시민들은 전하를 환영하는 바입니다!”

“어, 음···. 그래.”

생각과는 다르게 저자세로 나오는 갈리아 방위군단의 총 책임자인 코실리아누스의 모습에 오히려 마리우스가 당황했다.

그가 갈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던 것은 이탈리아로 진공하기 전에 후방을 안정화하겠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그의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지는 갈리아의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총독들을 빠르게 쳐내는 것으로 갈리아의 행정과 지휘체계를 마비시키고 나머지 잔당들을 휘몰아칠 생각이었는데, 머리가 사라지니 갈리아 주둔군은 뒤돌아보지 않고 항복했다.

“이렇게나 쉽게 무너질 줄 몰랐는데 말이야···.”

“저들로서는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들만 바뀌는 것이니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제···. 이 넓은 땅을 어떻게 다스리지···?”

후방을 안정화하려고 갈리아를 때리기는 했지만, 정작 이 땅을 지배할만한 능력은 없었다.

대충 이탈리아로 건너갈 징검다리쯤으로 생각했기에 몇몇 도시를 점령하고서는 병사를 보내서 그곳을 요새화하여 보급기지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일이 너무 잘 풀려버렸다.

일주일 만에 갈리아가 두 손을 들어버렸고, 갈리아 전역이 마리우스의 발밑에 굴복해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죠···?”

“일단은 내버려 두는 거로 하지···. 별다른 방법도 없지 않은가?”

“그럼 이대로 이탈리아로 가실 생각이시군요.”

“최대한 빨리 스틸리코를 제압하고 올리브리우스를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린 다음에···. 테오도시우스를 황제로 올린다.”

이제 막 옹알이를 하는 손자를 황제로 올린다는 마리우스의 말에 데키무스가 화들짝 놀라면서 물었다.

“각하, 이제야 옹알이를 시작한 어린아이를 황제로 올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각하께서 황제 자리에 오르시는 게 아니라요?!”

“내가 황제를 해서 무엇하겠나? 괜히 사방에서 반란이나 일어나면서 귀찮아지는 것보다는 그래도 혈통 상으로 문제없는 테오도시우스가 황제에 오르는 게 나아.”

“으음···.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허울뿐인 로마 황제보다는 든든한 게르마니아의 대추···. 아니, 대왕이 낫지.”

그동안 마리우스가 이탈리아 원정을 기획할 때부터 곰곰이 생각했던 것이 향후 이탈리아에 생길 권력 공백을 어떻게 메우느냐였다.

물론 마리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게르마니아 하나를 다스리는 것도 벅차고 힘든 마리우스에게는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다.

거기에 정통성이 떨어지는 마리우스가 무력으로 황좌를 찬탈할 시에 주변에서 터져 나올 반란들까지 생각해보면 차라리 호노리우스의 사생아이자 마리우스의 손자인 테오도시우스를 황제로 만들고 필요한 것만 그때그때 받아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때가 되면 데키무스 자네가 고생해줘야겠어.”

“제가 말입니까?”

“어린 테오도시우스 혼자 로마에 남겨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나.”

“그건 그렇지만···.”

“추잡하고 음험한 로마 원로원과 귀족들 사이에서 내 손자를 지켜줄 만한 사람은 자네뿐이야.”

“제가 살아있을 때 은퇴하는 건 무리겠군요.”

“하하하···. 내가 많이 챙겨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나!”

마리우스는 나름대로 위로라고 한 말이었지만, 앞으로 고생길이 활짝 열린 데키무스에게는 악덕 고용주의 횡포로 들릴 뿐이었다.

******

마리우스가 갈리아를 정복했다는 소식은 가장 먼저 올리브리우스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올리브리우스는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마리우스가 내 편을 들 줄 알았어!”

“마리우스가 폐하의 편에 섰다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마리우스가 갈리아를 공격해서 스틸리코의 손발을 잘라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

“마리우스가 갈리아를 공격한 것이 왜 스틸리코의 팔다리를 자른 것이 되는 겁니까?”

친위대장의 질문에 올리브리우스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지금의 갈리아는 스틸리코의 개인 영지나 다름없어진 지 조금 오래되었네, 스틸리코가 정권을 잡은 초창기부터 갈리아에 친화적인 정책을 편 탓에 그런 것이겠지···. 지금 그의 휘하에 있는 군단병들의 대부분이 갈리아 출신이 아닌가?”

“아, 그러면 마리우스 각하께서 이를 알아채시고 갈리아를 먼저 공격하셔서 스틸리코를 지원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로군요!”

“바로 그거지! 이제 스틸리코 놈은 완전히 새장 속에 갇힌 신세가 돼버린 셈이야.”

“그럼 지금이야말로 스틸리코를 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놈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뒤를 쳐서 로마를 되찾아야 합니다!”

친위대장의 말에 올리브리우스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명령을 내렸다.

“지금 동원 가능한 병사들을 모두 끌어모아서 로마로 진군해라! 빼앗긴 로마를 되찾는 것이다!”

올리브리우스의 명령에 나폴리와 이탈리아 남부에서 끌어모은 수만 명의 병사가 일제히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갑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창과 방패를 든 징집병이 대다수였지만, 어찌 되었건 수만 명이 군집한 그 위세는 대단하였다.

정작 마리우스의 갈리아 침공 소식을 들은 스틸리코는 올리브리우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크게 기뻐하면서 무릎을 '탁' 치고 있었다.

“역시 마리우스로군.”

“예? 지금 마리우스 각하께서 무단으로 갈리아를 공격하신 게 아닙니까?”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부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스틸리코에 묻자 스틸리코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갈리아에서의 내 영향력을 없애버리겠다고 갈리아 총독으로 자기 사람들만 앉혀놓은 것을 기억하느냐?”

“아···. 그랬었지요.”

“그러다 보니 갈리아는 점점 올리브리우스 놈의 손아귀에 굴러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리우스가 정확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총독 놈들만 죽이지 않았더냐?”

“아···. 듣고 보니 그렇군요.”

“이제 갈리아를 정리해서 후방을 튼튼하게 만들었으니, 우리는 마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들어올 때까지만 버티면 될 일이다.”

스틸리코는 지도를 펼쳐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올리브리우스의 병사들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알라리크의 병사들을 각각 가르치며 말했다.

“지금 올리브리우스는 마리우스가 우리와 합류하기 전에 로마를 공격해서 뺏을 생각인 것 같다.”

“으음···. 마리우스 각하께서 로마로 오시기 전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겠습니까?”

“로마는 지키기 어려운 땅이야. 지금 식량도 모자란 상황에서는 성안에 틀어박혀 싸우기보다는···.”

스틸리코는 로마 인근에 있는 평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한 번의 회전으로 알라리크와 올리브리우스의 군대를 박살 내고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준다.”

“적은 우리의 다섯 배가 넘습니다. 그런데도 평원에서 회전을 벌이시겠다는 겁니까?”

“적의 숫자가 많기는 해도 질적인 측면에서는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단련된 내 병사들이 더 뛰어나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성안에서 마리우스 각하와 게르마니아 병사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될까요?”

부관의 말에 스틸리코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마리우스가 이탈리아 정국을 주도하게 될 텐데···. 그렇게 놔둘 수야 없는 노릇이지.”

스틸리코는 황제와 친하게 지내면서 은근슬쩍 영향력을 넓히던 마리우스를 험지 중의 험지인 게르마니아로 보내고 나서는 반쯤은 잊고 지냈다.

그동안 로마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터져 나오면서 근근이 현상 유지를 할 뿐이었는데, 정작 불모지였던 게르마니아는 마리우스의 지도하에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로마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틸리코는 로마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알게 모르게 마리우스를 견제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나 견제하였음에도 마리우스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서 세력을 일궈냈고 결국 오늘에 이르러서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로마를 향해 오는 중이었다.

이대로 속절없이 마리우스의 도움으로 올리브리우스를 처리한다면, 로마는 마리우스의 손에 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스틸리코는 조금 무리하더라도 로마에서의 공방전이 아닌 평원에서의 회전을 택한 것이었다.

스틸리코의 명령이 떨어지자 로마에 주둔 중이던 갈리아 군단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전투를 준비했으며, 플로렌스에 주둔 중이던 콘스탄티우스도 스틸리코로부터 한가지 명령을 받게 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라리크의 남하 속도를 늦추라는군···. 이게 말이야 쉽지···.”

“장군, 알라리크와 그 패거리들은 굶주리고 지친 탓에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기 힘들 것입니다. 기병 오백 명 정도만 있다면 놈들을 괴롭혀줄 수 있습니다!”

“식량이 모자라서 있던 말들도 전부 도살한 지가 언제인데 기병 타령을 하고 있나?”

“아···. 죄송합니다.”

“후우···. 스틸리코 장군께서도 너무 하시는군.”

콘스탄티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투정을 부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군인이었고 스틸리코는 그의 상관이었다.

그렇기에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간단한 일이었지만, 지금의 로마에는 이 정도의 일조차 하지 못하는 머저리들이 넘쳐나지 않는가.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병사가 얼마나 되지?”

“음···. 사천 명 정도가 최선일 것입니다.”

“사천 명이라···. 일단은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고, 꼭 필요한 장비들과 식량들만 챙겨서 이동한다.”

“최소한의 장비와 식량이라면···?”

콘스탄티우스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모포 한 장에 무기와 갑옷, 그리고 약간의 부켈름과 훈제청어 정도만 챙기라고 해.”

“텐트도 없이 말입니까···? 진지구축용 연장은요?”

“모포 한 장으로 해결한다.”

******

스틸리코와 올리브리우스가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마리우스는 게르마니아의 병사들과 새롭게 합류한 갈리아 방위군을 데리고서 알프스를 넘는 중이었다.

“굳이 알프스를 넘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니발도 이곳을 통해서 이탈리아로 들어갔지.”

“아니, 한니발이 왜 나옵니까···.”

“그만큼 대규모의 병사들을 은밀하게 움직이기에는 알프스만 한 곳이 없다는 뜻이지.”

“으음···.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로마의 모든 시민이 장군께서 이탈리아로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언제 들어갈지는 모르잖아.”

마리우스는 씩 웃으면서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는 플로렌스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이들이 우리의 적이다. 저항하는 놈들은 처리하고, 항복하는 놈들은 받아들여.”

“첫 번째 표적은 플로렌스가 되겠군요.”

“그래, 콘스탄티우스가 우리를 아군으로 생각하고 문을 열어줬을 때···. 단숨에 도시를 점령하고 로마까지 내려간다.”

“그다음에 스틸리코를 붙잡고, 그다음은 올리브리우스겠군요.”

“잘만하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탈리아를 평정할 수 있겠지.”

마리우스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데키무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각하께서 게르마니아로 쫓겨난 지 어느덧 13년쯤 되었군요···. 그때는 저와 각하 단둘이었지요.”

“데키무스, 내가 뭐랬나? 내가 분명히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리고 이제 드디어 돌아왔지.”

마리우스는 뒤를 돌아서 알프스 너머의 이탈리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탈리아의 시민들이여. 내가 돌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