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만악의 근원 - 3
마리우스의 집무실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한 명은 게르마니아의 주인이자 이 방의 주인인 마리우스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예비사위이자, 반달족 족장인 고디기젤의 둘째 아들 가이세리크였다.
가이세리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마리우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마리우스는 근엄한 표정으로 가이세리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이세리크.”
“예, 전하···.”
“아그리피넨시스까지는 무슨 일로 왔는고.”
“아, 그것이···. 아버지께서 전하께 전해드리라고 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네 아버지라면···. 고디기젤이 아닌가? 그 친구가 나한테 전해줄 게 있다고?”
가이세리크가 신호를 보내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그의 노예가 들어와서 짐을 풀어놓았다.
“으음···. 장신구로군···?”
투박하지만 제법 봐줄 만한 황금 장신구였다.
이걸 왜 주냐는 듯이 마리우스가 가이세리크를 바라보니, 그가 침착하게 답했다.
“그···. 아버지께서 신부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뭐?”
마리우스는 투박한 장신구를 돌아보고서는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게 가이세리크.”
“예, 전하.”
“지금 내 딸이 몇 살인인지는 알겠지?”
“서너 살쯤 된다고···.”
“후우···. 그럼 자네와 결혼하려면 몇 년이 필요하겠나? 최소로 따졌을 때 말이야.”
“대략 십 년 정도···?”
가이세리크의 말에 마리우스의 얼굴이 돌연 험악해지면서 두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듯이 이글거렸다.
“십 년 뒤면 내 딸이 열세 살쯤 되겠군. 그런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을 데려가겠다고?”
“그, 그러면 십오 년 정도···?”
가이세리크의 말에 마리우스가 탁자를 내리치고서는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열여덟?! 이런 날강도 같은 놈을 보았나!”
“저, 전하···. 십오 년 뒤면···. 저도 서른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나이대면 조금 이른 이들은 손주를 볼까 말까 한 나이기도 한데···.”
“그래서.”
“그때까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결혼을 조금 일찍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으음···.”
가이세리크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마리우스는 팔짱을 끼고서는 두 눈을 감으면서 화를 가라앉히고서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래도 열다섯이 넘을 때까지는 기다려주게나, 내가 딸과의 추억을 쌓을 시간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후우···. 그래, 결혼 전까지는 자네가 무슨 짓을 하건 상관없지만···.”
마리우스가 손에 힘을 주어 탁자 모서리를 뭉개버리자 가이세리크의 두 눈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결혼 후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책임지고 자네를 게르마니아에서 지워주겠네. 대충 한적한 늪지대에 던져버릴 거야.”
“며, 명심하겠습니다.”
“조금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 사위가 된다는 건 그런 뜻이네, 자네도 이해하겠지?”
“예, 전하···.”
“그래, 그럼 푹 쉬게.”
마리우스가 축객령을 내리자, 잔뜩 힘이 들어간 가이세리크가 쭈뼛거리면서 집무실을 나갔고, 뒤이어서 데키무스가 들어오며 물었다.
“각하, 가이세리크의 표정이 좋지 않던데···. 무슨 말을 하신 겁니까?”
데키무스의 질문에 마리우스가 태연하게 답했다.
“내 딸을 데려가려면 명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잘 알려주었지, 아마 몇 년 동안은 잊어버리지 않을걸세.”
“참, 대-당하십니다.”
“고맙네.”
데키무스는 피식 웃으면서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금광의 가동률을 대략 40~50% 정도를 보입니다. 연이어서 벌어진 전투로 광부들의 수급에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동원령을 해체했으니 곧 정상화되겠지?”
“으음···. 당장은 힘들 것 같습니다.”
“응? 어째서지.”
마리우스의 질문에 데키무스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
“지금 라인강 너머의 게르마니아 지역이 한창 개발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전쟁까지 겹치니, 사람은 없고 일자리가 많아졌습니다.”
“오호라···. 그러면 전체적인 임금이 오른 탓에 사람들이 힘들고 돈도 적게 주는 광산에는 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겠군.”
“맞습니다. 노천 탄광은 조금 수요가 있지만, 갱도로 들어가는 탄광이나 금광은 사람이 없어서 난리가 났습니다.”
데키무스의 말대로 지금의 게르마니아는 마리우스가 정권을 잡은 초창기부터 개발에 열중하면서 자신의 사탕무농장을 제외한 얼마 있지도 않은 대농장들을 때려잡으면서 농부들을 해방했다.
그리고 해방된 소작농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땅이 없는 이들은 광산에 배정하여 요 몇 년간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나, 올리브리우스의 식량 통제로 인한 불황과 연이은 전쟁에 그 기세가 꺾여버렸다.
그 모든 것이 어느 정도 끝난 지금에 와서는 사람들에게 농부와 광부를 제외한 다른 선택지가 늘어난 탓에 다들 힘들고 보수도 적은 광부 일을 하기 꺼렸다.
물론 게르마니아에 있는 모든 광산의 주인이자 관리자인 마리우스가 보수를 높였지만, 그런데도 청어잡이에는 미치지 못했고, 일의 강도를 낮춰봐도 도자기 공방이나 시멘트 공장보다는 한참이나 높았다.
“무슨 방법이 없겠나?”
“대략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나? 어디 말해보게.”
“첫째로는 광산 인근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하고, 직업변경의 자유를 박탈하는 겁니다.”
“대대손손 광부 일을 시키라는 것이군.”
“바로 그겁니다.”
마리우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두 번째는?”
“두 번째 방법으로는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끌어와서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나는 것으로는 전쟁포로와 범죄자들을 동원하는 게 있겠군요.”
“으음···. 그것도 괜찮은 것 같군.”
“다만, 이전만큼의 효율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애초에 스스로 원해서 온 게 아니니 적극적으로 일을 배우려 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둘의 차이가 심해봤자 얼마나 심하겠나.”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보다는 첫 번째 방법을 추천해 드립니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마리우스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일단 광산 건은 나중에 정하고 다른 것들부터 보고를 듣겠네, 그래도 되겠지?”
“그럼, 브리타니아의 상황에 대한 간략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브리타니아? 내가 언제부터 브리타니아까지 관리하게 된 거지? 거기는 관심 끊은 것 아닌가.”
“뭐···. 사루스가 그곳을 정리한 뒤로는 그라시아누스라는 이에게 임시로 브리타니아의 관리를 맡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앙에 새로운 총독을 보내 달라고 보고를 올리려고 했는데···.”
마리우스가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말했다.
“중앙이 난리가 나버렸군.”
“예, 스틸리코 장군이나 올리브리우스 폐하나 두 분 모두 자기 앞가림에 바빠서 브리타니아에 관한 일은 전적으로 각하께 맡긴다고 하시더군요.”
“쓸모없는 게 하나 더 늘어 나버렸잖아···.”
“으음···. 그래도 브리타니아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이 제법 양이 되는지라 향후 게르마니아의 식량 사정 개선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어느 정도길래 그러나.”
마리우스의 질문에 데키무스가 헛기침하며 대답했다.
“크흠···. 대충 아그리피넨시스의 시민들은 먹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걸 누구 코에 붙여?”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머리 아프니까 일단은 그것도 뒤로 미뤄두게.”
“그럼 마지막 보고입니다.”
마리우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좋은 소식이었으면 좋겠군.”
“좋은 소식이니 안심하시지요. 지난번에 동방으로 보낸 헨리쿠스 단돌로가 성공적으로 황궁에 들어가서 황제 폐하의 자금줄을 틀어쥐었답니다.”
“오···. 그래? 역시 그놈을 처음 봤을 때 간사한 것이 사람 하나 등쳐먹을 관상이었다니까?”
“흠흠···. 아무튼 헨리쿠스가 보내는 자금 덕분에 당장 노르만인들의 이주비용은 해결되었습니다.”
“그건 다행이로군···. 말 나온 김에 물어보는 건데, 그···. 다들 별일 없지?”
마리우스가 조심스레 물어보니, 데키무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되물었다.
“별일이라면···. 뭘 말씀하시는 것인지···?”
“지난번에 배 만든다고 하던 것 있잖아.”
“아, 그것 말이로군요.”
“그래, 지금쯤이면 다들 포기했겠지?”
마리우스가 내심 기대하면서 말했지만, 데키무스는 그의 기대를 철저히 부숴버리는 말을 했다.
“제가 듣기로는 색슨족은 먼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커다란 강철 배를 만들고 있고, 노르만인들은 아그리피넨시스의 대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학자들에게 배움을 청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노르만인들이 대도서관에는 무슨 일로?”
“학자들에게 배움을 청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
마리우스가 설명하라 드는듯한 표정으로 데키무스를 쏘아보니, 데키무스는 덤덤하게 답했다.
“처음에는 항해술을 배우려고 찾아갔다가, 학자들의 지식에 감탄하고서는 눌러앉아서 새로운 것들을 배운다고 합니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잖나.”
“예, 몇몇 소수의 인원만 그럴 뿐이고 나머지 부족민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적응하느라 바쁜 듯하더군요.”
“음···.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나?”
“굳이 건드려서 문제를 일으킬 바에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한 방법이지요.”
“그렇겠지···. 쓰으읍···. 어쩔 수 없군. 술이 원수야.”
마리우스다 싶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데키무스에 말했다.
“처음에 말했던 광부에 대한 건은 전적으로 자네에게 맡기겠네, 되도록 사람들을 새로 유입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보고···. 정 안 되겠다고 판단되면···.”
“첫 번째 방법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시민들에게 너무 과격하게 대하지는 말고 처우도 개선해주고 요구조건도 들어주고···. 최대한 부드럽게 가자고 부드럽게 응?”
“알겠습니다.”
데키무스의 대답에도 마리우스는 영 시원치 않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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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탈리아 내의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험악해져만 가고 있었다.
플로렌스를 포위한 알라리크는 몇 번이고 도시를 공격했으나, 번번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막혀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갑갑하군···. 이대로 남쪽으로 내려가자니 뒤통수가 간지럽고, 그렇다고 정리를 하고 가려고 해도 저리 끈질기게 나오니···.”
“형님, 차라리 병력을 둘로 나눕시다. 제가 여기서 콘스탄티우스를 막을 테니, 형님께서 내려가서 스틸리코와 대적하시지요.”
답답했던 아타울프가 말했으나, 알라리크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스틸리코는 내가 대적하기에는 조금 버거운 자다. 그와 상대하려면 수적인 우세라도 유지해야 해.”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씀입니까? 이대로 여기서 굶어 죽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아타울프의 말대로 지금 알라리크의 병사들은 올리브리우스의 식량 통제로 인해 굶주리고 있었다.
올리브리우스는 스틸리코를 견제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였지만, 정작 같은 곳에 갇힌 알라리크 또한 같이 고통받고 있었다.
이게 황제의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알라리크는 황제가 자신과 스틸리코의 힘을 동시에 빼놓으려는 술수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수단을 마련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해둔 게 있긴 합니다.”
“생각? 무슨 생각?”
아타울프는 의뭉이 가득한 알라리크의 눈빛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조금 전에 불만 가득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