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187)

술은 만악의 근원 - 2

그리고 마리우스가 술에서 깼을 때는 이미 모든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으으···. 머리야···.”

“일어나셨습니까.”

“코프루스? 거기 자네인가?”

“예, 주인님.”

“도대체 어제 얼마를 퍼먹었길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지는 거지···? 일단 물 좀 다오.”

코프루스가 가져다주는 물을 받아먹고서는 정신을 좀 차린 마리우스가 천막 밖으로 나오면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했다.

잠을 늦게까지 잔 탓인지 온몸이 뻣뻣해서 몸을 비틀 때마다 온갖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는 통에 마리우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어우···. 죽을뻔했지.”

마리우스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과 부족민들의 모습에 마리우스가 데키무스에게 물었다.

“다들 뭔가 바쁜 모양이로군.”

“예, 배를 만든다고 다들 바쁘더군요.”

“갑자기 배를 만든다고.? 다들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그러는 거야?”

“지난밤에 각하께서 저 둘을 신대륙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보내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데키무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예, 어젯밤에 술에 잔뜩 취하셔서 알레피우스와 체르티미손에게 잔뜩 바람을 불어넣으셨잖습니까?”

“내가 그랬다고?”

“예, 동쪽에 있는 신대륙에서 옥수수를 가져오면은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될 거라는 둥. 신대륙에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가 있다는 둥···.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하셨습니다.”

“잠깐, 서쪽이 아니라 동쪽? 내가 동쪽이라고 그랬었나···?”

“예, 정확하게 동쪽이라고 하셨습니다.”

“으음···. 내가 그랬다고?”

“예.”

어느샌가 머리가 아팠던 것은 싹 잊어버리고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 그럼 지금 색슨족과 노르만족들이 전부 달라붙어서 배를 만들고 있다···. 뭐 그런 건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알레피우스가 이런 일에 부족민들을 전부 동원할만한 사람들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으시잖습니까?”

“그렇겠지···?”

“제 생각이지만···. 이번일에는 그냥 신경을 쓰지 마시는 게 어떠실런지···.”

“그게 좋겠지···? 일단은 자네가 알레피우스와 체르티미손에게 가서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라고 정정해주고 와.”

“예? 제가 말입니까?”

“고생 좀 해주게···. 그리고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라고 꼭 말해주게!”

마리우스는 지난밤에 동쪽과 서쪽을 구분하지도 못한 자신의 아둔함과 술을 되는대로 퍼먹어서 쓸데없이 일을 키운 어제의 자신을 원망했지만, 그런다고 쏟아진 물이 다시 컵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데키무스에게 뒷수습을 맡긴 마리우스는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아그리피넨시스로 돌아갔다.

노르만족은 그가 떠난다는 사실에 아쉬워했지만, 이내 색슨족과의 경쟁을 떠올리고서는 배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색슨족과 노르만족은 머리를 맞대고서 북해의 거친 바다를 헤쳐나갈 만한 튼튼한 배를 구상했다.

“저 높고 험한 바다를 헤쳐나가려면, 커다랗고 튼튼한 배가 필요해.”

“그런데 그런 배를 어떻게 만들지?”

“일단 커다랗게 만들어보자!”

색슨족과 노르만족은 기존에 자신들이 타고 다니던 배를 크게 키우는 식으로 방향을 잡아봤지만, 정작 그렇게 만들고서 바다 위에 띄워보니 무게중심도 맞지 않았고, 균형도 제대로 잡히질 않았다.

별다른 계산 없이 감으로 대충 크게 키우기만 한 배로는 북해의 파도를 헤쳐가는 것도 힘들었다.

“내 생각인데, 이번에 실패한 건 아무래도 용골이 튼튼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 같아.”

“으음···. 그럴듯한데?”

“그럼, 용골에는 뭘 써야 하는 거야? 떡갈나무 말고 참나무를 써볼까?”

“그것도 괜찮긴 한데···. 지금 게르마니아에 강철이 남아도는데, 강철을 써보는 건 어떨까?”

한 장인의 말에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하하하, 에이···. 아무리 그래도 강철로 만든 배를 어떻게 바다에 띄우겠다는 거야?”

“시도도 안 해보고 비웃는 거야?”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쇳덩어리를 바다에 던져봐라. 그게 뜨나 말이야.”

“이익···.”

색슨족들이 배 만드는 문제로 다투고 있을 때 체르티미손이 이끄는 노르만족은 배를 개조하기보다는 도시로 사람을 보내서 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항해술을 연구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있어서 배는 롱쉽으로 충분했고, 조금 모자라기는 하지만 크기를 키우면은 바다를 건너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만 보면서 항해하는 건 너무 힘듭니다···. 뭔가 쉬운 방법이 없을까요?”

“흠···. 제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는 당신들을 도와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하지만 아그리피넨시스 대도서관에 있는 대학자들이라면···. 당신들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그리피넨시스는 또 어디입니까?”

“마리우스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이자, 게르마니아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지요.”

알비스 안쪽으로 들어온 노르만족은 처음으로 접하는 로마 문명에 감화되어서 점점 게르마니아에 녹아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색슨족과의 경쟁에서 이기고자 항해술을 배우는 정도에 그쳤다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아졌고 그에 따라 아리우스파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마리우스를 따르는 게르만족들도 개종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노르만족들에게 거리낌이란 없었다.

그들은 마리우스가 아리우스파의 열성적인 지지자라는 말을 듣고서는 망설임 없이 개종했다.

“마리우스 전하께서 기적을 보이셨다는 말입니까?”

“예, 신부님. 전하께서 한번 손짓하시니, 마을에서 제일 커다란 거목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뿐인가요? 그분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환자들을 어루만져주시니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장님이 눈을 떴습니다!”

“거기에다가 악마들이 우리 부족에 쳐들어왔을 때, 마리우스 전하께서 검을 휘두르셔서···.”

노르만족들은 자신들이 보거나 들은 이야기를 주변에 늘어놓으면서 자랑하기를 즐겼고, 그들을 자주 접하던 교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노르만인들이 전해주는 마리우스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황했다.

“이건···.”

“기적이 아닐까요···?”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야···.”

“증인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확인해야겠습니까? 저들이 하는 말이 다 똑같잖습니까.”

“크흠···.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가 살아있는데, 시성을 논하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으음···. 일단은 도미티누스님께 알려서 처리하는 것이 옳을듯한데···.”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거기에 더불어 노르만족의 유입으로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게르마니아에 새롭게 유입된 덕분에 휘청거리던 게르마니아의 시장경제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먼저 게르마니아로 들어온 노르만인들은 춥고 인간에게 적대적인 북방과는 다르게 따뜻하고 살기 좋은 게르마니아에 만족하면서 아직 북방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게르마니아로 데려오면서 인구가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었다.

물론 당장 이주해온 부족민들에게 벌이는 복지정책으로 게르마니아의 재정이 휘청 저렸으나, 어차피 유입이 계속된다는 것은 추가적인 세금수입을 노릴 수 있었기에 충분히 감내할만한 상황이었다.

급한 돈이야 헨리쿠스가 빼돌리는 호노리우스의 자금으로 급한 불을 끌 수는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보고받은 마리우스는 편안한 표정으로 보리차를 들이켜며 말했다.

“다들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그러시겠죠.”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일라?”

“바루스도 노르만족을 따라가겠다고 난리인 것 말고는 아무 문제 없네요.”

“크흠···. 어린 녀석이 어디를 가려고.”

마리우스가 슬쩍 시선을 피하자, 에우독시아가 오른손을 뻗어서 마리우스의 턱을 붙잡고서는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게 하며 물었다.

“당신 저한테 할 말 있지 않아요?”

“내가 뭐 잘못했나···?”

마리우스는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언뜻 생각하기에도 떠오르는 것이 많아 잔뜩 긴장했다.

“얼마 전에 당신 사위라는 사람이 찾아왔던데···.”

“아, 가이세리크?”

“...사실이었네요.”

“아, 내가 다 설명할게! 설명할 수 있어!”

마리우스가 당황하면서 에우독시아에 말했지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저는 다 이해해요···. 그런데 아멜리아도 이해할지는 모르겠네요.”

“아···. 호, 혹시 아멜리아도 알고 있어?”

“지금 가이세리크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일 거예요.”

“흠···. 많이 화났을까?”

“글쎄요···. 저 같으면 좀 서운할 것 같긴 하네요. 그렇게 고민만 하지 말고 한번 찾아가 보시는 게 어때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에우독시아는 단숨에 방을 빼져 나가는 마리우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이를 먹어도 똑같다니까.”

******

“아멜리아, 내가 전부 설명···. 엥?”

“왔어요?”

마리우스는 홀로 차를 마시고 있는 테르만티아의 모습에 당황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며 가이세리크를 찾았다.

“으음···. 가이세리크는?”

“그 아이는 지금 발비나랑 놀아주고 있어요.”

“발비나···? 그건 누구야.”

마리우스의 말에 테르만티아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전에 없이 다정하게 답했다.

“당신 딸 중에서 첫째 이름이에요.”

“그, 그래? 내가 기억하기로는 전에는 다른 이름이었던 것 같았는데···. 아닌···. 가···?”

“지난번에 당신이 지은 이름이 별로라고 해서 다시 지었던 거···. 기억 못 하시나요?”

“그, 그랬었던가?”

마리우스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매사에 즉흥적으로 움직이기를 즐기는 그였기에 하나하나 기억 못 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물론 이를 알고 있는 테르만티아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글쎄···.

마리우스도 이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그랬었지! 맞아! 내가 바쁜 일들이 많아서 잊어버리고 있었지 뭐야?”

“그러실 것 같았어요.”

“크흠···. 그래서 만나보니까 어때? 생각보다 괜찮은 놈 같지 않아? 그놈이 말이야, 아에티우스보다 몇 살 많지도 않은데, 전투에서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더니 제법 공을 세우는 게 아니겠어?”

“그렇군요.”

“그리고 가이세리크 그놈이 워낙에 똘똘하고, 싹싹한 데다가 윗사람을 대하는 게 아주···. 당신 왜 그래?”

“제가 왜요?”

마리우스를 전쟁터에서 여러 번이나 자신을 살려줬던 특유의 감각이 연신 위험을 알려오고 있었다.

테르만티아는 웃고 있었지만, 입은 미동도 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뭐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

“글쎄요···. 없진 않네요.”

마리우스가 마른침을 삼키면서 물었다.

“어, 어떤 점이···?”

“음···. 당신이 저랑 상의도 없이 멋대로 발비나의 혼처를 정한 거 말이에요. 물론 당신에게 필요한 일이었겠지만···. 조금 서운하네요.”

테르만티아의 눈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조금 서운한 수준이 아닌 듯싶었다.

지난번에 테르만티아가 에우독시아와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그건···. 미안해. 내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어.”

마리우스는 머리를 숙이면서 사과했다.

어차피 변명한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고, 어차피 자신이 잘못한 게 맞았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테르만티아도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도 당신 안목이 영 별로는 아니더라고요. 그 아이 이름이 가이세리크라고 했던가요?”

“어? 어어···.”

“어차피 딸이 중앙귀족들에게 시집가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게르마니아에서 공주님처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테르만티아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다음부터는 미리 말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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