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오펜스 - 9
헨리쿠스 단돌로는 마성의 혓바닥으로 고작 5분 만에 호노리우스를 탄복시켰으며, 10분이 지날 때쯤에는 호노리우스의 궁정 창고지기 직에 제수되었다.
말이 궁정 창고지기지 실제로 하는 일은 호노리우스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로, 연구라는 목적하에 무분별하게 낭비되고 있는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폐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연구에 쓰이는 유리컵과 병들은 한번 쓰고 세척 한 뒤에 다시 쓰시는 게 좋습니다.”
“흠···. 그렇게 하면 용액들이 뒤섞여서 쓸모가 없어지는데···.”
“폐하, 이렇게 연구 한번마다 유리를 깨버리시는 것은 바닥에 돈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뭐 그렇다면은 생각은 해볼게.”
“생각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재정상태라면, 얼마 가지 않아서 파산하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파, 파산?!”
파산이라는 말에 호노리우스가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황제라도 파산이라는 말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지, 심드렁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헨리쿠스를 재촉했다.
“재정상태가 그 정도로 안 좋다는 건가?”
“하하하···. 당장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 상태가 이어진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후우···. 다행이네.”
“폐하께서 취미생활에 열중하시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돈이 너무나도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도 연구 덕분에 벌어들이는 돈도 쏠쏠한 편 아닌가···?”
호노리우스는 소심하게 항변했지만, 헨리쿠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반박했다.
“폐하의 발명품으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폐하께서 연구로 날려버리시는 돈이 더 많습니다.”
“흐음···.”
“폐하께서 저를 신뢰한다고 하셨으니, 제 말을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헨리쿠스의 간곡한 말에 결국 호노리우스가 고집을 꺾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뭐···. 결국 모두 돈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 말이야···.”
“그러면 저는 그렇게 된 거로 알고, 제 할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래, 나가봐.”
조심스럽게 호노리우스의 집무실을 빠져나온 헨리쿠스는 궁정 복도를 지날 때마다 살짝 구부린 허리가 펴지면서 장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샌가 그의 뒤에 따라붙은 파비우스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헨리쿠스에 물었다.
“오늘은 얼마나 되는가.”
“300닢입니다.”
“늘 그렇듯이 자네 몫은 알아서 챙기고, 준비해둔 곳에 가져다 두게.”
“예, 알겠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호노리우스의 창고를 관리하던 헨리쿠스는 에우트로피우스와 짜고서는 황실 재산을 차근차근 빼돌렸다.
처음에는 혹시라도 호노리우스가 의심할까 싶어서 움직임을 자제했지만, 취미생활에 푹 빠진 호노리우스는 헨리쿠스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폴로 또한 친위대와 수도경비대를 관리하느라 바쁜 통에 이들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뭐 폴로가 알아차린다고 해도 마리우스가 징수에 나섰다는 사실을 들으면 눈감아줄 게 뻔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빼돌려진 자금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마리우스의 저택창고에 차곡차곡 쌓였고, 틈나는 대로 게르마니아로 보내졌다.
이러한 자금들은 한창 노르만족과의 전쟁과 이탈리아 침공을 준비하는 마리우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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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서지 마라! 놈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알레피우스가 이끄는 색슨족 병사들은 한창 노르만족의 전가들과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숨이 턱 막힐 듯이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지나간 세월처럼 질척거리는 흙바닥이 병사들의 발목을 잡는 험악한 숲속에서의 전투는 힘겹기만 했다.
“적을 밀어내야만 한다. 모두 위치로!”
“전열이 무너졌습니다! 이제 물러나셔야 합니다!”
알레피우스는 그동안 마리우스의 원정을 따라다니면서 나름대로 경험을 쌓은 지휘관이었고, 그의 부하들인 색슨 병사들은 게르마니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흉포하고 거친 이들이었다.
하지만 노르만족은 색슨족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거칠고 흉포한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질서나 규칙 따위는 없었지만,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떼를 지어 몰려오는 그들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은 곁에 있는 동료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개의치 않고 무기를 높이 든 채로 달려들었다.
“후퇴! 전원 후퇴한다.!”
알레피우스가 후퇴를 명령하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전열이 무너져내렸고, 그렇게 알레피우스가 이끄는 색슨족은 다시금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쯧쯧쯧···. 알레피우스, 내가 누차 말했지만, 자네는 너무 성격이 급해.”
“죄송합니다···.”
“말로도 잘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왜 크게 키우는지 원···. 내가 굳이 와야겠나?”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마리우스의 핀잔에 알레피우스가 쭈그러들었다.
그 모습을 본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잔뜩 시무룩해진 알레피우스를 달려줬다.
“후우···. 그래도 자네의 호전성 하나만큼은 게르마니아 제일이니 그걸 잘 갈고 닦으면은 언젠가는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을 거야.”
“예···. 감사합니다···.”
“너무 기죽지는 말고···. 그래, 자네가 상대해본 노르만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마리우스의 질문에 시무룩해져 있던 알레피우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제가 노르만족과 전쟁을 벌인 뒤로 다섯 번을 싸웠지만, 다섯 번 모두 아군의 압도적인 패배로 끝이 나버렸습니다.”
“전부 졌단 말인가?”
“예.”
“흠···. 장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건가?”
“아닙니다. 장비는 충분하게 보급됐습니다.”
“그럼 병사들의 훈련도 문제겠군.”
“병사들의 대부분이 훈련소 출신이거나, 전하를 따라서 브리타니아까지 갔던 이들입니다.”
“흐음···.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건가?”
마리우스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지만, 이건 알레피우스도 잘 모르는 일이었기에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훈련 도에서 밀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장비 부분에서는 우리가 더 나은데도 밀렸다라···.”
“아무래도 노르만족에게 익숙한 땅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제 동네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건가? 뭐 한번 싸워보면 알겠지.”
마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데키무스가 물었다.
“출격하실 생각입니까? 아직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연이은 승전으로 놈들이 한껏 기고만장 해져있을 때를 노려야 해.”
마리우스는 오랜만에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스파타, 혹은 글라디우스라고 불리는 평범한 장검이었지만, 마리우스가 군에 입대한 이후로 나선 모든 전투에서 언제나 함께였다.
여러 번의 전투 중에 부러지고, 깨지는 등 주인과 함께 온갖 수난을 당했지만, 어찌 되었건 마리우스의 곁을 끝까지 지켜준 병기였다.
마리우스가 그렇게 아끼던 검을 뽑아 들었다는 건 오랜만에 몸을 풀겠다는 뜻이었고, 마리우스가 몸을 풀겠다는 건···.
“저, 저 미친놈은 뭐야!”
“화, 화살을 전부 튕겨내고 있습니다!”
“창을 던져도 이빨도 안 들어갑니다!”
“뭐 저런 놈이···.”
노르만인들의 지도자 체르티미르손은 무리와 떨어진 채로 홀로 숲을 가로질러서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마리우스의 모습에 공포에 질렸다.
숫자는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그들이 쏘는 화살은 갑옷에 부딪히는 족족 튕겨 나가거나 부러졌고, 힘껏 던진 창 또한 갑옷을 뚫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모두 겁먹지 마라! 놈은 혼자다!”
“뒤, 뒤에 기병대가···!”
마리우스는 그냥 힘으로 밀어붙였다.
거칠고 흉포한 노르만족들?
자신을 죽이겠다고 난리 치던 비디메르나, 수십만이나 되는 병사들과 부족민들을 이끌고온 라다가이수스에 비하면 세 살배기 애들이나 다름없었다.
앞장서서 검을 휘두르는 마리우스의 뒤로 중무장한 게르마니아 기병대가 뒤따랐다.
“모두 쓸어버려!”
노르만족 병사들은 이전에 맞서 싸우던 색슨족 병사들과는 다르게 무작정 정변으로 돌격하는 마리우스의 모습에 당황했다.
매 전투에서 언제나 적을 향해서 돌격하는 쪽은 자신들이었지 저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는 오히려 분기탱천한 로마군이 그들에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어설픈 진형으로 기마 돌격을 막으려 했지만, 단 한 번의 돌격으로 볼링핀처럼 쓸려나갔다.
“저, 저게 무슨···.”
“대장, 이제 끝났습니다. 놈들 때문에 아군 전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으음···. 일단 물러난다.”
그렇게 마리우스와 노르만족 간의 전초전이 끝났다.
생각보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마리우스가 보여준 충격적인 무위와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갑옷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아 사기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대장, 전사들이 잔뜩 겁에 질렸습니다.”
“정말···. 괴물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군.”
“잔뜩 성난 황소처럼 아군을 향해 뛰어오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놈이 사악한 술수를 쓴 게 분명하다. 당장 주술사를 불러와서 점을 치게 해!”
“무슨 점을 말입니까?”
“우리가 이길 수 있는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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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뭔가 좀 보이나?”
“아아···. 아아···!”
노르만족의 지도자인 체르티미르손은 수능 성적을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잔뜩 긴장한 채로 늙은 주술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상한 글자를 끄적이면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던 주술사는 밤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거대한···. 거대한 제국···!”
“거대한 제국? 로마를 말하는 겁니까?”
“거인의 발아래에서 놀던 이들은 결국 거인에게 굴복할 것이다!”
“뭐라는 건지···. 어, 어···?”
주술사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더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더니 이윽고 숨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주술사가 죽자마자, 그의 부관이 천막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대장! 어제의 그놈이···.”
체르티미르손이 밖으로 뛰쳐나오니, 어제 전투에서 미친놈처럼 날뛰던 놈과 그 병사들이 군영을 포위하고 있었다.
검은색의 갑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러싼 게르마니아 기병대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노르만 전사들과 부족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에 무기나 농기구 등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들고나와서 마리우스의 부대와 대치했다.
서로 한참이나 노려보던 중에 돌연 마리우스가 병사 몇 명만을 대동한 채로 노르만족에게 다가왔다.
앞마당에 산책하러 나가는 듯이 느긋하게 움직이는 마리우스였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노르만인들은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특히나 어제 전투에서 날뛰던 마리우스의 모습을 기억하는 전사들은 무기를 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다 야만인들아. 이곳의 대장? 지휘관? 흠···. 아무튼 최고 책임자가 누구지?”
노르만인들은 웅성거리면서 마리우스의 얼굴만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마리우스가 헛기침하더니, 이윽고 짧게 배운 게르만어로 물었다.
“여기, 대장! 어디?”
“나다.”
마리우스의 물음에 체르티미손이 앞으로 나왔다.
말에 올라타 있는 마리우스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바이저를 열어젖혔다.
체르티미손은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 마리우스의 모습에 흠칫 놀라면서 말했다.
“생각보다 어린 녀석이로군. 겁도 없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
“흠···. 알레피우스, 자네가 통역해주게나.”
“예, 장군.”
마리우스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서는 최대한 근엄한 자세로 말했다.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던 듯한데, 서로 피해가 커지기 전에 좋게좋게 말로 끝내는 게 어떻겠는가.”
“우리는 침략자와 협상하지 않는다.”
“협상하자는 게 아니다. 없던 일로 하자는 거다.”
“말장난은 듣지 않겠다!”
안 그래도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한데, 언어에서도 차이가 있으니 그 답답함은 배가되었다.
“후우···. 길게 말하지는 않겠다. 여기서 싸움을 멈추던가 불길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라.”
마리우스가 손짓하니 게르마니아 기병대가 준비해둔 호노리우스의 분뇨를 꺼내 들고서는 노르만촌락을 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