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오펜스 - 8
마리우스 또한 스틸리코의 편지를 받았다.
호노리우스에게 보냈던 편지처럼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스틸리코의 부탁이 담긴 편지였다.
“장인어른께서 내 도움이 필요하시다는군.”
“이탈리아의 상황이 그렇게나 안 좋은 겁니까?”
“연이은 병력 동원으로 시민들이 많이 지쳤고, 각 부족도 휘청거리는 상황입니다.”
“거기다가 최근에 색슨족과 노르만인들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게지카의 말에 마리우스가 질색하며 물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로?”
“알레피우스에게 듣기로는 청어잡이에 나선 색슨족들이 먼바다까지 나가서 청어를 잡다가 노르만족의 영역을 침범한 모양입니다.”
“그런 건 대화로 잘 해결하면 될 일이 아닌가.”
마리우스의 말에 게지카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색슨족이나 노르만인들이나 호전적인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이들 말입니다.”
“으음···. 어쩐지 알레피우스가 안 보이고 싶더니만, 그런 이유였군.”
“아마 지금쯤이면 노르만족과 피 터지게 싸우고 있을 겁니다.”
마리우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도대체 색슨족은 왜 노르만인들의 영토까지 기어들어 가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인지 원···.”
“듣기로는 연안에서 청어를 잡는 어부들이 많은 탓에 경쟁이 덜한 노르만 영토까지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또 청어가 문제인가?”
“청어잡이를 주 수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기에 생긴 일이 아니겠습니까?”
“으음···. 노르만인들과 색슨족의 사이를 중재해줄 수는 없겠나?”
마리우스가 질문을 던졌지만, 회의실에 모인 어느누구도 그에게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다들 입을 다문 채로 가만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던지, 마리우스가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키우며 물었다.
“색슨족과 노르만인들을 중재할 방법이 없냐고 묻지 않았는가?”
“각하, 딱히 방법이 없습니다. 애초에 노르만인들과 색슨족들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서로 겉돌 뿐입니다.”
“데키무스 경의 말이 옳습니다. 노르만인들은 태생부터 거칠고 흉포한 이들인지라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어렵습니다.”
마리우스는 그건 너희들도 똑같지 않으냐고 말하려고 했지만, 애써 속으로 삭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건은 일단 뒤로 미뤄두지.”
“옳으신 판단이십니다.”
마리우스는 일단 노르만과의 일은 알레피우스에 맡겨두고서는 관심을 끊기로 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나중에 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지만, 지금은 이탈리아의 일이 중요했다.
“후우···. 그래, 우선은 이탈리아의 일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일단 장인어른이 로마를 점령했고 올리브리우스는 나폴리로 도망갔다고?”
“예, 스틸리코 장군과 올리브리우스 둘 다 각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양반들이 꼭 저들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다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데키무스의 말에 가이세리크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지금 올리브리우스가 수세에 몰렸으니, 스틸리코 장군을 도와야 합니다!”
“쯧···. 어린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전하, 스틸리코 장군을 돕는 것보다는 올리브리우스를 돕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둘의 세력은 비등비등한데, 지금 올리브리우스가 잠깐 불리한 것뿐입니다.”
“게지카의 말이 옳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올리브리우스가 불리하게 보이지만, 아직 그에게는 알라리크와 그의 병사들이 남아있는 데다가 나폴리에서 새롭게 병사를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 아닙니까?”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올리브리우스를 지지했고, 가이세리크는 스틸리코를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 둘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올리브리우스에 승기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둘째치고 말이다.
그때,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세르비우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는지요?”
“세르비우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몸은 어떻게 좀 괜찮습니까?”
“하하하···. 걱정해주신 덕분에 멀쩡해졌습니다.”
“그건 다행이로군요. 그래서 제게 하고 싶은 말이란 거 무엇입니까?”
세르비우스는 잠깐 목을 가다듬고서는 말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짧은 생각으로는 양쪽 모두를 돕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양쪽 모두를 돕는다?”
“예, 정확히 말하자면 돕는‘척’을 하는 겁니다.”
“돕는 척?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장인어른과 올리브리우스를 뒤통수치자는 말인가?”
“예.”
세르비우스의 말에 마리우스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고, 그 모습을 본 세르비우스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각하, 소아시아에서부터 다키아와 일리리아, 게르마니아까지, 지난 30년 동안 로마를 위해 봉사하면서 느낀 바가 있습니다.”
“뭔가.”
“날이 가면 갈수록 저와 제 병사들은 지치고 약해져만 갔고, 적들은 언제나 강성해져만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해봤는데···. 결국 원인은 한가지더군요.”
세르비우스의 말에 모두가 집중했다.
“아무리 외적을 물리쳐도···. 내부의 다툼은 끝날 줄을 몰랐지요. 그런데 게르마니아는 어떻습니까? 각하께서 게르마니아로 오신 뒤에 어떻게 변했습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내부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다른 이들의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부재하기에 생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은데···.”
“저도 각하를 만나지 않았다면 생각만 했을 겁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행동으로 보여주셨잖습니까.”
마리우스는 당황하면서 세르비우스에 물었다.
“칭찬은 고맙긴 한데···. 내가 무얼 했겠나, 나는 그저 되는대로 움직였을 뿐이야.”
“각하께서는 게르마니아로 오신 뒤에 단 한 번의 싸움으로 게르만 인들을 끌어안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너무 과장 같은데···.”
마리우스는 과거를 되짚어봤으나, 딱히 기억에 남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게르마니아로 온 것부터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그냥 쫓겨난 것에 불과했다.
주변에 게르만 인들을 끌어들인 것도 힘이 없어서 싸움을 피한 것에 불과했고 말이다.
“과장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저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셨잖습니까? 이전의 총독들은 거만한 태도로 매번 우리를 윽박지르기 일쑤였는데 말입니다.”
“브레누스의 말이 맞습니다. 전하께서는 게르마니아에 오시자마자 여러 게르만 귀족들과 부족장들을 불러들이셔서 먹이고 함께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때가 좋긴 했지···.”
게르마니아로 좌천되었다는 생각에 중앙으로 돌아가기 전에 최대한 힘을 끌어모은다는 생각으로 한 행동이 졌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생각 없이 돈 쓰면서 놀던 시절이라 제법 즐겁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게르만 귀족들과 부족장들이 재롱부리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고 말이다.
“각하야말로 지금의 혼란스러운 로마를 안정화하고 평화와 번영으로 인도할 수 있으실 겁니다.”
“지금 나보고 황제라도 하라는 건가?”
“예, 지난번에 데키무스 경께서도 각하께 권유하지 않으셨습니까?”
세르비우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난번에는 자네도 반대하지 않았나.”
“그랬었지요.”
“그런데 왜 생각이 바뀐 건가?”
“그동안 각하의 영도 아래 점점 바뀌는 게르마니아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우스 각하께서는 빈손으로 이 땅에서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셨습니다. 이제는 이탈리아가 각하를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네, 나는 게르마니아의 대추···. 아니, 게르마니아의 왕으로 만족해.”
마리우스의 말에 내심 기대하던 세르비우스와 데키무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게르만 족장들이야 마리우스의 결정에 반대하는 법이 없었기에 별다른 반발은 없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슬쩍 훑어본 마리우스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황제가 될 생각은 없다는 말이지···. 뭐하러 그런 귀찮은 일을 하겠나?”
“예?”
“세르비우스의 말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어. 올리브리우스와 장인어른을 동시에 뒤통수친 다라···.”
마리우스는 전에 없이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재밌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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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가 결정하니 게르마니아가 뒤따랐다.
지난번 훈족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와 급격한 개발로 인해 생긴 여러 문제에 연이은 전쟁으로 비대해진 군사력으로 인한 국방비지출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지금이야 청어를 판 돈으로 어떻게 버티는 중이었지만, 청어가 언제까지 게르마니아 인근에서 잡힐지는 모를 일이었다.
당장만 하더라도 더 청어를 잡는 사람이 늘어나서 노르만인들의 영역까지 들어가서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느 정도나 동원 가능한가?”
“보급 소요나 기타요소 등을 생각해보면···. 보병은 2만 명 안쪽으로 기병은 최대 오천 명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보병 2만에 기병 오천이라···. 무언가를 해보기에는 굉장히 모호한 숫자로군.”
“안 그래도 힘든 재정 상황을 쥐어짜 내는지라···. 더 동원하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흠···. 지금 이탈리아 내에 있는 병력 현황은?”
마리우스의 물음에 세르비우스가 대답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친위군단과 갈리아 군단, 그리고 콘스탄티우스가 이끄는 라틴군단이 스틸리코 장군을 따르고 있는 반면에 올리브리우스를 따르는 군대는 알라리크의 병사들을 제외하고서는 없습니다.”
“장인어른이 정예병에 숫자도 많군···. 반면에 올리브리우스는 알라리크가 돌아서면 고작해야 남부에서 끌어모은 민병대 수준일 거고.”
“아직 다른 곳의 반응을 잘 모르기에 확답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갈리아의 총독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흠···. 그래?”
마리우스는 지도를 살펴봤다.
지금 게르마니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갈리아를 지나쳐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이탈리아와 가장 가까운 갈리아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군대를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사태를 관망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쓰읍···. 갈리아까지 훑고 지나가려면 병력이 모자라겠는데···. 어디서 더 병력을 끌어들일 수는 없겠나?”
“갈리아까지 건드리실 생각입니까?”
“그래, 아무래도 후방이 튼튼해야 하지 않겠나? 이탈리아로 갔다가 게르마니아가 공격당하면 큰일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쓰읍···. 게르만 부족들에 동원령을 내리면 안 되려나? 돈이나 병사들은 알아서 준비해오라고 하고 말이야.”
“그들도 지난 프랑크, 부르군트, 반달족은 지난 훈족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본 탓에 병력을 동원할만한 여력이 없을 겁니다.”
“그럼 색슨족은? 그놈들은 강이나 어슬렁거리면서 놀고 있었잖아.”
“지금 노르만인들과 사생결단 중인데, 부른다고 오겠습니까?”
“흠···. 그럼 색슨족을 지원하는 건 어떤가? 겸사겸사 유틀란트 반도에 있는 노르만인들도 복속시켜서 해안선도 안정화하고 말이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원래 땅은 넓으면 넓을수록 좋은 법이야.”
마리우스의 말에 데키무스가 탐탁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확장한 영토들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데, 굳이 영토를 더 넓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도를 보게 데키무스, 지금 알비스 유역을 따라서 만들어진 국경선에서 유틀란트반도를 점령한다면 방위 구역을 단축할 수 있어.”
“흠···.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저는 회의감이 듭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데키무스, 나를 믿게나 내가 언제 손해 보는 짓을 하던가?”
“적들이 알아서 꼬꾸라진 건 몇 번 본 것 같은데...”
“아무튼, 기병대에서 날랜 놈들만 뽑아서 이천 명만 준비해둬. 당장 내일 출발할 테니까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그때, 마리우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지난번에 황제 폐하가 선물로 보내준 신무기는 창고에 있나?”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건 왜 찾으시는지···?”
“그것도 수레에 잘 실어와. 이번에 한 번 써봐야겠어.”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