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187)

로마 오펜스 - 7

“가이세리크.”

“에, 전하!”

이른 아침부터 가이세리크를 부른 마리우스는 잔뜩 기대하고 있는 그에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울딘을 잡아 왔다고.”

“예, 하지만 살아서 잡아 오지는 못했습니다.”

“상황은 전부 전해 들었다. 루길라가 울딘을 죽였다고 들었는데···. 맞나?”

“예, 맞습니다.”

“흠···. 내 생각에는 불의의 사고 같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마리우스는 좋게좋게 해결하자는 의지를 은연중에 드러냈으나, 가이세리크는 이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럴 생각이 없었는지는 몰라도 마리우스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결코 실수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길을 지나갈 때 소 떼를 몰고서 길을 막은 점과 그와 울딘 사이의 원한을 생각해보면···.”

마리우스는 잔뜩 흥분한 가이세리크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가이세리크···. 아니, 이보게 사위.”

“예, 전···. 장인어른!”

사위라는 말에 앳된 가이세리크의 표정이 활짝 펴지더니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듯이 보였다.

마리우스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이세리크를 꾸짖는듯한 억양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자네가 울딘을 포로로 잡은 것은 패잔병들의 뒤를 쫓으라는 내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무단으로 울딘의 뒤를 쫓은 것이지···. 맞나?”

“전하, 그것은···.”

“어허,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네.”

마리우스의 말에 변명하려던 가이세리크의 입이 다물어졌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마리우스는 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이 휘몰아쳤다.

“거기에 울딘을 죽이기는 했으나, 무단으로 게르마니아의 시민을 체포해서 끌고 왔고 말이야···. 맞나?”

“끄응···. 맞습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울딘을 포로로 잡은 순간부터 그 처우와 생사여탈권은 내게 있어, 자네의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일은 사고가 되는 거지, 내 말이 맞나 가이세리크?”

마리우스의 질문에도 가이세리크는 대답하지 않고 반항하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 말이 맞냐고 물었네! 가이세리크.”

“전하! 아니, 장인어른! 도대체 장인어른께서 왜 그 훈족 녀석을 싸고도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 녀석을 싸고돈다고.?”

“예! 그렇습니다! 저는 장인어른을 따라서 훈족과 싸웠고, 언제나 장인어른의 명령을 잘 따랐습니다!”

“그렇지.”

“그런 제가 울딘을 사로잡은 건 제 단독행동이지만, 오히려 적의 수괴를 잡음으로써 큰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겠습니까!”

“더 말해보게.”

“울딘은 제 포로입니다. 그놈을 사로잡은 건 제 공적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루길라 그놈이 전부 망쳐버렸고, 말입니다! 왜 전하께서 그놈을 이리 옹호하는 겁니까?!”

가이세리크는 말을 마치고서는 씩씩거리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곁에 있던 데키무스가 그 건방진 모습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마리우스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가이세리크, 우선 몇 가지만 정정하지. 첫째로 나는 루길라를 옹호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둘째로 네 공을 무시한 적도 없네, 여기서 짚고자 하는 것은 자네의 월권행위를 말하고자 함이야.”

“저는 공을 세웠는데, 왜 처벌을 받아야 합니까!”

“처벌한다고 한 적 없네만.”

물론 마리우스의 예비사위인 가이세리크와 반달족을 견제하고자 그의 월권행위를 꼬집으면서 그를 처벌하라거나 공을 깎아내리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게지카나 브레누스 등이 이에 앞장서면서 가이세리크를 깎아내렸고, 말이다.

아직은 어린 가이세리크에게 이런 상황은 잘 이해되지 않았고,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부른 마리우스가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도 당연했다.

“후우···. 가이세리크, 올해로 네 나이가 몇이지?”

“열여섯입니다···.”

“내 딸들은 올해로 두 살이야. 다른 녀석도 있긴 하지만, 이미 애가 딸려 있는 데다가 황제와 정분이 난 상태라 자네와는 맺어줄 수가 없지.”

“......”

“이렇게 되면 자네와 내 딸의 나이 차이는 열넷이지, 나는 그런데도 자네를 내 사위로 삼겠다고 했어, 내 말이 틀렸나?”

“맞습니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덕분에 다른 이들이 너희 부자를 견제하고 있고 말이야.”

마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가이세리크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일들을 모르고 있을 거로 생각했나?”

“...그럼 왜 가만히 계셨던 겁니까.”

가이세리크는 투정을 부리듯이 말했다.

그 모습에 마리우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기를.

“내가 너희 부자의 편을 들었다고 가정해보지, 그러면 너를 욕하면서 깎아내리려는 이들이 과연 가만히 있겠나?”

“......”

가이세리크는 말이 없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거로 생각하겠네, 자네가 이번 일로 처벌받는 일은 없을 것이야. 물론 그렇다고 자네가 울딘을 사로잡은 공을 없던 일로 하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야.”

마리우스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코프루스가 여러 하인과 갑옷을 들고 와서는 마리우스의 옆에 있는 갑옷 걸이에 걸어놓고서는 말했다.

“후우···. 주인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장장이 레긴이 만든 판금 갑옷을 가져왔습니다.”

“수고가 많았네.”

“저, 전하 이것은···?”

“이제부터 이건 자네 것이야.”

“어···.”

가이세리크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갑옷을 향해 걸어가서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마리우스가 즐겨 입는 검은색의 갑옷에 황금 줄로 황소 무늬가 새겨진 갑옷은 마리우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인지 기존의 판금 갑옷보다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을 보이었다.

가이세리크는 그동안 가지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가지지 못했던 판금 갑옷을 만지작거리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그런 가이세리크를 뒤로하고 데키무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잘 들었지? 이번 일은 사고사로 진행하고, 주변에는 내가 가이세리크를 불러서 월권행위를 크게 꾸짖었다고 퍼뜨려.”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각하께서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게 기가 막히십니다.”

“말년병장 짬이 어디 가겠나.”

“말년병장이요?”

“흠흠···. 그런 게 있네.”

******

로마시에서의 전투는 한층 격렬해지고 있었다.

스틸리코가 이끄는 친위군단과 콘스탄티우스에게 보내지 않고 남겨두었던 갈리아 군단은 쉴 틈도 없이 로마를 들이치면서 성벽을 넘었다.

올리브리우스의 친위대장이 이를 막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압도적인 전력 차를 쉽게 이겨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르비우스가 세우고, 카이사르가 헐었으며, 아우렐리아누스 시절에 재건된 로마의 성벽은 생각보다 스틸리코의 공격을 잘 막아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애초에 로마는 라벤나처럼 튼튼한 방어를 자랑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중심도시이자 대도시로서 그 위치를 지키기는 했지만, 제정에 들어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고, 그 누구도 로마가 공격당한다고 생각한 이들도 없었다.

“폐하, 동문이 뚫렸습니다.”

“스틸리코의 기세가 매섭군.”

“하수도를 따라가면은 도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결국, 스틸리코의 맹공을 견디지 못한 친위대는 무너져내렸고, 올리브리우스는 하수도를 통해서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 나폴리로 도망가버렸다.

로마를 무력으로 점거하고 로마에 입성한 스틸리코의 모습을 본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스틸리코가 새로운 황제가 된다고 말하고는 했다.

로마를 점령한 스틸리코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동방에 있는 호노리우스와 게르마니아에 있는 마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었다.

“호노리우스를 불러들이고, 게르마니아에 있는 마리우스에게는 병사를 이끌고서 이탈리아로 내려올 수 있는지를 물어봐.”

알라리크의 부대가 플로렌스를 포위한 탓에 통행이 쉽지 않았지만, 결국 편지가 도착하기는 했다.

자신만의 연구실에서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의 편지를 받아들고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충 병사를 일으키는 척만 해.”

“스틸리코 장군을 도우러 가는 게 아니라요?”

“굳이 도우러 갈 필요가 있나? 어차피 숙부님께서도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신 것 같은데···. 우리는 그냥 가만히 사태만 지켜보면 될 일이야.”

“그러다가 나중에 어느 한쪽이 이길 것 같으면 움직이시려는 생각이 시로군요.”

“흠···. 그건 모를 일이지.”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폐하.”

“칭찬으로 들을게, 그나저나 테오도시우스는 잘 자라고 있으려나···.”

호노리우스는 그림으로나마 마주한 어린 아들을 생각하면서 만든 목마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본 폴로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호노리우스에게 말했다.

“이번 기회에 게르마니아로 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탈리아에 벌어진 일을 의논한다고 하고···.”

“마리우스가 날 살려두겠나?”

“크흠···.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모르기는···. 다 알면서,”

“폐하,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것은 좀 과장된 게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폐하와 마리우스 각하 사이가 어떤 사이입니까?”

“으음···. 그런가?”

호노리우스는 석연찮다는 얼굴이었지만, 폴로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폐하께서 5중성벽을 쌓으신다고 했을 때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리우스 각하께서 폐하께 나쁜 생각을 품었다면 굳이 콘스탄티노플까지 쳐들어오겠습니까? 그냥 방심한 틈에 사람을 보냈겠지요.”

“으음···. 그런가.”

“폐하, 5중성벽은 없던 일로 하시지요. 5중성벽을 짓는다고 들어가는 재화 탓에 국고가 휘청거리고, 여기에 동원된 노동자들 때문에 임금이 올라서 상인들도 불만이 많습니다.”

“아직 두 개밖에 못 지었는데···.”

“두 개면 충분합니다!”

오랜만에 강경한 태도로 나오는 폴로의 모습에 완고했던 호노리우스의 마음이 잠깐 흔들렸으나, 이내 강철과도 같은 의지로 말했다.

“아니, 이 5중성벽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세를 위한 것이기도 해.”

“그건 또 무슨 개···. 아니, 음···.”

“이곳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이야 동방의 중심이지만, 이게 언제까지 계속될 거로 생각해?”

“글쎄요. 천년은 가지 않겠습니까? 동방에서 이곳만 한 도시가 또 어디 있다고요.”

“지금이야 페르시아의 샤한샤인 야즈게르드가 우리와 다투기를 원하지 않아 조용히 지내지만, 이게 언제까지 계속될까? 결국에 페르시아와 우리 로마는 결판을 내야 할 사이야.”

“으음···.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페르시아가 아무리 강성해도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할 수나 있겠습니까?”

폴로의 말에 호노리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한 이백 년쯤은 괜찮겠지,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페르시아가 아니야.”

“그럼 뭡니까?”

“페르시아와 우리 로마가 다투고 있을 때,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는 게 두려운 거야.”

“새로운 세력 말입니까? 뭐···. 훈족이나 다른 이민족들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글쎄, 누군지는 모를 일이지···. 우리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도시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아니면 개인이 일으킨 세력이 될 수도 있는 일이야.”

“흐음···. 폐하께서는 그게 마리우스 각하와 게르마니아라고 생각하시는 거로군요.”

호노리우스는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말을 돌리려는 듯이 폴로에 말했다.

“지난번에 페르시아로 사신을 보낸 일은 어떻게 되었나? 잘 해결된 거겠지?”

“예, 더 이상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오히려 페르시아의 샤는 기독교를 공인하겠다고까지 하더군요.”

“흠···. 무슨 생각인 거지.”

“글쎄요···. 기독교도들을 끌어들여서라도 우리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자 함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 일단은 페르시아 쪽을 계속 주시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면 내게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밖에 있던 시종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들어오라고 해.”

“잘 지내셨습니까? 폐하.”

“에우트로피우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신지요.”

갑작스럽게 호노리우스를 찾아온 에우트로피우스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별일은 아니고, 지난번에 폐하께서 동방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귀족들과 상인들이 걱정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그랬었나?”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폐하께 도움이 될만한 이를 데려왔습니다···. 들어오시게.”

에우트로피우스의 말에 한 사람이 호노리우스의 연구실로 들어오면서 머리를 숙였다.

“뵙게 되어 가문의 큰 영광입니다. 폐하. 저는 게르마니아에서 조그맣게 생선장사를 하는 헨리쿠스 단돌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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