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187)

로마 오펜스 - 6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도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힌 채로 묵묵히 하는 일을 이도 있었다.

브리타니아에 온 지 어느덧 일 년이 된 사루스는 오천의 병사로 오만의 픽트족 전사들과 맞서 싸웠다.

최후까지 저항한 픽트족이었지만, 제대로 된 철제무기 없이 잘 무장한 게르마니아 병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노련한 사루스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항복하겠습니다. 무기를 바칠 테니, 부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어 자비를 내려주소서.”

“너희의 항복을 받아들이겠다. 이전의 일은 묻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불만이 있으면 무기를 들고 일어나기 전에 내게 말하도록.”

사루스의 잔혹한 복수를 걱정하던 픽트족은 생각과는 다르게 자비를 베푸는 사루스의 모습에 오히려 더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의 기억 속의 사루스는 게지카와 브레누스라는 두 명의 악마들과 함께 그들의 집을 불태우고 식량을 뺏어가던 이들이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자비를 보이니, 오히려 픽트족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사루스의 이 자비가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사루스는 마리우스의 명령대로 오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서 콘스탄티누스를 처단하고 다시금 브리타니아에 평화를 가져왔다.

두 번에 걸친 반항이 실패로 돌아가자 세력이 크게 꺾인 픽트족은 더 이상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영원히 저항을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당장의 저항을 포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브리타니아는 다시금 완전해졌다.

“드디어 돌아가는군.”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루스는 그라시아누스와 선을 맞잡으면서 헤어지기 전 인사를 나눴다.

본래 브리튼 군단에 소속되어있던 일개 병사였던 그는 아칸의 편에서 마리우스와 싸웠고, 아칸의 사후에는 콘스탄티누스의 휘하에서 사루스와 싸웠다.

그리고 지난 브리타니아 평정에서는 사루스의 휘하에서 맹활약하면서 파란만장한 군 생활을 보냈다.

“브리타니아를 잘 부탁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 제가 모르는 게 많긴 해도 바보는 아닙니다.”

“그래, 언제나 믿고 있다네.”

사루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배에 올랐다.

자청해서 브리타니아에 올 때만 하더라도 몇 달이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벌써 일 년이었다.

게르마니아의 지원을 받았다면 더 빨리 끝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게르마니아도 훈족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사루스는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고, 자기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서 게르마니아로 돌아온 것이다.

“복귀했습니다. 전하.”

“사루스! 이렇게나 반가울 때가 있나.”

마리우스는 오랜만에 재회한 사루스를 반겼다.

지난 훈족과의 전투에서 그의 수족처럼 움직여줄 지휘관이 절실했기에 그의 복귀를 반겼다.

“각하, 보고드릴 것이···.”

“데키무스.”

“흠···. 사루스, 돌아왔군.”

마리우스는 집무실로 들어온 데키무스에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 지금 이탈리아에서 스틸리코 장군이 군대를 일으켜서 로마시를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 방금 뭐라고?”

“스틸리코 장군이 로마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아주 잠깐 마리우스는 데키무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가만히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데키무스의 말을 되뇌던 마리우스가 그 뜻을 이해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가, 각하!”

“어···.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장인어른께서 왜 로마를 공격해!”

“어···. 듣기로는 마리우스 각하와 연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 거기서 내가 왜 나와?!”

마리우스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도대체 스틸리코는 왜 로마시를 공격하면서 올리브리우스와 척을 진 것인가 이해되지 않았다.

“각하,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있어?”

“플로렌스에 주둔 중이던 콘스탄티우스의 부대와 알라리크의 부대가 격돌해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아니 뭐···. 그건 뭐···.”

“덕분에 로마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마리우스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말했다.

“혹시 또 보고할 게 있으면 지금 하게, 나쁜 소식은 한 번에 듣는 게 나을 것 같아.”

“아직은 없습니다.”

“뭐라고? 아직은 없다고?!”

“어···. 예, 그렇습니다.”

“후우···. 또 뭔가, 그냥 빨리 말하게.”

데키무스는 마리우스의 눈치를 조금 살피더니, 이윽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이세리크가 울딘을 사로잡아왔습니다.”

“오···. 그건 좋은 소식이 아닌가.”

“그런데···.”

“잠깐,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중간에 루길라가 울딘을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

마리우스는 잠깐 머릿속에서 루길라라는 이름을 뒤져봤지만,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데키무스가 덧붙여 설명했다.

“지난번에 울딘에서 도망쳐온 훈족의 지도자 말입니다. 우연히도 가이세리크가 그 인근을 지나다가 그만···.”

******

가이세리크가 알비스 장벽을 지나쳐서 본인의 부족으로 돌아가던 때였다.

그는 자신의 부족인 반달족의 세력권에서 병사들을 재정비하고, 오랜만에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쉴 생각이었다.

“날 풀어주면, 네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의 보물을 선물하겠다.”

“아이 울딘.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남은 시간 동안 네 삶을 정리하지 그래.”

“마리우스가 언제까지 너를 대우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놈은 마리우스에게 아무것도 아냐!”

울딘의 말에 가이세리크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손에 들고 있던 말채찍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세 갈래로 갈라진 말채찍을 얻어맞은 울딘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고, 가이세리크는 그런 울딘에게 침을 뱉으며 말했다.

“내 앞에서 전하를 모욕하지 마라. 훈족 놈아.”

“크윽.”

“네놈이 살아있는 건 나의 자비로움이나 전하의 관용이 아니라 순수하게 법적인 절차 때문이니 오해하지 말도록.”

그 이후로 울딘은 투덜거리거나 중얼거리는 일 없이 조용히 가이세리크의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반달족의 영역으로 향하던 중에 가이세리크는 강을 건너는 오록스 떼를 발견하고서는 멈춰 섰다.

“이게 다 뭐야. 오록스 떼가 뭐 이리 많아.”

“저도 이 정도로 많은 숫자는 처음 봅니다.”

“아,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가이세리크와 게르마니아 기병대가 갑작스러운 오록스 떼에 당황하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훈족의 복장을 한 어린아이와 한 남성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사과했다.

“소 떼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그만···.”

“훈족이 어떻게 게르마니아에···.”

“장군, 왜 지난번에 울딘에서 도망쳐온 훈족들을 전하께서 받아주시지 않았습니까.”

“아···. 이분들이 그분들인가?”

“반갑습니다. 저는 루길라라고 하고, 여기 있는 이 아이는 제 조카인 블레다입니다. 블레다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저는 고디기젤의 아들 가이세리크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만···.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소 떼를 치워주실 수는 없습니까?”

가이세리크의 정중한 요청에 루길라도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보겠습니다. 다행히도 마리우스 전하께서 지난번에 알려주신 대로 소를 다루니, 제법 수월하게 다룰 수 있더군요.”

“호오···. 마리우스 전하께서 말입니까?”

“예, 이것 보십시오.”

루길라가 여러 마리의 소와 연결되어있는 끈을 가볍게 잡아당기자, 한참 물을 마시고 있던 소들이 움찔하면서 머리를 치키고 루길라의 곁으로 몰려왔다.

단순히 몇 번의 손질로 그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루길라의 모습에 가이세리크가 감탄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저도 부족의 양치기가 양을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노련한 양치기도 이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겁니까?”

“하하하···.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마리우스 전하께서 알려주신 방법입니다. 블레다!”

“예, 숙부님.”

블레다는 오록스 한 마리를 끌고 와서 가이세리크에게 보여줬는데, 소의 코에는 나무로 만든 이상한 고리가 걸려있었다.

“이건 뭡니까?”

“이게, 전하께서 알려주신 방법입니다. 저와 부족민들이 먹고살 길이 막막하여 전하께 아뢰니 오록스를 길들이는 방법을 알려주시더군요.”

“흐음···. 이 요상한 고리로 그 흉포한 오록스를 길들였다는 말입니까?”

“예, 이건 코뚜레라고 하는 건데···. 전하의 고향에서 거친 황소를 다룰 때 쓴다고 하더군요. 저희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한번 써보니 굉장한 성능을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흠···. 신기하군요. 혹시 소를 길들이는 방법을 우리 부족에게도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가이세리크와 루길라의 사이에 울딘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루길라···! 역시 네놈이 여기 있을 줄 알았다.”

“울딘···.”

“내게서 도망쳐서 한다는 게 고작 소를 치는 일이냐? 네놈의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은 지옥에서···.”

“내 형제를 모욕하지 마라. 울딘!”

분노한 루길라는 호통을 치면서 벼락같이 소몰이용 막대기로 울딘의 머리를 후려쳤다.

가이세리크가 미처 반응하지 못할 속도였다.

울딘의 무방비한 머리에 내리쳐진 소몰이용 막대가 단번에 부러지면서 울딘이 썩은 나무통처럼 쓰러져버렸다.

거기에 놀란 오록스 떼가 날뛰면서 울딘을 짓밟았고, 블레다가 다급하게 소 떼를 진정시켰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후였다.

“무, 무슨 짓을···!”

“의무관을 불러와!”

“우리에게 의무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이 부러진 것 같은데···.”

울딘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처참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팔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데다가 목뼈가 부러졌는지 잔뜩 뭉개진 머리가 덜렁거리는 모습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던 게르마니아 기병대도 질색할만한 모습이었다.

“젠장···.”

******

“쯧쯧···. 결국엔 자기 업보대로 가는군.”

“그···. 가이세리크가 루길라를 잡아 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흐음···. 자네는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형제들의 복수기는 하지만, 이는 사적인 일이니 법대로 처리하자면 사형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울딘은 우리 시민도 아니고 적이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가이세리크가 잡은 포로이니 그 소유는 가이세리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걸 법적으로 해석해보자면···.”

“간단하게 말해.”

“흠···.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루길라는 가이세리크의 가장 귀중한 재산을 잃게 한 것입니다.”

“쯧···.”

마리우스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루길라를 재판에 넘겨버린다면, 사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컸다.

상황설명만 들어본다면, 의도적으로 울딘을 죽인 것이 맞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덜컥 루길라를 죽여버린다면, 나중에 아틸라가 장성해서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그랬다가는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법과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으음···. 역시 그렇겠지···.”

마리우스의 고민이 깊어져만 갔다.

그냥 넘어가면 안 그래도 범과 질서를 불편하게 여기는 여러 게르만족을 통제하기 힘들어질 것이었고, 이대로 루길라를 재판에 넘기면은 죽어버릴 게 분명했다.

루길라가 죽는 것은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가 아틸라에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가족이라는 게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은 마리우스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마리우스는 장성한 아틸라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알고 있었기에 어지간하면 건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가이세리크는 쓸데없는 일을 해서는···.”

“본인의 전공을 뺏겼다는 생각에 그런 것이겠지요.”

“쯧···. 시킨 일이나 잘할 것이지, 시키지도 않을 일을 해서 귀찮은 일이나 만들고 말이야.”

“흠···. 잠시 생각해봤는데,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각하?”

데키무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귀를 쫑긋이면서 물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잠깐 머리를 굴려봤는데···. 가이세리크 경은 각하의 부하이니 그가 사로잡은 울딘의 처우도 전하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

“예, 그렇습니다. 각하께서 루길라를 용서하시거나 가볍게 처벌하신다면···. 위신이 조금 상할 수는 있겠지만,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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