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187)

로마 오펜스 - 2

다음날이 되자 마리우스는 아침 일찍부터 청어조합의 12인의 대표 중에 한 명인 헨리쿠스 단돌로를 총독궁으로 불렀다.

잠결에 불려 나왔지만, 헨리쿠스는 정갈한 복장으로 마리우스의 앞에 서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지난밤에 내게 보내준 제안서는 잘 읽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자네를 이른 아침에 부른 것은 자네들이 말한 저축상품에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아, 어떤 점이 말입니까?”

“그전에 하나만 물어보겠네.”

“예, 전하.”

마리우스는 전에 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헨리쿠스에게 물었다.

“내게 돈이 필요하다는 소식은 어떻게 접한 것인지 궁금하군. 혹시 총독궁에 사람이라도 심어놓은 건가?”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그럼 어떻게 안 거지?”

“이번 전쟁에서 전장으로 나가는 물품들을 둘러봤는데, 식량보다는 의약품을 더 많이 요청하시는 것을 보고 예측한 것입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믿지.”

“감사합니다. 전하.”

마리우스는 슬그머니 서류를 꺼내놓으며 말했다.

“자네들이 내 신용을 믿고 ‘투자’하겠다고 했는데, 이 투자가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까 하고 불렀네.”

“전하, 그···. ‘투자’가 아니라 돈을 빌려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 내가 본 서류에는 ‘투자’라고 적혀있었는데 말이지···.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듯이 말하는군.”

“아···.”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던 헨리쿠스는 다시금 미소를 지으면서 마리우스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지요.”

“그렇지. 이제 자네들의 투자내용과 요구조건에 대해서 들어보고자 하는데···. 설명해보게.”

“예, 전하께서는 지금 수많은 군인에게 위로금과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십니다. 물론 여태까지의 게르마니아 재정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이 돈을 전부 지급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당분간은 조금 힘드시겠지요.”

“생각보다 잘 알고 있군.”

“하하···. 우리 청어조합에서는 이런 전하와 게르마니아의 부담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꾸만 말을 빙빙 돌리려는 헨리쿠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말의 요점이 뭔가?”

“사망자의 유족에게 돌아가는 위로금과 부상자들의 보상비와 급여를 저희 측에서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대신 청어조합의 독립적인 권한을 인정해주셨으면 하는데···.”

“독립적인 권한···?”

“지금의 청어조합은 전하의 영향력 아래에서 장사하는 조그마한 지역 상단에 불과하지만···. 저는 우리 조합이 로마 전역에 이름을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로마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내 이름이 붙어있으면 힘들다는 말이로군. 보호는 필요하지만, 간섭은 하지 말아달라 그건가?”

“물론 그런 감이 없지는 않지만···. 정확히는 게르마니아에서 우리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려고 함입니다.”

“그래?”

“최근에 게르마니아가 점점 발전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로마의 여러 대형 상단들이 게르마니아로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헨리쿠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물었다.

“그럼 그 대형 상단들을 막아주면 되겠나?”

“하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엄연히 경쟁사회인에 말입니다. 그 정도야 각오하던 바였습니다.”

“그래?”

예상과는 다른 헨리쿠스의 말에 마리우스가 의외라는 반응과 함께,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게르마니아에서 감당할 수 있는 구매력이란 것은 뻔한 게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청어조합은 짧은 시간에 게르마니아 여러 곳에 뿌리내린바···. 충분히 해볼 만합니다.”

“그렇군···. 그럼 왜 내게 이런 제안을 한 거지?”

마리우스의 말에 헨리쿠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내 이름으로 사업을 하겠다고?”

“예, 이번 보상금과도 관련된 일입니다!”

“그래? 음···. 그럼 뭐···. 해도 돼.”

마리우스의 말에 헨리쿠스가 얼빠진 표정으로 마리우스에게 되물었다.

“예?”

“청어조합은 내가 만들라고 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자네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닌가? 매달 정해진 양의 세금만 낸다면 신경 쓰지 않겠네.”

“하하하···.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하시는군요.”

“내 것도 아닌데 반대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들이 내 이름으로 허튼짓을 했다가는 금세 사라질 텐데, 뭘 두려워하겠나.”

대수롭지도 않다는 마리우스의 말에 조금 고민하던 헨리쿠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한 가지 더?”

“아, 이건 청어조합의 대표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흐음···. 개인적인 부탁이라···.”

마리우스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헨리쿠스가 당황하면서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은 지급하겠습니다!”

“보상···? 흠···.”

“아, 소정의 약소한 선물 말입니다.”

“그래, 그렇지.”

마리우스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헨리쿠스에게 물었다.

“그래, 내가 뭘 해주었으면 하는가.”

“곧 청어조합에서 새로운 대표를 정하고자 합니다. 다음 선거에서 제가 이길 수 있게 저를 지지하신다는 말을 해주시면···.”

“잠깐, 어차피 12명의 대포는 조합원 중에서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었나?”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제 맞상대가 제법 뛰어난 녀석인지라···.”

“호오···. 그래서 내 지지를 바탕으로 그 자리를 유지하고 싶다는 거로군.”

“예, 뭐···. 그렇습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오히려 청어조합에 내 사람을 심어둘 수 있으니 내게 유리한 조건이로군···. 내 말이 맞나?”

“그, 그렇습니다.”

마리우스가 처신 잘하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니, 이를 알아들은 헨리쿠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지 선언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뭐지?”

“그건 제가 청어조합 대표로 올라가면···.”

“많이는 안 바라네, 청어조합에서 빼돌리는 비자금의 절반만 내 창고에 가져다 놓게.”

“예? 비, 비자금이라니요···. 저희는 아주 정직한 사업가입니다. 그럴 리가요···.”

“정직은 무슨···. 자네들이 만든 훈제청어가 이탈리아나 저 멀리에 있는 소아시아에서도 팔리는데, 그 수익에 대해서 내게 들어온 돈은 한 푼도 없더군.”

“그, 그건···.”

“긴말하지 않겠네, 자네 손으로 바치면 없던 일이 되겠지만···. 아니라면 뭐···. 상상에 맡기겠네.”

******

마리우스와의 협상(?)을 마치고 나온 헨리쿠스 안돌로는 그대로 청어조합의 건물로 달려가서 다른 대표들을 만났다.

“전하께서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다른 요구사항은 없으셨는지요?”

“다른 속주들에 건너간 청어의 판매수익 중의 일부를 넘기라고 하셨습니다.”

“일부를 말입니까?”

“허···. 역시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으시는군요···. 역시나 전하십니다.”

헨리쿠스는 판매수익에서 세금을 내라는 말을 판매수익 일부를 바치라는 말로 교묘하게 바꿔 쳤다.

다른 대표들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어차피 그 수익 중에 일부를 나눠드려도 남는 게 더 많지 않습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해외시장까지 공략해봅시다.”

“해외라고 해봤자···. 북아프리카 속주 인근의 사막 왕국들이나, 동방왕국들이 전부인데···. 그곳까지 청어가 상하지 않고 갈 수 있겠습니까?”

“누가 청어만 판다고 했습니까?”

헨리쿠스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청어조합에서 청어를 안 팔면 뭘 팝니까?”

“제가 지난번에 알게 된 친구가 해준 말이 있는데···. 제법 제 귀를 혹하더군요.”

청어조합 대표들 간의 회의가 끝난 후에 청어조합에는 새로운 판매 물품이 추가되었다.

“청어조합 투자권···?”

“이건 또 뭡니까?”

“하하하···. 이걸 가지고 계시면, 청어조합의 분기별 수익에서 일정 부분을 떼어드리거나 돈이 필요할 때 청어조합을 찾아오시면 이것의 가치에 상응하는 돈을 드리는 겁니다.”

“그냥 돈으로 주시면 안 됩니까?”

“굶주린 자에게 돈을 주기보다는 먹고살 방법을 마련해드리는 게 났다고 전하께서 그러셨습니다. 저희는 지난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여러분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 드리는 겁니다.”

“음···. 그런데 이런 종이 쪼가리를 들고 간다고 돈으로 바꿔주기는 하는 겁니까?”

“예, 전하께서 지급을 보장하셨으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돈을 우리 청어조합에 예금하신다면 분기마다 높은 이자를 보장하겠습니다.”

“흠···. 다른 상단에 이미 예금하고 있는데···.”

“우리 청어조합에서는 이번 전투에서 게르마니아의 시민들이 겪은 피해와 고통을 함께하고자 올 한 해 동안 예금에 대해서 백 분의 이십에 해당하는 이율을 보장하겠습니다!”

“다른 곳에 두 배인데···?”

로마에서 새로 건너온 시민들은 높은 이자율에 혹해서 집에 쌓아두고 있던 돈을 청어조합에 맡겼고.

“전하께서 보장하신다면야···.”

“어차피 돈을 가지고 있어봤자 쓸데도 없으니···.”

“시장이 열리면 그때 돈 찾으면 될 일이니 뭐···.”

라인강 너머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들은 마리우스라는 이름을 믿고 청어조합에 돈을 맡겼다.

그렇게 청어조합은 고작 몇 주 사이에 폭풍 같은 성장을 이뤄내면서 게르마니아 제일의 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마리우스 또한 전쟁 이후에 불어닥칠 보상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내가 뭐랬습니까 하하하!”

“헨리쿠스, 자네의 잔머리는 정말이지···.”

“이야···. 고작 몇 주 만에 게르마니아에 돌아다니던 모든 금화를 다 쓸어모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갈 차례입니다. 다들 오늘은 기뻐하시고 내일부터는 다들 돈을 쓸어 담으셔야 할 겁니다!”

청어조합의 인원들이 조합의 성장에 기뻐하면서 축배를 들고 있을 때, 마리우스는 정말 오랜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면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부인들은 자식들과 함께 꽃구경을 나갔고 어지간한 일 처리도 데키무스에 맡겨둔 상태였으며, 브리타니아의 일도 사루스가 거의 정리했으니 오랜만에 맞는 평화였다.

“어우···. 잘 잤다. 코프루스? 코프루스 있나?”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꽃구경 갔다는 가족들은 아직 안 돌아왔겠지?”

“두 마님과 자제분들은 리푸아리 들의 영역으로 가셨으니, 내일쯤에야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그건 다행···. 잠깐. 두 명?”

순간 마리우스의 잠들어있던 뇌가 번쩍 깨어나면서 주변을 살폈다.

“프로바는?”

“프로바님께서는 뒤뜰에서 꽃을 심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흠···.”

마리우스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게르마니아에서 프로바의 위치는 상당히 애매한 상태였다.

겉으로는 올리브리우스가 보낸 볼모 정도의 위치였으나,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마리우스의 공인된 정부 중에 하나로 알고 있었다.

당사자도 부정하지 않았으니, 대부분 눈치껏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현재 마리우스와 올리브리우스의 관계는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지난 청어 분쟁으로 얼굴을 붉힌 이후로는 데면데면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올리브리우스도 마리우스에게 먼저 속일 생각이 없었고, 마리우스 또한 먼저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었기에 이런 냉담한 분위기는 오랫동안 지속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프로바나 보러 가볼까.”

“뒤뜰로 모시겠습니다.”

“아냐. 나 혼자 가지.”

대충 의복을 갖춰 입은 마리우스는 한가한 걸음걸이로 뒤뜰로 향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여름답지 않게 찬 바람이 불어오던 게르마니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뜻한 태양 빛이 총독궁 이곳저곳을 비춰주고 있었다.

“흥흥~”

“황제의 여동생이 게르마니아에서 땅이나 파고 있다고 하면 로마에서 몇 사람이나 믿겠습니까?”

“아, 오셨네요!”

한창 꽃을 심고 있던 프로 바는 손에 뭍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서는 내게 달려오며 말했다.

“게르마니아에서 사는 건 힘들지 않으십니까?”

“힘들기는요. 로마에서 지내던 것보다 자유롭고 아주 편한걸요? 히히.”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아, 이것 좀 보세요. 제가 로마에서 가져온 건데 게르마니아에서도 잘 자라고 있어요!”

프로바가 마리우스를 끌고 간 곳에는 타오르는 듯이 붉으면서도 분홍빛이 감도는 꽃들과 어디선가 본듯한 뭉툭한 열매가 매달린 꽃들이 마리우스를 반겨주었다.

“어, 음···.”

“왜 그러세요?”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름이 잘 기억나질 않는군요. 분명 중요한 것 같은데···.”

“아, 이거 오피움이에요.”

“오피움···? 오피움···. 오피움···. 아편!”

마리우스는 프로바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서는 그녀와 눈을 맞추면서 물었다.

“이, 이걸 왜 여기서 기르는 겁니까?!”

“이게 약재로도 쓰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잘 길러서 내다 팔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아, 아니 이걸···.”

마리우스는 웃고 있는 프로바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양귀비와 그녀를 번갈아 보며 입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히히···. 예쁘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