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187)

오랜 동지들 - 9

“제, 제대로 찾아온 것 같습니다···. 장군!”

“그래···. 그래,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구나···.”

가이세리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끌었다.

작은 개울을 지나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가자 보인 립스크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바닥을 굴러다니는 시체들이나 검붉은 색으로 물든 바닥을 보면서 가이세리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전투가 벌어진 것 같은데···.”

“우리가 기가 막힌 상황에 도착한 모양이로군.”

“장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들이 지쳐서 달릴 수도 없다는 것만 기억해주십시오.”

“으음···.”

******

“적 기병대가 왜 저기 있냐는 말이야!”

“저, 전하···. 우선은 진정하시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일단 병사들을 천천히 뛰기로 물리면서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나 해!”

“루카고 님이 붙잡히셨는데요?”

“그딴 자식은 없어도 돼!”

울딘의 벼락같은 호통에 부하가 움찔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병력을 뒤로 물리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전부 살릴 수는 없어. 살릴 수 있는 병사들만 최대한 챙겨서 도망간다···. 알았나?”

“예, 전하!”

******

“오오···. 각하, 왔습니다! 가이세리크가 제시간에 왔습니다!”

“온건 다행인데···. 꼴을 보아하니, 오는 길에 비를 쫄딱 맞은 듯한데···.”

“어, 음···. 그렇군요. 저 상태로 전투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원군이 도착한 것은 좋았지만, 정작 도착한 이들의 상태가 영 아니었다.

빗길을 무리하게 달렸는지, 흠뻑 젖어있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말들이 굉장히 지친 듯이 보였고, 무엇보다 병사들이 몸을 으슬으슬 떨고 있는 것이 당장 전투는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아군 병사들을 뒤로 물리고 챙겨온 휴대식량을 먹여서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예,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마리우스와 울딘 중에 누가 먼저 체력을 회복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오랜 전투로 탈진상태인지라 전투를 속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울딘은 도망가기 위해서 잠시 병사들을 쉬게 할 필요가 있었고, 마리우스는 이들을 쫓아서 끝장을 보기 위해서 체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치상황이 시작됐다.

“주는 대로 다 먹어라! 토할 것 같아도 쑤셔 넣어!”

“청어는 많으니 모자라면 더 말해라.”

게르마니아 병사들은 청어 훈제, 어포, 조림 등등의 요리들을 입에 쑤셔 넣고 있었고, 훈족 병사들은 말고기로 만든 육포나 기타 여러 동물의 고기로 만든 보존식을 씹으면서 서로를 노려봤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원···.”

“내 말이 그 말이다.”

“투덜거릴 시간에 뭐라도 더 먹어.”

진흙투성이가 된 병사들은 들어가지도 않는 음식들을 입을 밀어 넣으며 투덜거렸지만, 오히려 핀잔만 들을 뿐이었다.

마리우스는 말없이 병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 싸움은 거의 끝난 것 같은데···. 쓸데없이 시간을 끌고 있군.”

“끝날 때까지는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방심이고 나발이고, 울딘은 이제 끝났어. 눈이 있다면 저기에 쓰러져있는 시체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은지나 보게.”

마리우스의 말대로 곳곳에 뒤엉켜서 진흙탕을 뒹굴고 있는 병사들의 시체는 훈족이 둘에 게르마니아 병사가 하나꼴로 섞여 있었다.

적은 기세가 꺾인 지 오래였고, 지금은 눈을 굴리면서 도망칠 궁리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이세리크가 데리고 온 게르마니아 기병대만 멀쩡했다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훈족을 쫓아냈겠지만, 현재 그들의 상태가 영 멀쩡하지 않았다.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다른 병력이 더 없나?”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최후의 한 명까지 긁어모으지 않았습니까? 이제 립스크에 남아있는 건 부상병들뿐입니다.”

“부상병?”

“예, 막시무스 장군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 말입니다.”

“그래···?”

마리우스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 모습을 본 데키무스가 질색하면서 물었다.

“각하, 설마···. 진심입니까?”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은 있을 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부상병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싸울 필요는 없어. 그냥 지원병이 추가로 도착한다는 모습만 보여주면 된다고.”

“각하···.”

“데키무스, 자네와 말다툼할 시간이 없어. 빨리 가서 병사들을 데려와! 무기를 들고 걸을 수만 있으면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데키무스가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왔다.

가까이서 보면 하나같이 안색이 파리한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이들이었으나, 멀리서 보기에는 영락없는 지원군처럼 보였다.

******

울딘은 립스크에서 줄지어 들어오는 병사들을 지켜보면서 혀를 찼다.

“쯧, 저놈들은 밭에서 사람을 수확하기라도 하는 건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군.”

“전하, 조금 무리하더라도 지금 후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원정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자네 말이 맞겠지···. 일단 천천히 립스크 평원을 벗어나는 걸 목표로 한다.”

울딘은 뒤에 나타난 기병대가 당장 싸울 수 없는 상태임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냥 싸움을 계속했다면 모를까, 중간에 싸움을 멈춰버린 탓에 전투의 열기로 확 달아올랐던 병사들이 냄비가 식듯이 식어버렸고, 연이은 전투와 난전에 피로감이 몰려들어 병사들이 완전히 퍼져버렸다.

거기에 립스크에서 병사들을 쥐어짜고 있는 마리우스의 모습을 보고서는 질려버린 울딘은 병사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훈족들이 물러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우스도 슬금슬금 물러나는 훈족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울딘이 도망친다. 뒤를 쫓아.”

“각하, 그냥 보내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보내주기는···. 지금 보내주면 올해 가을쯤에 다시 세력을 끌어모아서 장벽을 넘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원래 초원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족들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세력회복이 빠른 법이야.”

데키무스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마리우스의 명령이었기에 따랐다.

이를 전해 들은 게지카나 고디기젤, 파라몬드 또한 마리우스의 명령을 전해 듣고서는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마리우스의 명령이었기에 우선 따랐다.

그렇게 천천히 뛰기로 물러나는 훈족들과 그 뒤를 천천히 뒤따르는 게르마니아 병사들의 기묘한 추격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었지만, 울딘은 뒤를 쫓아오는 게르마니아 병사들에게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울딘은 압박감을 느끼는 정도였지만, 훈족 병사들은 까딱 잘못하다가는 게르마니아에 뼈를 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울딘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서, 다른 부대가 밀고 들어오는 게르마니아 군을 막으면서 시간을 버는 사이에 도망치려 했다.

“전하···. 그럼 뒤에 남는 병사들은···.”

“고귀한 희생이 되겠지, 최대한 멀쩡한 병사들을 오천 명 정도만 추려내서 적을 막게 해.”

“오천 명으로 되겠습니까?”

“어차피 시간을 벌기만 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예···. 알겠습니다.”

울딘의 명령에 병사들이 모이기는 했으나, 체력적으로도 한계점에 달해있었고 사기 또한 바닥을 기고 있는 병사들이 마리우스를 막아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르마니아 병사들의 뒤에서 병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고만 있던 마리우스가 검을 뽑아 들고 앞장서서 훈족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자, 게르마니아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가며 그를 뒤따랐다.

“잔챙이들은 필요 없어! 울딘 나오라 해!”

“막아! 막···.”

“넌 또 뭐야!”

울딘의 후퇴를 위해서 뒤에 남은 울딘의 부하는 마리우스를 단 십 분도 막지 못하고 목이 잘렸고, 훈족 병사들은 사람들 앞에 나타난 바퀴벌레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 저건 뭐야!”

“마리우스입니다! 마리우스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뭐? 뒤에 남은 병사들은!”

“아, 아마도 패배한 것이···.”

“아니, 고작 십 분이 지났을 뿐이야! 그런데 모두 전멸했다고?!”

“그, 그것까지는 저도 잘···.”

“에잇···. 병사들을 더 내보내! 저놈을 막으란 말이다!”

울딘은 마리우스가 따라붙을 때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이 병사들을 뒤에 남기면서 행군속도를 올렸다. 몇 번이고 그 짓을 반복하다 보니, 잔뜩 지친 병사들은 올라간 행군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로 처지거나 바닥에 쓰러지는 등 대열이 크게 술렁술렁했지만, 울딘은 개의치 않았다.

“병사들은 또 모으면 된다.! 우선은 내가···.”

“울딘 어딨어!!”

울딘이 속도를 높이니 마리우스 역시 행군속도를 높여서 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사기가 충만한 게르마니아 군이 그의 뒤를 따랐지만, 사기가 충만하다고 해서 소모된 체력이 단숨에 회복되는 일은 없었다. 체력이 완전히 고갈된 병사들은 뒤로 처져버렸고, 반달족과 부르군트의 병사들 또한 뒤로 처졌다.

가이세리크가 데려온 게르마니아 기병대는 애초에 따라오지도 못했고 말이다.

마리우스의 곁에 남은 것은 파라몬드가 이끄는 돌격대와 소수의 근위대 병사들뿐이었다.

“전하,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이러다가 적에게 포위당하기라도 한다면은···.”

“지금 울딘이 정신없이 도망가는 게 보이지 않나? 이제는 갑옷도 벗어 던지고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만···.”

“말은 하면 할수록 힘든 법이야. 말할 힘이 남았으면, 입 다물고 내 뒤만 바짝 따라와. 알겠나?”

“예, 전하!”

“좋아. 따라와!”

마리우스는 속도를 높여 울딘의 뒤를 쫓았다.

평소에는 한없이 질척거리는 게르마니아의 흙길들이 울딘의 발목을 잡아대는 통에 전혀 속도가 나지 않고 있었고, 마리우스와 울딘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게르마니아···. 이 빌어먹을 땅 같으니.”

“울딘, 이제야 만나는군.”

“마리우스···.”

결국, 드레스덴의 장벽 앞에서 마리우스와 마주하게 된 울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정말이지 끈질기구나! 마리우스.”

“남의 땅에 들어올 때는 주인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나?”

“내 형제들의 손을 자르고 두 눈을 뽑지만 않았다면, 우리가 만나는 일은 없었을 거다.”

“네 병사가 장벽 안으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린 일도 모르는 건가? 방귀 뀐 놈이 화낸다더니만, 그 말대로군.”

“후···. 내게 반기를 든 루길라를 받아들이지만 않았다면, 내가 병사를 보내는 일도 없었겠지.”

“더럽게 말도 많네, 훈족의 대왕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혀가 길어서야 하겠어?”

마리우스는 검 끝으로 울딘을 가르치며 말했다.

“이제 대화는 끝났다. 울딘. 항복하던가 죽어라.”

“항복?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굴복한 적이 없다. 네가 내게서 가져갈 수 있는 건 내 목숨뿐이다 마리우스.”

“그것도 좋지, 가자!”

마리우스가 앞장서서 달려가니 돌격대와 근위대가 그 뒤를 따랐다. 울딘 측에서도 마지막까지 곁에 남은 병사들과 호위대가 울딘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둘이 열심히 싸우는 동안, 울딘은 혼자서 장벽 너머로 도망가버렸고, 말이다.

“울딘이 도망간다.! 잡아!”

“전하, 더는 무리입니다···.”

“젠장···.”

짧은 전투가 끝나고서 울딘이 사라졌음을 깨달은 마리우스가 뒤를 쫓으려 했지만, 파라몬드가 그를 뜯어말렸다.

마리우스는 아쉽다는 듯이 연신 장벽 너머를 돌아봤지만, 그런다고 도망친 울딘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가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