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지들 - 8
“뭐? 돌아오라고 하셨다고?”
“예, 적의 본대가 립스크까지 왔다고 합니다.”
“아니, 내가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는데, 놈들이 어떻게 립스크로 왔단 말인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병사들을 모아서 다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이십니다.”
“으음···. 알겠네, 금방 돌아가겠다고 전하께 전해주게나.”
“에, 그럼···.”
가이세리크는 다급히 병사들을 불러모았으나, 워낙 넓게 퍼져있던 탓에 다 모이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하루를 꼬박 쓰고서 저녁때쯤에야 준비를 마친 가이세리크는 다급하게 병사들을 이끌고서 립스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갑작스러운 폭우가 그들을 막아섰으나, 가이세리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분주히 립스크로 향했다.
“장군! 비가 너무 거셉니다. 잠시 비를 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병사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안돼! 비가 얼마나 오건 간에 전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명령을 받았으면 지켜야 해!”
“장군, 이 정도로 비가 쏟아지는 곳에서 싸우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자네들은 조용히 명령만 들으면 될 일이야!”
가이세리크는 길을 가로막는 폭우와 그로 인해 진창길이 되어버린 흙길을 헤치면서 립스크로 향했다.
날씨 탓에 시야는 극도로 제한된 상태였고, 주변의 사물들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가이세리크와 게르마니아 기병대는 비에 홀딱 젖은 생쥐 꼴로 게르마니아를 떠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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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게 다 뭐야.”
“참을성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요.”
“아니, 자기 기병들을 전부 물어뜯으라고 던져주고서는 내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고? 정신 나간 새끼 아니야?”
“덕분에 기병을 잡는다고 아군의 힘을 모조리 빼놓는 데는 성공한 듯 보이는군요.”
“쯧···. 가이세리크에게는 연락했나? 어디쯤이고 언제쯤 도착한다고 하는가?”
“각하, 아직 전령이 도착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쯧···. 쯧···. 에라이 씻팔!”
마리우스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전황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는지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풀어놓고 있던 검집을 허리춤에 메고서는 말 위에 올라타고서는 말했다.
“데키무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게 얼마나 되나.”
“또 직접 가실 생각이 시로군요.”
“왜? 말릴 거라면 지금 말려야 할 거야. 나중 가면은 말려도 안 들을 거니까.”
“제가 어떻게 각하를 말리겠습니까?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래야 데키무스지!”
마리우스는 장비를 챙겨서 당장 말 위에 올랐다.
그 뒤로 데키무스와 천명 정도의 근위대에 취사병과 기술병까지···. 온갖 병과의 병사들까지 긁어모아 만든 임시 부대 천명까지 도합 이천 명의 군사가 따라왔다.
“마리우스도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이군.”
“전하께서 몸소 오셨는데, 마리우스도 와야지요.”
“적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된 모양이고.”
“루카고가 큰일을 했습니다.”
“저기 잡혀있는 것까지 완벽하군.”
울딘은 한숨을 내쉬고는 명령을 내렸다.
“전군, 목표는 마리우스의 몫이다. 좌익에 배치된 부대부터 약 1분 간격으로 천천히 진군해서 적을 정면에서 밀어버린다.”
“예, 전하.”
훈족 병사들이 오와 열에 발맞춰 전진하고 있었지만, 게르마니아 병사들은 아직도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전이 끝나고 파라몬드와 장교들이 열심히 병사들을 수습하고 있었지만, 난전 당시에 서로가 뒤엉켜 있었던 탓에 부대가 섞여버렸다.
“뭐야? 여기 1대대 아닙니까?”
“아저씨, 여기는 7대대에요. 그리고 반달족도 아닌 것 같은데···. 부르군트족은 저쪽입니다.”
“여기가 3중대···. 가 아니네.”
“댁은 뉘세요?”
뒤섞여버린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평소라면 깃발을 보고서 부대를 찾아갔겠지만,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깃발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비슷한 생김새 때문에 혼란을 가중하고 있었다.
“잘들 하는 짓이다.”
“전하!”
“저, 전하!”
“오셨습니까.”
마리우스는 아직도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혀를 찼다.
“쯧쯧쯧···. 참 잘들 하는구나.”
“그, 그것이···.”
“부르군트놈들이 길을 막는 바람에···.”
“다들 전하의 앞에서 무슨 짓들입니까!”
마리우스는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양반들이 서로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고 있는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크게 꾸짖었다.
“지금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때인가? 코앞까지 적이 몰려오는데, 다들 정신 안 차리나!”
“죄, 죄송합니다!”
“전하 그것이···.”
“시끄럽다! 이제부터 현 상황은 내가 통제한다. 불만 있는 놈은 말해라 바로 입을 다물게 만들어줄 테니.”
마리우스는 입을 꾹 닫는 게지카와 고디기젤을 한 번씩 흘겨보고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후우···. 다들 서로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이곳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야. 믿을 건 옆에 있는 전우들뿐인데, 전우끼리 다투면 적은 누가 막나?”
“......”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죄송합니다.”
“이 정도면 다들 잘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네···. 그러면 이제부터 병사들을 재정비 할 것이니, 자네들은 내 명령에 따르게.”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 마리우스는 단숨에 내뱉으면서 소리쳤다.
“모두 동작 그만!”
마리우스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병사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이어서 벼락같은 고함이 립스크 평원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지금 적이 몰려오는데, 이게 무슨 꼴들인가! 우선은 게지카와 부르군트 병사들이 좌측으로 가고, 고디기젤과 반달족은 그 우측으로 가라! 정면에는 나와 파라몬드가 있겠다.”
“명령을 받듭니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마리우스가 교통정리에 나서니 병사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울딘의 병사들은 시시각각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마리우스가 병사들을 통제하는데 애를 먹고 있군.”
울딘은 게르마니아 군과 삼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병사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속보로.”
“전군, 속보로!”
속도를 높이면서 다가오는 훈족의 모습에도 마리우스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궁수들 준비시켜, 적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한 번의 일제사격 이후에 자유 사격으로 적을 요격한다.”
“예, 전하.”
훈족이 점점 가까워지자 파라몬드가 이끄는 돌격대는 투구에 있는 바이 저를 내리고 가죽끈을 동여매면서 전투를 준비했다.
파라몬드는 돌격대 병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면서 근위대와 민병대들 사이에 병사들이 섞여들게 했고, 그들이 준비를 마쳤을 때쯤에 게르마니아 군이 쏘아 올린 화살이 머리 위를 날았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게르마니아 병사들의 머리 위를 날아간 화살들은 순식간에 훈족 병사들에게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전이었다면 썩은 짚단이 무너져내리듯이 병사들이 쓰러졌겠지만, 지난 프랑크족과의 전투에서 게르마니아산 강철로 만든 장비를 노획한 울딘은 병사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한 상태였다.
이들이 전열에서 방패처럼 앞장서니, 직사로 날아오는 화살들이 아니면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렇게 땅에다가 화살을 내다 버리는 걸 보니, 게르마니아 놈들은 화살이 남아도는 모양이로군.”
“어리석게도 말입니다.”
“모두 전력으로 돌격하라고 해.”
“예, 전하···. 전군! 돌격 앞으로!”
심장박동에 맞춰서 쿵쾅거리던 북소리가 점점 빨라지면서 훈족 병사들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땅이 제법 질척거리고 있었지만, 훈족 병사들은 지치지도 않고 마치 늑대들처럼 게르마니아 군을 향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백병전을 준비시키고, 게지카와 고디기젤에 중앙이 모든 충격을 받아내면 양옆에서 적을 감싸면서 포위하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파라몬드!”
“예, 전하. 부르셨습니까?”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자네와 돌격대의 역할이 중요해.”
“잘 알고 있습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흩어져있다가 전선이 무너지려고 하면 뭉쳐서 적을 밀어내야 해.”
“예, 맡겨만 주십시오.”
“쯧···. 편한 일만 시켜준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또 최전선까지 와버렸군···.”
마리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오른손으로 낚아채면서 말했다.
“제법 힘든 싸움이 될 거야. 중간에 정신 놓지 말고 잘 따라오게,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마리우스는 투구를 뒤집어쓰며 투구 끈을 동여매면서 병사들에게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전원 전투준비!”
“전투준비!”
병사들이 일제히 방패를 들어 올리고, 날카로운 창이 전방을 향해 세워졌다.
그 모습을 본 훈족 병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괴성을 지르면서 더욱 속도를 높이면서 뛰더니, 이윽고 게르마니아 군의 방진에 몸을 부딪히는 거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게르마니아 병사들은 그동안의 전투로 조금 지쳐있었지만, 훈련소에서 배운 것을 잊지 않았는지 굳건히 그 자리에서 버텨냈다.
훈족 병사들은 수천, 수만 명이 일시에 몰리면서 최선두에 있던 병사들은 게르마니아 군과 훈족 사이에 끼어서 짓눌릴 정도로 무식한 돌격이었다.
“허리에 힘주고! 앞에 사람 꽉 붙잡고 버텨라! 놈들도 영원히 밀어붙이지는 못해! 딱 5분만 버텨!”
“파라몬드!”
“부르셨습니까!”
“적의 기세가 매섭구나, 예비대를 투입해야겠어!”
마리우스의 말대로 훈족 병사들의 돌격에 최선두에 있던 병사들은 순식간에 뒤로 밀려 나가면서 훈족의 파도에 휩쓸려버렸다.
지금은 그 뒤에 있던 병사들이 버티고 있었지만, 위태위태 한 것이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마리우스는 조금 전에 데려온 근위대와 급조부대로 편성된 예비대를 투입하고자 한 것이지만, 파라몬드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 저들은 버텨낼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저들을 믿어주십시오!”
“당장에라도 적들에게 밀려날 것처럼 위태로운데, 어떻게 믿음을 가지라는 건가? 중앙이 밀려나면 좌우익의 병사들은 각개격파 당할걸 모르는 건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앙의 병사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닙니다. 예비대는 나중을 위해서 아껴두시고, 지금은 저들을 믿어주십시오.”
“아끼다가 똥 된다는데···. 쯧,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들어줘야겠지.”
마리우스는 다시금 팔짱을 끼고서는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는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봤다.
전열의 방진이 출렁거릴 때마다. 마리우스의 가슴도 출렁거렸고, 병사들이 적의 손에 잡혀서 끌려갈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훈족의 병사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연신 공세를 계속하고 있었고, 병사들의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듯이 보였다.
“각하, 파라몬드를 믿어보시지요.”
“안 믿었으면 진즉에 뛰어들었겠지.”
“그러시군요.”
“쯧···. 나 같았으면···. 음?”
마리우스는 코끝에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펴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에 없이 맑던 하늘이 꾸리꾸리한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전장으로 물푹탄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폭우는 눈앞의 시야를 가릴 정도로 매섭게 쏟아졌다.
“이게 무슨···.”
“각하! 아무래도 소나기인 듯싶습니다! 일단은 뒤로 물러나시지요.”
“됐다. 고작 비 오는 걸 뭘···.”
갑작스러운 폭우로 안 그래도 질척거렸던 땅에 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땅이 물렁물렁해졌다.
발이 푹푹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빨려 들어가는 정도가 되자 훈족들의 공세가 둔해지기 시작하더니,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온몸에 진흙을 덕지덕지 묻힌 병사들은 눈도 뜰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몰아치는 폭우 속에서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죽어!”
“죽어라. 게르만 돼지 새끼들!”
이때, 좌우익에서 대기 중이던 게지카와 고디기젤은 마리우스의 명령대로 양옆에서 훈족 병사들을 들이쳤다.
삼면으로 포위당한 상태였지만, 세찬 폭우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울딘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고, 눈앞에 보이는 중앙군의 상황에 집중했다.
“좋아, 이대로 밀어붙여서 적을 반 토막 내는 거다.”
그리고 짧지만 세차게 내리던 소나기가 그치고, 다시금 태양이 먹구름 사이로 피어오르면서 다시금 주변이 환해지자, 울딘은 그제야 게르마니아 군의 좌우익이 포위를 시도하려는 것을 눈치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울딘은 재빠르게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적의 좌우익은 오랜 전투로 지쳐있을 게 분명하다. 지금 좌익이나 우익에 예비대를 투입해서 적의 양 날개를 꺾어버린다.”
“하지만···. 예비대를 투입한다면, 돌아오는 적 기병대에 전혀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놈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한참은 걸릴 것이다. 그리고 놈들이 돌아올 때쯤이면, 우리는 립스크를 불태우고 아그리피넨시스로···.”
그렇게 말하던 울딘은 보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로 터덜터덜 말을 끌고 오는 게르마니아 기병대의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