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지들 - 7
립스크 인근의 평원에서 루카고가 이끄는 훈족의 기병대와 게지카가 이끄는 부르군트 병사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서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였지만, 부르군트군과 훈족 기병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치를 이어갔다.
“장군,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일단 기다려봐···. 적이 무슨 행동이라도 보여야 우리도 대응할 거 아냐.”
“알겠습니다···.”
루카고는 초조하게 부르군트의 진형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는 게지카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평원에서 기병을 마주친 상황이라 그런지 섣불리 움직이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훈족 놈들이 별다른 반응이 없군.”
“이대로 계속 대기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뭐 어쩌겠나? 내 명령은 저들을 막는 거지, 쫓아내는 게 아니야.”
“진심입니까?”
“아니, 당장에 박살 내고 싶다.”
지난 전투에서 브레누스가 훈족에게 크게 당한 이후로 게지카는 훈족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브레누스와 게지카는 어렸을 적부터 서로 앙숙과도 같은 사이였지만, 마리우스가 공식적으로 둘의 사이를 중재한 이후부터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어울렸다.
지금에 와서는 미운 정도 정이 맞는 것인지 브레누스의 동생이 게지카와 맺어질 정도로 사이가 돈독해진 상황이었는데, 좀 많이 모자란 친구가 어디 가서 두들겨 맞고 돌아왔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흠···. 반달족은 뭘 하고 있는 거지?”
“저희를 지원한다고만 했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뭐? 지금 어딨는데?”
“어···.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게 맞는다면···.”
부관이 손가락으로 갈대가 우거져있는 늪지대를 가르치며 말했다.
“저기 매복하고 있을 겁니다.”
“저기? 늪지대에 매복하고 있다고? 이 날씨에 물속으로 기어들어 가서 매복했다고? 이거 미친놈들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전공에 눈이 돌아가 버렸구나.”
“전하와 사돈지간을 맺는다고 한 뒤로는 유독 저렇게 쓸데없는 짓까지 하더군요.”
게지카는 그런 고디기젤의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혀를 차면서 한마디 했다.
“쯧쯧···. 나름대로 전하와 같은 급이 돼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아무튼, 우리가 적과의 교전을 시작하면은 적당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뒤를 들이칠 생각 같습니다.”
“뻔하지.”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대치는 점심쯤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루카고가 이끄는 훈족 기병대는 준비해온 육포나 훈제음식을 꺼내 들고서는 점심을 대체했고, 게지카가 이끄는 부르군트군은 각자 들고 다니는 훈제청어와 소량의 맥주로 간단하게 식사를 때웠다.
반면에 아침 댓바람부터 아침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갈대 수풀 사이에 쪼그려 앉아있던 병사들은 슬슬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제 여름이 다 되었음에도 불어오는 찬 바람과 차가운 늪지대의 물에 반쯤 몸을 담그고 있으니, 몸이 얼음장처럼 얼어붙는 듯했고 아침 식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점심도 거르고 있으니 병사들의 불만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고디기젤도 이를 눈치채고서는 조용히 부하를 부르면서 물었다.
“병사들의 상태는 어떤가?”
“끔찍합니다. 벌써 동상에 걸린 것 같은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허허···. 이제 초여름인데 동상이라니?”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곳에서 자꾸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본격적으로 싸워보기도 전에 병사들을 잃을 것 같습니다.”
“후우···. 도대체 부르군트놈들은 무얼 하는지···!”
고디기젤은 애꿎은 게지카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봤으나, 그런다고 그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고디기젤이 무기를 빼 들면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이대로 적을 들이친다.! 모두 사격준비!”
여름치고는 조금 추운 날씨에 제법 오랜 시간을 늪지대의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반달족 병사들의 움직임은 굼떴지만,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하니 루카고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놈들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모르겠습니다!”
“젠장···. 일단은 저놈들부터 처리한다.! 모두 나를 따라오도록!”
이에 루카고가 앞장서서 반달족에게 덤벼드는 것으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게지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국, 못 참고 뛰쳐나왔구먼···.”
“어쩌시겠습니까? 현 상태를 유지할까요?”
“어찌 되었건 간에 같은 편이니, 우리도 움직여야겠지···. 병사들을 준비시키게.”
“예, 장군.”
“오늘 까마귀들이 포식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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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제일 높은 교회 종탑에서 이를 내려다보던 마리우스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반달족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짓으로 괜히 병사들만 고생시키네.”
“그래도 기습은 기습인지라 훈족 기병들이 크게 당황한 모습 같습니다.”
“아침만 해도 물렁물렁하던 땅이 다시 얼어붙으면서 단단해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울딘도 이를 알고서 병사를 밀어 넣은 것일까요?”
“그건 모를 일이지, 그쪽 주술사들이 점을 잘 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울딘에게 운이 따라주는 모양이겠지.”
데키무스는 아무래도 조금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파라몬드가 대기 중이긴 하는데···. 출전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울딘이 아무 생각도 없이 기병들을 던져놨다고는···.”
“기다려. 놈도 생각이 있었으니 미끼를 던진 것이겠지···. 일단은 가이세리크한테 전령을 보내서 병사들을 모아서 돌아오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마리우스는 데키무스가 떠난 뒤에도 한창 적과 뒤엉키면서 혼란스러워진 전장을 내려다봤다.
훈족 기병대는 드디어 제대로 된 전장에서 싸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반달족 병사들을 파리채로 파리를 후려치는 것처럼 휩쓸고 있었고, 고디기젤은 이를 열심히 막아보려 했지만 잘 안되는 듯싶었다.
“아···. 방진은 그렇게 짜는 게 아닌데···.”
다행히도 때맞춰서 들어온 게지카의 부르군트 병사들과 힘을 합쳐서 어찌어찌 전열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동에 제약이 많아지는 훈족 기병대가 불리해질 것은 뻔했지만, 당장은 우리 쪽이 밀리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장비와 교육을 통한 병사들이더라도 실전에 들어와서 헤매는 것은 똑같은 것 같았다.
“아이고···. 아이고 저걸 꼬라박네···.”
마리우스는 답답한 마음에 당장에라도 무기를 집어 들고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은 울딘이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기에 그가 끌고 온 본대를 기다리면서 무슨 속셈인지를 알아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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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건 전투를 지켜보던 울딘도 마찬가지였다.
루카고가 생각보다 잘 버텨주면서 오히려 적 병력을 압도하는 듯이 보이기는 했으나, 울딘이 보기에는 반달족과 부르군트족의 병사들이 늑대의 위턱과 아래턱이 되어 자신의 병사들을 물어뜯는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당장에라도 병력을 내보내야 했지만, 울딘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침착하게 마리우스의 진영을 뚫어지라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우스···. 어째서 안 움직이는 거지? 저렇게나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지 않으냐.”
마리우스와 울딘은 서로 상대가 미끼를 물기를 바라면서 낚싯대를 드리웠으나, 정작 둘 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희생되는 것은 전장에 있는 병사들뿐이었다.
“차근차근 한 놈씩 처리해라!”
“움직이지 못하는 기병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모두 놈들에게 달라붙어!”
“뒤로 물러난다.! 뒤로 물러나 재정렬한 뒤에 다시금 놈들에게 돌격할 것이다!”
점심때쯤에 시작한 전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훈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찬 바람이 불면서 얼어붙은 탓에 땅이 제법 단단해졌지만, 태양이 머리 위로 떠 오른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르르 녹아내려서 진창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무리 기마술이 뛰어난 훈족 병사들이라고는 해도 발이 푹푹 빠지는 전장 속에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발을 잘못 내디뎌서 발목이 부러지거나, 발목을 삐는 등 말들에게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니,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를 지켜보던 울딘의 부하는 답답하면서도 애타는 마음에 울딘에 말했다.
“전하, 이러다가는 아군이 전멸하게 생겼습니다!”
“상관없다. 마리우스 놈을 끌어낼 수만 있으면 모두 죽어도 남는 장사다.”
“전하···!”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우스는 그제야 의심을 버리고 큰소리로 데키무스를 불렀다.
“데키무스! 데키무스!”
“예, 각하 부르셨습니까.”
“당장 파라몬드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훈족 놈들을 쓸어버리라고 해.”
“예? 조금 전에는 울딘이 보이지 않는다고···.”
“처음에는 울딘이 함정 같은걸 판 줄 알았는데···. 자기 병사들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병사들을 들이민 게 분명해.”
“흠···. 제 생각에는 부르군트와 반달 병사들에게 맡겨도 충분할 것 같은데···.”
데키무스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으나, 마리우스는 이를 거부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아군 병사들의 피해가 큰 편이야.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려면 압도적인 전력으로 쓸어버려야 해.”
“그렇다면야 뭐···. 알겠습니다. 파라몬드에게 저들을 구원하라 하겠습니다.”
“그래, 혹시라도 울딘이 움직일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파라몬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을 이끌고서는 바람처럼 평원을 내달려서 우왕좌왕하는 루카고의 병사들을 들이쳤다.
힘겹게 병사들을 수습하던 루카고는 파라몬드가 새로이 합류하여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젠장! 전하께서는 나를 버리셨다는 말인가?”
“장군, 더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물러나시지요.”
“물러나기는 어디로 물러난다는 말인가! 이미 사방에는 적들로 가득하고, 돌아간다고 전하께서 나를 반기지도 않으실 거야!”
“그럼 이제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곳에서 우리 다 같이 죽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그래, 못할것도 없지. 그냥 다 죽자!”
정신을 반쯤 놔버린 루카고는 검을 빼 들고서는 적 병사들 사이에 섞여서 아군을 끌어내리는 돌격대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놈들!”
“저놈이 대장이로군.”
“사로잡습니까?”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잡아 와.”
파라몬드의 명령에 따라 들쥐처럼 잽싸게 병사들 사이를 뛰어간 돌격대 병사들이 능숙한 솜씨로 꺾인 창을 휘둘러 루카고를 땅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땅이 물렁물렁해서 바닥에 떨어질 때의 충격은 덜했지만, 순식간에 적들에게 포위당한 루카고는 차라리 머리를 부딪혀서 기절하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허공에 무기를 휘둘러댔다.
“덤벼라! 먼저 오는 놈부터 죽여주마!”
훈족 병사들은 포위당한 루카고를 구하고자 했지만, 부르군트와 반달족 병사들은 그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근의 숲에서 이를 지켜보던 울딘은 그제야 무릎을 '탁' 치면서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마리우스 놈이 드디어 미끼를 물었어!”
“이제 병사들을 투입합니까?”
“그래! 전부 투입해! 단번에 게르마니아 놈들을 쓸어버린다.!”
울딘의 명령에 숲이 들썩거리면서 이에 놀란 새떼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심장을 들썩이게 하는 북소리와 우렁찬 나팔소리가 평원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진흙탕 싸움을 벌이던 훈족 병사들은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꺼져가던 희망의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저, 저기!”
반면에 오랜 전투로 제법 지쳐있던 게르마니아의 병사들은 새롭게 나타난 적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면서 멈칫거렸고,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지원군인가···.”
“게지카! 당장 병사들을 뒤로 물려야 하오!”
“무슨 일이 급이니까?”
“적들의 지원군이 나타났습니다. 당장 병사들을 뒤로 물려야 한 단 말이오!”
“그랬다가는 적에게 뒤를 내주게 될 겁니다. 지금은 적 지휘관을 사로잡고, 기병대를 처리하는 게 우선입니다.”
“댁의 병사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 병사들은 잔뜩 지치고 다친 상태요.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내 병사들이 못 견딘단 말이오!”
“그거야 댁 사정이지요.”
게지카의 단호한 태도에 고디기젤의 눈썹이 단번에 휘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는 거지요? 잘 알겠습니다.”
“지금 적을 앞에 두고 두 분 다 뭘 하시는 겁니까? 전하께서 이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잊으신 겁니까! 빨리 병사들을 수습해서 다시금 싸울 준비나 하십시오!”
파라몬드가 그렇게 말하고서는 부관과 함께 전장을 뛰어다니면서 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큰 피해를 본 훈족 기병대는 도망가고 있었지만, 더는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모두 정렬! 원위치로!”